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메가 2
3. 도망 생활
뾰족한 대책이 없었으나 서하는 하준의 손길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했다. 주말 오전의 나른함을 다시금 느껴 한편으로는 낯설었다. 서하는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자 페로몬을 필사적으로 갈무리하며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걸어갔다.
핸드폰도 지갑도 없어 서하는 무작정 거리를 걸었다. 하준의 집 근처는 대부분 알파들이 거주하는 공간이고, 자신들의 오메가가 있어 길에 돌아다니는 오메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너무 안심을 한 게 문제였을까 길을 걷다가 앞집 학생을 만났다. 교복을 입고 있어 발현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서하는 인사를 하며 지나가고자 했다.
“혼자 돌아다니시면 위험하지 않아요?”
“아……. 제가 핸드폰을 두고 와서……. 혹시 빌려주실 수 있나요? 데리러 올 수 있나 연락 좀 해 보려고요.”
호의적인 태도에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자 서하는 학생에게 핸드폰을 빌려 달라고 했다. 학생이 흔쾌히 핸드폰을 빌려줘 받았으나 기억이 나는 번호가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
학생이 기억이 안 나면 자신과 같이 돌아가자고 하였으나 서하는 하준이 외출을 해서 집에 못 들어간다고 말하며 손에 익은 집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서하는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들리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말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통화를 종료했다. 왜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 서하는 다시 걸겠다고 하며 강사훈의 번호를 기억해 내 통화를 걸었다.
[…….]
“형, 저예요. 형 오메가, 서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상대방에 혹여나 전화번호가 잘못되었을까 봐 긴장을 했다. 학생이 의심하지 않도록 이름을 넣어서 말하니 그제야 사훈이 대답을 했다.
[윤서하……? 이거 누구 핸드폰이야? 그것보다 졸업하고 뭐 하다가 이제야 연락하는 건데!]
“형, 나 좀 데리러 와 주면 안 돼요? 형이 나가서 저 지금 못 들어가고 있어요. 제가 한성대입구역 로즈카페에 갈 테니까 거기로 데리러 와 줘요.”
[야……. 무슨 일 있어? 거기서 기다려. 지금 바로 갈 테니까.]
서하는 안도하며 빨리 오라고 한 뒤 전화를 끊고 통화 기록을 삭제했다. 아무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걸어 통화 기록을 만들고 학생에게 빌려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며 돌려줬다. 서하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 로즈카페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사훈으로 보이는 인물의 손목을 붙잡고 달린 서하는 카페에서 멀리 떨어졌다. 혹여나 앞집 학생이 하준을 만나 장소를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끌려가 놀랐는지 사훈이 손을 뿌리쳤지만 서하의 얼굴을 보고 순순히 따라왔다.
“야, 어디까지 갈 거야. 힘들어.”
“멀리……. 최대한 멀리……. 최하준이 쫓아올 거야.”
“그게 누군데……? 하, 잠깐 기다려 봐.”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서 멈췄고, 사훈이 전화를 걸어 위치를 보내 줄 테니 당장 오라고 하였다. 서하는 자신의 위치가 발각될까 주변을 살피며 떨었고, 사훈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서하에게 씌워 주었다.
“진정하고 멀리 갈 테니까 떨지 마. 더 수상해 보여.”
“어……. 어, 응.”
사훈은 서하의 어깨를 붙잡아 떠는 것을 멈추게 하고 서하의 몸을 살펴보았다. 몇 년 만에 보는 서하의 얼굴은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불안해 보였고 목에는 목줄이 매여 있었다.
“이건 뭐야? 그동안 뭐 하고 있었어! 너 때문에 지호 그 새끼랑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지호……? 아…….”
고장 난 인형처럼 말을 제대로 못 하는 서하에 사훈은 카톡으로 서하의 상태가 안 좋으니 빨리 오라고 하였다. 곧 있어 검정색 세단이 골목길에 도착했고 누군가가 차에서 내려 달려왔다.
“윤서하!”
“소리 지르지 마! 애 놀란 거 안 보여?”
차에서 내린 사람은 하준이 아닌 지호였고 서하는 오랜만에 만나는 지호에 눈이 동그래졌다. 사훈은 일단 자리를 옮기자며 서하를 뒷좌석에 밀어 넣었고 지호에게 출발하라 했다. 서하는 사훈이 지호를 종처럼 부리는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황스러워했다
“윤서하, 그 목줄 뭐야?”
“운전이나 해. 내가 풀 테니까.”
백미러로 서하의 목을 확인한 지호가 목줄을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사훈이 운전이나 하라며 호통을 치니 조용히 운전만 하는 지호였다. 사훈은 생채기가 나 있는 목에 손을 가져가 목줄을 푸려고 했으나 풀리지 않아 신경질을 냈다.
“이거 안 풀려. 왜지?”
“일단 도착했으니까 올라가요.”
사훈에게 붙잡혀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집은 넓기는 했으나 포근한 분위기였다. 하준의 집과는 달리 안정된 느낌에 서하는 사훈의 옷깃을 붙잡았고 사훈은 서하를 이끌고 소파에 앉혔다.
곧이어 도착한 지호가 소파에 앉아 있는 서하를 내려다보며 손을 뻗었고 서하는 때리는 것으로 오인하여 눈을 감았다.
“야……. 그동안 왜 연락도 안 되고 뭐 하고 있었던 거야.”
“그냥……. 취업하고 회사 다녔어.”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서하를 보며 지호는 분통을 터트렸다. 대학교 졸업을 마지막으로 사라질 줄 알았으면 보내지 않았을 거였다. 사훈과 번갈아 가며 연락을 했지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
“유지호, 이것 좀 풀어 봐. 아무리 해도 안 풀려.”
“네 형. 잠깐만요.”
지호가 목줄을 만지더니 표정을 찡그리며 물러났다. 서하도 계속해서 풀어 보려고 시도했으나 풀리지 않은 목줄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거 알파만 풀 수 있는데. 저는 이제 못 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오메가를 붙잡으려고 만든 목줄인데 페로몬을 넣어야지 풀 수 있거든요. 근데 저는 형이랑 각인해서 페로몬이 안 통하니 음…….”
지호는 페로몬을 넣은 흔적이 없어 다행이라고 하였다. 아까 하준이 목 가운데 장식을 만진 이유가 페로몬을 넣기 위함임을 알아차린 서하는 실소를 지었다. 영준이 자신을 구한 셈이었다.
“다행인 건가…….”
“그런 알파는 벗어나는 게 낫지.”
말을 마친 지호는 잠시 전화 좀 하겠다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목이 불편하여 서하는 목 주위를 긁어 댔다. 목줄을 풀려면 페로몬을 넣어 등록하고 풀어 줄 알파가 필요한데 자신의 주변에서 순순히 해 줄 알파는 없었다.
“이것 좀 마셔.”
“고맙습니다.”
사훈이 코코아를 건넸고 홀짝거리며 마시니 따뜻함에 몸이 진정됐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 없어 서하가 떠나겠다고 말하니 사훈이 고개를 저으며 좀 더 머무르라고 했다.
“선배는 지호랑 사는 거예요?”
“어? 어…… 그렇게 됐네. 뭐 쟤랑 각인하니까 다른 알파는 내 페로몬도 못 맡고, 나도 베타처럼 평범하게 다닐 수 있어서 좋아.”
지호를 수단 취급을 하듯 말을 했지만, 사훈의 입에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같은 오메가라도 행복을 느끼는 모습에 서하는 마음 깊은 곳에서 불쾌한 감정이 퍼져 나갔다. 자신과 같은 오메가면서 자신은 나락에 떨어졌는데, 사훈은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마냥 축하해 줄 수 없었다.
근황을 묻는 사훈에게 서하는 하준을 제외한 정보를 말해 줬다. 아직 히트사이클이 오지 않았다는 말에 사훈이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서하는 코코아만 홀짝였다.
“너 근데 초커는 어디 가고 목줄 하고 있는 거야? 너 만나는 알파 있었잖아?”
“돌려줬어요.”
“아……. 그러면 너 피임은 제대로 하는 거 맞지?”
하준을 제외하고는 구멍으로 정액을 받은 적이 없지만 하준의 정액을 받았을 때도 피임을 하지 않았다. 히트사이클이 아니면 괜찮은 거 아니냐고 사훈에게 말을 하니 미간을 찌푸리며 오히려 자신에게 반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히트사이클은 100%고, 그게 아니더라도 오메가는 임신 확률이 높아 약 먹어야 한다고.”
“그럴 리가……요.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약을 먹은 적이 없었다. 기절한 사이 하준이 먹였을 수도 있지만 히트사이클의 전조 현상이 없는지 확인했기에 가능성이 낮았다. 베타 집안에서 발현을 한 것이 이유인가 싶어서 사훈에게 묻고자 입을 뗐다.
“형……. 혹시.”
띵동-.
“서하야, 잠시만.”
소파에서 일어난 사훈이 현관문으로 나가 문을 열어 줬다. 비디오폰도 확인하지 않고 여는 문에 서하는 선약을 잡은 손님이 있나 싶어 현관문을 쳐다보았다. 사훈이 먼저 거실로 돌아왔고 손님은 서서히 거실로 다가왔다.
“서하야.”
서하는 눈앞에 있으면 안 되는 얼굴에 코코아를 들고 있던 컵을 놓치고 말았다. 바닥에 부딪혀 깨진 컵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면서 발목이 베이긴 했지만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저 이 집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서하야…….”
“…….”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에 뒤로 물러나면서 파편을 밟았다. 깨지는 소리가 나 허둥지둥 방에서 나온 지호는 유리 파편을 밟고 있는 서하에게 다가갔으나 선수를 뺏겨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모습을 보고 멈췄다.
“어……. 내가 괜한 짓을 한 걸까?”
“개새끼야! 왜, 왜…….”
“아냐, 고마워. 지호야.”
서하는 자신의 발을 잡고 있는 승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호에게 소리를 질렀다. 기껏 지옥을 피해 왔더니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승언이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서하야……. 그동안 힘들었지?”
“만지지 마요……. 포기했는데……. 왜…….”
승언은 서하의 양말을 벗기고 발에 박힌 유리 조각이 없는지 확인했다. 사훈이 구급상자를 들고 왔고 승언은 서하의 발에 소독약을 뿌렸다.
“으읏, 흡!”
“아프지……. 서하야, 조금만 참자. 착하지?”
언제나 다정하게 대해 주는 승언에 또다시 서하는 무너질 것만 같았다. 발의 치료를 끝낸 승언은 손을 들어 서하의 뺨을 쓸어내렸다. 서하는 자신이 줄곧 봐 왔던 활기차고 밝은 느낌이 아닌 죽을까 봐 겁을 잔뜩 먹은 어린 짐승 같았다.
“그동안 왜 연락이 안 됐어……. 형이 걱정 많이 했어. 아무리 찾아보려고 해도 못 찾겠더라.”
“형이랑 나랑 찾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했는데 털끝 하나 못 찾겠더라.”
사훈을 뒤로 보내고 유리 조각을 치우며 지호는 이제라도 만나 다행이라고 하였다. 서하는 자신만 초라한 모습인 것 같아 눈에 초점을 의도적으로 흐리게 하였다.
“서하야……. 형 좀 봐 줘. 우리 오랜만이잖아.”
“형……, 형이 곁에 있으면 저도 모르게 희망이 생겨서 너무 괴로워요. 그러니까…. 그냥 모른 척해 줘요.”
승언은 뺨을 쓰다듬던 손을 목줄로 내렸다. 목줄을 만지자 흠칫 놀라는 서하를 진정시킨 승언은 목줄을 자세히 살폈다. 최하준이 예상보다 서하를 더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었다. 목줄까지 채워 밖으로 못 나가게 하려는 것 같았으나 서하는 제게로 돌아왔다.
“서하야……. 이건 뭐니?”
“…….”
“형, 그거 요즈음 알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목줄이에요. 페로몬 등록한 사람만 풀 수 있어서 저는 못 해요. 형이 풀어 주세요.”
승언이 목줄을 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행동하자 서하는 같은 알파인데 왜 모르냐는 반응을 보였다. 이미 알고 있으나 멋쩍게 웃어 보이며 지호에게 목줄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서하야, 잠시만 참자. 형 향 알고 있지?”
“어……. 네.”
“잠깐만요. 사훈 형!”
지호와 각인한 사훈은 지호 외에 다른 알파의 향을 맡지 못하지만, 알파인 지호는 다른 알파의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지호는 다급히 서하 근처에 서 있던 사훈을 방 안으로 들여보내려고 했다. 사훈이 방문을 밀며 바락바락 욕을 했지만 결국 밀어 넣기에 성공한 지호는 이제 하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미친놈….”
“서하야……. 욕하지 말고.”
오랜만에 만난 지호는 사훈의 완벽한 노예가 되어 있었고, 저러다가 간이고 쓸개고 뭐든 내줄 것 같은 모습에 서하는 나지막이 욕을 내뱉었다. 바로 승언에게 지적을 받기는 했으나 친구의 얼빠진 얼굴은 아무리 봐도 적응을 할 수 없어 표정을 찡그렸다.
“금방 풀어 줄게.”
승언의 페로몬이 맡아졌고 몸이 약하게 달아올랐으나 넣는 게 끝났는지 더 이상 맡아지지 않았다. 서하는 상의를 잡아당겨 발기한 성기를 보이지 않게 했다. 흥분한 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지호야, 이거 된 것 같지?”
“네. 다이아몬드 부분이 푸른색이 되었으니까 이제 푸시면 될 것 같아요.”
지호는 서하가 부끄러워하지 않게 못 본 척을 하였고 승언 역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흥분을 잘하는 몸과 착하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서하의 순진함이 좋았다. 자신이사라진 5년 동안 회사에 다니는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면 저 표정이 어떻게 일그러질지 상상만 해도 짜릿하고 아래가 묵직해졌다.
“형……?”
“아. 미안, 서하야. 고개 좀 숙여 줄래?”
표정을 바로 알아채는 서하에 승언은 착하고 다정한 형으로 돌아와 고개를 숙이게 했다. 발기한 승언의 성기를 본 서하는 순간적으로 흠칫했으나 자신도 남 말 할 처지가 아니라 못 본 척했다.
달칵-.
갑갑함이 사라지고 목이 시원해져 서하는 양손을 목에 가져가 댔다. 서하는 완전한 해방감을 얻은 기쁨에 활짝 웃었다.
“윤서하!”
“서하야, 손!”
소리를 지르는 지호와 승언으로 인해 놀라 몸이 경직된 서하는 승언에게 손이 잡혀 내려갔다. 손톱에 무언가 껴 있고 마디마디에 붉은색이 묻어 있었다.
“형, 여기 소독약이랑 약이요.”
“뭔데! 문 열어! 유지호. 인마!”
승언에게 약품을 건네고 사훈이 방문을 열지 못하게 막은 지호는 문 사이를 두고 사훈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였다.
손에 묻은 게 피인 것을 인식하니 쓰라림이 올라왔다. 서하는 저도 모르게 목을 만지기 위해 손이 올라갔고, 승언은 솜에 소독약을 묻히면서 서하의 손을 다시 잡아 내렸다.
“손 움직이지 말고, 지금 피 많이 나니까 조금만 참자.”
“괜찮은데요…….”
승언은 서하의 턱을 잡아 올려 상처 부위를 확인했다. 고개를 들면서 상처 부위가 벌어졌고 피가 목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승언은 하준이 서하를 망가뜨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조만간 들쑤시고자 하였다.
“윽. 아. 아파요…….”
“그러니까 왜 그렇게 긁어.”
소독약이 목에 닿으니 눈을 찌푸리며 아프다고 하는 서하를 지호가 타박을 했다. 그러자 서하는 눈을 앙칼지게 뜨고 작게 욕을 하였고, 다 들은 지호는 서하를 응징하기 위해 앞으로 나왔다.
“날 가둬? 가만 안 둬, 유지호!”
“사훈 형……. 가두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방문을 막고 있는 지호가 없으니 사훈이 안에서 문을 벌컥 열고 나왔고, 나오자마자 지호에게 달려들어 목에 헤드록을 걸었다.
“둘은 정말 친해 보이네.”
“맞아요. 사훈 형이 최고야.”
“뭔 개소리야…….”
서하에게 약을 발라 주며 승언이 아웅다웅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말을 하니 지호와 사훈이 상극의 반응을 보였다. 처음 승언을 봤을 때는 앞에서 숨도 편히 못 쉬던 사훈이었으나, 서하의 정보를 준 사람이 승언이었고 지호가 있기에 안심을 하고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저 나가고 싶은데요.”
“그 꼴로 어디 가려고. 좀 더 쉬다 가. 갈 곳도 마땅치 않으면서.”
서하는 두 사람의 애정 행각을 보느니 차라리 위험하더라도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지호는 서하를 막았고 사훈도 지호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서하는 강경했다.
“그래. 나도 위치를 옮기는 게 좋다고 생각해. 여기는 위험하기도 하고.”
“우리 집이 왜 위험해……?”
구급상자를 정리하던 승언이 자리를 옮기자고 하자 사훈이 왜 위험하냐며 반문을 하였다. 지호는 사훈이 우리 집이라고 표현한 것에 감동받아 어깨에 팔을 감으며 우리 집은 안전하다고 두둔했다.
“이 목줄에 위치 추적 장치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오래 있으면 서하를 막 다룬 알파가 찾아올 수도 있잖아.”
“아…….”
서하는 승언의 말에 하준이 목을 조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목줄은 벗겨졌지만 숨을 편히 쉴 수가 없었고 목에 감아 놓은 붕대에 손을 올렸다. 긁고 싶었다. 승언은 그런 서하의 손을 잡고 놔주지 않았고 안심하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서하야. 형 집으로 가지 않을래?”
“싫어요. 그냥 내버려 둬요.”
승언의 제안을 서하는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서하가 거절을 할 줄 몰랐는지 승언의 눈이 흔들렸다.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으나 서하의 대답은 똑같았다.
“형, 저는 더 이상 누군가의 소유물이 되는 게 싫어요. 밖에 나가도 지옥일 게 뻔하지만 제가 선택한 길을 갈래요.”
“그게 무슨 소리야, 소유물이라니……. 형은 그렇게 생각 안 해.”
결의를 다진 듯 소파에서 일어나 절뚝거리며 서하는 현관문으로 향했다. 지호와 사훈이 서하가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으나, 서하가 우수에 잠긴 얼굴로 말을 하니 지호는 포기하고 길을 내줬다.
“야! 막아야지. 윤서하 저렇게 못 내보내.”
“형, 윤서하 고집 엄청 세요. 우리가 막아 봤자 나갈 게 뻔해요.”
지호는 지갑을 꺼내고 현금을 서하의 손에 쥐여 주었다. 서하가 동정하지 말라며 욕을 했으나 지호도 이번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친구라고 생각하면 받아 줘라. 마음 같아서는 잡아 두고 싶은데 네가 싫다고 하니까…….”
서하는 더 이상 돈을 거절하지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지호는 카드는 사용 기록이 남아 주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돈이 더 필요하면 전화하라고 하였다.
“서하야, 형이랑 같이 가자.”
“아니요. 그냥 나갈래요.”
승언은 고집을 부리는 서하로 인해서 초조해졌다. 제 손으로 돌아온 줄 알았더니 또다시 빠져나가려 했다. 승언은 순간 본색을 드러낼 뻔했으나 마음을 가다듬고 서하의 역린을 건드렸다.
“서하야……. 이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부모님이 걱정하고 계셔.”
“그게 무슨……. 형, 우리 부모님이랑 연락하고 있었어요……?”
방금까지 부정적인 대답만 하게끔 설정된 로봇 같던 서하는 부모의 이야기가 나오자 당황과 절망, 약간의 희망이 깃든 표정을 지었다. 승언은 서하를 회유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안부를 확인하고 있다고 얼버무렸다.
“아……. 우리 부모님 건강하셔요? 아픈 곳은 없고?”
“그럼, 서하야. 형이 잘 모시고 있었어.”
서하에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을 내뱉으며 승언은 서하에게 다가가 포옹했다. 건강하다는 말에 안심이 되었는지 서하가 팔을 들어 올려 승언을 마주 안았다. 부모님이 안전하다. 한시름을 던 서하가 승언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부모님을 부탁한다고 말하자 승언이 손을 잡으며 인자한 미소를 짓곤 걱정하지 말라 일렀다.
“형 집에 가서 마저 이야기하자. 알았지?”
“그럼……, 신세 좀 질게요.”
승언은 서하를 들어 올려 다친 발이 땅에 최대한 닿지 않게 하였다. 지호가 목줄을 꺼림칙하니 버리겠다고 하였으나 승언이 위험한 물건이니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건네받았다.
“윤서하, 가서 연락하고. 그때는 웃고 있었으면 좋겠다.”
“안녕히 계세요, 선배. 유지호 너도.”
서하는 제가 웃을 날이 과연 올까 싶어서 은인인 지호와 사훈에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승언에게 의지하여 차에 올라타니 승언이 안전벨트를 매 주었다.
“제가 할 수 있는데……. 감사합니다.”
“별것도 아닌데 뭘. 그럼 가 보자.”
서하는 창문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승언이 말은 시키지도 않았고,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아 안심한 서하는 서서히 감기는 눈을 버티지 않고 그대로 잠들었다.
“서하야, 자니?”
“…….”
자느라 페로몬이 조금씩 새어 나오는 서하의 향을 맡으며 승언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뒷좌석에 던져둔 목줄을 살펴보았다.
“이거 진짜 악질이네. 얼마나 무서웠으면 날 버렸을까.”
“…….”
목줄의 안쪽에서 시간 차를 두고 붉은빛을 내며 깜빡거리는 장치를 뜯어낸 승언은 차에서 내려 던져 버린 뒤 목줄은 트렁크에 넣고 차를 출발했다.
집에 도착한 승언은 여전히 자는 서하를 안고 집으로 들어왔다.
“서하야, 환영해. 이제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망가져도 나한테 보여 줘야지. 꽁꽁 숨어 있으면 어떡해.”
자는 서하를 침대에 눕히고 버드 키스를 한 뒤 승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꺼냈다. 자신이 오늘 아침까지 사용한 베개와 이불을 덮고 자는 서하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사진으로 남겼다.
***
하준이 서하를 찾기 위해 사람을 풀었으나 한 달이 지났음에도 찾지 못했다. 목줄에 있는 위치 추적기를 가동했으나 특정 장소에서 멈춰 있다 움직이더니 오류가 발생했다. 하준은 로운을 데리고 좌표에 찍혀 있던 곳으로 갔다.
“여기, 혹시 이렇게 생긴 오메가가 왔을까요? 눈물점이 있는 오메가인데.”
“……아니요. 못 봤습니다. 그리고 여기 알파가 많이 거주해서 하루에 오메가가 얼마나 많이 오는데요.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도 못 찾을 겁니다.”
로운은 경비원에게 들은 내용을 하준에게 보고했다. 차에 기대 담배를 피우던 하준은 건물을 올려다보며 뒤지라는 한마디만 내뱉었다. 하준을 말리고 싶었으나 강경한 태도에 로운은 처지를 한탄하며 건물을 매입했다. 10분도 걸리지 않아 거주자들의 정보가 로운에게 전송되어 차트를 훑어 내렸다.
“이 두 사람 서하 씨랑 같은 대학교 나왔는데 둘이 각인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새끼들한테 갔다 와.”
담배를 피우는 하준을 보며 로운은 알겠다고 한 뒤 지호의 집 현관문을 두들겼다.
“무슨 일이십니까? 알파 분인 거 같으니 빨리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윤서하 씨에 대해서 알고 계실까요? 최근에 이곳으로 온 거 같아서요.”
“졸업하고 나서 본 적도 없으니 돌아가 주시죠.”
할 말을 마친 지호가 현관문을 세게 닫았고 복도에 남겨진 로운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언짢은 감정을 표현했다. 알파라는 놈이 오메가에게 빠져 있는 모습이 꼴사나웠다.
로운이 건물 입구로 나왔을 때도 하준은 담배를 피고 있었다.
“……돌아가지.”
오메가 하나 때문에 초조한 자신이 이해가 안 가 차에서 내린 하준은 대문에 기대 담배를 피웠다. 문득 자신이 담배를 피지 않았던 이유가 담배 냄새만 맡아도 기침을 하던 윤서하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헛웃음을 내뱉은 하준은 신경질을 내며 담배를 발로 밟아서 끄고 대문을 열었다.
“오늘도 혼자 들어오시네요. 그분은 어디 계세요?”
“…….”
하준은 교복을 입은 학생이 말을 걸었음에도 무시하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학생이 얼굴을 빼꼼 내밀며 오메가 형은 안 돌아왔냐는 말에 발걸음을 멈춘 하준은 뒤를 돌았다.
“와……. 개 무서워. 아니, 죄송……합니다.”
“너 누구야, 누구길래 윤서하를 알아.”
하준이 학생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었고, 겁은 먹은 학생은 뒤로 물러나며 앞집을 가리켰다. 윤서하의 행방을 아는 것이 아닌 앞집에 살아 몇 번 본 것 때문에 그런가 싶어 하준은 한숨을 쉬며 다시 몸을 돌렸다.
“그분이 아저씨 찾아간다고, 전화도 했는데……. 그 이후로 들어간 걸 본 적이 없어서 혹시나 해서요. 로즈 카페에서 기다린다고 했는데…….”
“전화……? 누구한테 전화했다는 거야. 카페는 또 뭐고?”
학생이 손을 떨며 서하가 사라진 날 통화 기록을 하준에게 보여 줬고 번호를 받아 적은 하준은 학생을 돌려보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정웅의 인사를 무시한 채 하준은 방으로 들어가 핸드폰에 입력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윤서하를 찾을 단서라는 생각에 연결되는 시간조차 길게 느껴졌다.
[여보세요?]
“윤서하를 아십니까?”
[네?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로운에게 번호 주인과 윤서하가 관련이 있는지 조사하게 하고 침대에 누워 팔로 눈을 가렸다.
“윤서하……. 너 따위가…… 감히 날 두고 떠나?”
추운 걸 싫어하는 윤서하라 집 안은 언제나 온도가 높았으며, 여기저기 잘 부딪혀 다치는 것을 방지하고자 어린아이가 있는 집 안에 쓰일 법한 모서리 보호캡이 씌워져 있었다. 윤서하가 떠난 집은 싸늘했던 예전으로 돌아갔다.
융- 웅-.
“그래서, 윤서하와 관련이 있나?”
[죄송합니다만, 이사님. 전혀 접점이 없는 인물입니다.]
전화를 끊은 하준은 짧은 시간에 위장까지 하고 떠난 서하에게 분노했다. 영악한 놈이 통화 기록을 지우고 아무 번호나 입력을 한 다음 떠난 모양이었다. 화를 참지 못하고 일어난 하준은 화장대 거울을 내리쳤다. 파편들이 이리저리 튀고 반동에 주변 물건들이 쓰러졌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세상에, 피가!”
“나가.”
방에 들어온 정웅이 손을 보고자 했지만, 하준은 축객령을 내려 내쫓았다. 손에 박힌 유리보다 윤서하의 빈자리가 더 커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심심풀이용 오메가인 줄 알았는데 사라지고 나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다시는 도망갈 수 없게 붙잡으면 힘줄부터 잘라야겠군.”
걷지도 못하고 바닥을 기며 자신이 올 때까지 방문만 쳐다보는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나아졌다. 예전에는 서하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단 한 번도 웃지 않기에 포기했다. 웃는 걸 볼 수 없다면 두려워하고 겁을 먹게 해서 복종이라도 하게 해야 했다.
웅- 웅-.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고 하준은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 영준의 전화를 받자마자 호통이 들려왔다.
[아직도 못 잡은 게냐?]
“네, 그렇습니다.”
[꼭 찾아야 한다. 그 오메가는 길거리에 널려 있는 어중이떠중이들이랑 다르니까. 무려 베타에서 오메가가 된 애다.]
“그렇게 목청 높이지 않으셔도 찾을 겁니다.”
[너의 힘을 보여 줄 수 있는 수단이다. 돌연변이를 임신시키는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테니 너는 증명만 해 보이면 된다. 네가 다른 알파들보다 뛰어나다는 걸. 알파들은 너를 받들고, 베타들은 너를 칭송할 게다.]
“…….”
윤서하를 철저히 알파를 낳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영준과의 통화를 끝낸 하준은 밀려오는 두통을 참지 못했고 장소를 옮겨 윤서하의 방으로 들어갔다.
주인이 없는 방은 휑하였으나 침구에는 미약하게마 페로몬이 남아 있었다. 하준은 서하의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정웅이 서하와 비슷한 페로몬이라며 파우더 향이 나는 오메가를 데리고 들어온 적이 있으나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역겨워 내쫓았다. 이제는 거의 날아간 향을 맡으며 하준은 핸드폰 갤러리에 들어갔다.
“이거 하나밖에 없는 건가?”
5년 동안 같이 살았지만 핸드폰에 남아 있는 서하의 사진은 취해 눈을 접으며 웃고 있는 것, 단 한 장뿐이었다. 로운이 비서팀 회식에서 서하가 취했다며 보내 주었던 사진이었다.
“웃길 바란 내가 미친놈이군…….”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하준은 서하의 베개에 코를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웃지 않아도 되니 옆에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갔고 서하 없이 회사에 출근한 하준은 밀린 서류를 보았다.
“이사님, 손은 괜찮으십니까?”
“쓸데없이 말이 많아.”
윤서하에 대해 보고를 하러 이사실에 들어온 로운은 하준의 손을 보고 안부를 물었으나 질책만 받아 입을 다물었다. 충혈된 채로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알아낸 것을 말하라고 했으나 로운은 고개를 저었다.
“누가 힘을 썼는지 주변 CCTV도 파일이 전부 날아갔고 특히 로즈 카페는 내부 CCTV도 메모리 카드가 고장 났다고 합니다. 정부 측에서도 요청을 거절했고요.”
“윤서하가 잠적하면 가장 빨리 찾아내는 놈들이 오메가 관리부야. 근데 그쪽에서 요청을 거절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해 줄 수 있는 말은 서하 씨가 오메가의 의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아마 서하 씨가 박승언과 만난 게 아닐까 짐작됩니다.”
쾅!
하준은 떠오르는 낯짝에 화를 참을 수 없어 책상을 내리쳤다. 로운은 서하가 빨리 돌아와 하준을 말려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근래 하준의 예민함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간부들 사이에서는 오메가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며 하준을 능력 없는 인간 취급하고 있었다. 사이에 낀 로운만 죽어날 뿐이었다.
“하! 윤서하가 알파를? 그때는 그 새끼는 죽이고, 윤서하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지.”
“…….”
순간적으로 윤서하가 잡히지 않기를 기도한 로운은 머리를 약하게 흔들며 하준을 모시고 있음을 상기했다.
웅- 웅-.
비서실에서 연락이 와 로운은 하준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실장님……. 선약을 잡지 않은 손님이 오셨습니다. 어떡할까요?]
“말해 뭐 합니까? 돌려보내세요.”
[근데, 이분이 목줄이라고 하면 알 거라고 하셨어요. 돌려보내기도 어려운 분이기도 하고…….]
“그게 무슨? 애초에 목줄은 뭡니까?”
알아서 처리하려고 했던 로운은 하준의 흉흉한 눈빛과 거북한 페로몬을 맡고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다시 한번 말해 봐. 목줄이라고 했나?”
“네, 그분이 목줄이라고 하면 안다고 하셨답니다.”
“들여보내.”
로운은 침을 삼키며 이사실로 들여보내라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목줄이 뭐기에, 라고 생각하다가 마지막 서하의 인상착의를 기억해 냈다. 설마 윤서하가 진짜 알파라도 만난 건가 싶어 로운은 전쟁터가 될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똑똑-.
“이사님,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대답을 듣기도 전에 로운은 이사실 문을 열었고 전체적으로 다정한 분위기의 사람과 마주쳤다. 가볍게 묵례를 주고받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알파치고는 너무 순하게 생긴 거 아닌가? 서하 씨 능력 좋네.”
무해하게 생긴 사람이 하준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해하며 로운은 이사실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났다.
“저런……. 손은 어째서 다쳤습니까? 장난감 오메가를 잃어서? 아니면 잃어버리고 난 후 사실은 사랑하고 있단 걸 깨달아서 뭐라도 깨부쉈나요?”
하준은 들어오자마자 인사를 생략한 채 비아냥거리는 상판대기를 보았다. 생김새와는 다르게 깐죽거리는 인물은 박승언이었다.
“윤서하의 이름을 꺼내는 것을 보니 네놈이 데리고 있나 보군.”
“음……. 부정 안 하시는 걸 보니 사랑하는 게 맞나 봐요?”
“살고 싶으면 그 입 다물고 윤서하나 내놔.”
“서하는 물건이 아닌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교양 없게.”
승언이 착한 형에 몰입하며 서하는 물건이 아니라고 했고 하준은 혀를 차며 원하는 게 무엇이냐 물었다.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 왔습니다. 서하를 둘이 나눠 가지는 건 어떨까요?”
“미친놈이군.”
하준은 윤서하가 왜 저런 놈을 만났을까 생각하면서 승언의 의중을 떠보았다. 본래 한 알파가 오메가 여럿을 거느리는 것이 관례인데, 박승언은 한 오메가를 두 명의 알파가 나눠 갖자고 한 것이다.
“들을 가치도 없으니 나가.”
두통이 올라와 머리를 손으로 짚고 다른 손을 휘저어 승언에게 나가라고 하였다.
“거절하면 재미없을 텐데요? 그럼 뭐, 저는 다른 알파를 찾거나 아니면 그냥 각인해서 혼자 가지죠, 뭐.”
“내가 그런 도발에 넘어가리라 생각하나? 각인하면 너를 죽이고 차지하면 될 텐데 내가 굳이 승낙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군.”
“저는 당연히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이 영상을 보고도 번복하지 않을까 궁금하네요.”
승언이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재생하여 하준에게 보여 줬다. 같잖은 짓이겠거니 생각하고 무시하려는데 영상에서 서하의 목소리가 들려 절로 시선이 갔다. 요리하는 모습과 박승언에게 달려와 인사를 하고 웃는 모습, 무서운 영화를 보는지 팔짱을 끼고 승언의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는 모습. 5년 동안 한집에서 살았지만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번복할 기회를 드리죠. 최하준 당신 윤서하 없이는 못 살잖아?”
능구렁이같이 퇴로를 막고 서서히 조여드는 승언에 하준은 거절하지 않고 제안의 조건을 말하라고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메일로 보내 드리죠. 이거 하나만 명심하면 됩니다. 각인, 그건 절대 용납 못 해요. 그러면 제가 서하의 페로몬을 맡을 수 없거든요.”
“지금 당장 윤서하의 위치를 말해.”
승언은 하준의 협박을 무시하며 자신은 다정한 형을 유지하고 싶다고 하였다. 오래 기다리게 할 생각이 없으니 오메가의 날이 끝날 때를 기점으로 하자고 하였다.
“오메가의 날? 웃기는군. 좋아, 그렇게 하지. 다음 주에 윤서하가 내 눈앞에 있어야 할 거야.”
“네, 당연하죠. 그때까지 서하는 제가 잘 데리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서로의 만족을 위해 잘 부탁합니다.”
하준은 악수를 청하는 승언을 무시했다. 무색한 상황인데도 승언은 자신의 두 손을 마주 잡고 악수를 하는 척하며 문을 향해 걸었다. 문을 연 승언은 나가다 멈추고 몸을 반쯤 돌려 하준에게 말했다.
“최하준 씨 아무리 연상이라고 하지만 서하 마음에 들려면 관리 좀 하세요. 연상미가 아니라 늙은 거 티 내는 거 같으니까.”
“입 찢어지고 싶지 않으면 닥치고 나가.”
“하나 더 말하자면 오늘은 서하가 오므라이스를 해 준다고 하네요. 케첩으로 서하가 뭐라고 써 줄지 기대되지 않으세요?”
상황이 즐거운지 승언이 웃음을 터뜨리며 나갔고, 하준은 로운을 다시 불렀다. 1시간도 안 지나서 다시 이사실에 호출된 로운은 고개를 돌려 가며 혹시 가구나 바닥에 피가 있지는 않은지 확인했다.
“한로운.”
“네? 네! 이사님.”
화들짝 놀라며 대답하는 로운에 하준이 박승언의 거주지를 알아낸 후 죽여 버리고 서하를 데려오라 지시했다. 단칼에 로운은 난처하다는 듯 웃으며 그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박승언 자체는 신입 검사라 건들 수는 있지만, 집안이 집안이라……. 건들면 대외적으로 타격이 클 것 같습니다.”
“양지에 있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건가. 운도 좋은 놈이군.”
하준은 로운에게 나가 보라고 한 후 달력을 보았다. 앞으로 일주일. 윤서하가 자신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
서하는 다시 편하게 오줌을 쌀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승언의 집에서 지냈을 때 오줌이 나오지 않고, 잔뇨감이 있어 힘이 들었으나 이제 정말 하준에게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니 서서히 몸이 원 상태로 돌아왔다.
“서하야, 오늘 나가 보지 않을래?”
“네? 그건 좀…….”
화장실에서 나오는 서하에게 승언은 외출을 제안했으나 서하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승언의 곁에서는 안전하겠으나 잠깐이라도 떨어지는 순간 알파들에게 심한 짓을 당할 것이다.
“바다도 볼 겸 드라이브하지 않을래? 바람도 쐬고, 맛있는 것도 먹자.”
“그래도…….”
“불안하면 지호랑 사훈이도 부르자.”
사훈과 지호가 동행한다는 말에 서하는 고민하다가 수락했다. 발현하고 나서 바다를 본 적이 없었는데 순간 설레었다. 게다가 승언과 간다니 더 좋았다. 승언은 자신이 본 알파 중 가장 상냥하고 예의 발랐으며, 오메가에게 함부로 굴지 않았다. 서하는 최근 승언을 보면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우리 서하 예쁘게 웃는 거 오랜만이네.”
“……예쁘긴 무슨. 바다는 오랜만이라 좋아서요.”
승언에게 둘러댄 서하는 평생 이렇게 지낼 수 있기를 기도했다. 승언이 오메가를 만난다면 어쩔 수 없겠으나 만약 만난다고 하더라도 먼 미래이기를 바랐고, 더 욕심을 부린다면 자신이 승언의 옆에 서고 싶었다.
“그러면 형이 지호한테 연락할 테니까 준비하고 나와.”
“네, 형.”
연락을 하는 승언을 등지며 서하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옷을 골랐다. 나가지 않아 옷이 필요 없다고 하였으나 승언이 한사코 옷은 많을수록 좋다며 드레스룸을 가득 채웠다. 아직도 태그를 뜯지 않은 옷이 대다수였다.
“이 정도면 되겠지……?”
검은색 바지와 흰색 티셔츠를 입고 혹여나 바닷바람이 추울까 봐 베이지색 카디건을 챙긴 서하는 드레스룸 밖으로 나와 승언에게 갔다. 제 차림을 보고 엄지를 들어 주는 승언을 보며 서하는 화답하듯 웃어 보였고, 전화를 끊은 승언은 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예쁘다, 서하야. 근데 혹시 위험하니까 초커도 하자.”
“그거 아직도 가지고 계셨어요?”
“당연하지. 혹시나 나중에라도 필요할까 봐 잘 챙겨 뒀지.”
승언은 작은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초커를 들고 나왔다. 한 번도 방에 들어가 본 적은 없으나 호기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어 승언이 문을 닫기 전 고개를 살짝 빼 방 안을 보았다.
빼곡하게 무언가 붙어져 있었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프로 파일인가 싶어 서하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했다.
“와, 형. 보려고 한 건 아니고 틈새로 보였는데 사진들이에요?”
“응? 서하야, 보지 말라고 형이 말했잖아.”
경의를 담았으나 승언은 표정을 굳혔다. 서하는 승언의 눈치를 보며 사과했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승언이 예민하게 굴어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서하의 목에 초커를 채우고 물러났다. 초커에 목이 눌리자 하준이 떠올라 서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거 풀면 화낼 거야. 그게 서하를 지켜 주는 물건이니까 풀면 안 돼. 알았지?”
“네……, 알겠어요. 근데 이거 원래 이 사이즈였어요? 저번보다 안 조이는 거 같은데.”
승언은 서하에게 살이 빠져서 그런가 보다며 앞으로 잘 먹고 건강해지자고 하였지만, 실은 성장을 하면서 골격이 커진 서하의 체격에 맞추어 새로 만든 초커였다. 서하에게 돌려받은 초커는 작은방 선반에 전시되어 있었고, 서하에게는 새로운 초커를 달아 줬다.
“그래도 아프거나 하지는 않지? 답답하면 형한테 말해야 해.”
“안 아파요. 빨리 나가요”
저번과 달리 초커 안쪽에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지만 안을 확인하지 못한 서하는 빨리 나가자며 재촉했다.
큰길에 잠시 정차하고 있으니 눈을 반쯤 감고 있는 사훈과 어깨를 잡고 걷는 지호가 걸어왔다.
“회, 먹고 싶다.”
“좋아요, 형.”
비몽사몽 하는 사훈을 껴안은 지호는 버드 키스를 하며 사훈에게 애교를 부렸다. 깨어 있을 때는 날카로운 사람이, 졸리거나 막 깨어났을 때는 멍한 상태고 유했다. 대학생 때부터 쫓아다니면서 플러팅을 날려 사훈의 마음을 얻은 지호는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표정 관리를 할 생각도 없던 지호는 승언의 차를 발견하고 사훈과 함께 뒷좌석에 올랐다. 최근에 서하를 찾아온 알파가 있어 언질이라도 줄까 싶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서하의 미소에 지호는 나중에 말하기로 했다.
“우와……. 바다 너무 오랜만이에요.”
“발이라도 담가 보지 그래?”
철썩거리며 밀려오는 파도를 보고 서하는 감탄을 내뱉었다. 넓은 바다와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과 자신도 함께할 수 있다는 점이 낯설었다. 승언이 바다에 들어가 보라고 했지만 서하는 망설이면서 거절했다.
“쫄았냐? 안 빠뜨릴게. 들어갔다 와.”
“닥쳐, 유지호. 너나 처들어가.”
서하와 지호에 대화에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지나갔다. 알파로 보이는 인물에게 초커를 찬 오메가가 욕을 하였지만, 알파는 웃으면서 맞받아칠 뿐 오메가에게 벌을 주지 않았다.
“좋은 날이니까 싸우지 말고.”
“알겠어요, 형.”
지호에게 도발하고 있던 서하는 승언의 말 한마디에 순한 고양이로 변했다. 지호는 온도 차가 너무 심한 서하에게 배신감을 느꼈고, 사훈에게 하소연을 했지만 당해도 싸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 나만 개새끼지…….”
“이제 알았어? 너 1학년 때 완전 쳐다보기도 싫었는데.”
위로해 달라고 한 말이었으나 사훈이 과거를 꺼냈고, 지호는 사훈에게 했던 짓이 다시 떠올라 모래사장에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심해졌고 일행인 서하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동공이 심하게 떨렸다.
“승언 형……. 원래 알파가 저래도 되는 거예요? 아니면 쟤가 유별난 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다 내려놓을 수 있는 거지. 둘이 행복해 보이지 않아?”
승언의 말을 들으며 서하는 자신도 승언과 저런 사이가 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지호를 일으키고 무릎에 묻은 모래를 털어 주는 사훈과 연신 미안하다며 사훈을 껴안는 지호가 부러웠다.
네 사람은 모래사장을 따라 걷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다들 포스트잇을 받아서 소원을 적고 게시판에 붙이고 있었다.
“우리도 소원 적어 볼래?”
“아……. 저기 알파가 있을까 봐 가기 싫어요……. 사훈 형, 지호랑 하고 오세요.”
사훈의 제안을 거절한 서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사훈이 알파가 둘이나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며 서하를 잡아 이끌어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포스트잇을 받은 서하는 펜을 들긴 했으나 어떤 소원을 적어야 할지 고민했다.
“저 둘 오메가 아니냐?”
“한 명은 초커 찬 거 보니까 오메가는 맞는데, 옆은 잘 모르겠다. 주인이 있어도 만지는 건 가능하겠지.”
알파들이 서하에게 다가갔으나, 무슨 소원을 적어야 할지 고민하던 서하는 눈치채지 못했다. 지호와 승언은 열중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가 날파리가 꼬이는 것을 보고 움직였다. 지호가 적개심을 담은 페로몬을 풀어내자 알파들이 불쾌해하며 물러났다.
지호의 페로몬을 맡은 사훈이 지호를 쳐다보았고, 지호는 손으로 입을 가리는 제스처를 취하며 마저 하라고 하였다.
“……무슨 소원 적었어?”
“어……. 이거 원래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안 가르쳐 줄래요.”
사훈이 피식 웃으며 그러라고 하며 게시판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같은 학교에서 지호는 국어 교사로, 사훈은 보건 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어 이 일상이 유지되었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서하도 쭈뼛쭈뼛 다가와 포스트잇을 붙였고, 승언과 지호가 궁금해하자 배고프다며 두 사람의 팔목을 잡고 길을 재촉했다.
회와 조개 구이로 유명한 음식점에 도착하자 승언과 지호가 자리가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오겠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4명 테이블 가능할까요?”
“음……. 저것들은 오메가 같은데, 우리 가게는 오메가 안 받아요.”
오메가는 재수가 없다며 받지 않겠다는 말에 지호는 표정을 찡그리며 가게를 나섰다. 승언은 가게를 둘러보며 앞으로도 장사가 잘되길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가게를 나섰다.
“예약 때문에 자리 없대. 다른 곳 가자.”
다시 차를 타고 도착한 가게는 별말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회와 조개 구이를 먹고 있는데 가게 TV에서 오메가 프로를 하고 있었다. 나체의 오메가 10명을 섬에 풀어놔 도망치게 하고 알파 100명이 오메가를 사냥하는 방송이었다. 오메가를 잡으면 상품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알파들은 유희처럼 참가했고, 오메가는 돈을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제발…… 못 본 척해 주세요……. 여기도…… 끌려온 거예요……. 제발…….]
[웃기네. 돈 받고 싶어서 위험 감수하고 나왔으면 책임을 져야지.]
바닥에 굴렀는지 흙투성이가 된 오메가를 알파가 잡고 그대로 성기부터 박아 넣었다. 오메가가 눈을 뒤집으며 비명을 질러 댔으나, 그럴수록 알파는 폭력적으로 허리를 움직였고 사정을 한 뒤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흑,으……. 제, 제발…… 놔주세요…….]
[아직도 포기 못 했어? 일단 카메라 보면서 웃어야지?]
도망갈 힘이 남았는지 바닥을 기며 앞으로 나아가는 오메가를 붙잡은 채 알파가 카메라를 향해 다리를 활짝 벌렸다. 항문에서 정액이 흘러내리자 가게에서 방송을 보는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더 울려야 한다고 하였다.
“나 때는 말이야. 이미 일어나지도 못하게 했어. 요즈음 애들은 빠져 가지고 말이야. 오메가를 사람처럼 대한다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어딜 오메가가 알파 앞에서 말을 해. 조용히 고개 숙이고 좆이나 받아야지.”
옆 테이블의 말에 사훈은 익숙한지 묵묵히 회를 먹었으나, 서하는 입맛을 잃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고개를 들어 TV를 보니 아까 오메가가 여전히 방송에 나오고 있었다.
[네, 현장 중계입니다. 이제 오메가에게 제공한 피어싱을 몸에 달아 주시면 되는데요. 데리고 가고 싶으시면 클리토리스에, 별로시면 유두에 달고 풀어 주시면 됩니다. 양쪽 유두에 피어싱이 달리고 세 번째 알파마저 거부하면 구멍이 쓸모가 없다는 뜻이니 주먹을 넣고 교육을 진행하는데요. 과연 어떤 선택을 하실까요?]
알파는 고민하는 듯하다 여성기를 벌렸다. 작은 클리토리스가 빼꼼하게 나왔고 알파는 그대로 피어싱으로 뚫었다.
[으악,악! 싫어, 아파! 흐읏……. 싫다고…….]
[이게 어디서 반말이야.]
클리토리스에 피어싱이 달린 오메가가 바닥을 뒹굴면서 고통을 호소했으나, 알파는 오메가가 존댓말을 할 때까지 여성기를 때렸다.
짜악- 짜악-.
넓은 숲에 여성기를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성기가 붉어지다 못해 보랏빛이 될 무렵, 오메가는 바들거리며 무릎을 꿇고 알파에게 사죄를 올렸다.
“그만 보고 이만 나가자.”
서하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며 승언이 그만 나가자고 했다.
차에 타고 서울로 오는 길까지 서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서하는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다음 날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데 뉴스에 나온 가게가 낯익었다. 관광지 맛집으로 인기 있는 집이 사실은 위생이 불량이어서 막대한 벌금을 부과했고 신뢰를 잃은 가게는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형, 저 가게 우리가 가려고 했던 데 아니에요? 손님 많아서 못 들어간 곳.”
“그렇네……. 못 들어가서 다행이다. 먹었다가 식중독이라도 걸렸으면 어떡할 뻔했어. 근데 서하야, 진짜 소원 뭔지 안 가르쳐 줄 거야? 너무 궁금한데.”
“행복해지고 싶다고 적었어요. 아! 지금도 행복하기는 한데 발현 전처럼은 아니니까…….”
승언은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며 서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메가의 날에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음……. 한 번도 밖에 나가 본 적이 없어서 혼자 나가 보고 싶어요.”
“혼자? 위험할 텐데……. 12시 안에는 무조건 들어와야 해. 알았지?”
서하는 승언과 약속을 하며 오메가의 날에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 알파와 베타가 오메가를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해 주는 유일한 날이었다.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오메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국가에서 생각해 낸 방안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잘 시행된 날은 아니었다. 정부의 말에도 알파들은 지키지 않았고, 집행 유예 없이 징역을 선고하자 모두가 지키기 시작했다. 속내는 모르지만 표면적으로는 건들지 않았고 오메가들은 이 정도면 감지덕지라고 생각해 거리에 나왔다.
하준과 같이 살 때는 오메가의 날도 집 안에서만 보냈지만 이번은 나가서 음식도 먹고, 승언의 선물도 사고 싶었다.
“네, 형! 정말 기대돼요.”
“그래. 형도 서하가 기뻐할 생각에 정말 기대돼.”
서하와 승언은 소파에 앉아 뉴스를 기다렸고 자정이 되자 앵커가 첫 소식으로 오메가의 날을 언급하며 길거리를 송출하였다. 모두가 평범하게 다니고 있었고 기자는 섭외해 놓은 오메가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안녕하세요. 오메가의 날인데 기분이 어떠세요?]
[오늘 하루는 마음대로 다닐 생각에 행복해요.]
[네,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오메가의 날로 오메가에게 상해를 입히면 벌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징역을 선고받습니다. 이 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환하게 웃는 오메가를 비추다가 다음 소식으로 넘어갔다. 서하는 TV를 끄고 침대에 누워 일정을 정리했다. 제일 중요한 건 곧 있을 승언의 생일 선물을 구매하는 것이었다.
“오늘 뭐 할 거야? 형한테도 알려 주라.”
“비밀이에요. 일찍 일어나서 바로 나갈 거야.”
궁금해하던 승언이 핸드폰을 쳐다보자 서하는 몸 뒤로 가져가 보지 못하게 했다. 승언이 계속해서 보여 달라고 했으나 서하는 단번에 거절하고 화제를 돌렸다.
“형은 가지고 싶은 거 없어요?”
“음……. 서하 너?”
승언은 웃으면 장난이라고 정정했지만 서하는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승언의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빨개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서하는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한다며 불을 껐고, 둘은 같은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
***
“형, 잘 다녀오세요.”
“출근하기 싫다. 나도 서하랑 같이 돌아다니고 싶은데……. 일이 많아 야근은 확정이고……. 자정이 지나기 전까지 무조건 집에 있어야 해. 알았지?”
승언이 나가려고 하다가도 몸을 돌려 계속해서 주의해야 할 점을 설명했다. 센서 등이 꺼지고 켜지기 몇 번 반복되니 착실히 대답하던 서하도 지쳐 승언을 현관문 밖으로 밀었다.
“알았다니까요. 늦기 전에 출근이나 하세요. 빨리 돌아올 테니까!”
“너무하다, 서하야. 형이 걱정하는데……. 초커 빼지 말고 나중에 보자.”
현관문이 닫힐 때까지 손을 흔들던 서하는 ‘나중에’라는 말에 의문을 품었다. 이따가가 아닌 나중이라고 한 이유에 대해 생각을 하다가 국어교육과 때 버릇이 나온 거라고 무마했다. 서하는 드레스룸에 들어가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신촌에 온 서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 년 만에 오는 신촌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왔을 때보다 많이 달라져 있었다. 번화가에 왔음에도 알몸의 오메가나, 오메가를 추행을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자유를 실감한 서하는 일단 배라도 채우자 싶어 라멘집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한 분이신가요?”
“네…….”
종업원이 친절하게 안내해 줬고 서하는 자리에 앉아 주문하였다. 잠시 뒤 라면이 나왔고 서하는 편안하게 밥을 먹고 계산을 했다.
“다음에 또 오세요.”
가게에서 흔히 하는 인사말이지만 떨떠름한 서하는 대답을 하지 않고 가게에서 벗어나 디저트 가게로 들어갔다. 케이크나 단것에 사족을 못 썼지만, 기숙사에서 살고 하준의 집에서 사느라 케이크를 먹을 기회가 없었다.
“쇼콜라랑 몽블랑이랑 인절미 마카롱이랑 말차 마카롱 주세요.”
“네, 또 필요한 거 없으세요?”
“음……. 초콜릿 음료수도 주세요. 휘핑크림도 잔뜩 올려서요.”
결제하고 디저트와 음료를 받은 서하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사진을 찍었다. 예쁘게 찍힌 사진을 승언에게 보내니 맛있어 보인다며 답장이 왔다.
「대리 만족이라도 하게 먹는 모습 사진으로 보내 줘ㅠㅠ」
「네? 먹는 모습이요? 그건 좀…….」
승언의 재촉에 서하는 마카롱 하나를 들고 입에 넣는 시늉을 하며 사진으로 찍었다. 주위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져 부끄러워진 서하는 고개를 숙이고 승언에게 사진을 보냈다.
「너무 귀엽다. 바로 저장했어. 재밌게 놀고 일찍 들어와~.」
「형은 열심히 일해요. 나는 열심히 놀게.」
일하라고 보내긴 했지만 승언과 조금 더 카톡을 하고 싶었다. 자신의 바람이 통했는지 승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주고받을 수 있었다. 맛있는 디저트와 좋아하는 사람의 연락. 모든 게 행복했다.
승언이 일하러 갔을 무렵 서하는 모든 디저트를 말끔하게 비웠다. 종업원이 놀란 눈치였으나 서하는 만족스러워하며 가게를 나와 백화점 앞에 멈췄다. 오메가 혼자서는 출입을 금하는 공간이지만 오늘은 당당히 들어갈 수 있었다.
하준과 몇 번 오기는 했으나 항상 영업이 끝나고 와서 사람이 많은 백화점은 오랜만이었다. 서하는 층을 하나씩 올라가며 승언의 생일 선물을 고민하였다. 웬만한 건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무엇을 줘야 마음에 들어 할지 몰라 맴돌다가 은색에 넥타이핀을 발견했다.
“혹시 찾으시는 게 있을까요?”
“아……. 혹시 저 넥타이핀 볼 수 있을까요?”
가운데 푸른색 보석이 박힌 넥타이핀이 깨끗하고 청량한 승언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승언이 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왕이면 직접 끼워 주고 싶었다. 쇼케이스 위에 손을 올린 서하를 보고 직원이 선물할 용도냐며 접대를 하였다.
“네……. 포장해 줄 수 있나요?”
“그럼요. 근데 각인은 안 하시나요? 일주일 뒤쯤 찾을 수 있어요.”
“아……. 오늘만 가능해서요.”
서하가 말을 어물거리자 직원이 오메가임을 눈치채고 넥타이핀을 포장하였다. 넥타이핀을 선물하는 의미에 대해 아냐 물었고 서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니 웃으면서 설명해 주었다.
“당신을 가지고 싶다는 의미예요. 받으시는 분은 좋겠어요. 오메가의 날에 선물 사러 나오는 오메가를 둬서.”
“…….”
결국 오메가로 마무리되는 이야기에 서하는 기분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직원의 말을 침묵으로 일관했다. 계산을 마치고 백화점을 빠져나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갔다. 문이 닫히려는 엘리베이터를 잡기 위해 뛴 서하는 당황하여 발을 멈췄다.
“어……?”
이 시간에 이곳에 있을 수 없는, 아니 있으면 안 되는 인물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었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보며 서하는 연신 버튼을 눌러 옆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빠른 걸음으로 로비를 벗어났다.
***
승언은 출근해 자리에 앉았다. 초커에 달린 GPS를 앱으로 확인하니 신촌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젯밤에 위치를 안 알려 주기에 서운했지만 이렇게라도 알아 다행이었다.
“서하야……. 헤어지는 건 슬프지만 나중에 형이 위로해 주러 갈게.”
앱을 종류하고 일에 몰두하고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돌아왔다. 핸드폰에 알림이 울려 확인하니 채팅방이 디저트로 가득 찼다. 기껏 나와서 한 일이 디저트 정복이라니, 서하다웠다.
승언은 서하에게 먹는 사진을 달라고 하였고 거절하는 서하를 계속해서 졸라 결국 사진을 받아 냈다. 마카롱을 넣고 있는 입이 하루 뒤에는 무엇을 넣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귀여워 푸스스 웃었다.
“검사님, 좋은 일 있으세요?”
“아……. 귀여운 걸 봐서요.”
적당히 대꾸해 주며 승언은 서하를 다시 만날 때까지 버티고자 사진을 저장했다. 우리 불쌍한 서하가 부디 너무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성질 나쁜 알파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박승언입니다.”
[입 닥치고, 윤서하 위치나 말해.]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내는 하준에 승언이 서하는 다정한 성격을 좋아한다며 하준의 성질을 긁다가 웃음기를 뺀 다음 말했다.
“지금 위치로는 신촌이네요. 여기까지만 알려 주겠습니다. 우리 서하 오늘 기대 많이 했으니까, 그 면상 너무 빨리 내밀지 말고요.”
제안을 한 건 자신이었으나 최하준의 성미를 고려하니 평탄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제가 보낸 서류에 사인하셨으니 동의한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끊기 전에 서하가 마카롱 먹는 사진 있는데 보여 드릴까요?”
[괴상한 성벽을 가지고 있으면 부끄러운지 알아야지.]
끊긴 전화에 승언은 묘미를 모른다며 혼잣말로 하준을 타박했다. 애초에 알파가 오메가에게 갖는 감정은 전부 괴상하다. 이 말 같지도 않은 오메가의 날만 봐도 그랬다. 전날까지만 해도 희롱하다가 손바닥 뒤집듯 오메가를 대우해 주고 있다.
***
“사훈 형, 와 주셔서 감사해요. 갑자기 불안해져서…….”
“아니야. 어디 들어갈래?”
백화점에서 벗어났음에도 진정이 되지 않아 사훈에게 전화를 하니 흔쾌히 나와 줬다. 2층 카페에 들어간 두 사람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웃기지 않냐? 어제까지만 해도 오메가만 보이면 때리고, 괴롭히던 새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
“그러게요……. 그래도 그 덕분에 제가 나올 수 있잖아요. 오늘 아니었으면 홀로 나올 생각도 못 했을 거예요.”
달콤한 음료수를 시켰지만 씁쓸하게 느껴져 음료수를 밀어 놓고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잔잔한 음악과 조곤조곤한 사훈의 말을 들으니 서서히 진정되기 시작해 음료수를 마셨다.
“그러고 보니 형은 오늘 출근 안 해요?”
“아……. 임신해서 일찍 휴직계 냈어. 사립 학교라 바로 처리해 주더라.”
놀라 음료수를 삼키지도 못하고 그대로 뱉어 냈다. 서하는 테이블에 뿌려진 음료수를 황급히 닦아 내며 사훈에게 재차 묻자 사훈이 살포시 웃으며 다시 말해 주었다.
“어……. 임신. 와, 유지호……. 미친놈…….”
실없이 웃기만 하던 놈이 사훈을 임신시켰다는 말에 서하는 사훈이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욕을 내뱉었다. 사훈은 빨대로 음료수를 휘저으며 미소를 지었고 서하는 떨떠름하게 축하했다.
“결혼식 같은 건…… 하나요……?”
“아, 곧 하기로 했어. 제일 먼저 청첩장 줄 테니까 받아 줘야 해. 집안 어른이랑 베타들만 초대하기로 해서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서하는 친구와 선배가 결혼식을 한다는 말에 놀람을 감추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알파와 오메가의 결혼식은 봐 본 적이 없어 기대가 됐다.
“근데 왜 갑자기 불러낸 거야? 어제는 거절했잖아.”
“사실은…… 목줄 채운 놈이랑 비슷한 사람을 엘리베이터에서 봐서 놀랐어요. 근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그 새끼가 여기 있을 리는 없고……. 잘못 봤나 봐요.”
담담하게 말했지만 테이블 위에 있는 손이 떨려 왔고, 사훈은 그런 서하의 손을 잡아 주었다. 사훈을 질투하기만 했는데 사훈은 항상 자신을 위해 줬다. 울컥한 사훈은 서하에게 사과했다.
갑자기 토해 낸 서하의 진심에 사훈은 당황한 듯하였으나 이내 손을 토닥이며 괜찮다고 하였다.
띠리링-.
사훈의 핸드폰에 전화가 왔으나 화면을 힐끔 보고 받지 않았다. 서하가 받아도 된다고 하자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은 사훈은 서하와 카페에 있다고 하였다.
“어. 서하랑 놀다가 들어가려고. 데리러 온다고? 그럴 필요 없어. 아……. 네 마음대로 해라, 그냥.”
지호와 한참을 말씨름하다가 결국 사훈이 백기를 들고 전화를 끊었다. 서하는 사훈을 구경하다가 소파에 올려 둔 쇼핑백을 보았다. 일주일 뒤에 승언의 생일인데 빨리 돌아가 쇼핑백을 숨겨야 했다.
“무슨 생각하기에 그렇게 실실 웃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박승언인가?”
사훈이 승언의 이름을 꺼내자 서하는 당황하여 아니라고 하였다. 눈에 띄게 놀라는 서하에 사훈의 추궁이 시작되었고 서하는 결국 사실대로 말하였다.
“승언 형이 좋아요……. 다정하고, 착하고, 오메가인데 고등학교 때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해 주고…….”
“고백할 거야?”
“아뇨! 승언 형은 집안에서 좋은 오메가랑 연결해 주겠죠……. 저 같은 게 무슨.”
쇼핑백을 어루만지며 서하가 말하자 사훈은 음료수를 입에 대며 후회하지 말고 말이라도 해 보라고 하였다.
사훈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지호의 차가 보였다. 트레이를 정리하고 1층으로 내려가니 차에서 내린 지호가 사훈에게 다가갔다.
“데리러 왔어요, 형. 윤서하, 안녕.”
“찬밥은 이만 사라지 마.”
데려다주겠다는 지호와 사훈을 거절하며 서하는 지하철역으로 걸었다. 오후 10시 20분, 지금 출발하면 여유롭게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을 느끼며 걷는데 어느 순간부터 인파가 많아졌고 지하철을 타는 사람이 많을까 봐 서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아!”
“죄송합니다, 윤서하 님.”
인파에 휩쓸려 행인과 어깨에 부딪힌 서하가 아픔에 소리를 내니, 행인이 서하의 이름을 부르며 사과를 하고 지나갔다. 두려운 마음에 행인을 붙잡고 싶었으나 인파에 뒤섞여 금방 사라졌다.
‘뭐야……. 왜…… 내 이름을 아는 거지?’
서하는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택시를 잡고자 길가에 섰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이나 어째서인지 차선에 택시는 다니지 않고 검정색 승용차만 가득했다. 모든 것이 이상하게 느껴져 서하는 앱으로 택시를 불렀다.
나무 아래에서 택시를 기다리는데 계속해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지나가는 행인뿐이었다. 빨리 택시가 오길 바라며 쭈그려 앉아 기다리다가 정차된 택시를 보고 몸을 튕기듯 앞으로 나아가 문을 열었다.
“죄송한데 제가 정말 바빠서요. 양보 좀 부탁드릴게요, 윤서하 님.”
“당신 뭐야…….”
어떤 여자가 서하를 밀어내고 택시에 탑승했다. 택시 기사가 예약한 사람이 아니면 탈 수 없다고 했으나 많은 현금을 내미는 여자에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출발했다.
“승언 형……. 형한테.”
급격하게 몰려오는 공포감에 서하는 최근 통화 내역으로 가 승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만 들리다가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가는 전화에 황급히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고 서하는 지하철역을 향해 달렸다.
플랫폼까지 온 서하는 인영을 보며 실성한 듯 웃었다. 아까 사훈과 함께 떠나지 않은 자신에게 욕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서하 씨. 엄청 뛰었나 봐요. 땀 좀 봐.”
“왜……. 아니, 당신이 왜 여기 있어. 다 너네 짓거리야?”
로운이 손수건을 꺼내며 서하에게 다가갔고 서하는 뒷걸음치며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최하준은 없는 것 같았다. 서하는 로운이 플랫폼을 막아서고 있어 출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사님이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자정이 될 때까지 안 잡히면 더 쫓지 않겠다고 합니다. 만약 잡히면 서하 씨가 잘 알겠죠?”
“미친……. 미친 새끼들…….”
로운이 10분 뒤에 출발하겠다고 하며 타이머를 맞췄다. 서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도망치는 것밖에 없어 출구를 향해 뛰었다. 밖에 나가 도움을 청해야 했다.
계단을 올라가다가 발을 삐끗했으나 잡히면 안 된다는 생각에 꾹 참고 뛰어 올라갔다. 기분 나쁜 고통이 머리에까지 울려 퍼지고 욱신거림이 심해졌다. 지하철 밖으로 나오니 숨길 생각도 없는지 최하준이 풀어놓은 사람들이 대기해 있었다.
“비켜.”
“네. 즐거운 숨바꼭질이 되길 바랍니다.”
무리에서 상급자인 듯한 인물이 나와 말을 하며 대열을 물렸다. 서하는 말을 번복하지 않을까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번화가 한복판에 왔으나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었고 서하는 핸드폰을 꺼내 승언에게 전화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승언은 전화를 받지 않아 서하는 손을 떨면서 승언에게 하준에게 쫓기고 있다며 카톡을 보낸 후 골목길에 숨어 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발……. 제발…….”
[왜…… 전화…….]
뚝.
“까꿍! 서하 씨. 왜 멈춰 있어요? 이렇게 빨리 잡히면 억울할 텐데.”
“…….”
로운이 뒤에서 어깨를 붙잡아 놀란 서하는 휴대폰을 떨어뜨렸고 액정이 나가면서 전화가 끊겼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뒤를 돈 서하는 생글생글 웃고 있는 로운과 눈이 마주쳤다.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서서히 내려 핸드폰을 주웠다.
“서하 씨, 별로 하고 싶은 마음 없는 거 같은데 그냥 잡혀 주실래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까지 강제 야근이어서 슬프네요.”
“미친 거 아니야?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음……. 순진하시네요. 지키는 건 보통 알파랑 베타지, 최하준 이사님께서 겨우 이 정도로?”
서하는 뒤를 흘깃거리며 뒷걸음질 쳤으나, 로운이 큰 보폭으로 거리를 좁혔다. 핸드폰이 멀쩡하기를 빌며 뒷짐을 지고 아무에게나 연락이 가길 바라며 액정을 눌렀다.
툭.
로운만 신경 쓰느라 뒤에 있는 행인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부딪혔다. 양복을 입고 있는 인물은 로운을 보고 고개를 숙이며 서하의 손에 있는 핸드폰을 빼앗았다.
“어……. 이건 반칙인데. 서하 씨, 전화하는 게 어디 있어요.”
“…….”
로운이 룰을 어겼다며 서하를 타박했다.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아 서하는 입술을 짓이겼다. 빼앗긴 핸드폰을 노려보고 있던 중 통화가 연결되었고, 서하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살려 주세요! 여기 신촌인데 협박당하고 있어요!”
“미친……. 빨리 전화 끊어요!”
로운이 서하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통화를 끊으라고 하였다. 서하는 입이 막힌 상황에서도 소리를 질렀고, 억눌린 소리이기는 하나 연락을 받은 대상이 눈치를 챘는지 중얼거렸다.
“으으읍! 읍!”
“뭐 하고 있어! 끊으라고!”
서하의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남자는 전화를 끊지 않은 채 액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로운을 향해 들어 보았다.
「최하준 이사님」
“하…….”
“어떡해, 서하 씨.”
신의 존재는 믿지 않았으나 서하는 신을 저주하고자 했다. 수많은 연락처에서 걸린 전화가 하필이면 최하준이었다. 로운은 기가 차다는 듯 서하의 입을 막은 손을 뗀 채 웃으며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네, 이사님. 지금 정신이 나간 것 같은데 데려갈까요?”
로운이 서하를 흘끔흘끔 보며 하준과 통화를 하더니 서하의 귀에 가져다 댔다.
[윤서하, 지금이라도 얌전히 잡히면 도망친 건 용서해 주지.]
“아……. 그게…….”
로운은 드디어 퇴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몇 달간 잘도 도망치더니 이렇게 쉽게 잡혀 허무하기는 했으나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서하가 희생하는 게 맞았다.
[그래, 윤서하. 끝까지 말해야지?]
“좆 까.”
“…….”
서하는 로운의 팔을 쳐 내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갑작스러운 서하의 행보에 당황한 로운은 완전히 깨진 핸드폰을 보았다.
“윤서하 씨……?”
“뭐 어쩌라고. 너도 좆 까.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어안이 벙벙해진 로운은 일단 자신의 핸드폰에 걸려오는 하준의 전화를 받으며 서하의 뒤에 있는 직원에게 감시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아뇨……. 그게……. 근래 무슨 큰일이 있던 게 아닐까요……?”
서하는 로운이 전화를 받는 사이에 몸을 숙여 핸드폰을 주웠다. 로운과 남자의 시선이 따라붙었으나 전원조차 들어오지 않은 핸드폰이라 안심했는지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아……. 바꾸라고요?”
로운이 핸드폰을 건네주며 하준의 전화라는 말과 소중히 다뤄 달라고 하였다.
[방금 뭐라고 지껄였어, 윤서하.]
“네 좆이나 까라고. 길어서 잘 보이겠네.”
“크흡.”
난데없이 상사의 성기 길이에 대해 안 로운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동안 납작 엎드려 순한 양처럼 굴던 윤서하는 어디 있는지 비속어를 남발하고 있었으며 마지막은 자신의 핸드폰을 바닥에 내던졌다.
“제 핸드폰…… 아직 약정…….”
“어쩌라고요. 다시 줍든가.”
술이라도 마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막 나가는 서하에 로운은 침을 삼키며 진정했다. 보지 않아도 하준은 날뛰고 있을 것이며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윤서하를 잡아 넘겨야 했다.
“자……. 서하 씨, 일로 오세요. 안락한 집으로 돌아갑시다.”
“안락……? 안락 뜻 모르냐? 그러면 네 후장에 딜도 꽂고 놀든가.”
집 나간 반려동물을 회유하듯 팔을 벌린 로운은 서하의 상스러운 말을 듣고 팔을 거두었다. 회유책이 안 된다면 강경책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로운은 서하에게 다가갔다.
“가만히 있어요. 금방 끝날 거니까.”
“…….”
어디 한번 해보라는 눈빛으로 서하가 쳐다봐 로운은 도리어 서하가 무슨 짓을 할까 봐 섬뜩해졌다. 오메가에게 겁을 먹은 알파라니, 비웃음을 살 만한 일이었으나 지금의 윤서하는 웬만한 알파와 비등할 정도였다.
“뭐 온다며. 와 봐, 오라고!”
“서하 씨, 혹시 미쳤어요……?”
로운이 걸음을 멈추자 서하가 도발하기 시작했고, 로운은 술이 아니라 잠깐 사이에 약이라도 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오메가의 날을 믿고 발악한다기에는 너무 무모했기에 최후의 객기라 생각하며 서하에게 손을 뻗었다.
퍽.
“쓰읍…….”
서하는 로운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고 한 뼘 거리로 다가온 로운의 눈가를 핸드폰으로 내리찍었다. 깨진 액정의 파편이 얼굴을 찢고 지나가 로운은 눈가를 손으로 짚으며 휘청거렸다. 그러자 뒤에 있던 남자가 서하를 지나쳐 로운을 부축했다.
서하는 생각보다 많이 흐르는 피에 순간 죄책감을 느꼈지만, 다시 달렸다. 길가는 하준의 사람으로 깔려 있으니 깊이 들어가 일반인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오후 11시, 대부분 상가는 문을 닫았지만 술집은 닫을 시간이 아니었기에 서하는 기억을 되뇌어 움직였다.
***
“우리 서하, 바쁘게도 움직이네.”
“…….”
승언은 하준의 서재에서 핸드폰을 보며 말했다. 서하의 목소리가 들린 직후 최하준의 표정이 급격하게 나빠졌고, 승언은 선을 넘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지금은 참기로 했다.
“어디 있어, 윤서하.”
“이 아저씨가 이제 반칙도 하네. 전 서하의 좋은 형이라고요.”
앱을 종료하여 하준이 보지 못하게 한 승언은 보고 싶으면 손가락이라도 잘라 가라고 하였다. 하준이 하지 못할 것 같냐 위협을 가하자 두 사람의 페로몬이 날뛰며 기 싸움을 하였다.
“안 알려 줄 거면 내 집에서 나가.”
결국 꼬리를 내린 하준에 승언은 흥미를 잃었다며 서재에서 벗어나 1층으로 내려왔다. 정웅이 배웅을 위해 나왔고 사람 좋게 인사한 승언은 집 밖으로 나왔다.
“오후 11시 30분, 잘 도망치고 있을까나.”
승언은 집으로 돌아갈까 고민을 하다가 본가에 들리기로 했다. 본가에 두고 온 고등학생 서하의 사진을 가지고 와 다시 만날 때까지 추억을 회상하며 착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
“어서 오세요. 어머, 괜찮으세요?”
“경찰…… 경, 아니…… 도와, 주세요.”
골목길 사이사이로 도망친 서하는 영업 중인 가게에 무작정 들어갔다. 손님들은 숨을 헐떡이며 쓰러지는 서하를 보자 소리를 질렀다. 포스 앞에 서 있던 사장이 구급차를 부르겠다는 말에 서하는 고개를 저으며 잠시만 숨겨 달라고 하였다.
“일단 이쪽으로 오세요.”
“절대…… 누가 와도 말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요.”
서하는 하준이 공권력에도 손을 뻗치고 있을까 두려워 경찰과 구급차를 거절했다. 사장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서하를 보며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그럼 죄송합니다만…… 부탁드릴게요.”
“일단 옷부터 갈아입는 게 어떨까. 손도 다친 거 같은데.”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에 생채기가 나 있었고 바닥을 구른 옷도 더러워져 있었다. 서하는 사장이 가져다준 여분의 옷으로 갈아입고 혹여나 로운이 오지 않았을까 밖을 흘끔거렸다.
“어서 오세요, 손님, 잠시만요!”
임시방편으로 반창고를 붙인 로운과 양복 차림의 사람들이 가게에 들어와 뒤지기 시작했다. 손님들이 불만을 표출하자 돈으로 잠재우며 서하의 행방을 물었다.
“이러시면 안 돼요, 나가 주세요.”
“혹시 오메가 한 명 오지 않았습니까?”
사장에게 대충 언질을 들은 종업원은 로운이 보여 준 사진을 보고 휴게실에 숨어 있는 서하를 떠올리며 시계를 쳐다보았다. 오후 11시 40분 아직까지 오메가의 날이다. 손님들이 다행히 서하의 존재를 발설하지 않았지만, 자정이 넘으면 그들은 서하에 대해 말할 것이다.
“아뇨. 오늘 오메가는 온 적도 없고 영업 방해이니 그만 나가 주세요.”
“그럴 리가 없는데요. 오메가 페로몬이 맡아지거든.”
로운이 종업원을 밀어내며 휴게실로 들어갔다. 파우더 향이 가득한 휴게실에 로운은 입꼬리를 올리며 몸을 숨길 만한 캐비닛을 보았다.
“서하 씨, 캐비닛 안에 있으면 답답해요. 이만 나가죠.”
드디어 끝난 숨바꼭질에 로운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캐비닛을 열었다.
“하……. 빡치게 하네.”
발칙한 오메가는 없었고, 방금까지 서하가 입고 있던 옷만이 캐비닛 속에서 파우더 향을 내뿜고 있었다.
로운이 가게를 수색하자 서하는 패닉이 왔고 우왕좌왕했다. 가게를 벗어나야 했으나 로운과 양복들을 제치고 달아날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캐비닛에 숨으면 모르지 않을까……?’
평균 신장보다 크게 만들어진 캐비닛을 보며 서하는 희망을 품고 몸을 욱여넣었다. 캐비닛에 들어가니 밖이 보이지 않아 상황 파악이 어려웠으나, 자신을 도와준 종업원이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다. 보이지 않으면 두려움이 사라질까 서하는 눈을 감고 로운이 자신을 지나치길 바랐다.
끼익.
캐비닛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빛이 들어와 숨을 참으며 서하는 조심스럽게 눈을 뜨니 로운이 아닌 사장이 있었다. 몸에 힘이 풀리려고 하는데 사장이 홀을 바라보며 정신 차리라고 하였다.
“뭐 하고 있어. 빨리 나와!”
“네……? 네!”
사장이 서하의 손목을 붙잡고 휴게실과 이어져 있는 뒷문을 열고 차에 태웠다. 얼떨결에 뒷좌석에 실린 서하는 비릿한 냄새에 숨을 참으며 중심을 잡고자 시트를 디뎠다.
“이게…… 무슨…….”
물컹하게 만져지는 물체를 잡고 확인했으나 불빛 한 점 없는 차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언뜻 사람의 피부 같은 촉감과 손을 타고 흐르는 끈적한 액체에 서하는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사장을 바라보았다.
“내…… 내려 주세요.”
“뭘 내려, 지금 나가면 잡혀가기밖에 더해? 조금만 그러고 있어.”
모든 좌석을 잠근 사장은 차에 시동을 걸고 서서히 속도를 올려 가게를 벗어났으나 이내 로운의 차에 막혔다.
똑똑.
“죄송합니다. 저희가 사람을 찾고 있는데 문 좀 열어 주시겠어요?”
사장이 서하를 향해 신문지를 던지고 창문을 조금 내리며 로운에게 용건을 물어보았다.
“운전 실력에 문제가 있으신 거 같은데 비키시죠. 길 막지 말고.”
“잠깐 뒷좌석 좀 볼 수 있을까요?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길을 막은 것에 대한 보상금도 함께 드리고요.”
로운은 시선을 살짝 돌려 조수석을 확인하고 남자에게 보상을 제시하며 협조를 구했다. 가게 안에 윤서하가 없으니 남은 건 가게에서 빠져나가는 사람뿐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남자는 운전석에서 내려 뒷좌석을 열어 주었고 로운은 돈 앞에 장사 없다라고 생각하며 몸을 숙여 뒷좌석을 보았다.
“이건…….”
“고기입니다. 제가 여기 사장인데 바로 잡아서 해체하려고 차로 싣고 오죠. 뭐 문제 있습니까?”
뒷좌석을 가득 채운 고기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고 로운은 서하가 아님에 실망하며 이를 갈았다.
“돈은 필요 없으니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고기가 상할 수도 있어서요.”
“그러시죠.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로운은 미련 없이 사장에게 사과를 하고 뒤를 돌았다. 그러다 고기를 어째서 차에서 내리지 않을까 의문이 생겨 사장을 붙잡았다.
“상한다고 말씀하신 것치고는 가게에 두지 않으시네요. 내리는 걸 도와드릴까요?”
“여기만 가게가 있는 게 아니어서요. 다른 가게에 줄 물건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지만 무언가 미심쩍어 로운은 손을 뻗어 뒷좌석을 만지작거렸다. 생고기의 물컹한 촉감에 기분이 좋지는 않았으나 윤서하가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신문지 아래도 전부 고기입니까?”
“그렇죠. 피가 많이 흘러서 상할까 봐 신문지라도 깔아 둔 건데 열어 보셔도 됩니다.”
로운이 신문지를 잡으니 사장의 말대로 손에 피가 한가득 묻었다. 끈적하게 떨어지는 피에 인상을 찌푸린 로운은 차에서 몸을 돌렸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혈 향에 후각이 마비된 것 같은 로운은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유일한 단서인 파우더 향이 맡아지지 않아 예민해졌고 사장에게 재차 사과한 뒤 차를 타고 떠났다.
사장은 백미러로 완전히 떠났음을 확인하고 차를 출발했다.
“이제 나와도 될 것 같은데.”
사장의 말에 서하는 조심스레 신문지를 치우며 일어섰다. 로운이 신문지를 치우면 어쩌나 싶어 떨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이거 고기였네요…….”
“그럼 뭔 줄 알았길래 그렇게 떨어.”
차를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서하는 사장이 시체를 차에 실어 놓은 줄 알았다. 오메가의 날이 끝나면 자신도 같은 처지가 될까 봐 두려웠는데 생고기여서 부끄러움이 밀려 올라왔다.
“갔으니 망정이지. 신문지 들췄으면…….”
“그 인간 깔끔한 거 좋아해요. 결벽증 환자같이.”
룸미러에 보이는 서하는 몸 곳곳에 피가 묻어 있었다. 젖지 않은 신문지로 닦으려고 하는 거 같았으나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앞으로 나와도 되지 않을까?”
“그렇네요. 감사합니다.”
엉거주춤 뒷자리에서 앞으로 넘어온 서하는 사장에게 휴지를 받아 얼굴을 닦고 몸을 돌려 뒤를 쳐다보았다. 다행히 로운이 쫓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해?”
승언의 집 주소를 부르며 서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오후 11시 57분, 사장의 태도가 언제 돌변할지 몰라 모든 신경을 주시하는데 날이 바뀌었다. 이제 자신을 보호해 줄 이유는 전혀 없었으나 사장은 묵묵히 운전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메가를 혐오하는 사람이 아닌지 사장은 서하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였다. 서하가 계속해서 흘끔흘끔 쳐다보자 사장은 같은 인간이기에 도와주고 싶다며 간략하게 말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마우면 나중에 가게에 와서 매상이나 올려 줘.”
사장은 서하를 내려 주고 떠났다. 집에 들어온 서하는 정신없던 와중에도 주머니에 넥타이핀을 챙긴 게 용하다고 생각하며 소파에 몸을 눕혔다.
“이제 다 끝났어……. 진짜…….”
방전된 서하는 잠들고자 하였으나 문득 카톡을 본 승언이 걱정할까 싶어 몸을 일으켰다. 핸드폰이 망가진 상황에서 연락할 방법을 고민했고 노트북으로 카톡을 보내기로 하였다.
작은방은 들어가지 말라고 했으니 서재의 노트북을 이용하고자 서재로 들어갔다. 불이 꺼진 서재는 으스스한 분위기만 흘러 서하는 더듬더듬 손을 움직이며 전원을 눌렀다.
“늦게까지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나 보군.”
“너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승언이 앉아서 업무를 보던 의자에 하준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하준은 한결 날카로워 보여 절로 위축되었으나 서하는 용기를 내 말했다.
“당장 꺼져! 네가 뭔데 이 집에 들어와 있어.”
“잠깐 풀어놨더니 버릇이 없어졌군.”
하준은 의자에서 일어나 서하에게로 걸어갔다. 감정 표현이 다양해진 윤서하는 새롭기는 했으나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가시를 잔뜩 세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당장 나가. 신고할 거니까.”
“바락바락 대드는 건 어디서 배워 온 거지? 강사훈 그 오메가인가?”
하준이 사훈을 언급하자 서하가 눈에 띄게 동요를 하며 서재에서 벗어났다. 하준은 또다시 자신에게 등을 보이는 서하에 분노가 치솟아 올랐고 뛰지는 않았으나 빠른 걸음으로 서하를 뒤쫓았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지금 뭐 하는 거지? 내려놓고 일로 와.”
서하는 부엌으로 도망가 칼을 꺼내 하준을 협박했다. 요리가 아닌 누군가를 협박하는 용도로 칼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서하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어 하준은 별다른 위협으로 느끼지 않았다.
하준이 점차 다가오자 서하는 두 손으로 칼을 꽉 쥐고 하준에게 휘둘렀다. 칼은 허공을 베었으나 서하는 칼을 휘둘렀다는 자체가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표정으로 다 드러내면서도 칼을 놓지 않았다.
“꺼져……. 꺼지라고!”
“…….”
계속해서 자신을 거부하는 서하에 불쾌한 하준은 서하의 행동을 주시하였다. 칼을 들고 있기는 했으나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패기였다. 서하는 칼로 협박하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부엌을 빠져나가 노트북이 있는 작은방으로 갔다.
“악질이군.”
“…….”
작은방의 문을 연 서하는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온 방이 자신의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고 그중에는 기억도 안 나는 사진도 더러 있었다. 뒤따라온 하준이 승언을 욕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서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거…… 네가 그런 거지?”
“이 방 주인은 박승언일 텐데. 모르고 있던 건가?”
“닥쳐! 네가 그런 거잖아!”
흥분한 서하는 아까와는 달리 하준을 향해 망설임 없이 칼을 휘둘렀으나 하준은 손쉽게 서하의 손목을 잡아 제압했다. 악력이 센 하준이 손목을 누르자 서하는 고통스러워하며 칼을 놓치고 말았다.
칼이 바닥에 떨어졌고 하준은 칼을 발로 차 멀리 치워 버렸다. 손목의 욱신거림도 잊은 채 서하는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이거…… 네가 그런 거잖아……. 승언 형이 아니라 최하준 너잖아…….”
“…….”
“근데 왜 뒤집어씌워……? 너…… 다 너 때문인데……. 다…… 네가.”
서하는 마지막 힘으로 하준을 밀치고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재빨리 행동하지 않았음에도 하준은 막지 않았고 서하는 스스로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아냐……. 승언 형이…… 아니라고.”
자신의 사진으로 도배된 방에 시선을 회피하며 책상으로 간 서하는 노트북의 전원을 눌렀다. 시간이 지나자 전원이 켜졌고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창과 함께 자신의 나체 사진이 배경으로 떴다.
“하, 아니잖아……. 아니라고, 아니야!”
노트북을 덮고 바닥에 던진 서하는 모든 게 하준의 음모라는 결론을 내렸다. 언제나 도와주던 승언이 굳이 자신에게 이럴 필요가 없었다. 언제든지 가질 수 있었고 자신도 바라 왔던 일이었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손잡이가 덜컥거리며 하준이 방 안으로 들어왔고 페로몬을 풀며 서하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의지를 잃은 몸뚱어리가 속수무책으로 따라왔고 조종하기에 안성맞춤이나 하준은 기쁜 마음이 들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서하를 조수석에 태운 하준은 서하에게 안전벨트를 매 주었다. 서하는 자신에게 욕을 했던 패기는 사라졌는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혼잣말을 내뱉고 있었다. 하준이 자해를 하는 서하의 손을 잡아 내리니 서하가 앙칼지게 눈을 치켜떴다.
“역겨우니까 건들지 마. 미친 새끼, 관음증도 가지고 있었나 봐?”
“그건 박승언이 했다고 말했을 텐데.”
페로몬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서하는 멈추지 않고 하준의 신경을 긁는 말만 뱉어 냈다.
“다른 오메가는 성에 안 차나 봐? 나한테 박는 게 그렇게 좋아?”
“더 말하면 입을 찢을 것 같으니 조용히 하도록.”
서하는 멀쩡해 보이나 속으로 흔들리고 있는 하준을 눈치채고 웃어 댔다. 어차피 도망치지 못한다면 하준이 괴롭도록 하고 싶었다.
“있잖아. 내가 여기서 갑자기 문을 열고 뛰어내리면 어떡할 거야?”
“…….”
정면만 바라보고 운전을 하던 하준은 예감이 좋지 않아 서하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서하는 손잡이를 잡으며 하준을 쳐다보았다.
“무서워? 죽어 버릴까 봐? 윽…….”
하준이 차를 급하게 몰아 길가에 세웠고 서하는 반동으로 창문에 어깨를 박았다. 인상을 쓰며 하준에게 욕을 하려던 서하는 하준의 손에 입이 막혔다.
“말했을 텐데, 한 번만 더 말하면 찢어 버리겠다고.”
서하는 위해를 가하겠다는 말에도 눈을 접으며 환하게 웃었다. 오메가가 알파를 주물렀다고 하면 믿어 주는 위인은 없겠지만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자신으로 인해 부모님과 승언, 사훈, 지호에게 피해가 간다면 남은 길은 최하준과 함께 지옥으로 가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