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첫 몽정을 했던 때를 기억한다. 지금보다는 한참 어렸고, 꿈에서 깨고 나서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던 그 순간을. 축축한 이불을, 그보다 더 젖어 있을 내 아래를 차마 확인조차 하지 못한 채로 중얼거렸다.
제발, 제발. 이게 꿈이게 해 주세요. 아까 이로빈이 나왔던 꿈 말고. 지금 이게 꿈이길.
아무리 중얼거리고 눈물을 흘려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난 그로부터 몇 년 동안은 차마 네 사진조차 보지 못했다. 그럼 네가 또 꿈에 나오기라도 할까 봐.
왜냐면 그 순간이야말로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 때니까.
그런 나를 비웃는 것처럼 넌 꾸준히 내 꿈에 등장했다. 무뎌진 죄책감은 이상한 호승심을 부추겼다. 하루는 견디지 못하고 앞에서 웃는 널 끌어안았다. 그날은 내가 엄마의 등 너머로 네 고등학교 졸업식 사진을 본 날이었는데, 꿈에 나타난 너는 사진 속 그대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갑자기 달려든 나에 놀라지 않고 등을 쓸어내리던 네가 말했다. 내 어깨에 볼을 기댄 채 웅얼거리는 게 사랑스러웠다.
‘보고 싶었어, 한결아.’
거짓말.
‘너도 졸업식에 왔으면 좋았을 텐데.’
거짓말.
‘사랑해.’
거짓말하지 마, 이로빈.
넌 달콤한 말만 하는데, 이상하게도 네가 그럴수록 난 더욱 불행해졌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줄줄이 뱉는 네가 진짜 이로빈일 수 없다는 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나니까.
근데 난 그 허상마저 놓질 못해서, 뻣뻣한 네 졸업 가운을 꽉 움켜쥐고, 웃는 네 얼굴 곳곳에 키스를 쏟아붓고, 널 침대에 눕혔다. 아래에서 헐떡이는 네 얼굴을 보고 말했다.
‘나도 사랑해.’
네가 웃으며 물었다.
‘정말?’
울면서도 답해야만 했다.
‘어, 정말.’
얼굴 말고는 하나도 이로빈이랑 닮지 않은 네가 해 주는 그 말을 듣고 싶어서 이렇게 비참해지길 자처할 정도로. 딱 그 정도로 널 사랑해.
내가 네 새로운 사진을 보아야만 꿈에서의 네 모습이 바뀌어. 그러니까 내가 또 다른 너의 사진을 보기 전까지 넌 계속 이 졸업 가운을 입고 있을 거야. 그리고 매번 똑같은 말을 속삭이겠지.
웃기는 건 나도 맨날 똑같은 대답만 돌려주고 말 거란 거야.
나도 사랑해.
어, 정말.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상이래도 넌 이로빈인데. 내가 어떻게 널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사실 널 실제로 만나고 나면 이런 짓은 멈출 수 있을 줄 알았다. 복학 후 둘이 한번 같이 살아 보는 게 어떠냐는 엄마의 제안은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다. 난 벽을 세우는 게 익숙한 사람이고, 12년 전 헤어진 소꿉친구에게도 예외는 아닐 거라고.
꿈속의 너와 실제 네가 다름을 알기에 부릴 수 있던 호기였다. 지금에야 생각한다. 어쩌면 난 나 자신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똑바로 봐, 다른 사람이라고. 정신 차려.
그 호기가 착각이자 오만인 것을 알기까지 겨우 하루가 걸렸다. 아침을 먹으며 이로빈과 손이 스친 날, 난 입학 이래 한 번도 빠져 본 적 없던 수업을 제쳐야 했다. 암실이 있는, 아무도 오지 않기로 유명한 더러운 화장실에서 신음하며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걸레물이 바닥에 흐르는 화장실 칸에서, 너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그곳에서마저 네 얼굴을 떠올리며 사정했다.
그런 날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빈도는 잦고, 내용은 점차 더 잔인해져만 갔다. 왜냐면 모든 걸 상상에 의존해야 했던 때와 달리 꿈속의 이로빈이 이제는 실재하는 이로빈을 닮아 가고 있었으니까.
‘아니, 생각해 보니까 좀 웃겨서.’
‘…….’
‘옷도 못 벗고 스킨십도 금지인 집에서 어떻게 또 애가 생겼잖아.’
그날은 너랑 처음으로 술을 먹은 날이었고, 비틀대며 용케 집에 왔다. 침대에서 눈을 감았다 뜬 순간 내 옆에는 네가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술을 먹은 날에는 유독 네가 진짜인지 헷갈리곤 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했다. 네가 웃으며 내 어깨를 껴안을 때가 되어서야 알았다. 아, 또 꿈이구나.
‘남한결. 난 애가 없어도 괜찮아. 너만 있으면 돼.’
술집에서와 똑같은 얼굴로 네가 농담하듯 말하는데, 난 죽고 싶었다. 추악하고, 꼴불견이었다.
언젠가 별생각 없이 시간표에 끼워 넣었던 철학 교양 수업의 교수가 말했다. 꿈은 욕망의 산물이자 잔재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깨달았다.
네가 내 욕망이니, 난 그럼 이 꿈을 널 사랑하는 내내 꾸겠구나. 그 안에서 넌 매일 달콤하고, 또 잔인해지겠지.
‘전 여자 친구랑 만나지 않기로 했어. 너 때문에.’
아니야.
‘유럽 여행 간 동안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매일 네 생각만 했어. 그럴 때마다 연락한 거야.’
아니잖아.
‘네가 내가 볼 수 있는 곳으로만 도망간다면 괜찮아. 그럼 난 널 계속 사랑할 수 있어.’
너 그런 말 한 적 없잖아.
난 꿈속의 네가 더는 이로빈을 흉내 내지 못하게 할 작정으로 입술을 맞대고, 네 티셔츠를 벗기고, 내가 빨 수 있는 건 모조리 빨았다. 가슴팍으로 미끄러져 내린 후 유두를 핥는 내 귀를 만지작댄 네가 신음했다. 헐렁한 트레이닝복을 무릎까지 내리고 네 바짝 선 성기를 입에 담았다. 네가 눅진해지고, 결국에는 아무런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내 머리를 쥘 때까지.
네 신음만은 흉내 낼 수 없겠지. 그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거니까.
안심했고, 동시에 그만큼 비참해졌다.
가끔은 생각했다. 어쩌면 난 이 순간에마저 길들어 버린 게 아닐까. 네가 선사하는 깃털 같은 희망과 기다렸다는 것처럼 찾아오는 절망 속에 갇힌 건 아닐까.
그래서 네 앞에서 자꾸 취하는 게 아닐까. 술에 취하고, 꿈에 취하면 나타나는 넌 평소보다는 조금 더 사실처럼 느껴졌으니까. 흐릿한 경계선에 서 있는 넌 그래도 날 안아 주니까.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입술이 간지러워 잠에서 깼다. 옆에 누워 있는 네가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난 익숙하게 입술부터 가져다 댔다. 한 번도 네가 키스하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인지, 꿈에서의 넌 늘 눈을 감지 않았다.
“눈 감아.”
네 입술에서는 희미한 사과 향이 났다. 요새 이로빈이 날 만날 때마다 내미는 껌에서 나는 향과 같았다. 난 어쩐지 울컥한 마음으로 한 번 더 입술을 맞댔다. 세 번째에는 아랫입술을 진득이 빨았다. 여전히 사과 향이 났고, 네 입술이 달았다.
하다 하다 이런 것까지 따라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네 위에 올라탔다. 내 허벅지와 닿은 네 베이지색 니트가 구겨졌다. 예전에는 네 새로운 사진을 보고서야 네 옷이 바뀌었는데, 널 매일 보게 된 순간부터는 매일 옷이 바뀌었다.
술자리에서 보았던 것과 꼭 같은 옷을 입은 네가 날 불렀다.
“남한결.”
난 숨을 죽이고는 아래에 있는 너를 응시했다. 익숙한 순간이었다. 이런 부름 뒤에는 늘 잔인한 순간이 찾아왔다.
“나 남자랑 키스 처음 해 봐.”
마치 지금처럼.
어떻게 이렇게 예상을 벗어나지 않을까. 난 아까 이로빈에게 강현과 서 있는 모습을 보여 줬다는 것을 떠올렸다.
굳이 날 찾으러 미대를 뽈뽈 돌아다녔다는 강현을 겨우 인적이 드문 곳으로 끌고 간 때였다. 담배나 한 대 물린 후 보내려 했는데, 다 피우고서도 건들건들 딴짓을 하던 강현이 내 뒤를 보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야, 너네 학교 물 존나 좋다. 재윤 누나는 여기서 캐스팅을 하지, 왜 엄한 가로수길에서 뻘짓을 하는 거야.’
‘시끄럽고, 좀 가.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어? 아니, 잠깐만. 쟤야?’
‘뭐가.’
‘맞는 것 같은데. 이쪽 뚫어져라 보는 거 보니까.’
‘…….’
‘돌아보지 마. 그럼 재미없잖아.’
정체 모를 소리를 하던 강현이 씩 웃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난 귀에 바짝 입을 가져다 댄 강현의 얼굴을 밀어내려다 말고 멈칫했다.
‘내가 아까 여기서 촬영해 봐서 아는데.’
‘…….’
‘저기서 보면 우리 키스하는 것처럼 보여. 각도 때문에.’
‘뭐?’
‘그나저나 새끼, 눈빛 한번 살벌한데. 나 뚫리겠다. 너 짝사랑하는 거 맞냐? 뭔가 이상한데.’
짝사랑?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나는 정말 먼 곳에서 이곳을 바라보고 선 이로빈을 발견했다.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강현과 나를 번갈아 보는 모습을 보니 뭘 오해하는지 알 만했다.
강현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네게 가는 길이 유독 멀게 느껴졌다. 네가 먼저 말을 걸어 줘서 다행이었다.
‘…같이 갈래?’
방금 다 봤으면서도, 넌 일부러 다른 말을 했다. 그 와중에 눈길을 피하고는 오히려 빤한 질문을 하는 게 꼭 직전의 장면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 행위인 듯해서 난 속이 쓰렸다.
그래. 비록 오해일지언정 남자가 남자와 입을 맞추는 모습이 너에겐 처음이겠지. 그리고 내가 떠나면 다시는 볼 일이 없을지 모르고. 그런 네가 남자와 키스한다는 상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건 결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될 수는 없을 거야. 알지.”
나지막한 목소리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한 번 더 일깨웠다.
난 남자와 입을 맞출 일이 없을 거야. 너도 알지.
여태까지 너와의 꿈에서 들었던 말 중 가장 잔인한 문장은 아닌데도 순간 목이 메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듣는 순간 평생 잊지 못할 것을 직감한 문장이 귓가를 맴돌았다. 쑥스러운 듯한 얼굴로, 그 사람을 생각하는 듯한 미소를 짓고 말하는 이로빈의 얼굴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수없이 상상해 본 건데 실제로 보진 못해서 몰랐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네가 그렇게 빛난다는 걸.
빛나는 네 곁에 있으면 타 죽겠지. 근데 그게 뭐 어때서. 네가 행복하다는데.
의연한 척을 하는 마음과는 달리 줄줄 쏟아지는 눈물을 무시한 채로 네게 다가갔다. 입술을 맞대는 이 순간마저도 넌 내 것이 아니라는 걸 느낀다.
“그건.”
“…….”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네 입술 사이를 갈랐다. 더운 숨이 섞였고, 사과 향이 내 입 안으로 옮겨 올 때까지 집요하게 네 혀를 빨았다. 이로빈의 손이 내 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마치 방금 흘린 눈물을 보상하는 것처럼.
아랫입술을 빨고 네 혀를 감아올렸다.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입을 뗄 때마다 네 숨이 내 턱을 간지럽혔다. 잠시 멈칫한 사이 네가 몸을 일으켜 내 턱에 짧게 뽀뽀했다.
“잘 안다니까 주는 선물이야.”
눈을 접으며 웃는 얼굴이 말갰다. 난 눈을 맞추지 못하고 얼굴을 내렸다. 잘생긴 귀를 빨고, 그 아래 턱과 귀 사이에 작게 난 틈까지도 꼼꼼히 핥았다. 귓바퀴를 따라 혀를 굴리던 순간 내 허리 부근에서 움찔대던 손은 목으로 입술이 옮겨 간 순간부터 내 등을 꽉 붙잡았다.
난 내 등에 붙은 손을 떼려다가 마음을 바꿔 니트를 조금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얼굴을 밀어 넣었다. 더운 숨이 가득한 니트 안에서 익숙한 돌기를 찾아 물었다.
“윽, 잠시만….”
황급히 어깨를 잡아 세우는 손길은 무시했다. 어차피 이러다가도 곧 좋다고 할 너일 걸 알아서.
돌기를 잘근잘근 씹듯이 하다가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위에서부터 끙끙 앓는 듯한 신음이 들렸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힘을 쓰고 있는지 내 가슴팍과 붙은 복근이 경련하듯 떨렸다.
숨을 크게 들이쉰 이로빈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목소리가 다 쉬어 있었다.
“남한결. 거긴….”
“…….”
“거긴 빨 필요 없잖아.”
난 무시하고는 반대쪽 돌기를 찾아 물었다. 사탕이라도 빨 듯 한참을 쪽쪽대다가 혀를 아래로 내렸다. 입술을 댄 순간 모양이 잡히는 복근 위에서 한참을 놀다가 니트에서 얼굴을 뺐다.
그러고는 곧장 얼굴이 붙잡혔다. 날 위쪽으로 끌어 올린 이로빈이 내 볼을 잡아 고정한 채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로빈의 혀가 깊숙이 내 입 안으로 침투했다. 저돌적인 움직임이었다. 까딱하면 끌려갈 정도로.
여태껏 꿈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난 언 것처럼 가만히 굳었다가 이로빈의 손이 내 셔츠 단추를 풀고 있다는 걸 깨닫고서야 정신차렸다.
“하….”
“…아….”
잠시 입을 뗐을 뿐인데 거친 신음이 엇갈려 터졌다.
붙어 있는 아래가 슬슬 자극되기 시작했다. 난 손을 아래로 내려 빳빳한 청바지 아래 있을 성기의 위치를 짐작하며 손을 움직였다. 몇 번 반복하고 나니 이로빈이 내 어깨에 머리를 박고는 끙끙댔다.
난 이로빈의 청바지를 아래로 내리며 명령하듯 말했다.
“소리 내기 싫으면 물어.”
어차피 흔적 하나 남지 않을 거니까 상관없었다.
“싫어.”
까만 드로어즈를 내리려던 손이 멈칫했다. 난 멍하니 고개를 올렸다. 온통 땀에 젖은 얼굴을 한 채로 이로빈이 눈을 휘었다. 손을 내려 내 귀를 만지작대면서 다정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너 아프잖아.”
어떻게 넌 그런 말들로 매번 사람을 망가트릴까. 누구를 해칠 마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말투로, 듣는 사람을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게끔 만들 수 있을까.
“…한결아.”
이건 다 꿈인데. 네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는데.
네가 좋아한다던 그 사람은 이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어도, 꿈을 빌어 네게 이런 욕망을 풀고 있는 나는 자격이 없는 말들이 귓가를 스친다. 눈가가 뜨거웠다. 난 눈을 질끈 감고는 네 배에 얼굴을 묻었다.
“왜 자꾸 울어, 속상하게.”
헐떡이듯 울며 네 팔을, 손을, 그 무엇이라도 네 온기를 전해 줄 수 있는 것들을 껴안았다. 일어난 순간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그 온기조차 급하고 간절해서.
어떡하지, 이로빈.
“…힘들어.”
머리를 쓸어내리던 손이 멈칫했다. 난 숨을 뱉듯이 한 번 더 중얼거렸다.
“죽고 싶어.”
차라리 말하지 말지.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난 아직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모습을 볼 준비가 안 됐다는 걸 깨닫는다. 너도 나처럼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모르고 싶었다.
네가 누군가를 생각하며 그런 얼굴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한참이 지나서야 들려온 이로빈의 목소리는 깊었다. 끝을 모르는 깊은 밤과 우리가 갈 일 없는 바다처럼. 난 그 안으로 잠겨 들며 눈을 감았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있을까.”
그 사람 만나지 마. 그 사람 꿈에는 나타나지 마. 그 사람이랑 밥 먹고, 같이 걷고, 어두운 곳에서 있지 마. 그 사람한테 사랑한다는 말 해 주지 마. 키스해 주지 마. 자지도 마.
안 돼. 안 돼, 로빈아.
그중 이로빈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게 아무리 꿈속에서까지 날 안아 주는 지독하게 다정한 걔일지라도.
죄책감과 뒤바꾼 밤이 잦아들었다. 난 곧 빠져나갈 온기를 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껴안았다.
***
창밖으로 어슴푸레 빛이 번져 왔다. 난 달빛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하얀 얼굴을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몸이 무거웠다. 단순히 잠을 자지 못해서만은 아니었다.
“…….”
허리 부근에 얹혀 있는 손을 조심스레 떼냈다. 어젯밤 보는 사람의 마음이 타들어 가도록 울던 얼굴은 그 밤이 무색하게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평소에도 잘 붓지 않는 편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 티가 안 날 줄은 몰랐다.
직접 본 게 아니었다면 간밤의 일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렇다면 이 방에서 너는 내가 모르는 그런 날들을 수없이 겪었을까. 겨우 벽 하나를 두고 있음에도 아침이 오면 네 얼굴에서 울음기 하나 찾아내지 못했던 내가 무신경했던 건지 아니면 그 사실을 티 한번 내지 않았던 네가 독했던 건지 알 수가 없다.
“…….”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왜 힘든지, 죽고 싶은지, 혹시라도 그게 나랑 관련이 있는 건지.
관련이 있어도, 설령 관련이 없대도 두렵기는 매한가지였다. 전자는 내가 너를 죽고 싶게 만드는 인물이었다는 걸 확인받는 셈이고, 후자는 네가 다른 이에게 그런 깊은 감정을 품었다는 걸 확인당하는 셈이라서.
‘이건 결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될 수는 없을 거야. 알지.’
부딪히던 숨결이 혹시 착각일까 봐 신신당부까지 마친 주제에 아직 그 대상이 누구인지를 확신하지 못하는 내가 우습지만.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어. 우린 한 번도 서로에게 확신을 준 적이 없잖아. 지금 느끼는 감정이 누구를 향하는지 정확히 말한 적도 없고.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이 상황에서 그 사실이 헷갈린다는 게 좀 슬프지만,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
“…남한결.”
내가 확신을 줄 테니까. 그래서 네 고통을 어떤 방식으로든 줄여 볼 테니까.
“일어나.”
속삭임에 가까운 소리였던지라 곤히 잠든 남한결은 움찔하지도 않았다. 제 속도에 맞춰 오르락내리락하는 속눈썹을 보던 중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그래, 생각해 보니 그 전날에도 잠을 잘 자지 못했다고 했다. 좀만 더 자게 하다가 깨워서 밥 먹여야겠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알바하는 날이었던가? 주말 이틀은 보통 다 카페에 나갔던 것 같은데.
몇 시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쥐었을 때였다. 손에 닿기가 무섭게 진동을 시작한 핸드폰을 침대 위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음….”
남한결이 뒤척였다. 나는 황급히 핸드폰을 집어 들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
“…….”
다행히도 깨진 않은 상태였다. 얼굴을 반대 방향으로 돌린 채 다시 자기 바쁜 남한결의 하얗게 드러난 등을 바라보던 나는 멈칫했다.
야한데….
결국 이불을 끌어 등 위로 덮어 주고서야 안심하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우리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