소설리스트

13화 (13/31)

“먹을 만해?”

빨간 떡을 입에 가져가던 남한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이 없는 볼이 가끔 볼록해지는 걸 지켜보던 나는 방금 남한결이 한 것처럼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학교 중문에서 10분 정도 걷다 보면 나오는 포장마차는 오늘도 사람이 많았다.

여름이라기에는 쌀쌀하고 가을이라기에는 가끔 겉옷을 벗어야 하는 날들이었다. 따닥따닥 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옷차림부터가 계절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다. 방금 우리의 옆에 앉은 아저씨가 일행에게 덥다며 짜증을 내는 와중에 뒤에 앉은 커플은 춥다며 서로의 외투를 나눠 입을 정도로.

하늘을 가린 천막 외에 모든 곳이 뚫린 이곳은 적당한 소음 속에 섞여 들기에 최고인 곳이었다. 귓가를 채우는 소음 중에는 포장마차 바로 앞에 있는 동전 야구 연습장의 것도 있었지만.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배트에 공이 맞는 소리가 들려왔다. 옆에 앉은 남한결은 포장마차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 소리에 반응했다. 가끔 배트에 공이 잘 맞아서 나는 청명한 타격 음이 들릴 때에는 앞을 흘끔거렸다.

방금도 그랬다. 난 남한결의 고개가 향하는 곳을 보다가 테이블 위 남은 음식을 확인했다.

“처음 보나 보네.”

“…어?”

“저거.”

“아.”

잠시 고민하던 남한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야구장에 시선을 뒀다. 가타부타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대충 왜인지는 알 만 했다. 우선 남한결이 저런 길거리 스포츠를 찾아 나서서 할 타입은 아니었고.

사실 이렇게 포장마차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놈이다. 꼭 얼굴만 그런 게 아니라, 분위기 같은 것들이. 난 남한결이 주문을 마치고 어색하게나마 파란 플라스틱 의자 위에 큰 몸을 구겨 앉는 모습을 아닌 척 힐끔거리던 옆 테이블들의 시선들을 기억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가자.”

“…간다고?”

멈칫한 남한결이 아까의 나처럼 테이블을 훑었다. 유독 시선이 하나 남은 어묵 꼬치에 오래 머무르는 게 보여서, 난 재빨리 어묵 꼬치를 입에 넣고 꼬치를 빼 테이블 위에 올려 뒀다. 적어도 남은 음식으로는 더 뭐라 할 게 없는 남한결이 얼떨떨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미 계산을 했기에 포장마차 안쪽으로 이모님께 간단한 인사만을 하고 나왔다.

당연히 집으로 갈 줄 알았던지, 아까 우리가 온 방향으로 서 있는 남한결의 팔을 잡아끌었다.

챙-

배트를 휘두르는 사람에 따라 가지각색으로 울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내가 가려는 곳이 어디인지를 깨달은 듯한 남한결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난 비어 있는 칸 하나를 발견하고 나서야 뒤를 돌았다.

가만히 서서 날 보는 남한결의 표정이 묘했다. 난 남한결의 시선을 받아넘기며 동시에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아까 담배 사고 거스름돈 받았던 것 같은데. 뒷주머니에 있던 천 원짜리 지폐 하나를 간신히 발견했을 무렵에 남한결이 물었다.

“저거…하게?”

“응.”

지폐를 청바지에 문질러 나름 빳빳하게 만든 후에 지폐 교환기 안으로 투입했다.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가 짤랑이는 소리를 냈다. 투입구 안으로 그중 하나를 넣고 난 고개를 들었다. 게임이 시작됨을 알리는 유치한 효과음이 들렸다.

“너 한 번. 나 한 번.”

“…….”

“자, 너 먼저 해.”

옆에 마련되어 있는 배트를 들어 남한결에게 내밀었다. 머뭇대는 남한결의 손에 들린 가방을 뺏고는 남한결을 무작정 철창 안으로 던져 넣었다. 지폐를 넣었을 때부터 이미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던 공이 뒤에 걸려 있는 과녁을 치고 떨어졌다. 날아오는 공에 어깨를 스칠 뻔한 남한결의 눈이 커졌다.

예고 없이 닥친 상황이지만 그래도 원체 운동 신경이 좋은 놈이라 곧 제 페이스를 찾았다. 배트를 똑바로 쥐고 앞을 본 남한결이 두 번째로 날아온 공을 배트 끄트머리로나마 쳐 내는 걸 보며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뒤에서 남한결을 지켜본 결과, 500원당 총 10번 공을 칠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남한결은 아예 배트를 채 쥐기 전에 허무하게 날린 첫 번째 공과 내가 던진 농담에 웃으며 날 돌아보느라 놓친 다섯 번째 공, 아쉽게 놓친 일곱 번째 공을 제외하면 10개 중 7개의 공을 쳐 냈다.

아까 시작을 알렸던 음악이 또 한 번 나오고서야, 남한결이 배트를 밑으로 내리고 뒤돌았다. 그새 이마에 맺힌 땀을 보니 얼마나 집중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난 문을 열고 나오는 남한결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재밌었어?”

“어.”

“한 번 더 할래?”

“아니.”

“왜.”

“너 해.”

“그래도 괜찮겠어?”

“…왜?”

방금 내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아 올려다보는 남한결의 얼굴이 얼핏 순수해 보였다. 괜히 장난기가 동할 정도로.

“나 이거 되게 잘하거든.”

“…….”

“너 지켜보다가 분명 자괴감 들 텐데.”

남한결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눈이 휘어지는 것까지 확인한 나는 덩달아 피식 웃으며 동전을 투입구에 넣었다.

“네가 네 무덤을 팠다는 것만 알아 둬.”

“말은 누가 못해.”

“못 믿는다 이거지. 알았어. 이 형이 보여 줄게.”

문을 열고 연습장 안으로 들어섰다. 배트를 쥐며 슬쩍 확인한 그물창 바로 뒤에 남한결이 서 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의자를 확인한 나는 배트를 쥐었다.

멀리서 공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난 공이 시야에 잡히기를 기다렸다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배트를 휘둘렀다.

탕- 배트로부터 밀려난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난 웃으며 남한결을 돌아봤다.

“자, 한 개.”

어디선가 무언가가 날라올 것을 알고 있을 때 그걸 쳐 내는 건 어렵지 않다. 특히 겁내지 않는다면.

두 개, 세 개, 네 개. 손가락 네 개를 오버하듯 들며 뒤도는 나를 본 남한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서도 웃고 있는 얼굴을 확인한 나는 한 번 더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본 남한결의 웃는 얼굴을 다시 그려 보느라, 다섯 번째 공은 놓쳤다. 난 뒤에 선 남한결이 들으란 듯 중얼거렸다.

“원숭이도 한 번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거야.”

“누가 뭐래?”

웃음기 담긴 남한결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다리를 구부렸다.

여섯 개, 일곱 개. 여덟 개.

드디어 남한결이 쳤던 것과 같은 개수에 돌입했다. 난 내가 방금 쳐 낸 공이 멀리 보이는 빈 곳으로 떨어져 내리는 걸 확인함과 동시에 뒤돌았다.

남한결과 눈이 마주쳤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질문이 튀어 나갔다.

“내기할래?”

“무슨 내기.”

“내가 너보다 많이 칠 수 있을지 없을지.”

일부러 9번째 공은 치지 않고 내 옆의 과녁을 맞히게끔 뒀다. 공이 날아온 속도 때문인지 크게 휘청한 과녁은 남한결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기면 소원 들어주기.”

과녁을 확인한 남한결의 시선이 날 향했다.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는 남한결을 본 난 뒤돌아서 다시 배트를 쥐었다.

수진이와 재균이와 함께한 술자리였을 거다. 그런 이야기가 나왔었다. 대학생들이 다 그렇듯 그날도 연애는 우리에게 가장 손쉬운 안주였고, 수진이는 질리지 않는 화두를 던졌다. 대체 왜 그러냐는 질문은 구체적인 데가 있었다.

‘아니, 근데 솔직히 썸 탈 때마다 좀 웃긴 게 뭐 할 때마다 자꾸 소원 들어주기 이런 거 하재. 무슨 소원을 들어줘. 지니야 뭐야.’

‘솔직히 누가 널 지니로 보겠어….’

‘재균아. 나 술 마시면 남자도 때려.’

‘술 마실 때만 때리는 척 극혐….’

언제나처럼 티격태격하는 둘 사이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던진 건 나뿐이었다.

‘그냥, 제일 쉽잖아. 관계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약속보다는 가볍게 미래를 엮을 수 있고. 애초에 소원이라는 게 둘 사이 관계에 따라서 가벼울 수도, 무거울 수도 있는 거니까.’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여전히 소원이란 건 약속보다는 가볍다고 생각하고, 그걸 빌게 만드는 상대방에 따라 무게가 결정될 수 있는 거라고 믿는다.

난 배트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앞을 응시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확신대로라면.

“…….”

“…….”

기분 좋은 타격감을 느끼고서야 어깨의 긴장을 풀었다. 난 배트를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는 뒤돌았다. 남한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내가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도.

옆의 바구니로 배트를 던진 후 남한결에게 다가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

“하이 파이브.”

“별걸 다 하네.”

“어허. 패배자가 말이 많다.”

피식 웃은 남한결이 대충이나마 손을 올렸다. 난 팔을 더 들으라고 눈짓했다. 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남한결은 결국 항복하는 사람처럼 손을 높게 들어 줬다.

난 남한결의 손에 내 손을 가져다 대려다 말고 마음을 바꿨다.

내가 손을 내리고 대신 한 걸음 더 다가선 순간부터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챈 것 같은 남한결의 몸이 딱 굳었다. 난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척 어깨 위로 한 손을 두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남한결의 허리를 감쌌다.

한 명은 손을 올리다 만, 다른 한 명은 온전히 몸을 붙이지도 못한 포옹 자세는 누가 봐도 이상할 거다. 그래도 탓할 수 없었다. 이 자세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관계로서는 최선임을 알아서.

“…….”

“…….”

요즘 너랑 있을 때면 살면서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이 궁금해진다. 예를 들어, 친구 사이에 있을 법한 평균적인 포옹 시간은 얼마나 될지 같은 것들.

한 번도 누군가와 포옹을 하며 시간을 세어 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이렇게까지 꾹꾹 참아서 겨우 포옹으로 감정을 삼켜 내는 경우가 없었기에 더더욱 그렇고.

그래서 오늘도 혼자 타협을 보기로 했다. 평균적인 포옹 시간이 10초라 치면….

“소원은 지금 안 쓸래.”

난 11초를 할 거라고. 왜냐면 난 너랑 평범한 걸 하고 싶은 게 아니니까.

천천히 11초를 세고는 몸을 뗐다. 남한결의 얼빠진 얼굴을 보고서야 어쩌면 내가 11초를 너무 느리게 세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상관없다. 너는 네 노력을 하고, 나는 내 노력을 하고. 그사이에 우리의 관계가 무거운 소원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해질 수만 있다면.

“그래도 되지?”

난 네가 모르는 곳에서 내 시계를 몇 번이고 돌릴 수 있어.

***

“형!”

“어, 재균아. 잠시만. 나 로운이랑 통화 중이라서.”

재균이가 알겠다는 얼굴로 얌전히 기다리는 걸 확인한 나는 다시 핸드폰 반대편에서 넘어오는 로운이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웬일로 전화를 먼저 했나 싶더니 예전 내 아이디로 가입된 계정과 관련한 문제였다. 난 로운이에게 기억 속 희미한 비밀번호를 다시 한번 읊어 주고는 통화를 마무리했다.

귀에서 핸드폰을 떼자마자 재균이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형네 집 햄스터 무슨 일 있대요?”

“무슨 일까진 아니고. 게임 접속이 갑자기 안 된다고 하네.”

“헐, 개짜증 나겠다. 어? 잠시만. 게임 접속이 안 되는데 왜 형한테 전화해요?”

“로운이가 내가 옛날에 쓰던 아이디로 게임 하거든. 그게 이메일이랑 연동된 계정이라 내가 혹시라도 이메일 접속해서 비밀번호 바꿨는지 물어본다고 전화한 거래.”

“와, 무슨 게임을 하길래 형이 옛날에 쓰던 아이디를 아직 써요?”

“우리 어렸을 때 하던 게임 있잖아. 유치하고 쉬운 거.”

“헐. 그 어린 나이에 그러기도 쉽지 않은데. 그게 재밌대요?”

“작동 원리가 단순해서 좋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걷던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리에 멈춰 섰다. 정확히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벌 떼같이 인파가 몰린 정문은 발 디딜 곳조차 없었다. 정문으로 나가는 길목 역시 사람들로 막혀 있어 통행이 힘들어 보였다. 까치발을 해 앞을 기웃거리던 재균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날 돌아봤다.

“뭔지는 몰라도 촬영하나 본데요?”

“무슨 촬영?”

“몰라요. 카메라도 보이고, 반사판도 보이고. 반사판 있는 거 보면 왠지 드라마 같은데 배우 얼굴이 안 보여요. 아, 잠깐만. 왠지 이수진은 알 것 같은데. 물어봐야겠다.”

사실 누가 무슨 드라마를 찍든 별 관심은 없었으나, 만류하려 돌아본 곳에는 재균이가 이미 핸드폰 화면을 신나게 두드리고 있기에 그냥 뒀다. 그나저나 이래서 정문의 밥집은 어떻게 가지. 잘못하다가는 여기서 발이 꽁꽁 묶이게 생겼네.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별 의미 없는 생각을 하던 나는 툭툭 치는 손길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형. 저 무슨 촬영인지 알았어요.”

“무슨 촬영 하는지?”

“네. 드라마 촬영이래요. 그때 이수진이 좋아한다고 했던 신인 배우 생각나요? 그 사람도 출연한대요.”

“와, 수진이 어떡하냐.”

“안 그래도 지금 욕하고 난리 났어요. 우리 학교에서 촬영하는 건 알았는데 그게 오늘인지는 몰랐나 봐요. 제가 지금 말하니까 당장이라도 택시 타고 올 기세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지금 있는 장소가 대성리이므로 일단은 두고 볼 일.”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필 그게 오늘이라니. 내 일도 아닌데 괜히 안타까웠다. 학생부 대표로 2학기 과 엠티를 갈 곳의 답사를 떠난 수진이의 절규를 상상한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녀를 대신하여 앞을 힐끔거렸다.

촬영이 계속 진행 중인지 정문 속의 인파는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호기심까지 해결한 재균이가 뒤로 반쯤 몸을 돌려 물었다.

“형. 저희 오늘 그냥 후문에서 점심 먹을까요?”

“그럴래?”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긍정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몸을 돌리기 전 슬쩍 본 정문 앞은 방금 우르르 자리를 뜬 구경꾼으로 인한 빈틈이 생겼다. 그 사이로 언뜻 보이는 누군가의 얼굴을 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 사람이었나? 그때 수진이가 보여 준 배우가? 헷갈리네.

“형?”

“어. 가자.”

잘생기긴 했네. 수진이가 못 봐서 아쉽겠다고 생각했다.

***

“괜찮다니까?”

“제가 안 괜찮아요, 형. 이거 봐요. 닦을 때마다 얼룩이 번지잖아요.”

“그거야 네가 자꾸 신경 쓰니까 더 그래 보이는 거고. 괜찮아, 재균아. 어차피 술집 불빛 아래서는 제대로 안 보일 거야.”

“그래도요. 하… 이거 오늘을 위해서 큰마음 먹고 지른 건데. 큰누나한테 안마까지 해 가며.”

점심을 먹던 중 양념이 셔츠의 카라 부분에 튄 재균이는 십 분째 발을 동동 굴렀다. 오늘 저녁 솔이와의 만남을 앞두고 차려입은 옷이라서인지 더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마음이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닌데, 당장 한 시간 뒤 솔이가 학교 앞에 도착하는 상황에서는 딱히 별다른 해답이 없었다. 학교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집에서 통학하는 재균이는 지금 집에 다녀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얼룩이 진 셔츠를 보여 주기도 싫은 마음에 갈팡질팡했다.

지켜보던 나는 문득 떠오른 대안에 재균이를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은 가깝잖아?

“야, 재균아. 형 옷이라도 빌려줄까?”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아니? 왜?”

“형 옷을 어떻게 입어요, 제가.”

“왜 못 입어. 형도 셔츠 있어. 빌려줄게, 인마.”

“형 어깨가 저보다 넓잖아요. 입으면 백 퍼센트 핏 이상할 거예요.”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는 얼굴을 보니 괜히 머쓱해졌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난다고….

목덜미를 긁던 나는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나치고 있는 동아리 건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님 도복이라도 입을래? 형 거 동아리방에 있는데.”

“갑자기 도복은 무슨 도복이에요 형.”

“왜, 커플룩이잖아.”

“…누나 도복 입고 오신대요?”

“아니. 그럴 리가.”

“…아 진짜! 이로빈 짜증 나!”

한 번 더 건드렸다가는 사람 때리겠다, 때리겠어. 씩씩대는 재균이의 볼을 잡아 늘이며 웃던 나는 내 등을 퍽퍽 두드리다 말고 멈칫한 재균이를 따라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안 그래도 눈이 큰 놈의 동공이 팽창됐다. 날 똑바로 본 채로 입을 벌리는 모습은 무언가를 막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아니 잠시만. 동아리방?”

“응?”

“그러고 보니까 저 저번에 축제 때 갈아입으려고 가져왔던 셔츠 로커 안에 뒀었던 것 같은데…. 헐 대박! 형이 말 안 해 줬으면 진짜 생각도 못 했다.”

“어엉?”

“저 동아리방 잠시 다녀올게요, 형! 여기 있을 거죠?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알았죠? 고마워요! 사랑해요!”

조금 전까지 도끼눈을 뜨고 짜증을 내던 놈은 사라지고 정체 모를 하트를 날려 대는 놈만 남았다. 발에 모터라도 달린 것처럼 후다닥 뛰던 재균이가 시야에서 사라지기까지는 5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새끼, 잘 뛰네. 새삼 재균이가 같은 과 후배가 맞다는 사실을 체감한 나는 이내 건물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까 동아리방으로 내달리던 속도를 보니 평소보다야 빠르겠지만, 그래도 5분 내로 그 모든 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기다리면서 담배나 한 대 피우지 뭐. 손도 씻고. 주머니 속 담뱃갑을 찾아 손을 휘젓던 나는 흡연 구역에 발을 들여놓은 것과 동시에 들리는 말소리에 자리에 멈춰 섰다.

동아리방이 모인 건물과 그 옆 사회관 사이 작은 통로에는 오솔길이 있었는데, 따지자면 학생들을 위한 휴게 공간 중 하나였으나 흡연자와 비흡연자 모두 이용하기에는 모호해서 늘 비어 있는 곳이었다.

흡연자는 나무부터 시작해 불과 닿으면 안 되는 것들 천지인 그곳이 부담스럽다는 게 이유였고, 비흡연자는 흡연 구역 옆에 붙은 그곳을 굳이 찾아가 신선한 숲의 공기와 정반대로 바로 뿜어지는 담배 연기를 동시에 들이마실 필요가 있냐는 게 그 이유였다.

나도 대다수의 흡연자들과 같은 이유로 발을 들여 본 적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지금 흡연 구역에 멍청히 서 그곳을 보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오솔길 입구에 선 채로 내게 뒷모습을 보이는 남자가 지나칠 정도로 익숙했기에.

“…남한결?”

내가 중얼거린 것과 동시에 뒷모습을 보이던 남자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이마를 가린 앞머리를 쓸어 올린 남자 때문에 하얀 이마와 볼이 드러났다.

남한결이 맞았다.

예상이 맞았음을 확인한 순간 지금 남한결과 대치 상태로 서 있는 남자에게로 온전한 관심이 쏠렸다. 내게서 돌아서 있는 남한결과 달리 날 똑바로 볼 수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기는 쉬웠다.

“잠… 깐만.”

난 눈을 가늘게 좁히고 앞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불길할 정도의 익숙함이 느껴졌다. 정확히 3초 뒤, 그 이유를 눈치챌 수 있었다. 남한결이 현재 마주하고 있는 남자는 아까 정문에서 본 촬영 중인 연예인이자 수진이가 보여 준 사진에서 확인한 이였다. 이렇게 사람들이 없는 데서 보니까 동일인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너무 뚫어지게 쳐다본 탓인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내가 선 부분만 콕 집어 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남자가 내 존재를 눈치챘다는 증거였다.

남자가 나와 시선을 맞춘 채로 앞의 남한결에게 무어라 말하는 게 보였다. 곧이어 둘의 거리가 한 뼘 정도로 가까워졌다. 물고 있던 담배가 아래로 툭 떨어져 내렸다. 담뱃갑을 쥐고 있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어? 뭐야. 저기 한결이 형 아니에요?”

갑자기 다가온 재균이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난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방금 나처럼 눈을 가늘게 뜬 채 오솔길 쪽을 보고 있는 재균이를 발견했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예요? 한결이형 친구인가? 어… 근데 왜 이렇게 얼굴이 익숙하지?”

“…….”

“사진 동아리에는 저렇게 생긴 사람 없….”

새로운 셔츠로 갈아입은 재균이가 아까의 우울한 모습은 싹 지운 채로 고개를 갸웃댔다. 난 재균이의 말소리가 급작스레 잦아듦을 느끼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남한결 쪽으로 고개를 완전히 기울였다. 줄곧 나를 봤던 모양인지, 눈이 곧바로 마주쳤다.

“…….”

“…….”

재균이와 나 둘 다 말이 없었다. 각도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앞의 남자가 남한결에게 고개를 가까이 댄 자세는 당장이라도 키스를 할 것처럼 보였다. 아직 해가 온전히 지지 않은 저녁 캠퍼스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랬기에 재균이도 나만큼 놀랐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둘은 입조차 다물지 못한 채 앞을 나란히 응시했다.

물론 형용할 수 없는 감정으로 손이 떨려 오는 건 나뿐일 터였다. 나는 내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서야 손의 힘을 풀었다.

더 놀라운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악! 꽤 거리가 있음에도 남자의 비명은 지나치리만큼 크게 들렸다. 정강이를 쥔 남자가 깽깽 발을 하든 말든, 방금 그 이유를 제공한 남한결은 매몰차게 그를 등지고 돌아섰다.

“둘이 뭐 하는 거예요?”

“…….”

“촬영인가? 아니, 근데 연기라 치기에는 한결이 형이 앞의 사람을 너무 세게 찼는데.”

같은 장면을 목격한 재균이가 옆에서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중얼거리는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방금 남한결과 남자가 보여 준 광경은 이미 연출된 상황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상당히 이상하게 보였으므로.

자신을 잡으려 드는 남자의 머리를 단호하게 밀어낸 남한결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난 잠시 망설이다가 곧 몸을 움직였다.

갑자기 제 앞을 막아선 나를 보고도 남한결은 딱히 놀란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 반응마저 내겐 얼떨떨했다.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난 결국 답을 찾지 못하고 아직도 오솔길 아까 그 자리에 선 채로 우리를 바라보던 남자와 눈을 맞췄다. 나와 뚫어지게 눈을 맞추던 아까와 달리 정강이를 살피는 중간중간 나를 힐끔대는 남자는 마치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난 그 시선을 무시하기로 마음을 정한 후 고개를 돌렸다.

남한결은 말없이 날 내려다봤다. 표정이 언뜻 복잡해 보였다.

“…같이 갈래?”

“…….”

“우리 술 먹기로 했잖아.”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시선이 자꾸 붉은 입술에 가 박혔다.

닿았을까.

난 남한결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한 번 더 재촉하듯 물어야만 했다.

“그거 오늘 밤인 거 알고 있지, 너.”

저 새끼랑 어디 갈 거 아니잖아, 그치. 묻지 못할 말을 힘겹게 삼켰다.

***

남한결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 셋은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술집까지 함께 걸어왔다. 처음에만 해도 남한결에게 방금 촬영한 거냐 등등의 질문을 하던 재균이가 묵묵부답인 남한결과 옆에서 묵묵히 걷기만 하는 나를 번갈아 본 후로는 슬슬 입을 다물었기에 말 그대로 정적만 흘렀다.

심지어 술집에 들어가 자리에 앉은 순간까지도 그랬다. 대충 안주 주문을 마친 우리는 그 누구 하나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해 말을 꺼내지 못하고 세 마디 안에 모든 의사소통을 끝내는 기적 같은 일을 해냈다.

난 나대로 마음이 복잡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건너편에 앉은 남한결의 얼굴을 볼 때마다 아까 남한결의 얼굴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대던 그 배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 저 이수진 어디까지 왔나 전화해 볼게요.”

돌덩이 같은 침묵을 견디지 못한 재균이가 쌩하고 사라지고, 테이블에는 나와 남한결만 남았다. 난 솔이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했다. 10분 안에는 도착할 모양이었다. 데리러 가겠다는 문자에는 됐으니 주소 보내라는 단문만 돌아왔다. 난 술집 이름과 간단한 위치를 전송한 후 핸드폰을 뒤집어 뒀다.

내가 그러는 동안 남한결이 계속 날 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때가 되어서야 알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 솔이가 다 왔다네.”

“…….”

“십 분 정도만 더 있으면 도착할 거야.”

“…알았어.”

남한결의 목소리가 넘어올 때마다 자꾸 그 입술로 시선이 향하려고 해서 미칠 것 같았다. 난 남한결의 시선을 피해 테이블 정 가운데에 놓인 강냉이를 공략했다. 물론 그것도 한계는 있는 탓에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로빈.”

“어, 어?”

“…더 먹을 거야?”

“어?”

“이거. 더 먹을 거냐고.”

내가 강냉이들을 거덜 내는 동안 남한결의 시선이 계속해서 꽂혔던 건 알았지만, 저렇게 확인 사살하는 말까지 듣고 보니 더는 피할 수가 없었다. 난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날 보고 있는 남한결과 시선을 맞췄다.

“…어어. 그럼 좋지.”

남한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나가던 알바생을 불러 강냉이가 들어 있던 오목 접시를 안겼다. 안주가 아직 다 나오지 않은 술집에서 유일하게 주의를 돌릴 것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막 깨달은 시점이기도 했다.

또 한 번 눈이 마주쳤다. 이젠 뭐 먹겠다고 핑계 댈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던 나는 갑자기 떠오른 게 있어서 옆에 있던 내 가방을 끌어왔다. 그러고 보니 어제 공부하다 말고 매점에서 사 먹고 남은 초콜릿이 여기 어디에 들었을 텐데. 가방 안으로 손을 넣어 휘젓던 나는 손끝에 끝이 뾰족한 모양의 물체가 닿아 오는 걸 느끼고 그걸 황급히 잡아서 밖으로 끌어냈다.

팅. 피라미드 모양으로 생겨서는 은박지에 쌓인 초콜릿 네 개가 나란히 테이블 위로 튕겨 올라갔다. 재빨리 초콜릿 하나를 집은 나는 그것을 남한결에게 내밀었다.

“키, 키섹스 먹을래?”

“…….”

“…아니다. 키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거 그냥 초콜릿인데. 너 그냥 먹으면 돼. 다 먹고 싶으면 다 먹어도 되고.”

“…….”

“…….”

“안 먹어.”

“어… 그래….”

입술에 집중하지 않으려고 눈까지 피해 놓고는, 생각하던 걸 줄줄이 뱉고 있었다. 아무래도 미친 게 틀림없었다. 귀가 화끈화끈했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뻔한 남한결을 차마 보지 못하고 초콜릿 하나를 끌어와 입 안에 넣었다. 더럽게 달아서 더 서글펐다. 씨발. 왜 난 하필 어제 이런 야한 이름을 가진 초콜릿을 골랐던 걸까.

“이로빈.”

정확히 초콜릿을 세 개째 까먹고 있을 때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름이 불린 것도 동시였다. 난 대답 대신에 슬쩍 고개를 올려 남한결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어. 말해.”

네 번째 초콜릿을 집으며 짐짓 태연한 척 대답할 때였다.

“나 걔랑 키스한 거 아냐.”

“…어?”

“너 그거 때문에 지금 이러는 거잖아. 남자들끼리 키스하는 거 처음 봐서.”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이상하게 굴고 있긴 하지만 그건 남자들끼리 키스하는 걸 처음 봐서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 둘 중에 하나가 남한결이었기에 그랬던 거지.

그랬기에 남한결의 핀트가 이상한 해명은 내가 반박할 수밖에 없게끔 했다.

“야. 그게 아니라 난….”

“오빠! 미친! 저 개늦었죠!”

반박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서론조차 꺼내지 못했다. 난 옆에 털썩 주저앉는 수진이를 확인하고는 건너편에 앉은 남한결을 응시했다. 남한결의 시선이 방금 수진이가 들어온 술집 입구로 향했다. 캡 모자를 쓴 채로 주위를 성의 없이 둘러보는 솔이가 서 있는 곳이기도 했다. 난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솔이를 데리러 가기 위해 몸을 일으킨 나는 테이블을 지나며 남한결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나중에 이야기해.”

남한결의 시선이 내 옆얼굴을 스쳤다가 이내 떨어져 나갔다. 솔이를 데리고 온 나는 아까 사라졌던 재균이마저 다시 돌아와 자리에 앉아 있는 걸 확인하고는 잠시 멈칫했다. 수진이 옆에 앉은 재균이 덕에 남은 자리라고는 남한결의 옆자리와 어느 쪽이라고 하기도 힘든 일명 ‘상석’이라고 불리는 자리뿐이었다. 평소였으면 생각 없이 아무 데나 앉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야, 재균아.”

생각을 마친 난 재균이의 옆으로 걸어가 어깨를 툭툭 쳤다.

“수진이 옆에 솔이가 앉게 하고. 네가 여기 앉는 게 나을 것 같아.”

여기 이 자리는 뒤에 사람 너무 많이 지나다녀서 솔이 앉히기 좀 그래서. 불편할 것 같아.

덧붙이는 설명에 재균이가 별다른 거부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나저러나 별 상관하지 않는 솔이가 재균이가 양보한 자리에 가 앉고, 재균이가 테이블 옆의 자리에 앉는 걸 확인한 나는.

“와, 언니 숏컷 하셨네요?”

“응. 더워서.”

“너무 잘 어울려요. 그치, 강재균?”

“네… 너무… 너무 잘 어울리시고….”

테이블에서 흐르기 시작한 대화를 느끼며 남은 자리 하나에 몸을 끼워 넣었다. 같은 규격의 자리일 텐데도, 수진이와 솔이가 대화를 나누며 몸을 자유로이 움직일 정도의 공간이 남은 것과 달리 남한결과 내가 앉은 쪽에는 딱히 빈 곳이라 할 만한 게 없었다. 방금도 테이블 끝에 있는 물 잔을 가져오려다 남한결의 가슴팍에 팔이 닿았다. 우뚝 굳는 남한결이 느껴졌지만 아까 재균이가 그랬듯이 누군가에게 이 자리를 양보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남한결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나는 태연함을 가장한 질문을 던졌다.

“왜.”

“…아냐.”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무언가를 꾹 눌러 참는 것처럼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그래도 아니라는 말이 사실이긴 한지, 더는 볼이 따갑도록 느껴지는 시선은 없었다. 아까부터 목이 탔던 난 물 잔에 가득 따라 둔 물을 연거푸 비웠다.

“야야. 강현 실물 어떻든?”

“개미 같던데.”

“뒤질래? 똑바로 대답 안 해?”

“개미같이 사람들이 많아서 안 보였다고, 수진아. 사람 말을 끝까지 좀 들어.”

물잔을 내려놓다 말고 또 한 번 서로의 허벅지가 부딪쳤다. 그리고 난 내가 왼쪽 다리를 떨고 있었음을 알았다. 긴장할 때만 나오는 버릇이다.

근데 뭐. 어쩔 거야. 허벅지 좀 부딪치는 게 대수라고. 쟤는 오늘 누구랑 키스까지 할 뻔했는데. 그것도 내 앞에서.

“강재균 진짜 짜증 나. 아, 로빈 오빠. 오빠도 강현 같이 봤댔죠. 어땠어요? 오빠가 강재균보다는 크니까 잘 보였을 것 같은데.”

“키 건드리기 있어요?”

“얼마큼 작다는 이야기 안 했는데요? 찔리시나요?”

“진짜 절교하자.”

“오케이, 오케이. 그래서 로빈 오빠 어땠다고요?”

수진이의 반짝거리는 눈빛이 나에게 향했다. 수진이와 재균이가 말장난하는 걸 지켜보며 슬그머니 웃던 솔이의 시선도, 솔이가 안 보는 틈을 타 수진이한테 눈을 부라리던 재균이의 시선도 내게 닿았다.

남한결의 시선만이 제 앞에 놓인 술잔에 꽂혀 있었다. 난 아직 아무도 테이블에서 손댈 생각을 않고 있던 소주병을 가져왔다. 으레 그러하듯 술병을 한 번 흔들어 주고는 뚜껑을 땄다.

“그냥.”

남한결 앞의 소주잔에 병 주둥이를 가져다 댔다. 투명한 액체가 잔을 빈틈없이 채웠다. 난 조금의 틈만 남겨 두고는 병을 뗐다. 이번엔 병 주둥이를 내 앞의 술잔 위로 기울였다.

결코 투명하다고 할 수 없는 질투가 입 밖으로 흐르고 말았다.

“난 별로던데.”

“헐. 충격. 오빠 누구한테 별로라는 소리 잘 안 하잖아요. 어땠길래? 막 진상 부렸어요? 걔 건방지다는 소리 좀 있긴 해도, 막 일반인한테까지 그럴 성격은 아닐 줄 알았는데. 나 캐릭터 해석 잘못했나?”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러고 보니 수진이가 좋아하던 배우였다. 충격받은 얼굴을 보고서야 내 질투에 빠져 분위기를 이렇게 만드는 게 옳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술잔을 바로 입에 가져다 대며 짧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냥 내가 기분이 좀 별로였어.”

시야에 걸려 있는 남한결의 잔은 여전히 가득 차 있는 채였다. 방금도 허벅지가 부딪쳤다.

아마 남은 밤 내내 그럴 거였다.

***

그래도 여름 방학 때 한 번 만났다고 테이블 위 다섯의 대화는 막힘없이 이어졌다. 사실 우리 다섯 중 가장 얼굴 맞댈 일이 적었던 게 남한결이라 내심 걱정했었는데, 재균이와 수진이의 농담에 피식대다가 한마디씩 얹기까지 하는 얼굴을 보니 기우였던 듯했다.

왠지 모르게 뿌듯한 광경이었다.

“근데 저 카페 갈 때마다 궁금한 거 있었는데, 음악은 누가 트는 거예요? 음원 사이트에서 순위별로 세운 노래 틀진 않는 것 같아서요.”

“왜?”

“아니, 노래가 너무 좋아서. 저 거기서 공부할 때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음악 찾기만 엄청나게 했잖아요. 핸드폰 스피커 앞에 흔들어 가면서.”

“그거 내가 하는데.”

“헐. 진짜요? 플레이리스트 만드는 것도?”

난 우리의 반대편에 앉아 눈을 반짝거리는 수진이와 고개를 끄덕이는 남한결을 보다 흐뭇하게 웃었다. 남한결이 아래에 있던 핸드폰을 들어 올리더니 무심하게 물었다.

“줄까?”

“네?”

“플레이리스트 만들어 놓은 거.”

“헐… 대박. 그래도 돼요?”

“응.”

사실 카페 갈 때마다 남한결을 신경 쓰느라 노래고 나발이고 좋은지조차 몰랐는데, 둘이 저러고 있는 걸 보니 귀여웠다. 수진이와 남한결의 성정을 익히 알고 있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둘 다 싫어하는 사람과는 저렇게 말을 섞는 타입이 아니니까.

특히 남한결은 더더욱 아니고. 물론 나로 인해 좋든 싫든 여러 번 겪어 본 아이들이 괜찮기 때문인 것도 있겠지만, 결국 남한결이 별말 없이 이 자리까지 나온 건 날 위해서임을 안다.

새삼 그 여름이 남긴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한결 없는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몰랐지.

“나 거기에서만 노래 안 들어.”

“…네?”

“네가 얘한테 그랬다며. 나 한 플랫폼에서만 노래 들을 것 같이 생겼다고.”

그래도 좀 얼굴 튼 룸메 후배라고 저렇게 농담까지 던지는 놈이 이토록 사랑스러워 보일 줄은. 픽 웃는 남한결의 얼굴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한 박자 늦게 남한결이 던진 말뜻을 이해한 듯한 수진이의 시선이 곧장 내게 꽂혔다. 언젠가 내게 남한결을 묘사하며 했던 말이 남한결의 귀에 들어갔음을 막 알게 된 모양이었다.

‘말했어요?’ 입 모양으로 묻는 얼굴에 대고 웃어 보이자 수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남한결의 눈치를 봤다. 그래도 플레이리스트를 받는 게 중요하긴 한지 남한결이 쥐고 있는 폰에 간절한 시선을 던지며 “좋은 뜻이었어요… 아시죠….”라며 중얼거리는 수진이를 보던 나는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돌아온 수진이의 날카로운 눈빛을 본 나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의 한쪽에서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서울까지 오시기 힘들진 않으셨나요….”

“별로.”

“아… 다행입니다. 혹시 버스 타고 오셨어요? 아니면 기차?”

“내 차 타고 왔는데.”

“아… 차가 있으시구나. 멋있으시네요….”

“태워 줘?”

“아… 태워… 네?”

“멋있다며. 태워 달라고 그런 말 한 거 아냐?”

“아, 아뇨! 그런 거 아닌데! 전 진짜 순수한 마음으로 멋있다고! 제가 어떻게 감히! 감히!”

저러다 애 울겠다, 울겠어.

덤덤하게 묻는 솔이와 상반되게 옆에 있는 재균이는 안절부절못하는 게 그대로 눈에 보였다. 두 손으로 손을 휘젓는 재균이를 본 솔이가 앞의 술잔을 흘긋대고는 물었다.

“나 술 먹어, 말아.”

“…예?”

“술 먹으면 너 못 태워 줘. 음주 운전 싫어.”

“아… 드시고 싶으시면 드셔도 됩니다! 전! 전… 지하철 타도 되고. 버… 버스도 있고! 좀 멀긴 한데 그래도 버스는 한 번에 가요. 정 안 되면 큰누나한테 데리러 오라고 말….”

마지막 말을 하던 재균이가 황급히 말을 멈췄다. 아차- 하는 표정을 보니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진지하게 나한테 솔이가 연하를 싫어하는지 묻던 재균이를 떠올랐다.

질문에 있던 전제를 생각해 봤을 때, 어른스럽고 무던한 솔이가 연하를 좋아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서 일부러 오늘 옷도 평소에 입는 옷 대신 깔끔한 셔츠 입은 것 같은데. 제 입으로 연하인 걸 티 내는 말을 하고 나니 당황스러웠겠지. 그래, 내가 봐도 술 먹은 남동생을 데리러 오는 큰누나가 있는 연하한테 끌리진 않을 것 같다.

난 도와줘야 할 타이밍을 깨닫고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근데 큰누나는 너 이제 다 컸다고 잘 안 태우러 오신다고 하지 않았어?”

“네? …아 네! 형 말이 맞아요! 저희 큰누나는 저한테 이제 그 남자 냄새 난다고 제 방에도 잘 안 들어오고…. 아, 근데 냄새가 난다는 게 그런 막 더러운 냄새가 난다는 게 아니구요! 저 되게 잘 씻어요. 진짜예요.”

몇 분 전 남한결 앞에서의 내 모습이 떠오르는 참담한 대화였다.

그래… 긴장을 하면 내가 뭔 말을 하는지도 모르게 되더라, 사람이. 난 대강 고개를 끄덕이는 솔이 옆에서 혼 나간 표정을 짓는 재균이에게 힘내라는 의미를 담아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줬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진동한 것도 동시였다. 난 핸드폰을 확인하고는 건너편의 수진이를 흘긋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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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진: 오빠 강재균 입 좀 닥치게 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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