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영이한테 미리 확인하고 온 보람이 있었다. 실습실 안에 덩그러니 앉은 남한결의 집중한 뒷모습은 누군가와 나눠 보기에는 아까웠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바로 뒤에서 내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발걸음 소리를 죽여 걷다가 남한결이 앉은 의자 뒤 두 걸음을 남기고 섰다.
팔뚝까지 걷어붙인 헐렁한 남방 소매나 종이 위를 오가는 손에 돋은 퍼런 핏줄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선을 이리저리 그은 미완성의 스케치들이 남한결의 앞에 마구잡이로 놓여 있었다. 정리 정돈에 사활을 거는 놈답지 않아서 재미있었다.
입까지 꼭 다문 채 집중한 얼굴은 또 어떻고.
“…….”
그림을 그릴 때는 이런 얼굴을 하는구나.
여태껏 나한테 그림 그리는 걸 보여 줄 때는 나름대로 표정 관리를 했었나 보다. 앞의 그림을 제가 전력을 다해 덤벼들어야 하는 대상처럼 관찰하고, 침묵하다가 이내 거침없이 손을 놀리는 놈을 보는 기분이 이상했다.
결국 한참이나 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출발하기로 정해 놓은 시간을 십 분이나 넘기고서야 남한결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두 번째 손가락으로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톡톡. 하얀 종이 위로 거침없이 선을 그어 대던 손길이 멈췄다.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뒤를 돌아본 남한결의 입이 조그맣게 벌어졌다. 당황에 물든 눈이 깜빡깜빡. 당장이라도 뽀뽀를 쏟아붓고 싶은 동그란 입술을 확인하고는 실습실 안을 한 번 더 둘러봤다.
은영이의 말처럼, 웬만한 야간작업에는 이골이 난 미대생들도 질리게 했다던 과제가 끝난 오늘 실습실을 지키는 모범생은 남한결 말고는 없었다. 난 몸을 숙여 남한결을 뒤에서부터 꽉 껴안았다. 조금의 틈마저 허용하지 않고 꼭 몸을 붙이며 그래도 안은 거라고 우길 수 있는 자세를 만들어 냈다.
어정쩡한 자세로 안긴 남한결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왔어?”
그 와중에도 자신을 껴안은 내 팔을 부드럽게 문지르는 큰 손. 손 마디마디에 난 펜 자국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하며 남한결을 껴안은 팔에 힘을 줬다.
“보고 싶어서.”
품 안에서 꼼지락대던 남한결의 몸짓이 멎었다. 옆얼굴로 고요히 꽂히는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려 웃어 보였다.
“데리러 온 거기도 하고.”
“…….”
“늦었어. 그만하고 가자.”
남한결이 조용히 앞의 종이로 눈을 굴렸다. 마치 남은 할 일이 얼마나 남았는지 세어 보려는 것처럼. 오래 지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인 남한결이 미련 없이 펜을 손에서 놓았다. 남한결을 꼭 껴안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짐을 정리하고 옷매무새까지 정리한 남한결이 가방을 든 채 뒤돌았다. 난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팔을 내밀었다. 팔짱을 끼라는 뜻으로 한쪽 팔을 들어 보이자 남한결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빨리.”
재촉하고서야 남한결이 어색하게나마 내 팔 위로 제 팔을 얹었다. 따지자면 팔짱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이도 저도 아닌 자세로 웃다가 계단을 다 내려왔다. 남은 건 하나뿐. 난 건물을 나서자마자 걸음을 우뚝 멈췄다. 덩달아 걸음을 멈추고 의아하게 돌아보는 시선에 대고 묻기 위해서였다.
“생일을 세 시간 남긴 소감이 어때?”
이제는 쌀쌀하다는 말로 넘길 수도 없는 겨울바람이 남한결의 머리를 헤집었다. 바람을 맞으며 내 얼굴에 시선을 두던 놈이 쑥스럽게 웃었다. 내가 왜 이 늦은 밤 자신을 찾아왔는지를 지금에야 깨달은 얼굴로.
“…최고인데.”
남한결 기준으로는 최상의 감정 표현이었다. 앞으로 실행할 행동에 대한 용기를 주기에도 충분했고.
“그럼 됐어.”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남한결의 팔을 끌었다. 일단 이끄는 대로 끌려온 남한결은 내가 저를 끄는 방향이 집과는 반대인 주차장 쪽임을 눈치채고는 얼떨떨한 낯을 했다.
난 말을 아끼는 대신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했다. 이십 분 전 내 손에 들어온 차 키의 스마트 버튼을 누른 것과 동시에 우리 앞에 있는 흰 차에 번쩍하고 불이 들어왔다.
“타.”
조수석 문을 열어 주고 운전석으로 향해 걷는 날 보는 남한결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그 표정을 볼 때마다 늘 그렇듯 장난기가 동했다.
“호박 마차가 마음에 안 들어?”
“…….”
“왕자님 모시려고 특별히 빌려 온 건데.”
장난을 냉정하게 무시한 남한결이 인상을 찡그리고는 반문했다.
“…집까지 가려고 이걸 빌렸어?”
겨우 집까지 데려가려고 이걸 빌려 온 줄 안 모양이었다. 설명하지 않았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난 잠시 웃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
“그럼?”
“일단 타. 타면 설명해 줄게.”
가만두면 내가 설명할 때까지 서 있을 기세라 결국엔 운전석에 먼저 앉아 버렸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조수석 문으로 남한결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운전석이 더 자연스러운 놈이라 그런지 보조석에 앉아 가방을 밑에 내려 두는 모습은 어색해 보였다.
안전띠까지 꼼꼼히 맨 놈이 나를 보았다. 설명을 내놓으라는 눈빛이었다. 때마침 내비게이션에 입력한 목적지가 낭랑한 음성으로 제 주소를 알렸다.
‘강원 강릉시 경포로 365로 경로를 설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