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31)

출입문에 달아 둔 종이 울렸다. 영업시간이 끝나자마자 잠가 둔 공방의 출입문이 열리는 건 이상한 일이지만, 그 문을 열 수 있는 건 한 사람뿐이라는 걸 알기에 경계심보다는 웃음부터 새어 나갔다. 

쏴아- 하는 빗소리가 잠깐 머물다 사라지고, 우산을 허공에 터는 소리, 바닥에 후두둑 물방울이 튀는 소리, ‘헉’ 하며 운동화 끝으로 물방울을 닦아 내려 애쓰는 소리, 끼익하고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와 낑낑대는 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우산 꽂이가 쓸데없이 작다며 툴툴대는 얼굴까지. 지금 들어오는 이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외부 공기가 통할 정도로만 조금 열어둔 작업실의 창문 사이로 빗소리가 흘렀다. 나는 예정보다 빨리 작업을 마무리 하기 위해 손을 조금 더 분주히 움직였다. 모니터를 끈 것과 동시에 작업실 안으로 빼곡 내민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짜ㅈ…”

“왔어?”

잔뜩 기대한 표정과 어떻게든 문 뒤로 몸을 쭉 빼고 있는 것까지,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놀라는 기색이 없는 날 본 이로빈이 부루퉁한 얼굴로 문가에 기대섰다.

“어쭈. 이제 놀라는 척도 안 해 준다 이거지?”

내가 저의 발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좋은지 안 좋은지를 알아채는 놈인 것도 모르고 가능성 없는 일을 꾸준히도 한다 싶다. 매번 허탕을 치면서도 같은 일을 반복하는 너를 보는 건 내게도 즐거운 일이라 굳이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지는 않지만.

“우체국은 잘 다녀왔어?”

늘 그렇지만, 이로빈의 삐진 척은 3초를 못 간다. 자리에서 일어선 내가 팔을 뻗자마자 성큼 걸어와 허리를 껴안는 놈의 머리 위로 턱을 얹었다. 익숙한 체향을 뚫고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비 냄새가 느껴졌다. 이로빈의 향이 가장 깊게 느껴지는 곳에 입을 맞추고 고개를 들었다.

“응. 비 오는 데도 사람 많더라.”

“많이 기다렸겠네?”

“그냥저냥. 기다리면서 재경이 형이랑 메시지도 하고.”

“…메시지는 왜 또 해? 소포 부쳐 줬으면 됐지.”

김재경이 결혼 선물이라고 턱 안긴 벽걸이 텔레비전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거실 한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큰 텔레비전이 설치되는 내내 턱이 빠지겠다 싶을 정도로 입을 벌리고 있던 이로빈은 당장 뭐라도 감사를 표해야 한다며 성화였다. 

한술 더 떠, 현재 김재경이 장기 체류 중인 스페인의 호텔로 선물을 보내야겠다며 삼 주 내내 하루가 멀다 하고 김재경 이야기를 꺼내는 이로빈을 보고 있으니 울컥함이 치밀어 올라 김재경에게 전화까지 했다.

‘안 그래도 로빈훗이 하루에 한 번씩 연락 와. 어제 거기 쌀은 파냐고, 이천 쌀이라도 사서 보내줄까 하고 묻는 목소리를 듣는데 문득 그 생각이 들더라. 옆에 있는 네 얼굴 존나 볼 만 하겠다고….’

통화 내내 놀리듯 말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분이 풀리기는커녕 열만 받았다. 이로빈이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알고 일부러 그런 무식하게 큰 선물을 한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에 내가 샀다. 비싸 봐야 얼마나 한다고. 마치 둘만 있을 수 있는 영화관이 생긴 것 같다며 신나서 덤벼드는 해맑은 얼굴에 대고 저건 돌려주고 대신 더 큰 걸 사 주면 안 되겠냐는 말은 꺼내지조차 못했다.

짜증을 꾹꾹 삼키는데 볼이 붙잡혔다. 내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는 이로빈과 눈을 맞췄다. 내가 짜증을 삼키는 동안, 이로빈은 웃음을 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대놓고 웃고 있진 않으나 광대가 느리게 씰룩대는 것이 다 보였다. 이어서 웃음기 담긴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우리 질투쟁이 또 질투한다, 또.”

“알면 나한테 집중해. 김재경 말고.”

아무리 포장해도 투정일 수밖에 없는 유치한 질투에도 이로빈이 환하게 웃었다. 달래듯 내 볼을 만지며 변명하는 얼굴이 모순적으로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너한테 소중한 사람이니까 더 잘하고 싶은 거지, 난.”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야.”

“진짜? 난 남한결이 관련된 일이면 다 좋기만 해서 몰랐어.”

뭐라 할 새도 없이, 이로빈이 내 양 볼에 뽀뽀를 쏟아부었다. 싫은 척 밀어내도, 손으로 가린 부분까지 쪽쪽 소리를 내 가며 모조리 다 빨아버리겠다는 듯이 구는 놈을 지켜보다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놔.”

진정으로 밀어낼 마음조차 없는 미약한 반항은 언제나처럼 이로빈에게 간파당하고 만다.

“싫어. 이 볼도 다 내 건데. 내가 내 거 만지는 게 왜.”

하여간, 진짜. ‘됐지?’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입술부터 들이미는 놈에게 못 이기는 척 입술을 가져다 대 줬다.입술을 몇 번 더 가볍게 부딪치다가, 괜히 얄미운 마음에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곧장 ‘아!’ 하는 신음이 터졌다. 결혼 답례 선물을 한다고 나 외의 다른 사람한테 삼 주나 신경을 써놓고, 이런 애교로 어물쩍 넘어가려는 이로빈이 괘씸했다. 난 때를 놓치지 않고 부루퉁하게 물었다.

“누가 너한테 다 준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뜬 이로빈이 억울한 표정으로 반박했다.

“네. 분명 4월 5일에 남한결이 저한테 다 준다고 했는데요?”

익숙한 날짜를 듣자마자 입을 다문 날 본 놈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그 사랑스러운 얼굴에 대고 심술을 부리는 것도 한계였다. 대신 네가 허락한 모든 사랑을 쏟을 수밖에.

허리를 만지고, 몸을 뒤로 빼는 놈의 얼굴 곳곳에 집요하게 입을 맞췄다. 몇 번은 받아 주던 이로빈이 헐떡거리며 항복하듯 손을 위로 들어 올리며 외칠 때까지. 

“아, 타임! 타임! 이러다 집에 못 가고 또 여기서 드러눕겠어. 집에 빨리 같이 가려고 데리러 온 건데!”

“데리러 온 거였어?”

“당연하지. 너 우산 없을까 봐 내가 얼마나 급하게 뛰어왔는데!”

“왜? 공방에 우산 있는….”

말을 잇지 못하게 제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댄 이로빈이 다급하게 말했다. ‘쉿’ 하는 비밀스러운 속삭임은 덤이었다.

“조용히 해. 설령 진짜 있었다 해도 지금 이 순간부터는 없는 거야.”

“…….”

“일부러 하나만 가져왔단 말야. 같이 쓰려고.”

그것도 모르냐는 듯한 뉘앙스였다. 웃음이 터진 날 본 이로빈이 ‘씁-’ 하는 소리를 내며 위엄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는 중에도 눈가에 웃음기가 가득해서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곧 이로빈이 예습내용을 확인하려 드는 선생님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자, 딱 한 번만 더 묻는다. 공방에 우산 있어, 없어.”

“…없어.”

“진짜야?”

“응. 방금 다 버렸어.”

자신이 시켜 놓고는, 원하는 대답을 들은 이로빈은 입이 찢어져라 웃기 시작했다. 입꼬리가 시원하게 벌어지도록 웃는 얼굴을 지켜보다 테이블 위에 얹어둔 손을 잡았다. 손가락을 얽고 내 쪽으로 가볍게 끌어당겼다. 저항 없이 끌려와 준 이로빈을 벽에 세우고는 시선을 내렸다.

눈이 마주친 이로빈이 서서히 입가의 웃음을 지운다. 그리고는 앞으로 내가 할 일을 예상한 것처럼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근데… 결아.”

조용히 내려앉는 적막을 반기는 차분한 중얼거림을 들으며, 내 손바닥을 간질이는 이로빈의 손가락을 느꼈다.

“여기서 서 있으니까 빗소리가 되게 크게 들려.”

“…빗소리?”

“응. 듣기 좋다.”

그제서야 네가 온 이후 존재조차 잊고 있던 빗소리가 아직도 이 방에 흐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시간과 공간의 뒤로 함께한 수많은 추억이 흐르는 것 또한.

“…왜?”

물과 만난 햇빛처럼 네 눈동자에 내가 반사되어 반짝하고 빛을 내는 추억의 조각을 가만히 응시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두꺼비 마트에서 설탕과 새콤달콤을 사고 나오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던 것. 쫄딱 젖은 자전거 안장을 보던 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별일 아니란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던 것도.

“…그냥.”

자전거가 비를 맞지 않도록 담벼락에 기대어놓고, 문 닫은 분식집 차양 아래서 비가 그칠 때까지 너와 함께 서 있었지. 네가 쉴새 없이 하는 질문에 대답하고, 빗속으로 손을 내미는 네 얼굴에 어린 장난기를 구경하며. 비가 그치고 네가 날 다시 그 축축한 뒷좌석에 앉혀서 다시 집까지 데려다 주는 길 내내 그런 생각을 했어. 한 번도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한 적이 없었는데, 어쩌면 그건 내가 너랑 비를 맞아본 적이 없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고.

“행복해서.”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그 순간들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 투박한 표현에도 이로빈은 모든 걸 눈치챈 사람처럼 웃는다.

“내가 데리러 와서?”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언제나 처음처럼 웃는 널 볼 때마다 생각한다.

“응. 네가….”

“…….”

“네가 날 데리러 와서.”

폭설처럼 쏟아져 내리는 세상 속에서 네가 걸어 나온 그 순간 난 이미 네가 내 세상의 주인임을 알았던 게 아닐까 하고. 

“그러니까…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너라는 세상 속에서 평생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걸 첫눈에 알아본 게 아닐까. 그렇기에 그 낯가리는 꼬마가 네가 건네는 손을 잡은 거지. 네가 건네는 헬멧을 쓰고, 네가 운전하는 두 발 자전거 뒷자리에 타 함께 비탈길을 내려간 것은 그 꼬마의 7살 인생에서 처음 낸 거대한 용기였다. 한 번도 내딛지 않았던 세계로 발을 떼기 위해서.

그 세계를 만든 이로빈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다정히 물었다.

“비가 그칠 때까지?”

“…응.”

비가 그치고 해가 뜰 때까지. 그리고 또 밤이 올 때까지. 영원히 너와 함께할 거야.

그 모든 게 네가 내게 선물한 세상이므로.

<당신의 로빈과 한결을 위하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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