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31)

지잉- 지잉-

눈을 뜨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몸부터 돌려 진동하는 핸드폰을 쥐었다. 혹시나 해서 돌아본 곳에는 이로빈이 정신없이 잠에 빠져 있었다. 잘 때만 해도 내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은 어느새 머리 위에서 이상한 각도로 널브러졌다. 가끔 작게 입맛을 다시는 것 외에는 미동도 없는 몸으로 봐서는 잠에서 깨긴커녕 내가 일어났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슬그머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조금의 소리도 나지 않게 방문을 닫고서야 핸드폰에 나눠 줄 관심이 생겼다.

화면 위에 뜨는 낯선 번호는 내가 평소라면 연락할 리 없는 사람에게서 온 전화임을 눈치채게 했다. 무시하려다 말고 현관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경계심을 무너뜨렸다.

“남한결 씨 맞으시죠?”

“아… 네.”

혹시나 했더니 맞았다. 문을 열자마자 핸드폰을 귀에 댄 택배 기사를 마주했고, 핸드폰의 진동이 멎었다. 쓱 내 얼굴을 확인한 기사가 건네는 패드에 사인하고 기사의 옆구리에 끼어 있던 네모난 박스를 건네받았다.

“감사합니다.”

인사와 함께 문을 닫았다. 혹시나 해서 박스에 적힌 모델명을 확인했다. 주문 내용을 들여다보지 않고도 확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델명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얼마 전 구입한 작업용 노트북과 같은 모델이기 때문에.

…뭐. 내가 직접 써 보고 좋아서 산 거니까. 굳이 같은 노트북을 쓰고 싶어서 그런 거라기보다는.

그 누구도 묻지 않는데 구구절절 변명을 대는 건 최근에 생긴 버릇이었다. 할 때마다 민망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난 노트북을 소파 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민망함은 세수로 씻어 내기로 했다.

“…….”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확인한 거실의 시계는 9시를 알리고 있었다. 익숙지 않은 기상 시간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짚어 보게 했다.

새벽 내내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창밖으로 동이 터 오는 걸 확인하고서야 기절하듯 잠이 든 게 어느덧 사흘째였다. 정확히는 이로빈이 베개를 옆구리에 낀 채 당당히 내 침대로 기어들어 오기 시작한 순간부터였다.

섹스했던 날은 그렇다 쳐도 매일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고 감는 건 감히 꿈꿔 보지도 못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통나무처럼 뻣뻣이 굳은 나와 달리 이로빈은 태연하기만 했다.

‘침대를 길들여야겠어.’

베개를 팡팡 손으로 치면서 하는 말은 도통 뭔 소린지 이해도 안 됐다. 이해를 마치기 전에 허리가 붙들렸고, 정신을 차리니 이로빈의 옆에 누워 있었다. 반년을 넘게 쓴 침대가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지긴 또 처음이었다. 팔베개를 해 주려 했는지 내 머리통을 제 어깨에 둔 채로 끙끙대던 이로빈은 결국 내 허리를 감싸는 것으로 혼자 타협을 본 듯했다.

‘결아. 자자.’

잠기운이 잔뜩 묻은 웅얼거림을 끝으로 이내 색색대는 숨소리가 들렸다. 머리만 대면 자는 버릇은 내 침대에서도 예외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그 머리통을 내려다본 게 사흘 전의 일인데, 오늘 새벽까지도 그러고 있었다.

사흘 동안 열 시간을 채 자지 못했다는 사실은 무시하고도 남았다. 이로빈과 함께 누워 잘 수 있다는 그 현실이 내겐 그 어떤 꿈보다도 꿈같이 느껴졌기에.

잠자는 사람 특유의 미열까지 더해진 이로빈의 몸은 늘 따끈따끈했다. 딱히 다른 난로가 필요 없을 정도로.

“…….”

늘 추위를 많이 탄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건 끌어안을 네가 없어서 그런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말로는 차마 뱉을 수 없는 마음들이 소리 없는 눈처럼 쌓인다. 그래도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한때는 뭉쳐 있기만 했던 눈덩이를 이제는 조금 떼어 너한테 던질 수 있게 되었다는 거겠지.

눈이 마주치면 뽀뽀를 하고, 스스럼없이 날 껴안고 웃는 너를 보면서도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널 깨워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과 조금이라도 더 단잠에 빠져들게 두고 싶은 마음이 싸우는 지금처럼.

어느 쪽을 선택하든 당장 널 보고 싶은 건 같았다. 창을 넘어 거실 바닥까지도 들어서기 시작한 햇빛을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발에 무언가가 밟히는 느낌과 함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소파 밑으로 삐죽 나온 종이가 익숙했다.

“…….”

얼마 전 이로빈이 스케줄을 적어 달라며 내민 종이였다. 그때만 해도 뻣뻣했던 종이가 어느새 구깃구깃했다. 종이에는 이로빈과 내 스케줄이 정신없이 얽혀 있었다. 중간중간 적힌 삐뚤빼뚤한 파란 글씨는 어제 파란색의 펜을 쥔 이로빈이 골똘한 얼굴로 뭘 하고 있었던 건지를 눈치채게 했다.

큰 동그라미가 그려진 부분은 각자의 스케줄이 비었을 때였다.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언제나 안 좋은 부분보다는 좋은 부분에 집중할 줄 아는 이로빈이 유독 크게 그려 놓은 동그라미를 보고 있자니 생각이 많아졌다.

지잉- 지잉-

진동 소리가 또 한번의 상념을 깨웠다.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고는 아까 닫고 나온 내 방문을 확인했다. 방문 너머의 이로빈이 겨우 통화 소리에 깰 것 같진 않으나, 그래도 조심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오늘은 이로빈이 나 외의 다른 것들로 인해 잠이 깨지 않길 바랐다.

종이를 테이블 위에 조심히 올려 둔 채로 걸음을 옮겼다. 베란다의 문을 닫으며 핸드폰을 귀에 댔다. 바깥 공기와 만난 숨이 보일 듯 말 듯 한 입김을 만들어 냈다.

“어. 왜.”

- 너 오늘 출근이지? 언제 오냐?

당연하다는 듯 묻는 목소리는 아직 잠에서 덜 깬 것 같았다. 사장이 되면 달라질 줄 알았더니 카페 오픈보다는 잠이 더 고픈 철없는 사장에게 걸기에는 너무 큰 기대였던 모양이다.

잔소리도 귀찮아서 그냥 사실만 지적했다.

“나 오늘 근무 뺀다고 했잖아.”

- …그랬냐? 기억이 안 나는데.

“스케줄표 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길어진다 싶더니 김재경의 민망해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 어, 진짜네. 야, 심지어 크게 적어 놨었다. ‘남싸가지 토요일엔 안 봐도 됨’이라고.

“…….”

- 아, 좀 이해해 줘라. 이번 주 내내 진형이 나가고 새로 온 애 교육하느라 정신없었던 거 알잖아.

“알겠으니까 끊어.”

- 야야, 잠깐만!

황급히 붙잡는 목소리를 들으니 한숨이 절로 났다.

어제 카페 부엌 빌려준 것만 아니었으면 진작 끊고도 남았다, 진짜.

“뭔데, 또.”

- 로빈훗 있잖아. 오늘 뭐 딱히 할 거 있대?

김재경 입에서 나오기에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난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핸드폰을 든 손을 바꿨다.

“그게 형이랑 뭔 상관인데.”

- 아니, 상관 안 하려 했는데 메신저 알림에 뜨잖아.

“…….”

- 오늘 생일이던데?

“…….”

- 시간 나면 오후에 카페 좀 들르라고 해. 뭐라도 해 주게. 아예 모르고 있었던 거면 모르겠지만 알고 있는데 그냥 지나가기는 좀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되레 할 말을 잃었다.

메신저에 알림이 떴다는 얘기는 김재경이 이로빈 번호를 가지고 의민데 그건 어떻게 된 일이며, 보기와 달리 제 것 외에는 관심도 없는 김재경이 이상할 정도의 오지랖을 부리는 이유는 또 뭔가.

삼십 초쯤 생각하다 보니 묻지 않고도 답을 알 수 있었다. 사람 좋아하고 잘 치대는 이로빈이라면 가능하게 하고도 남을 일이라는 걸.

어이없으면서도 결코 싫어할 수는 없었다. 그건 내가 사랑하는 걔의 모습 중 하나였으니까. 그래도 김재경이 나보다 이로빈을 더 챙기려 드는 건 싫어서 유치하게 훼방을 놓기로 했다.

“됐어.”

- 뭐가 ‘됐어’야. 물어봤어?

“바쁘다고.”

- 아니, 물어보지도 않고….

“오픈 준비 안 하냐? 이럴 거면 굳이 카페 위층에 사는 이유가 뭔데?”

- …아침부터 싸가지 엄청나네, 드럽게 어린 새끼가. 일어난다, 일어나. 가만 보면 누가 사장인지를 모르겠다니까.

투덜거림과 함께 김재경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끙차, 하는 소리를 몇 번 더 들어 주며 몸을 돌려 집 안을 확인했다.

베란다로 나오기 전과 똑같은 풍경은 아직도 이로빈이 깨지 않았음을 일러주었다. 굳게 닫힌 방문을 확인한 시선은 자연스레 거실의 테이블 위로 향했다.

멀리서도 보이는 파란색의 동그라미는 잊고 있던 걸 일깨웠다.

- 끊어, 인마.

조용히 김재경을 불렀다.

“형.”

- 왜.

“새로운 알바생 뽑고 알바 공고 내렸어?”

- 왜. 그것 가지고도 잔소리하려고? 아이고, 남 사장님. 아주 그냥 카페를 사시지 그래요? 보잘것없는 소인까지 세트로 하셔서 사 가세요.”

피식 웃음이 흘렀다. 김재경의 비아냥 때문이라기보다는, 저 엉망진창의 스케줄표를 본 지 십 분도 되지 않아 이렇게 충동적인 결정을 내리고 만 내가 웃겨서.

“아니, 그게 아니라. 공고 내리지 말라고. 괜찮은 사람 있으면 이력서도 킵해 두고.”

- …응? 왜?

“일단 그렇게 해 줘.”

아무리 그래도 겨우 잠에서 깬 사장에게 전화로 사표를 낼 수는 없기에 대충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김재경한테는 이로빈과 어떻게 됐는지 말도 못 했다.

나 자신도 믿기지 않고, 차마 엄두가 안 나서 내내 미뤘던 말을 이제야 할 마음이 들었다.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하니 스러지는 입김을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났다.

“만나서 설명해 줄게.”

긴 이야기가 되겠지만, 사실 누군가의 이름 하나면 설명은 끝나니까.

- 아니, 갑자기 뭔….

“연락할게.”

김재경의 얼떨떨한 목소리가 사라진 곳에는 아직 남은 하루가 길다고 알리는 아침 바람만이 나를 반겼다. 머리를 기분 좋게 헝크는 바람을 느끼며 난 베란다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당연한 거겠지만, 이로빈이 보고 싶었다.

***

혹시 몰라서 쳐 둔 커튼이 제 역할을 했는지 방 안은 어둡고 고요했다. 침대로 다가갈수록 들리는 작은 숨소리는 이로빈의 하루가 아직 시작하지 않았음을 넌지시 알리고 있었다.

사방으로 뻗은 팔 모양이 조금 바뀐 것 같기도 했다. 내 베개 위로 얹어진 팔을 보다가 조심스레 잡아 아래로 내렸다. 각도를 보니 팔이 저릴지 몰라서.

아까만 해도 누워 있던 자리에 걸터앉으며 이로빈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새벽 내내 힐끔댄 얼굴이건만 새로웠으며 또 곱씹고 싶었다.

이러다가는 영영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이로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입에서만 늘 맴돌았던 이름을 이제는 마음껏 부를 수 있음에 감사했다.

“이로빈.”

네 생일에 너와 있을 수 있다는 게.

“로빈아.”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날 누군가 네가 세상에 왔음을 알리기 위해 네 울음을 터트렸을 그 첫날처럼, 널 깨울 수 있는 그 축복받은 사람이 나라는 게.

네 어깨를 쥐고, 머리를 쓸고, 귀에 속삭일 수 있는 그 사람이.

“…으응….”

그 사람이 나라는 게 벅차서 준비한 말은 하지도 못했다.

대신 부스스 고개를 들어 한쪽 눈은 채 뜨지도 못하고 날 보는 이로빈의 볼 위로 진하게 키스했다. 입술을 떼기 싫어서 한 번 더. 간지러운 듯 웃는 네 웃음소리가 듣기 좋아서 딱 한 번만 더.

그렇게 많은 한 번이 더해지다 보니 이로빈의 얼굴에 입술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코에 입술이 닿은 순간 이로빈이 내 얼굴을 붙잡았다.

나를 아래로 끌어 내려 결국 엉거주춤 눕히고, 누워 있는 자신과 눈을 맞추게 한 이로빈이 웃으며 중얼거린다.

“남한결이 아침부터 깨워 주고… 뽀뽀도 해 주고….”

“…….”

“나 오늘 생일이야?”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했는지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눈까지 스르르 감는 모습을 봐서는 아직 원하는 만큼 자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이 무슨 날인지 눈치채지 못하는 상태인 것 같았다. 나는 재촉하는 대신 이로빈이 깨닫기를 기다렸다. 삼 초 후, 이로빈이 번쩍 눈을 떴다.

“헐. 나 오늘 진짜 생일이잖아.”

놀라서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얼굴에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내가 웃는 걸 본 이로빈이 결국엔 푸시시 따라 웃었다.

웃음이 멈추자마자 서로를 껴안았다. 내 목에 머리를 기댄 이로빈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밖에 나갔다 왔어?”

“응. 잠시 베란다에.”

오 분이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잠시 머리를 기댄 것만으로 알아챈다. 이로빈이 날 더 깊숙이 안았다.

“더 꽉 안아 줘야겠네. 안 춥게.”

추웠는지도 몰랐는데, 네가 그렇게 말하니 그랬던 것도 같다. 날 품는 네 온도를 느끼고서야 지금 우리의 섞인 온도가 적당함을 깨달았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고 눈이 서서히 감겼다. 일정한 속도로 목에 와 닿는 숨소리는 이로빈도 비슷한 상태임을 유추하게 했다. 잠에 취한 웅얼거림이 귀를 간질였다.

“…한결아.”

“응.”

“우리 딱 십 분만 더 잘까.”

잔뜩 졸린 목소리로 제안을 건네는 이로빈의 등을 고쳐 안았다. 어깨에 머리를 비비며 이로빈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일어나면… 네가 뽀뽀도 또 해 주고.”

“…….”

“나랑만 온종일 노는 거야.”

“…….”

“내 생일이니까.”

아무리 아침부터 계획해 둔 일이 많았대도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로빈이 그렇게 말하는데. 날 꼭 안고 체온을 나누며, 십 분 후를 약속하는데.

난 이로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십 분만.”

“…응. 십 분만.”

벌써 익숙해진 숨소리가 얌전해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마 십 분 뒤에도 깨지 못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알람을 맞추는 대신 우리가 나누고 있는 미지근한 온도 속으로 함께 잠겨 들기를 택했다.

괜찮아, 어차피 잠에서 깨도 네가 있을 테니까. 네가 내 옆에서 날 보고 웃을 거고, 날 안아 줄 테니까.

그러니까 네 생일을 위해 준비한 모든 일정은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이 말 뒤로 미룰 수 있어.

“이로빈.”

“…….”

“생일 축하해.”

나의 영원한 소원인 널 위해.

***

“어때.”

“색이 너무 멀쩡한데요? 혹시 소주는 얼마나 넣으셨어요?”

“한 병?”

“에이, 사장님. 로빈이 형 술 잘 마셔서 그거 가지고는 취하지도 않아요. 소주 조금 더 넣어도 될 것 같은데.”

“소주 없는데. 보드카 넣을까?”

“오, 개콜.”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잔뜩 신나서 내 생일주를 마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두 시간 전까지 남한결과 함께 보낸 오후가 마치 꿈같이 느껴졌다.

심지어 그 꿈같은 하루를 선물해 준 인물이 바로 대각선에 앉아 있음에도.

“…뭐.”

물론 눈앞의 인물과 오늘 내내 내 곁에 있던 인물은 같은 사람이지만 표정부터가 무시무시한 차이를 보였다. 평소 무표정한 편이었지만, 지금 팔짱을 낀 채 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앉은 남한결은 자신을 건드리는 사람을 눈빛으로 죽여 버릴 기세였다. 묻지 않아도 지금 이 상황이 남한결의 계획과는 억만 광년쯤은 떨어져 있으리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아냐….”

상황이 이렇게 흐른 데에 책임이 있는 나는 잠자코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시선은 결국 사이좋게 술을 제조하고 있는 둘에게로 다시 멎었다.

상황이 이렇게 흐른 데에 책임이 있는 나머지 둘이기도 했다.

“아, 근데 사장님. 저희 혹시 카페에서 술도 팔아요?”

“아니. 왜?”

“그냥, 술이 많길래. 저 카페에 이렇게 보드카 많은 거 처음 봐요.”

“이건 내 취미라서…. 근데 뭐, 팔아도 되고.”

“안 돼요.”

“왜.”

“저희 누나한테 혼날 것 같아요. 자기 없는 데서는 술도 많이 먹지 말랬는데. 팔기까지 하면….”

“오. 누나랑 사이가 좋은가 봐? 내 친구들 중에 누나 있는 애들은 맨날 싸우던데.”

“아, 아뇨. 친누나들 말구요. 저랑 사귀는 누나요.”

아무리 봐도 오늘 면접을 통해 알바생으로 채용된 사람과 그를 채용한 카페 사장님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가든 장을 턱턱 맡곤 하는 재균이와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카페 사장인 김재경의 조합이라 납득은 갔지만. 대화 내용과 달리 말하는 태도는 몇 년은 족히 알았던 것 같은 그들의 친화력이 새삼 놀라웠다.

뭐, 그런 둘이기에 이렇게 꼼짝없이 잡히긴 했다만은… 그것도 애인을 저렇게 심통 나게 해 놓고는.

뺄 수조차 없게 팔부터 잡아끄는 둘에게 끌려가며 입 모양으로 ‘삼십 분만 있다가 튀자’고 말한 게 벌써 두 시간 전이었다.

“흠, 흠.”

난 둘의 주의를 내게로 돌리기 위해 헛기침했다. 김재경과 재균이가 말을 나누면서도 끊임없이 제조하는 폭탄주 잔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남한결과 잠깐 눈이 마주쳤다. 난 김재경과 재균이가 보지 않는 틈을 타서 남한결을 향해 두 손을 모아 불쌍한 척을 해 보였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수신호였다.

슬쩍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남한결의 표정이 아까보다는 조금 풀린 것 같기도 했다.

“다 됐죠? 나 먹어요?”

난 재빨리 말을 뱉었다. 그러고는 대답을 듣기 전에 어디서 난 건지도 모르는 커다란 맥주잔의 손잡이 부분을 잡았다.

맥주잔 위로 기울여지던 온갖 술병들의 주둥이를 보고 쉽지 않은 잔이 될 것은 진작 눈치챘지만, 안의 내용물은 상당했다. 색이 너무 멀쩡하다는 재균이의 피드백이 반영됐는지 감히 어떤 색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액체가 찰랑댔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했다. 집 가서 양치질만 잘하면 멀쩡한 정신으로 남한결한테 키스하자고 덤빌 수 있을 수준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암.

상황 판단을 마친 내가 잔을 입에 가져가려 할 때였다. 갑자기 손이 가벼워진다 싶더니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 눈앞을 꽉 채웠다.

“에헤이. 뭐가 이렇게 급해. 생일 소감도 한마디 하고. 어? 그러고 나서 우리가 노래 불러 주는 동안 천천히 마셔야지.”

김재경이었다. 케이크를 만들다 놓고 왔다던 초를 가지러 카페에 잠시 들른 남한결과 내 앞을 막아설 때부터 짓고 있던 능글맞은 웃음은 어째 술이 들어가니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사장님 말이 맞아. 뭐가 그렇게 급해요. 생일이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구만!”

맞장구를 치는 해맑은 알바생은 환장할 상황에 한술을 더 뜨고 있었다.

‘형! 안 그래도 제가 오늘 전화했었는데! 생일 축하한다고!’

‘아, 맞다. 로빈훗 오늘 생일이라며. 안 그래도 남한결한테 너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버티더라고. 그래도 결국 데려오긴 했네. 야, 들어와, 들어와. 어차피 카페 마감하는 중이었어. 내가 너 케이크라도 공짜로 줄게.’

따지고 보면 남은 거라고는 집에 가서 밤새 붙어 있을 생각밖에 없던 우리의 계획을 비튼 주요 인물이었다. 불쑥 튀어나온 김재경까지는 어떻게 방어할 수 있었지만 대체 무슨 인연인지 오늘부터 김재경 카페의 새로운 알바생이 된 재균이까지 튀어나오고 나니 상황은 수습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더랬다.

결국 이렇게 불 꺼진 카페에서 생일 파티까지 열게 되고.

“아니, 한결이 형도 그렇고 둘이 뭐 집에 맛있는 거라도 숨겨 뒀어요? 아까부터 왜 자꾸 집에 간대.”

맛있는 거 안 숨기고 데리고 나왔는데 너 때문에 못 먹잖아 재균아….

차마 뱉지 못하는 말을 삼키며 애써 웃어 보였다. 테이블 밑의 발을 돌리는 척 눈에 익은 스니커즈를 꾹 밟았다. 악! 소리를 지르는 재균이의 등을 미안한 척 쓸어 주며 빠르게 김재경한테서 맥주잔을 뺏어 왔다.

정말 소감을 말해야만 보내 줄 것 같았다. 난 고작 셋인 관중을 둘러보며 맥주잔을 내 얼굴 높이로 들어 올렸다.

“다들 고마워요.”

눈이 마주친 김재경이 씩 웃으며 중세 시대 예의를 차릴 상황에서 했을 법한 우스꽝스러운 인사를 돌려줬다.

“덕분에….”

바로 옆에 앉아 경청하며 눈을 반짝대고 있는 재균이를 보니 결국 웃음이 터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 생일을 축하해 준다고 온 힘을 다해 까부는 놈이 귀여웠다. 머리를 한 번 크게 쓰다듬어 준 나는 남은 한 명의 관중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정신 사나운 테이블에서도 날 순식간에 집중하게 만드는 인물을 응시했다.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케이크에 두고 있던 눈을 서서히 들어서 날 보는 남한결의 고요한 얼굴에 대고 말했다.

“잊지 못할 생일이 될 것 같네.”

“…….”

“정말로.”

스물네 번의 생일을 보내며 많은 축하를 받아 왔지만 오늘처럼 특별하진 않았다. 생일에 큰 의미를 두진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남한결과 하루를 보내며 생각이 바뀌었다. 생일이라는 이유로 아침부터 깊은 포옹을 받고, 셀 수 없는 입맞춤과 또 그 모든 사랑을 담은 눈이 나에게 쉴 새 없이 머무른다면.

그 하루쯤은 정말 욕심낼 만하겠다고.

눈으로 건넨 소감이 남한결한테 가 닿았을지 모르겠지만 상관없었다. 집에 가는 길에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말해 줄 수 있으니까.

그나저나 먼저 여기서 도망가야 할 텐데. 난 테이블이 조금 조용해진 틈을 놓치지 않고 다짐을 받듯 말부터 뱉고 봤다.

“소감 했으니까 마십니다?”

소주, 맥주, 보드카, 맥주, 소주, 오렌지 주스, 소주.

“새앵일~ 추욱하~ 합니드아~.”

“스으랑하는~ 로오비니~ 혀엉~.”

한 잔에 담기기에는 심히 다채로운 액체들을 골고루 느끼며 빈 잔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엿가락처럼 축축 늘어지던 생일 축하 노래 또한 뚝 멎었다.

언제 일어선 건지 한 손에 케이크를 든 채로 날 보는 남한결과 곧장 눈이 마주쳤다.

“이 새끼는 불도 안 켜고 케이크를 왜 들어?”

“사장님, 라이터 있어요?”

“잠깐만.”

무책임하게 케이크만 덜렁 들고 선 남한결 대신 불을 일으킬 것을 찾기 바쁜 둘은 내버려 둔 채로 남한결과 시선을 나눴다. 케이크를 들지 않은 손으로 내 입가를 쓱 훔치는 다정한 손길과는 사뭇 다른 목소리가 나직하게 내려앉았다.

“이거 먹지 마.”

“왜?”

“…내가 만든 케이크도 아직 안 먹었으면서.”

케이크에서 시선을 올리다가 숨기지 못한 뚱함이 묻어 있는 눈빛을 마주하고는 결국 웃음이 터졌다.

“알았어, 안 먹을게.”

“김재경이 얼굴에 묻혀도 먹지 마.”

“어.”

“…강재균이 먹여 줘도.”

“절대.”

당사자들이 들으면 큰일 날 법한 소리를 속닥거리고 있으니 자꾸만 웃음이 샜다. 남한결도 마찬가지인지 위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피식대는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찾았다!”

카운터 밑에서 불쑥 머리를 든 재균이가 심마니라도 된 것처럼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서로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스태프 룸에서 초를 찾던 김재경이 우리에게 가까워졌을 때는 이미 눈앞의 일곱 개의 초에서 밝은 빛이 일렁이는 중이었다.

불을 붙인 순서에 따라 촛농이 흘러내리고 길이가 줄어드는 속도 또한 달랐다. 난 제각각의 키를 가지고 제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빛을 내는 초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영원히 타지 않을 하나의 빛이 그곳에 있었다. 내가 그 눈을 마주하고 있기만 하면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날 향해 있어 줄 그 빛이.

네 촛농은 눈물이었을 테다. 근데도 날 향한 네 마음이 흘러내리거나 줄어들지 않았다는 게 아프고 가끔은 숨이 막힐 정도로 벅차곤 했다.

“소원.”

그러니 나 또한 빌 수밖에.

네게는 댈 수도 없는 초를 다 끄고, 수많은 소원을 들어줬음에도 말만 하면 더 들어줄 것 같은 표정으로 날 보는 네 눈에 대고 고백했다.

“빌었어, 이미.”

다가올 네 생일엔 내가 네게 이런 감정을 선물할 수 있길.

***

결과적으로, 초만 불고 남한결과 둘이 카페를 벗어나려던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불 꺼진 카페 구석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는 어느덧 여섯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주위에 있었다던 수진이와 재균이의 혀 꼬인 목소리에 차를 돌려 이곳까지 온 솔이까지 끼고 나니 정신이 없었다. 이 사태를 초래한 재균이는 생일 주인공보다 더 취해 있었다.

“누나… 제가… 제가… 열심히 일해서… 꼭… 벤츠… 벤츠 사 드릴게요….”

솔이의 손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처럼 꼭 쥔 채로 웅얼웅얼 다짐하는 놈의 얼굴은 사뭇 슬퍼 보였다. 재균이가 취했다는 신호였다. 옛적에 그걸 눈치챈 수진이만 재균이를 대놓고 비웃고 있었다.

“하다못해 내 과자도 뺏어 먹는 게 벤츠 같은 소리 하네. 빈츠나 사라, 이 새끼야. 빈츠나.”

한 단어가 끝날 때마다 포크 손잡이 부분으로 재균이의 머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딱. 딱. 떨떠름한 표정으로도 재균이가 제 손을 조물대도록 내버려 둔 솔이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신기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김재경을 향해서였다.

“여기 시급이 어떻게 되는데요?”

“…벤츠 살 만큼은 안 되는데요.”

재균이는 그렇다 쳐도 수진이나 솔이와는 처음 얘기를 나눌 김재경은 전혀 위화감 없이 섞여 들고 있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이상함을 느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

남한결이 보이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히 여기에 앉아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 놈이 의아했다. 술을 먹은 탓인지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주머니를 더듬어 확인한 핸드폰에도 딱히 남한결이 남긴 연락이 없었다. 그 대신 화면에 뜬 숫자가 자정까지 십오 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내 생일이 끝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소원으로 빌 정도로 내 생일날 둘만 있기를 원했던 남한결의 뚱한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수진이가 합류한 순간 들고 있던 차 키를 테이블 위로 슬그머니 내려놓던 남한결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솔이를 확인한 순간에는 오늘 처음으로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었다. 빠져나가길 포기한 듯하던 표정을 생각하니 더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일단 정신부터 차리고. 뒤늦게 온 이들에게도 생일주 마시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는 이유로 폭탄주를 두 번이나 더 들이켰었다. 그로 인한 취기가 이제야 올라오는지 자꾸만 눈앞이 몽롱해졌다. 그래, 소주 9에 맥주 1 비율은 심했다.

그래도 남한결을 생각하며 눈을 세 번쯤 감았다 뜨니 얼추 자리에서 일어날 수는 있었다. 난 나머지의 눈치를 보며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잠깐 화장실 좀….”

슬그머니 빠져나가려고 일부러 작게 이야기했는데 네 쌍의 눈이 나에게 쏠렸다. 개중 가장 눈이 풀린 재균이와 눈이 마주친 나는 흠칫했다.

저 눈, 많이 봤는데. 불안함을 느끼기가 무섭게 허리가 붙잡혔다.

“혀엉… 사랑하는 우리 형… 어디 가요….”

“야, 야, 놔.”

“사랑하는 날 두고… 어딜… 어디를….”

강재균 주사 2번, 막강한 애교가 등판한 순간이었다. 힘은 또 얼마나 센지 머리를 아무리 밀어내도 소용이 없었다. 난 도와 달라는 신호로 솔이를 응시했다. 도와줄 생각은커녕 한참 재균이를 내려다보기만 하던 솔이가 눈썹을 꿈틀했다.

“얜 어떻게 된 게 나보다 너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하는 것 같냐.”

어딘가 억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솔이가 재균이의 볼을 잡아 제 어깨에 처박듯 기대게 했다. 머리를 밀어도 멀어지지 않던 놈이 또 솔이 손길에는 순순히 딸려가는 걸 지켜보던 난 헛웃음을 뱉길 잠시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쪽은 화장실 아닌데?”

3초도 되지 않아 뒤를 돌아봐야 했지만.

주당이라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처음부터 술을 같이 먹었던 김재경은 우리 셋 중에 제일 멀쩡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카페 주인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제대로 된 방향을 일러 주는 친절함까지 발휘하는 통에 대충 둘러댄 보람만 없어진 나만 곤란해졌다.

“…그래요?”

“엉. 왼쪽으로 가서 돌아야 해.”

“…….”

“취하긴 했나 보네, 우리 단골손님이. 일주일에 카페만 몇 번을 오면서 화장실 위치도 모르고.”

끝이 잦아드는 나른한 목소리를 보니 아예 취하진 않은 것 같은데, 그래도 내 구라를 눈치챌 정도의 정신이 있다는 건 느껴졌다. 난 변명거리를 찾으며 혀로 입술을 쓸었다.

아, 남한결 찾으러 간다고 하면 분명히 또 붙들릴 텐데. 아까도 그러다 재균이한테 지갑을 인질로 잡혔던 기억을 떠올린 나는 세 번쯤 더 눈을 깜빡이고서야 그럴듯한 변명을 찾아냈다.

“…아, 편의점! 편의점 좀 다녀올게요.”

“편의점에는 왜?”

“어….”

“아이스크림 사러 가는 거죠?”

“엉?”

불쑥 끼어든 수진이 덕분에 김재경의 시선이 앞에 앉은 수진이에게 고정됐다.

“오빠 술 먹으면 맨날 아이스크림 사 먹잖아요.”

“어? 어… 그렇지.”

“다녀와요. 여기 골목 나가면 바로 편의점 보이는 거 알죠?”

“어어, 알지….”

“골목 이 시간엔 되게 어두운 거 알죠?”

“엉?”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골목 어두운 건 왜…?

술에 취해서인지 뜬금없이 느껴지는 문장을 곱씹다가 수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그냥 그렇다구요.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수진이가 씩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언제 또 채운 건지 수진이 앞에 놓인 두 개의 맥주잔에 투명한 액체가 찰랑댔다. 아까 내가 겪은 소주 9 맥주 1의 비율로 제조된 술이 분명했다.

“사장님은 저랑 짠 하시고. 여기서 가장 덜 취하신 것 같으니까 제가 속도 맞춰 드릴게요.”

김재경이 등 떠밀리듯 맥주잔 중 하나를 건네받는 걸 지켜보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어후….”

무슨 블랙홀도 아니고, 이 카페에서만 벌써 몇 시간을 붙잡혀 있는 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카페의 출입문을 열고 나오던 나는 문을 열자마자 자리에 멈춰 섰다.

온갖 핑계를 다 대면서 찾고 싶던 인물이 바로 눈앞에 있어서였다. 김재경의 카페는 내부에 흡연석이 따로 없는 대신 야외에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카페 바로 옆 일반 주택과 구분하기 위해 세워 둔 담벼락 옆이 바로 그곳이었다.

남한결은 담벼락에 등을 성의 없이 기댄 채 들고 있는 라이터로 장난을 쳤다. 그러다가 가끔 고개를 돌려 연기를 내뿜었는데, 비스듬히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하얀 연기가 차분한 얼굴과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아서 신기했다. 익숙한 듯 낯선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걸음을 뗐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남한결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서 있는 밤과 꼭 닮은 까만 눈동자가 내 얼굴에 머물렀다가 이내 다시 사라졌다.

딸깍. 딸깍. 지포 라이터의 뚜껑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

“…….”

개삐졌네, 완전.

난 눈치를 보며 남한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가서는 내 인기척을 눈치챘으면서도 남한결은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맛있어?”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남한결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실패했다. 내 손이 닿기 전에 고개를 뒤로 뺀 남한결이 슬쩍 인상을 썼다.

“나랑 말 안 할 거야?”

시선이 잠시 내게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남한결의 목소리를 듣기에는 실패했다. 이 와중에 저 짜증이 묻은 귀여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술이 좀 깨는 것 같다고 느끼는 내가 웃겼다. 사실 더 큰 이유는 가을치고는 심히 쌀쌀한 날씨 때문이지만.

술을 먹다 보니 더워서 벗어 둔 니트가 생각났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지금 추위를 견디는 것보다는 백배는 더 급한 일이 있었으므로.

바로 퉁퉁 부은 애인을 달래 주는 일이었다.

“나 아직 생일인데?”

반팔티 밑에 드러난 맨팔을 쓸며 남한결에게로 고개를 기울인 것과 동시에 쌀쌀한 바람이 목 뒤를 간질였다.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린 나를 흘끔 확인한 남한결의 하얀 이마가 또 한 번 찌푸려졌다.

담배를 서둘러 끈 남한결에게 팔이 붙잡혔다.

“…바람 불잖아.”

날 제가 기댄 담벼락 옆으로 끌어 놓은 남한결이 퉁명스럽게나마 덧붙이는 말에는 결국 웃음이 샜다. 바람의 방향 때문인지 내게로 다가오려는 연기를 손으로 휘휘 저으면서도 내 쪽은 돌아보지 않는 꼿꼿한 고개가 이렇게 귀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얼굴도 대 주기 싫으면서 내가 추워하는 건 또 싫고. 담배 연기 갈까 봐 신경 쓰이고. 귀여워 죽겠다, 진짜.

멀어지려는 팔을 더듬더듬 잡고는 남한결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우리 결이 삐졌어.”

“…….”

“직접 만든 케이크도 먹고 초 불어야 하는데… 내가 붙잡혀서… 그치….”

어깨 부근에 코를 비비자 남한결의 향이 났다. 난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떴다. 고개를 올리자 날 내려다보고 있던 까만 눈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그러니까.”

아까보다는 좀 풀렸으나 여전히 쌀쌀맞은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을 하고서도 허리나 어깨는 얌전히 내주고 있는 게 용했다.

“왜 붙잡히는데. 짜증 나게.”

“…….”

“케이크 안 줄 거야.”

조심스럽게 내 얼굴 만지면서 그런 협박 해 봤자 하나도 신빙성이 없는데.

눈에 뻔히 보이는 그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허리를 한 번 더 힘주어서 와락 껴안기로 했다.

“아아, 왜. 내 거잖아.”

장난을 치듯이 좌우로 두어 번 흔들자 피식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난 쐐기를 박듯 한 번 더 물었다.

“줄 거지? 사랑을 담은 케이크?”

대답 대신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 위로 부드러운 손길이 내려앉았다. 머리를 쓸어 넘겨 주며 남한결이 눈을 맞췄다.

“너한텐… 화내기가 너무 힘들어.”

원망하는 말투와는 딴판으로 눈빛이 다정했다. 그게 진심인 걸 알아서 더 좋았다. 난 나름의 다짐을 담아 대답했다.

“내가 네가 화낼 만한 일을 안 하면 되지 않을까?”

“…말은 잘하지.”

“아냐, 진짜로. 야, 한결아. 이 형 못 믿냐?”

붙어 있던 몸이 서서히 떨어졌다. 방금 제 귀로 들은 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표정을 본 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누가 형인데.”

“나.”

“…어째서?”

“내가 너보다 생일 한 달 빠르잖아. 네 생일까지 앞으로 남은 한 달간은 내가 형인 거지. 몰랐어?”

장난이긴 했대도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입만 뻐끔대는 걸 보니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참지 못하고 남한결의 하얀 볼을 아래로 끌어온 나는 양 볼에 번갈아 가며 뽀뽀를 퍼부었다.

세 번쯤 왕복했을 때가 되어서야 남한결이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남한결이 내 얼굴을 쭉 밀어냈다. 힘이 하나도 실리지 않은 손길이 장난스러웠다.

“아, 비켜. 술 냄새나.”

“술을 먹었으니까 나지. 말 나온 김에 속성 코스 한번 밟아 볼래? 키스 한 번이면 오렌지 주스부터 와인까지 느낄 수 있을 걸. 삼 분 내로 꽐라 되기 가능.”

장난을 치듯 입술을 쭉 내미는 나를 보던 남한결의 시선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왔다.

“와인만 먹고 싶으면?”

입을 열기도 전에 남한결이 답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쪽, 하는 소리를 내며 입술이 가볍게 붙었다가 떨어졌다.

“어, 야.”

볼까지는 괜찮았어도 온갖 술을 때려 넣은 입 안까지는 공유할 생각이 없었던지라 당황스러웠다.

“술 냄새날 텐데…”

“내가 상관없다는데 왜.”

고개를 빼려 했지만 어느새 목 뒤를 부드럽게 받치고 있는 큰 손 때문에 불가능했다.

“아, 으응….”

아랫입술을 깨물고 안으로 들어온 혀가 입 안을 자유롭게 휘저었다. 목을 감싸고 있던 긴장이 풀렸다. 속도를 맞추며 슬쩍 눈을 감으려던 나는 우뚝 굳었다.

날 담벼락에 민 남한결의 어깨 너머로 카페의 출입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 몸을 드러낸 인물과 곧 눈이 마주쳤던 까닭이다.

우뚝 굳은 내가 이상했는지 뒤를 돌아본 남한결의 얼굴까지 확인한 김재경이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입술 끝에 느슨하게 물고 있던 담배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게 꼭 슬로 모션처럼 보였다.

정적을 깬 건 김재경의 멍한 중얼거림이었다.

“…내가 남한결 꿈으로 가는 문을 열었나.”

갑자기 뒤돈 김재경이 출입문 너머로 다시 사라졌다. 난 침을 꿀꺽 삼키고는 남한결과 시선을 교환했다.

“혹시… 형한테 우리….”

“아니.”

아직 말도 안 한 사람에게 키스 장면을 들킨 것 치고 남한결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잠깐의 놀란 표정을 지운 채 다시 고개를 들이미는 남한결의 뻔뻔함에 놀랄 새도 없이 방금 닫힌 출입문이 다시 열렸다.

문손잡이를 잡지 않은 손으로 눈을 비비고 있던 김재경과 또다시 눈이 마주쳤다. 김재경의 눈이 더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재빨리 등 뒤로 문부터 닫은 김재경이 가까워지는 것과 동시에 남한결이 내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등을 담벼락에 단단하게 붙드는 손길은 덤이었다.

“너네… 뭐냐…?”

처음 보는 당황한 모습으로 더듬더듬 말을 잇는 김재경과 머리꼭지만 보이는 남한결을 번갈아 본 내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난 차분하게 협상을 시도했다.

“하던 거 마저 하고 설명하면 안 될까요.”

멍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던 김재경의 표정이 천천히 바뀌었다. 난 남한결의 등을 툭툭 쳤다. 떨어지라는 뜻을 담아서였다.

“…야, 안 되겠다.”

살면서 저런 살의 어린 표정은 처음 봤다.

남한결을 겨우 떼 놓자마자 김재경이 휙 몸을 돌렸다. 담배 한 개비가 쓸쓸히 떨어진 곳에는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는 세 음절만이 남았다.

“따라와.”

밖으로 나가려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김재경이 담벼락 옆에 있는 우리를 스쳐지나가 담벼락과 카페 사이의 공간으로 사라졌다. 한 번도 그 뒤에 무언가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못한 공간이라 신기했다. 딱 한 사람 정도만 지나다닐 수 있을 만한 공간은 지금 보니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있었다. 방금 김재경이 지나간 발자취를 따라 죽어 있는 풀을 본 나는 남한결에게 고개를 돌렸다.

“뒷마당에서 패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시간이 날 때마다 으슥한 곳을 찾아 후배들을 팰 기회만 노리는 학과 선배들의 기억이 떠올라서 한 질문이었다. 인상을 찡그린 남한결이 반박했다.

“패긴 뭘 패.”

“너 방금 형 표정 못 봤지.”

눈썹을 꿈틀댄 남한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 허리를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기는 얼굴은 얼핏 귀찮아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런 일 없을 테니까 따라와. 얼른 하고 집 가게.”

마치 밀린 숙제를 하는 것 같은 말투로 뱉고는 남한결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반쯤 끌려 걸음을 옮긴 곳에는 일반 주택의 뒷마당 같은 너른 공터가 있었다. 주위를 미처 다 둘러보기도 전에 건물에 붙은 철제 계단이 시선을 끌었다. 계단을 따라 시선을 올린 곳에는 문이, 슬쩍 열린 문 사이로는 아까 훌쩍 사라진 김재경의 뒷모습이 보였다.

2층이 있었구나… 상대적으로 불빛이 많은 1층에만 집중했던지라 그 위에 누군가가 살 수 있는 공간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카페의 주인이 살고 있었다니.

계단을 먼저 오르던 남한결이 내가 따라오는지 확인하듯 뒤돌았다. 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형 여기서 사시는 거야?”

“어.”

“카페 운영하는 것 때문에?”

“아니. 그냥, 자기가 살고 싶어서.”

“…그러고 싶다고 해서 그냥 살 수 있어? 원래 살던 사람도 있었을 거 아냐.”

“이 건물 김재경 거야.”

“…….”

“자기 건물에 자기가 산다는 데 누가 뭐라 해.”

그건 그렇네….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해 보이진 않았지만, 맞는 말이었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남한결의 뒤를 따라 김재경의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브라운 톤으로 깔끔하게 잘 꾸며진 집은 마치 아래층의 카페를 축소한 곳 같아 보였다. 부엌으로 보이는 공간에서 물을 마시던 김재경이 우리를 흘끔 보고는 물 잔을 내려놓는 게 보였다.

불이 밝은 곳에서 보니 김재경이 꽤 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 수진이에게서 술잔을 건네받는 것이었음을 기억한 나는 부연 설명 없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수진이와 독대를 해야 했다면 충분히 짧은 시간 안에 저렇게 될 수 있었다.

“아… 내 머리야….”

물론 김재경의 얼굴이 빨간 이유는 그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우리가 들으란 듯 앓는 소리를 낸 김재경이 소파에 가서 눕는 것까지 확인한 나는 옆에 멀뚱히 선 남한결의 옆구리를 툭 쳤다.

“야. 어떡해?”

대답은 거실로부터 날아왔다.

“야. 너네 여기로 와 봐.”

혼잣말은 아닐 테니 현관문에 뻘쭘하게 서 있는 우리한테 한 말일 터다. 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갑자기 팔목을 붙잡는 남한결한테로 고개를 돌렸다.

“물 먹을래?”

“엉?”

“물 먹어. 가져다줄게.”

대답을 듣기도 전에 아까 김재경이 있었던 부엌으로 휙 사라져 버리는 뒷모습이 심히 태평했다. 부엌을 멍하니 보던 나는 볼에 와닿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소파에 누워서 눈을 손등으로 가린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김재경과 눈이 마주쳤다.

“…….”

“집이 참 좋네요.”

“…….”

오늘로 두 번째로 확인하는 살기 어린 눈은 이런 칭찬으로는 넘어갈 수 없다고 내게 말하고 있었다. 난 더 말을 보태는 대신 입을 다물고 김재경이 누워 있는 소파로 다가가 그 앞에 어정쩡하게 앉았다. 옆으로 다가온 남한결이 물 잔을 건네길래 김재경의 눈치를 보고는 빠르게 한 모금을 삼켰다.

“너도 먹어.”

물 잔을 다시 건네며 속닥대듯 한 말에 남한결이 별말 없이 물을 들이켰다. 방금 내가 입을 댄 곳에 닿는 잘생긴 입술을 보던 난 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허….”

헛웃음을 치며 물 잔과 남한결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는 김재경은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물 잔을 옆의 테이블에 내려놓은 남한결이 무뚝뚝하게 대화의 서문을 열었다.

“뭐.”

조금 전까지 같이 입술을 문대고 있던 내가 듣기에도 상당히 성의 없는 태도긴 했다. 역시나 김재경이 분개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어어? 문 열자마자 밖에서 그러고 있던 새끼가 처음으로 한다는 소리가 뭐어?”

“…….”

“아무리 밖에서는 안 보이는 공간이라 해도 카페 안에서는 나오기만 하면 보이는 곳인데 나란히 겁대가리도 없지. 나 말고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했어? 이로빈 친구들은 너네 이러는 사이인 거 알아?”

그 말에는 남한결도 할 말이 없는지 눈썹을 까딱댔다. 따지자면 남한결의 탐스러운 볼에 먼저 입술을 찍어 댄 당사자인 나도 반박할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입을 다문 우리를 확인한 김재경이 한숨을 쉬며 소파 아래로 발을 내리고 똑바로 앉았다.

한층 심각해진 얼굴로 김재경이 물었다.

“아니, 그것보다 먼저. 너네 뭔데? 언제부터 그렇게 붙어먹는 사이가 됐어.”

남한결과 시선을 교환한 나는 조용히 손을 올렸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거슬리는 문장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거였다.

“형, 말씀하시는 중에 죄송한데요. 정정해야 할 건 정정해야 하니까.”

“…….”

“따지자면 저희 붙어먹기도 전에 나오셔서 방해하셨는데요….”

“…….”

“키스도 제대로 못했는데.”

붙어먹기라도 했으면 안 억울하지.

내 말을 듣던 남한결도 암묵적인 동의를 표하듯 김재경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리를 번갈아 본 김재경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버퍼링이라도 걸린 것처럼 김재경이 버벅댔다.

“넌… 넌….”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머리를 감싼 김재경이 날 향해 손을 내저었다.

“넌 그냥… 웬만하면 입을 열지 마라.”

“…….”

“듣는 사람 속 터지니까.”

반박하려 했지만 따라붙는 살벌한 눈빛에 그냥 편하게 앉아 있던 자세를 바꿔 무릎을 꿇어앉기로 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익숙하지 않은 자세라 그런지 금세 무릎이 저렸다. 코에 침을 바르며 슬쩍 옆을 돌아본 곳에는 남한결이 김재경과 말없이 눈빛을 나누고 있었다.

팽팽하게 이어지는 긴장의 끈을 끊은 건 남한결이었다.

“나중에 얘기해 준다고 했잖아.”

“네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아침에 통화할 때.”

내가 모르는 내용이었다. 남한결이 그런 말을 했던 게 사실이긴 했는지 김재경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게 이거 관련한 거였어?”

“어.”

“공고 내리지 말라고 말한 것도 이거 때문이었고?”

남한결이 잠시 멈칫하고는 내 쪽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고개가 돌아갔다. 김재경과 눈을 맞춘 채로 남한결이 대답했다. 낮았지만 분명한 목소리였다.

“…어.”

김재경은 한참 말이 없었다. 나와 남한결을 번갈아 바라보는 시선에는 차마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묻어 있었다. 뭔갈 묻고 싶은데 한편으로는 그럴 수 없어 참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헤아려 보던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김재경은 입을 열지 말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입을 열어야 할 타이밍 같았다.

“형. 저희 사귀어요.”

그러고 보니 누군가에게 남한결과 내 사이에 대해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비록 이렇게 들키는 건 계획에 없었대도, 이건 우리가 앞으로 수없이 마주칠 상황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친해 보이기만 해도 연인 사이임을 의심받던 이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을 터다. 성이 같다는 이유로 우리는 평범한 연인이 할 법한 행동들도 수백 번을 생각해야 실행에 옮길 수 있을 테니까. 남들이 볼 때는 한없이 친한 동성 친구로만 보이는 행동을 하면서, 그 행동을 그렇게 단순하게만 보지 않길 바라는 몇몇 사람들에게만 이렇게 털어놓게 되겠지.

우리가 특별한 관계라는 사실을.

이런 순간에는 어떤 용기가 필요할까. 난 가까이 있는 온기에서 그 답을 찾기로 했다.

“제가 한결이 좋아하고.”

“…….”

“한결이도 저 좋아하고.”

김재경의 눈이 내가 방금 끌어와 꼭 붙잡은 남한결의 손으로 향했다. 천천히 내게로 돌아오는 시선은 마치 묻는 것만 같았다. 진심이냐고.

김재경이 내게 처음 말을 건 순간을 기억한다.

‘남한결 찾아요?’

그 말을 하는 순간조차 의중을 살피듯 내 얼굴을 샅샅이 훑던 눈이 기분 좋지 않았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날 본 게 처음이면서 다 아는 것처럼 떠보려 하는 그 말투가 불쾌했다.

그때의 김재경이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이해는 한다. 왜 그가 내게서 남한결을 필사적으로 감싸려 했는지.

당신은 알았겠지. 빈틈 하나 없는 것처럼 구는 남한결이 유일하게 열어 둔 그 틈이 수명을 다한 전구처럼 깜빡이는 순간을.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손을 단단하게 쥐자 아래에 있던 남한결 또한 손에 힘을 주었다. 난 든든한 지지에 힘을 얻어 김재경을 향해 웃어 보였다.

“붙어먹어도 될 정도로는 진지한데.”

김재경이 헛웃음을 치는 것에도 아랑곳않고 말을 붙였다.

“뭐 어떻게, 앞으로는 그러고 있는 거 봐도 눈감아 주시나요?”

한참을 우리 둘을 번갈아 보던 김재경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오버하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웃기는 놈들이야. 눈을 감긴 뭘 감아… 하여간….”

“…….”

“…….”

“어려서 그런지 겁도 없고….”

투덜대며 얼굴을 감싼 손을 내린 김재경이 나와 눈을 맞췄다. 김재경이 피식 웃고는 몸을 일으켰다.

“내려가기나 해라, 이것들아. 너네 친구들이 찾아. 특히 로빈훗 너.”

“형은요?”

“나도 곧 내려갈게. 어차피 밑에 정리해야 해.”

침실로 보이는 공간을 향해 몸을 틀던 김재경이 우뚝 서서는 뒤를 돌았다. 직선으로 시선이 꽂힌 곳은 남한결이었다. 김재경의 얼굴에 떠오른 괘씸하단 표정을 본 나는 재빨리 남한결의 앞을 막아섰다. 예상처럼 남한결한테 발길질이라도 할 기세로 발끝을 들고 있던 김재경이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날 응시했다. 그것도 잠시, 김재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퇴장했다.

나는 남한결에게 고개를 돌렸다. 김재경이 뭘 하려 하든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마주 잡은 두 손을 내려다보던 까만 눈이 내게로 돌아왔다. 난 눈앞의 문제가 사라지자마자 떠오른 것부터 뱉었다.

“열두 시 넘은 것 같은데… 어떡하냐.”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남한결이 조용하게 대꾸했다.

“괜찮아.”

“…….”

“상관없어, 이젠.”

느리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예뻤다.

“애들은 어떡하지?”

그러고 보니 아래에 남아 있을 아이들이 마음에 걸리긴 했다. 시간이 늦기도 했고.

같은 생각인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남한결이 손을 뻗었다. 잡고 일어나라는 뜻인 것 같았다. 거절하지 않고 손을 잡은 나는 괜히 저린 무릎을 툭툭 치고 걸음을 옮겼다. 당연히 따라올 줄 알았던 남한결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뒤돌았다. 거실에 선 남한결은 할 일이 남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먼저 내려가.”

“어? 넌?”

“김재경이랑 이야기 좀 하고 내려갈게.”

김재경이 들어간 침실 쪽을 눈짓하며 말하는 얼굴이 차분했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 애들 챙겨서 카페 앞에 있을게. 거기로 바로 와.”

“응.”

대답을 듣고는 몸을 틀었다. 계단을 반쯤 내려오고서야 아까 꿇어앉을 때 주머니에서 걸리적거리는 핸드폰을 옆에 빼 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발걸음이 다시 방금 떠난 곳을 향했다. 계단을 다섯 개 오르니 벌써 현관문이었다. 열린 문 사이로 고개를 내민 나는 방금까지 남한결이 서 있었던 거실을 눈짓했다. 남한결은 없고 대신 덩그러니 놓여 있는 내 핸드폰이 보였다.

신발을 벗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저절로 들린 고개는 현관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침실 쪽을 향했다. 김재경이 사라진 곳이자 남한결이 따라 들어갔을 것으로 추측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사실은 나도 아직 잘 안 믿겨서.”

조용히 귀에 감기는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마음속에만 있던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놓을 남한결의 얼굴이 눈에 보이듯 선명했다.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달싹이고 있을 하얀 얼굴을 상상하며 난 신발 안으로 다시 발을 끼워 넣었다.

“모르겠어. 어쩔 땐 그냥 꿈 같기도 하고.”

“…….”

“가끔은 일부러 걔를 만져 봐. 꿈이 아닌 걸 확인받고 싶어서.”

김재경의 말소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들려왔다.

“너 잠은 제대로 자고 있냐?”

“…아니. 지난 일주일간 스무 시간은 잤나.”

“…….”

“못 잤어. 야간작업 하던 주간보다도 더.”

“…….”

“근데 있잖아.”

남한결이 잠시 말을 멈췄다.

“행복해.”

“…….”

“나 좀 행복한 것 같아, 형.”

말끝에 남한결이 웃었다. 신경 써 들어야만 들릴 정도의 낮고 작은 웃음소리는 그러나 언제나처럼 내 귓속을, 가슴을 가득 메웠다.

“봐. 형도 안 믿기지.”

난 조용히 걸음을 물려 계단을 다시 내려왔다.

***

“너 술은 안 먹은 거 맞지?”

“먹었겠냐? 이거 데려다 놔야 하는데.”

‘이거’라고 칭한 것 치고는 뒷좌석에 길게 누운 재균이의 몸 위로 담요를 덮어 주는 손길이 꼼꼼했다. 차 뒷문을 연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담요를 덮어 준 솔이가 빠져나올 수 있게 길을 터 줬다.

뒷문을 닫은 솔이가 날 돌아봤다. 물론 철없는 애인을 챙기러 왔대도 엊그제 출시된 게임 팩까지 사 와서 한 아름 안겨 줄 만큼 나에 대한 애정도 있는 친구였다. 그걸 알기에 솔이의 어깨를 툭 치는 걸로 그 감사함을 표했다.

“와 줘서 고맙다. 선물도 잘 쓸게.”

“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인 솔이가 운전석을 향해 걸었다. 배웅이라도 할 요량으로 그 뒤를 따라 걷던 나는 운전석에 앉은 솔이와 덤덤히 눈빛을 나눴다.

“이로빈.”

“응.”

“축하해.”

“열두 시 지났는데도?”

나 아직도 생일이야?

웃으며 장난스럽게 대꾸하던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다시 솔이와 눈을 맞췄다. 별다른 반응 없이 가만히 날 보고 있는 얼굴은 방금 건넨 말이 생일 축하가 아니었음을 깨우쳐줬다.

이쯤 되니 내가 정말 어떻게 하고 다녔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혹시 모르는 마음에 확인한 뒷좌석에서는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입까지 쩝쩝 다시며 자는 재균이가 있었다. 나는 창틀에 팔을 걸친 채로 심각하게 물었다.

“그렇게 티 나?”

대답 대신 씩 웃기만 한 솔이가 물러나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엉거주춤 물러서자마자 편의점에 갔던 수진이가 헉헉대며 내 옆에 섰다.

“아, 숨 차… 허억… 언니 이거요. 운전하시느라 힘드실 것 같아서 자양강장제 좀 사 왔어요.”

“고마워. 와서 앉아. 가게.”

“넵. 잠시만요.”

들고 있던 종이봉투 안에 있는 병 하나를 꺼내 솔이한테 내미는 수진이는 김재경을 K.O 시킨 사람치고는 심히 멀쩡해 보였다. 내 후배지만 정말 자랑스럽다. 경탄의 감정을 담아 바라보던 나는 곧 내게로 덜렁 내민 종이봉투를 응시했다.

“오빠도 이거 먹어요. 숙취 해소제인데 술 먹은 뒤에 먹어도 어느 정도 효과는 있을 거래서 사 왔어요. 사장님도 하나 주시고.”

“…….”

“아, 한결이 오빠는 술 별로 안 먹은 것 같아서 굳이 안 사 왔는데, 뭐 정 원하면 하나로 나눠 드시든지.”

랩과 같은 빠른 설명을 미처 이해하기도 전에 싱긋 웃은 수진이가 걸음을 옮겼다. 언제 탄 건지 솔이의 옆 좌석에서 내비게이션에 제집 주소를 입력하는 수진이를 멍하니 보다가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로빈.”

“…응?”

솔이였다. 핸들을 쥔 채로 고개를 돌린 무심한 얼굴을 본 나는 눈을 깜박였다.

“강재균 한 번만 더 저렇게 술 먹이면 너라도 가만 안 둔다.”

심히 담백한 경고였으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넘치게 전달됐다. 대련할 때나 보곤 했던 저 눈빛이 거짓말을 하지 않음을 알기에 더더욱.

따지자면 나도 억울한 게 있었으나 재균이가 저렇게 취한 데에는 보복성으로 돌려준 술잔이 적잖이 기여했음을 알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았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내숭을 떨고 있는 재균이는 오늘 자신이 술에 취해 솔이 앞에서 이런 주접을 떨었다는 것만으로도 죽고 싶을 테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복수는 한 셈이었다.

“조심히 가.”

“너도.”

“내일 봐요, 오빠!”

차가 골목을 돌아 나가는 걸 보고는 뒤돌았다. 아까 입을 맞췄던 담벼락 부근에서 남한결을 발견한 것도 동시였다.

내 쪽으로 걸어오는 남한결을 바라보며 자리에 섰다. 한 걸음만 남기고 앞에 선 남한결이 내 뒤로 슬쩍 시선을 뒀다. 왜 혼자인지를 궁금해하는 얼굴을 본 난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애들은 보냈어. 시간이 늦기도 했고.”

고개를 끄덕인 남한결이 손을 뻗어서 내가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가져갔다. 궁금해서 그러나 싶어 내버려 뒀건만 안은 들여다볼 생각도 안 하고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길래 의아했다. 끔뻑끔뻑 눈을 맞추는 시간이 길어지고서야 그게 내가 뭐 하나라도 들고 있는 꼴을 못 보는 남한결 나름의 애정 표현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거 별로 안 무거운데.”

“알아.”

겨우 병 음료 두 개 든 봉지 무게가 얼마나 된다고 저러는 게 솔직히 어이없기도 하고, 멋쩍기도 하고. 민망함에 목덜미를 매만지며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야, 너 나 너무 과보호한다.”

남한결이 피식 웃으며 말을 돌렸다.

“갈래?”

“아 맞다. 너 차는?”

“내일 가지러 오게. 오늘은 걸어가자.”

“그럴까?”

나야 좋지.

최근 몇 번 남한결이 마감하길 기다려서 함께 귀가하곤 했지만,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걷는 밤 산책은 언제라도 기분이 좋았다. 그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귀갓길을 몇 초처럼 느껴지게 하는 사람이면 더 좋고.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는 일을 하기 위해 남한결의 옆에 나란히 서려다 말고 멈추었다.

“아….”

결국 김재경 집에서 가져오지 못한 핸드폰이 생각나서였다.

“나 잠시만.”

“왜?”

“아까 재경이 형 집에 핸드폰 두고 왔어.”

내 말을 이해하듯 눈을 깜빡인 남한결이 곧 몸을 틀었다. 당장이라도 제가 다녀오겠다고 자청할 법한 얼굴을 본 나는 재빨리 남한결의 손에 걸린 비닐봉지부터 벌려 그 안의 숙취 해소제를 하나 쥐었다.

“그럼 내가….”

“아냐, 됐어. 내가 금방 다녀올게. 어차피 줄 것도 있고.”

손에 들린 음료를 확인했는지 남한결도 더는 만류하지 않았다. 덕분에 수월하게 걸음을 옮긴 나는 이제 익숙하게까지 느껴지는 담벼락 옆을 지나 계단을 올랐다.

아까처럼 열려 있는 문 안으로 조심히 발을 들이밀었다. 현관문에 선 채로 일부러 큼큼 헛기침까지 했는데 기대했던 김재경의 인기척은 들려오지 않았다.

결국은 주인의 허락 없이 발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색하게나마 발을 떼 집 안으로 들어간 나는 아까와 사뭇 다른 거실의 차가운 공기를 느끼고는 멈칫했다. 이유는 거실과 연결된 베란다에서 찾을 수 있었다. 활짝 열린 거실의 창 너머로 밤공기가 끝을 모르고 밀려들었다.

평소에 큰 창을 가리는 커튼이 양옆으로 젖혀져서 전에는 존재도 몰랐던 베란다가 한눈에 보였다.

“…….”

베란다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김재경의 뒷모습까지도. 쓸쓸하게까지 보이는 뒷모습 너머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를 보며 거실에 있는 내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뭐야. 안 갔어?”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내 인기척조차 알아채지 못하던 김재경은 내가 눈앞으로 음료를 내밀 때가 되어서야 위를 올려다봤다. 정말 놀란 것 같은 얼굴을 본 나는 음료를 한 번 더 내밀기만 했다.

“핸드폰을 놔두고 가서요. 그 김에 이것도 드리고.”

“…….”

“또 이런 거 안 챙겨 드시면 다음 날이 끔찍하실 연세니까….”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도 김재경은 음료를 건네받았다. 음료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방금 그랬던 것처럼 허공을 보는 얼굴이 무표정했다. 평소의 웃는 모습과는 딴판인 얼굴을 바라보며 몸을 돌렸을 때였다.

“…그때.”

“…….”

“너한테 개새끼 닮았다고 했잖아.”

걸음을 붙잡은 건 김재경의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뒤를 돌았지만 김재경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서 있고 김재경이 앉아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앞에 놓인 재떨이에 담뱃재를 터는 손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지금은 아니래도 흡연자였기에 저렇게 오래 담뱃재를 털 필요가 없다는 것 정도야 안다. 그런데도 김재경이 한참이나 죄 없는 담배를 허공에 툭툭 던져 대는 걸 기다렸다.

“그 말 취소하려고.”

아무래도 오늘 남한결과의 그런 모습을 들킨 뒤 지난날을 들춰 본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제는 잘 기억조차 나지 않는 과거를 먼저 언급하며 김재경이 다시 필터를 빨았다.

“별로 안 닮은 것 같아, 지금 보니까.”

처음으로 들어 보는 희미한 목소리가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버석했다. 난 가만히 김재경의 머리를 내려다보다가 무릎을 굽혀 김재경처럼 쪼그려 앉았다.

“많이 좋아했어요?”

“…….”

“…….”

“…좋아했지.”

숨을 모아 뱉는 것처럼 김재경이 힘겹게 말을 끝맺었다.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는데 곧 마주친 얼굴은 그게 착각이었나 싶게 했다.

“남자라고는 좋아해 본 적 없는 새끼가 그래도 나는 다르게 봐 줄 거라고 착각할 정도로.”

“…….”

“딱 그 정도로 좋아했어.”

눈가를 찡그리면서도 김재경이 피식 웃었다.

“남한결이 내가 그 덜떨어진 짓 하는 걸 옆에서 다 봤거든. 처음부터 끝까지.”

의연하게 말하려 하는 것 같았으나 담배를 문 입술이 덜덜 떨렸다. 난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김재경의 입에 물린 담배로 손을 뻗었다. 김재경은 제지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담배를 축축한 재떨이에 비벼 끄는 걸 보며 읊조리듯 말했다.

“남한결이 널 좋아하는 걸 보는 게 괴로울 때가 있었어.”

“…….”

“날 보는 것 같아서.”

“…….”

“그리고 그 바보 같은 새끼가 고백조차 못하는 게… 꼭 내가 걔한테 안 된다는 예시를 보여 줘서인 것 같아서. 그래서 너한테 내가 대신 날을 세운 적도 있고. 근데 생각해 보면….”

“…….”

“너한테서 남한결을 보호하려 한 게 아니라 나를 보호하려 했던 걸지도 몰라. 멍청한 거지. 너한테도 미안하고.”

김재경의 떨리는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김재경이 날 돌아봤다. 처음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는 눈. 난 그 너머로 내가 모르는 시간을 보았다.

김재경이 서 있고, 남한결이 서 있는. 그 뒤에는 김재경이 무너지고, 남한결이 서 있는. 그러다가 남한결이 무너지고, 김재경이 서 있고. 결국에는 남한결이 무너지고, 김재경이 무너지는.

“형.”

그 시간을 헤아리며 김재경의 등을 둥글게 쓸었다. 성애의 감정이 없는 온기는 누군가에게 온전한 위로로 가 닿을 수 있음을 안다.

“저도 누군가에게는 개새끼였겠죠.”

“…….”

“그치만 한결이한테는 아니에요.”

“…….”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할 거예요.”

고인 눈물을 끝내 흘리지는 않으면서 김재경이 흐리게 웃었다.

“알아. 그래서 취소하는 거잖아.”

“…….”

“잘됐어, 진심으로.”

“…….”

“축하해.”

“고마워요.”

사이좋게 미소를 교환한 순간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게 누구일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진동을 느낀 건 나만이 아닌 듯 김재경이 서둘러 일어섰다. 베란다를 나서다 말고 픽 웃으며 1층을 눈짓하는 얼굴이 장난스러웠다.

“아래에 세워 두고 왔냐? 그 새끼 너랑 나 이러고 있는 거 알면 엄청나게 질투할 텐데.”

슬쩍 확인해 본 아래에는 정말 남한결이 위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귀에 대고 있는 핸드폰 비슷한 물체를 확인한 나는 김재경의 뒤를 황급히 따르며 물었다. 삐진 남한결을 달래더라도 이 농담만은 치고 가야 했다.

“근데 형. 제가 오늘 느낀 건데요.”

눈썹을 쓱 올리며 돌아보는 얼굴에 대고 씩 웃어 보였다.

“저희 상견례 때 양가 부모님은 못 모셔도 형은 꼭 모셔야겠어요.”

“…….”

“안 그러면 개삐질 것 같아서, 형이.”

눈을 깜빡이던 김재경이 무언가라도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갑자기 아래에 떨어져 있던 슬리퍼를 주워 드는 행위에 대한 설명은 희번덕대고 뜨는 눈이 대신했다. 김재경이 슬리퍼 한 쌍을 위협적으로 드는 걸 확인한 나는 재빨리 현관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내일이 일요일이라 다행이다.”

“그러게.”

김재경의 카페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가는 길, 새벽 한 시가 넘은 거리는 조용했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골목으로 발길을 튼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손을 잡았다. 손가락을 얽고 가끔은 손바닥을 장난스럽게 붙였다 떼며 걸었다. 이곳이 평소 우리가 이용하는 지름길보다 긴 것을 알면서도 나는 자꾸만 초조해하며 언제 이 길이 끝날지를 확인했다.

쌀쌀한 날씨만 아니면 밤새 이렇게 걷기만 해도 좋을 텐데.

남한결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해서 옆을 돌아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걷는 속도를 늦추며 남한결이 날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냥 쳐다본 거에도 이렇게 진심으로 눈을 맞추는 놈을 보니 굳이 너도 이렇게 좋냐는 질문은 할 필요가 없었다.

“왜?”

“아니. 그냥.”

“…….”

“좋아서.”

한 손에는 남한결한테 뺏어 오다시피 해서 든 케이크 상자를, 다른 한 손에는 남한결의 손을 잡고 걸으니 다른 특별한 것 없이도 가슴이 꽉 찬 느낌이 들었다.

내 눈을 바라보던 남한결이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내게로 몸을 완전히 돌린 남한결의 얼굴을 응시했다.

“김재경이랑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했어?”

진지한 얼굴을 본 나는 어쩌면 남한결이 걸어오는 내내 이걸 궁금해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되물었다.

“그게 궁금했어?’

“응.”

“음….”

잠깐 고민했지만 결국 입을 열었다. 그 시절을 공유해 온 둘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이야기 같아서. 난 대화에 집중하느라 헐거워진 손을 한 번 더 힘주어 잡고는 앞을 보며 걷기 시작했다.

“형이 미안하대.”

“…….”

“예전에 나 개새끼랑 닮았다 했던 거. 지금 보니까 하나도 안 닮았다고.”

남한결이 날 따라 천천히 걸었다. 가로등이라고는 긴 담벼락 끝에 붙은 게 다인 어둑한 골목에 발소리가 나란히 울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괜찮다 했지 뭐.”

“…….”

“‘저 한결이한테 정말 잘할 거예요’, 하고. 결혼 허락받으러 온 사위 같은 말도 하고.”

“…….”

“근데 쫓겨났어. 너랑 나랑 상견례 하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은 꼭 불러야겠다고 농담했거든. 안 부르면 삐질 것 같다고.”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슬쩍 옆을 돌아보자마자 다정하게 웃고 있는 눈을 마주했다.

“잘했네.”

어쩐지 조금 젖은 것 같은 눈빛을 마주하며 난 장난을 치듯 눈썹을 위로 들었다 놨다.

“원래 이 형이 좀 하잖아.”

아까처럼 형 소리를 지적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남한결은 또 한 번 작게 웃기만 했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아래를 향한 얼굴을 본 나는 티 나지 않게 걸음의 속도를 조금 늦췄다.

기다린 보람이 있게, 몇 걸음 더 걷지 않아 남한결이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김재경이 말했어?”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어리둥절할 게 뻔한 내 얼굴을 확인한 남한결이 대답을 눈치챈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우리 형이야.”

“…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게 아님을 입증하듯 남한결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내게로 완전히 몸을 돌린 남한결이 힘을 주어서 한 번 더 말했다.

“그 개새끼. 내 친형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라 멍했다. 남한결에게 형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8개월 가까이 살면서 한 번도 형에 대해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없었다. 저번 주, 남한결의 앨범을 볼 때 보지 않았다면 사실 그 존재조차 잊었을지도 모른다. 가끔 어린 우리의 옆에 서 있던 키가 한 뼘 정도 더 큰 남자를 떠올리며 난 침을 삼켰다.

“김재경이 먼저 얘기했다는 것 보니까 이것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 같아서.”

조용히 설명을 덧붙이는 남한결은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

“…….”

난 방금 차분한 얼굴을 한 남한결이 꼭 잡은 내 왼손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둘이 친구였어?”

“그랬지.”

“…….”

“김재경이 고백하기 전까지는.”

낮은 목소리 위로 김재경의 목소리가 입혀졌다.

‘남한결이 내가 그 덜떨어진 짓 하는 걸 옆에서 다 봤거든. 처음부터 끝까지.’

눈에 보이지 않았던 연결 고리들이 녹슨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난 그 고리들을 바라보며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말은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사람들까지 상처입힐지도 모른다고 느껴졌기에.

남한결도 한참이나 말이 없었기에 우리는 걷다 말고 멈춰 선 채로 맞잡은 두 손을 만지작대기만 했다. 긴 정적을 깬 건 남한결의 단호한 목소리였다.

“저번에도 말하긴 했지만, 형이랑 너는 달라.”

“…….”

“김재경이랑 나도 다르고.”

“…….”

“괜히 네가 죄책감 느낄까 봐 얘기하는 거야. 그러지 말라고.”

네가 이런 얼굴을 하기까지, 김재경이 그런 얼굴을 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널 좋아하면서… 힘든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

“한 번도 널 미워하거나 원망한 적은 없어.”

소리 죽인 물음이 흘러 나갔다.

“왜…?”

진심으로 궁금했다. 무엇이 너에게 그토록 확신 어린 말을 내놓게 하는 건지.

이 이야기를 뒤늦게 전해 듣는 나조차 왜 김재경이 나를 네 형과 겹쳐 봤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은데. 왜 너는 내가 네 형과 다르다고 말하는 걸까.

남한결은 내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망설이지 않았다. 다만 내 눈을 보고 속삭이듯 말했다.

“넌 날 다치게 할 수 있는 애가 아니니까.”

가끔은 내가 네 이런 깊고도 맹목적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를 돌이켜 본다. 이렇게 네 눈을 마주하고 있을 때. 그 까만 눈을 통해 보는 세상에 나만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언제 느껴도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우리가 하나이고, 내가 올바른 자리에 서 있음을 확인받는 순간이기도 했다. 우리 사이의 틈을 꿰어 절대 풀리지 않을 끈으로 몇 번이고 매듭짓는 바늘을 보며 난 남한결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내가… 잘할게, 한결아.”

“…….”

“네가 계속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날 만나기 전에 네가 실체가 없는 환상통을 끌어안고 있어야 했다면, 내가 실체를 가진 행복을 네게 줄게. 네가 그 안에서 언제든 행복할 수 있도록.

대답 대신 남한결이 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렇게 나눠 주고도 넉넉한 품에 머리를 기대며 난 온몸으로 남한결을 껴안았다. 머리를 대고 있던 남한결의 어깨가 뜨끈해지고서야 천천히 몸을 뗐다.

그새 내 손에 들린 케이크 상자를 가져간 남한결이 제 오른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뜻 같아서 냉큼 잡고는 걸음의 속도를 맞췄다. 약속한 듯이 자연스레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아까 솔이가 재균이 관련해서 나한테 경고했어.”

“뭐라고 했는데.”

“맞춰 봐.”

잡은 손을 달랑달랑 흔들며 남한결은 고민이라도 하듯 잠깐 말이 없었다.

“한 번만 더 술 먹으면 아무도 못 보도록 집에 며칠이고 가두겠대?”

“…엉?”

“아니면 묶어서 어디로 보내 버린대? 아무도 못 보고 못 치대는 곳으로.”

“…아니…?”

“그럼 별로 경고 같진 않은데.”

난 할 말을 잃고 남한결을 응시했다. 덤덤한 얼굴로 무시무시한 말을 이어 가던 남한결이 슬쩍 날 돌아봤다. 내 표정을 확인하고 이내 눈을 휘어 웃는 얼굴이 장난스러웠다.

나름의 장난이었던 모양인데 듣는 사람은 섬뜩했다는 게 문제였다. 난 남한결의 눈치를 보며 하하, 하는 웃음소리를 짜냈다.

“근데 방금 그거 뭐야? 나 순간 무서웠어. 너무 술술 나와서. 누가 보면 진짜 네가 진짜 평소에도 그런 생각하고 있는 줄 알겠다.”

“…….”

“…야?”

한 번 더 대답을 재촉하고서야 남한결이 일부러 짓고 있는 것 같은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푸시시 웃었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오른손으로 남한결의 배에 펀치를 날리는 척을 한 나는 남한결의 오른손을 복수라도 하듯 위아래로 세게 흔들었다.

몇 번 마저 장난을 친 후에는 아까처럼 얌전히 걸었다. 장난기를 좀 덜어낸 눈으로 남한결이 물었다.

“그래서 정답이 뭔데.”

“응?”

“임솔이 한 말.”

“아… 재균이 한 번만 더 그렇게 술 먹이면 가만 안 둔다고.”

말로 뱉고 보니 새삼 웃겼다. 누가 누굴 술 먹였는데….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남한결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제 애인부터 좀 어떻게 하라 그래.”

억울함이 배인 말을 들으니 괜히 웃음이 터졌다. 아무래도 이 억울함을 소명하기 위하여 조만간 다 같이 모일 자리를 또 만들어야 할 모양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골목의 끝에 다다랐다. 우리가 사는 오피스텔이 시야에 담겼다. 걸음을 멈춘 우리는 서로를 응시했다.

“다 왔네.”

“그러게.”

깊게 나누던 시선의 끝에는 누가 먼저 터트린 건지도 모를 웃음만이 남았다. 난 남한결의 허리에 손을 둘러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남한결 또한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한결아.”

같은 집에 산다는 게 이렇게 좋을 줄이야. 집 앞에서 아쉽게 헤어질 필요도 없고. 날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을 필요도 없다.

“오늘 내 방에서 잘래?”

“네 방에서?”

“응.”

이렇게 이인삼각 달리기 대회라도 하는 것 같은 웃긴 자세로나마 꼭 붙어서 걸어갈 수도 있고.

“난 네 냄새 맡으면 잠 잘 오던데.”

“…….”

“너도 내 방에서 내 냄새 맡으면 잠 잘 잘 수 있지 않을까? 원하면 자장가도 불러 줄게.”

같이 잘 수도 있고.

“네 방에서 자도 상관은 없는데 자장가는 부르지 마.”

“왜? 내가 큰마음 먹고 제안한 건데.”

“너 노래 못하잖아.”

“…….”

“…….”

“몰랐는데 우리 집 세종회관이었냐? 무슨 퀄리티를 바라길래, 대체.”

내 투덜거림에 남한결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내려 달래듯이 볼을 붙여 오는 남한결한테서 나는 향이 감질났다. 아무래도 얼른 집에 가서 제대로 맡아야만 성이 찰 것 같았다. 난 얼른 걸음을 재촉하기로 했다.

***

한결아. 자?

아니.

무슨 생각해?

…….

…….

네가 저 책상을 마지막으로 치운 게 언제일까 하는 생각.

…안 되겠다, 너 눈 감아.

…….

아니, 아까부터 감으라 했는데 안 감고 뭐 했어?

자꾸 시선이 가는 걸 어떡하라고….

어허, 빨리 눈 감아. 이제 핑계 대기 없음. 얼른 자고 일어나야 같이 씻고, 케이크도 먹고….

…같이 씻는다고?

너 그거에 되게 솔깃한다?

…….

야, 남한결.

조용히 해. 나 이제 좀 잠 오는 것 같으니까.

가만 보면 까져서는… 그때 암실에서도 그렇고.

…….

…자?

…….

…한결아.

…….

근데 생각해 보니까 우리 굿나잇 뽀뽀 안 했… 읍.

***

침대가 가볍게 출렁대는 느낌이 들고 누군가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그게 누구인지는 물을 것도 없었다. 방금까지 잠에 빠져 있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서서히 잠기운이 옅어졌다. 난 눈을 뜨기도 전에 앞에 앉아 있을 남한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고분고분 안겨 오는 남한결의 등을 껴안고 아래로 당겼다. 불편한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아래로 몸을 숙여 주는 남한결에게서는 늘 그렇듯 좋은 향이 났다.

이건 어느 방에서 자든 상관없는 거구나. 깨달음과 함께 남한결의 목덜미에 코를 가볍게 비볐다. 남한결과 함께 자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아침마다 하는 행위지만 할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깼어?”

“응. 넌 벌써 씻었네. 왜 이렇게 빨리 깼어?”

내가 아무리 한번 잠들면 쉽게 깨지 않는대도, 덩치가 이만한 놈이 침대를 빠져나가는 기척조차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붙어 있는 몸을 떼는 것마저 오랜 시간을 들여서 조심스레 침대에서 벗어났을 남한결이 눈에 훤했다.

“또 잠 못 잔 거야?”

어젯밤 김재경과 남한결이 나누던 대화까지 듣고 나니 신경 쓰였다. 그래서 나간 내 물음에 남한결이 작게 웃었다.

“아냐. 그래도 어제는 좀 잤어.”

그래도 손에 잡히는 말랑한 목덜미나 목소리를 들으니 아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서 넘어가 주기로 했다. 앞으로 수면 시간을 늘릴 방법은 내가 생각해 봐야겠다. 양초라도 켜 둘까.

뭐가 됐든 우리가 같이 자서 그런 것만 아니면 좋겠다. 남한결과 맞는 아침 중 그 어떤 것도 포기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머리를 부드럽게 넘겨 주는 손길이나, 잠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남한결과 살을 맞대고 있는 순간이 좋았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얼굴과 눈을 감기 전 보이는 얼굴이 같다는 사실은 새삼 내가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질 깨닫게끔 했다.

슬쩍 실눈을 떠서 확인한 남한결은 다행히도 비슷한 생각 중인 것 같았다. 얼굴 곳곳을 어루만지듯 하는 시선 끝에는 볼에 가벼운 입맞춤만 남겼다. 젖은 머리카락이 볼에 스칠 때마다 간지러움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날 따라 장난스레 입술을 이리저리 옮기던 남한결과 누구도 이길 생각이 없는 실랑이를 했다. 일어나라는 듯 내 등을 받치는 신호로 장난이 끝난 걸 알았다.

“씻어야지.”

아, 그렇지. 뽀뽀하려면 양치는 해야지.

귀찮음을 이길 계기를 얻고 어렵사리 몸을 일으켰다. 등을 부드럽게 당겨 일으켜 준 남한결과는 마주 앉은 자세가 됐다. 내 뒷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은 남한결이 상이라도 주듯 달콤하게 말했다.

“욕조에 물 받아 뒀어.”

“욕조에?”

“응. 입욕제도 풀어 뒀으니 들어가서 좀 쉬어.”

가끔 이럴 때면 남한결이 외국에서 살다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여태 누구한테든 입욕제를 풀어 뒀으니 욕조에 들어가 쉬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었나를 생각해 보던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누구든 상관없이, 지금 이렇게 세심한 데까지 관심을 기울여 주는 사람이 남한결이라는 게 중요했으므로.

화장실로 가는 내 뒤로 남한결이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거실로 나가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화장실 안까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모습에는 내심 놀랐다. 돌아보는 내 시선을 느꼈으면서도 별말 없이 내 칫솔 위로 치약을 쭉 짜 주는 남한결은 아직 가운 차림이었다. 치약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데 집중한 얼굴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보며 칫솔을 입에 물었다.

순간 화악 퍼지는 향은 아까 침대에서 남한결이 내 볼에 남긴 향과 별다를 게 없었다. 입을 헹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남한결이 물이 든 양치 컵을 내밀었다.

쏴아. 퉤. 쏴아. 퉤.

물 흐르는 소리와 입 안을 헹군 물을 뱉는 소리를 번갈아 내고 나니 남한결이 손으로 내 입 주변에 묻은 거품을 닦았다. 이쯤 되니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한결아. 너 뭐 해?”

충실한 집사처럼 묵묵히 일을 수행하던 남한결이 처음으로 멈칫하고는 날 봤다.

“너 씻겨 주는데.”

그것도 잠시, 생각보다 덤덤한 어투로 말이 넘어왔다. 거품이 많이 묻지도 않았을 텐데 입 주변을 한 번 더 제 손으로 훔치는 손짓은 꼼꼼했다. 여문 손에 입술을 맡긴 채로 가만히 한 뼘 정도 거리에 있는 남한결의 얼굴을 응시했다.

“같이 씻자며. 어젯밤에.”

“…….”

“근데 내가 먼저 씻었으니까 너라도 씻겨 주려고.”

눈뜨자마자 이 생각을 하는 게 나 자신도 어이없긴 한데 단순히 내 잘못만이라고 하기에는 눈앞의 남한결이 너무 귀여웠다. 같이 씻자는 말에 그 의미만 담긴 건 아니었을 텐데, 너나 나나. 모른 척 입술만 지분대고 있는 게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참지 못하고 웃었다. 움찔대는 입술을 느낀 듯 고개를 들어 보는 얼굴 가까이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제는 습관이 됐다고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을 조금 내미는 남한결을 모른 척하며 물었다.

“그래서.”

“…….”

“어디까지 씻겨 줄 건데?”

눈이 깊게 맞물렸다. 배경 음악처럼 계속해서 흐르는 물소리를 멈추기 위해 수도꼭지를 잡았다. 물이 흘러 어쩔 수 없이 축축해진 손으로 남한결의 손을 겹쳐 잡았다. 남한결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어차피 나도 마찬가지일 테니 상관없었다.

평소라면 얼굴을 붉히거나 도망쳤을 남한결은 말없이 가만히 날 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왠지 모를 흥분이 일었다. 난 느리게 숨을 뱉으며 그제야 나눠 줄 관심이 생긴 욕조를 눈짓했다.

양치 후 입 주위를 닦는 걸로 고작 씻겨 주겠다는 담대한 말을 하진 않았겠지.

“나 벗는 거 지켜보면서 결정하게?”

“…….”

“욕조에 들어가려면 벗어야 할 거 아냐. 먼저 씻기까지 한 네가 그걸 모를 리는 없고.”

시작은 장난이었는데 말하다 보니 나도 슬슬 헷갈리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은 눈물로 끝났던 지난 경험 이후로 남한결과 이런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껴안고 잘 때 서로 선 걸 모른 척하고 잠들기가 힘들어서 몇 번 대신 해 준 적은 있었으나, 차마 서로 그다음 단계로 가자는 말을 못 했다. 솔직히 나는 좀 쫄았었고, 그날 내가 우는 걸 지켜본 남한결도 꺼리는 눈치였다.

손으로 해결하려 해도 좀체 분위기가 잦아들지 않을 때면 슬그머니 화장실로 자리를 피하기까지 했다. 분명 두 번이나 빼 줬는데도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온 남한결한테서 다시 한번 진하게 보디워시 향이 풍겼다. 참기 힘드냐고 물을까하다가도 허벅지에 느껴지는 묵직한 존재감에 입을 조용히 다문 게 벌써 몇 번째더라. 족히 세 번은 넘었으니 남한결이나 나나 참을성이 바닥날 때가 되긴 했다.

이걸 두렵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설렌다고 해야 하나. 나도 내 마음을 도통 모르겠기에 남한결의 얼굴만 빤히 응시했다. 마찬가지로 날 보고 있던 남한결이 입을 열었다.

“알지.”

이마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내려가던 시선이 입술에 멎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더는 거품 하나 묻지 않았을 아랫입술을 간지럽게 문지르며 남한결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나 나가고 옷 벗어.”

“…….”

“지켜보면서까지 참을 자신은 없으니까.”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이 내 입술 위로 내려앉은 것과 동시에 아슬아슬하게 맞닿아 있던 우리의 몸이 떨어졌다. 남한결이 문을 닫고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뭐지?”

웅웅 울리는 혼잣말을 듣고서야 남한결이 정말 날 씻으라고 혼자 두고 나갔다는 게 실감 나기 시작했다. 집에 화장실이 하나라 또 어디서 잔뜩 흥분한 아래를 풀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우리가 지나와야 했던 몇 번의 밤처럼 샤워가운 너머로 느껴지던 열이 몰린 하체를 떠올리자 착잡한 심정부터 들었다.

과연 언제까지 둘 다 이렇게 참을 수 있을까? 섹스와 동반될 고통이 두렵긴 해도, 평생 섹스를 안 하고 싶다는 건 아니었는데. 같이 씻자는, 장난으로도 넘길 수 있을 말을 굳이 꼬투리 잡아 풀어헤쳤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슬슬 다시 시도해 볼 때가 되지 않았으려나 생각했건만. 씻겨 주겠다는 말에 그러겠다고 하길래 남한결도 같은 생각을 하는 줄 알았다. 실컷 말만 그렇게 해 놓고 설마 저렇게 내뺄 줄 알았나, 내가. 이거 참… 딴에는 참으면서까지 날 안 아프게 하겠다는데 괜찮으니 한 번 더 해 보자고 할 수도 없었다.

“어? 아니지.”

왜 안 돼? 어쨌든 남한결도 원하고, 나도 원하는데. 그래, 씨발. 해 보는 거야.

고민은 길지 않았다.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신 나는 거울 속 나와의 눈씨름을 멈추고 재빨리 옷부터 집어 던졌다. 속옷까지 벗어 화장실 구석에 박아 두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몸에 대충 물을 끼얹고는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적당한 온도가 몸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아래에서부터 풀풀 올라오는 어딘가 남한결을 떠올리게 하는 향도 마찬가지였다. 남한결이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부터 하려는 행동을 시작할 용기를 심어 주기에는 충분했다.

난 욕조 밖으로 나온 발을 움직여 욕조 옆 선반을 건드렸다. 샴푸며 린스, 보디워시까지 들어 있던 통이 흔들리며 끄트머리에 있던 샤워 볼이 아래로 떨어졌다. 무게가 가벼웠기에 바닥에 닿는 소리조차 안 났다. 당연히 밖에서 들렸을 리 없었다. 잠잠한 문가를 바라본 나는 이내 조금 더 힘을 줘 선반을 발로 밀었다.

콰쾅!

나이스. 타일 바닥이라 그런지 소리가 두 배는 더 크게 났다. 기뻐하길 잠시 난 너무 늦지 않도록 타이밍을 맞춰 일부러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악!”

급한 발소리가 들리고 머지 않아 문이 벌컥 열렸다.

“이로빈!!”

다급하게 소리를 치며 문을 연 남한결의 얼굴이 심각했다. 그것도 잠시, 욕조에 얌전히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본 표정이 묘해졌다. 난 때를 놓치지 않고 화장실 바닥에 널브러진 목욕용품들을 가리켰다.

“난 괜찮은데 저게 다 떨어져서….”

“…….”

“좀 주워 줄래?”

욕실 바닥과 날 번갈아 본 남한결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내가 멀쩡해 보여서 안심한 눈치였다. 몸을 숙여 욕조에서 가장 멀리 날아간 샴푸부터 주운 남한결이 한 번 더 확인하려는 것처럼 나와 눈을 맞췄다.

“다친 데 없는 건 맞아?”

“없어. 운 좋게 욕조 안으로 넘어졌지 뭐야….”

“그럼 소리는 왜 지른 건데.”

“…놀라서?”

내가 다 넘어뜨려 놓고는 놀랐다고 거짓말하는 게 좀 양심에 찔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 어물쩍 시선을 돌리며 남한결이 남은 용품들을 치우는 걸 구경했다. 얼마나 급하게 뛰어온 건지 아까만 해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샤워가운이 남한결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느슨하게 벌어졌다. 언뜻 드러난 가슴이 탄탄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래에는 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왜일까? 참, 알다가도 모르겠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남한결이 목욕용품을 이미 원래 있었던 곳으로 전부 돌려놓았다는 걸 한 박자 늦게 눈치챘다. 작업을 마친 남한결이 자연스럽게 문 쪽으로 다시 몸을 틀었다. 보나 마나 아까처럼 도망갈 게 뻔했다.

이럴 거면 이런 짓까지 계획할 이유가 없었다.

“야.”

돌아보는 남한결의 손을 잡아 욕조 쪽으로 당겼다. 내 예상치 못한 행동에 놀랐을 남한결이 휘청했고, 몸의 하중이 자연스레 뒤로 쏠렸다. 즉, 욕조 안으로.

“…….”

“…….”

운동 신경이 좋은 놈답게 어떻게든 몸을 지탱해 내긴 했지만 그래도 순식간에 몸의 반이 욕조에 잠기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푹 젖은 샤워가운을 내려다보던 남한결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기껏 말려 둔 보람이 없게 다시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날 보는 얼굴은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난 꾹 웃음을 참으며 남한결의 아래로 손을 뻗었다. 물 안에서 흐물흐물 풀리는 샤워가운의 끈을 잡아 풀고는 약간 벌어진 입술 위로 내 입술을 꾹 눌렀다.

“결아.”

그러고는 우리가 왜 내가 남한결의 남은 옷을 벗겨야 하는지에 대한 타당한 설명을 건넸다.

“우리 커플룩 하자.”

매듭이 풀린 가운 사이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남한결의 매끈한 상체가 드러났다. 난 걸리적거리는 가운을 마저 젖히며 남한결에게 깊이 입을 맞췄다. 손으로는 남한결의 잘 짜인 복근을 더듬었다.

몸의 긴장을 풀고 아래로 끌어당기는 듯한 따뜻한 물과 대체 어디서부터 흐르는 건지 장담할 수도 없을 정도로 날 감싸는 남한결의 향이 지나칠 정도로 야했다.

놀라서 멈춰 있던 남한결은 내가 바지를 벗기려 들 때가 되어서야 몸을 일으켰다. 다급하게 내 손을 저지하듯 감싼 손은 바지를 벗기지 못하게 막았다.

“…이로빈.”

내게 경고하는 음성이었다. 힘을 주고 있는지 끝이 잔뜩 긁힌 목소리는 그러나 역효과만 냈다. 남한결도 나처럼 흥분했다는 걸 알려 주는 신호가 기꺼웠다.

“잠깐.”

하얀 목덜미를 핥으려던 시도가 좌절되고서야 고개를 뺐다. 몸에 힘을 줘 날 슬쩍 밀어낸 남한결이 눈을 맞춰 왔다. 난 남한결의 손에 잡힌 손을 꼼질대며 물었다.

“왜. 싫어?”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우리 둘 다 알았다. 남한결이 작게 한숨을 쉬며 잡고 있던 내 손에 깍지를 꼈다. 다른 손으로 내 얼굴을 끌어와서 눈가며 볼에 짧게 입을 맞추는 행위는 나를 달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입술이 닿았다.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놓은 남한결이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거 아닌 거 너도 알잖아.”

이렇게까지 말하지 않으면 물러서지 않을 나를 알아서인지 남한결치고는 솔직한 말이 넘어왔다. 예상한 바이기도 했다. 닿으면 선다는 말이 나 한정 사실이라는 걸 깨닫게 한 여러 밤을 꿋꿋이 견뎌 내던 남한결을 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았다.

그날 이후로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는 것도.

“왜. 내가 아플까 봐?”

“…….”

”또 울까 봐서?“

대답 대신 젖은 내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다정한 손길은 암묵적인 긍정의 표현이었다. 말로 하지 않음에도 남한결의 마음이 느껴졌다. 자신이 참더라도 날 절대 아프게 하기는 싫다는 다짐도 함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죽을 만큼 아파도 좀 참을 걸 그랬다. 늦어도 너무 늦은 후회를 하며 난 남한결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볍게 부딪쳤다. 입술을 대 주는 남한결의 목 뒤로 손을 깍지껴 잡고는 이마를 맞댔다.

“한결아.”

“…….”

“대답해.”

“응.”

이상한 일이지만 남한결이 겁을 낼수록 난 터무니없을 정도의 용기를 내곤 한다. 어쩌면 이건 너와 내가 앞으로도 둘이어야만 하는 이유일지 모른다. 우리는 멈칫한 다른 한 사람에게 손을 뻗어 끌어 줄 만큼 서로를 믿고 사랑하니까.

“거짓말은 안 할게.”

“…….”

“그날 진짜 아팠거든?”

“…….”

“근데… 좋기도 했어.”

내 입술에 고정됐던 남한결의 시선이 서서히 올라왔다. 난 붙어 있던 이마를 떼고는 남한결과 눈을 맞췄다. 까만 눈동자 속에 오롯이 담긴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네가 흥분한 모습도 봤고. 사정할 것 같을 때는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디 만지기를 좋아하는지, 무슨 소리를 내는지도 알 수 있고.”

“…….”

“그런 건 섹스하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잖아.”

아찔한 그 고통을 잊지 못하는 주제에 섹스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꺼내지 못한 이유였다. 솔직히 쉽진 않았다.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일을, 그것도 나보다 덩치 큰 남자 밑에서 깔려서 한다는 게. 꼬리뼈까지 찌르르하게 느껴지는 고통을 겪고 나서는 더 어려워졌다.

그래도 언제나 남한결을 볼 때면 아래에서부터 가볍게 끓어오르는 흥분은, 나로 인해 흥분한 남한결에게 어떻게든 몸을 비비고 싶어지는 이 감정은 역시나 오늘도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나도 사람이고, 남자인데.”

“…….”

“나도 너 흥분하는 거 보면 좋고, 빨고 싶고. 너랑 조금이라도 더 붙어 있고 싶어.”

“…….”

“그래서 이러는 거야. 대책 없이 꼬시는 게 아니고.”

아플 거 뻔히 알고 이렇게 꼬시는데 이보다 더 진심일 수가 있나?

스스로 어이없어 웃는 순간조차도 남한결이 같은 마음인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애가 탔다. 빤히 날 보고 있는 얼굴로 다가가 볼을 맞댔다. 더 뭘 못하게 막은 건 자신이면서, 한 박자 빠른 남한결의 흥분에 젖은 숨소리를 들으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붙은 우리의 심장이 비슷한 속도로 뛰었다. 물이 고이듯 찾아오는 안정감은 낯설지 않다. 난 남한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내게만 허락된 그 안락한 품을 마음껏 즐겼다.

이 품 안에서는 얼마든지 솔직해질 수 있었다.

“솔직히 다른 방식도 생각해 봤는데, 네가 아픈 게 더 싫어서 관뒀어.”

천천히 허리를 감싸는 팔을 느끼며 남한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입술에 감겨 오는 부드러운 살의 감촉과 그 너머에서 움찔대는 근육을 느끼며 말했다.

“한 번만 더 해 보자, 우리.”

“…….”

“대신 좀만 덜 아프게 해 봐, 이번엔. 또 막 들지 말고. 힘자랑은 헬스장에서 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이 터졌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남한결이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게 맞닿은 가슴으로 느껴졌다. 곧 남한결이 어깨에 붙어 있던 내 얼굴을 조심스레 떼어 내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

“넌 왜….”

넘칠 듯한 눈을 한 남한결이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몰랐는데 그새 코가 빨개져 있었다.

“이런 순간조차 사람을 울고 싶게 만들어.”

남한결이 내게 솔직해지는 순간이 좋다. 굳이 이런 순간이 아니래도 최근 남한결과 겪고 있는 하루하루가 그랬다. 질투를 비추는 일이 늘어나고, 내가 먼저 해야만 조심스레 해 오던 스킨십도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횟수가 늘어났다.

걸음의 속도가 천천히 맞춰진다. 네가 내 등을 볼 필요도, 내가 네 등을 볼 필요도 없었다. 대신 우리는 옆에 선 서로를 보았다.

꼭 지금처럼.

네 눈에 비치는 내가 선명한 건 네가 눈을 깜빡이는 시간까지 아껴 가며 날 보고 있어서겠지.

“너 그거 모르지, 결아.”

난 오늘도 날 가득 채우는 그 눈에 얌전히 담긴 채로 남한결을 향해 웃어 보였다.

“너 우는 거 되게 예뻐.”

“…….”

“남한텐 절대 보여 주지 마. 나 화낼지도 몰라.”

나 나름의 진심이었는데 남한결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뭐라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발간 눈가를 접어 가며 웃는 놈이 예뻐서.

웃음이 잦아들고 미끄러지듯 시선이 얽혔다. 남한결이 어깨를 움직여 제 몸을 감싸고 있던 가운을 완전히 벗어 던졌다. 욕조 아래로 떨어지는 가운을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

“…….”

욕조 밖으로 어정쩡하게 걸치고 있던 발을 욕조 안으로 넣은 남한결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혼자면 몰라도 남자 둘을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좁디좁은 욕조였다. 남한결이 무릎을 좀 옮긴 것만으로 뒷머리가 금세 욕조 끄트머리에 닿았다.

언뜻 보아도 팽팽한 남한결의 아랫도리를 힐끔대던 시선은 돌려질 수밖에 없었다. 큰 손으로 내 목덜미를 틀어쥔 채 제 혀를 깊숙이 집어넣은 남한결 때문이었다. 목구멍 안까지 들어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깊은 입맞춤은 숨을 헐떡일 수밖에 없게 했다. 자동으로 벌어진 다리 사이로 남한결이 자리를 잡는 게 느껴졌다.

따지자면 천이 사이에 있는데도 부푼 성기의 모양까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게 신기했다. 그 크기를 아는지라 저렇게 갇혀 있는 게 답답할 것도 같았다. 벗겨 주고 싶은데 남한결은 깍지 끼고 있는 손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난 남한결이 입술을 떼 준 틈을 타 겨우 입을 열었다.

“하아… 너 바지…”

“…….”

“벗겨 줄게.”

목을 핥는 남한결은 못 들은 척 깍지 낀 오른손에 더 힘을 줬다. 그러고도 움찔대는 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결국에는 뒤의 벽에 손을 붙여 고정하기까지 했다. 다른 한 손은 제 허벅지 밑에 고정했다. 움직이기가 배로 불편한 자세였다. 바지를 벗기는 건 고사하고 몸 곳곳을 간지럽게 만드는 입술에 저항하기도 힘들었다.

“읏… 야….”

뭐라 말을 하려고만 하면 제 입술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을 정도가 되어서야 입술을 놓아준 남한결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알아서 벗을게.”

“…….”

“일단은 너부터 좀 어떻게 하고.”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는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입을 틀어막겠다는 목적에 충실하던 방금의 키스와는 사뭇 다른 진득하고도 느린 키스가 이어졌다.

처음에도 잘했는데, 어째 갈수록 키스가 더 느는 걸까. 적당한 세기로 혀를 갖고 놀다가 마지막에는 꼭 아랫입술을 살살 빠는데 그럴 때마다 목 뒤의 솜털이 바짝 서는 것만 같았다. 우리가 있는 곳이 물로 가득한 욕조 안이라서 더 그랬다. 물에 젖은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춥춥, 하는 소리가 우리의 귓속으로 고스란히 고여 들었다.

물 안에서 내 성기를 찾아 쥔 남한결이 기둥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살살 달래듯 기둥을 부드럽게 쓸다가도 이내 태도를 바꾸어 자비 없이 요도를 문지르는 손길이 몸을 잔뜩 긴장하게 했다. 손이 빨라질 때마다 남한결의 팔꿈치와 물이 부딪쳐 나는 참방대는 소리가 귀를 가득 메웠다.

“하….”

“…….”

“아읏- 아…!

허벅지에 힘이라도 들어갈라치면 남한결은 내가 무너지지 못하게 뒤로 밀었다. 심지어 더 물러날 곳이 없는데도 그랬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고개를 뒤로 젖히는 것뿐이었다. 그조차가끔 고개를 든 남한결이 입술로 돌진할 때면 불가능했다.

“하윽… 읏-.”

남한결이 익숙하게 유두를 찾아 물었다. 받아 놓은 물의 높이가 앉으면 딱 가슴 정도에 올 정도였던 탓에, 남한결은 물에 목까지 잠긴 채로 찰랑이는 물결 사이로 드러나는 작은 돌기를 혀로 굴려 가며 빨았다.

처음에만 해도 낯설던 행위는 이제는 남한결이 돌기를 문 것만으로 끙끙댈 만큼 나를 느끼게 했다. 무엇보다 눈을 내리깐 채로 내 유두를 빠는 데에만 집중한 남한결의 표정이 날 그렇게 만들었다. 가끔 내 얼굴을 확인하려는 듯 고개를 드는 남한결의 나른한 눈매를 확인할 때면 등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쾌감이 느껴졌다.

위와 아래를 괴롭히는 행동은 그 어느 쪽도 날 쉬이 봐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손조차 자유롭지 못하니 더욱 그랬다. 익숙한 사정감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결아, 아….”

“응.”

“읏, 나 지금… 하, 윽….”

“어. 잘하고 있어.”

이렇게 만져 주는데 흥분하지 않는 게 더 힘들 터라 딱히 칭찬받을 일은 아닌데도 남한결의 뜻 모를 칭찬은 계속 이어졌다. 귀를 핥는 혀보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가 날 더 자극한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남한결의 손이 선단을 힘주어 문지른 것과 동시에 허벅지를 옥죄게 하던 긴장이 풀렸다. 벽에 고정해 뒀던 오른손을 내려 준 남한결이 긴장이 풀린 내 어깨 밑으로 제 손을 넣었다. 등을 받쳐 주려는 손길에 저항 없이 몸을 맡기다 말고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읏…! 야!”

한 번 뺐으니 이제는 남한결의 차례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 예상이 틀렸다는 듯, 방금 사정을 마친 성기를 쥐는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왜 나만… 읍-.”

항의하려다 말고 또 입술이 틀어막혔다. 가만 보니 아주 버릇이었다. 괘씸하다가도 부드럽게 혀를 감아올리는 행동에 속수무책으로 말린다는 게 문제였다. 저항의 의지를 잃고 흐물흐물하게 입술을 받아 낼 때가 되어서야 입술을 꼭 누르는 무게가 덜어졌다.

몇 번을 훑은 것 같은데도 남한결의 몸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입 안을 즐기는 순간이 좋았다. 성격만큼 반듯이 난 치아를 혀끝으로 장난스럽게 건드리다 말고 우뚝 굳었다.

“읏….”

붙은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샜다. 구멍을 파고든 손가락 때문이었다. 물속에 있어서인지 별다른 저항 없이 진입에 성공한 긴 손가락이 점막 안을 눌렀다. 순간 힘이 바짝 들어간 아래에 머리가 차가워졌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확실히 이물감이 덜했다. 질끈 감은 눈을 뜨려던 순간 안을 파고드는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났다. 척추까지 뻣뻣이 굳는 느낌이 들었다.

얼음같이 굳은 몸을 풀게 한 건 허리를 지분대는 손길이었다. 제 입 안에서 갈 길을 잃은 내 혀를 감싸 오는 말랑한 혀에 목 뒤로 넘어오던 신음이 삼켜졌다. 허리를 부드럽게 문지르는 손길은 의지와 상관없이 굳은 몸의 근육을 달래는 것 같았다.

난 남한결이 의도한 것처럼 아래의 힘을 풀려 노력하며 밭은 숨을 내쉬었다. 입술을 뗀 남한결이 내 다짐을 받기 위해 말했다.

“아프면 말해.”

그런 목소리로 말하는데 어떻게 아프다고 말하냐.

그래도 아직은 참을 만했다. 난 신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다고 했는데도 손가락 개수는 더 늘어나지 않았다. 대신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키스가 이어졌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입술에 헐떡대며 난 남한결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방금까지 입술을 대고 있던 쇄골에서 느리게 떨어지는 남한결의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 분주하게 움직였다.

흥분에 젖은 촉촉한 눈동자를 보니 얼마나 참고 있는지가 눈에 훤했다. 날 아프지 않게 하려고 느리게 하는 건 알겠는데, 더 참는 건 나에게나 남한결에게나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물 안이라 덜하긴 하대도 구멍 안을 들락거리는 손가락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이물감을 선사했다. 어차피 이물감이 느껴질 거라면 좀 덜 아파지자고 손가락을 늘리는 것보다 차라리 남한결의 것을 넣고 익숙해지는 게 나을 듯했다.

“한결아. 그냥….”

“…….”

“그냥 네 거 넣자.”

멈칫한 남한결의 시선을 마주한 채로 아래를 눈짓했다.

“물 안이라 저번보다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

“손보다는 네 게 나을 것 같아. 기분도 그렇고.”

한참을 말없이 날 보던 남한결이 내 등을 받친 손을 뗐다. 안에 머물러 있던 손가락이 빠져나간 것도 동시였다. 등 뒤에서 움직이는 손이 느껴진다 싶더니 곧 쏴, 하는 소리가 났다. 아마 배수구를 막고 있던 마개를 뺀 모양이었다.

가슴께에서 찰랑대던 물의 높이가 점차 낮아졌다. 사라지는 물 사이로 드러나기 시작한 남한결의 몸에 시선이 꽂혔다. 언제 보아도 신기한 몸이었다. 벌어진 어깨나 하루아침에 쌓인 게 아님이 느껴지는 근육들은 매끄러운 선으로만 그려 놓은 듯한 고운 얼굴과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았다.

알아서 벗겠다는 말을 그냥 한 건 아니었는지 남한결은 바지를 벗고 있었다. 그 와중에 속옷은 입지 않았다. 그 사실에 흥분이 되면 이상한 건가.

아랫입술을 물며 바지를 욕조 밖으로 떨어뜨리는 옆얼굴을 응시했다. 천천히 시선을 내린 곳에는 배에 올라붙다시피 한 성난 성기가 보였다. 도통 익숙해질 수 없는 크기야 그렇다 쳐도 볼수록 남한결 같은 물건이었다.

“뭘 그렇게 보는데.”

묵묵히 바지를 벗기에 모르는 줄 알았는데, 모르는 척 중이었나 보다. 더는 그러는 척도 하지 못한 남한결이 제 손으로 내 눈을 덮었다. 조금 전까지 제가 하고 있던 행위를 잊은 것처럼 민망함이 담긴 어투에는 피실 웃음이 흘렀다.

“아니, 새삼 너 몸 좋다 싶어서.”

대답 대신에 배수구로 물이 빠져나가는 소리만 멎었다. 완전히 물이 다 빠져나간 건 아닌지, 골반이 잠길 정도로는 물이 고여 있는 상태였다. 난 손을 들어서 내 눈앞을 가린 남한결의 손을 치웠다.

바로 앞에 얼굴을 대고 있었는지 손을 치우자마자 보인 남한결의 얼굴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눈을 휘어 웃는 미소가 근사했다.

“좋겠네. 그것도 네 거여서.”

살다 보니 남한결한테 이런 닭살 돋는 멘트도 들어 본다. 감동이 반쯤 섞인 웃음은 남한결의 입 안으로 고스란히 삼켜졌다. 쪽쪽대듯 가볍게 입을 부딪치고 나서야 남한결이 날 서서히 눕혔다.

“여기서 해도 괜찮겠어?”

“응. 따뜻하고 좋은데. 너랑 나랑만 있는 것 같고.”

애초에 완전히 눕기는 불가능했기에 누웠다는 구색을 갖출 정도로만 몸을 기댔다. 뒷머리가 욕조 끄트머리에 닿았다. 욕조 바닥과 허리 사이에 생긴 틈은 남한결의 팔이 메우고 있었다. 이두근이 설 정도로 힘을 주고도 딱히 힘들어 보이진 않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욕조가 좁은 탓에 아무래도 다리를 벌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내 양발을 들어 욕조 바깥으로 걸치듯 올려놓은 남한결이 내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다리를 훤히 벌린 자세가 익숙하지 않아서 자꾸 아래를 힐끔거릴 수밖에 없었다.

“긴장하지 말고.”

그게 긴장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남한결이 쥐고 있던 내 발목에 가볍게 키스했다.

“야, 간지러워…!”

웃으며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멈칫했다. 방금 제가 입술을 묻은 내 발목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남한결 때문이었다.

태권도를 그만두기 전 마지막 경기에서 산산조각 날 정도로 부서진 뼈 때문에 심었던 철심을 빼내는 과정에서 생긴 흉터였다. 평소에는 양말로 가려질 가려졌지만 이렇게 알몸인 상태에서는 가릴 수가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괜히 민망해져서 남한결이 묻지도 않은 설명을 덧붙여야 했다.

“아, 그거 별건 아니고. 경기하다가 생긴 건데… 생각보다는 좀 크지?”

“…….”

“타투로 덮을까도 생각했었는데… 딱히 그리고 싶은 게 없어서. 뭐, 그래도 가끔 보면 내가 운동은 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아예 쓸모없는 건….”

남한결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복사뼈 아래로 자리한 긴 흉터 주위를 쓸다가 조용히 물었을 뿐.

“…아파?”

내게로 돌아온 눈이 슬퍼 보였다. 난 눈을 맞춘 채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심이었다. 흉터가 색이 바랠 정도의 시간이 지났고, 내게는 이제 상처를 남긴 태권도보다는 다른 것들이 중요했다. 예를 들어서 내 상처를 보고 제가 더 아픈 얼굴을 하는 남한결처럼. 남한결만이 날 웃고 울게 할 수 있었다.

“원래도 괜찮긴 했는데, 네가 뽀뽀까지 해 주니까 하나도 안 아파.”

“…….”

“진짠데.”

웃으라고 한 소리인데 남한결은 웃는 대신 아까처럼 발목에 입을 맞췄다. 한참 전부터 홀로 색이 달랐던 곳을 입술로 가만히 누르는 행위는 마치 그 시간에 대고 위로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까보다 깊은 입맞춤이 상처의 길이만큼 길게 이어졌다.

끝의 끝까지 꼼꼼히 입을 맞춘 후에야 남한결의 시선이 내게 돌아왔다. 눈을 맞춘 채로 조곤조곤한 설명을 덧붙이는 얼굴이 차분했다.

“네가 정말 타투로 덮고 싶은 거면 내가 도안을 그려 줄 수도 있는데.”

“…….”

“네가 괜찮으면 이대로 둬도 될 것 같아.”

“…….”

“예뻐.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그 어떤 말로도 지금 느끼는 감정을 표현할 수가 없어서 입술을 맞대야 했다. 점차 농밀해지는 입맞춤은 우리가 뭘 하려고 했는지를 깨닫게 했다. 당장이라도 더 닿고 싶은 우리에게 지금 그보다 더 적합한 행위가 없으리라는 것도. 남한결이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한 것도 동시였다.

“안 아프게 할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까지 지켜본 남한결이 고개를 내렸다.

응? 고개를 왜 내리지?

“하윽…!”

“…….”

“야, 야! 너 지금 무슨!”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 몸이 벌벌 떨리는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는 당사자만이 태연했다. 버둥대며 몸부터 일으키려는 내 허벅지를 힘주어 잡아 벌리면서도, 구멍에 혀를 대는 행위가 거침없었다.

한 번도 누군가의 숨이 닿아 본 적 없는 곳에 닿은 혀는 구멍의 주름을 하나하나 핥고 있었다. 할짝대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내릴 때마다 고환에 볼이 닿을 정도로 둔부 사이에 깊게 얼굴을 파묻은 남한결의 머리꼭지가 보였다.

몸을 뒤로 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 머리만 핑핑 돌았다. 뭐라도 붙잡기 위해 뻗은 손은 결국 남한결의 머리카락까지 쥐었다.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간질거리는 감각이 입술을 덜덜 떨리게 했다.

“아, 야… 한결아…”

“…….”

“으읏… 야… 이거… 이거 아닌 것 같… 아! 읏!”

내가 들어도 우는 것 같은 소리가 흘러 나갔다. 평소였으면 고개를 들었을 남한결은 이번만큼은 멈추지 않았다. 되려 겉을 할짝대던 아까와는 달리 대담하게 안으로 혀를 밀어 넣기도 했다. 손가락과는 감촉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다른 축축한 혀가 안을 장난이라도 장난치듯이 넘나들었다. 저항 없이 혀를 받아들이는 안은 마치 그걸 부추기는 것처럼 수축했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혀의 넓은 단면이 느리게 수축하는 점막과 닿을 때면 회음부에 남한결의 코가 닿는 느낌이 생생했다.

“으읍, 으…, 하아….”

결국 아래도 보지 못하고 피하지도 못하고 눈만 질끈 감아야만 했다.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깊은 곳에서 서서히 올라오는 흥분이 낯설다 못해 미칠 것 같은 감정을 선사했다.

한술 더 떠서 남한결이 내 성기를 쥐고 흔들어왔다. 엉덩이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하얗고 긴 손으로 기둥을 사정없이 쓰다듬고는 아래위로 흔들었다.

“흐, 으읏!”

점차 저항감이 옅어지는 아래는 뭐라도 푹 찌르면 들어갈 정도로 풀려 가고 있었다. 그걸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 남한결이 드디어 얼굴을 뗐다. 온몸을 기어가는 듯한 간질거림에서 해방되고 동시에 핏줄이 선 성기가 방금까지 혀가 드나들었던 곳 주위를 맴돌았다.

삽입의 순간이 다가오지만 긴장할 힘조차 없었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남한결의 손끝에서 액을 토해 내는 성기를 보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몸을 떨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그런 기분이 드는 건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내 몸이 내 것 같지 않았다.

허벅지를 벌리는 손을 느끼고서야 눈에 힘을 줄 수 있었다. 어느새 욕조 안으로 떨어진 발을 다시 욕조에 걸치던 남한결과 눈을 맞춘 순간, 굵은 살덩이가 빠르게 구멍 안으로 파고들었다. 꿈틀거리는 성기가 갈수록 좁아지는 내벽을 파고드는 느낌이 생생했다.

“읏… 아아!”

“이로빈.”

“흐윽… 하아- 흐….”

“로빈아. 나 봐.”

눈앞을 하얗게 점멸시키는 고통 속에서 날 건져 올린 건 남한결의 목소리였다. 로빈아, 로빈아. 익숙한 목소리에 집중하려 애쓰며 미간에 힘을 줘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한 손은 골반 위에 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단단하게 허리를 받친 채로 남한결이 내게 입맞춤을 쏟아부었다.

눈을 찡그리면서도 남한결과 시선을 맞췄다. 일단 확인부터 해야 했다.

“다… 다 들어온….”

“응. 다 넣었어.”

“하아, 하….”

“잘했어. 예뻐.”

말을 잇기가 힘들긴 해도 저번처럼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숨을 몰아쉬며 남한결의 등 뒤로 더듬더듬 팔을 둘렀다.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남한결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듯 조이는 아래를 그보다는 한 박자 느리게 쳐올리는 성기로 인해 안이 움찔대는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

무언가를 참는 듯한 낮은 신음을 흘리며 남한결이 내 귀를 깨물었다. 힘 조절이 안 되는 탓인지 세게 깨물었다가 이내 미안하다는 듯 살살 혀를 굴려 대는 통에 귀가 온통 축축해졌다. 물이 살과 부딪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래가 틈 하나 없이 맞닿은 것 같기도 한 소리가 파도처럼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온몸이 남한결로 젖어 드는 기분이었다. 고통을 삼켜 내는 중에도 안에서 꿈틀대는 남한결의 성기가 느껴진다는 게 신기해서 자꾸 숨을 멈췄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아래를 뭉근하게 건드리는 남한결의 성기는 그 안을 벌써 제가 지배하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남한결의 성기가 주름 안을 꾸준히 파고들고 또 물러날 때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간질거림이 배 속을 긁었다. 그에 집중하려 들 때면 남한결의 성기가 꿈틀거리며 빠졌다가 이내 다시 좁은 곳을 벌려 들어오곤 했다.

“로빈아.”

“흣….”

“이로빈.”

“…응….”

“움직일 거야. 괜찮아?”

이미 움직이고 있으면서 묻는 저의를 알 수가 없음에도, 그걸 묻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골반을 단단히 붙드는 손이 느껴진 것과 동시에 안을 꽉 채우고 있던 남한결의 성기가 뒤로 빠졌다. 꼭 물고 있던 성기를 놓은 구멍이 아까보다는 느리게 수축하는 게 느껴졌다. 마치 제 몸에서 빠져나간 남한결의 성기를 아쉬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소한 감각에 눈을 힘겹게나마 뜬 순간 남한결의 성기가 예고 없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더 이상의 저항은 용납하지 않겠다며 안을 푹푹 찔러 오는 성기에 허벅지가 경련하듯 떨렸다.

“흐흣, 아!”

떨리는 내 허벅지를 자신의 허리에 감은 채로 남한결이 깊게 몸을 겹쳐 왔다. 아래를 드나드는 속도는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깊은 곳까지 어떻게든 파고들려는 성기 때문에 몸이 움찔거릴 때면 남한결이 등을 쓸며 입을 맞췄다.

무뎌진 건지, 아래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다른 감각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남한결의 손이 엄지와 검지 사이로 유두를 끼워 비틀 때면 흐느낌과도 같은 신음이 흘렀다.

“으응….”

부어오른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흐르는 신음조차 내 것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깨에 입을 맞추던 남한결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아래서 찰박대는 물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좋아.”

“웃, 후으, 읏!”

“…아, 좋아, 로빈아.”

남한결이 뱉는 음절마다 짙게 묻어나는 흥분이 고통과 쾌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머리를 자극했다.

“흐읏, 나도….”

홀린 듯한 말을 들었는지 성기를 쳐올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처음에만 해도 눕혀져 있던 몸은 이제 앉은 것도 누운 것도 아닌 자세로 남한결에게 매달려 있었다. 단단한 허리에 감았던 발이 허공에 치켜들어진 채로 달랑달랑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남한결의 얼굴을 끌어와 입술을 맞댔다.

더는 헷갈릴 수도 없는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하아, 하, 읏, 아!”

점점 빨라지는 허리 짓은 남한결에게도 절정의 순간이 머지않아 찾아오리란 것을 암시했다.

“흐읏- 아…!”

“하아.”

남한결이 미처 삼키지 못한 숨을 깊게 뱉으며 눈을 떴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과 그 사이로 드러난 까만 눈동자가 날 올곧이 담는 순간을 눈조차 떼지 않고 지켜봤다. 내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 남한결의 성기를 느끼며 이 순간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말을 뱉었다.

“…한, 결아.”

“…….”

“사랑해.”

머리를 들어 올리기 힘들 만큼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두려움을 이겨 내고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완벽한 순간이 아니고서는 널 또 어떻게 안심시키겠어, 내가.

“사랑해, 널.”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남한결이 등을 받치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더는 버틸 수 없는 몸이 나란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안을 메우던 성기가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정액을 느끼며 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우는 남한결의 볼을 끌어와 맞댔다.

***

둘 다 덩치가 있는 편이어서인지 욕조 옆 빈 곳에 나란히 서 칫솔을 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거울이 꽉 찼다. 그보다 더 좁은 욕조에서는 어떻게 붙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난 입을 마저 헹구고는 남한결의 허리를 툭툭 친 후 밖을 눈짓했다.

“먼저 나갈게. 천천히 나와.”

칫솔을 입에 문 남한결은 지나가기 쉽도록 몸을 앞으로 당겨 주기까지 했다. 울었던 여파가 남은 얼굴로도 순순히 몸을 돌리는 놈이 귀여워서 엉덩이를 툭툭 쳐 줬더니 쓱 돌아보다 말고 몸을 숙여 입을 헹군다. 이제 이것 가지고는 놀라지 않는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좀 섭섭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꾸 놀리고 싶은 걸 봐서는 후자에 가까운데, 이걸 또 입 밖으로 내면 영원히 화장실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냥 생각만 했다. 방금도 손장난을 하다가 샤워만 한 시간을 한 참이었다.

“어후….”

화장실 안에서 오래 있긴 한 모양인지 거실로 나오자마자 마주한 햇살이 눈부셨다. 일요일 오후, 같이 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머리부터 굴릴 정도로.

밥 먹고 같이 농구나 하러 갈까. 아, 안 되겠다. 남한결 목이 또 빨개질지도 몰라. 그나저나 배고픈데, 먹을 거 있나? 뭐라도 시켜 놓을까?

베란다 밖을 기웃거려도 보고, 냉장고도 한번 열어 보고. 화장실에서 나올 때만 해도 조금 뻐근하던 아래는 행동반경을 넓힐수록 오히려 더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배달 애플리케이션을 켜기 위해 핸드폰을 찾으려고 뗀 걸음은 거실에 멎었다.

“…어?”

마치 내가 찾으려고 했음을 안 것처럼 때맞춰 제 존재를 드러내는 핸드폰이 신기했다. 그나저나 아침부터 웬 전화지. 걸음을 빨리해 소파 옆 탁자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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