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균은 네 명의 슈퍼맨과 함께 자랐다.
자기소개서를 쓴다고 머리 쥐어뜯던 고3 시절, 성장 과정을 서술하는 칸에 적힌 한마디를 본 담임선생님은 그랬다.
‘집에 남자 어른이 많으신가 보지?’
재균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아뇨, 제 위로 누나만 세 명인데요.’
눈을 껌벅이던 선생님은 한 번 더 물었다.
‘근데 왜 네 명이고?’
‘한 명은 엄마요.’
‘인마, 아버지는?’
‘제가 어릴 때 돌아가셨어요.’
익숙하게 떨어지는 동정 어린 시선. 재균은 재빨리 한 마디를 덧붙이며 선생님이 보고 있는 컴퓨터 화면의 한구석을 콕 집었다. 재균의 두 번째 손가락 아래에서 슈퍼맨이란 글자가 반짝거렸다.
‘괜찮아요, 대신 슈퍼맨이 네 명 있다니까요.’
위에서부터 차례로 재영, 재윤, 재인. 아들딸 구분 없이 돌림자로 묶인 네 남매. 누나 셋이 다 슈퍼맨이 된 까닭은 그녀들이 재균의 세상을 든든하게 지켰기 때문이다. 마치 막내 재균이 어릴 때 세상을 등진 아버지 역할을 나눠서 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 덕분인지 재균은 부족함 없이 컸다.
으레 남자 어른이나 형한테 배워야 하는 거라고 여겨지는 것들도 재균은 다 누나들에게 배웠다.
예를 들어 농구는 첫째 누나 재영에게 배웠고, 성교육은 둘째 누나 재윤이 끝장나게 해치워줬으며, 나이 차이가 가장 적게 나는 셋째 누나는 재균의 연애 상담을 해 줄 때마다 동성 친구들보다도 더 걸걸하게 재균이의 머리를 후려쳤다.
‘답답한 새끼야. 너 어디 가서 내 동생이라 하면 뒤질 줄 알아!’
그렇게 23년간 슈퍼맨들에게 쥐어 박히고 또 그만큼 사랑받으면서 재균은 한 가지를 배웠다. 사람은 눈치가 있어야 한다. 특히 어떤 상황에서도 분위기를 읽을 수 있으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재균은 현재 저답지 않게 침묵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앞에는 방금 조별발표를 함께 할 사람으로 호명된 두 사람이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어색한 건 재균과 여자 둘 뿐인 것 같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게 둘을 둘러보던 남자의 시선이 여자에게 좀 더 머무른다 싶더니, 이내 ‘아!’ 하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신음이 터졌다.
재균과 여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남자가 방금 전의 여유로운 태도와 다르게 급하게 제 가방 여기저기를 샅샅이 뒤지는 과정을 멀뚱히 지켜봤다. 가방의 앞주머니를 뒤지던 남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재균은 괜히 흠칫했다.
아까부터 느끼긴 했지만 존나 잘생긴 사람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연예기획사에서 캐스팅 실장으로 일하고 있는 둘째 누나가 봤으면 필시 눈이 뒤집혔을 것이리라고 감히 자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재균은 아메리카노를 쭉 빨며 남자의 얼굴을 흘끔댔다.
연습생인가? 아냐, 그러기에는 관리받은 느낌은 없는데. 주위 의식도 너무 안 하고.
“죄송한데, 저 펜 좀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누가 봐도 자기를 불편해하는 티를 내는 사람에게 저렇게 웃으며 펜을 빌릴 수도 없을 터다.
아니지, 저건 그냥 기가 센 건가.
“저분한테 빌리시지.”
갑자기 지목된 재균은 제게로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고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었다.
“저도 필통을 안 가져와서….”
순간 여자의 얼굴에 한심하다는 빛이 언뜻 스친 듯했다. 한숨 소리와 함께 여자가 책상 위에 올려둔 필통을 열었다.
표정이며, 느릿느릿한 동작이며 상황을 마뜩잖아하는 티가 잔뜩 났다. 괜스레 여자의 눈치를 보던 재균은 큼흠, 헛기침을 하고는 여자가 선심 쓰듯 제게 건넨 펜을 받았다.
먼저 펜을 빌려 달라고 한 건 남자였음에도, 여자는 굳이 재균에게 먼저 펜을 주고는 그다음에야 남자한테 펜을 건넸다. 심지어 남자한테 준 펜은 필통에서 나온 것도 아니었다. 멈칫하고는 몸을 돌려 가방 앞주머니에서 꺼낸 펜 하나를 남자 쪽으로 건넨 여자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
“그 펜은 안 돌려주셔도 돼요.”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말투가 아니더라도 여자의 의사는 차고 넘치게 전해졌다. 재균은 방금 자신이 건네받은 펜과 남자가 건네받은 펜을 번갈아 확인했다.
오천 원 정도 될까. 대학생이 적당히 쓸 법한 브랜드의 펜을 받은 자신과 다르게 남자는 바람불면 날아갈 것 같이 생긴, 천 원에 세 개씩 묶어 파는 펜을 쥐고 있었다. 재균도 가끔 필기구를 깜빡하고 학교에 왔을 때 매점에서 몇 번 구매해 봐서 알았다.
심지어 저거 존나 안 써지는데.
이유는 몰라도 여자가 남자랑 털끝만큼도 엮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일부러 펜도 저런 걸로 준 거다. 펜 돌려받으면서 또 얽히기 싫어서.
“아니에요, 당연히 돌려드려야죠. 감사합니다.”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볼 때 여자가 선을 긋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어색한 분위기 속에 조 모임은 빠르게 끝났다. 이름과 전공을 소개하며 서로 같은 전공이라는 사실에 놀랐던 것을 빼면 특별한 대화가 오가지도 않았다. 어차피 첫 수업시간이니까 뭐. 성의 없이 같은 전공자들끼리 한 조로 묶어 둔 교수도 첫 수업 조 모임에서 많은 걸 바라진 않았을 터다.
다들 비슷한 상황인지 강의실 곳곳에 무리 지어 앉아 있던 다른 조들도 비슷하게 모임을 끝낸 듯했다. 사방에서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고, 재균도 의자를 안으로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 같이 조 모임을 한 여자와 남자 또한 재균과 엇비슷하게 일어서서 인사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통성명을 한 바에 따르면 각각 이수진과 이로빈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름조차 귀에 익지 않을 정도로 어색했다.
“그럼….”
먼저 입을 연 건 남자였다. 웃으며 살짝 상체를 숙여 보이는 행동이 깔끔했다. 재균도 덩달아 고개를 숙이려 할 때였다.
“저… 저기.”
엉?
저를 부른 게 아님을 알면서도 재균은 가만히 선 채로 자신들이 앉아 있던 곳으로 성큼 거리를 좁혀 다가오는 여자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조 모임을 하다가 고개를 돌렸을 때 몇 번 눈이 마주친 다른 조의 사람이었다.
“저… 이거 드세요.”
“…….”
“부담 가지시진 마시고. 그냥 제가 드리고 싶어서 드리는 거니까….”
손에 든 음료를 방금 자신과 조 모임을 한 남자에게로 수줍게 내미는 여자를 본 재균은 저도 모르게 앞에 있는 수진의 얼굴부터 확인했다.
“…….”
눈에 보이게 떫은 표정을 한 수진은 재균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로빈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음료를 건네받는 걸 확인하고서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인사도 없이 자리를 떴다. 수진이 몸을 돌리기 직전 ‘그럼 그렇지…’ 라고 적힌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본 재균은 조 모임 내내 쌀쌀맞던 그녀의 태도가 비로소 이해됐다. 그녀가 로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다.
뭐,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누나 셋을 가진 자신이 보기에도 지금 이 상황이 그리 기꺼워 보이는 것은 아니었으니.
아까 다음 주에 논의할 사항에 대해 필기를 하던 로빈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커플링을 떠올린 재균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슬쩍 몸을 돌려 자리를 빠져나왔다.
작은누나. 내가 캐스팅할만한 사람 추천해주면 용돈 얼마 준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