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주는 연극배우였던 아빠와 다른 방면으로 알아주는 화가였던 엄마. 태어난 순간부터 좋으나 싫으나 운명을 나눠 가진 쌍둥이 남동생은 아빠의 외모를 똑 닮았고, 제 앞길을 선택하는 것마저 그랬다. 예술가들 사이에서 나고 자란 은영은 그런 삶이 당연한 줄 알았다. 다 조금씩은 그렇게 별나고 예민하게 사는 줄로만.
외출 시에 미용실에 들르는 건 기본이고, 개인마다 전용 옷방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드라마를 시청하기보다는 자신의 인생을 드라마 그 자체인 것처럼 사는 것이 익숙한 이들 사이에서 크면서도 은영이 별 이상함을 느끼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뭐, 다들 이렇게 사는 거 아니었어?
학창시절,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가족 이야기를 나누던 은영은 처음으로 자신의 가족이 유별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 가족만 좀 그렇게 별나게 한순간의 감정에 모든 걸 바칠 수 있다는 듯 사는 거일 수도 있겠다고.
사실 그런 생각을 하는 은영도 그 테두리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물은 아니었다.
우선, 어릴 적부터 엄마의 어깨너머로 보고 자란 미술을 하겠다고 붓을 잡은 게 그랬다. 또, 중학교 때부터 사귄 남자친구가 본격적으로 모델 일을 시작하며 둘 사이가 위기를 맞았을 때는 어떻고. 아직도 쌍둥이 남동생은 그때를 추억하며 남자친구와의 싸움에 밤새 울어 퉁퉁 부었던 은영의 눈을 흉내 냈다. 한 대 쥐어박고 싶을 만큼 재수 없는 모습임에도 사실이기에 차마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은영이야말로 그 일련의 일을 겪으며 자신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는지를 돌이켜보게 되었으므로. 비록 그 날의 은영은 유별난 가족 중에서도 누구보다 절박하게 드라마를 찍었지만, 그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모델과 지금까지 함께하게 되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집에서 절 기다리는 예술가들 외에도 제 주변엔 온통 별난 사람 천지였다. 예민한 성격의 가족을 보듬던 습관이 남아서인지 예술가들의 비위를 맞출 수 있는 기민한 성격을 갖춘 그녀는 대학 입학과 동시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과에서 1학년 과대가 됐다.
선배들의 등쌀과 분위기를 탄 동기들의 표 몰아 주기로 얼떨결에 맡게 된 과대 일은 힘들다기보다는 귀찮았다.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아이들을 모으는 것도, 그 사이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없나 챙기는 것도 모두 은영의 일이었다. 챙긴다고 해서 딱히 티는 안 나는데, 안 하면 언젠가는 티가 나고 마는 일들뿐이었다.
하필 은영의 과는 미대 안에서도 인원이 적기로 유명한 산업 디자인과였다. 고등학교 때처럼 함께 작업을 하는 실습실마저 인원수에 맞춰 배당된 곳이라 실습실 관리를 맡은 은영은 자연스레 과 인원 모두에게 한 번씩 관심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은영이 실습실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눈과 귀를 쫑긋 세워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여기에 떨어져 있었다고?”
“어. 누가 급하게 나가다가 떨어트렸나 봐.”
“이름 봐 봐.”
“잠시만. 어, 여기 적혀 있다. 남… 한결.”
“헐… 미친. 걔 우리 과였어?”
“누군지 알아?”
“내가 말했잖아. 현대 미술의 이해 수업 때 한 번 뒤집어졌다고. 저런 애가 우리 단과대에 있었냐고 다들 난리 남.”
“미친. 그 유니콘?”
“어. 야, 대박이다. 걔 우리 과였구나. 와, 나 소름. 드로잉북 보니까 실습실도 왔다 간 것 같은데 나 왜 못 봤지? 어제부터 공강 때마다 여기 있었는데.”
얼굴을 아는 은영의 동기 둘이 창가에 붙은 책상 앞에 서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드로잉북을 보고 있었다. 그들이 나눈 대화를 통해 추측하건대 실습실 어딘가에 떨어져 있던 걸 주운 듯했다. 물건 잃어버리는 거야 다 같이 쓰는 공용 공간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수업 다니랴, 과 행사 참여하랴 정신없는 신입생들이라면 더 그렇고.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던 은영은 멈칫했다.
근데 방금 남한결이랬나? 이름이 왜 익숙하지.
얼마 전 과 회비를 걷는다고 들고 다녔던 명부를 들춰 보고서야 왜인지 알았다. 노란색 하이라이트가 되어 있는 이름 옆으로 적힌 모든 항목에 자리한 ‘X’는 왜 자신이 얼굴 한 번 못 본 동기의 이름이 익숙했는지 깨닫게 했다.
과 OT 불참. 새내기 배움터 불참. 개강 총회 불참.
신입생이라면 적어도 하나는 참여하도록 되어 있는 모든 과 활동에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은 동기는 남한결이 유일했다. 그들이 속한 산업 디자인과가 과 활동이 활발한 과이기에 더더욱 눈에 띄었다.
생각에 잠긴 채, 펜 끄트머리로 종이 위를 툭툭 치던 은영은 몸을 일으켰다.
“근데 얜 드로잉북도 잘생겼네.”
“진짜 개소리다. 잘생긴 건 인정.”
“아니, 깔끔하잖아. 무늬 하나 없는데 뭔가 있어 보이고.”
“야, 잠깐만. 너 방금 넘길뻔한 다음 장 봐 봐. 인물화 맞지? 자기 그린 건가? 잘생겼다.”
“아닌 것 같은데. 그때 본 거랑 느낌이 달라.”
아까만 해도 드로잉북을 기웃거리며 흥미를 비치는 것에 그쳤던 그녀의 동기들은 첫 장에 적힌 이름을 본다는 핑계로 다음 장을 슬쩍 들춰 보기까지 했다. 현재 실습실에 사람이 별로 없는 데다가, 자리에 없는 드로잉북 주인에 대한 호기심이 그런 담대한 일을 벌이게 한 듯했다.
은영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주인 허락도 안 받고 드로잉북을 저렇게 만지면 안 될 것 같은데.
은영은 결국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너네 뭐해?”
수업 전 잠깐 들른 거라 일부러 조용히 뒤에 앉아 있던 은영이었기에 그녀의 존재조차 몰랐던 둘이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도 잠깐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얼굴이 앳됐다.
“어? 은영이?”
“너 언제부터 있었어? 못 봤는데?”
“뒤에 있었거든. 과제 좀 하느라.”
은영은 그들에게 웃음을 돌려주며 옆에 가 섰다. 일부러 드로잉북에 시선을 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그거 뭐야?”
“아… 이거?”
“응. 누구 건데?”
일부러 소유권을 묻자 당황한 표정을 한 지수가 옆의 현정과 눈빛을 교환한다. 그제야 자신이 남의 것을 들춰 보려 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에 약간의 불안함이 스쳤다.
“그건… 우리도 주워서 잘 몰라. 누구 거인지 짐작은 가긴 하는데.”
“주웠다고?”
“응. 저기 입구 쪽에 떨어져 있었어.”
“그래? 근데 누구 건지 짐작이 가는 거면 돌려줘야 하는 거 아냐? 갖고 있을 게 아니라.”
“…어…, 이거 주인이 지금 어디 있는지를 몰라서.”
교과서적인 제 말에 어색하게 눈을 깜빡거리는 지수와 현정을 보며, 은영은 부드럽게 웃었다. 마치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하긴,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거다. 그냥 궁금했겠지.
“나 줄래? 내가 어차피 실습실 관리하니까, 주인 찾아서 돌려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래도 돼?”
“당연히 되지. 이런 거 하라고 과대 하는 건데, 뭐.”
“고마워. 그럼 부탁할게.”
드로잉북을 들춰 보려 한 일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한 현정은 은영이 그걸 문제 삼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는 표정으로 드로잉북을 건넸다. 드로잉북을 받아 든 은영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후 둘이 잊고 있던 사실을 일깨웠다.
“근데 너네 오늘 세 시부터 수업 아니었어? 신 교수님꺼.”
“어? 무슨… 헐 미친! 김현정!! 우리 늦었어!”
“돌았다, 돌았다. 야 너 가방은?”
순식간에 사색이 된 동기 두 명이 우당탕탕 앞문을 통해 튀어 나갔다.
둘의 뒷모습에 대고 잘 가라는 인사까지 얹어 준 은영이 뒤돌았다. 뒤쪽 자리에 둔 가방을 챙기러 가기 위함이었다. 어느새 실습실에는 그녀뿐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느긋하게 걷던 그녀는 세 걸음도 걷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
뒷문에 기대 서 있는 남자를 발견한 탓이었다.
“아.”
처음 보는 남자는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익숙했다. 은영은 저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감탄사를 뱉었다.
아까 엿들은 지수와 현정의 대화가 귓가에 맴돌았다. 은영은 직감적으로 알 수밖에 없었다. 우리 단과대에 저런 사람이 있었나 의심하게 하고, 과 활동에 다 참여하지 않고도 첫 주부터 유니콘이라는 별명까지 붙은 남자는 제 앞의 서 있는 남자와 동일 인물임이 분명했다.
‘내가 말했잖아. 현대미술의 이해 수업 때 한 번 뒤집어졌다고. 저런 애가 우리 단과대에 있었냐고 다들 난리 남.’
‘미친. 그 유니콘?’
네가 남한결이겠구나. 그 유니콘.
태어날 때부터 주변에 워낙 날고 긴다는 사람이 가득했던지라,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감탄하는 일이 거의 없는 은영에게는 낯선 경험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순수하게 감탄하는 일은.
남자는 여러모로 시선을 끄는 데가 있었다. 평생 염색이나 해 봤을까 싶을 정도로 결 좋은 새까만 머리부터, 얼룩 하나 없는 흰 얼굴이 그랬다. 앞머리 사이로 드러나는 단정한 눈썹과 그 밑에 자리한 서늘한 눈매 속의 흑요석 빛 눈동자까지. 곧게 뻗은 콧날과 누군가 선을 딴 것처럼 잘 정리된 얼굴선을 따라 시선을 굴리던 은영은 남자의 선홍빛 입술이 움직이는 걸 확인하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거.”
저도 모르게 남자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던 은영으로서는 의외인 목소리였다. 남자치고도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는 사람을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은영과 눈을 맞춘 남자가 이내 문에 기대고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 똑바로 섰다. 몰랐는데, 키가 컸다. 키가 작은 편이 아닌 은영도 고개를 꺾어 올려봐야 할 정도로.
자연스레 올려다보게 된 은영과 시선을 마주한 채로 한결이 입을 달싹였다.
“줄 수 있어?”
남자의 시선을 따라 아래로 눈을 내리던 은영은 그제야 제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드로잉북의 존재를 깨달았다. 은영은 어색하게 눈을 깜박거리며 걸음을 옮겨 남자에게 다가섰다.
“네 거야?”
혹시 몰라 한 번 더 확인하듯 물은 말에 남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영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드로잉북을 건넸다.
“고마워.”
둘의 시선이 자연스레 드로잉북으로 향했다. 은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냐. 난 주워서 너한테 전달해 준 것밖에 없는데.”
“그거 말고.”
어? 은영의 질문에도 한결은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 그 눈빛을 마주하고 있던 은영은 한 박자 늦게 한결이 말하는 고마움이 단순히 드로잉북을 전해 줬다는 사실이 아님을 알아챘다.
그러고 보니 아까 처음 봤을 때 뒷문에 기대 서 있었지. 방금 도착한 사람이 할만한 포즈가 아니긴 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걸까. 자신이 지수랑 현정이에게 다가가 드로잉북을 가져오던 순간부터?
은영이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이, 인사를 마친 한결은 실습실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볍게 돌아온 눈인사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여 주던 은영은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황급히 뒤도는 등을 불러세웠다.
“저기!”
문가를 채 벗어나지 못한 한결의 고개가 제 쪽으로 돌아왔다. 은영은 지금이 처음 본 제 동기에게 과대로서의 임무를 다해야 하는 순간이라고 판단했다.
“이번주 금요일에 ‘산디과의 밤’ 행사를 하거든. 우리 과에서 제일 큰 행사고, 졸업하신 선배님들부터 시작해서 교수님들까지도 참여하셔.”
남자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조용히 마주치는 시선만이 그가 듣고 있음을 알게끔 했다. 은영은 황급히 덧붙였다.
“내가 과대라서 알고 있는 건데, 네가 여태까지 과 행사 참여율이 높은 편은 아니더라고. 그래도 이번 행사는 의미 있는 거니까 시간 나면 와도 좋을 것 같아서.”
돌려 말한 거지, 남한결의 과 행사 참여율은 0%이다.
대답 없이 물끄러미 돌아오는 시선을 보니 왜 0%였는지 알 것도 같다. 은영이 머쓱하게 덧붙였다.
“그냥 한 번 들르기만 해도 돼. 교수회관 강당에서 하는데, 우리처럼 행사하는 과들이 있어서 좀 시끄럽긴 해도 눈에 띄지 않아서 괜찮을 거야.”
말이 길어질수록 은영은 제가 남자에게 드로잉북을 찾아준 일이 아니었다면 그가 진작에 자리를 뜨고도 남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제 어깨 뒤로 슬쩍 시선을 돌리는 눈에서 무관심을 읽어낸 그녀는 과대라는 이유만으로 남자를 붙잡아둘 수 있는 시간도 끝났음을 깨달았다. 뻘쭘하게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은 그녀가 그가 절대 오지 않을 게 분명한 행사의 주의사항을 일러주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아, 맞다. 그날 반대편 강당에서 체대가 행사하는 데 거기랑 헷갈리지 않게 조심하고.”
“…뭐?”
“응?”
갑자기 돌아온 대답에 자신이 더 놀랐다. 은영은 절 보는 눈빛이 흔들리고 있음을 눈치채고 당황했다. 같은 나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한없이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기던 남자가 서 있던 자리에는, 전혀 다른 얼굴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한결이 아랫입술을 가만두지 못하며 결국 은영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는 중얼거리듯 물었다.
“체대가 왜….”
“…아. 신입생 관련 행사하는 걸로 아는데. 우리랑 비슷한 거 아닐까?”
제 말을 듣는 내내 아래를 향해 있던 시선은 한참 뒤에야 제게 돌아왔다. 은영은 안 그래도 하얗던 한결의 얼굴이 그새 더 창백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얼굴빛을 하고서도 한결이 뱉어낸 말은 의외였다.
“갈게.”
“어? 오는 거야?”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남한결이 실습실을 빠져나갔다. 은영은 한참 뒤에야 고개를 갸웃했다.
체대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
***
“저 잠깐 남자 친구랑 통화 좀….”
남자 친구와의 통화를 핑계로 대고서야 자리에서 잠깐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은영이 앉은 테이블 한쪽에 자리 잡고 썰렁한 개그와 술 안 먹는 후배들 괴롭히기로 분위기를 박살 내고 있는 고학번 선배는 유독 이런 부분에서 자비로웠다. ‘은영이 남자친구한테 잘 자라고 하고 와~ 어차피 은영이는 오늘 우리랑 노느라 집에 못 가니까~’ 하며 능글맞게 웃으며 손을 휘휘 젓는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은영은 고깃집 밖으로 나온 순간 걸고 있던 웃음을 싹 지웠다.
미친 새끼. 몇 살이나 어린 후배한테 그딴 말을 하고 싶냐. 얼른 가라고 택시비를 쥐여 주지는 못할망정.
테이블마다 저런 선배가 넘쳐났다. 피라냐같은 그들의 감시망을 뚫고 몰래 술자리에서 빼돌려 안전하게 집으로 보낸 동기들이 한 무더기였다. 집에 무사히 도착하면 연락을 남기라는 제 말에 동기들만 있는 단체 메시지방은 철자 틀린 귀가신고가 속속히 도착하는 중이었다. 올라오는 카톡을 하나하나 확인한 은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까 봐 둔 고깃집 옆 골목으로 들어섰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는 대신 다른 주머니를 뒤졌다. 내일 촬영이 있어 진작에 잠에 든 남자친구를 굳이 깨울 필요는 없었다. 대신 다른 게 필요했다.
아까 라이터 식탁에서 몰래 챙겨 뒀는데. 담배는… 아, 있다.
하얗고 긴 필터를 빼어 문 은영은 혹시 몰라서 또 한 번 골목 끝을 확인했다. 아까 테이블에서 들은 말들이 떠올라서였다. 다행히도 아는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골목에 서서, 은영은 씨발. 하고 욕을 뱉었다.
지들은 숨 쉴 때마다 썩은 내가 날 정도로 뻑뻑 펴 대면서, 어린 여후배가 제 앞에서 담배 무는 꼴은 못 보겠다 이거지.
짜증을 질겅질겅 씹으며 빤 첫 모금은 달큼했다. 이완되는 몸을 느끼며 담배를 쥐지 않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린 은영이 담벼락에 등을 기댔다. 은영의 과가 뒤풀이를 하는 곳 반대에 자리한 고깃집에 시선이 멎었다. 은영처럼 숨길 필요도 없는 남자들이 고깃집 바로 앞에 서서 담배를 피워 대고 있었다. 그들의 과 이름이 크게 박힌 과 잠바에 시선을 박은 채로 은영이 중얼거렸다.
“또 체대네.”
일부러 저러나. 짠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동선이 겹쳐.
그나저나… 저 과도 참 저 과다. 여럿이 나와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에서까지 드러나는 묘한 권위의식이 웃겼다. 헛구역질을 하는, 누가 봐도 나사가 나간 새내기의 뺨을 툭툭 치면서 낄낄대는 무리를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던 은영은 다음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남한결?”
어느덧 골목에는 그녀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비틀거리며 골목에 들어서서는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떨구는 남자의 실루엣이 익숙했다. 은영은 황급히 걸음을 재촉했다.
“야. 너 괜찮아?”
은영이 한결 쪽으로 다가가 말을 걸어 보았지만 한결은 고개를 들기는커녕 대답조차 내놓질 않았다. 가까이 다가선 것만으로도 술 냄새가 훅 끼쳐 올 정도니 얼마나 마셔 댄 건지는 감이 잡혔다.
은영은 문득 아까 술자리에서 스치듯 본 한결의 모습을 생각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유독 한결의 주변이 와글와글했다. 선배들부터 시작해서 동기들의 시선까지도 담뿍 받아 내던 얼굴은 그 와중에도 무덤덤했다.
‘네가 남한결이구나. 이름은 많이 들었는데, 얼굴은 처음 봐서.’
‘…….’
‘처음 만난 사이에 이런 말 하기 좀 그렇긴 한데, 좀 의외긴 하다. 난 잘생겼다길래 좀 더 남자다운 잘생김을 생각했는데, 넌 좀… 하하. 나쁜 뜻은 아니고.’
‘넌?’
‘어?’
‘넌 이름이 뭐냐고.’
‘어? 김동현인데….’
‘미안.’
‘어…?’
‘난 네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너랑 대화 못 하겠는데.’
솔직히 뒤풀이까지 온 걸 보고 내심 놀랐는데, 늘 되도 않는 자신감으로 동기들을 귀찮게 굴며 은영을 골치 아프게 하던 남자 동기의 비꼼을 받아치는 모습을 보니 걱정할 건 없어 보여서 신경을 껐었다.
근데 얘가 이렇게까지 마실 일이 뭐가 있지. 슬쩍 봐도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 모두 다 쩔쩔매던데.
은영이 어깨를 두어 번 더 흔들고서야 한결이 고개를 들었다. 은영을 알아본 것처럼 충혈된 눈이 깜박이더니, 이내 고개를 튼다. 고개가 향한 곳은 한결이 골목에 들어서기 전까지 은영이 보고 있던 곳이었다.
“…….”
은영은 한 번 더 생각했다. 쟤 진짜 체대에 아는 사람 있나? 술도 먹었겠다, 이번엔 그냥 물어보기로 했다.
“너 저기에 아는 사람 있어?”
은영이 손을 뻗은 것과 동시에, 과 잠바를 입은 무리가 고깃집 안으로 우르르 사라진다. 한결의 시선이 잠깐 제게 돌아온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고요한 얼굴. 한참 뒤에야 한결이 천천히 다시 고개를 돌렸다. 조그만 목소리는 마치 목 깊은 곳에서 긁어낸 것 같았다.
“…아니.”
그걸로 다였다. 한결은 왜 아는 사람도 없는 고깃집을 쳐다보고 있는지,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 왜 지독히 쓸쓸한 목소리를 냈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처음엔 한결을 힐끔거렸던 은영은 나중에는 그냥 옆에 서서 담배만 두 대 더 피웠다.
휴대폰을 꺼내 보니 30분이 지나 있었다. 부재중 전화 세 통. 아까 억지로 저장한 고학번 선배들 이름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튀지 말라는 경고 같이 느껴지는 그들의 이름을 보던 은영은 띵한 머리를 부여잡으면서도 한결에게 물었다.
“갈래?”
한결이 대답 없이 몸을 일으켰고, 나란히 골목을 빠져나왔다. 술자리는 30분 전과 똑같았다. 다만 전사자들이 더 많을 뿐. 유리창 너머로도 보이는 제 동기들의 헤롱헤롱한 모습에 그들의 집이 어딘지부터 생각하며 안에 들어선 은영은 아까 제가 앉았던 테이블로 다가섰다.
아까 은영에게 잘 다녀오라며 장난을 걸던 선배가 은영이 앉음과 동시에 코를 킁킁댔다. 꼭 뱀같이 느껴지는 눈이 은영을 향했다. 실실 웃으며 그가 물었다.
“은영아, 너 담배 피웠냐?”
아, 숨어서 피울 생각만 했지 냄새는 생각 못 했다. 그것도 세 대를 연달아 피워 놓고는.
술이 오르긴 했나 보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 텐데, 딱히 할 말이 생각이 생각나지 않았다. 은영이 멍하니 눈을 깜박일 때였다.
“제가 피웠어요.”
테이블에 앉은 사람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아까 골목길에서 본 모습을 찾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결이 한 번 더 말했다.
“제가 피웠다구요. 강은영 말고.”
공손하지는 않은 말투였는데도 뒤풀이 내내 입 한 번 열지 않고도 모두의 시선을 받아 삼키던 남한결에게 감히 시비를 걸 사람은 없었다.
“너 담배도 피울 줄 아냐? 하긴 생각해 보면 이렇게 생긴 애들이 의외로 존나 꼴초라니까?”
잠시나마 놀란 낯을 하던 선배가 말을 유들유들하게 돌렸다. 한결의 시선은 어느새 저를 비껴 유리창 너머의 어딘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은영은 선배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옆자리에 놓인 한결의 가방을 챙겼다. 실습실에서 본 가방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슬쩍 본 가방에서는 익숙한 물건이 튀어나와 있었다.
삼 일 전에 본 드로잉북이었다. 삐죽 튀어나온 하얀 종이 끝에는 누군가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던 은영은 튀어나온 끝을 가방 안으로 꼼꼼히 넣고는 테이블 밑으로 가방을 밀어 줬다.
발끝에 가방이 채인 모양인지 한결의 시선이 제게 꽂혔다. 은영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적당히 봐서 가.’ 한결이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고, 새벽의 술자리는 지지부진하게 흘렀다.
은영은 어느덧 한결처럼 유리창 너머를 확인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고깃집 앞에선 아까 골목에서 훔쳐보았던 것과 같은 풍경이 반복되고 있었다. 누군가가 토하고, 누군가는 비웃고, 누군가는 담배를 피우고.
은영은 궁금해졌다.
그림 속의 남자는 지금 저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뭘 하고 있기에.
“…….”
한 남자의 밤을 저토록 독식할 수 있는지.
<드로잉북 (은영 side),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