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발, 이건 할 짓이 아니다.
“…….”
남한결이 미국으로 떠난 지 정확히 21일 되던 날 아침, 눈을 뜬 내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이었다. 한참 천장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싸늘한 옆자리만이 나를 반겼다. 그 자리가 식을 수 있다는 것조차 모르게 날 지켰던 사람은 지금 내 곁에 없었다.
습관처럼 시계를 확인하며 남한결이 있는 뉴욕과의 시차를 계산했다. 한국이 아침 여덟 시니 남한결이 있는 곳은 저녁 여섯 시쯤 되었을 것이다. 퇴근 시간을 준수하는 편인 남한결에게서 곧 전화가 오리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 생각으로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울 속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한 내가 힘없이 양치를 하고 있었다. 나조차 낯선 그 표정을 외면하며 칫솔질에 힘을 실었다.
가르르, 퉤. 몇 번 입을 헹구며 핸드폰을 곁눈질했다.
그래, 어쩌면 얼굴을 보지 않고 통화하는 게 다행일지 모른다. 이런 얼굴 보였으면 분명 걱정만 시켰을 거야.
미국으로 떠나는 순간마저도 내 감정을 살피느라 바쁘던 남한결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면대 위 홈에 엎어 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잠시만, 잠시만! 나 다했어!”
절대 상대방은 듣지 못할 혼잣말도 삼 주 만에 습관이 됐다. 시선을 핸드폰에 둔 채로 젖은 손을 재빨리 수건에 문질러 닦았다. 지난 주 헐레벌떡 전화를 받으려하다가 전화도 못 받고 핸드폰도 박살 낸 일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어제는 십 분 정도 늦게 왔길래 조금 느긋하게 씻었는데 그건 오차 범위를 생각하지 않은 멍청한 짓이었다.
속으로 쌍욕을 하며 핸드폰을 낚아챘다. 신고 있던 욕실 슬리퍼는 거추장스러워서 내팽개쳤다. 저번 주에 알았지만 욕실은 가끔 통신 신호가 끊겼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요즘은 가능한 한 피하고 싶은 상황이기도 했다. 난 그 후로 몇 번 더 헛손질을 하고서야 기다리던 전화를 받는 데 성공했다.
“응!”
- …이로빈?
“응! 받았어!”
- 뛰었어?
“아니, 그건 아니고… 뭐, 따지자면 맞긴 한데.”
차분하고 부드러운 남한결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지금 남한결의 존재를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건 목소리뿐이었다. 난 그 매개체를 꼭 쥔 채 거실을 향해 걸었다.
겨울의 아침치고는 밝은 햇빛이 창가를 통과하고 있었다. 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한 번 보다가 미련 없이 시선을 돌렸다.
“퇴근 중이야?”
- 어.
“마샬이랑?”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제도 그러더니, 남한결은 뭐든 잊어 먹기가 특기인 내가 자신의 퇴근 시간뿐만 아니라 퇴근을 같이하는 인턴 동료까지 기억하는 게 그렇게 신기하고 웃긴 모양이었다. 곧 웃음기를 던 목소리가 건너왔다.
- 음… 아니. 오늘은 나 혼자 퇴근.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난 얼마 전 길을 가다 사 와서 테이블에 방치해 둔 귤을 하나 까먹다 말고 심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헐. 왜? 싸웠어?”
- 뭘 싸워.
“걔 너 옆자리라며. 집도 같은 방향이고. 왜 같이 안 가.”
- 그냥….
“…….”
- 너랑 하는 통화에만 집중하고 싶어서 오늘은 따로 가겠다고 했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핸드폰만 꼭 쥐어야 할 정도로.
이 분도 안 되는 통화 시간에 핸드폰이 뜨거워졌을 리도 없건만, 핸드폰과 붙어 있는 귀가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진짜?”
- 응.
귤을 만지작대며 눈을 내리깔았다.
지구 건너편에서 내 목소리를 듣고 있을 네 얼굴이 생생히 그려지는데 볼 수가 없다는 사실이 날 자꾸만 침묵하게 했다. 매일 생각하지만, 너와 떨어진 지 겨우 삼 주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 …이로빈?
삼 주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보고 싶어도 되나.
네 저녁에 내가 없다는 게 슬프고, 내 아침에 네가 없다는 게 이렇게 서러워서도. 당장 모든 걸 그만두고 네게 달려가고 싶어서도. 겨우 이런 전화기로만 네 존재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이렇게 목이 메서도 안 될 것 같은데.
그것도 귤을 까먹다가 말이지.
“…응.”
- …너 아까부터 목소리가 이상해. 괜찮은 거 맞아?
“아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무래도 내가 장거리 연애를 너무 쉽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울 거라고는 생각했대도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질 줄은 몰랐다.
그러나 내가 이 말을 꺼낸 순간 남한결은 힘겹게 떠난 길을 다시 돌아오고도 남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절대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난 차오르는 그리움을 목 너머로 애써 누르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끔 흔들리는 창은 거센 바람이 불고 있음을 추측하게 했다. 덕분에 핑곗거리가 떠올랐다.
“아침이라 그런지 좀 춥네.”
- …너 또 거실 창문 열어 놨지.
“아니야. 나 그때 너한테 혼나고 아침에는 절대 문 안 열어.”
- …….
“와, 또 못 믿네?”
- 사진 찍어서 보내면 믿을게.
“참 나. 내 사진도 아니고 창문 닫힌 사진을 찍어 보내 달라고? 저기요. 자꾸 장거리 연애 이딴 식으로 하실 겁니까?”
오버를 보태 장난을 치고는 사이좋게 웃음이 터졌다.
- 네 사진도 보내 주든가, 그럼.
그 와중에 ‘도’인 걸 보니 창문을 기어코 제 눈으로 확인하고 말 작정인가 보다. 난 웃음을 참으며 다른 한 손으로 얼굴을 마구 쓸었다.
“안 돼. 씻으면서 거울 봤는데 오늘 얼굴 상태가 너무 별로야.”
- 네가 벌써 씻었다고? 겨우 여덟 시인데?
“저기요.”
방금까지 의심쩍다는 목소리를 내서 사람을 억울하게 만들 땐 언제고 별안간 청량하게 웃는다. 더는 뭐라 할 수 없어서 웃고 말았다. 그래도 이제 좀 편해졌다고 가끔은 이렇게 먼저 장난을 걸어오기까지 하는 놈이 귀여운 한편 괘씸했다.
웃음소리까지도 잘생겨서 내가 봐줬다, 진짜.
문득 시선이 닿은 시계는 우리가 벌써 삼십 분가량 이러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했다. 곧 학원 수업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제 거실에서 공부를 하며 필기구를 어질러 두어서 가방을 챙기기 한결 쉬웠다. 난 어깨와 귀 사이에 핸드폰을 끼운 채로 테이블 위에 있는 필기구와 노트들을 가방 안으로 쏟아부었다.
- 학원 수업 아홉 시부터지?
“응.”
- 오늘 서울 춥던데. 옷은?
“네가 준 플리스 입고 그 위에 롱패딩 입으려고.”
- 발목 올라오는 운동화 신어. 또 편하다고 발목 내놓는 거 신지 말고.
“네네. 잔소리 접수.”
우유와 토스트를 씹어 넘기는 소리까지 들려주고서야 남한결이 나와 통화하는 내내 고집스레 자리를 지키던 차에서 내렸다. 이제는 귀에 익은 차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난 어깨와 귀 사이에 핸드폰을 낀 불편한 자세로나마 운동화 끈을 맸다.
신발장에 선 채로 시계를 흘끔거리며 가능한 한 시간을 벌려고 했지만 학원에 제시간에 도착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난 한숨을 삼키고는 핸드폰을 꼭 쥐었다.
“나 이제 진짜 나가야 할 것 같아.”
- 응. 수업 잘 듣고.
“연락할게.”
- 나도. 아, 그리고….
아쉬운 건 나뿐만이 아닌 듯 남한결이 뜸을 들였다. 난 시계를 한 번 더 확인하고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버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괜히 마음이 급했다. 그 사실을 한 번 더 상기하기 전에 남한결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사진 꼭 보내 줘. 창문 말고 못생긴 이로빈으로.
“…….”
- 생각해 보니까 그게 더 보고 싶어.
전화라는 건 참 신기했다. 따지자면 서로의 숨소리를 나누는 것뿐인데 그 사람이 날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느껴지니까.
“…그래 놓고 막상 보면 후회하는 거 아냐?”
- 그러지 않게 좀 잘 찍어 봐.
“너무 까다로우세요, 애인님.”
이 모든 기다림을 가치 있게 하는 그 한 사람의 그리움이 내가 품은 그리움과 같다는 걸 느끼고서야 남한결이 없는 오늘을 살아 낼 용기가 생겼다. 난 오늘 밤 해야 할 일에 한 가지를 더 입력하고는 건너편의 남한결에게 우렁차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결아. 나 진짜 뛰어야겠다. 사랑해!”
***
“한결이 오빠 간 지 얼마나 됐죠? 한 육 개월 됐나?”
“…….”
어깨를 흔드는 누군가의 손길은 현실 감각을 일깨우기 충분했다. 난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오빠?”
“…어?”
“괜찮아요? 아까부터 엄청 피곤해 보이는데.”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날 훑는 얼굴을 보자 내가 왜 이 자리에 앉아 있는지가 떠올랐다.
아… 맞다. 나 수진이랑 같이 있었지. 난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대충 넘겼다. 손 사이로 흩어지는 부스스한 머리칼을 느끼니 새삼 내가 얼마나 피곤한 얼굴로 앉아 있었을지가 그려졌다. 수진이한테 미안해졌다.
“잠깐 생각 좀 하느라…. 미안.”
“사과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니구요. 아까 만났을 때부터 오빠 좀 멍해 보였거든요. 무슨 일 있어요? 내가 술 먹자고 할 타이밍을 잘못 잡았나?”
삼 개월 만의 만남이었다. 임용 고시 공부에 막 발을 담근 나와 경찰 시험을 준비하는 수진이가 어렵사리 맞춘 시간이기도 했다. 스포츠 의류 회사에 인턴으로 합격한 재균이까지 각자 진로를 탐색하느라 한동안 잠잠했던 메시지방은 널브러진 단어장과 우그러진 맥주 캔을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며 대화의 포문을 연 수진이로 인하여 밤새 미생들이 수다를 나누는 장이 되었다.
“아냐. 나도 마침 너네 보고 싶었는데 잘 됐지, 뭐. 맞다. 공부는 좀 어때? 할 만해?”
여간해서는 힘들다는 말조차 하지 않는 수진이임을 알기에 오늘 그 고충을 들어 줄 생각으로 나온 자리였다. 뭐가 됐든 지금 이렇게 복잡한 얼굴로 앉아 되레 그녀의 걱정을 살 자리는 아니라는 소리였다.
화제를 돌리기 위한 내 질문에 수진이의 시선이 느리게나마 떨어져 나갔다. 대답 대신 돌아온 술잔에는 별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연거푸 두 잔을 더 부딪치고서야 수진이가 시무룩한 목소리를 냈다.
“좆같아요, 오빠….”
“…공부 때문에?”
“공부 때문에 힘든 것도 힘든 건데….”
“응.”
“그냥… 가끔은 이게 내 길이 맞나 의심이 갈 때도 있어요.”
들고 있는 소주잔에 시선을 둔 채로 수진이가 머리를 헝클었다. 복잡한 얼굴이었다.
“오빠 혹시 그런 거 겪어 봤어요? 이게 정말 내 길이구나 하고 걷다가 갑자기 고장 난 것처럼 멈춰 버린 느낌.”
“…….”
“근데 스스로 알거든, 돌이키기에는 꽤 멀리 온 거. 그래서 돌아보기도 무섭고,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계속 가기에는 망설여져요. 이대로 계속 가면 돌아볼 기회조차 없을까 봐.”
듣다 보니 낯선 이야기는 아니었다.
“…겪어 봤지.”
맥 빠진 동조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열일곱 살 때.”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눈치챈 수진이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난 그녀가 불필요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고개를 저으며 얼른 말을 이었다.
“그러지 마. 그러라고 너네한테 운동 그만둔 이야기 했던 거 아니니까.”
“…그래도. 오빠한테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괜찮아. 그리고 방금도 내가 먼저 이야기 꺼낸 거잖아.”
수진이가 말없이 잔을 채워 줬다. 사이좋게 한 번 더 잔을 나누고는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했다. 말로 뱉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감정을 나누며 술자리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시켜 놓은 어묵탕이 팔팔 끊는 것을 구경했다. 어묵이 흐물흐물 풀어지는 것까지 보고서야 입 안에 남은 말을 마저 건넸다.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괜찮아질 거라는 말을 해 주려고.”
“…….”
“금방이라고는 장담 못 해도.”
수진이가 옅게 웃었다.
“안 그래도 금방 붙긴 글렀어요. 어제 모의고사 봤는데 점수 보고 저 진짜 자괴감 들어서….”
“수진아. 넌 잘할 거야. 내가 이것만큼은 정말 장담할 수 있어.”
“에이. 오빠니까 그렇게 얘기하죠.”
손사래 치는 수진이의 얼굴이 아까보다는 현저히 풀려 있었다. 그건 내가 건넨 같잖은 위로 때문일 수도, 아니면 같은 상황을 견뎌 내고 있다는 어떠한 동질감 때문일 수도 있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기쁘게 만드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난 마저 말했다.
“아냐, 진짜로.”
“…….”
“대체로 그런 마음이 들 때는.”
“…….”
“정말 그걸 잘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해서거든. 그리고….”
좋아한다는 말을 한 것뿐인데 남한결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방금 한 말은 남한결과 내가 현재 견뎌 내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지금 남한결에게 돌아오라는 말도, 그렇다고 해서 계속 그곳에 있으라는 말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 어떤 결과도 책임질 수가 없어서 겁이 나는데 동시에 그게 너무 좋으니까 포기할 수 없는 거야.
확실한 건 남한결을 향한 마음. 불확실한 건 그 외의 모든 것들.
“…….”
갑자기 입을 다문 날 본 수진이의 표정이 조심스러워졌다.
“오빠. 괜찮아요?”
아까처럼 괜찮다고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차마 그러질 못했다.
“…수진아.”
어제는 잡생각을 떨쳐 내겠다고 운동장을 두 시간 동안 뛰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뛰기 시작한 건데, 숨이 차 멈춘 순간마저 발목에 무리가 가는 일을 하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하던 남한결의 얼굴이 생각나서 괴로웠다. 발목에 파스를 붙이는데 왜 그렇게도 눈이 시큰거리던지.
귀신같이 그 순간 남한결한테서 연락이 왔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울어 버릴 것만 같아서 전화는 결국 받지 못했다. 피곤하다는 핑계에 푹 쉬라고 돌아온 답변을 보며 밤을 새웠다.
“나 왜 이렇게….”
“…….”
“왜 이렇게 이기적이지.”
“오빠가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묻는 얼굴을 보는데 힘없는 웃음이 터졌다. 그런 신뢰를 받기에는 최근 내가 하고 있는 생각들이 너무나 자격이 없는 사람의 것이기에.
“응. 내가.”
“왜요?”
“그냥… 자꾸 내 생각만 하는 것 같아. 아무리 힘들어도 그래서는 안 되는데.”
“…….”
“가끔 공부가 힘든 날이면 한결이랑 통화하는 내내 미안해. 피곤하고 지친 게 티날 것 같아서. 그래서 입 다물고 있으면 한결이가 또 걱정하고. 난 그게 싫고. 그러다 보면 공부에 집중이 안 되고… 악순환 같아. 사실 잠시 얼굴만 봐도 금방 해결될 문제인 것 같은데, 지금은 그게 안 되니까….”
이어지는 말을 듣던 수진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감을 잡은 표정을 지었다. 받아 줄 사람이 있다고 하소연을 줄줄 늘어놓은 게 뒤늦게 민망해진 나는 민망함에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 오랜만에 만난 건데 내 하소연만 엄청 했네.”
“아니에요, 오빠. 저도 실컷 징징댔는데요, 뭘.”
패딩 양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수진이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장거리 연애 힘들죠…?”
“…응. 지금도 참고는 있는데, 솔직히 한결이한테 그만하고 오면 안 되냐고 하고 싶어.”
“…….”
“힘들다고. 옆에 있어 주면 안 되냐고 떼쓰고 싶어.”
입 밖으로 내니 더욱 유치한 말들이었다. 내뱉은 것만으로도 낯이 뜨거운.
그래도 이런 이야기까지 할 수 있는 후배답게 수진이는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얼마나 남았어요? 한결이 오빠 오기까지요.”
“육 개월.”
“…온 만큼 가야 하네요. 오빠 힘들긴 하겠다.”
온 만큼 가야 한다는 말이 마음을 깊게 파고들었다. 순탄하다고는 볼 수 없었던 지난 육 개월이 떠올라서였다. 수진이가 그걸 바라고 한 말은 아닌 걸 알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시험까지 디데이 줄어 가고 마지막 정리에 정신 팔리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을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다, 진짜.”
“에헤이. 분명 그럴 거라니까요? 분명 나중에 시험 붙고 나면 이날 생각만 해도 웃음 나온다. ‘나 그때 남한결 보고 싶다고 땅 판 거 기억나?’ 이러면서.”
장난을 걸어오는 수진이를 향해 약간이나마 웃으며 한 번 더 잔을 부딪쳤다.
드르륵. 입구와 가까운 쪽에 앉은 탓에 술집에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 입장했다.
“자자. 여러분~~ 귀염둥이 도착했습니다.”
“…강재균?”
“귀염둥이 같은 소리하네. 지금이 몇 시냐?”
능청맞게 문을 열고 들어온 재균이가 남은 하나의 자리를 익숙하게 차지했다.
“김 부장이 오늘따라 기분 지랄 맞은 걸 나보고 어쩌라고. 그래도 진짜 끝나자마자 존나 뛰어온 거야. 근데 벌써 세 병을 드셨어들? 여덟 시부터 이렇게 달린다고?”
급하게 왔다는 말이 사실인지 목에 달랑달랑 걸려 있는 사원증을 보자 웃음이 터졌다.
“못 본 새 직장인 다 됐네, 강재균.”
앉자마자 제 몫의 수저와 물잔 세팅부터 하던 놈이 멈칫하고는 날 봤다. 얼핏 어른스러워 보이던 표정을 싹 지우고 와락 달려드는 게 꼭 애 같았다.
“형~ 보고 싶었어요. 공부한다고 잘 만나 주지도 않고~~.”
“어차피 임솔이랑 노느라 바빴으면서.”
“에이. 우리 누나는 누나고, 형은 형이고.”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서야 만족한 듯 떨어져 나가는 얼굴에마저 애교가 그득했다. 그것도 잠시, 어묵을 질겅질겅 씹던 놈이 곧 시무룩한 얼굴로 수저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누나 요새 대회 준비한다고 바빠요. 저번 주에는 한 번밖에 못 봤다니까요? 그것도 큰누나 차 훔쳐서 대전 내려갔다가 혼만 나가지구….”
“육 개월째 애인 못 보고 있는 사람 앞에서 퍽이나 할 만한 말이다.”
퉁명스럽게 받아치는 수진이의 말에 재균이가 헙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허를 찔린 표정으로 내 눈치를 보는 놈에게 웃어 주며 시선을 내렸다.
“뭘 또 새삼스럽게….”
오랜만이라 걱정했는데 생각보다는 부드럽게 소주가 넘어갔다. 술잔을 내려놓을 때까지 시선이 느껴진다 싶더니 재균이가 불쑥 질문했다.
“한결이 형은 잘 지내요? 인턴 생활은요? 저보다 더 빡셌으면 빡셌지. 장난 아닐 것 같은데.”
멈칫.
‘그때 그건 어떻게 됐어? 인턴들끼리 경쟁 시켰다고 한 거. 준비 열심히 했었잖아, 너. 막 밤도 새우고.’
- 아… 이겼어.
‘뭐? 야. 그런 소식을 이제 말해 주냐. 상은 뭐 받았는데? 그거 수상자 발표할 때 얘기해 준댔다며.’
- …….
‘여보세요?’
- 어.
‘왜 말이 없어. 뭐였길래.’
- …….
‘남한결.’
- …전환 오퍼였어.
“…어. 잘 지내지.”
너무 잘 지내고, 잘나서 문제지만.
지난 주의 통화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전환이면… 너 거기서 인턴이 아니라 정규 직원 된다는 뜻이야?’
- 이로빈.
‘…….’
- 나 오퍼에 답 안 했어.
‘…….’
- 어차피 인턴 기간 끝날 때까지만 대답하면 된대서. 마지막에 얘기할 거야. 안 한다고.
‘…남한결. 너….’
- 이미 결정 끝나서 얘기 안 했던 거니까 이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말자. 나 번복할 마음 없어.
‘…….’
- 너랑 떨어져 있는 건 일 년이면 족해. 네가 못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못 하겠다고.
날 안심시키겠다는 의도로 한 말이래도 그 말에 정말 안심하고 만 나에 대한 자괴감을 떨칠 수는 없었다. 남한결이 더는 포기하지 않길 바라며 일 년간의 생이별을 택한 건데, 그 와중에도 포기할 것들은 계속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이 날 못 견디게 했다.
당연히도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일주일 내내 그랬다. 그래서인지 어제 본 학원 모의고사에서는 육 개월간 공부했다고는 보기 힘든 점수까지 나왔고.
사실 이런 무기력함을 느낀 지는 꽤 됐다. 진로에 대한 고민까지 더해진 묵직한 괴로움이건만 남한결에게는 차마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게 만드는 사랑하는 한 사람을 위해서 그 마음을 내어놓을 수가 없다니. 아이러니하지만 사실이었고, 모든 건 엉망진창이었다. 난 바닥난 인내심을 어떻게든 끌어모으려 안간힘을 쓰며 이 시기를 버티고 있었다.
“아!”
“술 가져와라, 술. 이모 바쁘신가 본데 안 가져다주시면 가져다 먹기라도 해야지.”
내 표정을 본 수진이가 보란 듯 재균이의 발을 밟았다.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결국 냉장고로 가는 재균이의 뒷모습을 보며 난 핸드폰을 한 번 더 확인했다.
화면에는 남한결과의 메시지창이 떠 있었다. 엊그제부터 연락을 잘 받지 않는 나를 걱정하듯 이어지던 연락은 어젯밤을 끝으로 뚝 끊겼다. 몇 번씩이나 멈칫하던 나는 또 아무런 말도 적지 못하고 창을 껐다.
좀 불안하다 싶었는데 배터리가 없음을 알려 주는 알림이 화면에 뜨더니 곧 화면이 꺼졌다. 난 잠시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쿡쿡 찔러 오는 더부룩한 속은 무시했다. 어차피 당장은 해결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어, 형. 노량진으로 안 가고요?”
“오늘은 그냥 본집 가서 자게. 옷도 좀 가져와야 하고.”
인사는 진작 끝냈는데, 재균이가 눈에 보이게 머뭇댄다. 아까부터 눈치를 보더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왜, 인마.”
피식 웃은 내가 등을 툭 치며 물은 것과 동시에 걱정이 가득 담긴 눈빛이 돌아왔다.
“노량진 생활은 할 만해요?”
“뭐, 그냥저냥. 왜?”
“형 안 본 사이 살이 빠져서 마음이 좀 그래요… 얼굴도 요만해지고… 아무리 시험 얼마 안 남았다고는 해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주먹을 들어 내 얼굴 옆에 대보이는 얼굴은 조금 속상해 보였다. 이번에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는데 웃음이 나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늘 둘을 만나길 잘했다. 난 웃으며 놈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다 컸다, 강재균이. 형 걱정도 하고.”
“지금은 한결이 형도 없는데 형을 누가 챙겨요. 나라도 해야지.”
몇 마디를 넘기지 못하고 나온 남한결의 이름에 또 멈칫하고 말았다. 수진이한테 무슨 말을 듣긴 했나 보다.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등을 문지르는 놈을 보는데, 괜히 울컥해서 헛기침을 했다.
“귀찮아도 끼니 거르지 말고요.”
“…그래.”
“저 조만간 진짜 그 근처 들를 것 같거든요? 연락할 테니 밥 같이 먹어요. 제가 살게요.”
“알았다고. 야, 택시 온다. 너 저거 타고 가.”
더 듣고 있다가는 꼴사납게 눈물이라도 터트릴 것 같아서, 놈의 시선을 피하며 다가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들었다.
“아… 알겠어요. 그리고 집에 도착하면 꼭 연락하구요!”
“알았으니까 얼른 가기나 해. 수진이는 벌써 도착했겠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걱정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놈을 택시 뒷자리에 밀어 넣고서야 후배들 챙기기가 끝났다. 난 천천히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후텁지근한 여름의 밤공기가 걸음걸음마다 달라붙었다. 술기운이 뒤늦게 올라오는지 괜히 덥기까지 했다. 갑갑한 목 부근의 티셔츠를 들었다가 놓으며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오피스텔 앞에 멈춰 섰다.
“…….”
오는 내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 옆의 재떨이에 비벼 껐다. 술을 먹은 데다가 담배까지 피워서인지 눈앞이 조금 어질어질했다.
술자리 중간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던 나를 보자마자 끊은 것 아니었냐며 경악한 표정을 짓던 재균이가 떠올랐다. 괜히 멋쩍어졌다.
남한결이 미국으로 가고 나서 두 달 정도 후에 다시 피우기 시작했으니 그리 오래된 건 아니었다. 의식해서인지 담배 향이 나는 것 같은 손을 킁킁거리며 눈에 익은 건물을 한 번 더 올려다봤다.
몇 달 전 이동 시간을 줄이겠다고 집에서 나온 후 오랜만에 들르는 거였다. 물끄러미 위를 바라보는데 문득 언젠가 베란다에서 날 바라보던 남한결의 얼굴이 생각났다.
“…….”
기분이 이상했다.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담배 하나를 더 빼 물어야 할 정도로. 한 번 더 짧아진 필터를 비벼 끄고서야 걸음을 옮겼다.
새벽 두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라 그런지 층수 버튼을 누른지 얼마 되지 않아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아무래도 내일은 새벽에 운동하기 힘들겠지. 그러고 보면 이제 내일도 아니구나. 학원 - 집 - 학원을 반복하던 일상이라 이런 사소한 변화마저 괜히 크게 느껴졌다.
하긴, 어차피 어제 삐끗한 발목이 완벽히 낫지도 않았고. 내일은 쉬는 게 컨디션 관리를 위해서도 나을 터다. 괜히 시큰하게 느껴지는 발목을 털고 걸음을 옮겼다.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 등이 걸음마다 머리 위를 밝혔다.
띡띡띡띡띡띡. 뻑뻑한 눈을 비비며 여섯 글자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문을 열고 발을 안으로 들여놓던 나는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두 달 넘게 비어 있던 공간은 이상하게도 빈집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거실의 불마저도 켜져 있었다.
뭐지? 내가 두 달 전에 불을 켜 놓고 나갔나? 아니. 그건 말이 안 되는데.
술이 확 깬다. 이상한 느낌을 지우지 못한 채로 재빨리 신발을 벗다 말고 나는 곧 언 듯이 멈춰 섰다. 비어 있는 집에서 들릴 수 없는 문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
난 제자리에서 연달아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도저히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늦었네?”
여섯 달 동안 이곳에 없었던 사람이라고는 전혀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심히 평온한 어투였다. 젖은 머리를 털던 수건을 옆의 빈 빨래통 안으로 던진 남한결이, 내가 눈을 깜박일 때마다 가까워졌다.
“술 먹었냐.”
표정을 보니 대답을 듣기 전에 이미 확신한 모양이었다. 술을 먹는 날이면 늘 볼 수 있던 한숨 가득한 얼굴로, 남한결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어쩐지 전화를 안 받더라. 공항에서부터 몇 번을 연락했는지 알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설핏 인상까지 찡그리며 묻는 얼굴을 보는데, 그제야 손에 감각이 돌아왔다. 난 덜덜 떨리는 손을 쥐었다 폈다.
“…이로빈?”
참을 시간조차 주지 않고 눈물이 터졌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볼을 금세 축축이 적셨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성큼성큼 걸어온 남한결이 당황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붙잡았다.
“진짜….”
난 남한결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러고도 자꾸 눈앞이 흐려져서 끝내 주먹을 쥔 손으로 눈을 한 번 더 벅벅 닦아야만 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멍한 상태로도 급하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남한결 맞아, 너?”
만약에 이게 술김이라서 그런 거라면, 진작에 술을 좀 더 마실 걸 그랬다. 그럼 이렇게 남한결을 보고 느낄 수 있었을 텐데.
“…….”
눈을 뜰 때부터 밤에 잠들던 순간까지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그리워했던 남한결의 향이 가까워졌다.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워진 향이 내게 닿았다.
“그럼 누구야.”
볼을 감싼 손이 서서히 움직였다. 엄지손가락을 크고 둥글게 움직이며 볼을 쓰는 행위가 애틋했다. 걱정 어린 눈빛을 숨기지 못하는 까만 눈동자는 자신이 그 자리에 있다고 확인시켜 주었다.
내가 와락 자신을 껴안자 남한결이 휘청했다.
“아….”
놀란 소리를 내기도 잠시, 남한결이 내 뒷머리를 조심스레 쓸었다. 이마에 촉촉한 입술이 닿았다.
“…머리 잘랐네.”
이름값이라도 하려는 건지, 어쩌면 너는 그렇게도 사람이 한결같은지 모르겠다. 그런 멋대가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사로 목메게 하는 것도 내 세상에는 너라는 사람뿐일 거다. 난 남한결의 목을 꼭 껴안고는 단단한 어깨에 젖은 얼굴을 비볐다.
“뭐야. 어떻게…. 어떻게 왔어, 갑자기. 연락도 안 하고.”
이렇게 올 줄 알았으면 술이고 뭐고 안 먹었지. 우울해할 필요도 없었는데. 억울함과 원망이 뒤죽박죽 섞여 나간 말에 남한결이 침묵했다. 한참 뒤에야 답변이 돌아왔다.
“그냥. 보고 싶어서.”
그 심하게 단순한 말에 결국 늦은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흐윽….”
이렇게 소리 내어 엉엉 울어 보는 게 얼마 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만은 알겠다. 이렇게 날 안아 주는 사람의 품에서 울려고 그동안 참고 있었다는 걸.
“나도…. 나도. 남한결….”
“…….”
“너무 보고 싶었어, 진짜….”
남한결이 대답 대신 날 꼭 껴안았다. 육 개월 만에 맞닿은 심장이 화답하듯 거세게 뛰어 댔다. 불안함과 꼭 닮은 감정은 날 조급하게 만들었다.
난 고개부터 올려 급하게 남한결의 입술을 찾았다. 손으로는 남한결의 허리 부근을 더듬었다. 조금이라도 더 닿고, 남한결이 진짜 내 옆에 있음을 확인받고 싶었다.
순순히 날 받아 주던 남한결은 내가 자신의 바지 저퍼에 손을 얹고서야 입술을 뗐다. 이런 행위가 뜻하는 바를 모를 리가 없는 놈이 내 손 위로 제 손을 얹었다.
“이로빈.”
달래기 위해 이어질 말이 뻔했다. ‘피곤해 보인다’ 아니면 ‘일단 눈물부터 어떻게 하자’ 겠지. 그중 어느 것도 지금 나에게 중요하진 않았다. 난 남한결을 보지 않은 채로 고개부터 저었다.
“일단 하고. 하고 이야기하면 안 돼?”
“…….”
“나 너랑 하고 싶어.”
내 손 위에 있던 남한결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남한결이 말없이 날 내려다봤다.
“하고 싶어, 한결아. 하자. 응?”
남한결의 시선이 아직도 축축할 게 뻔한 내 볼에 멎었다. 난 남한결을 어떻게든 설득하기 위하여 재빨리 입을 열었다.
“넌 안 하고 싶어? 우리 너무 오래 못 했….”
말을 채 끝마치지 못했다.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남한결이 내 입술을 파고들었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란 내 허리를 받친 후 혀를 깊숙이 넣은 남한결이 등을 거칠게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침실로 가는 걸음이 마구 뒤엉켰다. 서로의 타액으로 입 안은 물론 입술 주변까지 온통 축축했다. 내 티셔츠를 위로 잡아 올리기 무섭게 남한결이 고개를 내려 드러난 내 유두를 물었다.
“하으….”
오랜만에 느껴 보는 자극에 자꾸 허리가 움찔거렸다. 그 와중에 바지 지퍼는 착실하게 내려가고 있었다. 내 청바지를 내리던 손이 이제는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윽, 생각보다 거센 손아귀의 힘에 나도 모르게 작은 신음이 흘렀다.
못 본 새에 힘이 더 세진 것 같은데. 가서 운동만 했나.
분명 하자고 조른 건 나였는데 어느새 내가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가 됐다. 방금도 키스를 하려는 시도는 좌절되고, 남한결의 손에 성기가 잡혀 신음을 뱉어 내기에 바빴다.
“으… 응….”
떨어져 있는 내내 참아온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언뜻 마주친 얼굴에서 놈이 만만치 않게 흥분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같이.”
“…….”
“같, 이 하자, 결아. 응?”
아래로 뻗은 손을 남한결은 거절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것처럼 이미 불룩해진 앞섶을 풀어 헤쳐 남한결의 성기를 꺼냈다. 모양이 예쁜 성기는 이미 반쯤 서 있었다. 팬티 위로 손을 몇 번 왔다 갔다 했을 뿐인데 눈에 보일 정도로 크기를 키워 가는 게 신기했다.
슬쩍 올려다본 남한결은 제 성기가 내 손에서 어떻게 놀아나든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른하게 풀린 얼굴은 사정 전보다는 사정 후 모습에 가까웠다. 난 남한결과 눈을 맞춘 채로 기둥을 한 번 더 쓸어 올렸다. 남한결은 눈가를 살짝 찡그리면서도 내 성기를 쥐고 흔드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하아, 흐, 좋아….”
“…후우.”
비슷하게 신음이 터진다는 게 기분이 좋았다. 남한결이 가기 전의 얼굴을 보는 것도 흥분감을 극대화했다. 붉은 입술이 조금 벌어진 채 그 사이로 숨을 모아 뱉는 듯한 간헐적인 신음이 흐를 때면 배 아래의 간질거리는 감각이 폭발하는 느낌이 들었다.
사정감이 몰려들었다. 난 등을 조금 둥글게 말며 남한결의 입술을 찾았다. 질척한 입맞춤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거친 신음이 터졌다. 난 남한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채 이제 거의 꺼덕이는 수준으로 선 남한결의 성기 윤곽을 따라서 손을 놀렸다.
이렇게 만지고 있으니 정말 남한결과 함께 있다는 게 실감났다. 그제야 조금 안심한 나는 남한결에게 장난을 걸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되찾았다. 우선은 아직 쥐고 있는 성기를 조물대기부터 했다.
“팬티 안 벗기고 하면.”
“…….”
“여기 축축해져, 결아?”
성기를 다 담아 내기도 벅찬 듯한 팬티 위를 툭툭 건드리자 남한결이 인상을 찡그렸다.
“혼자 해 봤을 거 아냐.”
처음엔 놀리려고 한 소리였는데, 남한결이 혼자 하는 걸 생각하니 진짜 꼴리긴 했다. 남한결한테 꾸준히 자극받고 있는 성기에서 올라오는 흥분이 날 더더욱 부추겼다.
난 조금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을 재촉하듯 남한결의 성기를 주물렀다. 이렇게? 아님 저렇게?
“그때는 팬티 내리고 했어?”
“…….”
“몇 번이나 했어?”
“…….”
“내 생각 하면서 했어?”
남한결은 말없이 날 보고 있었다.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대답을 할 가치를 못 느끼는 건지 모르겠는데, 하다가 중간에 멈춰서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건 확실히 웃기긴 했다.
아무래도 장난을 멈춰야 할 타이밍 같았다. 난 이 말을 꺼낸 나름의 타당한 이유를 제시하기 위해 경험담을 덧붙였다.
“난 네 생각하며 했는데.”
남한결의 팬티를 내려 성기를 꺼냈다. 힘이 붙은 성기는 배에 바짝 붙을 기세였다. 한 번만 더 만져도 사정할 것처럼.
사정을 돕기 위해 나가려던 손은 거칠게 내팽개쳐졌다.
“아!”
난 눈을 크게 뜨다 말고 잇새로 새어 나가는 신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윽, 야…! 그걸 갑, 자기, 흐으, 그렇게 쥐면….”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세기로 내 성기를 흔들고 있는 남한결 때문이었다.
“하으….”
내 손이 자신의 성기를 만지지 못하게 쳐 낸 이유는 곧장 알 수 있었다. 난 이상함을 느끼고는 고개를 내렸다.
남한결의 성기와 내 성기가 비벼지고 있었다. 터질 듯한 남한결의 성기와 내 성기가 마찰을 일으킬 때마다 까끌한 음모와 더불어 이상할 정도로 미끄러운 감각이 온몸을 지배했다.
남한결의 긴 손가락이 유두를 비틀었다. 정갈하게 자른 손톱의 끄트머리가 예민한 표피를 긁었다.
“아…!”
처음 느껴 보는 자극이었다. 남한결의 어깨에 머리를 박은 채 신음해야 할 정도로.
조금 더 참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래위로 괴롭히는 손길에는 도리가 없었다. 눈앞이 하얘지는 것과 동시에 사정감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성기의 끝에서 쏟아져 나오는 하얀 액이 침대부터 남한결의 몸까지 튀었다.
“…윽!”
“후….”
그 사실에는 털끝만치 신경쓰지 않으며 남한결이 또 한 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금 정액을 토해 낸 성기는 지칠 줄도 모르고 또 흥분했다. 나도 모르게 나간 손이 남한결의 가슴을 밀어냈지만, 또 한 번 밀쳐지기만 했다.
“넌 겨우 그따위 것들이 궁금해?”
“흐, 으응….”
“나야말로 궁금해. 어떻게 그렇게 사람 환장하게 하는 말만 골라 하는지.”
서랍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남한결의 미끌미끌한 손가락이 이내 내 아래를 파고들었다.
“윽…!”
“보여 줄게. 내가 어떻게 가는지.”
“…하아, 하….”
“근데 그러려면 네가 먼저 가야 돼.”
정액으로는 모자랐는지 남한결이 거의 구멍 안으로 젤을 쏟아붓듯이 했다. 손가락이 아래를 파고들 때마다 질척이는 소리는 낯부끄러울 정도였다. 손가락 세 개를 넣고서야 남한결이 키스를 허락했다. 평소보다 빠르고 거친 손길이 아래를 정신없이 헤집었다. 찔꺽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남한결이 피식대며 웃었다.
“그거 안 보면 나 못 가거든. 너없이는 몇 번을 해도… 후… 한 것 같지도 않아.”
귓가에 속삭이는 짓궂은 목소리를 들으니 내가 아무래도 뭔가를 잘못 건드린 것 같았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흘렀지? 아니 좋긴 한데….
“하윽…!”
오랜만이라 그런지 내가 느껴도 내벽의 저항감이 컸다. 골반을 붙잡은 남한결이 달래듯 엉덩이를 툭툭 쳤다.
“더 넣어야 하는데.”
“…하, 흐윽, 아파….”
“후우, 알아. 네 말처럼 오랜만에 하는 거니까… 그래서 몸이 잊었나 봐.”
“…….”
“조금만 지나면 안 아프게 해 줄게. 힘 빼고.”
땀으로 엉망일 내 이마에 입술을 붙인 채 끝내 제 성기를 그 좁은 구멍 안으로 다 구겨 넣은 남한결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성기는 생각보다 거칠게 안을 휘저었다. 성기가 움직이는 대로 이리저리 쓸리는 내벽의 느낌이 생생했다. 자세를 편하게 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움직임이 거슬렸는지 남한결이 팔을 들어 내 허벅지가 자신의 허리를 감게 만들었다. 자세가 한층 깊어졌다.
“흑, 하아… 흐….”
“…….”
오랜만의 삽입이라 그런지 마치 처음 할 때처럼 아팠다. 이상한 건 그와 동시에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흥분이었다. 난 도통 종잡을 수 없는 감정에 눈을 꾹 감았다. 의지와 상관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이로빈. 나 봐.”
안을 꽉 채우던 남한결의 성기가 뒤로 빠지다가 이내 안을 쾅 쳐올렸다. 어째 속도가 빨라지는 느낌이 든다 싶더니 상체가 휙 들렸다.
“나 보라니까.”
아래를 쳐 대고 있는 난폭한 살덩이에 비해서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덜덜 떨리는 눈을 떠 남한결의 얼굴을 마주했다. 남한결은 난생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묘한 정복욕과 해소되지 않은 성욕이 묻은 얼굴로, 날 보채듯 아래를 쳐올렸다. 뚫어질 듯한 시선이 내 얼굴을 집어삼킬 것처럼 난폭했다.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자 남한결이 얼굴 양옆을 짚은 팔을 굽혀서 내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쪽쪽쪽 소리를 내며 입술을 붙이더니 곧 혀를 내어 내 눈가의 눈물까지 모조리 삼켰다. 달콤한 것 같기도, 살벌한 것 같기도 한 말소리가 들렸다.
“봐야지. 내가 너 때문에 가는 거.”
그제야 눈을 떴다. 남한결이 나와 눈을 마주친 채로 허리 짓의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골반을 꽉 붙잡은 채 비좁은 안을 뚫고 들어올 때마다 신음이 터졌다.
“아! 하악… 흐, 으응!”
단단한 성기의 끝이 집요하게 한 곳을 찧었다. 발가락이 곱아들고 허리가 경련하듯 떨렸다. 넘실거리는 쾌락에 눈을 감으려고 들 때면 남한결은 어떻게 알고 마저 뜨게 했다. 그 때문에 눈을 쉴 새 없이 깜빡이면서도 힘겹게 시선을 맞췄다.
“후으, 보라니까.”
“…….”
“보고 싶다며. 응?”
이렇게까지 많이 보고 싶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이제 와서 부정하기에는, 스친 것만으로 서는 애를 자극한 죄가 너무 컸다. 사실 남한결이 절정하는 얼굴은 몇 번을 봐도 좋았다. 사정 전에 설핏 떨리는 눈가와 이마에서 땀방울이 떨어져 내릴 때면 잠시 감겼다가 드러나는 까만 눈동자는 내가 불평을 하기 어렵게 했다. 내 눈을 제 얼굴에 고정하게 붙들며, 남한결이 울컥하듯 감정을 토해 냈다.
“너만 이 짓하고 싶었던 거 아냐.”
“…흐으, 알았으니까, 좀만, 살, 살살!”
“나도 너랑 이러고 싶어서… 뒤질 뻔했다고, 이로빈.”
급하게 빠져나간 남한결이 두 번째 콘돔을 묶어서 옆으로 던졌다. 이로 새로운 콘돔 껍질을 잡아 뜯는 행동에서 참을성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아… 남, 남한결. 한결아.”
누가 봐도 지친 게 분명할 내 눈을 바라보며 남한결이 중얼거렸다.
“근데 몇 번을 했냐고?”
얼핏 얼굴이 싸늘해진다 싶더니 이내 남한결이 짓씹듯 뱉었다.
“씨발, 그걸 어떻게 세.”
“…….”
“알면 너 도망갈 텐데.”
뭐라 하기도 전에 발목이 붙잡혔다. 콘돔을 몇 개나 더 썼는지 알 수 없었다. 마주 앉은 채로, 내가 침대 헤드를 짚게 한 채로, 몇 번의 피스톤 질이 반복됐다.
“읏… 아… 한결, 아!”
“여기. 잡아.”
“…아! 아, 좋아… 키스, 키스 더해줘….”
분명 조금 전까지 천장을 보고 누워있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니 남한결의 무릎 위에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흥분을 참지 못한 내가 끙끙대는 소리를 내고서야 입술이 달래듯 찾아왔다. 내 입술 주위에 지저분하게 묻은 침까지도 빨고 있는 남한결을 말릴 힘이 없었다.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춰준 남한결이 내 어깨를 잡아 뒤로 눕혔다. 그러고는 지난 육 개월간 쌓인 성욕을 다 풀고도 앞으로 몇 달간 안 해도 될 정도로 시달린 내 성기를 쥐었다. 난 힘없는 손을 들어 남한결의 어깨에 얹었다. 흘긋 날 바라보는 놈의 얼굴이 그래도 아까보다는 순해져 있었다. 흥분해있던 아까보다는 훨씬 말이 통할 것 같았다. 나는 아직 남한결의 손에 잡혀있는 성기를 눈짓했다. 남한결이 사정한 횟수보다도 더 많이 정액을 쏟아야만 했던 내 성기는 이제는 불쌍할 정도였다.
“…이제 나오지도 않아, 인마….”
그렇게 말까지 했는데도, 차마 정액이라 하기 어려운 묽은 액을 확인하고 나서야 남한결이 날 풀어 줬다.
사실 그마저도 완전히 풀어 줬다고 하긴 어려웠다. 하필 하다가 멈춘 탓에 옆으로 나란히 누운 남한결과 나는 여전히 결합된 상태였다. 아직도 내 안을 꽉 채우고 있는 남한결의 성기가 느껴졌다.
“하아….”
“…….”
“…후….”
못다 쉬었던 숨을 몰아쉬는 날 끌어안은 채 목덜미에 진득하니 입을 맞추는 행위는 몸을 노곤노곤하게 만들었다. 벽지에 시선을 둔 채,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평화롭고, 따뜻했다.
“…아파?”
배를 만지작대며 남한결이 사근사근 물었다. 제발 그만하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밀어붙이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어이가 없었지만 이렇게 된 경위를 따지면 자극한 내 탓도 있을 테니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응. 특히 젖꼭지가 좀….”
이미 남한결의 손에서 놀아나고 혀로 신나게 굴려진 젖꼭지는 아래에 있는 이불에 스치기만 해도 아팠다.
“여기?”
“아!”
“별로 빨지도 않았는데 왜 아프지.”
그건 뭔 개소리야. 하도 빨아 대서 원래 크기의 두 배로 부어올랐는데.
황당함에 뒤돌려는 내 머리를 잡아서 저지한 남한결이 킥킥대고 웃었다. 그래도 젖꼭지를 쿡 찌르던 손이 내려오긴 했다. 배를 만지작대던 남한결이 멈칫하며 말했다.
“너 살 많이 빠지긴 했다.”
“…응?”
“여기. 만져 봐.”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남한결이 내 손을 끌어 방금까지 만지작대던 곳에 댔다. 난 평평한 배에서 조금 튀어나온 부분을 만지다 말고 우뚝 굳었다.
“이거 네 거야?”
“그런가 본데.”
“…….”
“…진짜 내가 네 안에 있네.”
남한결이 신기하다는 듯 속삭인 대로, 안으로 들어온 성기는 정말 또렷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한결이 내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겹쳐진 손이 남한결의 성기가 있는 부근을 덮었다.
귓바퀴에 입을 댄 채로 남한결이 조용하게 속삭였다.
“계속 이러고 있어도 돼?”
이 사실에 왜 저렇게 기분 좋은 듯한 음성을 내는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안 된다고 할 이유가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기도 했고.
맨몸으로 붙어 느끼는 적당한 온도가 오랜만인 데다가, 섹스만 몇 번을 했으니 당연하게도 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시간도 늦었다. 아까 들어온 게 새벽 두 시였으니 적어도 네 시는 됐을 거였다.
“…하암.”
하품 소리를 들은 남한결이 배를 만지작대던 손을 뗐다. 머리를 넘겨 주는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씻겨 줄까.”
“응. 제발….”
잠기운을 이겨 내려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인 것과 동시에 남한결이 웃음을 터뜨리며 내 안에서 빠져나갔다.
***
같이 자기까지 했건만 남한결이 이 집에 다시 왔다는 게 아직 믿기지 않는다.
“왜?”
남한결이 옷을 내리다 말고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남한결에게는 조금 작은 반팔 티셔츠의 밑단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배고파?”
해 놓은 짓이 있어서인지, 이제 섹스 후에 자신을 쳐다보고 있기만 해도 아주 자동으로 부엌행이다. 당장 부엌으로 갈 기세인 남한결의 허리를 잡아서 다시 침대에 앉혔다.
“나 때문인 거면 가지 마. 배 안 고파.”
멈칫한 남한결이 엉거주춤한 자세를 고쳐 날 안았다.
“넌 밥 먹었어?”
“기내식 먹었지.”
남한결의 가슴 조금 위에 얼굴을 댄 채로 조금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얼굴을 마주한 순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이 튀어나가고야 만다.
“진짜 나 보러 온 거야?”
“…그럼. 내가 너 아니면 왜 이런 미친 짓을 해.”
고개를 들어 올리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꼼꼼하게도 내 얼굴을 훑던 남한결이 마지막으로 시선이 멎은 입술 위로 서서히 얼굴을 내렸다.
가볍게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지고 남한결이 내 어깨를 문질렀다. 아까 자신을 보자마자 내가 울었던 일이 마음이 걸리는지 시간이 날 때마다 달래듯 하는 행위들이 눈물 날 정도로 다정했다.
“엊그제 너랑 연락하는 데 기분이 이상했어. 그래서 전화한 건데 네가 안 받으니까 걱정이 되더라. 메시지로는 괜찮아보이는데, 뭔가 그 전날밤 통화했을 때 너 목소리 안 좋았던 것도 생각나고.”
“…….”
“얼굴을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
나름대로 육 개월 동안 정말 잘 숨기고 있다고 믿었는데 남한결한테는 하나도 먹히지 않았던 모양이다. 심상치 않은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망설임 없이 비행기 표부터 끊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신기한 한편 민망했다. 미안하기도 했고.
“미안. 별것도 아닌 걸로 신경 쓰이게 하고.”
회사에 통보에 가까운 휴가를 내고 왔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을 땐 목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이런 놈을 알아서 티 내지 않으려 한 건데, 그날 그 감정을 못 참아서 계획에 없던 비행까지 하게 만들었다.
내 얼굴을 확인한 남한결이 단호하게 일갈했다.
“이게 어떻게 별게 아니야.”
“…….”
“오길 잘했지. 아니었으면 또 이 발목으로 뛰어다녔으려고.”
아까 자초지종을 듣고 바로 얼음부터 가져와 발목에 대어 준 남한결의 질타하는 듯한 눈빛이 이어졌다. 자연스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나 그래도 어제부터는 잘 안 뛰는데.”
“…….”
“네가 다리 조금이라도 아프면 절대 뛰지 말라고 했던 거 기억나서….”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던 남한결이 한숨을 흘리며 발목 위에 손을 얹었다.
“안 아픈 거 맞아?”
“응. 진짜. 하나도 안 아파.”
한 번 더 확인을 하고서야 남한결이 발목에서 손을 뗐다. 난 몸이 잠깐 떨어지는 틈새를 참지 못하고 다시 남한결을 껴안았다.
“한결아.”
어정쩡하게 안긴 게 불편했는지 몸을 뒤척이려던 남한결이 날 내려다봤다. 까만 눈을 보는데 더는 숨길 것도, 숨기고 싶은 것도 없었다. 마음속에서 깊이 묻어 둔 이야기를 위에 얹힌 먼지조차 털어 내지 않은 채 꺼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생각보다 더… 너랑 떨어져 있는 게 힘들어.”
“…….”
“하루를 지내다 보면 말하고 싶은 게 생기잖아. 근데 다른 일들 하다가 그런 걸 까먹고 너한테 말 못 하게 되는 것도 슬프고.”
“…….”
“너무 보고 싶은데 못 보는 것도… 좀 힘들더라.”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한 박자 늦게 동조하는 남한결은 그럴 필요가 없음을 짚어 주었다.
“매일 네 생각 해.”
“…진짜?”
“진짜.”
“나랑 통화할 때 말고도?”
“응.”
“…….”
“아침에 샌드위치 사 먹으러 가서 쌓여 있는 햄 보면 ‘이로빈도 저거 좋아하는데’ 하는 생각부터 들고. 일하다가 시계 볼 때마다 네가 뭘 하고 있을지 상상해. 밥은 잘 먹고 있는 건지, 수업 듣다가 졸고 있지는 않은지 같은 거.”
그 시간을 떠올리듯 달콤한 미소를 띤 남한결이 자세를 바꿔서 날 꼭 껴안았다. 머리 위로 다정한 말들이 흐른다.
“특히 네가 보낸 메일 보면 가끔 내가 여기서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어.”
“…….”
“너랑 같이 있고, 안아 주고 싶거든.”
느리게 이어지던 말소리가 멎었다. 귀를 만지작대던 행위까지 멈춘 채로 남한결이 조용히 물었다.
“난 네가 힘든 건 싫은데.”
“…….”
“어떻게 할까.”
차분한 목소리가 소복소복 귓가에 쌓였다.
“다 정리하고 한국에 올까.”
“…….”
“네가 그러라고 하면 그럴게.”
난 이게 남한결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을 안다. 내가 그러라고 말하는 순간 정말 실행에 옮기고도 남을 애인 것도 알고.
“…아니.”
그 확신은 내게 많은 것을 견뎌 낼 용기를 주었다. 마치 지금처럼.
“대신 이번 기간만 끝나면 우리 절대 떨어져 있지 말자.”
“…….”
“삼 일도 안 되고. 일주일은 더더욱 안 되고.”
“…….”
“장기 출장이라도 가야 하면 아예 날 데리고 가. 조용히 있을게. 너 하는 일에 방해 안 되도록.”
말도 안 되는 억지인데 남한결이 귀엽다는 듯 웃어 주니 괜히 뿌듯했다. 새삼 느끼기도 했다. 아무리 통화 음질이 좋아 봤자 이렇게 꼭 껴안고 직접 듣는 것만은 못하다는 것을.
“출장용 가방은 큰 걸로 사야겠네.”
“응.”
볼에 입술을 여러 번 떼었다가 붙인 남한결이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들었다. 눈을 맞춘 채로 남한결이 잠시 망설였다.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허락된 시간이 짧다는 사실은 우리를 솔직하게 만들었다. 눈을 맞춘 채로, 남한결이 고요히 물었다.
“…공부하는 게 많이 힘들어?”
겨우 그 질문을 하려고 그랬나 싶다가도, 지난 육 개월간 내가 한 게 그것뿐이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라는 데도 떨어지기는커녕 한층 더 진득하게 뻗어 오는 시선을 봐서는 오늘 거짓말하기는 그른 것 같았다. 그래, 내가 누구한테 거짓말을 하냐. 난 한숨을 쉬며 포기한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조금?”
“…….”
“사실 모의고사를 봤는데.”
“저번 주에 본다고 했던 거?”
“응. 그거.”
“…….”
“나 공부 열심히 안 했나 봐.”
‘괜찮다’고 마인드 컨트롤을 충분히 한 줄 알았는데, 물어 주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털어놓고 있는 걸 보면 그게 아니었나 보다. 나 자신도 느껴질 정도로 속상함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부끄러웠으나 이런 이야기까지 털어놓아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음에 새삼 안심이 됐다.
“선생님이 될 수는 있나 싶기도 하고.”
“…….”
“슬럼프인 봐. 이 길이 내 적성이 아니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까지 들어.”
가만히 들어 주던 남한결은 내 목소리가 잦아들고서야 입을 열었다.
“아닌데. 너 공부 열심히 했는데.”
“…….”
“이렇게 살도 빠지고.”
아까까지만 해도 다른 의도로 만지작대던 배를 또 한 번 쓰는 손짓에 괜히 부끄러웠다. 남한결이 그러지 못하게 손을 잡은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그건 너 못 봐서 그런 거고.”
멈칫한 남한결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이로빈.”
날 좀 더 끌어당겨 깊숙이 안으며 남한결이 말을 이었다. 귓가에 입을 대고 말하는지 선명한 말소리가 조곤조곤 내려앉았다.
“너무 힘들면 안 해도 돼.”
“…….”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둬도 되고.”
예상치 못한 위로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말을 들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이런 말을 해 주는 게 날 가장 잘 아는 너라서.
“너 하고 싶은 거 해, 로빈아.”
“…….”
“그 일이 뭐든, 얼마가 걸리는 거든, 네가 하고 싶은 일이면 걱정하지 말고 해.”
“…….”
“네가 힘들 때는 내가 언제든 도울 수 있어. 그러니까 넌 그냥… 그러고 싶다고 말만 하면 돼. 나 그러려고 열심히 사는 거야.”
“…….”
“너 행복한 거 보려고.”
난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고 남한결의 어깨에 얼굴을 부볐다.
“그건 너랑 사귀기 전부터 그랬어. 언젠가 네가 힘들 때면 내가 도와줄 수 있도록, 늘 단단한 곳 위에 서 있고 싶다는 생각으로 살았거든.”
누군가 그러라고 가르쳤을 리도 없는데 넌 내가 어떤 말을 들어야 힘이 나는지를 아는 사람처럼 굴었다. 나에 대한 사랑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이 담긴 목소리를 마음에 꾹꾹 눌러 담았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너무 스트레스받지도 말고.”
“…….”
“너 그러면 나 속상해.”
남한결이 한 손으로는 내 배를 쓸며 입술로는 부드럽게 내 귓가와 그 위를 간질였다. 도장이라도 찍듯 피부 위를 꾹꾹 눌러 가는 입술을 따라 남한결의 마음이 내게 와닿았다.
“알았어. 난 너 속상한 일은 하기 싫어.”
“응.”
“응.”
다짐하듯 한 번 더 말하자, 남한결이 웃으며 내 볼을 살살 쓸었다.
“예쁘다.”
고개를 올리자 남한결이 당연하다는 듯 입술을 부딪쳐 왔다. 가벼운 입맞춤을 몇 번 더 하고서야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웠다. 남한결은 여름에도 이불이 필요하고, 난 남한결이 내 이불이면 된다. 결국 이불을 덮은 것도 안 덮은 것도 아닌 자세로 붙어서 손장난을 쳤다.
손을 붙였다 떼었다 하는 단순한 장난도 남한결이랑 하면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한참을 내가 제 손을 가지고 놀게 두던 남한결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근데 난 어렸을 때부터 네가 선생님 하면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했어.”
“왜?”
“넌 늘 누군가한테 뭘 가르쳐 주는 걸 좋아했거든.”
“…진짜?”
“응. 언젠가는 궁금하다는 말도 안 했는데 네가 설명해서 중간에 도망친 애도 있었어.”
참 나. 내가 웃음을 터뜨려도 남한결은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너는?”
“껌딱지잖아. 어떻게 도망쳐.”
이런 애인에 웃지 않고 배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난 잡고 있던 남한결의 손을 위로 끌어와 입술에 가져다 댔다. 예쁜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며 남한결이 떠나기 전까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생각했다. 손가락에 이어 볼까지 내준 남한결이 날 보는 눈빛에서, 지난 육 개월간 우리의 사이가 모순되게도 더 깊어지고 단단해졌음을 느꼈다.
“그렇게 말하면.”
여전히 넌 날 숨이 막힐 정도로 사랑하고.
“자꾸 열심히 공부하고 싶어지잖아.”
나도 널 숨이 달릴 정도로 사랑하고.
입술을 맞댄 것과 동시에 남한결이 윗몸을 일으키며 내 뒷통수를 받쳤다. 기꺼이 내 몸을 맡기며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만끽하기로 했다.
***
“들어가. 나랑 더 있다가는 비행기 놓치겠다.”
남한결이 비행기를 타기 전 끌어모을 수 있는 시간은 다 끌어다 썼다. 지난 6개월간 지겹게도 안 흐르던 시간은 왜 이럴 때만은 빠른지 원망스러웠다. 토요일 저녁의 북적북적한 공항 속, 그나마 한산한 곳을 찾아 앉은 화장실 옆이 한동안 못 볼 우리의 마지막 인사를 나눌 곳이라는 게 씁쓸하면서도 우스웠다.
“…그래야지.”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남한결은 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니 쉽게 자리를 뜰 리 만무했다. 6개월 전 남한결을 보낼 때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그땐 둘 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서인지 지금보다 훨씬 담백한 인사를 하고 헤어졌었다. 1년간 전혀 못 볼 거라 생각한 거에 비해 한 번은 본 거니 좋게 생각해야 싶었지만 참 야속하게도 마음은 두 배로 아쉬워졌다. 생각하다 보니 괜히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 진짜 쪽팔리게…. 난 매운 코를 괜히 훌쩍이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다시 만나기까지 남은 일자를 세겠다고 내가 들고 있었던 남한결의 핸드폰을 넘겨줬다. 남한결은 건네받은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가라앉은 얼굴을 보며 난 씩씩한 말투를 꾸며내어 장난을 쳤다.
“얼마 전 바꾼 폰인데, 잘 챙겨라. 다음에 폰섹스할 때는 안 튀게 조심하고.”
귀에 대고 속삭인 말에 남한결이 피식댔다.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길래 귀를 가져다 댔더니 귓바퀴로 후-하고 바람을 부는 행위가 아찔했다. 예상치 못한 자극에 펄쩍 뛰는 날 보고도 씩 웃기만 하는 얼굴은 못 본 새 꽤 능청맞아졌다.
“네가 많이 싸게 만들지마, 그럼.”
어쭈. 막상 폰섹스할 때는 한참 끙끙대기만 해서 사람 애타게 만들더니.
‘이렇게…? 아, 이거 자세가 좀 그런데.’
자위하는 걸 보여달라는 말에 남한결은 쩔쩔매다 이내 화면을 꺼 버렸었다. 그게 그새 사정을 한 탓에 정액이 묻은 핸드폰을 쥘 수가 없어서였다는 고해성사는 평생 잊지 못할 거였다. 킥킥 웃는 날 본 남한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순간 쿵 내려앉는 심장을 모른 체하며,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천천히 출국장을 향해 걸었다. 비행기를 탈 일이 자주 없어서 몰랐는데, 꽤 늦은 시간에도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은 많았다. 늘어서 있는 줄의 끝을 확인한 남한결이 나와 눈을 맞추며 자리에 멈춰 섰다.
마지막 인사의 순간이 찾아옴을 깨달은 나는 저려오는 입꼬리에 힘을 주어서 웃어 보였다.
“도착하면 연락하고.”
“내리자마자 전화할게.”
“응. 공부하면서 기다리고 있을게.”
고개를 끄덕인 남한결이 엄지로 내 볼을 소중하게 쓸어왔다.
“…가기 싫다.”
그 솔직한 고백에는 입꼬리를 올리고 있던 힘이 풀렸다. 난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
“…….”
“참고 있었는데, 네가 그러니까 울 것 같잖아.”
그러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각자의 비행을 위해 출국장으로 걷기 바쁜 사람들조차 걸음을 멈춘 채로 우리를 힐끔댔다. 평소라면 나보다 더 그 시선들에 더 예민하게 굴 남한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변 시야가 차단된 듯 나만을 담고 일렁이는 눈을 마주 보는데, 이윽고 남한결이 날 껴안았다.
푹 젖은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는다.
“떠나는 건 난데. 왜 이렇게….”
“…….”
“막막하고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내가 느끼는 감정을 똑같이 고하는 널 볼 수가 없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날 한 번 더 고쳐 안고서야 남한결이 서서히 몸을 뗐다. 눈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내 마음을 아는 것처럼, 머리를 들어 올리는 대신 뒷머리를 만지작대며 남한결이 마지막 당부를 했다.
“내일 아침도 잘 챙겨 먹고.”
“네가 사준 반찬 다 먹으려면 그래야 할 것 같아. 안 그러면 썩겠어.”
“응. 그러라고 일부러 많이 샀어.”
“…치사해.”
“어. 나 치사해.”
어쭈.
“밥 많이 먹는 애인이 살 빠지니까 불안해서 그래. 네가 이해해.”
이제 능글맞아지기까지 해서, 웬만해서는 남한결을 이길 수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는 나를 본 남한결이, 시계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아무리 미루려 해도 미뤄지지 않는 이별의 시간 앞에서, 남한결이 할 말이 남은 얼굴로 날 응시했다. 더 들을 잔소리가 남았나 생각하던 나는 멈칫 굳었다.
“사랑해.”
작은 중얼거림이었대도, 못 들을 수는 없었다. 멍할 내 얼굴을 보며 남한결이 작게 웃었다. 내 얼굴을 끝까지 보기 위해서 뒤로 걸으며, 남한결이 조금 목소리를 키웠다.
“담배 자주 피우지 말고.”
남한결이 없는 동안 흡연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붙어 있던 지난 이틀 내내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내내 그 사실을 모르는 척해준 남한결이 마지막 당부를 하는 순간, 흡연을 숨기는 철저한 애인은 못 된다는 걸 깨달았다. 난 바람 빠지는 웃음을 뱉으며 멀어지는 남한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대신 빨 입술도 안 남겨 주고서는 너무하네.”
남한결이 더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고서야 당사자는 듣지 못할 투정을 했다.
***
남한결이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서야 돌아온 독서실은 언제나 그렇듯 조용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남한결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시간을 보니 이륙이 몇 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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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이: 지갑 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