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5권) (17/31)

“…….”

“…….”

둘 중 누구도 쉽게 입을 떼지 못하는 분위기는 우리가 같은 착각을 했다는 사실을 짚어 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알 수 없는 민망함에 서로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던 게 몇 분, 난 결국 남한결의 옆모습을 흘깃거리며 어색하게나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건….”

“…….”

“우리가 같은 걸 갖고 있어서 생긴 일이네.”

알고야 있었지만 이렇게 온몸으로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하던 도중에 멈춰서 이렇게 둘 다 당혹스러워할 줄도.

그건 별반 다르지 않은지 여전히 날 보지 못하는 남한결은 거푸 얼굴을 쓸기만 했다. 아까와 달리 술기운이 없는 얼굴은 어떻게 아까보다 더 빨개졌다. 잘 익은 사과 같은 얼굴이 하얗고 긴 손가락 사이로 사라졌다가 드러나는 것을 바라보던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넌 왜 그렇게 생각했어?”

“…뭘.”

“아니, 해 본 적도 없다며. 뭘 믿고 네가 위에서 날….”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가 눈치챌 정도로 미간을 찡그린 남한결 때문이었다.

“야, 좀….”

부탁도 명령도 아닌 애매한 투였다. 곤란한 표정으로 아래를 힐끔거리는 남한결을 따라 시선을 내리던 나는 멈칫하고는 고개를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어색하게 시선을 돌린 남한결이 아랫입술을 이로 꾹 물고 있었다.

왜 당연히 자신이 안 아플 것으로 생각했는지 물어본건데 대답 대신 갑자기 여기를 눈짓한다고? 난 방금 확인한 남한결 성기의 크기를 떠올리며 물었다.

“커서?”

상당히 직설적인데.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한결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미쳤냐? 손 치우라고.”

“아… 어.”

미친놈 보듯 하는 눈을 보고서야 비로소 남한결이 한 눈짓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내 손이 남한결의 드로어즈 위에 있었다. 난 군말 없이 손을 치우고 남한결을 가만히 응시했다.

팔을 일으켜 몸을 지탱한 남한결이 얼굴을 다시 벅벅 쓸었다. 민망함에 나온 행동임은 알겠으나 저러다가는 예쁜 얼굴에 흉이라도 질 것 같아서 불안했다. 내가 손을 뻗어 그러지 못하게 막은 것과 동시에 남한결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머뭇대는 투로 말이 넘어온 것도 동시였다.

“…꿈꿀 때마다.”

“꿈?”

“늘 내가 위에 있어서… 그냥… 자연스럽게.”

몇 초가 지나고서야 그게 아까 내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난 확인 사살하듯 한 번 더 물었다.

“우리가 자는 꿈을 꿀 때마다 네가 위였다?”

아닐 시에 칼같이 반박할 놈이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문 걸 보면 맞는 모양이었다.

조금 황당하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아예 터무니없진 않았다. 애초에 머리만 대면 자는 데다가 꿈을 꾸는 횟수가 손에 꼽는 나야 남한결과의 섹스는커녕 비슷한 상황도 꿈꿔 보지 못했지만, 만약 그랬다면 나도 당연히 내가 위에 있는 모습을 상상했겠지.

그나저나 쟤는 대체 꿈에서 뭘 하는 거야. 그러고 보면 우리가 키스한 날도 꿈인 줄 알았다고 했지.

꿈에서는 분명 더한 것도 했을 텐데 겨우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얼굴이 홍당무가 된 남한결을 보고 있자니 그 속에서 대체 뭘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졌다. 난 팔짱을 낀 채로 남한결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꿈에서는 내가 안 아파하든?”

잠시 고민하던 남한결이 목덜미를 문지르며 시선을 비스듬히 내렸다. 부끄럼 많은 주인 때문에 오늘도 터져 나갈 듯이 빨개진 귀를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꿈 이야기해 봤자 별 도움 안 될 것 같아.”

“왜?”

“…….”

“왜냐니까.”

내가 대답을 듣기 전까지 물러설 생각이 없는 걸 눈치챈 남한결이 혀로 입술을 쓸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표정을 보니 반쯤 포기한 듯했다.

“…네가 항상 좋아했으니까.”

이번에 할 말을 잃은 건 나였다. 정신을 차린 난 감탄부터 뱉었다.

“자신감 봐라.”

생각할수록 아주 자신감 넘치는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좋아해? 뭘 얼마나 잘했길래?”

남한결이 시선을 피하며 가까이 들이대는 내 얼굴을 쭉 밀어냈다. 난 무릎걸음으로 걸어 남한결을 침대 헤드 쪽으로 몰았다.

“바지 지퍼 내리는 속도가 심상치 않더니, 꿈에서 연습해서 그랬구나? 내가 안 아파하니까 안심하고 막 했어?”

“…아, 진짜. 그만하라고.”

“어떻게 했는데? 얼마나?”

당황하긴 한 모양인지, 날 밀어내는 손에 힘이 실려 있었다.

“좋았겠다? 어?”

한 번도 아쉬워해 본 적 없던 게 아쉬워진다. 그러게. 나도 네가 등장하는 야한 꿈 좀 꿀걸. 그러면 그런 영상 보고 남자와의 관계에 대해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할 필요도, 괜히 겁먹을 필요도 없었는데.

아쉬움 반, 궁금함 반, 놀리고 싶은 마음 한 스푼까지 담아 대답을 피하는 남한결의 얼굴을 쫓았다. 곧 내 가슴을 밀어내던 남한결의 손이 멈칫하는 걸 느끼고는 말을 멈췄다.

방금까지 부끄러워하던 게 없던 일인 양 씁쓸한 낯빛으로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남한결과 눈이 마주쳤다.

“…안 좋았어.”

“…어?”

“…….”

“왜?”

솔직히 의외였다. 방금까지 같은 상황이면 좋았겠다고 생각한 내가 민망해질 정도로.

그게 그대로 드러났을 내 얼굴을 본 남한결이 힘 빠진 웃음을 뱉었다. 동시에 내게로 손을 뻗어서 허벅지 위에 있던 내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워 놓고 이내 힘을 주어 잡는 행위는 마치 그렇게나마 내가 이 자리에 있음을 다시 확인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건 네가 아니잖아.”

아….

난 멍청한 신음을 뱉었다. 눈물로 흠뻑 젖은 채 남한결이 한 말들이 귀에서 메아리쳤다.

‘몰랐어.’

‘…….’

‘꿈인 줄 알았어. 꿈이 아니면… 꿈이 아니면 그렇게 너랑 있을 일이 없으니까. 난. 난….’

꿈이라고 생각한 순간에도, 아니라고 생각한 순간에도 넌 울었다. 내가 당장 눈앞에서 사라질까 봐 무서워하면서.

이런 순간에마저 불쑥 모습을 드러내고 마는 네 밤을 어떻게 감싸 안아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냥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엄지손가락으로 남한결의 손등을 쓸며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인지라 결심하는 데는 좀 시간이 걸렸다.

결심이 선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손을 계속 잡고 있던 덕분인지 남한결은 아까처럼 쓸쓸한 얼굴을 하진 않았다. 그 사실에 안심하며 남한결과 깍지 껴 잡은 손을 살살 흔들었다. 그러고는 물었다.

“한결아. 네가 할래?”

나에 맞춰 주며 같이 손을 흔들던 행위가 뚝 멎었다. 깜짝 놀라서 날 보는 얼굴에는 잠시 내가 무슨 말을 한 건가 싶었지만, 어차피 입 밖으로 뱉은 이상 무를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럴 생각도 없었고.

난 내가 진심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 남한결과 눈을 맞췄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경험 여부가 중요한가 싶어서.”

“…….”

“어차피 너나 나나 처음이니까. 그러니까 지금 민망함을 감수하면서 누가 박니 마니 이런 대화까지 하는 거고.”

“…….”

“그리고 무엇보다.”

“…….”

“이번엔 네가 꿈이 아님을 확실하게 알았으면 좋겠어.”

날 바라보는 까만 눈이 파도처럼 천천히 일렁였다. 끝없는 심연을 닮은 그 눈을 피하지 않으며, 난 언제가 되든 이 선택을 후회할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을 직감으로 알았다.

손을 힘주어 잡으며 농담을 할 여유가 생긴 것도 그래서고.

“뭐, 네가 아래에서 아파 보는 것도 확실히 꿈이 아니라고 느낄 수야 있겠지만.”

“…….”

“이번엔 그냥 내가 아프지 뭐. 설마 죽겠냐. 죽을 것같이 아프면 플라토닉 러브든 뭐든 알아보면 되고.”

씩 웃으며 시선을 올린 나는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남한결을 확인했다. 서로를 찾아 내려온 숨이 부딪치기 전에 남한결이 고개를 뒤로 빼고 나와 한 번 더 눈을 마주쳤다. 몸을 섞기에 앞서서 ‘괜찮냐’ 하고 마지막으로 물어 오는 거였다. 여기서 아니라고 하면 언제든 물러설 남한결을 알고 있어서 난 대답 대신 코를 맞댔다.

“으음… 흣….”

하던 도중 멈춰서 진지한 대화까지 했으니 다시 분위기를 살리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생각했으나 그건 내 착각이었다. 이전에도 충분히 격렬했던 키스가 무색하게, 보다 집요하고 농밀한 키스가 이어졌다.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실타래처럼 늘어나는 흔적을 본 게 어느덧 세 번째였고, 남한결의 숨이 거칠어지고 있음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건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침대 헤드 아래로 끌어 내린 남한결과 잠시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이 아쉬워서 나는 남한결의 목에 손을 둘렀다. 화답하듯 입을 맞춘 남한결이 깊숙이 혀를 넣었다.

그 와중에도 열띤 아래는 천천히 비벼지고 있었다. 서로 몸에 걸치고 있는 거라고는 드로어즈 한 장만이어서인지, 맨살과는 다른 감촉의 아래가 닿을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기본적으로 몸이 서늘한 편인 남한결이 그곳만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것도 흥분을 부추겼다.

삽입 없이 그저 천천히 아래를 비비고 있는 것뿐인데 남한결의 부푼 드로어즈 앞섶이 고환이나 기둥의 끝을 스칠 때마다 불쑥 사정감이 스쳤다.

“아….”

알 듯 말 듯 한 쾌감이 등을 타고 올랐다. 감질나는 감각은 사람을 애타게 했다. 난 내 목에 얼굴을 묻은 남한결의 귀를 찾아 고개를 비틀었다. 그러고는 속삭였다.

“그냥, 하, 다 벗겨 주면 안 돼?”

“…….”

“너도, 읏, 벗고….”

내가 들어도 흥분한 티가 나는 목소리였다. 내 목덜미를 집어삼킬 기세로 입술을 지분대던 남한결마저 멈칫했다. 잠시 기다렸지만 아래로 뻗어지는 손은 없었다.

사정이 코앞으로 다가옴을 느낀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손을 아래로 가져갔다. 드로어즈의 끝을 잡은 것과 동시에 손이 덥석 붙잡혔다.

“…가만히 있어. 벗겨 줄 테니까.”

처음 들어 보는 거친 목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웠다. 내 귓바퀴에 입을 바짝 갖다 대고 있는 남한결 때문이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귀를 따라 움직이는 혀가 질척이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귀를 내준 채로 난 남한결의 손을 따라서 홀린 듯 움직였다.

조금의 틈도 없이 겹쳐진 손은 몇 번을 헤매고서야 드로어즈의 끝을 잡아 아래로 내릴 수 있었다. 내내 갇혀 있던 성기가 배에 바짝 붙었다.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은 성기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올렸다.

남한결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맞춰 왔다. 농밀하게 혀를 섞다가도 꼭 뽀뽀처럼 입을 부딪쳐 오는 통에 쭙쭙, 하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난 남한결이 내 입술 옆에 묻은 침까지 빨아 먹으려 드는 틈을 타서 겨우 말을 걸었다.

“하, 한결, 아.”

“…….”

“마저, 내려 줘야지, 저거.”

허벅지 중간에 걸린 드로어즈 때문에 다리를 움직이기 힘들어서 한 말이었다. 드로어즈를 내리기는커녕 손을 올려 유두를 꼬집는 걸 보니 남한결은 듣지 못한 듯했다.

“불편, 흣, 하다고.”

한 번 더 말하기 위해서 남한결의 입술을 피했을 때였다. 입술 대신 볼에 입술을 묻은 남한결이 중얼거린 건.

“알아.”

뭘 안다는 건지 미처 묻기도 전에 거센 악력으로 턱이 붙잡혔다. 눈을 맞추고서야 남한결이 느릿하게나마 남은 설명을 했다.

“아니까 기다리라고.”

뭘 기다리라는 건지를 물으려던 입은 막혔다. 입 안의 여린 살을 쭉 빨다가도 입천장까지 부드럽게 살살 쓸어 대는 혀에 온통 정신이 없던 나는 허벅지를 힘주어 벌리는 손을 느끼고는 멈칫했다.

도통 키스에 집중하지 못하는 나를 느낀 듯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나처럼 아래를 내려다본 남한결이 아무렇지 않은 눈빛으로 나와 시선을 맞췄다. 내 허벅지 안쪽을 벌리고 있는 손바닥에 힘을 주며 날 똑바로 응시하는 남한결은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야해 보이는지를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다분히 의도를 가진 행동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아…!”

그 행동의 이유는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엉겁결에 손부터 뻗은 나는 손안에 가득 잡히는 결 좋은 머리칼을 느낄 새도 없이 목부터 뒤로 젖혔다.

성기가 뜨거운 점막에 닿은 것만으로 사정감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기둥을 느릿하게 핥아 올라가는 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다리는 남한결 때문에 움찔할 수조차 없었다. 복근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뻐근하게 긴장한 상체 근육을 느끼며 겨우 고개를 들어 확인한 아래에서는 남한결이 붉게 핏줄이 불거진 내 좆을 사탕처럼 빨고 있었다.

“윽, 야, 너….”

뭐라 말을 하려고 해도 그럴 때마다 더 힘을 주어 빨아 대는 통에 번번이 좌절되기만 했다. 흥분에 자꾸만 힘 조절을 잊은 내 손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한 하얀 얼굴은 제가 하고 싶은 행위가 그것뿐인 것처럼 굴었다.

가끔 성기를 빼낼 때만 길게 내리깐 속눈썹이 움찔대는 걸 지켜보던 난 손을 뻗어 남한결의 어깨를 잡았다. 아까 남겼던 쇄골의 울혈을 문지르며 이를 악물었다.

“너 자꾸, 아, 이럴….”

아까 한정식집 화장실에서 내가 화를 내는 순간까지 손을 치우지 않던 남한결을 생각하니 지금 뭘 할지가 눈에 보였다. 왜 내가 자신을 밀쳐 내지 못하게 무력을 쓰고 있는지도.

참을성 없는 성기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지만 아무리 어깨를 밀어도 남한결은 끄떡하지 않았다. 한술 더 떠서 내가 상체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다른 손으로 힘을 줘 내 가슴을 눌렀다.

그 손길이 남한결이 이미 진득하게 빨아 놓은 유두를 스친 순간에는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하아, 씨….”

욕설을 삼킨 것과 동시에 아래의 힘이 풀렸다. 참던 것을 분출하고 난 후에 찾아오는 기분 좋은 사정감을 느낄 새도 없이 고개부터 내렸다. 물고 있던 성기를 빼고는 조용히 시선을 올린 남한결과 눈이 마주쳤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성기를 물고 있기에 예상은 했지만, 정액을 한가득 머금었을 입은 말할 것도 없고 붉은 볼이며 속눈썹까지도 하얀 액이 점점이 묻었다.

지독하리만치 야한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방금 자신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도 모를 남한결이 덤덤히 설명을 덧붙였다.

“빼야지 좀 덜 아플 것 같아서.”

그거면 설명이 다 됐다는 듯 그제야 내 허벅지에 걸려 있던 드로어즈를 빼내 주는 남한결을 보던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시선은 저렇게 서고도 드로어즈가 멀쩡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남한결의 아래에 멎었다.

난 조심히 손을 뻗었다. 드로어즈를 침대 아래로 던지던 남한결의 시선이 곧장 내 얼굴로 향하는 걸 알았으나 멈출 생각은 없었다.

까만 드로어즈는 움푹 파인 장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막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의외로 남한결은 가만히 날 지켜보기만 했다.

“…….”

“…….”

난 드로어즈의 밴드를 따라 손을 굴리다가 이내 안으로 넣었다. 머리 위에서 들리는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졌다. 아래만 비빌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남한결의 성기는 그간 어떻게 참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뜨거웠다. 다른 손으로는 드로어즈를 내렸다.

이렇게 보는 순간마저 믿기지 않는 크기였으나 자세히 보니 남한결다운 예쁜 좆이었다. 색까지 옅은 탓에 내 손길을 따라 튀듯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핏줄만 아니라면 무식하게 큰 막대 사탕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런 좆이라면 물고 빨 수도 있겠다 싶었다. 신기한 마음으로 길고 쭉 뻗은 기둥을 쓸었다.

“아… 씨발.”

“읏!”

언제 들어도 낯선 욕설과 함께 갑자기 몸이 뒤로 처박혔다.

남한결이 손을 뻗어 내 몸을 지탱했다. 지탱했다기보다는 침대 헤드에 몰아붙였다. 맨등에 닿는 원목의 느낌이 낯설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힘이 풀린 손에서 놓칠 뻔한 기둥은 남한결로 인해 돌아왔다. 처음에는 성기 위에 있는 내 손을 떼려나 생각했는데, 그 반대였다. 제가 만져지고 싶은 대로 손을 움직이는 남한결은 반대편 손으로 내 성기를 만지고 있었다.

발군의 멀티태스킹 능력이었다. 감탄할 틈도 없이 신음부터 뱉어야 했다. 아직 정액이 묻어 있는 성기의 갈라진 끝을 문질대는 남한결의 입에서 무언가를 참는 것 같은 신음이 간헐적으로 흘렀다.

“아… 아!”

“…하.”

등에 닿은 침대 헤드가 날 압박했다. 앞도 뒤도 막힌 느낌이었다. 머리 위에 열어 둔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희미하게 뒷덜미를 간질였다. 겨울의 초입을 앞둔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는 방에서 벌거벗은 채 붙은 우리의 몸은 땀으로 미끌거렸다.

섹스하면서 옴짝달싹하지 못할 정도로 누군가의 품에 갇혀 있는 건 처음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한편으로는 낯설었다. 난 내게 바짝 붙은 남한결의 목에 키스하며 중얼거리듯이 부탁했다.

“한결아. 얼굴 좀 보여 주면 안 돼?”

“…….”

“얼굴… 보고 싶어.”

남한결은 목과 귀 사이를 입술로 지분대는 데에 정신이 팔려 대답도 안 했다. 대답 대신 입술이 살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남한결에게 밀려 침대 헤드에 바짝 붙은 허벅지는 만질 때마다 손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하….”

탁. 탁. 쉬지 않는 손길에 사정감이 찾아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남한결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것과 동시에 나와 남한결의 허벅지 사이로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정액이 흘렀다. 엇갈리는 숨을 보건대 몇 초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사정한 것 같았다.

“하… 하아….”

“…하.”

나른한 숨소리가 흐르고 우리는 서로의 등을 껴안은 채로 잠시 있었다. 난 긴장이 남은 남한결의 어깨에서 우리가 할 일이 남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입이 바싹 마르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안 할 수도 없었다. 난 준비물부터 확인했다.

“콘돔은?”

“…….”

“또 없어?”

아니, 그걸 왜 안 갖고 다니지? 시도 때도 없이 세우면서?

“…두 번째 서랍에.”

오케이. 잔소리하지 않아도 됨에 안심하며 붙어 있는 몸을 떼 침대 옆 협탁의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열을 맞춰 정리된 물품들 속에서 익숙한 브랜드명의 박스가 눈에 띄었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 웃으며 남한결을 돌아봤다.

“한동안 콘돔 모자랄 일은 없겠다, 야.”

웃으면서도 일단 세 개를 꺼냈다. 남한결에게 건네다 말고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었다.

“야, 근데 하기 전에 약속 하나만 하자.”

나른함이 묻어나는 눈매로 건네받은 콘돔을 가만히 응시하던 남한결의 시선이 돌아왔다. 난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남한결에게 당부했다.

“내가 넣을 수 있는 건 네 좆까지만이야.”

“…….”

“다른 거 넣지 말라고.”

“…다른 걸 왜 넣어?”

눈가를 설핏 찡그리며 진지하게 묻는 얼굴에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몰라… 넣던데….

성기를 받아 내는 것만으로도 앓는 소리를 내는 남자의 밑으로 들어 밀어지던 팔뚝을 생각하자 저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냐. 모르면 됐다.”

남한결의 표정을 보니 팔뚝을 아래에 넣을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걱정되긴 했다. 난 잠시 남한결 손에 들린 콘돔을 보다가 조금 시선을 내리면 보이는 남한결의 좆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저걸 한 번에….

“아냐.”

난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했다.

잠시 고민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난 어색함을 참기 위하여 오히려 빠르게 움직였다.

“야. 나 하나만 줘 봐.”

우선 남한결의 손에서 콘돔 하나를 가져와 뜯었다. 그러고는 검지와 중지를 붙여 그 위에 씌웠다. 다리를 조금 더 벌려 앉기 위해 허벅지에 힘을 줬다. 아까부터 느꼈지만, 이렇게 다리를 벌리는 동작을 많이 해 본 적이 없어서 낯설었다. 끙끙대며 자세를 잡고서야 겨우 무릎을 세워 앉은 채로 다리를 벌릴 수 있었다.

“잠깐만.”

“…….”

“나 시간 좀 줘.”

아무리 나라도 이 상황에서는 남한결의 얼굴을 확인하기가 민망했다. 고개를 떨군 나는 일단은 오늘의 목표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 아픔을 최대한 줄이는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견딜 만한 충격부터 견딜 수 없는 충격까지 가야 하니까 우선은 손가락부터 하나하나 넣어 보자. 할 수 있어.

“아….”

다짐하듯 들이민 손가락은 그러나 한 번도 자의로 만져 본 적 없는 그곳 앞에서 멈칫대길 반복했다. 자그마치 세 번이나 움찔대며 손가락을 다시 가져오는 행위를 하고 나니 더욱더 민망해졌다.

아씨… 어떡하지.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남한결 쪽을 흘깃 확인했을 때였다.

“야. 이거 각도가….”

“…이로빈.”

“어?”

“도와줄게.”

뭐라 대답을 하기 전에 손이 붙들렸다. 미끄러운 고무가 손가락에서 빠져나가는 걸 느낀 나는 멍하니 고개를 올렸다.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것과 동시에 몸이 침대 헤드 쪽으로 휙 돌려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주 보고 있던 남한결은 어느새 내 등 뒤에 있었다. 몸을 바짝 붙였는지 등을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남한결의 맨가슴이 닿는 느낌이 선명했다.

그 사실에 놀랄 틈조차 없었다. 난 눈을 크게 뜨고는 앞으로 몸을 숙였다.

“아, 윽…!”

다물린 좁은 안을 헤집고 들어온 차가운 손가락이 안을 쿡 찔렀다. 생경한 느낌이었다. 불쑥 침입한 손가락을 밀어내려고 움직이는 주름이 느껴졌다.

남한결이라고 그걸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그래서인지 손가락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빠져나갔다. 그제야 숨을 뱉을 수 있게 된 내가 뒤를 돌아보려던 순간, 또 한 번의 충격이 찾아왔다.

“…아, 흐으…!”

“…….”

“…윽….”

심지어 아까보다 한층 더 깊은 삽입이었다. 두 개인지 세 개인지도 알 수 없는 손가락이 안을 꾹꾹 눌러 댈 때마다 정의할 수 없는 불편함과 아릿함이 날 괴롭혔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앞으로 무너지려 했지만 뒤에서 내 배를 감싸고 있는 남한결의 손 때문에 불가능했다.

아까와 달리 손가락은 안에 길게 머물렀다. 마치 내가 적응할 시간이라도 주려는 것처럼. 내가 겨우 눈을 깜빡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남한결은 배를 받친 손을 내려 성기를 쥐었다.

“하아, 하….”

“아파?”

어깨를 따라 입을 맞추는지 멀지 않은 곳에서 입술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죽어 있던 성기가 남한결의 손길에 반응하기 시작하는 걸 내려다보며, 난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멈추면 다시는 이 단계까지 오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였다.

세 번째 삽입이었다. 입구까지는 다소 수월하던 전과 달리 처음부터 뻑뻑함을 느끼게 하는 손가락은 어림잡아도 세 개는 넘는 것 같았다. 난 이를 악물며 자꾸만 힘이 들어가는 아래를 풀기 위해 천천히 숨을 골랐다. 지탱할 곳을 찾는 몸은 자꾸만 뒤로 쏠렸다. 견디지 못하고 머리를 젖힐 때마다 남한결이 내 귀 뒤를 빨았다.

“…하윽, 하아, 읏, 하….”

신음조차 한 번에 뱉을 수 없었다. 배 속을 휘젓는 손가락은 어느새 내 안이 제집인 것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볼을 스쳐 가슴팍으로 내려가는 느낌이 생생했다.

무뎌진 건지, 아니면 아예 감각이 없는 건지 헷갈려질 때쯤이 되어서야 손가락이 모두 빠져나갔다.

“하… 하아….”

난 남한결에게 머리를 기댄 자세 그대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앞이 흐려졌다가 선명해졌다가를 반복했다.

저항할 힘이 없는 몸이 부드럽게 돌아갔다. 아까처럼 날 자신과 마주 보게 한 남한결이 상을 주듯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 땀이 흐른 자리까지도 거리낌 없이 입술을 가져다 대는 통에 결국 내 입술에 내려앉은 남한결의 입술에서는 온갖 맛이 났다.

입맞춤에 흐물흐물 녹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남한결이 콘돔을 하나 더 뜯었다. 처음에 내가 손가락에 끼웠던 콘돔과 방금 남한결이 내 뒤를 쑤신 콘돔을 제외하고 남은 한 개였다.

언제 섰는지 모를 남한결의 성기 위로 씌워질 콘돔이기도 했다. 남한결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손끝을 움츠렸다. 방금 남한결이 내 손에 넘긴 고무의 느낌이 익숙한 듯 낯설었다.

곧 시선이 마주쳤고, 나 자신도 낯설 정도의 잔뜩 긁힌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이거.”

“응.”

“…….”

“이번엔 네가 도와줘야지.”

제 성기 위로 콘돔을 얹어 놓는 스스럼없는 모습은 도와 달라는 말을 한 것치고는 혼자서도 충분히 잘할 수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그런데도 남한결은 굳이 날 시킬 모양이었다. 조용히 다가와 내 귓바퀴에 혀를 굴리며 남한결이 다정하게 명령했다.

“끝까지 씌워.”

알아서 해 보라는 투였다. 그 말을 끝으로 남한결이 정말 손을 뗐기에 잔뜩 성난 성기 위에는 내 손만이 올라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쥐었다 펴 보던 난 곧 손을 움직였다. 먼저 귀두 끝에 얹어진 고무를 잡았다.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빈틈없이 고무 위를 잡아 요도 구멍에 맞췄다.

슬쩍 고개를 들어 남한결을 확인했다. 내가 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는지 눈을 내리깐 남한결과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무표정한 것처럼 보이던 눈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날 향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남한결이 이내 피식댔다.

“왜 그렇게 보는데.”

“…….”

“다 하지도 않아 놓고.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것처럼.”

시키는 대로 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 빤히 보는 게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장난기 어린 음성이 칭찬이라도 해 줄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기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 예상처럼 입술이 가볍게 부딪쳤다.

남의 좆에 처음 콘돔까지 씌워 주는 대가치고는 짜지만, 예쁘니 봐준다.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고개를 내렸다. 고무 양쪽을 잡고는 음경을 따라 살살 내리며 남한결에게 물었다.

“근데 이거 사이즈 뭐냐?”

어쩔 수 없이 손에 스치는 남한결의 성기가 조금의 틈조차 없이 고무를 소화하는 걸 보고 있자니 생긴 궁금증이었다. 별생각 없이 물은 건데 남한결은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든 나는 어느새 코앞에 다가와 있는 남한결을 느끼고 숨을 가볍게 멈췄다.

등을 타고 올라간 손은 어느새 목덜미를 가볍게 주물렀다. 손이 큰 놈이라 그런지 목을 거의 손아귀에 쥐고도 엄지손가락으로 볼을 쓸 수가 있었다. 조심스럽다고 보기 힘든 움직임은 어딘가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말을 하면 입술이 닿을 거리만을 두고 남한결이 고개를 기울였다. 느릿하면서도 장난기 어린 말투는 목덜미를 제멋대로 만지작대는 손길과 닮은 데가 있었다.

“넌 그게 궁금해?”

답을 들을 생각도 없었던 듯 틈도 두지 않고 찾아온 입술에는 손이 움찔댔다. 남한결의 다른 손이 내 손 위를 덮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눈치챘다. 고무를 쥔 손가락들을 감싸고 움직이지 못하게 힘을 주는 손길은 명백히 무언가를 보채 왔다.

“난 다른 게 궁금한데.”

“읏….”

“끝까지 씌우랬잖아. 왜 말을 안 들어.”

평소보다 한 톤이 낮은 목소리는 낯설어서 꼭 남한결이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 난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손을 움직였다. 손바닥이 음낭에 닿고서야 남한결이 보상이라도 주듯 내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눈 깜짝할 사이에 침대에 누웠다. 잠을 잘 때가 아닌 이상 별로 본 적 없는 천장이나 목 뒤에 닿는 푹신한 베개는 내가 정자세로 누워 있음을 일깨웠다. 남한결의 손에 붙들린 발목부터 온몸이 간지러워졌다. 복사뼈부터 시작하여 천천히 다리의 선을 따라 입을 맞추는 남한결 때문이었다. 허벅지 안 여린 살에 축축한 입술이 닿았을 때는 몸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바짝 긴장한 허벅지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려 했다.

“응, 괜찮아….”

허벅지를 힘주어 벌리며 남한결이 날 달래듯 중얼거렸다. 위로 올린 한 손은 아까처럼 유두를 비트는 중이었다.

“아… 흐으….”

온몸을 기어 다니는 듯한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몸이라도 비틀라치면 어떻게 알고 무거운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마치 상체를 일으키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몇 분쯤 그걸 당하고 있으려니 이골이 났다. 난 더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가슴 위에 있는 남한결의 손을 힘주어 쳐 냈다. 그러고는 성기 위 음모에 입을 맞추는 남한결의 뒷머리를 잡아 위로 끌어 올렸다.

“같이 해. 같이….”

“…음.”

“혼자 하면 재미없잖아.”

순순히 끌려와 준 남한결은 대신 마운팅하는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천조차 없는 아래가 비벼지는 느낌이 적나라했다. 구멍의 입구를 슬쩍슬쩍 건드리는 남한결의 성기가 생생히 느껴졌다. 콘돔을 씌울 때부터 눈치는 챘지만 참고 있는 게 용한 수준이었다.

이런데도 안 넣고 참는다고?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려는 시도는 곧장 입술로 돌진한 남한결 때문에 실패했다. 오늘 몇 번이고 집요하게 맞댔기 때문인지 입술이 부었다. 무겁게 느껴지는 아랫입술을 남한결이 허겁지겁 정신없이 빨았다.

“아… 으….”

“…….”

“하… 한결아, 아.”

발기한 두 성기가 비벼지는 소리가 야했다. 가끔 서로의 허벅지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턱, 턱,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읏… 흐읏… 흣….”

잠시 입술이 떨어진 순간마저 정체를 알 수 없는 끙끙거림이 흘렀다. 흐느낌에 가까운 신음은 내 귀로 들어도 낯설었다. 오늘 밤만 해도 족히 세 번은 빼낸 아래는 또 절정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남한결에게 성기를 잡힌 순간 강한 사정감이 들었다.

“윽…!”

정액을 분출하느라 꺼덕이는 성기를 놓지 않은 탓에 남한결의 손을 타고 흐르는 하얀 액들이 선명히 보였다. 아까와 달리 남한결은 그걸 삼키지 않았다. 대신 손을 내려 내 엉덩이를 좌우로 벌렸다. 미끌미끌할 만도 한데 엉덩이를 타고 내려가 입구를 가볍게 비비는 손은 제가 갈 곳을 아는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몇 번을 더 그렇게 입구를 맴돌았을까. 천천히 개수를 늘리던 아까와 달리 손가락 세 개가 순식간에 뒤를 뚫었다.

허억… 숨을 들이쉬는 내 얼굴을 혀로 핥으며 남한결이 말했다.

“아프면… 말해. 멈출 테니까.”

다정한 투였으나 아래를 찌걱찌걱 쑤시는 손을 느끼며 들으니 별로 신빙성이 없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 놓고 귓불을 문 남한결이 대답을 종용했다.

“응?”

“…….”

“이로빈.”

“…아으… 응… 알았, 어….”

아까 한 차례 풀어 둔 탓인지 이물감은 덜했지만 내벽을 가볍게 훑는 손가락에 적응하는 건게 쉽지 않았다. 자꾸 손가락을 뱉어 낼 것 같아서 아래에 힘을 안 주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생각보다 힘들었다.

같은 걸 느꼈는지 손가락을 빼낸 남한결이 상체를 옆으로 숙였다. 아까 콘돔을 빼낸 서랍 쪽으로 몸을 기울인 남한결이 곧 무언가를 꺼내 손에 덜었다.

고개를 들어 확인할 틈도 없이 손이 내려가고 이내 익숙한 향이 코를 파고들었다. 난 헐떡거리면서도 고개를 들었다.

“네… 로션이야?”

남한결 목덜미에서 나던 향보단 덜하지만 같은 향인 건 어슴푸레 알 수 있었다. 아까보다 한층 수월하게 손가락이 안을 파고들었다. 딴 데 정신이 팔려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물감이 한결 덜했다.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남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지금은 이거밖에 없어서.”

“…….”

“싫어? 딴 거… 찾아볼까?”

중간중간 끊기는 목소리는 남한결이 흥분을 참고 있다고 눈치채게끔 했다. 내가 그러라 하면 정말 하던 행위를 멈추고 그것부터 찾을 작정인지 안을 휘젓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점차 느려졌다. 난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남한결과 눈을 맞췄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좋아.”

“…….”

“나 네 냄새만 맡아도… 읏… 서니까. 요새는.”

대답은 그만하면 된 것 같았다. 볼에 진하게 키스한 남한결의 두 손이 내 골반을 단단히 붙잡았다. 처음에만 해도 서늘했던 남한결의 손은 숨 쉴 틈 없이 붙어먹은 내 온도가 옮아서인지 제법 미지근했다.

난 허리에 힘을 줬다. 그러지 않으면 벌써 움찔대기 시작한 허리가 튀어 나갈 것만 같았다. 혹시 몰라서 발뒤꿈치에 힘을 줬다. 남한결을 발로 차기라도 할까 봐서.

“아ㅇ…!”

나름의 노력을 했는데도 남한결이 들어올 때는 온몸이 떨렸다. 두께부터가 다르니 고통도 남다르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직접 겪는 건 또 달랐다. 나름 속도를 조절하면서도 좁은 구멍을 어떻게든 비집어 들어오려는 성기가 벅찼다. 숨이 턱 끝까지 찼다.

남한결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아, 로빈아, 너무….”

“…….”

“너무 조여.”

골반을 놓치지 않으려는지 한 번 더 손에 힘을 준 남한결의 입에서는 듬성듬성 잘린 신음이 튀어나왔다. 볼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땀방울에서도 좋은 향이 난다는 게 이상했다.

“못 움직일 것… 같은데.”

“…….”

“힘 좀 빼 봐. 응?”

파고든 성기를 어떻게든 흡수하려 수축하는 아래를 느끼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남한결 역시 엄청난 압력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참을성 있게 엉덩이를 토닥이는 손길이 다정하다는 것도.

근데 그걸 다 알면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난 아랫입술을 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힘, 주고, 있는 거 아니야.”

“…아.”

“아, 니라고… 윽….”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리가 덜덜 떨렸다.

“아… 흐으….”

이젠 목소리까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허벅지가 떨리지 않도록 꽉 붙잡은 남한결이 내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들이댔다.

“이로빈. 괜찮아?”

너라면 괜찮겠냐… 그만한 걸 한 번도 넣어 본 적 없는 곳에 넣었는데.

“나 봐봐. 응?”

나야말로 남한결의 얼굴을 보고 싶은데 억울했다. 눈이라도 마주치고 키스라도 받으면 조금이라도 이 고통이 나아지지 않을까 싶은데 얼굴을 보기는커녕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모든 신경이 아래에만 쏠린 것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허리가 푹푹 꺾이려 했다. 자꾸만 꽂히는 통증 때문에 도저히 아래를 볼 수가 없었다.

숨을 백 번쯤 몰아쉬고서야 조금 진정이 됐다. 내 대답을 듣기 위해 모든 행위를 멈춘 남한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난 남한결의 목 뒤에 손을 걸었다. 이래야만 그나마 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괜… 괜찮으니까.”

“…….”

“일단, 움, 직여… 봐.”

그래야 고통이 좀 덜하지 않을까 싶어서 한 말이었다. 마치 처음에는 고통만 안기던 행위도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무뎌진 감각을 통해 다른 느낌이 들게 되는 것처럼.

한참을 기다려도 남한결이 움직이질 않아서 결국 눈을 떠야 했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얼굴로도 남한결은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럽게 날 보고 있었다. 웃어 주고 싶은데 웃음이 안 나서 대신 다리 사이에 있는 남한결의 허리에 발을 둘렀다. 자세가 깊어진 탓인지 두 배의 고통이 느껴졌지만 이를 악물고는 참아 냈다.

“빨리….”

“…….”

“그래야… 흐으… 좀 나을 것 같아서 그래.”

남한결이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난 주문을 걸 듯이 중얼거렸다.

“어차피 다 넣었으니까… 좀만 견디면 되는 거잖아… 그치….”

이상할 정도로 긴 침묵이었다. 남한결의 침묵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데가 있었다. 목에 힘을 주어 고개를 든 나는 그러자마자 남한결의 곤란한 얼굴을 발견했다.

그럴 이유가 뭐가 있을지 생각해 보던 나는 방금 내가 한 말을 떠올렸다.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눈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는 발견했다. 아직 안으로 다 들어가지도 못한 기둥을.

“…다 넣은 게 아니었어?”

떨리는 목소리에는 긍정의 침묵만이 돌아왔다. 난 털썩 누워 손등으로 눈을 덮었다.

“아… 미친.”

돌겠다, 진짜….

“뺄게, 잠시만.”

억지로 흥분을 가라앉힌 듯이 침착한 목소리가 들린 것과 동시에 안에 있던 성기가 꿈틀대며 움직였다. 잠시 잊고 있던 고통이 또 한 번 찾아왔다. 난 급하게 남한결의 어깨부터 잡아 세웠다.

“아윽…!”

“…….”

“안… 안 돼….”

더 넣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빼지도 못하고 애매하게 멈춰 선 남한결을 향해 고개를 마구 저어 보였다. 마음이 급했다.

“지금은 그것도 아파.”

“…….”

“빼도… 아프… 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남한결이 어색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 무해한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래, 진정하자. 평소보다 몇 배나 되는 자기 암시를 걸고서야 입을 뗄 수 있었다. 난 결연함을 담아 말했다.

“일단… 끝까지….”

“…….”

“끝까지 넣어 봐. 내가 참아… 참아 볼게.”

이게 이렇게까지 결연할 일인가 싶지만 방금 느낀 고통의 강도를 볼 때는 이보다 더한 다짐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난 두려움을 덜기 위해 남한결의 얼굴을 더듬거리며 내 쪽으로 끌어왔다. 익숙한 향은 확실히 이 모든 걸 조금 더 견디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남한결의 관자놀이 부근에 입술을 대고는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아까 남한결이 나가려 할 때 느낀 고통이 사라졌을 때쯤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과 닿기 위해 상체를 일으킨 내 등 뒤에 손을 넣은 채로 중얼거리는 말들이 귓가에 쏙쏙 박혔다.

“이로빈.”

“어.”

“이번엔 그냥….”

“…하….”

“한 번에 넣을게.”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서야 남한결이 움직였다. 한 번에 넣겠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아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속도로 안이 꽉 찼다.

“윽….”

“아… 우윽….”

남한결이 천천히 아래서부터 위로 쳐올리기 시작했다. 내벽의 주름 하나하나를 긁듯이 다가온 성기가 닿을 수 있는 곳 끝까지 닿았다가 이내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하.”

“하… 흣… 하악…!”

처음에만 해도 안을 긁는 것 같던 성기는 이제 안을 강하게 쳐 대고 있었다. 속도까지 점점 빨라지는 통에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남한결이 움직일 때마다 허벅지끼리 닿는 소리가 외설적으로 귓가를 울렸다.

“읏….”

“…….”

“하아, 흑, 하, 읏….”

“…하아.”

몸이 주체하지 못하고 떨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남한결에게 말을 걸려 했지만 그마저 쉽지 않았다. 남한결의 등을 감싸 안은 손이 부르르 떨렸다. 난 말로 하지 못하는 의사 표현을 하려 남한결의 어깨에 머리를 쿵쿵 박아 댔다.

연이어 세 번을 박았으나 미친 듯이 아래를 넘나드는 속도는 줄어들질 않았다.

목 너머에 잔뜩 힘을 줘 긁은 목소리를 뱉었다.

“아, 흑.”

“…….”

“제발….”

“…….”

“제발, 남한결….”

애원하다시피하자 남한결이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함께 흔들리던 몸이 멈추니 떨고 있는 게 나 혼자뿐인 게 명확해졌다.

“…이로빈?”

얼굴을 확인하려는지 어깨에 머리를 기댄 나를 떼려고 하는 몸짓에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태로는 기댈 곳이라도 없으면 몸이 어떻게 무너질지 장담할 수 없었다.

침을 수없이 삼키고서야 겨우 한마디를 했다.

“한결, 아, 나….”

“어.”

“아, 윽, 너무 아파….”

살면서 진짜 이렇게 아팠던 적이 없었다. 이렇게 아픈 행위를 심지어 자처했다니. 거짓말 하나도 보태지 않고 죽을 만큼 아팠다. 조각난 발목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했을 때도 이 정도로 아프진 않았다.

“…너 울어?”

남한결의 당황한 목소리를 듣고는 내가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몰랐다. 지금 얼굴을 묻은 어깨가 축축한 것도 남한결의 땀이거나 여태껏 남한결의 손에 한껏 싸질러 댄 정액 때문인 줄 알았지.

“흐윽….”

눈을 감아도 떠도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시야가 온통 흐렸다. 떨리는 몸은 이 와중에본능적으로 덜 아픈 곳을 찾기 위해 움직이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번번이 느껴지는 묵직한 살덩이는 내 아래에 수많은 감각이 존재함을 일깨웠다.

한마디로, 환장할 지경이었다.

“이로빈.”

내가 고통으로 말을 삼킬수록 남한결은 더더욱 마음이 급해지는 것 같았다. 조금 전의 조심스러운 손길은 어디 가고 이마에 흩어진 내 머리카락까지 헤치며 얼굴을 보려 노력하는 통에 아주 정신이 없었다.

“로빈아.”

급기야는 날 번쩍 들어 올리기까지 했다. 심지어 자기 성기를 그대로 꽂아 둔 채로 날 제 허벅지 위에 올렸다.

덜렁 허공으로 들린 몸에 이상함을 느끼기도 전에, 푹 아래를 찌른 남한결의 성기가 아까와는 다른 각도로 날 압박해 왔다. 허억….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게 숨을 삼켜야만 했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흐느낌과도 같은 문장이 흘러 나갔다.

“이, 미친, 놈아….”

웬만하면 욕은 안 하려 했는데 아무리 그렇대도 이건 심했다. 이제 통제를 잃은 눈은 아주 눈물을 흩뿌려 댔다. 볼이 축축하다 못해 젖었다.

“그렇게 하면, 더, 끄윽, 더 아프, 아….”

말조차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사실 제대로 다물지도 못했다. 입을 다무는 것마저 힘이 필요함을 처음 알았기에.

아니, 대체 이 행위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가 있단 말인가. 몸이 쪼개질 것처럼 아픈 것 말고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는데.

“흐윽….”

“…….”

“…끄….”

몇 분을 그렇게 더 있었을까. 짐승의 울음이나 다름없는 소리가 잦아들고서야 남한결이 내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은 채로 남한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도 아파?”

“…….”

“내려 줘도 돼?”

“…….”

“아니면 이대로 있을까? 응? 로빈아, 말해줘.”

말하는 걸 들으니 이제야 이 자세가 어떤 고통을 주는지를 조금이나마 눈치챈 듯했다. 여러모로 처음이기에 가능한 실수였다.

그 와중에 저게 귀엽다고 생각하는 나야말로 진짜 답이 없었다. 난 코를 한 번 훌쩍이고는 남한결의 어깨 위로 턱을 올렸다.

“잠시… 만….”

“…….”

“내가 말할 때까진 움직이지 말고. 절대….”

“…알았어.”

남한결이 뒤를 뚫고 들어올 때마다 들리던 희미한 스프링 소리, 땀투성이의 몸끼리 부딪치며 나는 젖은 소리, 다른 온도를 가진 살이 맞닿는 소리가 잦아든 곳에는 비슷한 위치에서 나란히 뛰는 심장 소리만이 남았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난 이 엉망진창인 밤에서 내가 잡아낼 수 있는 유일한 아쉬움을 입 밖으로 냈다.

“…네가 진짜 좀만 더 작아도 좋았을 텐데.”

3초 뒤 헛웃음이 들렸고, 그 웃음이 사라지기 전에 남한결의 손이 내 머리를 마구 흩뜨렸다.

넣는 것도 대장정이었는데, 빼는 거라고 다르지 않았다. 최대한 아프지 않게 빼려고 용을 쓰는 남한결이나 최대한 힘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나나 곡예와 다름없는 일을 몇 분이나 더 하고서야 몸을 분리했다.

침대 헤드와는 반대편으로 머리를 대고 누워 창문 너머의 밤을 구경했다. 남한결이 억지로 덮어 준 이불을 살피고는 고개를 올렸다. 베개를 들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던 남한결과 눈이 마주쳤다.

내 목 밑으로 베개를 넣어 주려 했던 모양이었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곧 머리가 부드럽게 들리고 푹신한 베개가 목 뒤를 받쳤다. 난 한참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남한결.”

긁힌 목소리는 무시했다.

“나….”

사실 아까부터 남한결한테 하고 싶던 말이 있었다. 말하라는 듯 가만히 바라보는 남한결을 보니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억울함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너무 배고픈데.”

그러고 보니까 특갈비탕도 제대로 못 먹었다. 이 짓 하려고 달려온 6시간이 아깝지는 않은데, 성욕이 해결된 후에는 식욕이 존재를 어필했다.

“우리 같이 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면 안될까…?”

잠시 할 말을 잃은 남한결은 한참이 지나도 반응이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난 결국 이불을 젖혔다. 싫다면 혼자라도 끓여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상체를 일으키는 것까지는 어찌 했는데, 침대 밑으로 발을 디디려는 순간 온몸이 휘청했다. 황급히 팔꿈치가 붙잡혔다. 갑자기 휘청한 나를 잡아 준 남한결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못했다.

이게 뭐라고 되게 서럽다. 난 울컥 올라오는 말을 간절하게 뱉었다.

“미안한데 나 라면 좀 끓여 주면 안 되냐, 한결아….”

***

물이 흐르는 소리, 도마 위 칼질하는 소리, 보글보글 끓는 소리. 라면을 끓이는 것치고는 들리는 소리가 다양했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소파에 누워 있던 몸을 움직였다.

소파에 얼굴을 얹고 확인한 부엌에서는 남한결이 뒷모습을 보인 채 요리에 매진하는 중이었다. 언제 또 옷은 찾아 입었는지, 씻은 후 제대로 말리지 못해 젖은 뒷머리만 아니라면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흠.”

웬일로 오늘은 편해 보이는 바지 입었네.

아래서부터 천천히 그 모습을 훑어보자니 새삼 몇 시간 전만 해도 남한결과 알몸으로 붙어 있었던 일이 꿈같이 느껴졌다.

“…….”

잊을 때쯤 한 번씩 저릿하게 다가오는 아래의 고통이 아니라면 말이지.

그래도 생각보다는 후유증이 없었다. 아마 내가 낯 뜨거울 정도로 극진했던 남한결의 간호 때문일 거였다. 뜨거운 물을 받은 욕조에 날 밀어 넣어 곳곳을 씻기고, 꾸벅꾸벅 조는 동안 머리를 말려 주고, 라면 끓일 동안 쉬고 있으라며 이불에 돌돌 말아 소파에 옮겨 놓기까지 한 남한결 덕분에 내가 한 거라고는 가만히 누워 있던 일밖에 없었다.

자세를 바꾸며 조금만 앓는 소리를 내도 곧장 내게 집중하는 통에 오랜만에 머리에 묻은 샴푸를 미처 다 씻어 내지 못한 채 벌컥 화장실 문부터 열어젖히는 남한결을 볼 수 있었다. 이번엔 아래에 수건을 두를 정신조차 없었는지 물을 뚝뚝 흘리며 내게 다가온 남한결 덕분에 아주 좋은 구경을 했다.

원체 허둥대는 일이 없는 놈이라 그런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좋았다. 아, 생각하다 보니 또 보고 싶네.

근데 그러려면 또 이렇게 아파야겠지? 잠시 생각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본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라면도 못 끓이고 누워 있는 이 상황에서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래도 언제까지고 이렇게 누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어나긴 해야 했다. 슬슬 지겹기도 했고. 난 남한결에게 부탁해서 보고 있던 사진 앨범을 앞의 테이블에 놓아두고 천천히 소파 아래로 내려섰다.

아까 남한결의 침대에서 내려오다 균형을 잃을 뻔한 일을 생각하며 조심스레 발을 내렸다. 제자리에 똑바로 균형을 잡고 서기까지 꽤 걸렸다. 조심히 움직여서인지 아까처럼 다리가 풀리진 않았다. 러그에 닿은 발뒤꿈치가 살짝 땅기는 걸 빼고는 괜찮았다. 나는 제자리에 선 채로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발을 뗐다.

“…어?”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멀쩡한데?

쪽팔리게 눈물을 줄줄 뿌려 댄 것에 비해 원래의 몸 상태로 금방 돌아온 게 신기했다. 신나서 부엌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다음 순간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허윽….”

취소. 취소.

걸으니 배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갔고, 그게 아래에도 자극을 준 모양이었다. 다행히 입을 바로 틀어막아서인지 남한결은 듣지 못했다.

그래도 지극한 남한결의 보살핌 덕분인지 고통이 오래가진 않았다. 제자리에 선 채로 몸을 이리저리 구부려 보던 나는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물론 조금 어기적거리는 걸음이긴 했지만 요리에 집중한 남한결의 옆으로 다가서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라면을 얼마나 맛있게 끓여 주려고?”

뒤에서 끌어안듯 남한결의 허리에 손을 두르며 어깨에 턱을 올린 것과 동시에 남한결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뭐야.”

뭐긴 뭐야. 이 집에 갑자기 자기를 끌어안을 사람이 나 말고 누가 또 있다고. 난 픽 웃으며 허리에 두르고 있던 손을 올려 남한결의 배를 슥슥 문질렀다. 아까 눈으로 직접 확인했던 군살 하나 없는 배의 근육이 내 손길에 움찔하는 게 기분 좋았다.

“애인인데요.”

말없이 눈을 깜박이던 남한결이 갑자기 불을 확인하는 척 분주히 몸을 움직였다.

“다 되면 부른다 했는데 왜….”

말을 돌리며 딴청을 피우는 걸 보니 또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겨우 애인이라는 소리에 부끄러워하면서도 할 건 다 하는 남한결에게 슬슬 익숙해지기 시작한 나는 오늘도 그걸 못 본 척 지나가 주기로 했다.

“심심해.”

“…….”

“그리고 배고파.”

사실 그 두 개보다는 당장 누워서 잠들고 싶은 욕구가 더 컸는데 그건 말하지 않았다. 라면 끓여 달라는 소리에 아닌 새벽부터 온갖 세간살이를 다 내놓고 뚱땅거리는 남한결이 좀 힘 빠질 수도 있겠다 싶어서.

남한결 티셔츠의 어깨 부분에 얼굴을 묻으며 하품을 삼켰다. 감겨 오는 눈에 힘을 주며 슬쩍 고개를 빼 확인한 곳에는 왜 라면이 3분 요리가 되지 못했는지를 설명해 주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양파, 피망, 파프리카, 호박, 버섯 등 알록달록 여러 가지 색깔들의 야채 옆에는 하얀 계란도 두 개 올라가 있었다. 잘게 다진 야채들을 보니 아까부터 왜 도맛소리가 들렸는지 알 만했다.

마침 손질을 다 끝내고 안이 움푹 파인 프라이팬 안으로 야채를 던져 넣고 있던 남한결의 옆얼굴을 보며 물었다.

“나 볶음밥도 해 주게?”

“어. 그러니까 좀만 참아.”

“…….”

“햄도 넣어 줄게. 너 그거 좋아하잖아.”

배고프다는 나를 달랠 당근이라도 제시하는 것처럼 햄을 넣어 주겠다고 말하는 얼굴이 나름 진지했다. 큽. 남한결이 모르게 웃음을 삼킨 나는 표정을 정리하고는 태연한 척 말했다.

“스팸으로 넣어 줘.”

슬쩍 날 돌아본 남한결이 곧 대수롭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스팸이 있었나 보다.

볶음밥만 하는 줄 알았는데 라면도 끓이는 모양이었다. 끓기 시작하는 빨간 물을 확인한 남한결이 볶음밥 재료 옆에 있던 면을 집어 들었다. 눈으로 남한결의 행동을 좇으며 재료들을 살피던 나는 아까는 보지 못했던 초록색의 재료 하나를 발견하고 슬쩍 남한결을 돌아봤다.

불쑥 장난기가 솟은 건 순간이었다. 난 목을 가다듬고는 초록색의 재료를 가져와 쥐었다.

“한결아.”

라면을 끓이랴 볶음밥을 하랴 바쁜 와중에 남한결의 고개가 날 향했다. 난 그 앞으로 손안의 재료를 내밀며 물었다.

“이것도 넣는 거야?”

눈을 끔벅거리던 남한결이 내가 쥐고 있는 초록색의 고추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하며 지켜본 보람이 없게, 남한결이 별 반응 없이 고개를 돌렸다.

“아, 어. 저번에 보니까 너 매운 거 잘 먹길래.”

아무래도 크기가 너무 다르다 보니 유추는커녕 장난도 못 알아챈 것 같았다. 포기하지 못한 나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한 번 더 말했다.

“내가 오늘은 못 넣겠다고 했잖아.”

그제야 남한결이 멈칫하고는 날 돌아봤다.

“무슨 소리야. 뭘 못 넣….”

당최 내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투였다. 물음표가 가득 뜬 얼굴을 본 나는 씩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고추를 흔들었다.

남한결의 눈이 멍하니 나와 손에 들린 고추를 번갈아 훑었다.

하나, 둘, 셋.

“아….”

남한결이 휙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복근 위에 얹힌 내 손도 냉정하게 내팽개쳤다. 내게서 최대한 멀어져야겠다고 생각한 듯 상대적으로 먼 라면 냄비 쪽으로 성큼 다가서서 날 필사적으로 외면하는 남한결의 목덜미가 온통 새빨갰다.

“돌았나, 진짜….”

갑자기 깜빡이 없이 이야기를 꺼낸 나에 대한 원망과, 그에 곧이곧대로 반응하는 자신에 대한 억울함이 반씩 섞여 있는 듯한 중얼거림까지 들으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 알았어, 알았어. 안 해.”

세상에서 남한결 놀리는 게 제일 재밌다.

지금 이 순간엔 그 말을 해 봤자 역효과만 날 것이기에 대신 웃으며 남한결의 등을 와락 끌어안았다. 잠은 어느덧 멀리 달아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눈앞에 노릇노릇한 볶음밥과 라면이 놓였다. 신나서 수저통을 뒤적이던 나는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위로 들었다.

물컵을 내려놓던 남한결의 시선이 내 상체 언저리에 꽂혔다. 어딘가 마뜩잖은 눈빛을 확인한 나는 남한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렸다.

“…그러고 먹게?”

무슨 말인가 했더니, 식탁에 앉고서야 내가 상체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게 거슬린 모양이었다. 입을 달싹이는 걸 봐서는 또 그놈의 옷 입으란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난 재빠르게 선수를 쳤다.

“쓸려서 못 입겠어.”

“…….”

“누가 너무 빨아 놔서.”

지어낸 말은 아니었다. 남한결이 부엌으로 가는 걸 확인하자마자 소파에서 벗어던져야만 했던 티셔츠를 떠올린 나는 어쩔 거냐는 눈으로 남한결을 응시했다.

여차하면 바지도 벗을 거라고 협박해야지. 다행히도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남한결이 시선을 거뒀다.

“…천천히 먹어. 체하지 않게.”

말을 돌리며 따로 그릇에 담은 피클까지 밀어 주는 걸 보니 방금의 일은 더 꺼내 봤자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유독 이 문제에 관해서는 얻어 내기가 힘들던 자유를 거머쥔 채로 의기양양하게 식탁을 훑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난 남한결한테 수저를 건네며 물었다.

“근데 넌 언제부터 요리를 잘했어?”

건네받은 수저를 내려놓던 남한결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따로 드라이하지 않은 앞머리가 움직임에 따라 작게 흔들렸다.

“…잘하는 건 아냐.”

“야, 무슨. 여태까지 네가 해 준 것들 다 맛있었어.”

“그건 네가 워낙 잘 먹으니까 그런 거고.”

“뭐, 아예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래도. 내가 음식을 못하는 편이라 그런지 너처럼 뚝딱뚝딱 요리 잘하는 사람 보면 신기하더라고.”

“…….”

“자연스럽게 시작한 거야? 아니면 뭐, 다른 이유라도?”

궁금한 마음에 질문이 길어졌다. 그걸 듣고서야 정말 내가 궁금해하는 걸 눈치챘는지 남한결이 말을 멈추고 눈을 깜빡였다. 마치 무언가를 기억해 내려는 것처럼.

“그냥.”

고민하는 얼굴을 한 것치고는 싱거운 대답이었다. 그래도 덤덤한 말투로나마 몇 마디가 더 넘어왔다.

“미국에 있을 때 혼자 있던 시간이 많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시작했던 것 같은데.”

“…….”

“엄마는 원래도 요리를 잘 안 하시는 편인 데다가 워낙 바쁘셨고, 집에 누가 와서 차려 주는 건 싫었고, 사 먹는 건 한계가 있고.”

“…….”

“참다가 가끔 먹고 싶은 게 생기면 어설프게나마 해 먹던 게 습관이 됐나 봐.”

몇 마디만 들어도 외로운 이야기인데 말을 한 남한결은 정작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런데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어머님까지 출근하고 아무도 없는 큰 집에서 혼자 밥을 해 먹었을, 지금보다 키도 덩치도 작았을 아이를. 그 등에 얹혀 있었을 외로움이나 그리움 같은 것들이.

라면을 먹자는 말에 이렇게 꼭 밥까지 같이 챙겨 주는 거나, 함께 밥을 먹을 때 식사가 먼저 끝나도 상대방이 다 먹기 전까지 자리를 지키는 행동들 또한 그때의 외로움이 남한결의 안에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겠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입만 달싹이고 있는데 고개를 든 남한결과 눈이 마주쳤다. 남한결이 아주 느리게, 그리고 멋쩍은 듯이 웃었다.

“그래도… 잘된 것 같은데.”

“…….”

“거창한 건 아니라도 너한테 이런 것도 해 줄 수 있고.”

그 안쓰럽고도 사랑스러운 얼굴에는 위로보다는 다른 걸 건네고 싶었다. 예를 들어 사랑 같은 거. 손에 잡힐 정도로 선명하고 깊은.

난 왼손을 뻗어 남한결의 오른손을 잡았다.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웃음을 지으며 잡힌 손을 장난스레 흔들었다.

“그러게. 나 진짜 복 받았다.”

두 손을 잡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손으로는 남한결이 해 준 음식을 아주 맛있게 먹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요리까지 잘하면 어떡해? 어?”

“…….”

“거창하지 않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 이거 봐. 막 입에 넣기만 해도 살살 녹는….”

남한결의 눈을 보며, 과장해서 입 안으로 볶음밥을 마구 떠 넣던 행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

난 방금 퉁퉁 부은 입술 안으로 다 들어가지 못하고 식탁보 위로 떨어진 밥알들을 멍하니 응시했다. 아니, 이게 여기서 이렇게 방해가 된다고?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동시였다. 서서히 고개를 들자마자 손에 턱을 괸 채로 날 건너보는 장난기 어린 얼굴을 마주했다.

“눈은 다 부어서.”

식탁을 넘어온 서늘한 손이 아직 열이 남은 눈두덩이를 감쌌다. 난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입술엔 감각도 없는 것 같고.”

입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밥알들은 죄다 식탁 위로 흘린 줄 알았는데, 몇 개는 입술 옆에 붙어 있었던 모양이다. 입술 옆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남한결이 웃음기 어린 한숨을 쉬었다.

“널 진짜 어떻게 하냐.”

보지 않아도 남한결의 웃는 얼굴이 눈에 그려졌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따라 옮는 미소와 함께, 난 진심을 담아 대꾸했다.

“뭘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더 사랑해 주면 되지.”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서 슬며시 눈을 떴다.

“…….”

“…….”

그 어떤 다정함이 뚝뚝 흐르는 행위도 지금 남한결이 날 보고 있는 눈빛에 비하지 못할 거였다. 오래 보고 있는 것만으로 녹아내릴 듯한 눈을 하고서 남한결이 턱에 대고 있던 손을 뗐다.

“지금보다 어떻게 더….”

질문이라고 보기에는 모호한 문장이었다.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남한결이 웃었다. 눈이 둥글게 휘어지고 볼이 쑥 올라가는, 평생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미소가 달콤했다.

“노력해 볼게.”

짜릿하고도 독점적인 감각이 심장에 피를 필요 이상으로 제공했다.

새벽 세 시, 집 안의 불이라고는 부엌 식탁 위 달린 조명이 다인 밤, 그 말을 하는 내내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남한결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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