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7권) (26/31)

굳이 처음 와서 그렇다는 핑계를 덧붙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뉴욕의 공항은 복잡하고 정신이 없었다. 그 때문인지 입국장까지 가는 길이 더욱 멀게 느껴졌다. 열네 시간을 비행하고도 입국 심사를 통과하지 못해 다시 돌아가야 할까 봐 예상 질문과 답변까지 달달 외운 입국 심사야 허둥지둥 댈 수밖에 없었다 쳐도, 수화물을 찾는 것마저도 쉽지 않았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승객 대다수가 짐을 찾고 사라지고 난 뒤에 텅텅 빈 컨베이어 벨트 위로 겨우 올라오는 눈에 익은 내 캐리어를 발견했을 때는 감격에 겨워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비행 내내 설레는 마음으로 충전하는 것도 잊고 만져 댄 핸드폰이 기어이 꺼진 탓에 남한결과 연락할 수단도 없어져 마음이 급했다. 입국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남한결과 엇갈리기라도 할까 봐 애가 탔다. 자연스레 캐리어를 끄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여기서 어디로… arrvial… area! 저기다!

입국장을 알리는 표지판을 보자 조급한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앞의 사람들을 제치며 속도를 내어 뛰기 시작했다. 다급한 발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는 백발의 할아버님께는 정중히 사과를 건넸다.

“죄송…아니지, 쏘리! 쏘리!”

정확히 세 번 더 사과를 하고 나서야 입국장으로 나가는 문을 발견했다.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던 문이 내게 조금의 틈을 열어 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발을 내밀었다. 잠들지 않는 공항의 밝은 빛이 눈이 부실 정도로 쏟아졌다. 어쩔 수 없이 잠시 눈을 찌푸려야 했던 나는 이내 눈을 크게 뜨고 주위부터 살폈다.

“어…?”

저마다 설레는 표정으로 입국장 앞을 지키고 있는 수많은 사람 중에 남한결은 없었다. 비슷한 체격의 남자라도 발견해 좀 더 자세히 보려고 하면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모를 사람이 시야를 가렸다. 그런 일이 두세 번 반복되고 나니 머릿속이 멍해졌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 내가 남한결을 못 알아볼 리도 없는데. 그리고 분명 마중 나온다고 했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볍게 들고 뛰었던 캐리어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한숨을 쉬며 천천히 뒤를 돌았다. 어떻게 해야 되지? 일단 핸드폰 충전부터 해야 될 것 같은데. 핸드폰 충전을 대체 어디서….

막막한 상황을 곱씹느라 주위를 보지 못한 탓인지, 지나가던 사람과 어깨가 부딪쳤다.

“아… 쏘리.”

습관처럼 사과를 뱉으며 고개를 올렸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얼굴을 보지 않고 사과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그리고는 발견했다.

“…….”

“…….”

한 발 뒤에서 빤히 날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를. 눈이 마주친 순간, 심장에 찌릿한 감각이 스쳤다.

기다렸다는 듯이 날 향해 사르르 허물어지는 얼굴을 보는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멍하게 자신을 보는 내 등허리에 깍지를 껴 끌어당긴 남한결이 얼굴을 가까이했다.

“오자마자 뭐가 그렇게 미안해.”

“…아.”

“내가 알기론 너 잘못한 거 없는데, 아직은.”

가까이서 보니 코끝이 빨갰다. 몸에 닿는 코트에서 느껴지는 냉기는 어떻고.

“야, 너….”

몸을 뗀 내가 걱정할 기회조차도 가로챈 남한결이 말을 이었다.

“혹시 밖에서 헤매나 싶어서 한 바퀴만 돌고 온 거야. 괜찮아.”

말만 그렇지 입국 예정 시간보다 한참 늦게 나온 나를 찾느라 공항 밖까지도 서성였을 놈이 뻔해서 코가 찡했다. 누가 봐도 늦은 날 찾아 헤맨 꼴을 하고서도 도통 탓하는 법이라고는 모르는 놈을 가만히 응시했다. 눈을 맞추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빙그레 웃는 그 얼굴을 보기 위해 열네 시간을, 네 달을, 일 년을 기다려 왔다는 생각을 하며.

처음엔 장난으로 한 말이었는데, 요새는 진짜로 남한결을 닮아 울보가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연인의 얼굴을 보는 이 행복한 순간에도 자꾸만 눈물이 나려 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 있던 손의 힘을 뺐다. 내게로 몸을 숙인 남한결을 꼭 껴안았다. 걸리적거리는 패딩과 코트는 무시했다. 조금이라도 더 깊게 안고 싶어 두세 번 자세를 고치는 나 때문에 불편할 텐데도 묵묵히 안겨있길 택하는 남한결의 마음은 이미 그 두꺼운 겹들을 넘고도 넘치게 느껴졌으니까.

차가운 남한결의 뺨에 내 뺨을 대고 온기를 나누며,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생각보다 더 멀더라, 여기.”

“…….”

“그래도 곧 너 볼 거라 생각하니까 견딜 만했어. 너도 나 보러 오면서 이런 감정이었을까 생각도 하고.”

경청하고 있는 남한결이 조용하게 뱉는 숨소리가 달았다. 내내 입 맞추고 싶었던 볼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

“…보고 싶었어, 결아. 엄청.”

가만히 뺨을 대 주고 있던 남한결이 조심스레 날 떼어 냈다. 가까이서 마주 보는 까만 눈에 다정한 빛이 돌았다.

“그럼 많이 봐야지. 이렇게.”

정답을 일러 주듯 제 얼굴에 시선을 쏟게 한 뒤 기습적으로 내 손을 끌어 쪽 입 맞추고 웃는 놈을 보고 있으니 울컥했다. 

씨발, 내가 이러려고 그 개고생을….

남한결이 내 곁에 있다는 게 슬슬 실감나기 시작했다. 예고 없이 와락 달려 들어도 가볍게 받아 주는 다정함도, 남한결 향이 나는 코트도, 머리를 조심스레 만지는 손길도, 가끔 이마로 내려앉는 입술도. 어느 것 하나 그리워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가슴이 벅차오르도록 그 순간을 누리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곧바로 눈을 맞춰 오는 남한결이 한 번 더 예쁘게 웃었다. 웃음이 감춰지질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왔다는 사실에 답지 않게 신난 티를 마음껏 내는 놈을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긴장이 풀리고 스트레스가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안도감이 들자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공항에서 스킨십을 나누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실감이 돌아오자 사랑에 눈이 먼 주인 덕분에 밀려난 캐리어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내 시선을 눈치챈 남한결이 가볍게 캐리어를 끌어와 내 옆에 섰다. 내가 들 테니 달라고 손을 뻗어도 가볍고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남한결을 보며 잊고 있던 놈의 과잉보호를 실감했다. 이렇게 불시에 느낄 때마다 어처구니가 없긴 해도, 뭐든 날 먼저 생각하는 게 느껴져 고마운 일이기도 했다. 피식대는 나에 걷자고 눈짓하는 놈을 따라가려다 말고 제자리에 섰다.

“어…?”

“왜?”

남 앞에서는 생전 하지도 않던 스킨십을 해놓고, 태연하게 묻는 남한결의 모습이 생소했다. 이 믿기지 않는 일에 당황한 나는 주위부터 살폈다. 머리색도, 피부색도, 쓰는 말도 다른 사람들 중 우리 둘이 손을 잡고 있다는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제야 이곳이 편견 어린 시선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곳이라는 게 실감 났다. 와… 개좋은데?

“결아. 우리 그냥 여기서 살까?”

심각하게 묻는 내 질문에 담긴 의도는 모르고, 남한결이 피식 웃기만 한다. 내내 날 향한 놈의 눈에만 신경 쓰느라 놓치고 있던 부분을 발견한 나는 마주 잡고 있지 않은 반대 손을 뻗었다.

“밖에 눈 와?”

“아….”

남한결의 코트 깃에 묻은 눈부터 털어 냈다. 끝이 빨간 귀 바로 위 머리카락에도 눈이 조금 묻어 있었다. 

“어. 그래도 오래 내리진 않을 것 같던데….”

가만히 서서 얼굴을 맡긴 채로 순순히 답하는 놈을 보는데 장난기가 불쑥 치밀어올랐다.

“이렇게 털어 달라고 묻히고 온 거지?”

보통 이렇게 장난치면 반은 받아 주고, 반은 안 받아 주는데. 아무래도 오늘 남한결의 기분은 최상인 모양이다. 눈을 휘어 웃으며, 남한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

“그리고 너한테 눈 보여 주려고.”

뻔뻔한 대답을 이렇게 사랑스럽게 하면 반칙 아닌가. 대체 누가 이걸 보고 사실인지 아닌지를 의심할 수 있겠냐고. 이미 홀라당 마음을 뺏긴 사랑의 포로는 그 모습을 조금 더 보고 싶은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었다.

“이 코트도 나 보여 주려고 입은 거겠네?”

어디까지 하나 보자. 입술 새로 흐르려는 웃음을 꾹 참고, 까만 코트를 쿡 찌르며 물은 말에 남한결이 입술을 달싹인다.

“…그건.”

서로에게 정신이 팔린 우리 때문에 오늘만 해도 죄없이 수백 번을 구른 캐리어가 또 한 번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너 이렇게 안아주려고.”

캐리어 손잡이를 내팽개친 남한결이 코트를 벌리고 그 안으로 나를 당겨 안았다. 그리고는 날 내려다보며 근사하게 웃었다.

와, 남한결 나 없는 동안 학원이라도 다녔나? 막 애인이 당장이라도 침대로 뛰어들고 싶게 만드는 법 가르치는?

“이야, 너….”

감탄을 숨기지 못하고 남한결을 올려다봤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가까이에 남한결의 입술이 있었다. 주춤한 내 이마, 볼, 코끝으로 차례대로 가볍게 내려앉는 따뜻한 입술.

“…….”

그리고 물러서지 않고 아래로 내려올 듯 말 듯 애를 태우는 입술을 보며 조용히 남한결을 불렀다.

“결아.”

아무리 우리가 아는 얼굴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타국의 공항에 있대도, 하루에 수십만 명이 지나다니는 공항에서 키스를 하는 건 썩 바람직한 행위는 아닐 거야. 알아, 아는데.

“다 나야?”

그렇다 해서 우리가 지금 이 마음을 참아서 뭘 하겠어, 그치. 결아.

너도 같은 생각이니까 지금 그런 눈빛으로 날 보는 거잖아. 나한테 키스를 조르는 거잖아.

“다….”

“…….”

“너지.”

그러니까 그냥 해. 그런 말로 꼬시지 말고.

목에 미처 손을 두르기도 전에, 남한결이 단 숨을 뱉는 입술을 포갰다. 사랑에 마비된 혀가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처음 와 보는 뉴욕의 공항, 각자의 목적지로 흩어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는 초면의 사람들, 온몸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애인과 하는 133일 만의 눈 맞춤. 이 순간을 극적으로 만들 수 있는 여러 가지 말들이 떠올랐지만 머릿속에 오래 남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내 입술을 정성 들여 핥고 있는 남한결이 너무나도 자극적이었으므로.

아, 좆 까. 다 필요 없고, 나는 그냥 남한결이 너무 좋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