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31)

학교와 가까운 오피스텔에 산다는 건 장점과 단점이 공존했다. 우선 장점은 출퇴근이 쉽다는 것이었다. 가끔은 남한결을 회사로 데려다주기까지 하고도 제시간에 맞춰 출근을 할 수 있었다.

단점은,

“어머, 로빈 선생님!”

학교와 관련된 모든 사람과 자연스레 행동반경이 겹친다는 것.

난 방금 시식대에서 건진 비엔나소세지를 급하게 삼키며 뒤돌았다. 학부모일 거라 예상했던 대로, 어딘가 익숙한 얼굴의 중년 여인은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꾸벅 숙인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해 내기 위해서 머릿속을 한바탕 뒤집었다.

“어떻게 여기서 봐! 이 근처에 산다더니 정말인가 봐요?”

호기심 가득한 반짝반짝한 눈동자가 꼭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아, 그래! 작년에 임시 담임을 맡았던 2학년 3반 반장 한승재의 엄마였다. 학기 초 상담에서 마주했었던 그녀의 해맑은 얼굴을 떠올린 난 안심하며 그녀가 끌고 있는 카트를 눈짓했다. 

“안녕하세요, 승재 어머님. 장 보러 오셨어요?”

“네, 내일 애들 아빠가 도시락을 좀 싸달래서. 근데 너무 반갑다! 아 참, 이럴 때가 아니지. 승재한테 자랑해야겠어! 승재가 아직도 선생님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몰라요. 누가 보면 아직도 담임인 줄 알걸?”

반갑다는 말이 사실인지,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말을 하다 말고 그녀가 멈칫했다.

“삼초온-.”

핸드폰을 두드리던 손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날 향한 눈이 휘둥그레 커지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낯선 얼굴이 등장한 순간부터 경계하듯 목에 딱 달라붙어 옷을 잡아당기고 있는 존재를 일찍이 알고 있던 나는 ‘올 게 왔구나’, 생각하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근데 안고 있는 아기는 누구예요?”

“아….”

“설마 선생님의….”

눈을 가늘게 뜨며 나와 예빈이를 번갈아 가리키는 얼굴을 보는데 무슨 오해를 하는지도 알만했다. 큰일 날 일이었다. 난 손을 내저으며 재빨리 해명에 나섰다.

“아, 아뇨! 그건 아니구요. 친구 딸인데 오늘 저희가 봐주기로 해서요.”

“저희…?”

갸웃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주위를 스캔했다. 예빈이가 먹을 요거트를 사오겠다며 사라지더니 함흥차사인 남한결을 찾기 위해서였다.

“저랑 같이 사는 친구인데…. 어, 어딨지.”

“아, 그 친구? 아직도 총각 둘이 같이 사나 보네.”

난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궁금해하던 얼굴을 지운 채,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는데 한 박자 늦은 현실 감각이 차올랐다.

아… 그랬지. 남한결과 나의 연결고리조차 찾지 못하는 사람들한테는 해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뻘쭘한 손이 목으로 향했다. 목걸이에 걸려있는 반지 두 개를 만지작대는 습관은 남한결과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견뎌 내며 생긴 습관이기도 했다.

“로빈 선생님이 어떻게 혼자야, 진짜. 난 들어도 들어도 이해가 안 가네. 아직도 주변에 참한 아가씨 없어요? 내가 중매 한번 설까?”

진지함 반, 장난 반으로 말을 걸어오는 그녀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삼십 대에 들어선 순간부터는 하도 익숙해진 일이라, 이제는 자동반사적인 대답부터 튀어 나간다.

“에이, 어머님. 저 소개 소개하면 받은 사람 쪽에서 욕해요.”

“욕을 먹긴! 내가 우리 애한테도 선생님 인기에 관해서 들은 게 얼만데. 혹시 눈이 높아요? 이상형이 뭔데? 말해 봐. 내가 그래도 우리 청하동에서 중매 잘 서는 걸로 유명해.”

이런 중매 제안은 적당히 받아치면 그만이다. 청하중학교의 남은 총각 선생님은 셋. 그중 제일 나이가 어려서 그나마 이런 제안을 하기가 쉬운 데다가, 막내라는 죄로 학교 모임에 종종 불려 나가는 나로서는 질리도록 겪은 일이었다. 난 여러 번의 거절 시도에서 얻은 교훈을 되새기며, 일부러 정중한 얼굴을 꾸며 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울산 이대 손 10대 독자인데….”

“…요새 세상에도 10대 독자가 있어요?”

“있다마다요. 거기다 저는 외동이어서… 무슨 뜻인지 아시죠?”

새빨간 구라였지만, 흠칫한 그녀가 말을 잃어가게 하는 데는 효과가 탁월했다. 난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정중하게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호호. 그 정도면 일단 좀 생각을 해 봐야겠네? 요새 사람들이 워낙 또… 그런 거에 좀 민감하니까는. 뭔 말인지 알지?”

“알죠, 저도. 저희 어머니께서도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는데 생각만큼 제 짝을 찾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아들의 중매보다는 실험 결과에 매진하고 계실 엄마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였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요.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장 잘 보고 가요. 오늘 고등어가 아주 좋더라. 하나 사 가서 친구랑 구워 먹어요!”

“네. 감사합니다, 어머님.”

중매 이야기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생활 팁까지 얹어 준 그녀가 자리를 뜨려다 말고 멈칫했다. 난 그녀가 바라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찾으려 할 때는 죽어도 없던 남한결이 한 발자국 뒤에 서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남한결이 이내 승재 어머님 쪽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자신에게 가려고 손을 뻗는 예빈이를 가뿐하게 받아든다. 남한결이 내 동거인임을 확신한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예빈이에게 말을 걸었다.

“잘생긴 삼촌들이 맛있는 것도 사 주고. 우리 공주님은 좋겠네.”

사람 좋게 웃으며 예빈이의 통통한 볼까지 만져 준 그녀가 사라지고, 남한결이 눈을 감기 시작한 예빈이를 고쳐 안으며 카트 안으로 물건을 내려놨다. 난 카트 손잡이를 잡으려는 남한결에게 비키라는 눈짓을 하고는 카트를 밀었다. 슬쩍 확인한 남한결의 얼굴은 태연했다. 묻기가 망설여질 정도로. 난 잠시 말을 고르다 끝내 입을 열었다.

“어디부터 들었냐?”

“뭘.”

“아냐. 못 들었으면 됐다.”

잠시 침묵하던 남한결이 예빈이의 등을 토닥이며 조용히 말을 걸었다.

“주성찬 영화가 빨리 끝났대.”

“그래? 빨리 가야겠네.”

“어.”

남한결은 평소와 같은 반응이었으나 남한결이 등장하기 전에 하고 있었던 대화가 대화였던지라 괜히 신경이 쓰였다. 흘끔대던 나는 이상함을 느끼고는 자리에 멈춰섰다. 덩달아 멈춘 남한결이 피곤함이 묻은 얼굴로 날 응시했다.

“너 또 체했어? 얼굴이 좀 창백하네.”

그러고 보니 요새 프로젝트다 뭐다 해서 바쁘긴 했다. 나도 다른 일에 정신 팔려서 신경을 잘 못 썼고. 속이 몇 번 안 좋아서 밥을 거르는 건 봤는데, 오늘도 그런 줄은 몰랐다. 아까 함께 마트에 올 때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였는데…. 걱정을 숨기지 못하고 나간 손은 고개를 비틀어 피한 남한결 때문에 목적지에 닿지 못했다.

“자, 오늘 고등어 상태 좋습니다! 세 마리에 이만 원! 이거 다시 안 오는 기회인거 아시죠?”

“저기 혹시 자몽은 어디로 가야 있나요?”

잊고 있던 주위의 소음이 귀를 두드렸다. 나는 허공에 뜬 손을 조용히 내렸다.

“…괜찮아. 집에 가서 따려고.”

손을 피한 게 마음에 걸리는 듯 날 안심시키려는 말이 잇따랐다.

“내가 해 줄게. 너 손 다쳤잖아.”

“알았어.”

“응. 얼른 가자.”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서야 남한결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차분한 얼굴은 역설적으로 더 창백해져 있었다.

***

“어우, 피 나는 거 봐… 엄청 체했었네, 너.”

엄지손톱 밑을 찌른 사혈기를 치우고, 퐁퐁 솟아나기 시작한 검붉은 피를 서둘러 닦았다. 아프다고 할 법도 하건만, 따끔하는 순간조차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놈은 말없이 제 엄지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피가 더는 나지 않을 때까지 엄지 주변을 꾹꾹 누르다가, 피가 완전히 멎은 걸 확인하고서야 위에 밴드를 붙였다.

밴드의 끝을 만지작거리는 남한결의 왼쪽 손바닥에는 큰 밴드가 붙어 있었다. 얼마 전 공방에서 작업을 하다 크게 손을 베어 생긴 흉터 때문이었다. 나는 구급상자를 텔레비전 밑 공간에 넣고는 남한결의 손을 끌어와 잡았다.

“예쁜 손에 이게 무슨 일이냐, 대체.”

아침에 갈아 준 밴드 주변을 살살 어루만지는데, 속상한 목소리가 절로 났다.

“공방 오픈한 것 때문에 정신없는 건 아는데 그래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체하는 횟수도 잦아지는 것 같고.”

가만히 손을 맡기고 있던 남한결의 시선이 서서히 날 향해 올라왔다. 난 눈을 맞춘 채로 조용히 놈의 대답을 기다렸다.

“…괜찮아.”

한참 있다가 돌아온 놈의 목소리가 낮았다. 붙잡고 있던 남한결의 손이 스르르 빠져나간 것도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난 일어서는 남한결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피곤하겠다. 씻고 자.”

“넌?”

“서재에서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 금방 침실로 갈게. 먼저 자고 있어도 되고.”

서재를 향해 몸을 돌린 놈을 보며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한결의 말처럼, 슬슬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긴 했다. 내일의 일정을 생각하며 화장실로 걸어가던 나는 이상함을 느끼고 뒤돌았다.

“…….”

서재로 들어간 줄 알았던 놈이 머지 않은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왜?”

꼭 할 말이라도 있는 것 같은 표정이길래 물은 건데, 한참 날 바라보던 남한결은 끝내 고개를 젓고는 서재로 사라졌다. 난 닫힌 서재 문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지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움직였다.

“아, 네. 아빠. 안 그래도 들었어요. 금방 가셔야 한다면서요?”

자꾸만 서재 쪽을 향하려는 시선을 끊기 위해 핸드폰을 꼭 쥐고 뒤돌았다. 그래, 괜한 걱정이겠지. 만약 무슨 일이 있다면 남한결이 나한테 말 안 할리가 없었다.

***

“고개 좀 들어 볼래, 결아.”

순순히 턱을 올려 주는 남한결의 목 뒤로 타이를 둘렀다. 매듭 사이로 끝이 짧은 쪽을 넣어 빼냈다. 몇 번의 손짓 뒤에 짙은 회색의 타이가 딱 맞게 목을 감쌌다. 오늘도 주름 하나 없는 와이셔츠의 깃을 한 번 더 매만진 후 고개를 들었다.

내가 넥타이 매는 모습을 줄곧 지켜보던 칠흑 같은 눈을 마주했다. 얼마 전 남한결이 작업장에서 손을 꽤 깊이 벤 후로 아침마다 타이를 대신 매 주기 시작했다.

애초에 중학교 체육 교사가 정장을 입을 일이 몇 번이나 있겠는가. 임용 후 면접을 위해 장만한 정장은 친구들의 결혼식이 아니면 꺼낼 일조차 없었다.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타이를 매는 법을 알아 뒀다는 게 뿌듯해지곤 했다.

“넥타이 매 준 값 줘야지.”

거기다 뽀뽀도 받을 수 있고. 이렇게 남는 장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자신이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지도 모르고 얌전히 양 볼에 값을 치른 남한결이 정장 마이와 코트를 마저 챙겨 입었다. 침대 옆 베드 테이블에서 차 키를 챙겨 드는 놈의 등으로 질문을 던졌다.

“네 차 타고 갈 거지?”

“어.”

“먼저 내려가. 금방 따라갈게.”

“천천히 나와. 차 예열해 두고 있을게.”

그럴 필요 없다고 하는데도 꼭 저런다. 추위를 많이 타는 놈이 제 방식으로 베푸는 배려는 몇 년째 받고 있지만 매번 새삼스러웠다. 난 지나치게 착실한 애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돌아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오랜만에 꺼내 본 양복이 괜히 어색했다. 타이들을 몇 개 둘러보다가 남한결이 선물해 준 감색의 타이를 집어 들었다. 목에 대 보니 얼추 괜찮았다. 난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타이를 매고는 남한결이 옷장 제일 앞에 걸어 둔 내 코트를 껴입었다.

침실 앞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든 것과 동시에 화면 위로 알람이 떴다. 몇 달 전 설정해 둔 알람은 주말인 오늘이 남한결과 내가 나란히 타이를 매야 하는 특별한 날임을 알리고 있었다.

11월 13일 : 솔, 재균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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