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잔!”
저놈의 짜잔은 그만하라고 해도 통 말을 안 듣는다.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 혼을 빼놓는 건 또 어떻고. 딴에 말하는 걸 들어보면 과도한 선물을 내놓는 나에 대항할 방법이라는데, 어째 갈수록 스케일만 커졌다.
어쩐지 모터쇼가 열릴 장소가 울산이라는 걸 안 순간부터 반짝거리던 눈을 보고 눈치챘어야 했을지 모른다. 난 재빨리 이로빈의 옷부터 훑었다. 8시면 늦은 시간이긴 했으나, 편한 맨투맨과 청바지를 골라 입은 차림은 아무리 봐도 서울에서 수업을 마치자마자 달려온 것으로 보기는 힘들었다. 내 시선을 눈치챘으면서도 뻔뻔하게 웃기만 하는 얼굴을 보니 묻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너 수업은.”
“휴가~ 냈어요~.”
“…너네 교장이 뭐라 안 해?”
“오는 길에 이미 다 잊어버렸어요~.”
요새 학교에서 저와 또래인 음악 교사랑 친하게 지낸다더니 말끝마다 음음, 하며 곡조를 붙이는 이로빈은 이보다 더 신나 보일 수 없을 정도였다. 보란 듯 내 쪽으로 장난스럽게 달랑달랑 흔드는 짐 가방까지 확인한 나는 이기기를 포기하고 짐 가방부터 낚아챘다.
“…어디를 그렇게 가고 싶은 건데.”
“아싸!”
허락이나 다름없는 말에 이로빈이 와락 달려들었다. 행사가 끝난 후 사람들이 죄다 빠져나간 주차장이 썰렁해서 다행이었다. 난 짐 가방을 든 손을 내린 채 이로빈의 어깨를 엉거주춤하게 끌어안았다.
하여간 진짜….
결국 입술을 비집고 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행사 뒤치다꺼리를 다 하고 내려올 때만 해도 마냥 피곤하기만 했는데, 이렇게 이로빈을 껴안고 있으니 그 일들이 다 아주 예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난 이로빈의 머리 위에 턱을 비스듬히 기댄 채로 이로빈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오면서 호두과자 사 먹었어?”
“와씨. 머리에서 그 냄새가 나?”
난 방금 짐 가방을 뺏는 과정에서 삐죽 튀어나와 있는 호두과자 봉지를 봤다는 이야기를 생략하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제 머리의 냄새를 맡아 보려 노력하는 이로빈이 귀여웠으므로.
***
“뭐 해. 오라니까?”
“…야.”
“응?”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찾아가는 건….”
“아이참, 갑자기가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네. 말했다니까?”
“그래도… 분명히 부모님도 불편해하실 거고.”
“왜 불편해? 우리가 그럴 사이야? 옛날엔 너네 집이 우리 집이고, 우리 집이 너네 집이었대. 뭘 이렇게 낯을 가려. 우리 엄마 아빠야말로 지금 네가 이러는 거 보면 섭섭해하겠다.”
됐지? 하는 표정까지 지은 이로빈은 거침이 없었다. 얼떨결에 손이 잡혀서 질질 끌려가던 내가 집에 돌아가기 싫은 개처럼 문 앞에 가까스로 발을 세워 멈췄을 때는, 이미 이로빈이 번호 키를 누르기 시작했다.
“저희 왔어요!”
미쳤다. 진짜 들어왔어.
문이 활짝 열리고, 이로빈이 불이 흘러나오는 거실을 향해 크게 외치며 나를 신발장 쪽으로 던져 넣었다. 남자 둘이 서기에는 좁은 현관 탓에 꾸물거리며 운동화를 벗는 이로빈과는 필연적으로 몸이 부딪쳐야 했다. 먼저 운동화를 벗은 이로빈이 거실을 한 번 보고는 이내 내 엉덩이를 툭툭 쳤다.
“야!”
미친 게 틀림이 없다. 거실부터 확인하며 소리를 죽여 버럭대는 나를 본 이로빈이 특유의 능청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왜. 부모님 집이라고 내외하는 거야?”
반짝이는 눈동자가 장난스러웠다. 심각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동자를 보니 아무래도 오늘 여기서 나가기는 그른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발소리가 여러 개 겹쳐 들려왔다.
“왔구나. 생각보다 늦었네?”
“어머. 이 청년이 정말 한결이야? 여보. 얘 키 큰 거 봐!”
“…안녕하세요.”
이내 머리 모양과 크기만 다른 이로빈들이 내게로 쏟아져 나왔다. 난 구두조차 벗지 못한 채 엉거주춤 고개부터 숙여야 했다. 무거웠던 양손의 짐들이 사이좋게 흩어졌다.
“한우라니. 너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이걸 사 와.”
“그러게. 너네 이거 과일 바구니는 집 앞 마트에서 산 거니? 영수증은? 환불하자.”
“…엄마. 나 멜론은 먹고 싶어요.”
***
“이야….”
“여보. 한결이 민망하게 그러지 말고 밥 먹어.”
“아니, 먹을 거야. 먹을 건데. 너무 신기하잖아. 한결아. 어떻게 이렇게 잘 자랐어? 응? 진짜 고대로 자랐네. 예쁘고 잘생기고. 근데 또 키는 엄청나게 크고.”
어려서도 그랬지만 난 정말 이로빈 엄마의 친화력에는 면역력이 없었다. 어쩌면 그건 이로빈과 꼭 닮은 눈동자 때문일지 모른다. 나를 향해 반짝대는 갈색의 눈동자는 애정을 전달하는 방식마저 이로빈과 비슷했다. 난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고개를 또 한 번 숙이며 이로빈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말했잖아요. 한결이 예쁘고 잘생겼다고.”
나름의 도움 요청 신호였으나 이로빈은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마치 이런 낯부끄러운 칭찬을 들은 게 저인 것처럼 자랑스러운 미소까지 띤 얼굴이 어이없었다. 그 과장된 찬사를 진지하게 고개 끄덕이며 듣는 이로빈의 엄마 아빠는 말할 것도 없고.
“아들. 이제 난 동네 아줌마들이 우리 김 교수 아들이 제일 잘생겼다고 치켜세워 줘도 양심에 찔려서 공감도 못 해 주겠다, 어떡해? 사실을 말해야 하니? 아들 친구가 더 잘생겼다고?”
“옆집의 은지한테만 말 안 하시면 전 상관없어요.”
“은지는 왜?”
“은지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다고 했단 말이야. 그 정도의 찬사는 잃고 싶지 않아요.”
한술 더 뜨는 이로빈 때문에 이 대화를 그나마 자중시키려고 노력하던 이로빈의 아빠마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제 부모님에게 개구쟁이처럼 웃어 보이면서도 옆의 통에서 수저를 쑥쑥 뽑아낸 이로빈이 곧장 그것들을 내게로 내밀었다. 먹어 얼른, 앞의 미역국을 한 번 더 밀어주며 챙기듯이 말하는 얼굴에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한결이 정도면 아들이지 뭐. 이 김에 그냥 잘생긴 아들 하나 더 있다고 하세요.”
이로빈이 말도 안 되는 말을 했을 땐 나도 모르게 이로빈 부모님의 눈치부터 살폈다. 조금 전까지 장난스럽던 표정을 지운 채 심각한 얼굴을 한 이로빈의 엄마가 내게로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럴까? 내가 그래도 너네 엄마가 화 안 낼까, 한결아?”
진지하게 묻는 얼굴에는 이로빈이 장난을 칠 때와 똑같은 눈빛이 떠 있었다.
“아….”
종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대화에 눈앞이 핑핑 돌았다. 틈이라고는 없는 대화 속에서 조용한 건 묵묵히 밥을 먹고 있는 이로빈의 동생뿐이었다. 종종 서울에 올 때마다 집에서 자고 갔기에 그나마 익숙하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쳐다본 시선이 길었는지 눈이 마주쳤다.
“…아.”
눈을 깜빡이던 이로빈의 동생이 무뚝뚝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먹고 싶으면 말씀을 하시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앞에 있는 반찬을 본 걸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제 앞에 있던 오징어젓갈이 담긴 접시를 쭉 밀어 주는 얼굴을 보며 새삼 그도 이 집안의 일원임을 느꼈다.
“…고맙다.”
반쯤 포기한 상태로 오징어젓갈로 젓가락을 뻗은 것과 동시에 소곤거림이 귀로 엉겨들었다.
“와, 우리 햄스터가 젓갈을 공유하네. 연구할 때도 보지 못했던 광경이야.”
“여보. 로운이는 원래 마음에 드는 사람한테는 잘해.”
“로운이가 한결이는 좋아한다니까요? 저번에 서울 왔을 때는 둘이 밥도 같이 차려 먹더라고.”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구분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밥그릇에 코를 파묻듯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
“집에 갈 때 꼭 회 떠서 가자. 알았지?”
“아… 네. 가능하면….”
아무리 봐도 민물에서 펄떡펄떡 뛰어다니는 조막만 한 물고기들에서 회라고 부를 만한 덩어리가 나올 리 없었지만…. 기대감이 일렁이는 얼굴에 대고는 그 말을 할 수 없었기에 말끝을 흐려야만 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따지자면 울산에 올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겠지만,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토요일 오후 이로빈의 아빠와 파라솔까지 펴 놓고 민물낚시를 하는 상황은 내 예상 밖이었다.
‘낚시 가세요?’
‘어. 슬슬 출발하려고. 왜?’
‘아빠 괜찮으면 한결이 데려가실래요? 얘 햇빛 좀 쐬어야 하거든요. 이번 행사 때문에 바빠서 계속 실내에만 박혀 있었더니 안 그래도 하얀 얼굴 더 하얘진 거 봐요.’
‘야. 너….’
‘그래? 나야 말동무 생기면 좋지. 한결아. 갈래?’
‘결아. 갈 거지?’
‘…너도, 너도 가는 거지?’
‘나 엄마 연구실 잠깐 들르기로 했거든. 아마 시간이 안 되지 않을까? 그냥 둘이 다녀와. 재밌을 거야. 아빠가 요새 완전히 빠져 계시거든.’
다른 건 몰라도 이로빈의 아버지가 낚시에 빠져 있다는 이야기는 맞았다. 햇빛이 반짝일 때마다 덩달아 빛을 내는 것 외에는 온통 잠잠한 물을 바라보는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머님 이야기는 로빈이 엄마 통해서 종종 듣곤 하는데, 아버지는 잘 지내시고?”
갑작스러운 대화의 물꼬였다. 내가 멍하게 있는 사이 질문에 힘을 싣는 것처럼 시선이 돌아왔다. 이로빈보다 조금 더 색이 짙은 눈동자는 그래도 사람을 안심시키는 힘이 있었다. 난 어색함을 이겨 내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 네. 잘 지내십니다.”
형과 어색해지기 전까지는 가끔 아버지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생신에는 자택으로 선물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아버지와 나는 그 이상 노력할 의지를 상실한 사람들이고, 그건 내게 있어 더는 아프지조차 않은 사실이 되었다.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고개를 끄덕이던 이로빈의 아빠가 다시 민물에 시선을 박았다. 찌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이미 지나간 줄 알았던 대화가 다시 시작되기에는 충분한 환경이었다.
“힘들었지?”
“…네?”
“크면서 말이야.”
불쑥 건너온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설명을 바라듯이 그를 응시해야만 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야무지게 머리에 쓰던 낚시 모자 아래로 그늘이 진 얼굴은 유독 읽기 어려웠다.
“친구로는 몰라도 아버지로는 좀 어려웠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너네 아버지.”
“…….”
“심지어 친구로 지내기에도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지.”
이로빈의 엄마와 우리 엄마가 친구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로빈의 아빠와 우리 아빠가 친구라는 말로 묶일 수 있다는 건 몰랐다. 사실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얼핏 봐도 두 사람은 같은 범주 안에 있다고 보기 어려웠으니까.
내 표정에서 그런 의아함을 다 읽은 모양인지 이로빈의 아빠가 친절히 설명을 덧붙였다.
“아직도 기억나. 처음 만난 날이었는데, 아내한테 들은 이야기 때문인가 난 한결이, 너네 아버지가 그렇게 반가운 거야. 나랑 나이도 같다고 하고, 내가 또 어렸을 때부터 군인에 대한 환상이 좀 있었거든. 막 제복 입고. 인사도 각지게.”
이로빈의 풍부한 감정 표현은 이런 아버지 밑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나에게 시범을 보이듯 군인처럼 경례까지 하는 이로빈의 아빠를 따라 어색하게나마 웃었다. 그런 내 웃음에도 만족한 듯 너털웃음을 지은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만나자마자 손부터 딱 내밀었는데.”
“…….”
“네 아버지가 끝까지 안 잡아 주더라고.”
“…….”
“내가 참다 참다 물어보니까 ‘친해지면 잡읍시다’ 나직이 한마디 하는데, 그 순간 딱 느꼈지. 아, 이 사람 어렵겠구나 하고.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 특유의 딱딱한 얼굴로 사람이 기분이 나쁘지 않을 정도로만 티 나게 선을 그었을 얼굴이. 아들에게도 그어 대던 선이 타인에게는 후할 리 없었다. 그건 어쩌면 아빠의 장점일지 몰랐다.
모두에게 원리원칙주의자인 군인. 공평하게 퉁명스럽고, 그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할 줄 모르는 남자.
그 모두라는 범주에 포함되는, 자격 없는 아들인 나로서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때마침 찌가 움직여서 다행이었다. 이로빈의 아빠가 ‘어이쿠’ 하는 소리를 내며 황급히 낚싯대를 당겼다. 그러나 물고기가 미끼를 물고 도망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던지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갈고리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쉬운 표정을 짓는 이로빈의 아빠를 보다가 옆에 놓인 미끼통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아버님. 여기….”
“어, 그래. 고마워.”
한 손에는 낚싯대를 잡은 채로, 낑낑대며 미끼통을 열려 하는 그를 보니 한 번 더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낚싯대 잡아 드릴까요.”
“그래 줄래?”
“네.”
“아쉽다, 그치. 잘하면 우리 진짜 회 먹을 수도 있었는데.”
찌가 흔들리던 속도를 보아하니 회가 나올 만한 크기는 아니었으나 그런 말을 들려주기에는 너무 순진한 얼굴이 보였다. 무엇보다 눈앞의 사람은 이로빈의 아빠였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갈고리에 미끼를 걸 수 있도록 낚싯대를 잡아 줬다. 또 한 번 낚싯대가 물 위로 드리워졌다.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리자마자 날 보고 있는 흐뭇한 얼굴을 마주했다.
“그래도 이렇게 믿음직한 조수가 옆에 있어 주니 좋네.”
“아닙니다. 제가 뭘 했다고….”
“뭘 하긴! 다 했지! 내가 저번에 로빈이랑 왔을 때는 어우, 아주 난리도 아니었어. 덩치가 작지도 않은 놈이 어찌나 가만있질 못하는지 아주 물고기가 시끄러워서 다 도망간 거 있지.”
그게 과연 이로빈 혼자 떠들어서였을까….
“네 시간 동안 실컷 수다만 떨고 갔잖냐. 하여간 말은 오죽 또 웃기게 하는지.”
흉이라면 흉을 보는 순간마저 이로빈의 아빠 얼굴에서는 그 시끄럽고 가만있지 못하는 아들에 대한 애정이 읽혔다. 어렸던 내 눈에도 보이던 것은 여전히 이 집안에 건재했다.
어렸을 때는 그게 참 부러웠다. 나는 왜 저런 집안에서 태어나지 못했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근데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기에 난 너무 나이 먹었고, 저런 사랑은 그 대상이 이로빈이기에 가능한 것임을 알았다.
왜냐면 나도 그들처럼 이로빈을 사랑하니까. 그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두를 형편없이 웃게 하고, 동시에 죽을 듯이 울게 만드는 그 남자애를.
난 내 생애를 통틀어 이로빈을 지키고 싶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지킨 적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로빈은 대부분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서 있었고, 그런 이로빈이 삐끗할 때는 이런 가족들의 애정이 이로빈을 일으키고 또 지켰음을 안다.
아무래도 이로빈은 그 애정을 나에게도 나눠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의도가 뻔히 읽혔으나 이렇게 따라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가 그 애를 지키고 싶은 이유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천천히 곱씹는 사이 찌가 두어 번 더 움직였고 엄지손가락 반 마디만 한 물고기 새끼 하나를 잡았다. 어떤 고기든 잡겠다며 눈을 빛낼 때는 언제고 재빨리 다시 물에 놓아준 이로빈의 아빠가 내가 건네준 미끼를 익숙하게 끼웠다.
“한 번만 더 해 보고 갈까?”
뉘엿뉘엿 지는 해를 본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띄엄띄엄 주변에 앉아 있던 낚시꾼들도 하나둘 떠났다. 찌를 나란히 드리우고는 반짝이는 강물에 가만히 시선을 두고 있을 때였다.
“둘이 사는 건 좀 어때?”
바로 고개를 돌렸지만, 눈을 보며 대화하는 것이 습관처럼 보이던 이로빈의 아빠는 이상하게도 날 보고 있지 않았다. 강물과 낚싯대를 번갈아 살피는 눈길을 보니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낚시에 집중하려는 듯했다. 나는 여태껏 잠잠했던 내 낚싯대를 괜히 한 번 잡았다가 놨다.
이로빈이 날 여기까지 끌고 온 의도를 아는 만큼, 내가 이곳을 오기 어려웠던 이유를 알고 있다.
이런 질문에 답하기 어려워서였다. 정말 나와 이로빈이 룸메이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무해한 애정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알기에.
입 안이 썼다. 난 모래라도 돌아다니는 것처럼 깔끄러운 입 안을 혀로 훑은 후에야 겨우 이도 저도 아닌 대답을 내놨다.
“아… 네. 좋습니다.”
이번에는 휙 시선이 돌아왔으나 마주하기 어려웠다. 난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 강물을 응시했다. 고기라도 잡혔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두 개의 낚싯대는 미동조차 없었다. 무료를 이기려는 낚시꾼들이 그러듯 이로빈의 아빠가 질문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로빈이가 좀 더럽게 해 놓고 살지?”
“아니에요. 그래도 요새는 빨래도 잘하고.”
“빨래야 하겠지. 제대로 안 해서 손이 두 번 가니 문제지.”
이로빈의 버릇을 익히 아는 것처럼 쯧쯧대며 나온 말에는 공감도, 부정도 할 수 없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이로빈의 아빠가 잠시 침묵했다.
“한결아.”
이름까지 불린 마당에는 모른 척을 할 수가 없었다. 어렵사리 고개를 든 나와 시선을 마주친 이로빈의 아빠가 웃었다.
“너네 아빠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악수를 청한 게 언제인지 아니.”
뜻밖의 질문이었다.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한 대화의 주제를 다시 꺼내 놓은 의중을 몰라서 가만히 그 얼굴만 응시했다. 이로빈처럼 입이 크게 벌어지는 웃음은 중년 남자의 입가를 환하게 물들였다.
“서울로 이사할 때.”
“아….”
“그때 처음으로 나한테 손을 내밀고 말씀하시더라.”
이로빈의 아빠의 뒤로 해가 졌다.
“‘우리 아들 잘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뭐라고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난 굳은 채로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근데 아저씨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아저씨가 그 말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어.”
“…….”
“아저씨가 보기에는, 내가 널 돌봐주는 것보다 네가 로빈이를 돌봐주는 게 더 큰 것 같거든.”
자연스레 주름이 지고, 또 그을린 손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서 우리는 참 너한테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우리 로빈이는 다리가 몇 번은 더 부러졌을 거야.”
“…….”
“신발 끈은 또 왜 그렇게 자주 풀리는지. 네가 매번 묶어 주느라 고생했지.”
추억을 돌이켜보며 너털웃음을 짓던 이로빈의 아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내가 느슨하게 잡고 있던 낚싯대를 세게 잡은 그가 다급하게 외쳤다.
“고기! 고기!”
“어, 네?”
“도망간다. 당겨, 얼른!”
얼떨결에 낚싯대를 잡자 그 위로 힘을 실은 이로빈의 아빠가 재빨리 줄을 감으라는 눈짓을 했다. 난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도 모른 채 줄을 감았다. 주황빛으로 반짝이는 강물들 너머로 물고기의 비늘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몸부림을 칠 때마다 잔뜩 힘을 줘야 할 정도로 큰 고기였다. 힘 싸움이 이어졌고, 갈고리가 목에 제대로 박힌 듯한 물고기가 힘이 빠져서 멈칫한 틈을 타 마지막 줄을 감았다.
오버 좀 보태자면 성인 남성의 허벅지만 한 고기였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이마가 축축했다. 낚싯대를 같이 잡아 주던 손을 놓은 그가 마찬가지로 축축한 이마를 닦으며 흐느적흐느적 올라오는 물고기에 대고 탄성을 질렀다.
“히야….”
“…하아… 하.”
“이게 진짜 잡히네….”
이로빈의 아빠가 감격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 맨날 한 마리도 못 잡는다고 아내가 엄청나게 구박했거든….”
물고기를 잡으면 넣어 둘 용도로 가져온 통에 들어간 고기가 뻐끔뻐끔 숨을 쉬기 시작했다. 통 안을 내려다보던 그의 시선이 내게 돌아왔다.
“한결아.”
한 손에는 미끼통을 든 채 다른 한 손으로는 검지를 세워 내게 들이대는 얼굴이 진지했다.
“따-악 한 번만 더 해 볼까?”
“…….”
“이번에는 아저씨가 조수 할게.”
자신이 날 데리고 왔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 조수를 자처하는 해맑은 얼굴은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누군가와 똑 닮아 있었다. 아마 이로빈이 늙으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
“집 찾아올 줄은 아는 거지? 모르면 아저씨나 로빈이한테 꼭 전화하고.”
“네, 압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 참, 그렇네. 한때는 너도 살았던 곳인데.”
떠날 때 다짐했던 대로 정말 회를 떠 왔다는 사실에 그는 고양된 상태였다. 그가 먼저 세팅을 해 두겠다며 서둘러 아파트 입구를 걸어가는 걸 보고 슈퍼로 걸음을 틀었다.
이로빈과 내가 어렸을 때 자주 들르곤 했던 슈퍼는 대형 할인 마트로 바뀌어 있었다. 어제 과일 바구니를 사기 위해 들른 곳이기도 했다. 마음에 차는 과일 바구니를 찾기는 어려웠대도, 초장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회무침에 필요한 야채와 이로빈이 좋아하는 몇 가지 군것질까지 산 후 슈퍼를 나왔다.
슈퍼에서 이로빈의 집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봄이면 양쪽으로 벚꽃이 드리워지는 길을 지나서 조금 걷다 보면 놀이터가 나오는 것마저 기억과 같았다. 부지런히 걷던 나는 시선이 스친 놀이터를 지나치지 못하고 멈춰 섰다.
정확히는 그네라 해야 옳았다. 어둑어둑한 어둠 속 가로등 아래에 있는 그네는 한때 이로빈과 내가 하루 중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낸 놀이터의 주인이었다.
‘울지 마, 남한결.’
‘…….’
‘우린 꼭 다시 만날 거니까. 알았지?’
연결 쇠가 죄다 녹슨 그네 위로 우리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나 잊으면 안 돼.’
‘…….’
‘나도 절대 안 잊을 거니까.’
‘…….’
‘못 잊을 거니까. 너도. 너도, 로빈아.’
어떻게 보면 난 너를 잃는 게 참 무서웠던 그때에서 한 뼘도 자라지 못했다.
녹슨 그네는 잠시 앉는 것만으로도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난 봉지를 옆에 놓아둔 채로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한 번도 돌아올 것으로 생각하지 못한 곳.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던 사람들.
그리고….
“…뭐 하세요, 여기서.”
난 말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자를 푹 눌러쓴 이로빈의 동생이 놀이터 입구에 서서 날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는 것보다 이로빈의 동생이 가까워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이내 앞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큰 덩치에 맞지 않게 내가 들고 있는 봉지를 기웃대는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보란 듯 봉지를 건네주자 이로빈의 동생의 시선이 한 번 더 넘어왔다. 이내 봉지 안을 콕 찍어 가르키는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저 콜라 먹어도 돼요?”
“…먹고 싶으면 먹어.”
자그마치 1.5L 콜라를 소중히 품에 안은 이로빈의 동생은 옆의 그네까지 꿰차고 앉았다. 가끔 발을 구르는 모양인지 삐거덕대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자고 말할 타이밍을 놓친 나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군대 간다며.”
“네.”
“언제 가?”
“내년 2월이요.”
“육군?”
“네. 형은 다녀오셨죠?”
“아, 어.”
“육군으로요?”
“아니. 난 카투사로 다녀왔어.”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불편한 건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수다를 떨 사이도 아니었다. 아직까지 이로빈으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지만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괜히 목덜미를 긁은 나는 옆으로 손을 뻗었다.
“줘. 내가 들고 갈게.”
“제가 들어도 되는데.”
“괜찮아.”
고개를 끄덕인 이로빈의 동생이 잔말 없이 봉지를 건넸다. 봉지의 손잡이를 고쳐 잡다 말고 시선을 돌렸다. 콜라병을 옆구리에 낀 채 바지 주머니에 손까지 넣은 이로빈의 동생과 내 눈높이가 얼추 비슷했다. 오늘 이로빈이랑 닮은 눈과 깊숙한 눈 맞춤을 하는 일이 꽤 잦았다. 이어지던 시선을 끊고 몸을 돌리려던 나는 멍청하게 굳은 채로 고개만 뒤로 돌렸다. 그가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나는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뭐…?”
방금 폭탄을 던진 사람치고는 심히 태연한 얼굴로 이로빈의 동생이 한 번 더 말했다.
“우리 형이랑 결혼할 거예요?”
누가 들으면 ‘저 콜라 먹어도 돼요?’라고 묻는 것으로 착각할 법한 어투였다. 그러나 두 번을 듣고도 도저히 내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난 멍하니 입을 벌렸다. 봉지의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아귀의 힘이 풀렸고, 곧 모래 위로 초장을 비롯한 여러 식재료들이 풀썩 가라앉았다.
***
“어? 진짜 여기 있었네?”
슬리퍼를 직직 끄는 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로빈과 얼굴을 마주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언제나 그렇듯 그런 내 의사 따위는 필요 없는 이로빈이 가까워지더니 이내 그네에 앉은 내 앞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직도 쐴 바람이 남았어?”
장난스럽게 물으며 내 볼을 만지작거리는 이로빈을 보지 못한 채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토록 참으려 했음에도 눈가가 뜨거워졌다. 사실 이로빈의 발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그랬다.
“저녁 먹어야지.”
“…….”
“밥 먹기 전부터 홈런볼 먹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한데.”
무언가를 물고 있는 듯한 목소리였는데, 그게 과자를 먹고 있기 때문이었나 보다. 축축해지는 눈을 빠르게 깜빡인 나는 기울어진 시야에 담긴 슬리퍼와 내 앞에 쪼그려 앉은 허벅지, 그리고 과자 부스러기가 묻어 있는 옷소매 같은 것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과자 먹는다고 잔소리도 안 하고. 뭔가 이상한데?”
“…….”
“내가 낚시 안 따라가서 힘들었어? 아빠가 질문을 너무 많이 했나?”
말 없는 내가 이상했던지 조심스레 물은 이로빈이 품에 안고 있던 홈런볼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내 볼을 잡아 왔다. 따뜻한 손이 소중한 것을 달래듯 내 볼을 쓰다듬었다.
“…아.”
숨을 한 번 삼키고 손을 뻗어 이로빈을 끌어당겼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네가 출렁댔고, 몸이 위로 끌어당겨진 이로빈의 입에서는 어리둥절한 신음이 터졌다.
“…….”
그것도 잠시, 이로빈의 손이 내 뒷머리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내게 안길 때면 늘 그러듯 내 어깨에 볼을 댄 채 이로빈이 웅얼웅얼 말했다.
“우리 결이, 나 보고 싶었구나.”
“…….”
“그것도 그냥 보고 싶었던 게 아니라, 엄청나게 보고 싶었나 본데?”
나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언제 알았냐구요? 잘 기억 안 나는데. 근데 우리 가족 다 안 지는 꽤 됐어요.’
‘…어떻게.’
‘저희 형이 집에 내려와서 이야기했거든요. 형이랑 사귄다고. 형이 말 안 해요?’
‘…몰랐어. 들은 적도 없고.’
‘알고 온 줄 알았는데. 인사하러 온 줄 알았죠. 뭐, 아니면 됐어요. 형한테는 제가 얘기했다고 하지 마세요. 본인이 생각이 있으니까 말 안 한 것 같은데 저 괜히 혼나요.’
이로빈의 동생이 무덤덤하게 털어놓던 이야기가 귀에서 맴돌았다. 난 메어 오는 목을 무시하고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 그네에 앉을 때마다 무서워.”
“…….”
“널 잃을 날이 올까 봐. 그리고… 널 잡지 못할까 봐.”
네가 내 전부임을, 그걸 잃으면 살 의미가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아는 나는 열셋에도, 스물아홉에도 버림받을까 봐 겁먹은 애처럼 굴곤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붙잡고 싶은데, 네가 잡혀 줄까를 확신하지 못해서 울기만 했지. 그때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이었기 때문에.
“…거참 신기하네.”
“…….”
“나도 그랬는데. 이 그네 앞에 쪼그려 앉을 때마다 네가 날 정말로 떠날까 봐 무서웠지.”
그때도 지금도 넌 나를 달래는 법을 알았다. 나와 몸을 붙인 채로 네 숨소리를 한참 들려주다가, 나의 두려움에 크고 담대한 마침표를 찍어 줬지.
“같은 걸 무서워하는 걸 보니, 우리가 정말 서로를 사랑하긴 하나 보다.”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고개를 들어서 날 올려다본 이로빈이 씩 웃었다.
“어때. 안심되지? 나도 겁쟁이라니까?”
대답 대신 이로빈의 머리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응. 조금은.”
“…….”
“고마워.”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며, 내 손을 잡은 이로빈이 장난치듯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뭔진 몰라도 밖에서 스킨십 질색하는 남한결이 이렇게 안아 주기까지 하고. 가끔은 이렇게 떨어져 있는 것도 나쁘진 않….”
가로등 불빛을 받은 채로 신나게 말을 잇던 이로빈이 멈칫했다.
“헐. 미쳤나 봐. 너 인턴 갔을 때 그렇게 고생해 놓고 이런 미친 말을 하다니….”
“…….”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더니 진짜인가 봐. 와씨. 나 소름 돋았어. 봐봐.”
어떻게 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내 인생에 너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대부분 그랬다.
근데 언제나 답은 너무나 쉽게 나오더라.
“이로빈.”
내가 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사랑해.”
이런 너를 내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사랑해, 이로빈.”
네가 나를 사랑하는 기적이 일어났는데, 내가 어떻게 너를 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어떻게 용기를 내지 않을 수가 있겠어. 네가 나를 허락해 줬는데.
“나도.”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답변과 함께 내 등을 감싸 안는 네가 있는데.
이번 겨울에 엄마를 찾아뵈면 네 이야기부터 꺼내리라고 다짐했다. 널 향한 사랑을 입에 담은 순간 감당해야 할 것들은 더는 겁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바라는 건 단 하나였다. 네가 받아야 마땅할 사랑을 받는 것.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네가 사랑할 사람들로부터.
서서히 몸을 떼어 내고 일어선 이로빈이 손을 내밀었다. 난 손을 잡고는 그네에서 일어났다. 내가 일어선 그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로빈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우리 정말 이 그네에 얽힌 추억이 많다.”
“…그러게.”
이로빈이 바닥에 떨어진 과자 봉투를 옆의 쓰레기통에 넣는 것까지 기다리다가 옆에 섰다. 팔짱을 끼라는 듯 팔을 드는 장난스러운 얼굴을 보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꾹꾹 눌렀다. 나는 팔짱 대신 네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오늘 떨어져 있던 시간의 공백을 알아서 채우는 이로빈의 수다가 시작됐다.
“아까 엄마 연구실 다녀오는데 차 라디오에서 ‘사랑의 포로’라는 노래가 나오는 거야. 그 노래 우리 학교 문학 선생님이 얼마 전에 추천해 준 노래거든. 가사에 ‘사랑으로 꽁꽁 묶어 버릴 거예요.’ 이런 게 나온대서 내가 아무리 그래도 요새 나온 노래인데 어떻게 그렇게 가사가 유치하냐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었거든? 근데 진짜 가사에 그대로 나오더라고. 소름 돋았어.”
“야. 문학 선생님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했잖아.”
“문학 선생님 쉰여덟 살이신데?”
“…음악 선생님이랑 헷갈렸어.”
“졸라 웃긴다 너. 너도 그럼 성 대리랑 친하게 지내지 마.”
“나 그 사람 핸드폰 번호도 몰라.”
“참나. 핸드폰 번호도 모르는 사람 유머에 웃어 주기는 왜 웃어줘? 나 진짜 기분 상했어, 그때.”
“솔직히 너보다는 웃겨.”
“와, 이건 진짜 자존심 상한다. 됐어. 너 혼자 우리 집까지 알아서 잘 찾아와 봐.”
눈을 흘긴 이로빈이 내 팔을 오버하며 쳐냈다. 난 웃음을 참으며 이로빈의 어깨를 다시 잡았다. 그러고는 이로빈도, 나도 아님을 뻔히 알고 있는 거짓말을 보탰다.
“아, 가지 마. 나 너네 집 어딘지 몰라.”
“내가 세상에서 제일 웃기다고 해 주면 다시 생각해 볼게.”
“그건 아냐.”
“그래, 한결아. 서울 가서 보자. 조심히 올라가고.”
미련없이 휙 뒤돌려는 등을 껴안아서 옆구리에 간지럼을 태우자 이로빈이 아파트 단지가 떠나가도록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 웃음소리에 제가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대기부터 한 이로빈이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놀란 표정을 지웠다.
“내가 잘못했어. 이리 와.”
손을 뻗자, 못 이기는 척 옆에 서 준 이로빈이 제 딴에는 소리를 죽여 소곤소곤 속삭였다.
“아빠는 회, 엄마는 한우 구워 먹겠다고 아주 신나셨어. 주인공인 네가 들어와야 한다고 자리까지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계셔. 근데 고기 네가 잡았다며? 아빠 그렇게 좋아하시는 거 로운이 대학 붙은 이후로 처음 봐.”
“어. 아버님이 더 좋아하셨어. 다음엔 너랑 셋이 같이 가자셔.”
“나야 좋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우리 은퇴하면 낚시장이나 하나 차릴까? 생선 반찬은 실컷 먹겠다, 그치.”
농담을 얹으며 자연스레 허리를 감싸는 너 덕분에 우리에게만 허락된 어깨동무가 완성됐다. 한 손에는 봉지를, 다른 한 손에는 평생 안고 갈 어깨를 쥐었다. 우리는 집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