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31)

“아, 진짜….”

분명 알람까지 맞췄건만 기다리던 기계음 대신에 허전한 옆자리를 느끼며 눈을 떴다.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게 만든 당사자는 방금 일어났다고는 보기 힘든 깔끔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한 손에는 리모컨을 든 채 텔레비전을 집중해 보던 얼굴이 문가에 선 날 향했다.

알아듣기 힘든 음성이 나오는 영화나 무릎에 올려 둔 노트북을 보니 저번에 한다던 교양 과제 중인 듯했다. 프랑스 영화랬나. 같이 봐 주겠다며 옆에 앉아 놓고는 반도 보지 못하고 잠이 들었던 걸 기억해 낸 나는 미련 없이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는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너보다 빨리 일어날 수 있는 거야?”

부루퉁하게 나간 질문에도 남한결은 웃기만 했다. 달래려는 듯 손을 뻗는 놈에게 다가가 순순히 안겼다. 면도까지 깔끔히 마친 턱에 볼을 대자 남한결이 내 등을 꼭 껴안았다. 목에서부터 시작해서 등을 둥글게 쓰는 손은 잠을 깨우는 데는 도통 소질이 없었다.

이러다가는 또 잘 것만 같아서 붙어 있던 몸을 뗐다. 한 손으로는 여전히 내 어깨를 감싼 채로 남한결이 허벅지에 불편하게나마 올려 두고 있던 노트북을 옆으로 치웠다.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뻑뻑하게 만드는 글자들을 아침부터 굳이 보고 있는 걸 보니 완벽주의자라던 은영이의 말뜻을 알 것도 같았다. 심지어 저건 지난번에 거의 끝냈다고 한 게 아닌가.

하품하며 그런 생각을 하는데 리모컨을 내려놓던 남한결과 눈이 마주쳤다. 난 손가락 끝으로 텔레비전 화면을 가리켰다.

“다 했다며.”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서.”

공부하겠다는데 말릴 수도 없고. 한숨을 삼키며 확인한 시계는 하루를 시작하기에는 이른 시간임을 확인시켜 줬다. 다행히 이걸로는 잔소리할 게 있었다. 난 팔짱을 낀 채로 남한결의 어깨에 머리를 쿵 박았다.

아, 작은 신음을 흘리며 내려다보는 황당한 눈에 대고 따져 묻기 위해서였다.

“몇 시부터 이러고 있었어.”

“…얼마 안 됐는데.”

“개구라. 말하기 전에 망설이는 거 다 봤는데.”

찔리는 거라도 있는지, 슬쩍 눈을 피한 남한결이 괜히 리모컨을 들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배경 음악처럼 깔리던 프랑스어가 잦아들고 대신 한국말들이 귀를 채우기 시작했다. 의식하기도 전에 돌아간 고개는 아침 방송이 나오는 중인 텔레비전에 멎었다. 잠을 깨우기 위해서인지, 아침이라고는 믿기 힘든 분위기로 목소리를 높이는 방송인들을 보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 코를 툭 건드린 남한결이 화면을 눈짓했다. 어느새 화면에는 오늘의 기온을 보여 주는 여러 날씨 기호들이 떠 있었다.

“오늘 춥대. 따뜻하게 입고 가. 반팔 같은 거 입지 말고.”

이제는 이런 식으로 말을 돌리네, 얘가.

귀여워서 넘어가 주고 싶긴 한데 한편으로는 요새도 잠을 못 자는지 걱정됐다. 진짜 잠이라도 줄여야 하나. 그렇다고 해서 매일 몇 시에 자나 확인하려 밤을 새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다 쟤는 내가 잠이 오는 순간을 기가 막히게 아는 것 같단 말이지. 좀 버텨 보려고 커피를 마시는 날마저도 익숙한 향이 날 껴안는 순간에는 모든 걸 잊어버리곤 했다.

너무 오래 사색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볼을 쓰는 조심스러운 손길을 느끼고서는 고개를 돌렸다. 내 표정을 살피며 남한결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어제는 좀 잤는데.”

“…몇 시간?”

“다섯 시간.”

“진짜?”

“응.”

“많이 늘었네?”

“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솔직히 다섯 시간도 긴 시간은 아닌데, 워낙 못 자던 놈이라서인지 그것만으로도 큰 발전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웃는 날 확인한 남한결의 얼굴에도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다.

“나 혼내지도 말고.”

볼을 가볍게 잡아당기며 애교 아닌 애교까지 부리는 놈 앞에서는 장사 없었다. 남한결에게 와락 달려들어 뽀뽀를 쏟아붓고서야 과제에 남한결을 양보해 줄 생각이 생겼다.

“알았어. 과제 하고 있어. 아침 해 줄게.”

“…밥?”

“토스트라고, 토스트. 기계한테 시킬 거니까 안심해.”

정말 그 말을 듣고서야 안심한 표정을 하는 남한결의 옆구리에 힘을 뺀 주먹을 먹이고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토스터에 식빵을 넣고 남한결이 사용하는 걸 몇 번 본 커피 기계까지 작동시키고는 거실을 확인했다. 커피 기계가 돌아가고 다 구워진 토스트가 튀어 오르는 일정한 소음을 뚫고 들려오는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일상이 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한마디로 완벽했다. 그 어떤 것도 바꾸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고 있을 단정한 뒷모습을 보자니 괜히 마음이 급해졌다. 결국 마지막 식빵이 익기도 전에 옆의 버튼을 눌러 강제로 빼냈다. 이건 내가 먹으면 되지, 뭐. 덜 노릇한 토스트 먹는다고 안 죽는다.

토스트를 접시에 담고, 커피까지도 완료. 바빠진 걸음 소리가 들렸는지 뒤를 돌아보는 남한결에게는 커피잔부터 들어 보였다.

“커피도 타 왔어. 칭찬해 줘.”

대놓고 볼을 내밀자 남한결이 웃었다. 그것도 잠시, 입술이 가볍게 볼에 내려앉았다. 난 만족스럽게 웃으며 토스트를 소파 앞 탁자에 내려놓았다. 여전히 켜져 있는 텔레비전에 시선이 닿았다.

“시끄럽지 않냐? 끌까?”

“별로. 너 볼 거 있으면 봐.”

“뭐, 어차피 나도 티브이 잘 안 봐서.”

스포츠 뉴스면 몰라도. 거기다 아침이라 딱히 재미있는 방송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끄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내가 리모컨을 찾기 위해 몸을 돌릴 때였다. 익숙한 얼굴이 화면에 나타난 건. 핸드폰을 들고 이리저리 설쳐 대는 걸 보니 통신사 광고나 핸드폰 광고 같았는데, 몸에 핏 되는 하늘색 셔츠를 입은 채로 카메라를 향해 자신만만한 미소를 전시하는 남자가 낯설지 않았다. 심지어 마지막 인상이 워낙 강렬했어야지.

자연스레 옆으로 시선이 향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광고 속 남자는커녕 텔레비전에도 관심이 없어 보여서 이름을 불러야만 했다.

“야. 한결아.”

고개를 든 남한결의 시선이 곧장 날 향했다. 난 텔레비전을 눈짓했다. 다행히도 광고는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너 쟤랑 무슨 사이야?”

날 따라 화면을 확인한 남한결이 이마를 슬쩍 찌푸렸다. 그제야 화면 속의 남자가 누구인지를 확인한 모양이었다. 그게 자신과 이상한 자세를 연출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도. 아래로 시선을 내린 놈에게서 곧 빠른 대답이 흘러나왔다.

“사이라고 말할 것도 없어.”

“그래?”

“어.”

눈빛을 보니 그래 보이기는 한다만….

그래도 여러모로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난 입에 물고 있던 토스트를 마저 넘긴 후 남한결에게로 완전히 돌아앉았다.

“근데 그날은 왜 그러고 있었어?”

멈칫하고 날 보는 남한결의 시선을 느꼈으나 딱히 뱉은 말을 철회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키스는 안 했대도, 네가 애초에 아무 사이도 아닌 남한테 그 정도의 거리를 허락하는 애는 아니잖아.”

“…….”

“어떻게 아는 사이인데? 예전부터 알았던 사람이야?”

사실 연예인이고 뭐고 나는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 내가 기껏해야 두 번 본 사람을 이렇게 기억하는 건 그만큼 그 기억이 강렬하거나, 아니면 그 기억에 얽힌 감정이 강렬할 땐데. 그날은 둘 다였다.

남한결에게 가까워지는 남자를 보는 순간 머리가 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충격, 질투, 그리고 혼란스러움 등의 감정이 휘몰아치는 동안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때는 너에게 감히 이런 걸 물을 수도 없던 사이였으므로.

대답을 듣기 전까지 뒤로 물러서지 않을 날 눈치챘는지 남한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난 토스트가 식기 전에 남한결의 입으로 하나를 넣어 주고는 대답을 기다렸다. 다시 확인한 텔레비전에서는 아까의 그 광고 대신 내가 이름조차 모르는 연예인이 나와서 청소기를 홍보하고 있었다. 광고가 두 개 정도 더 지나가고서야 남한결이 입을 열었다.

“…별건 아니고.”

“아니라도 말해 봐. 궁금해.”

“유럽 여행 갔을 때 만났어.”

“여름 방학 때?”

“어. 숙소에서 같은 방 썼어.”

생각지도 못한 만남의 계기에 놀라기도 잠시, 레스토랑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서 억울해졌다. 분명 여행에서 기억나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을 때는 아무도 없다고 해 놓고.

“너 레스토랑에서는 분명 여행에서 기억나는 사람 없댔잖아.”

“그거야 쟤가 기억할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래도 너한텐 말했었던 것 같은데.”

“뭐? 나 기억 안 나. 뭐라고 했었는데?”

“개또라이 만났었다고 했잖아.”

“…….”

“그게 쟤야.”

그렇게 들으니 기억이 좀 났다.

“아….”

그때도 지금도 개또라이라고 단정 짓는 남한결의 단호한 눈빛 앞에서는 혹시 그 이상의 관계가 있었냐고 묻기가 애매했다. 그래, 하긴 누구든지 자신들을 볼 수 있는 곳에서 얼굴도 다 팔린 연예인이 일반인과 키스하는 모습을 연출한다는 게 정상적인 사람이 할 법한 행동 같진 않았다. 그것도 나와 눈 똑바로 마주치면서.

“쟤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아.”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머리를 쓸어 넘기던 남한결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숙소에서 네 사진 잃어버린 것 때문에 내가 좀… 미친 것같이 굴었었어.”

“…사진 잃어버렸었어?”

“어. 근데 쟤가 찾아 줬어.”

“…….”

“그러면서 네 얼굴도 봤겠지. 그러니까 그런 미친 짓도 한 거고.”

이야기를 듣다 보니 뜬금없게만 느껴지던 그 일이 어떤 연결 고리를 가지고 벌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천천히나마 고개를 끄덕이는 날 보던 남한결이 노트북을 앞의 탁자로 내려 두고는 소파 아래에 앉은 나와 눈을 맞췄다.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야. 내가 너라도 신경 쓰일 것 같아서.”

다정하게 설명까지 덧붙이며 머리를 쓰다듬는데 더 뻗댈 수도 없었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남한결과 눈을 맞췄다.

“아냐, 네가 설명해 주니까 궁금했던 것도 풀렸고.”

“…….”

“대신에 너 쟤 또 만날 일 생기면 나 꼭 데리고 가라.”

“…왜?”

순수하기 짝이 없이 넘어온 질문에는 말문이 막혔다.

“너 쟤 좋아해?”

한술 더 떠 질투하며 묻는 얼굴에는 미세한 짜증이 배어 있었다. 가만두면 정말 오해할 기세라 어이없음을 숨기지 못한 채로 대꾸해야 했다.

“뭐래. 둘만 만나면 질투 나니까 그렇지.”

“…….”

“말 나온 김에 이야기하는데, 그날 그거 보고 나 제정신 아니었어. 재균이가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말 안 하는 거 처음 봤다고 했던 거 기억나냐?”

“…….”

“근데 좀 억울한 게, 말을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였다고. 묻고 싶은 거라곤 ‘너 왜 걔랑 키스했어?’ 이딴 거밖에 없는데 네가 ‘뭔 상관이야?’라고 할까 봐 존나 겁이 나 가지고.”

줄줄이 그날의 감정을 털어놓다 보니 성토대회가 되고 있었다. 난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남한결을 느끼고는 말을 멈췄다.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남한결이 고요히 눈을 깜빡였다.

“왜?”

작게 입을 벌린 신기해하는 것 같은 얼굴을 보니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

“너도 그런 감정 느낀다고 하니까 좀 신기해서.”

말끝에 쑥스럽게 시선을 내리는 놈을 보니 괜히 민망해졌다. 당연한 건데, 이게 뭐라고….

그새 빨개진 귀로 뻗어 가려던 손은 번쩍 고개를 든 남한결 때문에 허공에서 멈칫했다. 마주친 남한결의 눈빛이 또렷했다.

“근데… 그래도 되는 거면 나도 할 말 많은데.”

“어?”

“말해도 돼?”

“…뭘?”

귀를 온통 빨갛게 물들인 채로도 남한결이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질투 나니까 하지 말라 그러는 거. 말하면 네가 안 하냐고.”

“…그래야 하지 않을까? 애인이 부탁하는 건데?”

환하게 밝아지는 남한결의 얼굴을 보는데 이렇게 불안한 건 처음이었다.

“뭐든 말하면 다?”

“응, 뭐… 나야 네 말 들어야지.”

“음….”

“…많은가 봐?”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이는 남한결은 대답을 안 했다. 이게 어쩌다 이렇게 흘러가고 있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남한결의 옆에 곱게 앉혀진 채였다. 고민을 끝낸 듯한 남한결이 나와 천천히 시선을 맞췄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스킨십 안 했으면 좋겠어.”

길었던 고민치고는 단순할 정도의 요구였다. 괜히 쫄았네. 난 웃으며 남한결의 입술을 장난치듯 툭 건드렸다.

“에이, 그건 지금도 안 하는데?”

남한결의 한쪽 눈썹이 꿈틀댔다. 제 입술에 얹은 내 손을 잡아 내리는 손길이 꽤 단호했다.

“그거야 네 생각이고.”

엉?

“손잡고 키스하고 이런 것만 스킨십이 아니잖아.”

“…그럼?”

“남 몸 만지고 장난치듯 껴안고 그런 것도 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는데.”

“아….”

남한결이 말하는 스킨십의 범위가 그토록 넓은지는 미처 상상도 못 했다. 심지어 예시가 구체적이었다. 말문이 막힌 날 보고 남한결은 빤히 바라보는 것 외의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마치 내 입에서 그러겠다는 답변이 나오길 기다리는 것처럼.

“음….”

상황이 이 정도까지 흐르다 보니 나도 내가 여태껏 내가 그런 스킨십을 일삼아 왔는지를 돌이켜 볼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워낙 남이랑 살 맞대는 거에 거부감이 없는 편이라 때로는 친밀감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었다. 그래도 맹세코 마음에도 없는 사람이랑 묘한 분위기가 흐를 정도의 스킨십을 한 적은 없는데.

거기다 남한결이 이렇게 마치 보고 말하는 듯이 스킨십을 한 건 기껏해야 재균이나 수진이밖에 없었고. 목덜미를 긁던 난 남한결을 흘깃댔다.

“내가 좀 헷갈려서 그러는데…. 스킨십을 하면 안 되는 대상들에 그런 감정이 아예 없는 사람들도 포함되는 거야?”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침묵하는 남한결의 뜻은 긍정에 가까웠다. 눈으로 보고도 차마 믿을 수가 없어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냥 친구인데? 친한 후배인데도? 재균이 같은 남자 후배도?”

재균이의 이름이 나오자 남한결의 얼굴이 미묘하게 동요했다. 그래, 네가 봐도 재균이한테까지 그런 경계를 하는 건 아니지? 작게 안심하던 순간 남한결의 단호한 말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애인이 있는 사람한테 스킨십을 하는 건 오해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해.”

근데 그 애인이 내 친구잖아. 심지어 나로 인해 둘이 처음 만났는데?

할 말을 잃은 날 보고서도 남한결은 흔들림이 없었다. 얼굴을 보니 여간 굳은 마음을 먹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와는 별개로, 기준이 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멍하니 생각하던 나는 애인이 없는 다른 후배를 기억해 내고는 물었다.

“…그럼 수진이는?”

“애인이 없는 사람한테 그런 스킨십을 하는 것도 오해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듣다 보니 ‘복사’ ‘붙여넣기’라도 한 것 같은 답변이었다. 말하는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는 있는지 남한결이 헛기침을 하며 앞의 커피 잔을 들었다. 커피 잔에 반 이상이 가려지는 얼굴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뭐… 알았어.”

“…….”

“네가 신경이 쓰이면 안 해야지. 뭐든.”

사실 아직도 왜 안 되는지 백 퍼센트 이해가 되는 건 아닌데, 오랫동안 생각해 온 것처럼 말하는 얼굴에 대고 안 된다는 말을 하기가 싫었다. 거기다 남한결의 질투는 이상하게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가끔 좀 과할 때가 있긴 하지만.

“진짜?”

밀어붙인 건 자신이면서 남한결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순수하게 놀라워하는 얼굴을 아침부터 몇 번이나 보는 건지. 토끼 같은 눈을 보며 볼을 쿡 찌르자 이번에는 내 손가락을 떼어 내는 대신 순순히 얼굴을 내어 줬다.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왜 해.”

“…….”

“더 없어? 다 들어줄게.”

허세라도 부리듯이 덧붙인 말에 품에 순순히 안기던 남한결이 멈칫했다.

“…있긴 한데.”

시선을 내리자마자 장난기가 넘실대는 눈과 마주쳤다.

“…더 있다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

선심 썼다는 듯 말하는데 이렇게 사랑스러운 건 반칙이 아닐까. 아무리 봐도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얼굴이었다. 이렇게 웃을 때는 더욱 그렇고.

시계 속의 분침이 아까보다 훨씬 기울어 있다는 건 한참 뒤에야 알았다. 입 안에 남은 잼의 향을 교환하다 못해 결국 토스트를 두 개씩 더 구워 온 우리는 사이좋게 하나씩 물며 시계를 곁눈질했다. 미적거림을 멈추고 현실을 소환한 건 놀랍게도 나였다.

“너 1교시 아냐?”

“맞아.”

“수업 끝나고 카페 갈 거지? 오후 알바니까?”

“…외웠어?”

“그런가 봐.”

쪽지 시험을 위해 공부할 때는 몇 번이고 도망가는 집중력이 이런 데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 눈을 찡긋하는 내 볼에 상 같은 뽀뽀를 남긴 남한결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나 옷 좀 갈아입고 올게.”

시계를 보니 그래야 할 시간이긴 했다. 방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다 문득 앞의 노트북에 시선이 꽂혔다.

아까만 해도 문서 창이 자리하던 곳에는 대신 여러 창이 켜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노트북이랑 정말 똑같이 생겼네. 남한결이 얼마 전 예전에 쓰던 거라며 넘긴 노트북을 떠올리면서 자연스레 터치 패드에 손을 얹던 나는 방으로 고개를 빼 물었다.

“노트북 들고 갈 거야? 꺼 줘?”

답이 돌아오질 않아서 노트북 화면을 보며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화면에 떠 있는 창들을 대충 훑던 시선은 가장 큰 창에 멈췄다. 상태 바에 떠 있는 이미지를 보니 메일인 듯했다.

From: Mark Smith

Date: November 12 8:02 A.M.

To: Hangyeol Nam

Subject: RE: PINST Internship program_Hangyeol Nam

We’re sorry to hear that you could not attend our PINST internship program of 20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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