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테이블 위를 짚은 손을 보고는 고개를 올렸다.
“좀 추운 것 같아서 어묵도 시켰어. 괜찮지?”
말릴 틈도 없이 계산대로 쌩하니 달려간 이로빈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추운 것 같다는 말이 무색하게 하얀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내 시선이 흐르는 곳이 어딘지 눈치챈 듯 허를 찔린 얼굴을 하던 이로빈이 이윽고 어깨를 으쓱했다.
“정정할게.”
“…….”
“네가 추워하는 것 같아서 시켰어. 잘했지.”
눈을 찡긋한 이로빈이 플라스틱 의자 위로 앉았다. 난 이로빈을 흘끔거리던 걸 멈추고 팔짱을 낀 손을 내렸다. 주위를 둘러보며 별생각 없이 취한 자세인데, 이로빈한테는 그게 추워서 나온 자세로 보였나 보다.
“왜?”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는데도 매번 실패하고 만다. 방금도 의식하지 못한 새에 이로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나 보다. 장난기 어린 눈길을 느끼고는 정신이 들었다.
“…아냐.”
말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 주에만 해도 몇십 번은 겪은 일인데 도통 면역력이 생기지 않았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이로빈이 갑자기 거리를 좁히거나.
“한결아.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
“넌 추위를 많이 타잖아.”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비밀스럽게 속삭이거나.
“가끔 너무 추우면 네 몸을 이용하면 될 것 같아. 봐봐, 이렇게.”
이렇게 장난을 걸 때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따뜻하지.”
내 손을 가져가 겹쳐 잡은 후 그걸 내 목덜미에 가져다 대고 눈을 접어 웃는 이로빈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말이 없으니 이로빈의 표정도 점차 묘해졌다. 목을 감싼 손 중 누구 것인지 모를 손가락이 움찔댔다.
“…….”
“…….”
눈이 마주친 것과 동시에 이로빈이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겹쳐져 있던 손이 떼어졌고 순식간에 목 부근이 허전해졌다.
“큼, 흠. 음식 나왔네. 내가 가져올게.”
“…아, 내가.”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려 했지만 이로빈의 손에 밀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냐, 아냐! 넌 앉아 있어.”
내 어깨를 눌러 앉힌 이로빈이 파란 테이블 사이를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난 이로빈이 포장마차 아저씨에게 트레이를 받으며 넉살 좋게 말을 거는 걸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미친놈처럼 아까 이로빈의 손이 닿은 곳을 만지작거렸다. 심장이 그곳에서 뛰고 있었다. 난 손바닥이 미지근해질 때까지 한참을 그러고 있어야만 했다. 아니면 그 사이로 감당하지 못할 것들이 쏟아져 나올 듯해서.
평생 더위란 걸 타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최근 날 쥐고 흔드는 이 간지러운 더위들을 어떻게 명명해야 할지.
“야, 오늘 떡볶이 진짜 맛있게 됐대. 아저씨가 아니면 물어낸다고 하셔서 내가 일단은 보증금 개념으로 어묵 하나 더 받아 왔어.”
한 사람이 웃으면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상태에서도 따라 웃고.
“자. 여기. 먹어 봐.”
“…….”
“아, 맞다. 너 뜨거운 거 잘 못 먹지. 불어 줄까?”
평소라면 절대 응하지 않을 제안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응.”
그러는 그 순간조차 그 사람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런 더위가 내게도 찾아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맛있지?”
난 이로빈의 침이 온통 묻어 있을 떡을 씹어 넘기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얼마나 비위생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지를 깨달은 순간에는 헛웃음이 났다. 예전에 주성찬이랑 여행을 했을 때 놈이 썼던 컵을 쓰기 싫다고 했다가 대판 싸웠던 게 기억나서.
탕. 탕.
오늘도 포장마차 앞에 있는 동전 야구 연습장에서는 누군가가 배트를 휘둘러 댔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들려오는 소리는 이로빈을 마주할 때마다 널뛰기하는 심장 소리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았지만, 한 번씩 공이 배트에 제대로 맞은 묵직한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이로빈의 고개가 앞으로 돌아갔다. 난 이로빈이 반강제로 넘긴 어묵을 든 채로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을 걸었다.
“이로빈.”
볼에 한가득 음식을 넣고 우물거리던 이로빈이 멈칫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이든 들을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는 갈색 눈동자는 물어보지 않은 사실까지 고백하고 싶게끔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난 어색하게 콧등을 긁으며 앞을 눈짓했다.
“나 이제 저거 잘 쳐.”
의아함을 담은 눈빛이 장난기로 넘실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꿀꺽 입 안의 음식을 모두 삼킨 이로빈이 팔짱을 낀 채로 날 건너보았다. 오버하며 눈 사이를 가늘게 좁히는 놈을 보다가 다 먹은 어묵 꼬치를 내려놨다. 이래야 이로빈이 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줄 테니까.
예상했던 대로 앞의 접시들을 거의 다 빈 것을 확인한 이로빈이 선심 쓰듯이 물었다.
“내기할까?”
난 이로빈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굳이 이곳까지 와 떡볶이를 먹자는 말에 따른 건 그 이유밖에 없었으므로. 그 사실을 눈치챌 리 없는 이로빈이 내 빠른 반응이 의외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난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은 채로 제안했다.
“소원 들어주는 거.”
“…….”
“그거 하자. 이번에도.”
시계를 내려다본 이로빈의 얼굴에 얼핏 곤란함이 스쳤다. 그것도 잠시, 이로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격다운 시원한 승낙이 떨어졌다.
“그래. 네가 하고 싶은 거니까.”
이로빈을 따라 일어서며 난 그새 조금 축축해진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앞서는 이로빈의 머리를 헝크는 바람은 우리가 서 있는 곳이 가을의 막바지임을 깨닫게 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소리였다.
***
이로빈은 열 개 중 총 일곱 개를 쳤다. 놓친 세 개의 공은 누가 봐도 고의였다. 심지어 여덟 번째 공이 날아올 때는 배트를 가져다 대지도 않았다. 그때는 본인 생각에도 좀 티가 났는지 돌아보며 내 눈치를 보았다. 그 얼굴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철창 밖으로 나온 이로빈을 흘끔 확인한 나는 아까 바꿔 온 동전을 기계 안으로 넣었다. 내 차례인 줄 알고 배트를 건네는 이로빈에게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다시 철창 안으로 들어가라고 눈짓했다.
“나 방금 쳤는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 이로빈이 철창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기에 등을 떠밀어야만 했다. 다시 철창 안에 갇힌 이로빈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말도 안 되는 씨름을 하는 사이에 게임은 시작됐다. 저 멀리 공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난 이로빈 뒤를 눈짓했고, 이로빈이 즉각 몸을 돌려 배트를 휘둘렀다. 탕. 명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이로빈이 방금 일곱 개를 친 건 나한테 져 주기 위한 놈 나름의 계략이었다는 걸.
난 이로빈이 다시 그러지 못하도록 똑똑히 말했다.
“그럼 뭐 해. 제대로 안 쳤는데.”
등을 움찔한 이로빈이 곧 배트를 고쳐 잡았다. 들으란 듯 투덜대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내 마음대로 애인한테 져 주지도 못하고….”
꿍얼대며 제대로 자세를 잡는 걸 보니 아까와 같은 짓을 반복하진 않을 모양이었다. 두 개, 세 개, 네 개. 시원하게 허공을 가르는 공들은 정적 속에서도 정확히 갈 길을 알았다.
“소원 들어주고 싶었는데….”
투덜거림이라기에는 너무나 이로빈다운 말들까지도. 절로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웃음이 좀 잦아들고서야 이로빈의 뒤통수에 대고 말할 수 있었다.
“내 소원은 내가 챙길 테니까.”
“…….”
“넌 져 주지 말고 너 할 거 해.”
서서히 돌아보는 얼굴과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짧지만 강하게 이어졌던 시선을 끊고 말없이 돌아선 이로빈이 이전보다 신중하게 공을 치기 시작했다. 저번에도 눈치는 챘지만, 잘한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마지막에 배트 끝에 빗맞은 공 하나를 제외하면 총 아홉 개를 날려 보낸 이로빈이 문을 열고 나왔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놈이래도 스무 개를 연달아 친 건 힘들었는지 숨이 좀 거칠어졌다.
“이제야 좀 만족스러워?”
“어.”
고개를 끄덕이며 배트를 건네받았다. 철창 안으로 들어선 것과 동시에 이로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시작할 거지? 돈 넣는다?”
“어.”
이로빈 때문에 오기 시작한 이곳은 설 때마다 이 네모난 선 안에 있는 게 철저히 나 혼자임을 깨닫게 만든다. 나를 감싸는 공기도, 양손으로 붙들고 있는 단단한 나무 조각이 주는 어색한 느낌도 오롯이 이곳에 선 나만을 위한 것이라고.
근데도 이곳에서 몇백 개가 넘는 공을 치는 내내 네 생각만 했다. 공을 밀어내기 위해 부드럽게 움직이곤 했던 네 등과 중간중간 날 돌아보며 웃던 네 말간 얼굴과 이상하리만치 길게 느껴졌던 그 포옹을.
네가 나중으로 미룬 소원이 무엇인지가 가장 궁금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이 가는 게 없었다. 네가 말해 주기까지 기다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좀 슬펐다.
굳이 소원으로 만들어 빌지 않아도 네가 바라는 건 뭐든 들어줄 수 있다는 말을 네게 할 수가 없다는 게.
탕- 탕-
“와… 남한결.”
어쩌면 소원이 필요했던 건 네가 아니라 나였을 텐데. 난 소원으로 만들어 빌어야만 네게 바라는 걸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면서도 가장 바라는 소원은 죽을 때까지 네게 빌 수 없는 그런 사람.
“뭐야. 진짜 잘하네? 연습했어?”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열 번째 공을 칠 순서가 되곤 했는데, 한 번도 그걸 제대로 치지 못했다.
오늘도 여전했다. 난 네모난 선 안에 갇혀 있고, 날아오는 공을 보면서도 네 생각만 하고 있고. 그러나 그 수많은 여름의 날들과 다른 점이라면 이번 공은 무슨 일이 있어도 쳐야만 한다는 거였다.
“…….”
“…….”
뒤에 있는 이로빈 역시 이게 승부를 가를 마지막 공이라는 걸 알 터였다. 중간중간 응원인지 견제인지 모를 말을 던져 대던 놈이 답지 않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부터가 그랬다.
난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열 번째 공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고, 배트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이곳에서는 모든 게 일 초 안에 가름이 난다. 방금 우리가 견딘 정적은 일 초보다는 길었다. 마치 몇 시간이 흐른 것만 같은 정적을 끝까지 견뎠다. 공이 내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고서야 눈을 감았다 떴다.
땀이 들어간 모양인지 눈이 온통 따끔거렸다. 힘이 빠진 손에서 떨어져 내린 배트가 바닥을 굴렀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간신히 뱉으며, 난 천천히 뒤돌았다.
“이로빈.”
이로빈은 말없이 날 보고 있었다. 난 이로빈과 눈을 마주친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원을 빌어야 했다.
“이번 네 생일은.”
“…….”
“내가 같이 보낼 수 있게 해 줘.”
일주일 뒤인 네 생일을 위해 여름부터 이 소원을 생각했어.
그러고는 줄곧 이 소원을 꺼낼 완벽한 타이밍을 기다려 왔지. 그 순간이 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이 순간을 그리고 상상했어.
근데 그거 알아?
“나만… 너랑 있을 수 있게 해 줘.”
이미 모든 건 완벽했던 것 같아. 내가 몰랐을 뿐.
***
“이로빈.”
“…….”
“…….”
“어? 불렀어?”
방금까지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걷던 일이 없었던 양 번쩍 고개를 든 이로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대답 대신 시선을 내렸다.
레스토랑에서 나온 순간부터 잡고 있던 손에 나란히 시선이 멎었다. 내 손에서 계산서를 뺏으려 하던 이로빈과 몸싸움을 하다 잡은 손인데, 놓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이로빈 때문에 산책로를 걸어 내려오는 내내 잡고 있었다.
이로빈이 예약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산 중턱에 있었는데, 그 덕분에 식사를 마치고 산 밑까지 이어진 산책로를 걸어 내려왔다. 이곳에 오기 위해 주성찬이 추천한 레스토랑을 포기했대도 손을 잡고 조용한 산책로를 걷는 것만으로 그럴 만한 가치는 있다고 느껴졌다.
비록 이렇게 손을 놓아야 하는 순간이 아쉽긴 했지만. 난 아쉬움을 숨기며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손. 놔야 할 것 같아서.”
조금만 더 걸으면 산책로가 끝나고 대신 번화가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아래가 가까워질수록 점차 선명해지는 소음들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이 달콤한 밤의 여유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더는 이렇게 손을 잡고 걸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지금까지는 밤인 데다 산책로가 유독 어두운 편이라 괜찮았지만, 곧 우리가 마주칠 번화가의 불빛들 아래에서는 손을 잡고 걷는 남자 둘의 모습이 지나치게 잘 보일 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로빈은 언제나처럼 내 예상을 깼다. 손이 다시 붙잡힌 것과 동시에 불쑥 질문이 넘어왔다.
“왜?”
“…어?”
“놓고 싶어?”
어찌 보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질문에는 말문이 막혔다. 그럴 리가 없음을 알고 있으면서 내게서 확답을 받겠다는 기세로 묻는 이로빈은 눈앞에 당면한 모든 문제를 잊어버리고 싶게 만든다.
“난 놓기 싫은데.”
웃지 않는 이로빈은 대개 물러서지 않는다. 난 이로빈이 고쳐 잡은 손을 보며, 오늘도 이로빈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한숨과도 같은 동조가 흘러 나갔다.
“…나도.”
“그럼 놓지 말자.”
명쾌하게 해답을 내린 이로빈이 그것으로 됐다는 듯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난 잠시 망설이다가 이로빈의 등을 잡아 세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걸렸다.
“차에 타서 다시 잡으면 되니까, 그때까지만 놓고 가자.”
이로빈이 멈칫하고는 날 향해 완전히 돌아섰다. 설명을 바라는 눈빛에 더는 침묵하기 어려웠다. 유쾌한 순간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피할 수는 없었다. 난 이로빈의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며 말을 이었다.
“…여기 밑에 번화가야. 사람도 많고.”
“알아. 그게 왜?”
“이상하게 볼 거야. 남자 둘이 손잡고 가면.”
“…….”
“술 취한 것도 아니고. 누가 봐도 멀쩡하잖아. 둘 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걸 걱정하게 될 줄은 몰랐다. 너와 이러고 걷는 건 꿈에서조차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이었고, 너 말고 다른 사람이랑은 그럴 일이 없으리라고 여겼으니까.
기적과도 같이 찾아온 이 순간이 현실이길 바라는 것만큼이나 널 이 현실에서 밀어내고 싶었다.
손가락으로 손등을 쓰는 건 날 위로하려는 이로빈만의 몸짓 같다. 난 손을 넘어 내 온몸을 감싸는 듯한 그 온기를 느끼며 시선을 올렸다. 눈을 맞춘 채로 이로빈이 조용히 물었다.
“신경 쓰여?”
“…어.”
죽을 것 같이 신경이 쓰였다. 나야 그렇다 쳐도, 한 번도 그런 눈빛을 받아 본 적 없는 네가 그 순간에 당황하고 상처받을까 봐. 네가 고작 이런 걸로 겁을 먹을 사람이 아니란 건 알지만, 내가 자꾸 겁이 났다.
꽉 찬 온기를 주던 손이 스르르 떨어져 나갔다.
“알았어. 그러자.”
어깨로 이로빈의 손이 올라왔다. 친한 친구한테 하듯 툭툭 치다가 어깨 끝을 살짝 힘주어 잡은 이로빈이 다시 걸었다.
가을에도 풀벌레는 울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나란히 걸어 내려왔다. 이로빈은 산책로의 끝이자 시작을 알리는 표지판 앞에 다다라서야 입을 열었다.
“근데 한결아.”
마주친 눈동자가 사뭇 진지했다.
“남자 둘이 손잡고 있다고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이 이상한 거지.”
“…….”
“우리가 이상한 건 아니잖아.”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닌 걸 아는데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알아.”
“그래. 너만 알면 난 됐어.”
꽉 막힌 것 같은 목소리를 모른 척하며 이로빈이 씩 웃었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나 걸었더니 그새 또 배고픈데.”
***
원 플러스 원 행사라며 이로빈이 굳이 하나를 넘긴 아이스크림은 생각보다도 더 달았다. 한참을 먹었는데 그대로인 듯 느껴지는 컵 속의 아이스크림을 내려다보는데 또 하나의 아이스크림 컵이 불쑥 시야에 끼어들었다.
툭툭 치는 손길은 덤이었다.
“야, 한결아.”
설마 더 먹으라고? 제발 아니길 바라며 고개를 들었지만 이로빈은 날 보고 있지 않았다. 늦은 시간에도 붐비는 거리의 한구석을 빤히 보고 있는 얼굴은 얼핏 정신이 팔려 보였다.
“나 잠깐만.”
“뭐?”
“아이스크림 들고 차에 먼저 가 있어! 거기로 바로 갈게!”
뭐라 말을 붙일 새도 없이 이로빈이 사라졌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상황 파악조차 쉽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발을 뗐지만 삼 초도 되지 않아 포기했다. 갑자기 뛰쳐나간 이유도 모르는데 이 수많은 상점 중 어디에 들어갔나 추측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
난 녹아서 손가락에 엉겨 붙기 시작한 내 아이스크림과 반 이상 비어 있는 이로빈의 아이스크림 컵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이로빈 말처럼 차에 가 있는 편이 나을 거였다.
“짜-잔.”
이로빈이 차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뱉은 소리였다. 난 핸드폰을 노려보던 눈을 들어 시계부터 확인했다. 이로빈이 말없이 사라진 지 삼십칠 분하고도 이십 초가 흐른 뒤였다. 이유는 몰라도 잔뜩 신나서 날 흘끔대는 얼굴은 개무시당한 다섯 번의 전화를 무색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어디 다녀온 거야?”
난 결국 잔소리를 하는 대신 이제는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아이스크림을 눈짓했다.
“아이스크림 다 녹았잖아.”
심지어 맛있게 먹던 얼굴을 생각하며 기다리는 동안 한 번 더 사 온 건데 그것마저도 다 녹아 없어졌다.
“어, 진짜네.”
헉, 하는 소리를 내며 아이스크림 컵을 심각하게 내려다보는 얼굴은 자신이 아이스크림을 먹다 말고 어딘가로 사라졌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도 잠깐, 이로빈이 대수롭잖은 듯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괜찮아.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어.”
왜 저렇게 신났을까. 뭔지는 몰라도 이로빈의 기분이 좋다는 건 알겠다. 덩달아 피식대며 시동을 켜다 말고 멈칫했다.
“…….”
“…….”
눈앞이 온통 노랬다.
“어때?”
기대감이 가득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눈을 깜빡였다. 세 번을 반복하고서야 방금 이로빈이 핸들 위로 얹은 게 꽃다발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옆 좌석에 바로 앉지 않고 고개만 빼꼼 들이밀었던 이유가 이것인 모양이었다. 꽃다발을 내게 건넨 이로빈이 보조석 문을 닫고 앉았다.
묻기도 전에 움직이기 시작한 입은 삼십 칠 분간 무엇을 했는지 낱낱이 고하고 있었다.
“학교 앞 꽃집에는 없어서 못 샀거든. 근데 아까 지나가는 사람이 이걸 들고 계시는 거야. 쫓아가서 이 주변에서 사신 거냐고 물어보니까 그렇다고 하시더라고. 물어 물어서 꽃집에 갔는데 인기가 많은 곳인지 사람이 많아서 좀 기다려야 했어.”
“…….”
“그래도 받으니까 생각보다 더 예뻐서 기분 좋더라.”
이로빈의 말처럼 꽃은 예뻤다.
언젠가 이로빈 친구의 경기장에 갔을 때 보았던 꽃다발처럼. 아니, 그 꽃다발을 안고 있던 이로빈처럼.
한참이나 그 꽃다발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눈이 마주친 이로빈이 웃었다.
그 얼굴을 보는데, 이상하게도 숨이 막혔다. 입을 닫았다 열기를 한참 반복하다가 겨우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
“이거… 나 주는 거야?”
다른 누구한테 주는 게 아니라, 나한테.
네가 나한테.
“그럼?”
“…….”
“너 말고 내가 누구한테 이 꽃을 줘.”
지금 네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흘리는 말이 당연했던 때가 있었다. 네가 꽃다발을 건넬 누군가를 만나는 상상을 하면 죽고 싶어지던 때. 그 누군가에 나를 그려 놓는 것도 못했던 때.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꽃, 우리 집 남자들한테는 로맨틱함의 상징이나 다름없어.”
“…….”
“아빠가 엄마랑 첫 데이트 한 날 선물한 꽃이기도 하고.”
내가 아는 모든 감정은 너한테서 배운 것이다. 기쁨도, 슬픔도, 그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감정들까지 전부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배웠다.
“…한결아.”
“…….”
“울라고 준 건 아니었는데.”
기쁨과 슬픔이 양극에 선 감정이 아니란 것. 그렇기에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 역시 너한테 배웠는데, 넌 이젠 그 이상의 감정이 있다는 것까지 가르쳐 주려고 한다.
누군가를 너무 사랑하면 머리가 하얗게 물들고, 온몸이 덜덜 떨리고, 볼이 축축하게 젖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널 껴안았다.
“이로빈.”
그 순간, 뱉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단어가 있다.
“사랑해.”
널 너무, 너무나도 사랑해.
어렸을 때부터 늘 이로빈한테서는 햇빛의 냄새가 났다. 갓 마른 옷에서나 날 법한, 곁에 있는 것만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그런 냄새.
“나도.”
난 처음으로 그 햇빛을 온전히 껴안았다. 젖은 날 감싸 안는 그 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내게만 내리쬐는 그 향을 마음 놓고 들이마셨다.
“근데 있잖아. 옷 벗기고, 땀 흘리고, 울고. 우리 첫 데이트 때 하지 말아야 할 짓은 다 한 것 같은데.”
“…….”
“괜찮겠지?”
손안의 해바라기가 널 향해 노랗게 웃었다.
“…응. 괜찮아.”
살 것 같았다.
***
아침을 함께하는 일이 잦아졌다.
“아….”
그 말인즉슨, 아침 수업이 없는 내가 감겨 오는 눈을 비비면서라도 부엌에 꾸역꾸역 나와 앉아 있는 횟수가 많아졌다는 뜻이다.
요새 저와 안 놀아 준다며 얼굴이 퉁퉁 부은 재균이의 말을 들어주는 게 아니었다. 세 시간도 잠들지 못한 눈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 감겼다 뜨였다 했다.
“개졸리네 진짜….”
그러지 않으면 늦은 밤 말고는 도통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자고 짠 것도 아니었는데, 마치 짠 것처럼 엇갈리는 남한결과 내 수업 스케줄을 생각하니 기가 찼다.
“…이로빈.”
“…엉?”
“그냥 들어가서 잘래?”
그래도 이렇게 걱정스럽게 묻는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면 얼마든 더 견딜 수 있었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고, 흐리게만 느껴지던 눈앞이 남한결의 주위만 조금 선명해졌다. 난 내 쪽으로 프렌치토스트가 담긴 접시를 밀어 주며 앉는 남한결을 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 수업 가고 나면 들어가서 푹 자지 뭐.”
걱정을 덜어 주려고 한 말인데, 내 말을 들은 남한결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눈썹 한쪽을 서서히 들어 올리는 얼굴은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뭘 잘못했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딱히 짚이는 게 없어서 직접 물어야만 했다.
“왜?”
“너 두 시간 뒤면 수업이잖아.”
그건 또 언제 기억하고 있었대.
아무래도 상대방의 시간표를 외운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난 남한결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포크를 들었다. 가운데가 폭신하게 들어가는 노란 식빵을 입에 넣고는 오버하며 연신 감탄사를 뱉었다.
“와, 정말 맛있다.”
“…….”
“진짜야. 이건 정말 둘이 먹다 둘이 죽어도….”
남한결은 말없이 가만히 날 보고 있기만 했다. ‘어디까지 하나 보자’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보니 방금 내가 수업을 땡땡이치려 한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의지가 없다는 건 확실히 느껴졌다.
저런 표정엔 답이 없다. 결국 난 대화의 주제를 돌리기를 포기하고는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였다.
“…나만 죽을 것 같지? 수업 안 갔다가는?”
“…수업 가라.”
“어. 그래….”
남들은 연애한다고 수업을 안 들어가는데, 나는 연애한다고 평소보다 더 수업을 꼬박꼬박 참석해야만 했다.
이러다가 장학금까지 받겠어, 아주….
쓸데없이 철저한 남한결을 힐끔대며 투덜대는 와중에 입 안의 토스트는 살살 녹았다. 접시 위의 세 조각을 해치운 것과 동시에 접시 하나가 더 나타났다. 토스트 세 조각이 더 올라와 있는 접시를 내민 당사자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이쯤은 예상했다는 듯이 여유롭게.
“너 배 안 찼잖아, 아직.”
“…….”
“…왜.”
어쩌면 우린 운명이 아닐까? 아니면 내가 방금 ‘조금만 더 먹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걸 어떻게 알았지?
“아냐. 잘 먹을게. 고마워.”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꾸 웃음이 실실 났다. 내가 아니라고 하고서도 한참을 더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날 보던 남한결의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
이미 식빵을 잘라서 만든 토스트를 정확히 두 조각으로 나눠 하나씩 입에 넣고 씹는 모습은 당장 토스트 광고에 나와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잘 정돈된 얼굴선이 무언가를 씹을 때만 슬쩍 어긋나는 게 귀여웠다. 특히 볼 부분만.
또 순식간에 해치운 접시까지 얹어 옆으로 밀어 두고서 남한결이 먹는 모습을 본격적으로 관찰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눈을 가리려 드는 손을 세 번쯤 치우고서야 눈가를 찡그린 남한결을 마주했다.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불퉁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그만 봐.”
“왜?”
“남이 밥 먹는 거 뭐 볼 게 있다고 그렇게 봐.”
그 와중에 귀는 또 빨개 가지고는. 귀엽게. 난 웃음을 참으며 심각하게 표정을 굳혔다.
“우리가 남이야?”
“…그게 아니라.”
“넌 남의 바지 지퍼도 막 내리고 그러는구나….”
“…….”
“큰일 날 애네… 이 기세면 곧 남의 팬티도… 읍.”
남한결의 인내심은 팬티까지인가 보다. 더 말을 못하게 하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쳐 입을 틀어막은 단단한 손에 숨이 막히기보다는 웃음이 났다.
내가 웃고 있다는 걸 눈치챈 남한결이 짜증을 내며 손을 뗐다. 테이블 위 접시를 정리해 싱크대 안으로 넣고 식탁 의자에 기대 둔 가방을 주워 드는 걸 보니 이어지는 놀림에 대한 대응 방식으로 집을 떠나기를 선택할 모양이었다.
내게 복수를 하기 위해 그런 선택을 했다면 아주 현명했다. 난 백 개는 더 대기하고 있는 놀림들을 황급히 삼킨 채로 뛰쳐나가 남한결의 허리를 껴안았다.
“야, 아직 시간 여유 있잖아!”
“놔.”
“알았어! 알았어! 그만 놀릴게. 어? 나 물어볼 거 있었는데 그것만 답해 주고 가!”
일단은 남한결이 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 뱉은 말인데, 그러고 보니 진짜 물어볼 게 있었다. 난 남한결이 멈칫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거실로 뛰어갔다.
어제 과제를 하며 꺼내 놨던 종이를 찾기 위해서였다. 오늘 물어볼 생각을 하며 꺼내둔 거였다. 난 소파 앞 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여 있는 종이를 들고는 남한결이 그걸 볼 수 있도록 펄럭이며 부엌으로 향했다. 한 손으로 남한결이 도망치지 못하게 팔뚝을 잡자 손이 모자랐다. 결국 함께 집어 온 펜의 뚜껑을 입술 사이에 문 채로 펜을 남한결에게 내밀었다.
내가 방금 식탁 위로 내려놓은 종이와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 남한결이 도통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길래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어제 너 기다리면서 너랑 내 일주일 스케줄을 정리해 봤거든? 그래야 앞으로 밖에서 데이트할 시간을 좀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지금은 너무 집에서만 보니까. 집도 좋긴 한데, 그래도 가끔은 너랑 밖에서도 놀고 싶단 말이야.”
차분하게 눈을 깜빡이는 남한결에게 종이를 눈짓했다.
“어쨌든! 그래서! 내가 적어 보긴 했는데, 너 카페 알바하는 시간 말고는 언제 뭘 하는지 확실히 몰라서 일단은 비워 놓기만 했어.”
“…….”
“내 스케줄은 다 적었고. 운동하는 시간까지.”
“…….”
“그러니까 이제 너만 적어 주면 돼.”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설명이라고 생각했는데 남한결은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
“…….”
한참이 지나서야 남한결이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놨다. 내 손가락 사이에서 펜을 가져가 하얀 종이 위로 고개를 기울이는 일련의 행위가 얌전하게 이어졌다. 집중한 얼굴을 보니 더는 가지 못하게 팔뚝을 잡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대신 그 옆에 바짝 다가서 붙은 나는 남한결이 일정한 속도로 종이 위로 그어 대고 있는 글자를 따라 눈을 움직였다.
“와….”
예상은 했지만, 남한결의 일주일은 정말 빈틈이 없었다.
과제, 과제, 운동, 도서관, 아르바이트, 봉사, 스터디, 조 발표, 과제, 과제.
어떤 때는 10분 단위로도 쪼개지는 스케줄을 보던 나는 감탄사부터 뱉었다.
“너 그동안 나한테 시간 어떻게 냈냐?”
적은 것들만 대충 봐도 1학기 때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텐데 내가 필요로 할 때면 늘 나타나던 남한결이 떠올랐다.
금요일 스케줄에 시선을 둔 채 손가락 사이의 펜을 휘휘 돌리던 남한결이 멈칫하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식탁 위에 종이를 댄 후 그 위로 몸을 기울인 탓인지 남한결의 얼굴과 펜 사이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저러다 얼굴에 닿겠다 싶어서 펜을 치워 주려다 말고 행동을 멈췄다.
“…그냥.”
“…….”
“마음만 먹으면… 시간이야 낼 수 있던데.”
휙 시선을 거두는 걸 보니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방금의 일이 없던 것처럼 남한결이 다시 펜을 놀리기 시작했으나 이번에는 내가 집중하기 어려웠다. 난 어색하게 눈썹을 긁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갈비뼈 부근이 간질거리는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여기.”
몇 분이 지나고, 마침표를 찍으며 펜을 내려놓은 남한결이 종이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난 시계부터 확인했다. 적어도 수업 30분 전에는 집을 나서는 남한결에게는 출발하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난 남한결이 내려놓은 가방을 들어서 내밀었다.
“땡큐. 이제 가도 돼. 안 잡을게.”
선심 쓰듯 건넨 말에 남한결이 픽 웃으며 가방을 건네받았다.
“간다.”
“어. 교수님 말 잘 듣고, 밥은 꼭 세 숟가락 이상 먹고.”
그 와중에도 씻지 않은 그릇들이 마음에 걸리는 듯 싱크대로 흘깃 시선을 주는 걸 확인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고무장갑을 꼈다.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제발 걱정하지 말고 가.”
훠이훠이 손까지 흔들고서야 남한결이 몸을 돌렸다. 싱크대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나는 방금 남한결의 볼에서 얼핏 무언가를 발견했다.
“어? 야. 잠시만.”
신발장 쪽으로 걸어가던 남한결이 멈칫하고는 뒤돌았다. 덕분에 긴가민가했던 것이 확실해졌다.
거실에 있는 남한결과 부엌에 있는 나 사이에 거리가 좀 있음에도 오른쪽 볼의 볼펜 자국은 선명히 보였다. 제 하얀 얼굴에 볼펜 자국이 묻은 것도 모른 채 무슨 일이냐고 묻는 듯한 눈빛을 마주하자 결국 웃음이 터졌다.
내가 아까 볼 근처에서 펜 돌려 댈 때부터 알아봤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지워 주고 싶은데, 깔끔한 애인을 안심시킨다고 고무장갑까지 끼고 있는 터라 그건 무리였다.
난 대신 손을 들어서 내 오른쪽 볼을 가리켰다. 말없이 가만히 날 보는 얼굴을 보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서, 볼을 툭툭 쳐 보이기까지 했다.
“여기.”
내 얼굴을 빤히 보던 남한결이 가방을 들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금?”
얼굴을 빨갛게 해서는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묻는데, 이번에는 내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언제 하게?”
아니, 귀엽긴 하지만, 그러고 온종일 돌아다닐 수는 없을 텐데?
그러나 그렇게 말할 틈은 없었다. 원래의 목적지인 신발장이 아니라 내 쪽으로 발걸음을 튼 남한결 때문이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남한결을 확인한 나는 영문 모를 행동에 의아해하다 말고 돌처럼 굳었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말랑하고도 따뜻한 것이 볼에 닿았다.
“…….”
“…….”
누가 보면 갑자기 뽀뽀를 당한 사람이 자기일 줄 알 정도로 새빨간 남한결의 얼굴을 본 난 침을 꿀꺽 삼켰다.
그제야 방금 남한결이 어떤 깜찍한 짓을 한 건지 실감이 났다. 폭발한 화산처럼 아래서부터 치고 올라오기 시작한 웃음을 꾹 참으며, 난 힘겹게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왼쪽 볼을 툭툭 쳤다.
“…한결아. 여기도.”
남한결이 대답 없이 날 가만히 보기만 해서 기어코 한 번 더 졸라야만 했다.
“왜. 여기는 안 돼?”
“…….”
“해 주면 내가 네 볼에 묻은 자국도 지워 주려 했는데.”
남한결이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막 깨달은 것처럼 황급히 뒤로 물러나기도 했다. 아, 씨발. 잘 하지도 않는 욕설을 뱉으며 제 양 볼을 더듬는 모습을 본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뱉었다.
말릴 새도 없이 남한결이 뛰쳐나갔다. 도어 록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린 난 신발장을 향해 소리부터 쳤다.
이러고 간다고?
“야! 어디 가! 뽀뽀 마저 해 주고 가!”
대답 대신 문이 대차게 닫히는 소리만 났다. 남한결은 당황하면 힘 조절을 못했다. 부서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문소리를 들으니 도망치는 남한결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따라가 볼까? 고무장갑부터 신나게 집어 던지려던 나는 흠칫하고는 고개를 내렸다. 그러고 보니 아래가 묘하게 불편했다.
하필 또 트레이닝복을 입은 탓에 더욱 도드라지는 형체를 한참 내려다보던 나는 결국 남한결이 뱉었던 것 같은 욕설을 뱉고 말았다.
“와… 씨발.”
겨우 뽀뽀 가지고 선다고?
***
이러라고 만들어진 게 아닐 애국가 몇 소절을 흥얼거리고, 막판에 하려고 미뤄 둔 논문 참고 자료를 읽고, 푸시업 백 개를 하고. 애초에 혼자 해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덕에 택한 방법은 나름대로 효과적이었다. 무엇보다 흥분을 일으킨 당사자가 눈앞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샤워까지 마치고 나니 아래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열기가 잠잠해졌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대충 털며 식탁 의자에 앉은 나는 아까 남한결이 자신의 일정을 적어 준 표를 바짝 끌어당겼다.
“와….”
다시 봐도 놀라운 스케줄이었다. 빡빡한 남한결의 일정과 내 일정이 합쳐진 일주일간의 일정표는 취침 시간 등의 으레 필요한 긴 시간 외에는 서로를 위해 낼 틈이 별로 없어 보였다.
그 덕분에 더 잘 보였다. 남한결이 그 바쁜 일정을 뚫고 날 만나기 위해 쪼갰을 시간의 흔적이.
“이래서 아침마다 깨웠구나.”
그것도 밥까지 해서는.
살펴보니 남한결의 스케줄이 빡빡한 날일수록 둘이 아침을 함께한 경우가 많았다. 나처럼 스케줄표를 작성할 생각까진 안 했더라도, 내가 수업이라도 빠지려 하면 도끼눈을 뜰 정도로 내 일정을 파악한 남한결이 시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냥.’
‘…….’
‘마음만 먹으면… 시간이야 낼 수 있던데.’
아까 그 말에서도, 이런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종이에서도 느껴지는 간지러운 그 애정을 되새기며 연필을 고쳐 잡았다.
화요일에 할 과제는 월요일 밤에 끝내고, 대신 그 과제를 하기로 했던 시간에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남한결을 데리러 가야겠다. 목요일에는 오후 수업을 땡땡이치고… 아니다. 저번에 보니까 내가 목요일 수업 있는 것도 알던데 분명 들킬 거야. 아니, 얜 대체 왜 이렇게 기억력이 좋지?
이십 분쯤 테트리스와 다름없이 일정을 끼워 맞추다 보니 그래도 얼추 함께할 시간이 만들어졌다. 남은 건 남한결에게 이 사실을 통보할 일뿐.
“됐어. 완벽해.”
애인과 나란히 아침을 먹고 뽀뽀까지 했음에도 아직 수업까지는 한 시간이 남아 있고, 이미 씻기까지 했으니 나름 완벽한 아침이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수업 자료가 있던 투명 파일에 일정표를 소중히 끼워 넣으려던 나는 우연히 시선이 닿은 수업 자료를 보고서야 잊고 있던 과제를 떠올렸다.
간단한 리서치만 필요한 과제라서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였다. 비록 귀찮긴 하지만. 방에서 노트북을 가져와 켰다.
듀이에 의한 체육 교육의 변화… 발달 교육 모형….
검색어를 입력하자마자 떠오르는 게시글들을 하나씩 클릭하고 필요한 정보들을 간략하게나마 메모하던 나는 멈칫하고는 고개를 올렸다. 교육 이론의 상세 정보를 확인하는 곳으로 연결된 링크가 열리지 않았다.
게시글의 다른 링크는 잘만 열리는데 비해 이 링크를 클릭하기만 하면 에러 메시지가 떴다.
뒤의 특수 문자 때문인가? url 주소에서 유독 거슬리는 문자 하나를 지우고 새로고침 버튼을 눌렀다.
“…어?”
나오라는 듀이의 이론은 안 나오고 대신 온통 살구색으로 가득한 사진들이 화면을 채웠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와, 요새도 이런 사이트가 있구나. 살구색이면 모든 게 비밀스럽고 또 야하게 느껴지던 어린 시절이면 놀랐겠지만, 지금은 그런 거에 놀라기엔 너무 나이를 먹었다. 심드렁하게 화면을 훑으며 창을 끄기 위해 커서를 옮기던 중이었다.
바라던 X 버튼에 가까워졌음에도 커서는 한참이나 움직이지 못했다. 화면의 한구석에 자리한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 때문이었다. 무선 마우스 위에 올려져 있는 손이 굳은듯 움직이지 않았다.
“…….”
난 아랫입술을 물며 나도 모르게 뒤를 살폈다. 조용한 집은 나 외에 아무도 없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남한결의 침실 쪽을 두 번이나 확인한 나는 마우스 왼쪽 부분에 힘을 실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바뀌었다.
방금까지는 작게만 보였던 영상이 좌우로 커졌고, 희미한 형체에 가깝던 두 사람이 선명해졌다. 영상이 자동 재생되기 시작했다. 방금 보았던 사진과 달리 옷을 갖춰 입고 있는 그들은 영상이 시작된 순간부터 서로를 물고 빠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둘은 남자였다. 사이좋게 옷을 벗기는 순간에도 익숙하게 키스를 이어 나가는 모습이나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모습이 그들이 프로임을 짐작하게 했다. 배경으로 깔린 세트장이나 마치 빙글빙글 도는 듯이 그들에게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카메라 앵글도 그랬다.
“하….”
난 소파에 등을 깊숙이 묻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쩌자고 이걸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끌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혹시나 해서 확인해 본 아래는 잠잠했다. 겨우 뽀뽀에 반응을 보이던 아까와는 사뭇 달랐다. 고개를 든 나는 노트북에서 새어 나오기 시작한 신음에 한 번 더 현관문을 확인했다.
남한결의 수업이 아직 마치지 않았음을 알고 혹시 몰라 노트북의 소리부터 줄였으나 괜히 불안했다.
그러는 사이에 화면 속 남자 둘은 자연스럽게 얽혀들었다. 나는 현관문 쪽을 흘끔대는 걸 멈추고 영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의도하고 찾아보진 않았더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영상을 통해서 남자와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한결도 경험이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이 이야기를 누구한테도 물을 수 없으니 어찌 보면 우리가 이 부분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한 방법일지 몰랐다. 비록 상업용으로 성을 파는 영상을 보는 게 자랑스럽진 못하대도.
교육용 영상이 있으면 좋을 텐데 아마 없겠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화면을 보던 난 눈을 깜박였다.
상체를 탈의한 노란 머리의 남자가 아래 남자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뭐, 저건….”
놀랍지 않다. 남한결과도 저기까진 해 봤다.
노란 머리의 남자의 입술이 목을 타고 내려와 판판한 가슴 사이로 사라진 순간엔 나도 모르게 얼굴을 조금 찡그리긴 했으나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머릿속에는 단계별로 행동이 차례차례 입력되고 있었다.
그래, 저렇게 바지 버튼을 푸는 것까지도 해 봤고. 다음이 중요한데….
이젠 남한결과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행동들이 나올 차례였다. 나도 모르게 긴장을 했는지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혼자 침을 삼키는 소리가 괜히 크게 들렸다.
누군가 자신들의 상업용 영상을 교육용으로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를 외국 남자 둘이 자연스럽게 몸을 겹치기 시작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은 솔직히 낯설었다. 심장이 정체 모를 불안감으로 쿵쿵거렸다. 난 애써 침착하려 애쓰며 화면을 응시했다.
‘흣, 으…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