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정착 생활(3권 완결) (6/6)

오메가 3(완결)   

5. 정착 생활

서하는 실외기에 몸을 기대고 멍하니 빈 벽을 바라봤다.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무렵 어두운 골목길에 엔진소리와 함께 강렬한 빛이 들어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빛이 가득히 들어와 팔을 올려 눈을 가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는 발소리는 두 명이었고 무리가 다시 온 건가 싶어 서하는 몸을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

“…….”

무서워서, 살고 싶어서 서하는 눈을 감은 채 무릎을 꿇고 놔주라고 두 손을 모아 빌었다. 유흥거리가 되질 않으니 놓아 달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어깨 위로 무언가가 덮였다. 서하는 눈을 뜨고 어깨에 걸쳐 있는 양복 재킷을 보았다. 무리 중에서 양복을 입고 있던 사람은 없었고 큰 그림자에 아래로 떨어져 있는 고개를 천천히 올렸다.

“최……하준.”

“그래.”

최하준이었다. 왜 여기 있는 거지, 어떻게 알고 온 건지 모르겠지만 최하준이었다. 하준은 멍하니 무릎을 꿇고 있는 서하의 시선에 맞추어 자세를 낮췄다. 박승언을 통해 윤서하의 위치가 파악되자마자 앞뒤 가리지 않고 액셀을 밟았다.

“최하준.”

“그래.”

“최하준.”

“그래.”

“최하준.”

하준의 이름만 불러 대는 서하였고, 하준은 대답을 해 주다가 입을 다물었다. 보닛에 앉아 있던 승언은 둘의 조우에 짧게 웃으며 서하에게로 다가갔다. 각인하지 않은 오메가가 함부로 돌아다니다니 미친 일이었다.

“…….”

“…….”

서하와 승언의 눈이 마주쳤으나 서하는 하준에게 한 것과는 달리 승언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다. 유치하지만 최하준보다 못한 존재가 된 것 같아 언짢아져 승언은 하준에게 청승 떨지 말고 서하를 차에 태우라고 한 뒤 돌아섰다.

정신을 차린 하준은 재킷 사이로 보이는 서하의 몸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오랜 시간 밖에서 떨었는지 핏기 없는 상체와 배와 허벅지에 붙어 있는 정액이 보였다. 재킷을 여미며 서하를 안으려고 하는데 팔이 붙잡혔다.

“너도 나 버릴 거야? 아니다. 내가 오메가라고……. 쓸모없어지면 나 버릴 거야?”

“…….”

“어쩌지……. 이제 아무도 날 원하지 않아. 엄마, 아빠……. 내가 잘못한 건가…….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안 버려. 진정해.”

끊임없이 확인받으려고 하는 서하를 품에 안고 다독이며 하준은 서하를 안아 뒷좌석에 앉혔다. 충격을 많이 받은 듯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준은 한숨을 쉬며 눕히려고 하는데 서하는 끊임없이 무언갈 중얼거리고 있었다. 낮에 칼부림하며 도망쳤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분노했으나 서하를 보자마자 분노는 눈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서하의 자존심상 묻은 정액을 닦으려고 하면 길길이 날뛸 게 분명했기에 하준은 서하에게 손수건을 쥐여 주고 운전석에 올랐다. 차의 시동을 걸고 승언의 차가 빠지길 기다리는데 뒷좌석 문이 열리며 승언이 올라탔다.

“뭐야.”

“뭐긴 뭐예요. 우리 서하가 뒷좌석에서 홀로 떨고 있는데 위로해 주러 왔죠.”

하준이 차를 빼라고 다그쳤으나, 승언은 곧 사람이 와서 빼 갈 거라며 기다리라고 했다. 창문에 얼굴을 기대고 있는 서하에게 다가간 승언은 축 늘어진 서하의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차가운 손을 주무르는데 잠시 관심을 주더니 이내 시선을 거뒀다.

“서하야.”

“…….”

“형 안 볼 거야?”

언제부터 승언이 타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머릿속에서는 깍지를 풀라고 했지만, 몸은 의지를 따라 주지 않았고 무기력해진 서하는 포기한 채 창밖을 내다봤다. 하준이 차를 출발했고 서하는 창밖으로 보이는 동네를 눈에 담았다.

승언은 오랜만에 보는 동네에 덩달아 창밖을 보았다. 같은 학교에 다니고, 가끔은 야자를 땡땡이치고 분식집에 가고 번화가에서 놀기도 했다. 서하가 느낄 심정을 대충은 짐작하며 어깨를 다독이는데 떨림이 느껴졌다.

“아……?”

“흐읍……흑.”

서하의 집이 보였다. 왜 동네로 도망쳤나 했더니 부모님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나 보다. 승언은 서하의 기분을 풀어 주고자 재밌는 이야기를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승언은 꿋꿋이 입을 뗐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오메가랑 알파 왕 이야기 있잖아.”

“…….”

이 지경이 돼서까지 알파, 오메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던 서하는 자는 척을 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승언이 그만둘 줄 알았으나 이야기는 멈출 줄 몰랐다. 학교 다닐 때 진절머리가 나도록 들은 역사서였기에 점점 들리지 않던 찰나 승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뒷이야기가 있는데. 오메가 왕을 찾을 수 있게 하려고 베타로 환생시키는데 저주를 풀고 싶으면 오메가가 알파의 아이를 낳아야 한대.”

“…….”

드디어 올곧이 바라봐 주는 서하에 승언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오메가가 알파의 아이를 낳으면 오메가에서 다시 베타로 돌아간다는 말을 하자 서하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어느 면에서는 독하다가, 이럴 때 보면 순진하기 그지없어 승언은 말을 이어 나갔다.

“이건 우리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이야기야. 어때,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어?”

“……거짓말하지 마.”

“도착했으니 내려.”

차에서 내린 하준은 뒷좌석의 문을 열어 줬다. 찬바람이 차 안으로 들어오면서 우느라 부은 눈가를 스치고 지나갔고 열기를 식혀 줬다. 승언은 차에서 가져온 담요로 서하를 칭칭 동여매고 안아 하준이 서 있는 반대쪽 문으로 나왔다.

“대문이나 여시죠.”

내려놓으라고 했으나 승언이 내려 주지 않았고 서하는 처음 보는 집에 경계심을 보였다. 거실 소파에 내려진 서하는 낯선 풍경에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모든 게 귀찮았고, 모든 걸 잃어 될 대로 되자 싶어 숨만 쉬고 있는데 승언과 하준이 서하를 기준으로 한쪽씩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가운데에 낀 서하는 자리가 불편해 소파 밑으로 내려가고자 했으나, 하준과 승언이 내려가지 못하게 어깨를 붙잡고 손을 잡았다. 나름 배려해서인지 하준과 승언은 페로몬을 풀지 않고 있었지만 서하는 고양이가 쥐를 생각해 준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여긴 어디야?”

“서하야, 씻을래?”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

“씻고 자는 게 좋겠군.”

자신을 도와준 경배의 안위를 물었으나 하준과 승언은 대답을 교묘하게 피하면서 씻으러 가자고 했다. 찝찝하기는 해 욕실로 들어선 서하는 걸쳐진 양복 재킷을 벗었다. 하준과 승언도 들어와서 처음에는 놀랐으나 이내 그러려니 생각했다.

“윤서하. 눈 감아야지.”

“…….”

샴푸가 눈 근처까지 흘러내리고 있는데도 서하는 눈을 감지 않고 멍하니 뜨고 있었다. 하준이 눈을 감으라고 했으나 반응이 없었고, 하준은 서하의 눈을 손으로 덮고 나머지 한 손으로 거품을 헹궈 냈다.

다 큰 성인을 데리고 인형 놀이를 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두 알파의 행동이 역겨워 신물이 넘어왔고 이성이 뿌리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간사한 몸뚱어리는 편안하고 따뜻한 공간에 와 안심이 되었는지 급격하게 피곤이 몰려왔고 눈이 서서히 감겼다.

“서하야, 졸려?”

“…….”

“오늘 많이 피곤했겠다. 자자.”

승언은 비몽사몽 하며 고개가 푹푹 꺼지는 서하에게 목욕 가운을 입혔다. 팔 한쪽 넣는데도 협조해 주지 않았으나 우여곡절 끝에 다 입힌 승언은 매듭까지 매어 주고 서하를 침대 위로 눕혔다. 수마가 상당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소리를 내며 자는 서하를 보며 앉은 승언은 자장가를 불러 주다가 방 밖으로 나왔다.

하준이 소파에 앉아 있었고 승언은 하준을 무시한 채 방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윤서하 말대로 그 경호원은 어떻게 처리했지?”

“뭐 특별한 게 있나요. 잘 지키지 못했으니 해고했죠.”

정확히는 해고하고 알파들에게 던져 줬다. 경배는 끝까지 서하와의 비밀을 지키려고 했고 블랙박스 SD카드도 제거했으나 지급한 핸드폰은 의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승언은 경호원을 신뢰하지 않았기에 GPS와 도청기가 내장된 핸드폰을 일괄 지급 했고 덕분에 서하의 마지막 위치를 알아냈다.

“음……. 해고돼도 바라던 형을 만났으니 행복하지 않을까요? 근데 이 집이 어릴 때 살았던 집이라니 최씨 일가도 대단하네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잠이나 자.”

승언이 방으로 들어갔고 하준은 소파에 기대 곰곰이 생각했다. 윤서하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화가 났다가도, 다시 되돌아오면 안심이 되다가도 다른 곳을 쳐다보면 갈등이 났다. 게다가 버리지 말라는 윤서하의 말이 기쁘기까지 하였다.

“병신 같군.”

하준은 방에 들어가지 않고 소파에 앉아 밤을 지새웠고 아침이 밝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윤서하의 부모는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근데 서하의 반응을 보니 외면당한 모양이었다.

-부모 잃은 오메가가 기댈 수 있는 게 알파밖에 더 있겠느냐.

“노인네가…….”

노인네의 노망난 소리라고 넘긴 게 화근이었다. 부모를 만나게 할 마음은 없었으나 인연을 끊고자 할 의도는 없었다. 자신과 부모처럼 일방적으로 헤어지는 경험을 서하가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생각을 멈추고 방으로 들어간 하준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서하에게 다가갔다. 버리지 말라고 눈물을 머금고 애원했던 눈동자는 사라지고 텅 빈 채 공허하기만 했다.

“안 묶어?”

“뭐?”

“또 도망치면 어떡하려고. 아니다. 이제 돌아갈 곳 없는 거 알고 있구나.”

어제 일이 떠오르자 코가 시큰해지면서 눈물이 맺혔다. 울지 않고 담담히 말하려고 했으나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손등에 떨어졌다. 부모님에게도 버림받고, 유일한 안식처였던 사훈과 지호에게는 승언이 붙어 있어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가족을 지키려고 희생했는데 모두 헛수고였다.

“너도 나 버릴 거야?”

“…….”

위태로워 보이는 서하를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으나,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동안 서하의 주변이 다 떨어져 나가길 기다리고 있었기에 하준은 서하를 바라만 보았고, 울먹이면서 서하가 방을 나간 순간까지도 하준은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방 밖으로 나온 서하는 낯선 집 안 구조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그나마 익숙한 소파에 올라가 다리를 올리고 몸을 웅크렸다. 가구의 연식이 오래돼 보였다.

달칵-.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든 서하는 승언을 보았다. 사훈과 지호에게 거짓을 말한 승언이었지만 복수할 방법이 없어 다시 몸을 웅크렸다. 승언은 소파에 앉아서 근황 이라며 말을 했다.

“형 이야기는 이걸로 끝. 서하는 어제 나가서 뭐 했어?”

“개새끼가.”

승언을 애써 무시하고 있던 서하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고, 승언을 흘겨보며 욕을 했다. 욕을 먹었음에도 실실 웃는 승언에 기가 찬 서하는 몸을 웅크리고 귀를 막았다.

“가만히 있지만 말고 우리, 집 구경하지 않을래?”

“…….”

“움직이면 기분 좋아지니까, 형이랑 가자.”

서하의 팔을 잡고 일으킨 승언은 집 구경을 하자면서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강제로 방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서재까지 온 서하는 책을 읽는다는 핑계로 승언에게서 벗어났다.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하고자 했으나 하준이 들어와 일으켜 세웠다.

“바닥에서 자지 말라고 했을 텐데.”

“무슨 상관이야.”

하준과 승언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과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양가적인 감정이 서로 얽혀져 풀 수 없을 만큼 꼬아지고 있다. 이제는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하준의 행동이 평소와는 달라 더더욱 심란해졌다.

“서하야.”

“…….”

서하는 하준에게서 시선을 떼고 승언을 보았다. 할 일이 없는지 승언이 나른하게 의자에 앉아 이름을 불렀고, 고개를 다시 거두니 여전히 하준이 쳐다보고 있었다. 한 공간에 두 사람과 있으면 피곤했기에 서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갔다.

어린이 동화가 많이 보여 손으로 책을 쓸어내리며 움직이는데 유독 한 책이 손가락에 닿는 질감이 달랐다. 오랜 시간 읽혔는지 가죽의 겉면이 해져 있었고 제목이 적혀 있지 않아 책을 펼쳐 보았다.

알파 왕과 오메가 이야기. 최근 들어 자꾸 듣던 이야기에 머리가 아파 와 덮으려고 했으나 승언이 말했던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베타에서 오메가로 발현한 오메가 왕이 알파의 아이를 낳으면 저주의 굴레가 끊어져 베타로 돌아간다는 구절에 서하는 설마 하는 마음이 생겼다.

“최하준, 이거 무슨 책이야?”

“자세히는 기억 안 나지만……. 할아버지께서 주셨지.”

“그럼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책일 수도 있겠네.”

하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승언은 배를 붙잡고 웃었으며, 서하는 눈을 번뜩였다. 베타에서 오메가로 발현한 게 오메가 왕의 환생을 의미한다면 아이를 낳기만 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바닥에 앉은 서하가 자리를 잡고 책을 읽자 하준은 의자에 앉으라고 권유했다. 책에 집중한 서하가 하준에게 대꾸조차 안 하자 방을 나간 하준은 쿠션과 담요를 가지고 와 등을 받치게 하고 담요를 무릎에 덮어 줬다.

어둠이 깔린 시간이 되었을 때 책을 완독한 서하는 베타로 돌아가기 위해 아이를 낳기로 했다. 아이만 낳는다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하준은 서재에 없었고 승언은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책 다 읽었어?”

“응.”

계속해서 보고 있었는지 의자 방향이 고정되어 있었다. 누구의 아이를 낳으라는 말은 없었다. 하준과 승언 둘 다 역겨운 존재였고 아무나 상관이 없었기에 서하는 가까이 있는 승언에게 다가갔다. 승언을 보며 미소를 짓자 승언도 미소를 지어 줬고 서하는 승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형…… 나 무서워.”

“왜 무서울까.”

“나 최하준이랑 살기 싫어……. 형이랑 둘이서만 살고 싶어.”

승언의 목에 매달려 서하는 어제 겪었던 일을 꺼냈다. 부모의 집에 갔으나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고, 질 나쁜 무리에게 붙잡혀 무서웠는데 구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동정심을 사기 위해 승언의 목에 얼굴을 비비며 말하던 서하는 울먹이며 승언과 눈을 마주쳤다.

“나랑 같이 살자. 응?”

입술을 가르고 잇몸을 훑은 키스가 끝나고 서하는 혀를 빼내고 숨을 골랐다. 헐떡이는 호흡과 빨개진 게 분명한 얼굴을 만지며 서하는 자리를 잡는 척 무릎을 승언의 하반신으로 가져가 살짝 눌렀다. 발기한 성기에 서하는 놀란 척 몸을 물리자 승언이 떨어진다며 허리에 손을 감아 단단히 붙들었다.

“형…….”

무릎에서 내려온 서하는 의자 아래에 앉아 승언의 벨트에 손을 가져갔다. 벨트를 풀려고 하는데 승언이 손을 눌러 행동을 막았고, 당황한 서하가 고개를 들자 승언이 씁쓸한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서하야, 이건 아닌 것 같다.”

“형 힘들잖아……. 여기 이렇게 섰는걸……?”

승언이 고개를 저으며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했고, 다급해진 서하는 승언의 허벅지를 누르며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난처해하는 승언에게 이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고 하니 할 수 없다는 듯이 승언이 의자에 착석했다.

버클을 풀은 서하는 승언의 성기를 꺼내 입에 담았다. 입 안 가득히 성기가 들어와 버거웠고 목에 상처가 벌어지면서 쓰라렸다. 고통 어린 신음을 막고자 더 깊숙이 넣고 혀를 움직여 선단을 핥았다.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걸까.”

“예……뻐……해 줘.”

성기를 빠느라 웅얼거리면서 서하는 예뻐해 달라고 했다. 승언은 서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재롱을 즐기다 고개를 눌러 끝까지 삼키게 했다. 컥컥거리는 서하는 좋은 눈요기였으나 목에 깊게 패인 상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목을 손으로 덮어 가린 승언은 서하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책 냄새로 가득했던 서재에 질척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정액 냄새가 퍼졌다.

서하는 목을 쥔 채 성기를 뱉어 냈다. 쓰라리고 부은 목을 쓰다듬으며 구멍에 정액을 넣기 위해 책상에 팔을 대고 허리를 숙였다.

“박아 줘…… 형.”

“미안한데 서하야. 형은 그다지 섹스에는 관심이 없어.”

승언이 버클을 다시 채우려고 하자 조바심이 난 서하는 넣어 달라고 양손으로 엉덩이를 붙잡고 벌렸다. 수치심이 일었지만, 베타가 될 수 있기만 하다면 상관없었다. 빨리 넣어 달라고 요부처럼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자 승언이 넘어왔는지 콘돔을 찾아오겠다고 했다.

“콘돔…… 싫어.”

“응? 그러다가 임신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형이 나 데리고 나가 줘. 응? 나 여기 싫어.”

임신이라니 바라던 바였으나 내색하지 않으며 승언에게 아양을 부렸고 못 말린다는 듯이 승언이 손가락을 넣어 구멍을 풀었다. 다정하게 움직이는 행동을 견딜 수가 없던 서하는 엉덩이를 흔들며 빨리 박아 달라고 했다.

“그러다가 다쳐. 천천히 풀고 해야지.”

“아냐……. 나 오메가잖아. 하다 보면 으흣……. 나올 거야. 응? 빨리하자.”

구멍을 풀던 승언은 서하의 재촉에 손가락을 빼내고 성기를 꺼냈다. 방금 사정하기는 했으나 서하를 보니 금방 다시 발기가 되었고 성기를 위아래로 쓸어내려 구멍에 가져다 댔다.

엉덩이에 성기가 닿자 움찔거린 서하는 구멍을 벌리고 점점 들어오는 성기에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책상에 배를 댄 채로 승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며 서하는 승언의 비위를 맞췄다. 몸 안 가득히 들어온 성기와 배를 누르는 책상이 겹쳐 무서웠으나, 꾹 참고 교성을 내질렀다.

“더……! 형아, 힉! 더 해 줘.”

“서하야. 어디, 윽, 찔러 줄까?”

격한 움직임에 책상에 무릎이 부딪히는 서하의 허리를 누르고 엉덩이를 뒤로 더 빼내 거리를 벌리고 추삽질을 했다. 어느 곳을 찔러도 자지러지게 반응하는 서하였지만 위로 쳐올릴 때는 책상을 손으로 긁으며 더 강렬하게 반응해 집중적으로 문지르고 짓눌렀다.

“힉……! 형, 승언 형. 너무 커! 찢어져. 찢어, 질 거야.”

“안, 윽, 찢어져.”

평소엔 입에 담지도 않는 말을 내뱉는 서하에게 동한 승언은 간단하게 대답하고 구멍에 박는 거에만 집중했다. 그간 섹스는 흥미가 없다고 여겼는데 대상이 문제였나 보다. 승언은 하준을 제치고 형이라고 부르며 매달리는 서하를 보며 흥분했다. 섹스하는 것도 즐거웠으나 다음에는 장난감으로 잔뜩 괴롭히고 지쳐 박아 달라고 하게 하고 싶었다.

반응을 꾸며 내고 있던 서하는 몸 안에서 더 커지는 성기에 기겁하며 몸을 뒤틀었다. 벗어나야 한다는 적신호가 울려 퍼졌으나 승언이 허리를 누르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생 그대로 반응이 튀어나왔고, 서하는 울고불고하며 커지지 말라고 했다.

“무,서워. 형! 으흑……. 아파! 커지지 마……흐엉!”

“우리 서하는 이걸로도 무서워하면, 노팅하면 어쩌려고 그래.”

노팅을 겪어 보지 못한 서하는 노팅과 지금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팔을 뒤로 뻗어 승언을 말리고자 했다. 그러나 승언은 서하의 팔을 붙잡고 속도를 가했고 한 팔로 지탱하지 못한 서하는 책상에 상반신이 엎어졌다.

들락날락거리는 성기에 내벽이 딸려 나가는 게 아닌가 싶은 정도로 구멍이 벌어졌다. 겁을 먹은 서하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울먹였다. 하준과의 섹스는 폭력적이기는 했으나 위험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으나 지금은 너무 무서웠다.

책상에 짓눌린 유두와 조금씩 마찰되는 알싸한 통증으로 쾌감을 견뎌 내고 있는데 승언이 깊게 찌르면서 등 위로 엎어지며 숨을 골랐다. 정액이 꿀렁이며 내벽으로 타고 들어왔고 목적을 완수했다는 생각에 서하는 왼팔을 책상에 디디며 몸을 일으켰다.

“승언 형. 무겁고 허리 아파…….”

“허리 아프면 안 되지.”

정액이 흘러내리지 않게 구멍에 힘을 주고 있던 서하는 승언이 의자에 앉히자 당황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허리가 아프다고 해서 앉힌 건가 싶어 일어나려는데 승언이 팔걸이에 손을 올리며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형……?”

“예쁘다, 우리 서하.”

힘들어하는 서하를 놔주지 않고 의자에 앉힌 승언은 서하의 왼 다리를 잡고 팔걸이에 걸쳤다. 상황을 파악한 서하의 눈이 커졌으나 승언은 웃으며 오른쪽 다리마저 팔걸이에 걸치게 했다. 구멍이 훤히 보이는 자세와 의자에 구겨진 몸까지 불편하기 짝이 없어 서하는 몸부림을 쳤다.

“형…… 불편해.”

“…….”

정액이 새어 나가는 느낌에 구멍에 힘을 주며 승언에게 비키라고 했는데, 승언은 구멍을 빤히 바라보며 묵묵히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눈이 맛이 가 있어 불길함을 느낀 서하는 허둥거리며 오른쪽 다리를 빼냈다.

“어디 가, 서하야.”

“…….”

서재 안에 스멀스멀 승언의 페로몬이 퍼져 나갔고, 페로몬에 짓눌린 서하는 행동을 멈췄다. 페로몬을 풀어내 시간은 벌 수 있겠으나 괜히 역효과가 나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깔릴 게 분명했다. 서하가 망설이는 사이 승언은 페로몬을 서하에게로 집중적으로 내뿜었다.

“형, 형, 승언 형.”

“응, 형 여기 있어. 겁먹지 마, 서하야.”

몸에 직접적으로 닿는 페로몬에 서하는 승언에게 페로몬을 거둬 달라고 했으나 승언은 서하의 허벅지 안쪽을 쓸어내렸다. 감각이 예민해진 서하는 오스스한 느낌에 다리를 움츠리자 정액이 꿀렁이며 구멍 밖으로 나왔고 승언은 검정색 의자에 떨어지는 새하얀 정액을 보았다.

또다시 발기한 승언의 성기를 보며 서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방금까지 드나들었던 성기의 크기를 두 눈으로 확인한 서하는 이판사판으로 페로몬을 풀어냈다. 승언같이 방향을 정밀하게 조절하지는 못했으나 전력을 다해 페로몬을 풀며 의자를 뒤로 밀고 도망쳤다.

서재 문을 향해 달려가던 서하는 어느새 다가온 승언에게 붙잡혔다. 승언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졌고, 서하는 고개를 뒤로 물리고 시선을 피했다. 서하가 등을 돌려 도망치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승언은 서하를 뒤쫓아 갔고 열리는 문을 손으로 눌러 막았다. 좀 더 서하의 얼굴을 보고 싶었으나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는 서하의 턱을 붙잡아 눈을 보게 했다.

“아까는 형이 좋다며.”

“응. 형 좋지.”

“근데 왜 피해?”

“……나 힘들어.”

말로는 힘들다고 했으나 자신의 페로몬을 누르고 서재를 가득 메운 파우더 향에 승언은 짧게 웃었다. 아직은 생생해 보이는 서하에게 승언의 두 가지 선택지를 줬다.

“밖에 최하준이 다 듣게 여기서 할까 아니면 최하준이 두고 간 담요랑 쿠션이라도 껴안고 할까?”

“…….”

“움직이기 귀찮으니까 여기서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승언이 서하의 턱에서부터 눈가까지 손가락을 쓸어 올리며 동의를 구하듯 묻자 서하는 고개를 저으며 싫다고 했다. 주인을 따라 페로몬도 울렁거렸고 페로몬을 맡은 승언은 점차 이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윤서하!”

“……최, 읍.”

“쉿.”

역시나 서재 밖까지 페로몬이 새어 나갔고 페로몬을 맡은 하준이 문을 두들겼다. 입을 막자 고개를 위로 올리며 방문을 구세주처럼 쳐다보는 서하에 가까스로 잡고 있던 이성을 놓은 승언은 손을 뻗어 방문을 잠갔다.

“문 열어!”

“같이 살기로 했으면 이런 것도 예상했어야죠. 그리고 관음증 욕했으면서 정작 본인이 이렇게 나오면 언행 불일치입니다.”

문고리가 헛 돌아가는 소리와 하준의 고함이 들렸으나 승언은 무시하며 서하의 발목을 잡고 서재 중간으로 끌고 갔다. 어지간히 하기 싫은 듯 서하가 발버둥을 치고 종아리를 찼으나 움직임을 더딜 게 할 뿐 막을 수 없었다.

“형! 잠깐만!”

“……왜 서하야.”

혼탁해진 눈으로 승언이 다정하게 말했으나 서하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서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하에서 승언을 설득했다. 나중에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 지금은 봐 달라고 아양을 부리자 승언이 마뜩잖아했으나 곧 폭발할 것 같은 하준의 페로몬에 서하를 놔줬다.

짤랑거리는 열쇠 소리와 함께 하준이 방 안으로 들어오며 승언의 아래에 깔린 서하를 봤다. 페로몬을 갈무리하지 못해 서하가 괴로워하자 하준은 페로몬을 거둬들이고 박승언에게 뭐 하는 짓이냐고 했다.

“뭐 하긴 뭘 해요. 알파랑 오메가가 한 방 안에서 있는데 더 할 게 있나요?”

“머릿속에 섹스밖에 안 들어찼나 보군. 덮치는 것밖에 하지 못하나?”

승언은 하준에게 대꾸하지 않고 서하를 일으켜 세웠다.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조금씩 흘러나오자 서하는 정액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하려고 서재 밖으로 나가면서 입을 뗐다.

“내가 먼저 하자고 했어.”

“뭐?”

“왜, 너도 나랑 하고 싶어?”

황당하다는 듯한 하준을 뒤로하고 서하는 하준의 방에 들어가 서랍장을 뒤졌다. 예상대로 콘돔과 딜도가 보관되어 있었고, 서하는 작은 딜도를 꺼내 구멍에 넣었다. 정액이 있어 수월하게 딜도가 들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온 하준은 눈앞에 보이는 행각을 믿을 수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풀이 죽어 있더니, 잠깐 외출하고 온 사이에 집 안에는 승언과 서하의 페로몬이 퍼져 있었다. 두려움이 가득한 파우더 향에 하준은 무슨 정신으로 서재의 열쇠를 찾고 방문을 여는지도 몰랐는데 정작 서하는 담담하게 승언과 섹스를 하고 왔다고 했다.

“나 씻을 건데 또 인형 놀이 할 거야?”

“윤서하…….”

“미안한데 박지는 말아 주라.”

말을 마친 서하는 하준의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고 곧 있어 물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서하가 이상했다.

배 속에 승언의 정액을 품고 생활했다. 하준이 중간중간 팔을 붙잡고 인상을 찌푸렸으나, 별말을 하지 않고 놔줬다. 장장 일주일 동안 구멍에 딜도를 넣고 다녔고 서하는 집에 방문한 의사를 반갑게 맞았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과도하게 밝은 서하의 인사를 받은 의사는 어정쩡하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갑작스럽게 집을 바꿔 의아스럽기는 했으나 부자들의 취미라고 생각해 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서하를 침대 위에 눕히고 몇 가지 간단한 검사를 한 의사는 이만 가 보겠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

“네?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임신했는지는 언제부터 알 수 있을까요?”

전혀 언질을 받지 못했던 부분이라 의사는 고개를 위로 올려 하준과 승언을 쳐다봤다. 미미하게 기분이 나빠 보이는 하준과 옆에서 웃음을 참고 있는 승언이 있었다. 알아서 하라는 승언의 손짓에 의사는 최소한 4주는 되어야 정확한 검사를 할 수 있으니 병원에 오라고 했다.

“혼자서는 알 수 없어요?”

“페로몬이 약해지는 거로 아는 방법도 있지만, 정확한 방법은 아닙니다.”

3주간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초조해진 서하는 엄지를 깨물었다. 해방되는 방법을 알았음에도 불안한 마음은 손가락을 물어뜯는 행위로 나타났다. 흉터 없이 부드럽고 매끄러웠던 손가락은 물어뜯고 약에 절여 퉁퉁 부어 있었다.

“하지 마.”

“놔.”

날 선 서하의 페로몬이 하준에게로 뿜어졌으나 하준은 꿋꿋하게 서하의 입에 손가락을 넣어 놓게 했다. 승언은 의사에게서 밴드를 받아 엄지손가락에 붙이며 물어뜯지 말라고 하니 말을 잘 듣는 아이처럼 서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나갔다.

서하가 나간 걸 확인한 하준은 승언의 멱살을 잡았다. 이상 행동을 하게 만든 원인은 승언의 말에서 비롯되었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말을 했어.”

“이거 놓고 말하세요. 그래도 덕분에 기운은 차렸으니 해피엔딩 아닌가요?”

비록 서하의 페로몬에 잠식되어 이성을 잃을 뻔했으나 승언은 부러 하준에게 말하지 않았다. 장난으로 말한 오메가 왕의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는 서하를 보는 게 최근 가장 큰 유희 거리였다. 원래 한 번은 믿지 못하지만 두 번, 세 번 보면 사람은 믿게 된다. 삼인성호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자신의 말은 믿지 않다가 하준이 서적을 할아버지에게 받았다는 말을 듣자마자 덥석 물고 사실로 받아들였다.

“귀엽지 않아요? 오메가 왕의 환생이라고 믿는 게. 그리고 당신도 정정은 안 하는 거 보니까 비밀로 하고 싶은 거 같은데, 왜 나한테만 지랄이지?”

승언이 하준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최근 서하를 대하는 태도가 영 거슬려 이참에 말할 생각이었다. 어깨에 올려진 손을 본 하준은 기가 차 한 번 웃고 응수하듯 쳐다봤다. 두 사람의 페로몬이 공격적으로 서로를 감싸고 공기가 무거워졌다.

쨍그랑-.

부엌에서 식기류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자 하준은 단번에 페로몬을 거두고 방 밖으로 나갔다. 의사와 같이 있었으나 승언은 의사가 없는 양 표정과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알파와의 신경전에서 먼저 거두는 건 진 거와 같았다. 하준도 알고 있음이 분명하나 작은 목소리로 윤서하를 외치며 세기의 사랑처럼 절절매는 꼴이 심기가 불편했다.

“무슨 일이야.”

“서하 님이 갑자기 떠시더니…… 컵을 놓쳤습니다. 바로 치우겠습니다.”

정웅이 허둥지둥 산산조각이 난 컵을 치우고 있었고 서하는 구석에서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물을 마시고자 했는데 몸을 짓누르는 페로몬이 서서히 목을 조여들었고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쳤다. 컵이 깨짐과 동시에 숨통이 트이기 했으나 숨이 답답했다.

“윤서하, 괜…….”

“오지 마!”

하준의 몸에 하준뿐만 아니라 승언의 페로몬까지 묻어 있었고, 하준이 다가올수록 질식감도 더해져 몸서리쳤다.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뒷걸음질 치던 서하는 위험하다는 정웅의 말을 듣지 못하고 고개를 저으며 오지 말라는 말만 반복했다.

“만지지 마!”

“진정해……. 착하지? 진정하자.”

서하를 안아 올린 하준은 발버둥을 치며 내려가려고 하는 서하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진정시켰다. 왼발에서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으나 하준은 고통을 무시하며 서하를 안고 러그 위에 내려놓았다. 잠깐 사이에도 감정이 바뀐 서하는 좀 전의 행동은 보이지 않고 집 안을 구경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앞으로 3주만 지나면 임신 여부를 알 수 있었다. 이왕이면 한 번에 임신이 되길 바랐다.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베타로 돌아갈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서하는 베타로 돌아가고 평범한 일상을 상상하며 배를 어루만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준은 서하를 피했고, 승언은 서하를 다정하게 대해 줬다.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하는 모습은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으나 승언의 페로몬을 맡으면 심신이 안정되어 서하는 승언에게 붙어 있었다.

“서하야, 형 아기 가지고 싶어?”

“응, 형 닮으면 엄청 예쁠 것 같아.”

자신보다는 승언을 닮았으면 좋겠다. 높은 확률로 오메가와 알파로 발현이 될 터인데 오메가의 삶보다는…… 차라리 알파가 나았다. 승언도 알파로 발현될 만한 아이라면 잘 키워 줄 것이다.

“나 물 마시고 올래.”

“형이랑 같이 갈까?”

염병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서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엌으로 나오니 출근을 하지 않은 것인지 머리를 내린 하준이 서 있었는데 흡사 비에 쫄딱 젖은 개새끼같이 쳐다보고 있었다. 저기서 낑낑거리기만 딱인데 울게 할 방법이 없나 고민하던 서하는 승언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승언 형.”

“왜 그래, 서하야.”

“형이랑 섹스하고 싶어. 안에 잔뜩 싸 줘.”

까치발을 서고 승언의 볼에 뽀뽀하고 물러난 서하는 하준의 표정을 살폈다. 됐다. 소리로 표현만 안 할 뿐이지 동요하고 있는 게 보였다. 코미디 영화를 본 것처럼 서하가 웃어 댔고 승언이 바람을 이루어 주겠다며 방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잠깐 나 물 마시고 싶어. 다녀올게.”

부엌으로 들어간 서하는 정수기에 컵을 올려 두고 물이 차오르는 걸 응시했다. 물이 차오를수록 컵에 또렷이 하준의 모습이 비쳤다. 왜 네가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형질, 재력 모든 가지고 있음에도 뭐가 부족해서……. 하필이면 나를 골라서…….

기분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처박힌 서하는 물을 단번에 벌컥벌컥 마시고 정수기에 컵을 내려놓았다. 더 이상 하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흡족한 서하는 하준을 스쳐 지나가 승언에게 안겼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머리가 시키는 대로 서하는 승언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최하준 앞에서 그런 걸까.”

“몰라. 그냥 하고 싶었어. 나 잘래.”

마음이 확 식은 서하는 승언의 침대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 졸리지는 않았으나 몸이 계속해서 축축 처졌고 차라리 잠들고 싶었다. 귀에 들리는 음악 소리가 크게 들리다가 이내 점점 작아졌는데 승언이 허리를 지분거렸다.

“하지 마!”

“아까는 안아 달라며. 갑자기 마음 바뀌면 좀 섭섭한데…….”

배를 손으로 둥글게 쓸어내리며 말하는 승언에 서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지켜보았다. 서서히 배를 압박하는 손을 잡은 서하는 일어나며 하지 말라고 하자 서하의 목에 팔을 두르고 껴안은 승언은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불안해서 그랬어. 미안해, 서하야. 많이 아팠어?”

“아냐, 괜찮아. 나 이제 진짜 잘래.”

한 번 수마가 덮치자 맥도 없이 고개가 이리저리 축 처지고 있었다. 하준의 기분을 나쁘게 하고 싶은 건 마찬가지라 서하의 수작에 동참했지만 이런 식으로 내뺄 줄은 몰랐다. 강제로 할까 했지만 겁을 먹고 쪼르르 하준에게 가 안기는 건 바라지 않았다.

“우리 재밌는 거 할까?”

“응? 아니……. 진, 짜 졸려. 그리……고, 아기…… 위험……할 수 있어.”

서하는 임신을 확신하고 있었고 승언은 서하를 회유하기 위해 성기는 삽입하지 않겠다고 했다. 신경질을 내는 서하의 기분을 바꾸기 위해 승언은 페로몬으로 몸을 간지럽히듯 살살 풀어 댔다. 잠기운이 가셨는지 눈을 뜨고 손과 발을 오므리고 있었고, 승언은 목 부분을 어루만지며 숨결을 내뱉었다.

“형! 흐으. 간지러, 기분…… 이상해.”

“잔다고 해서 자장가 불러 주려고 하는 건데 왜 이렇게 발정 나 있어.”

페로몬을 풀어내면서 말하는 건 설득력이 없었으나 서하와 승언 모두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다.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었던 서하는 만약 임신했으면 위험할 수 있으니 삽입은 하기 싫다고 재차 강조했다. 승언은 걱정하지 말라며 서하의 볼에 짧게 뽀뽀를 한 뒤 침대에서 내려갔다.

부스럭거리며 물건을 찾는 승언을 고개를 내빼고 보던 서하는 동전 크기만 한 털 뭉치를 의아스럽게 보았다. 승언의 성벽을 고려했을 때 범상치 않은 물건일 거고 서하는 침대에 후드득 떨어지는 색색별의 털 뭉치를 보았다.

“털실……?”

“맞아. 예쁘지 않아?”

붉은색 털실을 손에 올려 주는 승언을 보며 서하는 미심쩍은 눈으로 털실을 건드려 보았다. 일반 털실과 다름없는 촉감에 손에 쥐고 눌러 보는데 엉성하게 감았는지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찌그러졌다.

“어…….”

“향기 좋지? 이거 색별로 향이 달라.”

짓눌린 털실 안에서 딸기 향의 붉은 액체가 끈적하게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엄지와 검지로 문지르니 미끈거리고 점성으로 거미줄처럼 늘어났다. 기분 나쁜 끈적임에 침대 옆 선반에서 티슈를 뽑은 서하는 손을 벅벅 문질렀다.

너무 세게 문질렀는지 화끈거리는 손바닥에 행동을 멈추고 티슈를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승언이 괴상한 짓을 할 줄 알았으나 생각보다 시시해 서하는 안도하고 침대에 올려진 털실들을 툭툭 치며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충격에 약한지 색색의 액체들이 흐르고 있었고, 구경하던 서하는 쌀쌀한 날씨임에도 벌레에 물렸는지 간지러운 손바닥을 긁었다. 긁으면 긁을수록 더 간지러워졌고 침대 시트에 손바닥을 문지르던 서하는 방금 닦은 액체가 이상함을 알아챘다.

“요즈음 인기 장난감이라고 해서 사 봤는데 신기하지 않아? 생긴 건 귀여운데 안에 든 액체는 가려움을 유발하는데, 향도 좋고 즐길 수도 있어.”

“안 할래……. 차라리 섹스하자. 나 하고 싶어졌어.”

여전히 손바닥의 간지러움이 지속되었고 승언이 털실을 어디에다 넣을지 분명했기에 서하는 승언의 옷을 붙잡으며 매달렸다. 침대 위에 남아 있는 털실은 2개가 전부여서 승언에게 힘껏 매달려 바닥으로 떨어뜨리자 승언이 웃어 댔다.

“우리 서하가 놀고 싶었구나?”

“섹스하자. 빨리, 박아 줘.”

승언은 서하를 품에 안고 일어나 서랍장의 문을 열었다. 머리를 쓰며 바닥으로 털실을 떨어뜨리는 허접한 행동이 귀여웠으나 아쉽게도 털실은 서랍에 많이 있었다. 한 봉지는 너무 많은 거 같아 승언은 3개를 꺼내 손에 쥐고 흔들며 서하에게 보여 주자 입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품에 안겨 바둥거리는 서하의 허벅지를 때려 멈추게 한 승언은 침대 위에 서하를 눕혔다. 눈치가 빨라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서하를 단념시키기 위해 승언은 문을 잠갔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서하를 보니 기분이 고양된 승언은 침대에 앉아 서하의 뺨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형……. 나 저거 싫어. 우리 다른 거 하자, 응?”

“삽입은 싫다고 해서 기껏 생각해서 가지고 온 거잖아……. 너도 좋아할 거야.”

변태도 이런 변태가 없을 거다. 손바닥은 아직도 미약하게나마 끊임없이 간지러워 예민한 내벽에 닿으면 어떨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승언을 밀치고 도망갈까도 생각해 봤는데 눈을 보니 서서히 맛이 가고 있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차라리 빨리 끝낼까 싶어 단념하는데 승언이 베이지색 털실은 마로 만든 거여서 따가울 수 있지만 만족할 거라고 했다. 숭한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승언을 견디지 못한 서하는 결심한 듯 몸을 날려 침대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우리 서하는 술래잡기 진짜 좋아하나 봐.”

“…….”

서하의 발목을 잡고 침대에 벗어나지 못하게 한 승언은 의미 없는 술래잡기는 그만하자고 했다. 손에 잡힌 발목에 힘을 주는 승언에 서하는 다급한 목소리로 도망치지 않겠다고 했다. 손자국이 남은 발목을 보고 속으로 욕하고 있는데 승언이 팔을 잡고 일으켰다.

옷을 한 겹씩 벗겨 낼수록 서하의 잔 떨림이 더욱 강해졌고 두려운 듯 털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실올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벗겨 낸 승언은 마지막으로 서하의 두 손을 부드러운 천으로 묶고 엎드리게 했다.

꼼짝없이 당하게 된 상황에 서하는 심호흡을 하며 마로 만든 털실만은 피하고자 했다. 단단히 매어진 매듭은 풀리지도 않고 손을 돌릴수록 더욱 옥죄어 왔다. 서하의 배 밑으로 손을 넣은 승언은 허리를 들어 올리게 하고 배 밑으로 베개를 넣었다.

“겁먹을 필요 없어. 후기 보니까 다들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

“너나……. 아니, 그건 다른 오메가 이야기잖아…….”

너 같은 놈이나 마음에 들어 한다고 말할 뻔한 서하는 황급히 말을 바꿔 동정심을 사고자 했다. 후기라고 해 봤자 오메가가 아닌 알파들의 후기였을 테고 당연히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며 좋아했을 게 분명했다.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속으로 풀어내는데 엉덩이를 벌리는 손길과 함께 털실의 촉감이 엉덩이에 닿았다.

짜악-.

털실이 들어가기도 전에 진입이 막혀 엉덩이를 때리니 구멍에 힘이 빠졌다. 반항을 한다고 하더라도 오메가임을 역력히 자각하고 있는지 맞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알파의 요구에 따라 구멍은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안 빠지면…… 어떡해?”

“잘 뱉어 내면 되지.”

이 장난감의 매력은 가려움을 유발하는 게 전부는 아니었으나 엎드려 있는 서하는 알지 못했다. 승언은 고정된 털실의 끝부분을 풀어 검지의 두 번을 감고 구멍에 서서히 밀어 넣었다.

“잠, 잠깐! 형……. 느낌 이상해. 빼, 흐으…… 빼 줘!”

“…….”

큰 크기는 아니었지만, 손으로 만졌을 때는 부드러웠던 털실이 구멍에 들어오니 따끔거렸고, 빠른 속도로 들어오는 실에 피하고자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승언이 잡지 않아 안심하며 숨을 들이켜는데 털실이 내벽 안에서 움직였다.

“싫어……. 싫어, 형. 나 이거, 흡……. 진짜 싫어. 들어가면 어떡해…….”

“놀랐어? 걱정 마, 다 뺄 수 있어.”

베개에 고개를 파묻고 숨을 들이켜고 있는 서하의 엉덩이와 허리를 쓸어내리며 승언은 안심하라고 다독였다. 조금이긴 하지만 내벽에서 털실이 굴러다니는 게 확실하여 서하는 몸부림을 치며 계속해서 앞으로 기어갔다.

“하으으……. 이, 이거 이상해, 왜 굴러다녀. 흐으……. 형! 승언 형!”

“서하야, 어디까지 가려고 그래. 그러다가 머리 박겠다.”

침대 헤드까지 기어간 서하를 보며 승언은 액체가 터지진 않은 건가 싶어 발목을 잡고 끌어 내렸다. 스스로 움직이며 실을 푼 서하 덕분에 승언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좋은 광경을 보고 즐기고 있는데 막바지에 다다랐는지 실 색이 달라졌다.

내벽을 굴러다니며 긁고 가는 털실로 인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서하는 털실이 점점 풀리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흘러내리는 침을 막지 못하고 침대 헤드까지 필사적으로 기어갔으나 승언에게 잡혀서 내려온 서하는 발에 닿는 여러 가닥의 털실에 신경질을 내며 밀었다.

“아……?”

발로 밀어내는데 털실이 내벽 안에 있는 털실과 연결되어 있는 거 같았다. 고개를 들어 뒤를 확인한 서하는 침대에 앉아 있는 승언의 손가락에 동여매어 있는 실을 봤다.

얼굴이 발개진 채 뒤를 돌아본 서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더니 서하의 발이 움츠러들면서 눈이 날카로워졌다.

“흐음, 왜 이렇게 심통이 났어.”

“너…… 손에 그거 뭐야.”

“형한테 너라니 버릇없네.”

순간 욱한 마음에 가감 없이 내뱉은 서하는 곧 있어 후회했지만, 승언의 입꼬리는 호선이 그려지면서 이제부터는 실수하지 않게 해 주겠다고 했다. 실이 전부 나왔지만, 서하의 반응을 보니 터지지 않은 거 같았다. 서하에게 언질을 주며 엉덩이를 쓰다듬으니 잘못을 빌며 고개를 좌우로 저어 댔다.

“옛날에 그런 말이 있잖아.”

“하으……. 못 하겠어. 승언 형, 혀엉……. 앗! 하읏, 아, 때리지 마.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아냐, 이번 기회에 고쳐 보자.”

승언은 허벅지에 서하를 엎드리게 하고 바둥거리며 내려가려는 서하의 두 손목을 잡아 눌렀다. 승언의 무릎에 배가 눌려 불편한 서하는 엉덩이를 계속해서 쓸어내리는 승언의 손목을 깨물었다.

짜악-.

“히익! 흐윽…….”

“넌 인간이지 개가 아니잖아? 입은 안 막아 놨는데 왜 개새끼처럼 물어.”

또다시 엉덩이를 내리치는 매운 손길에 서하는 깨문 손을 놓치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고통에 바르작거리기만 하는 서하를 보며 불량품을 사용한 건가 싶어 승언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조금 더 충격을 가하면 터지지 않을까 싶어 무릎을 조금 올리고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아앗, 흐아……. 싫어. 그만 때려, 으흐으……. 아파…….”

“흠……. 불량품인가. 하나 더 해 볼래?”

뜻대로 되지 않아 짜증이 난 승언은 손을 뻗어 주황색의 털실을 손에 쥐었다. 마찬가지로 털실을 검지에 감고 구멍 안에 밀어 넣으니 막히지도 않고 쑤욱 들어갔다. 또다시 들어오는 털실에 훌쩍이던 서하는 작게 욕을 내뱉으며 승언을 욕했다.

“그래, 그래. 이번에는 힘들지 않게 내가 풀어 줄게.”

“하지 마……. 으헝엉……. 싫다고, 싫어!”

내벽에 무언가 뭉쳐져 있는 느낌이 들어 가뜩이나 거북한데 새로운 털실이 들어오면서 짓눌렸다. 숨은 짧게 내뱉으며 침대시트를 손안 가득히 쥐고 있자 떨고 있자 승언이 손목을 토닥거리며 실을 조금씩 잡아당겼다.

“형, 아파……. 풀어 줘. 하으… 손목 아파, 안 도망갈게……. 손목만이라도 풀어 줘.”

“안 믿어, 서하야.”

승언은 한 손으로 서하의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누르고 나머지 손으로는 털실을 푸는 데만 열중했다. 털실이 풀리면서 내벽 깊숙이 들어와 여린 내벽을 긁었고 따가움에 서하는 승언의 허벅지를 붙잡고 울었다.

“아, 알겠다. 다 풀고 하면 잘 안 터지는구나.”

실이 어느 정도 남아 있을 무렵 승언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말하며 실을 푸는 걸 멈추고 엉덩이를 내리쳤다. 찰싹거리는 소리와 울음 섞인 비명까지 완벽하여 오싹한 느낌을 받은 승언은 강도를 조절하며 실이 있을 만한 부근을 손으로 내리쳤다.

“하하, 이것 봐 서하야. 아, 넌 못 보는구나. 지금 엄청 예쁜데.”

“흐윽……읍. 느낌 이상해.”

서하의 구멍에서 액체가 떨어지며 딸기 향과 오렌지 향이 방 안에 퍼져 나갔다. 꿀렁이면서 나온 붉은색과 주황색이 섞인 액체와 엉덩이에 남은 손자국을 지켜보던 승언은 즐기기 위해 무릎에서 서하를 내려놨다.

깊숙한 곳에서 뭉쳐 있던 액체가 터지면서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곧 있어 닥칠 일에 누워 눈물만 흘리고 있는데 승언이 다가와 허벅지를 벌리며 사이에 앉았다. 욕을 내뱉는 서하를 구경하던 승언은 효과가 있는지 반응을 보이는 서하에게 입꼬리를 올리며 움찔거리지 못하도록 무릎을 눌렀다.

“간, 간지러워! 비켜……. 놔, 놓으라고!”

“손으로 만지면 손까지 간지러운걸?”

체격이 큰 승언이 눌렀음에도 간지러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서하의 몸부림이 상당해 승언이 밀렸다. 날것 그대로의 반응이라 웃음이 터진 승언이 손을 떼고 서하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봤다.

승언에게서 벗어났지만, 마땅히 해결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서하는 울먹이며 앉아 있었다. 내벽뿐만이 아니라 액체가 타고 내려온 구멍까지 간지러워 서하는 압박 자위를 하듯 다리를 모으고 비벼 댔다.

“서하야 원래 자위 이렇게 해?”

“으읏. 간지……러워. 이거 싫어. 해결해 줘……. 어떻게, 해야 해?”

두 손목은 묶여 있고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는 상태로 말해 봤자 역효과만 일으키는 걸 모르는 건가 싶을 정도로 순한 서하에게 승언은 기회를 주기로 했다.

“남은 털실 넣고 스스로 풀어내면서 긁을래? 아니면 형이 긁어 줄까?”

“어……?”

“형이 박아 주면 깊은 곳까지 긁어 줄 수 있는데 말이야.”

입을 뗐다 닫았다 망설이고 있는 서하 옆에서 승언은 마지막으로 남은 털실을 눈앞에서 흔들다가 서하의 팔에 대고 비볐다. 피부에 닿아도 따끔한 재질은 내벽에 넣고 굴리면 당장은 섬세하게 긁고 지나가 해소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보면 멍청한 선택이었다.

승언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서하가 마침내 입을 뗐다. 피부에 닿으면 간지러움을 유발하는데 자신이 해결해 준다고 하면 의심을 할 법한데 제대로 사고 회로가 돌아가지 않는지 서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뭐, 그게 오메가이긴 했다. 똑똑하고 예리한 척은 해도 결국은 오메가다.

“박아 줘……. 긁어 줘, 응? 나 가려워.”

“근데 아까는 싫다며. 어쩌지? 이거라도 넣을래?”

“안 싫어……. 안 싫어요. 혀엉. 박아 줘.”

엉덩이를 들썩이며 박아 달라고 음탕한 몸짓을 하는 서하의 어깨를 잡아 누른 승언은 페로몬을 풀어냈다. 마 재질의 털실이 가장 핵심이긴 했지만 원래 목적을 채웠으니 상관없다 여긴 승언은 서하의 구멍에 성기를 집어넣으며 페로몬을 풀어냈다.

“더! 거기, 하으응! 긁어 줘……. 더, 더어…….”

“할 말 없어? 아까 서하가 형한테 뭐라고 했더라?”

“우으……. 잘못, 형. 잘못……했어요.”

손을 얼굴로 가리며 잘못했다고 빌면서도 서하의 허리는 끊임없이 들썩였다. 승언의 성기가 내벽을 긁으며 간지러움을 해소해 줬으나 깊은 곳은 여전히 간지러워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더 세게 긁어 주길 원해 페로몬을 푸니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속도가 빨라졌다.

“좋아?”

“응……. 좋아. 흐으, 응.”

승언이 손목의 끈을 풀어 주자 자유로워진 손으로 서하는 손을 앞으로 가져가 성기를 잡고 흔들었다. 이성은 없고 본능만 남은 몸짓만이 이루어졌고 두 사람의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더 긁어 주었으면 하는데 구멍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성기에 서하가 힘을 주며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자 승언이 골반을 쓰다듬으며 달랬다.

“쉬이……. 착하지?”

“아직, 더 해 줘.”

성기를 반쯤 빼낸 승언이 서하가 숨을 내뱉는 시점에 맞추어 성기를 한 번에 넣자 새된 소리가 흘러나왔다. 박아 주기만 하면 좋은 건지 침을 흘리며 고개를 주체하지 못하는 서하의 턱을 잡고 얼굴을 보게 했다.

쿠퍼액을 흘리기 시작하는 서하의 성기를 툭 건들고 허리 짓을 하여 전립선을 짓이기듯 누르니 서하의 다리가 더 넓게 벌려지며 완성되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 몰아치는 쾌감에 사정감을 느낀 서하가 손을 더 빨리 움직여 성기를 흔들어 대는데 승언이 성기를 만지지 못하게 막았다.

“싸고 싶어……. 다시 흑, 만질래…….”

“형이 열심히 도와주고 있는데 혼자 가겠다고?”

사정하기 직전이었는지 요도구를 막자 허벅지가 덜덜 떨고 상체를 뒤틀며 괴로워했다. 애원하고 매달리며 승언에게 놓아 달라고 했으나 승언의 허리 짓은 더욱 느려졌고 천천히 들어오고 빠져나가는 느낌이 생생히 전달되어 괴로웠다.

박는 건 취향에 없었는데 서하의 얼굴만 보면 발기가 되었고 박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구멍의 모양을 탐색하듯 승언은 서서히 움직이다가 한 번에 박아 넣기를 반복하다가 절정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깊게 박아 넣은 승언은 요도구를 막고 있던 손을 떼 내고 서하의 손에 깍지를 끼며 사정했다.

서하의 성기에서 픽픽거리며 사방팔방으로 정액이 튀었고 배와 다리, 침대 시트를 적셨다. 완전히 탈진한 듯 서하는 숨만 색색 내뱉고 있었고 승언이 성기를 뽑아내자 정액과 젤이 거미줄처럼 늘어져 나왔다.

“이제 안 간지럽지?”

“…….”

“대답해야지, 서하야. 나머지 하나도 마저 넣고 싶어?”

“히윽, 안, 안 간지러워. 형…… 형아!”

구멍에서는 정액과 붉은색 젤이 흘러나오고 몸에는 정액이 튄 채 서하는 승언에게 아양을 부리듯 어린애처럼 말했다. 발음이 다 풀린 채로 애교를 부리는 서하를 쓰다듬으며 승언은 확실하게 임신을 하자며 구멍 안으로 마 재질의 털실을 밀어 넣었다.

“싫어……. 그만, 제발…… 잘못했어, 용서해 줘.”

“서하야. 정액 흐르지 않게 잘 조이고 있어야 해?”

서하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승언은 서하를 안고 욕실로 들어가 서하를 씻겼다. 액체가 터지지 않게 행동을 조심하는 서하와는 달리 승언은 평상시보다 거칠게 서하를 씻겼고 결국은 터지고 말았다.

알파의 페로몬을 풀어내기만 하면 효과가 사라졌으나 승언은 도와주지 않았고 서하의 검지에 끝부분을 묶어 스스로 풀어내게 했다.

***

창문은 겨울임을 보여 주듯이 하얗게 김이 서려 있었다. 창가 근처에 앉아 서늘함을 즐기고 있던 서하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쳐다보지 않았다. 승언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 서하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고 볼에 뽀뽀했다.

“…….”

“오늘 병원 가자고 한 거 안 잊었지? 추우니까 따뜻하게 입고 나가자.”

검정색 목도리가 목에 감기려고 하자 서하는 목도리를 쳐 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목을 조이는 물건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바닥에 떨어진 목도리를 쳐다본 승언은 알았다는 듯 손바닥에 주먹을 치며 세심하지 못했다며 서하에게 사과했다.

“자, 발 조심하고.”

“알아서 갈 수 있어…….”

위험한 물건이 없는 집 안임에도 불구하고 승언은 유난스럽게 서하를 부축했고 한숨을 쉬며 손을 뿌리쳤으나 꿋꿋하게 따라붙었다. 거실에는 정웅과 호철이 서 있었고 하준은 출근했는지 집 안에 없었다.

“도련님은 회사에 가셨습니다.”

“안 궁금합니다.”

정웅이 하준의 행선지를 말해 줬고 궁금하지 않았던 서하는 단칼에 잘라 냈다. 오랜만에 신어 보는 신발에 어색해하며 신발 끈을 조였다. 문을 열어 주려는 호철을 거절하고 뒷좌석에 탑승하는데 승언이 안전벨트를 매 주려고 했고 손을 올려 거절의 의사를 비쳤으나 채우게 해 달라고 했다.

“…….”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를 좋아했던 사람인가 싶었지만, 서하는 관심을 거두고 목적을 되뇌었다. 만약 임신을 했어도 아이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 오직 베타로 돌아가 일상으로의 복귀만을 염두에 둬야 했다. 차가 매끄럽게 도로를 달렸고 승언의 재잘거림이 들렸으나 듣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던 서하는 호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호철이 언제 복귀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애초에 호철이 사라진 적은 있기는 한 건가. 기억을 떠올릴수록 지끈거리는 고통에 머리를 짚으며 괴로워하자 승언이 머리를 붙잡고 가슴에 기대게 했다.

“왜 그래. 머리 아파? 잠시 쉬었다 갈래?”

“아니……. 그냥 갑자기 아파서.”

승언의 페로몬이 맡아지자 좀 나은 듯한 기분에 서하는 승언의 허벅지를 베고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기억의 조각을 맞추려고 해도 모든 조각이 따로 놀듯 맞춰지지 않았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파 오는데 승언이 한숨 자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을 뜨니 진료실 안이었고 집에 오던 의사가 앉아 있었다. 서하에게 중요한 일임에도 의사는 서하가 아닌 승언에게만 검사에 대해 설명했다. 짧게 헛웃음을 지은 서하는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상황에 그러려니 하고 가만히 앉아 진료실을 보았다.

의사의 설명을 듣던 승언은 서하를 쳐다보았다. 그동안의 서하는 입덧을 하지도 않았고 페로몬의 변화도 없어 임신이 아닌 것 같았으나 승언은 서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베타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으며 임신하게 해 달라는 서하는 근래 들어 최고의 즐거움이었다. 병원에 왔으니 이제는 못 하겠지만 서하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줄 것이다.

“여기에 누워 주세요.”

검사가 시작되자 불안한 듯 서하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서하의 손을 잡은 승언은 손을 토닥거리며 괜찮다고 안심시켰다.

금방 끝날 거라고 했으나 의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오랜 시간 검사를 계속했고 이내 확신을 한 듯 입을 뗐다.

“임신이…… 아닙니다.”

“그렇군요…….”

머릿속에 어째서라는 의문이 가득 찼다. 임신을 하기 위해서 승언과 역겨운 짓을 매일같이 반복했다. 임신이 아니라니……. 승언의 페로몬을 맡으면 편안해지는 게 아이가 있어서라고 생각했다. 근데 아니었다. 모든 게 헛수고라 생각하니 설움이 밀려왔다. 서하가 입을 막으며 울음을 토해 내자 의사는 당황스러워했고, 승언은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서하의 눈물을 닦아 줬다.

“괜찮아, 서하야. 앞으로 시간은 많잖아.”

“흡, 으흐…….”

“이만 가 보겠습니다.”

승언은 이지를 잃은 서하를 토닥거리며 허리에 손을 감고 어깨를 감싸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참아 낸 승언은 울고 있는 서하를 차에 태웠다. 완전히 무너질지 아니면 또다시 지푸라기라도 잡고 희망을 얻어서 일어날지. 아무렴 어떤 것도 좋았다. 서하라는 존재만 있으면 삶이 무료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

“많이 실망했어?”

손에 얼굴을 묻으며 울던 서하는 어깨에 닿은 승언의 손을 어깨를 뒤로 빼내 털어 냈다. 임신이 아니니 승언은 쓸모가 없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다정한 척하고 있어 역겹기 짝이 없었고 쓸데없이 크기만 한 성기가 제대로 구실은 하는 건지 의심마저 들었다.

“서하야.”

“만지지 마.”

허벅지를 만지는 손길을 치워 낸 서하는 문가로 몸을 바짝 붙였다. 건들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듯이 매서운 눈빛을 보내자 승언은 건들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태도가 바뀐 서하에 승언은 당황하여 일단 손을 거두었다. 정신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다고 하더니 이렇게 급격하게 바뀔 줄은 몰랐다.

“형은 일하러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래?”

“…….”

“윤서하.”

“돌아갈래.”

팔에 턱을 괴고 창밖을 쳐다보면서 대답하는 서하에게 출처를 모르겠는 불쾌감이 올라왔다. 창문에 비치는 심드렁한 얼굴을 돌리고 눈을 보면서 똑바로 말하라고 하고 싶었다. 겁에 질린 눈이든 노려보는 눈이든 하물며 울고 있는 눈이든 소유욕이 맴돌다가 문득 오메가 하나 때문에 뭐 하는 건가 싶어 승언은 차를 멈췄다.

“다녀올게, 서하야.”

“…….”

“다녀온다고.”

집요하게 대답을 원하는 승언에게 대충 손을 휘저으며 인사를 한 서하는 승언이 나가 넓어진 자리에 지친 몸을 눕혔다. 한 달간 개같이 굴며 아양을 떨었는데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가서는 하준을 이용하기로 하며 서하는 호철에게 말을 붙였다.

“팀장님, 저번에 쉰 거 맞죠?”

“…….”

“다른 경호원분들이 절 피하더라고요. 최하준이랑 박승언이 시켰어요?”

“…….”

룸미러로 누워서 홀로 중얼거리고 있는 서하를 본 호철은 호응을 해 주지 않았다. 경배의 일도 있지만, 최근 서하의 행동은 정상인의 범주를 넘어섰다. 예전과 같이 폭력적이지는 않았으나 시시각각으로 감정이 변해 웃거나 울고 있었다. 기이함을 느낀 경호원들은 자연스럽게 서하에게 멀어졌으며 하준은 병원에 데려가려고 했으나 임신 초기 증상일 수도 있다는 승언의 말을 믿은 서하는 하준의 말을 묵살했다.

“도착했습니다.”

“으……응.”

상대해 주지 않자 잠에 빠져 일어나지 못하는 서하를 업고 들어온 호철은 하준과 승언의 방 중 어느 방에 들어가야 할지 고민했다. 움직임에 깨어난 서하가 호철의 양복 재킷을 잡아당기며 내려 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했고 언성을 높이자 한숨을 쉰 호철이 소파에 내려 주었다.

방에 있다가 돌발 행동을 하는 것보다 나아 거리를 두고 지켜보았다. 정웅이 잠든 서하에게 담요를 덮었다. 새근새근 숨소리는 평화로웠으나 호철은 몇 달 전 일이 떠올라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쉬는 동안에도 목을 매달은 서하가 떠올라 경기를 일으키며 일어나길 수차례였다. 복귀를 하고 본 서하의 목에는 상흔이 남았고 호철은 지키지 못했다는 좌절감과 일말의 양심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으으.”

빛이 거슬리는지 눈이 파르르 떨리고 있어 서하가 깰까 호철은 거실의 조명 밝기를 낮추고 벽에 기대 서하를 지켜봤다.

주위에 어둠이 깔리고 시계의 초침 소리만 들리는 집 안에 도어 록이 열리며 하준이 들어오며 곧장 서하가 있는 소파로 갔다.

“언제부터 여기서 자고 있었지?”

“병원에 다녀오신 뒤로 계속 주무시고 있었습니다.”

불편하게 옆으로 누워 자고 있는 서하를 안아 올린 하준이 방으로 들어가자 호철이 따라 들어와 이불을 치웠다. 서하를 눕히자 호철은 이불을 덮어 주며 병원에 다녀온 후 많이 실망한 거 같다며 보고했다.

침대에 앉아 잠든 서하를 내려다보던 하준은 알겠다고 한 뒤 호철을 내보냈다. 총명했던 학생 때는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서하는 사소한 일에도 일희일비하고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게 됐다.

“이것도 나 때문일까…….”

인턴 일을 하러 온 서하의 모습이 떠올랐다. 낯선 상황에 의기소침해 있기는 했으나 맡은 일은 열심히 하고 일을 완수하지 못해 힐난을 받으면서도 홀로 남아 일을 하곤 했다. 열심히 하는 모습에 흥미가 생겨 로운에게 알아보라고 하니 베타가 아닌 오메가였다.

오메가 주제에 한 사람의 몫을 하려는 게 탐탁지 않아 하준은 로운에게 시켜 취업을 권유하라고 했다. 졸업을 아직 못 했고 관련 분야의 스펙도 없다고 거절하는 서하에게 다가간 하준은 가족을 발미로 협박했다.

그때 어떤 반응을 보였더라. 울지 않으려고 꾹 눌러 참는 거 같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서하에게 가족들이 길거리에 나앉고 싶은 게 아니면 기회를 줄 때 붙잡으라고 했다. 핏줄이 보일 정도로 주먹을 꽉 쥐며 취직을 하겠다고 했으나 사인할 때 결국 서하는 눈물을 보였다.

몇 년만 지나면 서하가 모든 걸 포기하고 자신에게 의지를 할 줄 알았다. 회사 생활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니 서하가 스스로 포기를 하도록 참고 또 참아 왔으나 박승언이 끼어들었다.

승언에게 딱 붙어 의지하는 서하를 보니 견딜 수가 없어 하준은 근래 들어 회사 일에만 열중했다. 며칠간은 좋아하던 로운도 종래에는 퇴근 좀 하자며 하준에게 애원했지만, 승언의 품에 안겨 있는 서하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늦게 들어왔다. 서하를 붙잡고 승언의 말은 거짓이라 했지만 눈이 떨리며 그럴 리가 없다는 말만 반복하는 서하를 하준은 어찌할 수 없었다.

“윤……서하.”

“…….”

이름을 부르자 서하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 눈을 떴다. 눈을 깜빡이는 서하에게 갈증을 느낀 하준은 다시 눈을 감을까 서하의 이름을 불렀다. 몇 차례 하준의 애절한 음성이 방 안에 울려 퍼졌고 입꼬리를 올리며 활짝 웃는 서하에 덩달아 따라 웃었다.

“하준아, 나랑 섹스할래?”

“…….”

마음 한 켠이 무너졌다. 침대에 팔을 올리고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데 몸을 일으킨 서하의 손이 팔을 잡고 내렸다. 무릎걸음으로 걸어와 목에 팔을 감는 서하를 차마 내칠 수도 없어 어물쩍거리고 있는데 완전히 매달린 서하가 귓가에서 속사였다.

“나 아기 가지고 싶어.”

팔을 풀어내고 서하를 침대에 눕힌 하준은 서하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가슴을 눌렀다. 서하가 하준의 손목을 붙잡고 발버둥을 쳤으나 하준은 놔주지 않자 서하는 고함을 지르며 놓으라고 했다.

“놓으라고.”

“지금 제정신이 아닌 거 같으니 더 자는 게 좋겠어.”

“왜 너 나한테 박는 거 좋아했잖아. 아……. 돌려 먹는 건 싫어?”

스스로 자학을 하고 괴로워하는 서하를 본 하준은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언제 이렇게까지 망가졌나 생각하는데 파우더 향이 맡아졌다. 서하를 보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순진하게 웃고 있었으나 짙은 파우더 향은 의도가 명백했다.

“그만둬. 윤서하.”

“최하준 왜 깨끗한 척해. 너 나 원래 이러려고 데리고 온 거잖아.”

무릎을 꿇고 하준의 겉옷을 벗기려고 하는데 하준이 손을 내쳤다. 파열음과 함께 얼얼한 손등을 내려다본 서하는 어이가 없어 하준을 보며 웃었다.

“그러니까 하기 싫다는 거지?”

“너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조금만 진정하고…….”

“네 말대로 내가 제정신이 아니면 네 탓이겠지! 책임 전가하지 마!”

오메가에게도 위협하는 페로몬이 나올 수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막대한 양의 페로몬이 흘러나왔고 고스란히 페로몬을 맞은 하준은 헛기침을 했다. 흥분한 서하는 승언에게 다시 가면 된다며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가지 마.”

하준은 등을 보이며 가는 서하를 보고 몸을 움직여 허리에 팔을 두르고 뒤에서 껴안았다. 서하가 팔꿈치로 하준의 복부를 내리찍으며 몸부림을 쳤으나, 하준은 놓아주지 않았고 승언에게 가지 말라고 했다.

“하……. 지금 나랑 장난해……? 내가 네가 가라고 하면 가고, 가지 말라고 하면 가지 말아야 해?”

“윤서하…….”

“평소대로 행동해. 짜증 나게 하지 말고.”

하준의 손등을 힘껏 깨무니 입 안에 피 맛이 돌았으나 놓아주지 않는 하준에게 서하는 욕을 내뱉었다. 의미 없는 체력 소모가 이어졌고 지친 서하는 고개를 뒤로 젖혀 하준을 바라보았다.

매섭게 위로 치켜뜬 눈을 본 하준은 서하를 놓아줬다. 팔이 풀리자마자 몸을 돌려 하준을 직시한 서하는 이제 와서 개수작 부리지 말라고 한 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며 실패 원인을 분석했다. 하준의 정액과 승언의 정액 모두 품고 있었던 적이 있으나 임신이 되지 않았다. 하물며 하준의 경우는 히트사이클 때 일어난 일이었다.

히트사이클과 러트사이클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건가.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하물며 오메가 왕의 환생인 자신이 평범하게 임신을 하지는 않을 거다. 결론을 도출한 서하는 손쉽게 구워삶을 수 있는 정웅에게로 다가갔다.

부엌에서 재료를 손질하고 있던 정웅은 서하를 보자마자 경기를 일으켰다. 집을 옮기고 나서 서하에게 위협을 받은 적은 없지만 목에 칼날이 닿았던 기억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손으로 바닥을 가리키며 멈춰서 말하라고 했으나 서하가 콧방귀를 끼며 정웅에게로 다가왔다.

“무, 무슨 일로…….”

“집사님은 최하준을 위해서 어디까지 하실 수 있어요?”

정웅이 대답을 회피했으나 서하는 활짝 웃으며 질문을 되풀이했다. 칼을 멀찍이 떨어뜨리며 정웅은 하준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했다. 샐쭉하게 눈을 접으며 손뼉을 치는 서하에 놀라 뒤로 물러나는데 서하가 뜻이 같으니 다행이라며 정웅의 손을 맞잡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최하준 자식 낳아 드릴게요.”

“예?”

한동안은 승언에게 붙어 다녀 탐탁지 않았는데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서하가 하준의 아이를 낳아 주겠다고 했다. 정웅이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자 서하는 태도를 바꿔 당사자가 협조를 안 하고 흥미를 잃은 거 같으니 승언이 돌아오면 집을 나가겠다고 했다.

순간적으로 영준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 간 정웅은 미련 없다는 듯 몸을 돌리는 서하의 손을 맞잡았다. 하준이 영준의 연락을 받지 않아 영준의 호통을 고스란히 받은 정웅은 억울하던 참이었다. 지금은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했다.

“흠…….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죠?”

“러트사이클 촉진제 구해 주세요.”

러트를 유발하는 촉진제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히트사이클 촉진제는 있으니 던져 본 말이었다. 정웅의 표정을 보니 옳게 찍은 거 같아 흡족한 서하는 당장이라도 철회할 수 있다는 듯 시선을 승언의 방으로 고정했다.

“곤란할 것 같습니다. 러트사이클 촉진제라뇨…….”

“그래요? 아쉽네요. 그냥 없었던 걸로 해요.”

등을 돌려 부엌을 빠져나가는 서하는 속을 천천히 숫자를 셌다. 셋, 둘, 하나. 정웅이 서하에게 잠시만 멈춰 보라고 했고 서하는 심드렁하고 약간은 짜증이 묻은 목소리로 정웅에게 왜 불렀냐고 말했다.

“회장님께…… 연락 해 보고 알려 드리겠습니다.”

“음……. 근데 빨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최하준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데 전화 내용 들으면 다 무산될지도 모릅니다.”

아까까지는 필사적으로 칼을 숨기더니 다급하다고 판단했는지 정웅은 서하에게 등을 보이며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손에 뻗으면 칼이 닿을 거리였는데 자신의 목숨보다 최씨 일가에 대한 충성이라니 대단했다.

“네……. 회장님. 그렇습니다. 러트 촉진제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아! 2개로 주세요. 밥에 탈 건데 누가 먹을지 모르니까요. 그리고…… 히트사이클 촉진제도 같이요.”

서하의 요구를 들은 정웅은 입이 떡 벌어졌다. 히트사이클 촉진제는 그나마 가격이 낮았으나 러트사이클 촉진제는 수요가 적어 생산량이 극소량이기에 천문학적이 금액이었다. 핸드폰 너머로 서하의 목소리를 들은 영준은 당당한 포부가 마음에 든다며 당장 보내겠다고 했다.

“저녁쯤에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회장님께서 나중에 댁으로 놀러 오라십니다.”

“……생각해 보고요.”

순간적으로 왜 가야 하냐고 반문할 뻔했다. 한 기업의 회장이라는 게 충동적이고 기분파인데 회사가 유지되는 게 신기해 서하는 정웅에게 식상하게 대답하고 서재로 들어갔다. 호철이 서재 안으로 따라 들어왔으나 서하는 호철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쿠션을 껴안았다.

“책을 읽기 위해 들어오신 거 아니십니까?”

“제 방은 없잖아요. 박승언 방은 이제 들어가기 싫고, 최하준 방에는 최하준이 있어요. 그럼 남은 건 서재랑 바깥인데 나간다고 하면 내보내 줄 거예요?”

“…….”

천장 형광등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서하는 모든 일이 빨리 끝나길 바랐다. 바깥은 차디찬 겨울이었으나 집밖으로 나갈 때 즈음이면 선선한 가을이다. 산책로를 걸으며 낙엽도 밟아 보고 포기한 공부도 다시 시작할 거다. 일 년 뒤에 모습을 상상한 서하는 기분이 좋아져 쿠션을 세게 껴안았다.

똑똑.

“저…… 막 도착했습니다.”

“벌써요? 진짜 빠르네.”

주어가 생략된 말이었으나 촉진제라는 걸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쿠션을 내려놓은 서하는 우물쭈물하며 망설이고 있는 정웅에게서 약을 건네받았다. 파란색 알약 2개와 보라색 알약 1개. 개수로 알파와 오메가용을 구분해 낸 서하는 바지 주머니에 약봉지를 넣었다.

“저녁은 다 준비됐나요?”

“거의…… 다 되었습니다.”

이게 맞는 일인지 모르겠으나 하준을 위해서라고 정당화하며 정웅은 서하의 뒤를 따랐다. 생전 부엌에 들어올 때 밝은 표정인 적 없는 서하가 처음으로 웃으며 식사 준비를 도왔다. 콧노래를 부르며 국을 뜬 서하는 8인용 식탁 위에 3개의 국그릇을 올려 뒀다.

“음……. 어디다가 넣지.”

하준과 승언이 앉는 위치는 일정했으나 서하는 양쪽에 있는 국그릇에 모두 풀어내고 녹을 수 있게 휘저었다. 가운데 자리에 앉아 승언과 하준을 기다리는데 호철이 승언은 퇴근이 늦을 거라며 부엌에 들어와 말했다.

“왜 늦는데요?”

“최근에 일정을 무리하게 조정하셔서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얌전히 잘 있으시면 오실 때 선물을 주신답니다.”

얌전히라는 말이 거슬린 서하는 귀를 후비며 알겠다고 대충 대답했다. 정웅이 하준을 부르러 갔고 곧이어 하준이 나왔다.

방에서 나온 하준은 신경이 날카로워 보였다. 평소에는 서하가 가운데에 앉고 하준과 승언이 양쪽에 앉았으나, 하준은 의자에 앉으며 서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

“…….”

“……자리를 바꾸는 게 어떨지.”

“굳이?”

곧 있어 약까지 먹을 사람이니 장단을 맞춰 줄까 싶어 서하는 국그릇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이상하게 여기는 하준의 시선이 따라붙었으나 그렇다고 러트 촉진제가 들은 국을 먹을 수 없어 시선을 피했다.

“맛있게 먹어.”

“……윤서하, 너도.”

달그락거리는 수저질 소리만 들리고 대화 소리는 일체 들리지 않았다. 순순히도 약이 타진 국물을 마시고 있는 하준을 보며 서하는 기분이 좋아져 발을 앞뒤로 조금씩 흔들었다. 오랜만에 입맛이 도는 것 같아 입 안에 음식을 잔뜩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천천히 먹어. 그러다가 체하겠어.”

하준에게 대꾸할 생각에 씹는 속도를 높이는데 하준이 의자에서 일어나 물을 따랐다. 속이 타나 싶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쳐다보는데 하준이 서하의 뒷목을 받쳐 제 궤도로 돌려놓고 서하의 밥그릇 옆에 물컵을 올려 뒀다.

승언의 몫으로 차려져 있던 밥과 국으로 인해 자리가 좁아지자 하준은 정웅에게 치우라고 했다. 쟁반을 든 정웅은 밥그릇은 쉽게 거뒀으나 약이 타져 있는 국그릇은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어 망설이자 하준이 채근하며 빨리 움직이라고 했다.

“집사님, 버리지 말고 따로 빼 주세요. 승언 형 올지도 모르잖아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힘들어 보이시는데 들어가서 쉬시는 건 어때요? 치우는 건 제가 할게요.”

무슨 짓을 했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듯 정웅이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했고 서하는 싹을 잘라 내기 위해 정웅에게 들어가서 쉴 것을 권유했다. 하준의 눈치를 보고 있던 정웅은 하준마저 쉬라고 손짓을 하자 국그릇을 선반 위에 올려 두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따로 빼라고 한 이유가 있나?”

“음……. 사랑이 담겨서.”

대충 대답을 한 서하는 하준의 반응을 살폈다. 효과가 없어 보여 사기당한 기분에 서하는 젓가락을 잘근잘근 씹으며 식사를 마쳤다. 속으로 연신 정웅과 영준의 욕을 하며 설거지를 하는데 뒤에서 거슬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점차 짜증이 난 서하는 분노를 억누르는데 미약하게 페로몬이 맡아졌다.

물을 끈 서하는 하준을 쳐다보며 활짝 웃었다. 한 손은 식탁을 짚고 한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은 채 혼란스러워하는 하준을 보니 가슴이 뛰었다. 본능의 지배당해 몸을 자제하지 못하는 무력감을 너도 맛보아야 했다.

“…….”

“윤……서하. 방에 들어가. 나올 생각 하지 말고.”

“왜?”

알량한 배려를 간파했으나 서하는 짐짓 모르는 척 식탁 위에 올라갔다. 날 선 눈매와 마주쳤으나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지, 계획대로 되고 있다는 생각에 서하는 기뻐 하준의 어깨를 손으로 쓸어내리니 하준에게 손목을 붙잡혀 제지당했다.

“빨리 들어가라고 했어.”

“…….”

눈가에 실핏줄이 터지고 손에 핏줄이 도드라진 하준을 보며 서하는 입이 찢어져라 웃어 댔다. 러트사이클이 일어난 시기가 아닌데 페로몬 조절이 되지 않아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러트가 한낱 오메가의 계락이었다는 걸 알면 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서하는 다리를 위로 뻗어 하준의 고간 부분을 꾹 눌렀고 발기한 성기가 발에서 느껴져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윽, 뭐 하는 짓이지. 후……. 네가 안 간다면 내가 나가지.”

“최하준 씨, 이게 뭘 것 같아?”

흠칫 놀라며 현관문을 향해 가고 있는 하준에게 서하는 말을 걸어 걸음을 멈추게 했다. 보랏빛 알약을 엄지와 검지로 잡은 채 하준의 반응을 살폈다. 험악해진 인상이 점차 다가올수록 서하는 가슴이 두근거려 하준이 더 빨리 오길 바랐다.

“어떤 새끼가 이걸 너한테 줬어.”

“와, 너 진짜 독종이구나. 약 먹으면 정신 나가야 하는 거 아니야? 윽, 목 만지지 마!”

하준의 반응을 즐기던 서하는 목으로 다가오는 손을 보고 표정을 굳히고 경기를 일으키며 하준에게 고함을 내질렀다. 뒤로 물러난 하준이 서하의 비위를 맞추듯 재차 약의 출처를 물으니 영준의 협조를 받았다는 말과 함께 페로몬을 풀기 시작했다.

점차 이성을 유지하기 힘든 하준은 서하를 뒤로한 채 벗어나고자 했으나 거리를 벌릴수록 서하의 페로몬이 댐이 무너지듯 퍼져 나갔고 하준은 숨을 크게 들이켠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자리까지 깔아 줬는데 어디 가?”

“후회, 할 짓 하지 마…….”

네가 후회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됐다. 서하는 입에 알약을 넣고 삼켰고 일그러져 가는 하준의 표정을 오롯이 눈에 담았다. 약을 먹은 상태는 빈말이라도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시야는 구름이 낀 듯 아른거렸고 숨은 달리기를 쉴 새 없이 한 것처럼 막혀 왔다.

이 상태는 하준도 별 차이가 없었으나 하준은 필사적으로 서하를 밀어냈다. 더 이상 서하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 하준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내딛기 전에 서하에게 발목을 붙잡혔고 서하의 위로 넘어졌다.

가까스로 서하를 깔아뭉개지는 않았으나 서하의 풀린 눈과 페로몬을 들이켠 하준은 눈을 감는데 목에는 서하의 팔이 둘러졌고, 귓가에는 서하의 숨결이 닿았다.

“다른 건 필요 없어. 넌 그냥 박고, 싸고, 노팅만 하면 돼. 쉽지? 네가 평소에 나한테 하던 짓이니까.”

서하는 하준의 옷깃을 잡고 잡아당겼다. 서로의 숨결과 페로몬이 호흡을 어렵게 했다. 황망한 표정의 하준을 뒤로하고 서하는 하준의 벨트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만……하지.”

“…….”

하준의 말을 무시하고 서하는 벨트를 푸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시야 탓에 번번이 헛손질을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버클을 푸는 데 성공해 웃음을 짓는데 차가운 손이 막아 왔다.

“…….”

“…….”

하준의 얼굴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입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당황스러울 거다. 서하는 벨트에서 손을 떼 내고 하준의 뺨을 어루만졌다.

푸석푸석한 피부가 손의 마디에서 느껴졌다. 서하는 속삭이듯 하준을 부르며 입 안에서 이름을 굴려 보았다. 스스로도 웃기기 짝이 없었다. 하준이 덩달아 쓰게 웃었고 마주 보지 않고자 얼굴을 돌렸다.

“어떻게 해야 네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황당한 소리였다. 마음이라니 준 적도 없을뿐더러 평생 하준을 좋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준이 고개를 숙여 서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귓가에 헐떡이는 호흡이 선명하게 들려 서하는 하준의 목을 끌어안았다.

“있잖아. 난 지금도 네가 너무 싫어. 지금 당장이라도 널 죽이고 싶은데……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버틴 게 너무 억울하잖아.”

“…….”

“우리 인간인 척하지 말자. 너랑 나…… 둘 다 갈 데까지 갔어. 그러니까 참지 마.”

마지막 말을 끝으로 해소되지 않은 열기가 터지듯 페로몬이 넘쳐흘렀다. 스스로 제어되지 않는 페로몬에 잠식된 서하는 눈을 찡그리며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하준의 목을 껴안은 팔이 계속해서 풀렸고 팔에 닿은 섬유의 촉감은 칼날에 베인 것처럼 얼얼했다.

하준은 고개를 숙여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서하를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모진 말을 들으니 러트의 열이 거대한 파도에 꺼진 듯 사그라들었다.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상처 입히고 있는 서하에게 하준은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라고! 내가 하라고 하잖아……. 근데 왜……. 왜!”

하준은 서하에게 자리를 뜨라고 밀어냈으나 서하는 하준에게 네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며 버텼다. 마음 한편이 무너지는 기분이 느끼며 하준은 서하의 목뒤로 손을 가져가 일으켰다.

눈이 풀린 채 모든 걸 내려놓은 서하를 하준은 품에 안고 방에 들어왔다. 같잖은 짓을 하지 말라는 서하의 말이 들렸으나 하준은 서하가 다칠세라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냥 해. 짜증 나니까.”

어깨에 올려진 하준의 손을 쳐 낸 서하는 바지와 속옷을 벗으며 하준에게 다가가 바지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까부터 시간이 지체되는 게 달갑지 않았다. 빨리. 그저 빨리 쉬고 싶었다. 예민한 몸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정신의 고통이 더욱 커다랗게 다가왔다.

“제발…… 그냥 해 줘. 더 이상 싫어.”

눈을 꾹 감은 하준은 서하의 한탄이 담긴 말에 눈을 떴다. 돌이킬 수 없기에 하준은 서하의 어깨를 잡고 침대 위에 눕혔다. 잔뜩 발정한 오메가의 몸은 알파를 원하듯 구멍에서 애액과 함께 벌름거리고 있었고 그런 서하의 몸은 아름다웠으나 하준은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다.

본능을 거스르는 알파가 얼마나 있을까. 하준은 서하가 손목을 붙잡고 끌어당기지만 않았어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애처롭게 떨리는 서하의 손이 하준에게로 고스란히 전해졌고 하준은 잡히지 않은 반대 손을 넣어 풀어냈다.

“……읍.”

“…….”

손가락이 들어오길 바란 게 아니었다. 서하는 하준을 노려보며 하준의 어깨를 발로 찼으나 오히려 손가락의 개수만 더해질 뿐 빠지지 않았다. 길쭉한 손가락이 곳곳을 움직이며 넓혀 갔고 서하는 참을 수 없는 불쾌감에 몸을 떨며 입을 막고자 하였다

“놔.”

“…….”

하준을 붙잡았던 손이 도리어 붙잡혔고 힘을 줘 흔들어도 놔주지 않았다. 발정한 알파의 눈이 보였고 입꼬리도 올라가 있었다. 하준은 쓰게 웃으면서 서하의 구멍을 세게 쑤셔 댔다. 갈무리하지 못한 신음과 물기 어린 소리가 방 안에서 울려 퍼졌다.

“흐으……읏.”

순간 더 해 달라고 말할 뻔한 서하는 입술을 세게 깨물며 고개를 돌려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소리를 참으려 애쓴 탓에 얼굴이 잔뜩 달아올라 벌겋게 물들었으나 하준은 손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견딜 수 없는 느낌에 서하는 입을 벌려 숨을 크게 들이켜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좀…… 그만해!”

몸을 바들바들 떨며 서하는 결국 하준에게 소리를 질렀다. 하준이 하는 몸짓 하나하나가 거슬렸고 배려해 주는 양 행동하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서하의 눈가를 어루만지고 잔뜩 울어 축축한 눈가를 닦았다. 서하가 싫어해도 멈출 수가 없었다.

미움을 넘어서 혐오와 증오를 받는 주제에 서하가 자신의 손놀림에 따라 반응하는 게 기꺼웠다. 고개를 흔들어 하준의 손길을 쳐 낸 서하는 하준에게 더는 만지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엄포를 줬다. 순순히 물러난 서늘한 손이 목과 배를 타고 내려가더니 성기에 멈췄고 문질렀다.

“으으……읏. 개새끼야, 하지…… 말라, 흑, 고.”

자기 딴에는 몸부림을 친다고 했으나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조금만 문질러도 침대 시트에 주름이 잔뜩 생기도록 바둥거리면서도 표정만은 날카로웠다. 입을 틀어막은 손바닥 사이로 서하의 울음이 섞인 탄식이 새어 나왔다.

괴로워하는 서하를 편하게 해 주기 위해 하준은 선단을 손으로 쓸고, 구멍에 넣은 손가락을 계속해서 움직였다. 멍한 머리는 몰아치는 쾌락에 반응하기도 급급했고 소리를 억눌러도 번번이 새어 나와 손등을 힘껏 깨물었다.

“물지 마.”

“흐으으…….”

하준은 성기를 문지를수록 반응이 격해지고 구멍에 넣은 손가락이 조였다가 풀어지는 게 느껴져 묘한 기분을 느꼈다. 소유욕과 성욕은 전과 다를 바가 없었으나 박기에 급급했던 과거와는 달리 색달랐다. 사랑이 담긴 섹스는 아니지만 적어도 고통스러운 섹스는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 너, 무슨.”

결국, 사정한 서하는 침대에 늘어지기도 전에 손에 묻은 정액을 입에 넣는 하준을 보고 경악하며 몸을 일으켰다. 러트의 알파는 본능에만 충실할 거라 생각했는데 하준의 반응은 이상했다. 이래서는 안 됐다. 자신이 하준을 눌러야만 했다. 더 이상 하준의 손에 놀아나는 건 싫었다.

서하는 침대 헤드로 기어 올라가 하준의 손길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나 눈을 마주치니 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제멋대로 굴지도 않고 하준이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았지만, 서하는 산 채로 잡아먹히는 기분이 들어 어깨를 잘게 떨었다.

“겁먹지 않아도 괜찮아.”

“…….”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와 중간중간 음이 끊겼지만 안심하라고 했다. 서하는 말을 듣고 난 후 정신을 차리고 하준을 덮치듯 위로 올라갔다. 채 풀지 못한 하준의 벨트에 다시 손을 댔으나 마음처럼 풀리지 않았다.

“하……. 다 짜증 나.”

“…….”

자제력의 끝을 시험하고 있던 하준은 서하의 무릎이 고간을 누르자 결국 포기했고 벨트를 풀고 성기를 속옷에서 꺼냈다. 열기를 띠는 성기가 허벅지에 스치자 서하는 고개를 내려 성기를 빤히 보았다. 평소에도 커다랗다고 생각했는데 성기는 한층 더 크게 발기되었고 핏줄이 도드라져 거부감이 들었다.

하준의 배를 지지대로 삼아 일어난 서하는 구멍에 성기를 맞추고 서서히 내려앉았다. 하준이 풀어 줬고, 히트사이클이 왔음에도 구멍이 벌어지는 느낌이 생생했다. 도리어 성기가 몸을 쪼개는 거 같은 충격이 전해졌다. 아래에서 하준의 신음이 들려왔지만, 서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기를 삼키고 뱉기를 반복했다.

“읏, 하읏……으.”

“윤, 윽. 서하.”

두꺼운 성기를 받아들이는 게 스스로의 몸을 부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지경까지 와야 한 것도 어이가 없었으나 가장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은 모든 걸 쾌감으로 치환한 자신이었다.

“흐윽……. 흡. 시발…….”

“……깨물지 마.”

“닥쳐……. 닥, 흐으으.”

하준이 서하의 눈물을 닦아 주러 일어나자 전립선을 짓누르는 성기에 서하는 또다시 사정했다. 탈력감에 눕고 싶었으나 하준은 한 번도 가지 않았으며 몸을 웅크려도, 허리를 펴도 쇄도하는 쾌감에 입술을 더더욱 깨물었고 결국 피가 흘렀다.

“쉬. 울지 말고.”

꽉 다문 입술에 손가락을 비집어 넣은 하준은 서하가 물지 못하도록 한 후 등을 쓸어내렸다. 하준의 품에 기댄 서하는 나지막이 하준에게 어울리지 않은 짓 하지 말고 싸고 박으라고 했다.

올라타 있는 상태 그대로 자세가 바뀌었고 몸이 반으로 접히다시피 한 자세가 되었다. 아래에서 위로 성기를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었으나 위에서 아래로 꽂히는 듯한 자세는 더욱 힘이 들었다. 하준의 무게가 여실히 느껴졌으며 골반을 붙잡은 악력은 감각의 축에도 끼지 못했다.

“으읏, 흐윽. 더……. 더 해. 빨……리. 흐으으…….”

침대 헤드까지 밀려 올라가 머리를 부딪치는 서하의 다리를 잡아당겨 끌고 내려온 하준은 상의에 손을 넣어 유두를 만졌다. 피어싱의 차가움이 느껴져 흠칫했으나 하준은 표정을 갈무리하고 거칠게 유두를 짓눌렀다.

“하윽! 뭐……. 하지 마! 거기 만지지 마.”

“임신하면 모유를 어떻게 먹일지 궁금하군. 피어싱이라도 단채로 먹일 심산인가.”

“흐아앗. 싫어. 아니! 아, 좋아……!”

정신을 차리게 하려는 속셈이었으나 쾌락에 빠진 서하는 듣지 않았고 다리로 하준을 옥죄며 더 해 달라고 팔을 뻗었다. 성기가 구멍에 드나들고 골반과 엉덩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과도한 쾌감은 고통으로 다가왔고 몸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소리만 내뱉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새 두려운 서하는 유일하게 손에 잡히는 하준을 구원 줄처럼 꽉 껴안고 놓지 않았다. 움직임을 멈추지 않은 성기가 빠른 속도로 쑤셔 대 손에 힘이 풀려 미끄러지려고 했다.

“잘, 잡고 있어야지?”

“으흐……응. 응.”

대답하기도 힘든 듯 입만 벙긋거리고 숨을 크게 들이쉬는 서하의 목덜미에 얼굴은 묻은 하준은 심호흡을 했다. 사정을 하는 순간 서하는 임신이 될 것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서하는 정신을 차리면 더 큰 충격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참아야 했다. 하준이 성기를 빼내고자 하는 순간 서하가 페로몬을 풀어내며 자신의 배를 꾹꾹 눌러 댔고 성기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크읏……!”

짧게 한숨을 쉰 하준은 서하의 몸을 부둥켜안고 일으켰다. 고개가 푹푹 꺼지고 과호흡을 하면서도 허벅지에 흐르는 정액을 확인하고 있었다. 하준은 눈물로 흠뻑 젖어 있는 눈가에 버드 키스를 하며 입술로 내려왔다.

서하는 호흡이 진정되지 않는지 숨을 헐떡이며 입이 살짝 벌리고 있었다. 하준은 입술을 탐하며 서하의 혀를 살짝 깨물고 흘러내리는 타액을 핥아 먹었다. 숨이 막혀 처음에는 몸부림을 치던 서하도 하준을 서서히 따라왔고 달콤하지만 달콤한 관계가 아닌 키스를 했다.

“흐읏…….”

초점이 서서히 잡힌 서하는 하준의 어깨를 뒤로 밀어내며 입술을 떼고 밭은 숨을 터뜨렸다. 온몸이 얻어맞은 듯 욱신거렸고 구멍은 여전히 성기가 박혀 있는 것 같았다. 하준이 노팅을 했던가? 아니다. 아프기는 했으나 노팅은 상상은 초월한다고 했고 서하는 떨리는 손으로 구멍에 손을 가져가 정액을 긁어냈다.

“으응……! 흑. 흐으윽!”

“뭐 하는 거야?”

“노팅이 아냐. 쓸모……흐윽. 없어.”

구멍에 손가락을 넣으니 질척거리는 느낌이 좋지는 않았으나 서하는 손톱을 세워 내벽을 긁으며 정액을 빼냈다. 점성을 가진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느릿하게 내려오니 간지러웠으나 내벽은 손톱의 상처로 인해 화끈거림이 간지러움을 해소시켰다.

“윤서하. 이제 그만해.”

“뭘……? 다시 해야지. 다, 긁어냈잖아.”

겨우 붙잡고 있던 하준의 이성이 완전히 끊어졌다. 눈앞에서 정액을 긁어내는 오메가는 처음 보았고 서하를 위한다는 마음은 잊어버린 채 짐승의 교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행위가 반복되었다.

서하가 그토록 바라는 노팅은 하지 않을 계획이었다. 스스로 포기하게 할 요량이었다. 성기를 박는 건 가만히 있었으나 그 외의 행위에 대해서는 더러운 게 몸에 묻은 것처럼 진저리를 치며 거부했다.

“놔! 하지 말라고!”

하준의 힘에 떠밀린 서하가 억지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게 되었고 손과 발을 사용하여 하준을 밀어냈으나 하준은 신음조차 내뱉지 않고 서하에게 다가왔다. 머릿속에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 찬 서하는 옆으로 몸을 돌려 벗어나고자 했으나 하준에게 다리를 붙잡혔다.

양 종아리가 붙잡혀 활짝 벌어지고 가운데 하준이 자리 잡았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바둥거렸으나 하준은 서하에게 더욱 붙었다. 인내심에 한계에 도달한 서하가 주먹을 쥐고 휘두르려고 했으나 하준에게 붙잡혔다. 눈은 자신에게로 고정돼 있는 상태에서 옆에서 날아오는 주먹을 잡은 하준이 미친 것 같아 서하는 머리로 하준의 턱을 쳐올렸다.

손이 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서하는 움직일 수 없었다. 하준이 잠깐 턱을 어루만지더니 시선을 다시 고정했고 서하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네가 원하는 게 이게 아니었나.”

“윽, 박으라고 했지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라고는 안 했는데.”

머리가 뿌리째로 뽑힐 것 같고 눈물이 고였으나 서하는 지지 않고 하준에게 응수했다. 짧게 한숨을 내뱉은 하준은 머리를 움켜쥔 채로 키스했다. 키스라고 부를 수도 없는 행위가 이어졌다. 어깨를 잡아 눌렀음에도 불구하고 몸부림을 치며 어깨와 뺨을 맞았으나 하준은 놓아주지 않았다.

도리어 집요하게 서하의 입술을 탐했고 이리저리 도망치는 혀를 옭아맸다. 상처가 난 입술을 다정하게 핥다가 이내 벌을 주듯 헤집어 놓았다. 읍읍거리며 쓰라림에 몸부림을 치는 서하에게 다시는 깨물지 말라 충고가 되었으리라 생각하고 부드럽게 키스를 이어 나갔다. 피가 입 안에 들어오면서 씁쓸한 철 맛이 났으나 하준은 달콤한 사탕이라도 먹는 것처럼 빨았다.

제대로 된 약은 아니었는지 시간이 조금 지나 약기운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하준은 부러 말하지 않았다. 정신이 또렷했지만, 서하를 보고 발정하는 건 여전했다.

“후……. 그만. 그만해!”

하준의 입술을 물어뜯은 서하는 틈을 확보하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얼얼하고 축축한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서하가 깨물어 넝마가 된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니 피가 묻어 나왔고 서하의 뺨에 문지르니 움직임에 따라서 길게 자국이 생겼다.

“숨 제대로 쉬어야지?”

얼굴을 더듬거리며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쓰는 서하에게 호흡을 신경 쓰라고 하니 그제야 막힌 숨을 뱉어 내고 있었다. 모든 걸 의심하고 확인하는 주제에 이상한 데에서는 남을 철석같이 믿고 미련스럽게 굴었다.

“다시 해야지? 네가 원하는 거.”

“개, 새끼.”

원망이 담긴 욕지거리였으나 하준은 사랑의 고백을 들은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다만 또다시 입술을 습관적으로 깨무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아 하준은 침대에서 내려와 서랍장을 열었다.

눈으로 훑어보던 중 한 번도 착용해 본 적 없는 선명한 붉은색의 넥타이를 보았다. 2년 전 서하가 심드렁하게 어울린다고 하여 구매하고 난 후 서랍장에서 나오지 않은 물건이었다. 보통 쓰지 않은 물건은 망설임 없이 버렸는데 이상하게 버릴 수가 없었고 이제야 이유를 깨달은 게 한탄스러웠다.

매끄러운 넥타이를 손에 두른 하준은 침대 위로 올라와 노려보고 있는 서하에게 다가갔다. 원하는 건 임신이니 도망치지 않을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고 서하의 눈앞에서 손을 아래로 내리니 넥타이가 풀리면서 침대에 닿았다.

“깨물지 말라고 난 몇 번을 말했는데 영 말을 듣지 않으니 말이야.”

“동물 취급하는 건 여전하네.”

“네 말대로 여기에 인간이 있던가? 짐승이면 짐승답게 놀아 보자고.”

양손으로 넥타이를 잡은 하준은 서하가 넥타이를 입에 물게 하고 뒤통수에 매듭을 지었다. 심히 불만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키스는 더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풀려고 하지는 않았다.

넥타이를 만지던 서하는 얼굴도 마주 보기 싫은지 엎드렸고 하준은 구멍에 성기를 맞추며 입을 열었다.

“지금 내가 종마 역할을 한다고 생각할 텐데 말이야. 오늘의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할 거야. 난 네가 뭘 하든지 마음에 들거든. 애를 원하는 게 아니니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거면 단념해.”

웅얼거리며 항변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하준은 듣지 않고 성기를 한 번에 박아 넣었다. 장시간 혹사당한 서하의 몸이 버티지 못해 자세가 무너지니 하준은 서하의 배 밑에 손을 넣고 들어 올려 억지로 허리를 세웠다. 신음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숨도 잘 쉬지 못하며 억억거리기를 반복했으나 하준은 서하의 상황을 봐주지 않았다.

“으읍! 읏…….”

“입 막을 때 좋다고 가만히 있을 때는 언제고 왜 싫다고 고개를 흔들어.”

길이의 여유로 목까지 내려온 붉은색 넥타이와 버금갈 정도로 목은 붉어져 있었다. 순간 충동적으로 목을 깨물 뻔했다. 하준은 자세를 낮춰 한 손으로 서하의 목을 쥐고 쑤셔 박았다. 더 깊이 박혀 들어 괴로운지 서하의 목에 핏대가 섰고 바르작거리는 사소한 움직임 모두 하준에게 전달됐다.

“흐으으, 흑……!”

손에 묻은 물기에 하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서하의 몸을 뒤집었다. 넥타이는 침에 절여져 짙은 와인색을 띄고 있었고 눈 역시 이지를 잃어 탁해 있었다.

“윤서하, 한마디만 해. 그만해 달라고. 아니면 고개라도 끄덕여. 그러면 다 끝나는 거야.”

여기서 포기하면 끝나는 건 미래밖에 없었다. 베타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서하는 멈추지 않겠다는 듯 풀 수 있는 최대한의 페로몬을 풀어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라 어느 정도가 나오는지도 몰랐고,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하! 끝까지…….”

“아아악!”

반쯤 나가던 성기가 다시 깊숙이 밀고 들어왔다. 그동안은 봐줬던 건지 작정한 것처럼 난폭하게 전립선을 짓눌렀다. 아프다. 괴롭다. 한편으로는 이상했다. 서하는 있는 힘껏 넥타이를 깨물며 감각을 승화시키려고 했으나 쾌락이 너무나 선명했다.

“흐…….”

“이것도 긁어낼 테니 대신 해 주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손을 뻗어 하준을 만류했으나 단호하게 손이 내쳐지고 하준의 손가락이 구멍에 닿았다. 손가락이 구멍에 닿자 알싸한 통증에 작게 앓는 소리가 나오니 순간 하준의 움직임이 멈췄다. 오늘 안에 노팅은커녕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서하는 몸을 돌려 무릎걸음으로 하준과 거리를 벌렸다.

“으윽! 읍!”

“움직일 힘이 아직 있는 모양이군. 다행이지? 아직 더 할 체력이 남아 있어서.”

발목을 잡고 끌어 내린 하준은 서하의 어깨를 눌러 엉덩이만 높게 올리게 했다. 부은 구멍은 육안으로 보기만 해도 고통스러워 보였으나 하준은 손가락을 넣어 정액을 긁어내고 넥타이를 풀어냈다.

“하아, 흡.”

“아까와 같이 페로몬 뿜어내 보지 그러나.”

“…….”

방 안에 적막만이 맴돌았고 목이 메마른지 기침을 하고 있는 서하를 보며 하준은 한숨을 쉬었다. 잘 먹지도, 잘 자지도 않았던 몸으로 기절도 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건 순전히 오기였다.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만약 자신이 아닌 박승언에게 약을 먹였다면 박승언은 필연적으로 서하를 망가뜨릴 것이다.

하준은 가운을 걸치고 정액과 땀으로 얼룩진 침대 시트에서 서하를 안아 올렸다. 이리저리 움직이면서도 초점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눈을 본 하준은 눈 위를 손으로 덮고 거실로 나왔다. 방 안은 창문이 막혀 있어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거실 창문에서 햇빛이 서서히 들어오고 있었고 하준은 서하를 러그 위에 눕혔다.

“자리를 비키겠습니다.”

“아니, 잠시 있다가 들어가.”

호철이 자리를 피하고자 했으나 하준은 서하가 돌발 행동을 할까 싶어 호철에게 지키라고 하였다. 서하의 턱을 들어 올려 눈을 마주친 하준은 서하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부엌으로 들어갔다. 물을 마시니 정신이 선명해졌고 물을 다시 받아 거실로 나가는데 기가 차는 광경이 펼쳐졌다.

“싸 줘. 응? 왜 옷 입었어.”

“윤서하 님. 저는 이사님이 아닙니다. 이거 놓으시고…….”

“최하준이잖아. 왜, 으윽!”

“찾을 거면 잘 찾아가야지, 왜 엄한 사람을 잡고 그래.”

머리를 움켜쥐고 눈을 마주 보게 한 하준은 다시 서하의 고개를 돌려 방금까지 잡고 있던 사람은 호철이라고 정정했다. 제정신이 아닌지 축 늘어지는 몸을 부여잡고 하준은 호철이라고 제대로 부를 때까지 계속해서 정정했고 갈라진 목소리가 띄엄띄엄 호철의 이름을 부른 뒤에야 끝이 났다.

“그러면 난 누구지?”

“최……큽. 하준.”

칭찬하듯 머리를 쓰다듬은 하준은 컵을 기울여 서하에게 물을 먹였다. 갈증이 심했는지 컵을 잡으려는 손을 쳐 내고 컵을 기울여 줬고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서하는 하준의 속도에 맞추어 물을 마셨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것 같아 하준은 그만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

“노팅. 아직…… 안 했잖아.”

“더 이상 화나게 하지 마. 장단을 맞춰 주는 것도 여기까지야.”

겁을 먹은 손이 잠시 주춤거리더니 다시 하준의 가운을 잡고 늘어졌다. 바지는 벗었으나 처음부터 입고 있던 큰 셔츠는 정액과 피로 얼룩져 있었다. 하준은 서하를 내려다보며 마지막 경고라고 하였으나 서하는 도리어 가운을 손에 꽉 쥐었다.

“이쪽으로 아무도 못 오게 해.”

“알겠습니다.”

호철이 자리를 비키고 하준은 서하를 러그에서 끄집어내 벽 쪽으로 밀어냈다. 벽에 부딪힌 고통과 등에 닿는 서늘한 느낌에 몸을 떨고 있는데 하준이 몸을 돌려 벽을 짚게 했다. 엉덩이가 뒤로 빠진 자세가 되었고 하준의 성기가 들어왔다.

넣자마자 화끈거리는 구멍에 겨우 수분을 보충했던 입을 벌리며 신음을 질렀다. 이번에는 제발 노팅을 하길 바랐다. 더 이상 했다가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흐으, 아흑! 아, 아!”

“구미를, 당기게 해야지, 윽, 노팅을 해 주지.”

벌어진 다리가 좁혀지려고 하자 하준은 양 발목을 툭툭 치며 다리를 벌리게 했다. 수십 번 수백 번이 넘게 구멍에 성기가 드나들었고 정액이 넣었다 빼진 구멍은 완전히 흐물거렸다. 성기를 무리 없이 받아먹었고 빠져나가려고 할 때는 오물조물 성기를 꽉 조이고 내보내기 싫은 것처럼 붙잡았다.

“윽! 더, 더! 거긴 싫어. 싫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지 않나. 이렇게 까다로우면 원하는 대로 해 주기 힘들지 않겠어?”

벽을 짚은 것도 안간힘을 쓰고 있던 서하는 척추를 따라 쓸어내리며 엉덩이를 뭉근히 잡는 손에 자신도 모르게 구멍을 조이자 하준이 낮게 신음을 내뱉었다. 전립선을 뭉근하게 누르는 성기를 견디지 못한 서하는 결국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으으…….”

“그렇게 앉아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

한쪽 무릎을 꿇은 하준이 주저앉은 서하의 턱을 들어 올렸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주저앉은 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음에도 그만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턱을 놓은 하준은 서하의 몸을 돌려 벽을 짚게 한 후 성기를 넣고 서하의 다리를 벌리게 했다.

무릎이 넓게 벌려져 있고 가운데 하준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앞은 벽에 막혀 있어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자세는 하준을 거부할 수 없었다. 벽을 손으로 짚으며 벗어날 길을 찾고자 했으나 그마저도 하준에게 양손을 붙잡혀 벽에 눌렸다.

“아……?”

“계속 도망가서 말이지.”

서하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은 하준은 파우더 향의 페로몬에 힘껏 들이마시며 허리 짓을 했다. 벽에 머리를 찧다가 자지러지며 고개를 뒤로 젖히는 서하를 무시하며 하준은 자신의 것을 쑤셔 댔다. 도망칠 틈도 없어 전해지는 쾌감과 여러 번 사정하여 예민한 성기가 벽에 쓸려 고통스러웠다.

“아파, 아파……. 이 자세 싫어. 다른 곳. 으흑.”

“벽에 문질러지는 거로 발정하는 성기도 대단하군. 아직 더 나올 게 있나 봐?”

발기가 되었으나 직접적으로 만지지 못해 미묘한 불쾌감이 올라왔고 만져 해소하고 싶었으나 두 손이 붙잡혀져 속절없이 눈물만 흘렀다. 만지고 싶다. 허리에 잔뜩 힘이 들어가고 무릎을 버둥거리니 하준이 서하의 손목을 한데로 모아 한 손으로 잡고 서하의 성기를 잡고 흔들었다.

“흐윽, 아아! 악!”

여러 번 사정한 성기는 조심히 만졌음에도 불구하고 상처에 소독약을 들이부은 것처럼 따가웠다. 하준의 손에도 따뜻함을 넘어선 열기를 띠고 있는 성기를 의아스럽게 여기면서도 놔주지 않았다. 이상했다. 아픔을 넘어선 쾌감이 느껴졌고 배가 아팠다. 사정할 때는 느껴 본 적이 없던 감각에 이질감이 들었다.

“비켜. 비켜! 으응……. 제발, 놔……!”

“왜 그러지. 앞도 뒤도 만족한 듯한데 이 입은 항상 싫다고만 하는군.”

핏줄이 보일 정도로 힘을 주며 손목을 풀어내려고 했으나 풀리지 않았고 기묘한 느낌에 벽에 바싹 붙어 애처롭게 울어 댔다. 배가 딱딱하게 굳으며 구멍을 조여 대는 서하를 느낀 하준은 성에 처음 눈뜬 사람처럼 서하의 성기를 전체적으로 문지르다가 속도를 높여 선단을 엄지로 긁어내렸다.

“아악! 안, 안 돼……. 아냐……흑, 그만……하라고. 흐으으……. 그만하라고 했는데.”

픽픽거리며 맑은 색의 물이 성기에서 튀기며 벽과 유일하게 입고 있던 셔츠를 축축하게 적시고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손을 놓아줬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이 상당한지 움직이지 못하고 동물의 절규처럼 생것 그대로의 소리를 내뱉었다.

“어허엉, 만족했잖아……. 나 놔주면 안 돼? 흐읍, 다른 오메가…… 많잖아. 왜, 왜 나한테 그래.”

“울지 마, 왜 울고 그래. 언제 이런 걸 해 보겠어.”

고개를 벽에 묻고 한마디 한마디를 어렵게 꺼내는 서하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눈가에 입을 맞췄다. 자신만 본 모습에 정복감이 상당했는데 예쁜 입에서 다른 오메가를 언급한 순간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하준은 바닥을 타고 흘러가는 액체에 대해 부러 말하지 않았다. 짚어 주는 순간 불같이 반응하며 정신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손해였다.

“흐으, 이제 그만, 그만할래. 제발……. 싸 줘……! 응? 최……하준.”

다리를 웅크리고 몸을 껴안고 싶었으나 벌어진 다리를 오므릴 수도 없이 미약한 움직임만 가능했다. 하준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은 건 다행이었으나 축축하게 젖어 살갗이 비치는 옷을 보니 수치심이 몰려왔다.

어젯밤부터 날이 샐 때까지 하준은 박아 대기만 할 뿐 노팅을 하지 않았다.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고 서하는 반쯤 꺼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고 애원했다. 벗어나고 싶었다. 이 감각에서도 하준에게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나한테 싸 주라. 제발. 응? 이제 못 해……. 으흑, 이제 싫어.”

바닥을 손으로 디딘 서하는 몸을 돌려 하준을 마주 보았다. 뒤에서 신경을 거스르는 말을 할 때는 멀쩡한 줄 알았는데 정면에서 본 하준은 거세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눈이 돌아 버렸다는 게 이런 걸까. 실핏줄이 터진 눈은 광기 그 자체였다.

“무서워?”

“…….”

시선을 피하자 턱이 잡혀 고개가 원 상태로 돌아왔다. 거센 숨소리와 턱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 한쪽만 올라간 입꼬리까지 이성이 아닌 본능만 남은 하준의 모습이 여실하게 보였다. 지금 매달려야 했다. 하준이 노팅을 하게끔 하기 위해서 서하는 머리를 굴리며 하준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귓가에 속삭였다.

“응? 해 줘요. 윽……!”

강제로 풀린 팔에 당황해 동그랗게 눈을 뜨고 하준을 바라봤다.

“윤서하. 내가 노팅 하면, 넌 못 받아들여. 끝없이 굴을 파고들어 갈 거야.”

굴을 파긴 할 거다. 최하준에게서 도망갈 굴을. 노팅을 안 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은 하준에 안도한 서하는 사랑스러운 연인을 보는 것처럼 하준을 보았다.

“해 줘, 최하준.”

말을 끝으로 고개를 숙인 서하는 하준에게 입을 맞췄다. 자신이 물어뜯은 입술의 상처를 혀로 핥고 입 안으로 들어가 입천장을 훑었다. 혀를 섞고 하준의 숨을 빼앗을수록 기묘한 감각이 들었다. 더 이상 벌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 구멍이 넓혀지는 감각이 들었다.

몸 안에서 부푸는 성기를 고스란히 느낀 서하는 통증과 두려움이 몰아닥쳐 몸을 굳혔다. 망가질 것 같은 공포감에 잠식되었고 생존 본능으로 페로몬이 새어 나왔고 하준의 페로몬도 덩달아 짙어졌다.

“읏.”

“싫어, 이거 뭐야. 흑……. 아냐, 이거 아냐.”

당황한 서하가 하준의 혀를 깨물고 고개를 숙여 배를 쳐다보았다. 윤곽이 보이는 것만 착각에 빠진 서하는 배 주변에서 손을 방황하며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이런 걸 오메가들은 모두가 하는 건가. 어째서. 왜. 충격을 받아 갈팡질팡하는 손을 보며 하준은 서하가 진정할 수 있도록 페로몬을 풀어내 서하를 감쌌다.

“후우……. 진정하고. 괜찮아. 괜찮아, 윤서하.”

“아, 아악……. 싫어. 아파……!”

페로몬이 고통을 쾌감으로 바꾸다가도 다시 통증을 가져왔다. 고통과 쾌감 또다시 고통. 반복되는 과정에 정신을 놓아 버리고만 싶었다. 아득한 정신에서도 하준이 설사 목을 물어 각인을 할까 봐 정신을 끌어모아 손을 목으로 가져가 감쌌다. 각인은 싫다. 그러다 손이 붙잡혀 하준의 등에 안착했다.

“걱정하지 말고, 목, 상처 생기지 않나.”

“아……! 흐으, 읏.”

힘 조절을 하지 않아 손톱이 등 깊숙이 박히면서도 하준은 눈썹만 꿈틀댈 뿐 서하를 제지하지 않았다. 손톱을 박는 행위로 분출을 했음에도 참기 어려운지 천장을 향한 고개에는 핏대가 서 있었고 목젖이 도드라졌다. 목젖을 베어 물고 싶은 욕망을 실행에 옮긴 하준은 머금은 다음 입 안에서 굴렸다.

“흐으으……. 읏, 최, 최하준. 목.”

서하가 말을 할 때마다 혀에 닿는 목젖에 잔 떨림이 느껴졌다. 노팅과 급소를 물려 두려움이 배가되었는지 안쓰러울 지경으로 떨고 있었다. 윤서하. 저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다. 그렇다면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을 것이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준은 서하의 가슴팍에 고개를 댄 채 꽉 껴안았다. 사정감이 들었고 서하가 도망치지 못하게 단단히 붙들었다. 평소에도 많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많았다. 꽉 맞물린 틈으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정액에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신음을 흘렀다.

“하…….”

노팅이 끝나자 후들거리는 다리로 기어코 일어난 서하는 하준을 밀어내고 구석으로 기어갔다. 밀어냈다기보다는 하준이 순순히 밀려난 거지만 의식할 틈도 없이 서하는 벽에 기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탈하게 웃었다. 됐다. 노팅이니 임신은 확실했다.

서서히 바닥으로 추월하는 서하를 안은 하준은 땀에 젖어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눈을 뜨고 정신은 차렸으나 손가락 하나 까닥거리기 힘들었고 숨을 쉬는 사소한 행동에도 온몸에서 아우성을 쳤다. 하준과 거실에서 한 기억은 있는데 그 이후로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산뜻한 살결에 정액을 빼낸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어 안간힘을 써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 내니 온몸에 잇자국이 즐비했다. 섹스 중에 하준이 씹은 적은 없었는데 종아리와 허벅지, 배, 가슴까지 성한 곳을 찾는 게 어려웠다. 목이 물리지는 않았을까 팔을 들어 목을 만졌으나 따끔한 부분은 없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없어서 아쉬워? 꽤 즐겁게 놀았나 봐?”

“…….”

사람이 있는 줄 몰랐는데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홱 돌리니 승언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낮게 말하는 승언을 서하는 말없이 응시했다. 고저가 없는 말이었으나 비아냥거리는 어조는 명백했다. 배신감이라도 느낀 걸까. 날 선 알파와 한 공간에 있는 건 신상에 이롭지 않았다. 승언에게서 시선을 돌린 서하는 문을 쳐다봤다. 나가야 했다.

“어디 봐. 난 여기 있는데.”

“…….”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고 고개를 든 서하는 작게 혀를 찼다. 왜 일어나자마자 불편한 놈이랑 대면하고 있어야 하는지 제 신세를 한탄했다.

“왜 말을 안 해. 지금 형이 말하잖아.”

“최하준 죽었어?”

“뭐……?”

아닌가 보다. 최하준 방에 박승언이 있길래 노팅 한 거로 심기가 불편해 하준을 죽이고 방을 차지한 줄 알았다. 박승언과 최하준 둘이 부딪히면 누가 이길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승언이 침대 위에 앉았다. 겁을 먹은 듯해 으레 하던 미소를 머금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승언은 하준이 씹어놓은 잇자국을 하나하나 쓰다듬었다.

“읏…….”

“많이 아파? 약 가져올게.”

상처 난 살을 헤집어 놓고 할 말은 아니었다.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부르면서 약을 가지러 방을 나가는 승언을 지켜보다 침대에서 내려가기로 했다. 삐걱거렸지만 생각보다 몸이 멀쩡한 거 같아 지지하고 있던 팔을 뗀 서하는 바닥으로 한 걸음을 떼자마자 볼썽사납게 넘어졌다.

“마중 나온 거야? 조심해야지.”

손길을 피하기도 전에 승언에게 붙잡힌 서하는 그대로 품에 안겨 들려졌다. 허리를 꽉 쥐는 승언으로 인해 욱신거림이 심해져 몸부림을 쳤으나 움직이지 말라고 도리어 엉덩이를 맞았다.

“아악……!”

“떨어지니까 가만히 있어야지.”

하준의 방에서 나와 거실을 지나치고 승언의 방으로 들어왔다. 진짜 최하준이 죽은 건가. 보통 노팅을 하면 관심이 없어지는 건가.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드는데 정리는 되질 않았고 그사이 승언의 침대에 안착했다.

“물어 놓은 꼬락서니하고는.”

“……읏.”

소독약을 들이붓고 있는 승언에 눈물이 절로 나와 붙잡힌 팔을 빼내고자 했는데 놔주지 않았다. 승언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걸 행동으로 표현하고 있었으나 서하는 알은척하지 않았다. 어중간하게 상대해 줬다가 어디서 핀트가 나가 미친 짓을 할지 몰랐다.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는 승언은 꽤 즐거워 보였다. 가슴팍까지 다 붙인 승언은 약통을 정리하더니 방을 벗어났다. 안도한 서하는 몸을 뒤로 물리고 방 안을 보았다. 깔끔한 성정이었던 승언이었는데 바닥에 서류들이 뒤섞여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형이 만들어 줄까? 아니면 나가서 먹을까?”

“…….”

“몸이 안 좋은데 나가는 건 조금 그렇겠지?”

“최하준은?”

“……역시 집에서 만들어 먹자. 조금만 기다려.”

심심할 테니 가지고 놀고 있으라며 핸드폰을 넘겨주고 나가 버렸다. 의도적으로 대답을 피한 승언을 보며 의심에서 확신으로 바꿨다. 죽지는 않았어도 상당한 피해라도 입은 건가. 핸드폰 액정을 거울로 쓰며 손톱자국은 있으나 비교적 성한 목 상태를 보고 안심했다. 탁자 위에 핸드폰을 올려 두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몸에 정액이 남아 있지 않으나 임신은 됐을 거다. 체력이 떨어진 몸은 또다시 수마가 덮쳐 왔고 잠이 들려던 찰나 시끄럽게 벨이 울려 댔다. 신경질을 내며 무음 상태로 바꾸려고 했던 서하는 당황해하며 눈을 크게 떴다.

거울로 쓸 생각만 하고 사훈과 지호에게 전화를 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승언은 도움을 청하지 못하리라 생각을 한 것인가. 시험하는 것인지 아니면 못 하리라 생각하는 것인지 망설여졌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온 전화는 끊겼다.

전화보다는 메시지를 남기는 게 나을 것 같아 서하는 메신저를 열고 조심스럽게 자판을 눌렀다. 오랜만에 입력하는 자판과 불안감에 굳은 손가락은 빨리 움직여 주지 않았고 초조해질수록 더욱 느려졌다.

“제발……. 제발.”

「사훈 형 도와주세요 박승언이 저 납치했어요.」

「여기 어디인지 잘 모르겓느겠데 제발 형 도와주어요」

「언제 올지 모르겟어요 지금 핸드폰 잡은 거라 형 제발」

군데군데 오타가 있었으나 촌각을 다투는 상항이라 서하는 고치지 않고 메시지를 보내고 기록을 삭제했다. 소리가 나지 않게 탁자 위에 핸드폰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때마침 저벅거리며 승언이 들어왔고 서하는 베개를 꼭 쥐고 눈을 감았다.

“밥 먹어야지. 이제 일어나자.”

“…….”

“땀 좀 봐. 몸이 많이 안 좋나 보다. 밥 먹고 약도 먹자.”

다행히 눈치채지 못했나 보다. 잠에서 막 깬 척 비척거리며 일어난 서하는 탁자에 올려진 핸드폰을 확인하는 승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관심이 없는 척 곁눈질로 보는데 승언의 손이 뒤통수를 쓰다듬어 몸이 굳었다.

“전화 오는 소리 못 들었어?”

“……어, 잠들어서 몰랐나 봐.”

“그래? 게임도 안 했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에 선명하게 들려 승언에게도 들릴 것만 같았다. 여유롭게 미소를 지은 채 핸드폰을 서하에게 건네준 후 승언은 서하를 품에 안고 일어났다. 핸드폰을 멍하니 쥔 채 이송되던 서하는 켜져 있는 화면을 보았고 뉴스포털 메인 이미지에 담긴 최하준을 보았다.

“잘 먹겠습니다. 서하야, 맛있게 먹어.”

“이거 뭐야……?”

“국물 뜨거우니까 급하게 먹지 말고.”

같은 공간에 있으나 서로 다른 말을 했다. 스크롤을 내려 뉴스를 읽고 있는데 식사 중에는 핸드폰을 내려놓으라며 승언에게 빼앗겼다. 최하준이 검찰에 소환당했다. 길 한복판에서 버젓이 운행되었던 오메가 클럽이 이제야 언론에 물밑으로 올라와 질타를 받고 있었다.

“네가 한 거야?”

“뭘?”

“최하준 잡아넣은 거 너냐고.”

물로 목을 축이던 승언은 아까부터 들리는 최하준 세 글자에 참다못해 터져 컵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큰 소리가 나자 입을 다문 서하를 보며 만족한 승언은 장조림을 집어 서하의 밥그릇 위에 올렸다.

독기가 가득한 눈과 마주쳤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승언은 저녁 식사를 계속했다. 배신한 게 아닌 하준에게 배신당한 거다. 없는 틈을 타 서하에게 노팅을 하고 온몸을 짓씹어 흔적을 남겨 놓았다. 꼴에 각인하지 않은 건 다행이었으나 자신의 오메가라고 낙인을 찍듯 페로몬을 겹겹이 씌워 놓았다.

“잡혀 들어갈 정도로 나쁜 짓을 한 거 아닐까?”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아까부터 너라고 하는데 뭘 믿고 이러는 걸까. 최하준? 지금 네 옆에는 없는데.”

낮게 혀를 차니 승언이 실성한 듯 웃으며 흐르지도 않은 눈물을 닦았고 서하는 질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호철도 정웅도 집 안에 없고 오직 승언과 자신만 있는 듯했다. 최하준은 아마 구속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되어서는 안 된다.

“나 때문에 그렇게 화난 거야? 형 나 좋아해?”

“…….”

“근데 어쩌지? 최하준이 나한테 노팅 했는데.”

실시간으로 일그러지는 표정과 조절을 못 해 페로몬을 풍기는 승언을 볼수록 서하의 입꼬리는 점차 올라갔다. 승언의 성격상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고 예상이 맞다면 최하준은 금방 풀려날 거다. 만약 승언이 하준을 완전히 처리한 거라면 이 집에 머무를 필요가 없음에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 두 알파의 신경전이라고 결론을 내린 서하는 승언의 눈치를 살피지 않았다.

“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

“……욱.”

승언의 페로몬을 맡으니 역겹고 속이 뒤집혀 헛구역질이나 젓가락을 내려놓고 입을 막았다. 물을 마셔 속을 달래고 의자에서 일어나 자리를 피하니 승언도 의자에서 일어나 따라왔다. 승언의 페로몬이 밴 방에 들어갈 마음이 없어 하준의 방으로 가까스로 걸음을 옮기는데 어깨가 붙잡혀 몸이 돌아갔다.

“거긴 가지 마.”

“방금 봤잖아. 형 페로몬 맡으니까 헛구역질한 거. 근데 형 방으로 들어가라고?”

“아까까지는 괜찮았잖아. 내가 페로몬을 순간적으로 조절하지 못해서 그래. 그러니까 저 방 말고. 차라리 거실에 있자.”

어깨를 붙잡은 손이 희미하게 떨리는 걸 본 서하는 주객이 바뀌었음을 눈치챘다.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갔다. 승언과 하준 누구에게 붙어 있는 게 도움이 될지 저울질을 하다가 하준이 돌아오면 판단하기로 했다.

서 있는데 한계에 다다른 서하가 인상을 찌푸리자 승언이 황급히 안아 거실 소파에 내려놨다. 승언이 정해 놓은 선의 기준을 가늠하며 심심하니 핸드폰을 달라고 했다. 망설이는 듯하다가 유심칩을 제거하고 핸드폰을 건네준 승언은 서하를 품에 안고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게임 하고 싶었어?”

“그냥 아까 들으니까 해 보고 싶어서.”

고양이 밥 주는 게임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레벨이 상당히 높았다. 어깨에 묵직하게 승언의 머리 무게가 느껴졌고 귓가에서 속삭이는 승언으로 인해 간지러워 옆으로 피하니 더더욱 몸을 밀착했다. 단순한 놈이었다. 어느 고양이가 무슨 간식을 먹으면 경험치가 올라가는지 설명이 시작되었고 서하는 감흥 없이 건성으로 맞장구쳤다.

“이제 안 할래.”

“다른 게임 할래? 펭귄 멀리뛰기도 있는데.”

“안 한다고.”

인터넷에 들어간 서하는 아직까지 메인 포털을 장악하고 있는 하준의 기사를 눈으로 스캔하고 노팅 후 알파 반응을 검색창에 입력했다. 궁금하기도 했고 승언의 반응을 확인할 목적도 있었다. 뒤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으나 행동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글을 찬찬히 읽었으나 영양가 있는 정보는 없었다. 쓸데없는 찌라시들만 너무 많았다.

검색창을 다시 눌러 노팅 후 임신을 치니 승언이 손을 뻗어 액정을 손으로 가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서하가 말없이 보자 잘못된 정보가 많다며 보지 말라고 대답한 승언은 미소를 지었다.

“임신하겠지?”

“…….”

“그럼 형은 나랑 인연이 끝나는 거네. 최하준의 아이니까.”

“누구 맘대로.”

핸드폰을 덮은 손에 힘이 가해지면서 핸드폰을 받치고 있던 서하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내색하지 않지만, 행동으로 동요하는 걸 보여 주고 있었다.

“방법이 없잖아. 형이 최하준의 아이를 키울 거야?”

“…….”

적막감이 맴돌았고 서하는 굳어 있는 승언의 손을 치워 내고 핸드폰을 보았다. 각인하면 다른 알파가 향은 못 맡는다는 말은 끌렸으나 하준과 각인은 하고 싶지 않아 단념하고 창을 나왔다. 실시간 검색어는 하준에서 더 나아가 기업과 영준까지 거론되고 있었다.

“최하준 나오는 데 오래 걸리나. 아…….”

“그만, 그만! 더 이상 그 새끼 이름 담지 마.”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입 밖으로 나왔다. 서하의 입에서 하준을 들은 승언은 답지 않게 언성을 높이며 다그쳤다. 표정을 굳히며 인상을 쓰자 승언이 서하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감으며 소리를 질러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예상을 빗겨 나가 초조해졌다. 하준이 없는 틈을 타 서하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으나 이상하게 만큼 서하가 쉽게 빠져나갔다.

“팔 풀어 줘. 서재에서 잘래.”

“가지 마. 응? 서하야.”

당장이라도 품에서 나갈 것 같은 서하를 놓아주고 싶지 않아 짐짓 못 들은 척 더 꽉 껴안았다. 잠에 취해 있는 동안 페로몬을 조금씩 덮었음에도 최하준의 페로몬이 맡아져 불쾌했으나 꾹 참았다. 최하준이 아닌 자신의 페로몬을 풍기는 서하를 안고 싶다는 생각을 하자 페로몬이 서서히 흘러나왔다.

“욱, 좀! 하지 말라고!”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게 노팅의 영향임을 안 승언은 하준을 향한 증오가 더욱 거세졌다. 몇 주간 서하는 자신만을 보고 자신에게만 매달렸다. 오래 비운 것도 아닌 단 하루. 그사이에 하준이 노팅을 했다. 서하의 말대로 임신을 할 확률이 높고 보통 다른 알파가 노팅을 한 오메가에게 호감이 사라진다.

그러나 이번에도 남들과 다른 모양이었다. 설령 서하가 최하준의 아이를 낳는다고 하더라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하준의 아이가 아빠라고 부르며 따르는 모습을 최하준의 눈앞에서 보여 주고 싶었다. 서하와 서하의 아이, 그리고 자신. 아름다운 가족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하에게 잘 보여야만 했다. 잃지 않을 수만 있다면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었다.

“잘못했어, 서하야. 형…… 버리지 마.”

“아니, 이거 놓으라고.”

“사랑해, 사랑해. 서하야.”

헛구역질이 승언의 고백을 듣고 난 후 어이가 없어 단번에 멈춰 버렸다. 신종 엿 먹이기인가 싶어 몸을 돌려 얼굴을 보려고 했으나 승언의 팔 근육이 더 도드라지면서 조여 왔고 허리가 부서질 것 같아 주먹으로 승언의 허벅지를 내리쳤다.

“형! 아파! 아프다고……!”

“사랑해, 서하야. 나 너 좋아하나 봐.”

웃기지도 않은 자세로 절절한 고백을 들으며 체념한 서하는 가만히 정면의 벽을 바라보았다. 승언의 고백을 끝도 없이 이어졌고 참으려고 했으나 갈수록 가관에 승언의 팔을 잡으며 이름을 불렀다.

“승언 형. 나 좀 봐 봐.”

“이제 심통 안 부릴게. 그니까 벗어나지 마.”

재차, 삼 차까지 확답을 받고서야 힘을 풀었고 서하는 러그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종아리를 감싸는 푹신한 감촉에 안도하며 고개를 올리니 울먹이던 목소리와는 상반되게 입술을 굳어 있고 눈은 광기가 넘쳤다.

“안 간다며.”

“…….”

미묘한 움직임에도 승언이 표정을 굳히며 소파 아래로 손을 뻗었고 살기 위해 서하는 손을 내줬다. 다음은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부드럽게 풀린 표정에 욕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어젯밤 약을 타 놓은 국을 주워 먹고 염병을 떠는 걸까 싶었다.

그래도 웃으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미친놈보다는 화만 내는 미친놈이 나았다. 일단 승언을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최하준이 노팅하기 전에 내가…… 내가 먼저 했어야 하는데.”

뭘 먼저 해. 순간 욱한 마음에 손을 내팽개칠 뻔했지만 간신히 참고 승언의 손을 쓰다듬었다. 노팅에 상당히 집착하더니 각인까지 말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결혼식까지 올린 모양인지 인적이 드문 곳에 가서 조용히 살고 싶다는 노후 계획까지 들으니 아득해졌다. 정정해야겠다. 그냥 미친놈이 아니라 많이 돌은 미친놈이었다.

“형…….”

“우리 내려가자. 만약 아이가 생기면 내가 책임지고 키울게.”

“어……?”

어느새 소파에서 내려와 한쪽 무릎을 꿇고 말하는 승언에 당황한 서하는 어버버거리며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급발진이 된 건지 짐작도 못 하고 있는데 목에서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대학생 때 나한테 각인해 달라고 했었잖아.”

“어……? 그치. 아주 옛날에.”

“그때 각인을 했으면 우리 관계가 달라졌을까?”

목을 쓸어내리는 느낌이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영 좋지 않았고 점점 가까이 오는 승언으로 인해 심장이 빨리 뛰었다. 말의 뉘앙스를 보니 각인이라도 하자고 할 것 같아서 서서히 뒤로 물러난 서하는 러그 대신 짚어지는 바닥에 혀를 찼다. 눈에 띄게 도망간 걸 승언이 인지했는지 말을 멈췄다.

도망가야 한다. 하준의 방은 승언을 지나쳐 가야 하기에 불가능하고 승언의 방으로 도망가자니 페로몬을 맡는다면 속이 뒤집힐 테다. 서재로 도망가기로 결정을 내린 서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급격한 움직임에 혹사당한 근육들이 아우성치고 힘이 풀렸으나 이를 악물고 서재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하아…….”

“서하야. 도망친 거 아니지? 책을 읽고 싶으면 말하지 그랬어.”

손잡이가 덜컥거리면서 듣기 싫은 소음을 자아냈다. 금방이라도 열릴 듯한 모양새에 책상으로 뛰어가 올려져 있던 물건들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책들과 잡다한 물건들이 떨어지면서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대응하듯 손잡이는 더 거세게 돌아갔다.

가벼워진 책상을 문 쪽으로 밀어 막고 바닥에 떨어진 책들을 허겁지겁 모아 책상 위에 쌓았다. 더는 돌아가지 않은 손잡이에 안심하며 서하는 책상 밑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상황이 일단락되니 손이 욱신거려 두 손을 보니 책상을 옮기느라 많은 힘이 들어갔는지 벌게져 있었다.

“서하야.”

“…….”

“그렇게 싫어? 물론 내가 지금까지 못 할 짓을 많이 한 거 알고 있고 후회하고 있어.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너를 힘으로 누를 생각한 거 맞아. 근데…… 아니더라. 너랑 함께하는 상상은 행복한데……. 네가 없는 미래를 생각하니까 즐겁지 않아.”

방문 너머로 승언의 두서없는 고해성사가 시작됐다. 계속해서 일어나는 걸 보고 무너지는 게 보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마음을 바꿨다고 했다. 단순히 재미인 줄 알았는데 하준에게 마음을 준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린다며 끝내는 울먹이고 있었다.

“우리 다시 해 보자. 아이 정말 잘 키울 자신 있고 가지고 있는 거 다 포기할 수도 있어. 조용한 곳에서 우리끼리 시작하자.”

스탠드로 머리를 치는 상상을 하니 통쾌한데 잘못하면 죽을 것 같았다. 치는데 죄책감은 없으나 승언으로 인해서 살인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책상 밑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데 주머니에서 승언의 핸드폰이 떨어졌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챙겨 온 건 놀라웠으나 유심칩이 빠져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최하준보다 내가 낫잖아. 최하준은 너보다 나이도 한참 많고, 널 배려해 주지도 않잖아. 지금도 봐. 죄나 저질러서 불려 다니고 너한테는 어두운 최하준보다 밝은 내가 어울려.”

알파가 미인계를 쓰는 광경까지 보다니 갈 데까지 갔다 싶었다. 두꺼운 책을 품에 끼고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들었다. 여차하면 찍어 내릴 생각이었는데 구차하게 구구절절 말하기만 할 뿐 손잡이를 부수거나 열쇠를 찾아오지는 않았다.

검사는 말을 많이 해서 그런가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승언으로 인해 경계심이 풀린 서하는 다리 사이에 책을 두고 핸드폰으로 인터넷에 들어갔다.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는 기사를 보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승언이 조금만 더 떠들어 주고 하준이 빨리 온다면 불똥은 튀지 않을 것이다. 설마 노팅까지 한 사이인데 승언 한 명 못 이길까 싶었다. 갑자기 조용해져 이상함을 느낀 서하는 조심스럽게 바닥을 기어 책상 밑으로 들어가 방문에 귀를 댔다.

“서하야……. 최하준이랑 각인까지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 각인이 정 하고 싶으면 형이랑 하자. 알겠지?”

오메가로 발현만 되지 않았더라면 승언을 여전히 좋아했을 테지만 부모님을 가지고 거짓을 말했고, 사훈과 지호를 농락했다. 사랑을 입에 담고 있지만 사랑이 아님을 알았다. 지독한 소유욕. 서하는 묵묵히 주먹을 쥐었다. 베타로 돌아가더라도 승언과 하준을 용서할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방문을 사이에 두고 한 사람은 끊임없는 회유를 한 사람은 복수의 칼을 갈았다. 어둠이 깔리면서 불이 꺼진 서재는 달빛이 들어와 은은하게 방을 비췄다. 피로했던 몸은 간사하게도 잠깐의 평화에 눈을 감게 했고 책상에 기대 잠에 들었다.

“아!”

“……무슨 일이지? 몸이 안 좋나? 아니면…….”

“최하준.”

수척한 얼굴인 하준에게 승언은 어찌 되었냐고 물으니 잘 처리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승언은 사라졌고 하준도 건들지 않아 스트레스 연속에서 해방되니 또다시 잠이 몰려왔다.

***

아무것도 없는 암흑의 공간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있으면 그치리라 여기며 귀를 막는데 울음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시끄럽다. 입을 막고 싶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난 서하는 근원지를 향해 가니 작은 아이가 더욱 몸을 작게 웅크리며 서럽다는 듯 끅끅거리고 있었다.

아이의 부모는 어디 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아이와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아이의 어깨를 건드리니 흠칫하며 놀라는 작은 몸에 서하는 손을 거두었다. 잘못 만지면 다칠 것 같았다.

“내가 미워요?”

“……뭐?”

고개를 든 아이의 얼굴이 낯설지가 않았다. 많이 본 얼굴인데 입 안에서만 맴돌고 목 끝에 걸려 정작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미워하지 말라는 아이의 말을 영문을 몰라 듣고만 있는데 아이가 품에 안겨 들었다.

“사랑해요.”

“너…… 누구야.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아빠가 날 미워해도 난 아빠 좋아해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를 떼 내기 위해 밀어낼수록 아이는 끈질기게 붙으며 떨어지지 않았다. 아빠라니 내가 왜 아빠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지. 부정하니 아이가 울며 버리지 말라고, 사랑해 달라고 애원했다. 머리가 급격하게 아파 왔다. 아이를 가진 적이 없다. 아, 노팅을 한 기억이 떠올랐다. 누구랑 한 거였더라. 하준. 최하준의 이름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아이는 최하준을 닮아 있었다.

“역겨워. 끔찍해.”

“내가 끔찍해요?”

힘을 줘 아이를 밀쳐 내니 힘이 약한 아이가 품에서 떨어져 바닥에 처박혔다. 순간 놀라 일으키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하준의 아이임을 떠올리니 손이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맑은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으면서도 아까와 같이 소리를 내어 울지 않았다. 통통한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아도 닦아 주고 싶지 않아 서늘하게 쳐다보았다.

“안아 줘요.”

“건들지 마!”

“왜…… 잘못했어요. 미워하지 말아 줘요. 예뻐해 달라고 안 할 테니까…… 같이 있게 해 줘요.”

눈물을 닦은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리고 비척비척 걸어갔다.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너무나 멀리 가 버린 아이를 잡지 못했다. 홀로 남은 공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꿈이라면 깨고 싶었다.

***

“건들지 마.”

“……그래.”

하준이 손을 잡고 있었고 서하는 잡힌 손을 빼내고 쓸어내렸다. 이게 태몽이라는 건가. 태몽치고는 지나치게 사실적이었고 너무나 불쾌한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아빠라니. 미워하지 말라니.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렸으나 조금씩 감정이 북받쳐 올랐고 끝내는 눈물이 나왔다. 혼자 있고 싶은데 건들지 않겠다고 알겠다고 하더니 하준이 낯익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줬다.

“꿈에 널 닮은 아이가 나왔는데 미워하지 말래. 예뻐해 달라고 안 할 테니 미워하지만 말아 달라면서 아빠라고 부르는데, 내가…… 내가 왜! 너 때문에 비참해야 해? 왜?”

“…….”

분노가 치밀어 와 베개를 집어 던지니 피하지 않고 하준이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는 기분에 고함을 지르며 하준에게 개탄하다가 제풀에 지쳐 침대 위로 상체를 숙였다. 새하얀 시트는 눈물로 젖어 짙은 색으로 물들어 갔다.

“내가 다 잘못했으니 그만 울어.”

“너도 나 사랑해? 박승언이 나 사랑한대. 너도 그래?”

“윤서하…… 제발!”

자학하고 괴로워하는 서하를 두고 볼 수 없었던 하준은 참다 참다 언성을 높였다. 헐떡이는 숨을 따라 가파르게 솟고 내려앉는 등을 쓸어내리며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도 서하에게는 역효과가 날 뿐이다.

“있잖아. 아이를 낳아도 사랑해 줄 생각은 없어.”

“그래……. 마음대로 해. 원하는 대로.”

하준이 동요하길 바랐는데 평온한 얼굴로 그러라는 대답을 들으니 속이 뒤틀렸다. 아이야 넌 어느 쪽에도 사랑을 받지 못할 건가 봐. 아이 대신 울기라도 하듯이 서하는 눈가가 새빨갛게 물이 들고 목이 쉴 때까지 통곡했다.

***

“임신입니다. 축하드립니다.”

“…….”

“…….”

하준과 서하 모두 반응이 없자 의사가 헛기침하며 주의 사항을 알려 줬다. 심드렁한 서하와는 달리 하준이 경청을 하고 있어 의사는 하준에게 집중적으로 안내를 했고 허공을 보던 서하는 말이 끝나자마자 미련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을 나갔다.

“뭐라도 먹고 갈까?”

“아니. 잘래.”

말수가 적어졌으나 무시하지 않는 거에 위로를 받은 하준은 조수석에 앉은 서하의 안전벨트를 채우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예상은 했지만, 의사에게 들으니 착잡해져 판판한 배를 쓰다듬었다. 무서웠다.

“안색이 안 좋은데 쉬었다 갈까?”

“……오랜만에 나와서 그런 거야.”

손을 앞으로 저으며 출발하라고 하니 마뜩잖은 표정의 하준이 기어를 바꾸고 출발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창밖을 보는데 차가 멈춰 고개를 돌려 하준을 보았다. 다시 가라고 했으나 차에서 내린 하준이 조수석을 문을 열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

“잠시 들를 곳이 있는데 같이 가겠어?”

“벨트까지 풀고 나서 할 말은 아니지 않아?”

말을 할 때마다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웠으나 서늘하면서 깨끗한 공기가 들이마셔졌다. 답답한 차의 히터보단 걷는 게 나을 것 같아 차에서 내렸으나 하준은 도로 차에 들어갔다. 이렇게 자유의 몸이 된 건가 싶어 잠시 눈을 깜박이던 서하는 인도를 걷던 중 다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에 어깨가 붙잡혀 몸이 돌아갔다.

“하아……. 어딜 그렇게 가는 거야.”

“네가 차에 들어갔잖아.”

하준이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차에 넣어 둔 귀마개를 꺼내려고 잠시 들어간 사이에 서하가 겁도 없이 거리를 막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겨울인데도 목을 감싸는 옷을 입지 못하니 차선책으로 준비한 물건이었다.

하준이 귀마개를 서하의 귀에 씌웠다.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귀마개를 써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새하얗고 보들보들한 귀마개는 취향이 아니어서 눈길도 주지 않았다. 따듯하기는 했으나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귀마개를 벗고 처리를 고민하다가 검지를 까닥거려 하준의 상체를 낮추게 했다.

“댁이나 많이 하세요.”

“…….”

패대기칠 줄 알았는데 순순히 귀마개를 한 하준은 가야 할 곳은 반대편이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화려한 상가가 즐비해 있고 행인도 많아 꺼려졌다. 미간에 주름이 지는 걸 본 하준은 자동차 안에 있어도 된다고 했으나 서하는 괜찮다며 앞장서라고 했다.

온몸을 검정색으로 두른 건장한 남자가 귀에만 보송보송한 흰색 귀마개를 한 모습을 보니 기괴했다. 사람들도 아닌 척 흘끔흘끔 시선을 주는 걸 보니 비단 자신만 느낀 건 아니었나 보다. 일행이 아닌 척 몇 걸음 뒤에서 걸으니 하준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추우니 어서 들어가지.”

고개를 끄덕이고 하준을 따라 디저트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달콤한 냄새가 가게 안에 퍼져 있었고 빛을 받은 디저트가 반짝거렸다. 다른 가게와 연결된 것인지 두리번거렸으나 한 층을 통째로 쓰는 듯했다.

“먹고 싶은 건 없나?”

“……지금 케이크 사려고 들어가자고 한 거야?”

“어서 오세요. 뭐로 드릴까요?”

직원의 해맑은 인사에 손가락질하던 서하는 어버버거리며 쇼케이스를 쳐다봤다. 대충 고르고 끝내려고 하는데 직원의 상세한 설명이 이어졌고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 갔을 때 가까스로 케이크 하나를 골랐다.

“네, 봉봉쇼콜라 포장해 드릴게요. 또 필요하신 거 있으신가요?”

“……아니요.”

“앙버터 다쿠아즈와 인절미 마카롱도 같이 포장 부탁드립니다.”

카드를 건네며 추가 주문을 하는 하준은 너무 자연스러워 보였다. 가게 직원도 하준을 알아봐 인사를 하며 쇼핑백에 포장한 디저트를 서하에게로 건넸다. 하준이 종종 들고 오던 쇼핑백이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감사합니다.”

차에 다시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서하와 하준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집 안에 들어서자 마중하던 정웅이 쇼핑백을 보곤 뭐냐고 물어봤고 서하는 케이크와 마카롱이라고 대답했다.

“건강에 안 좋게 뭘 이런 걸 사셨어요. 먹어 봤자 달기만 하고 영양가는 없고…….”

“최하준이 샀어요. 버리셔도 돼요.”

입을 다물며 냉장고에 넣는 정웅을 보며 피식 웃고 서재에 들어간 서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쿠션을 베개 삼아 누웠다.

“왜 여기에 누워 있어. 졸리면 방에서 자야지.”

“거긴 내 방이 아니잖아.”

눈이 감기는 와중에도 하준에게 톡 쏘며 말한 서하는 쿠션을 더 끌어와 품에 안았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고요한 서재에서 눈을 뜨고 두리번거리니 서재 책상에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하준이 보였다.

“일어났으면 밥 먹으러 가지. 사 온 간식도 먹고.”

“……입맛 없어.”

노트북을 덮으니 완전히 암흑인 서재에서 청각이 예민해져 서로의 숨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손의 감각으로 더듬거리며 방문을 찾아낸 서하는 문을 열고 나와 거실 소파 위로 올라갔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먹기도 싫었다.

“입맛이 없으면 케이크라도…….”

“먹고 싶다고 한 적 없어.”

한숨을 쉰 하준이 정웅에게 손짓하자 음식이 물러졌고 모든 식기를 치운 걸 본 서하는 소파에 몸을 맡기고 엎드렸다. 앞으로 아홉 달 뒤면 모든 게 끝이 난다. 한 달 전에 꿨던 꿈이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스트레스가 꿈으로 나타난 거라고 믿었다.

기어이 하준이 마카롱을 접시에 담아 가져왔고 한숨을 쉬며 서하가 접시를 받아 드니 하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인절미 마카롱을 좋아하기는 했으나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서 먹으라는 듯이 쳐다보는 하준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서하는 접시를 기울여 바닥으로 떨어드렸다.

“아, 실수.”

“…….”

장식으로 되어 있던 콩고물이 러그에 떨어졌고 마카롱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망가졌다. 화를 낼 줄 알았던 하준은 옆자리에 앉아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하며 손에 묻은 가루를 털어 줬다. 내버려 두지 사사건건 귀찮게 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혼자 있고 싶어.”

“그래.”

며칠간 이상한 일들이 반복됐다. 하준은 유명한 디저트와 과일들을 사 오며 서하에게 제안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아이를 가져서인지 가족을 빌미로 협박하지 않았다. 하준의 말을 전면적으로 무시할까 했지만 미묘하게 변하는 표정이 통쾌해 웃으면서 상대했다.

서재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서하를 걱정한 하준은 집을 나간 승언의 방을 개조해 방을 만들어 주었다. 2층으로 올라가면 하준과 완전히 분리되지만, 하준이 탐탁지 않아 해 2층 대신 주인이 없어진 방으로 낙점되었다.

방 안에 들어오니 마음이 안정되었다. 과도할 정도로 각양각색의 쿠션들이 바닥에 깔려 있어 쿠션 늪을 헤쳐 나가며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새벽이 되면 하준의 방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잠시의 자유를 만끽했다.

엎드려 누워 있던 서하는 문득 자세를 바꿔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주의 사항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던지라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알지 못했다.

“배 눌렸다고 다치진 않겠지?”

판판한 배를 여기저기 만져 보며 혼잣말을 하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쿠션을 주워 배 양옆에 두었다. 어떤 아이일지 잠깐 궁금증이 있었으나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라도 잊기로 했다.

“원망할 거야? 나한테 왔다고…….”

눈시울이 붉어지고 침울해지는 기분에 침대에서 내려온 서하는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골치 아픈 일이라도 있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는 하준에게로 다가가니 금세 표정을 바꿔 필요한 게 있냐며 물음이 날아왔다.

“기분이 너무 더러워.”

“감정 기복이 생길 수 있다고 했는데 페로몬을 맡으면 괜찮아진다더군. 너만 괜찮다면…….”

“아니, 하지 마. 차라리 더러운 게 나을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은 게 페로몬 때문임을 안 서하는 서재에 관련 책이 있지 않을까 싶어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따라오는 하준을 상대해 주지 않은 채 서재에 들어와 책장을 훑어 내렸다. 책 내음에 마음이 진정됐다. 빼곡한 책장은 철학과 전문 서적으로 가득 차 있어 육아 관련 책은 없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찾는 책이라도?”

“…….”

눈높이에는 찾는 게 없어 쭈그리고 앉으니 손때가 많이 묻은 동화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최하준도 동화를 읽었던 적이 있었겠구나. 책 한 권을 빼내고 펼쳐 보니 흐릿하지만 유려한 글씨로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오……늘은 네가 웃어 줘서 행복했다. 함부로 잡지 마.”

서늘한 손이 손목을 잡아 놀란 서하는 하준을 눈을 흘겼다. 답지 않게 동요하는 눈동자가 쥐고 있던 책을 가져가 찬찬히 보더니 이내 책을 덮어 책상 위로 던졌다. 반동으로 큰 소음을 내며 바닥에 떨어져 책의 겉표지가 찢어졌다. 과민 반응을 보여 호기심이 생긴 서하는 하준을 밀어내고 책을 주워 들었다.

“찢어졌네. 왜 던지고 난리야.”

“……원하는 책이 있다면 말을 해. 없으면 당장 사 올 테니까.”

“이거 누구 글씨야? 엄청 잘 쓰네.”

다 벌어져 떨어지려는 책을 조심스럽게 넘겨 보며 메모들을 속으로 읽었다. 화를 냈지만 다시 돌아왔다, 어른스러운 척하지만 결국은 애였다, 잠이 든 모습이 사랑스러웠다는 등 대상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메모의 주인공은 하준일 거다. 그렇다면 이 글은 쓴 사람은 누구일까.

“그만 보라고 했어.”

“그러고 보니까 지금 회장님은 네 할아버지잖아. 부모님은?”

“윤서하!”

“뭐.”

역린을 건드린 모양인지 불같이 화를 냈다. 한동안 언성을 높인 적 없는 하준의 반응에 기쁜 마음으로 더더욱 자극했다. 서하가 서 있던 책상까지 저벅저벅 걸어온 하준은 서하의 어깨를 붙잡고 서재 밖으로 밀어내려고 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널 낳아 준 분을 어머니라고 불렀어? 아버지라고 불렀어?”

“…….”

고개를 뒤로 젖히니 상처를 입은 게 역력해 보였다. 어깨에서 스르륵 내려가는 손을 확인하고 서재에서 나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쿠션을 벽에 두고 기댄 서하는 흥미를 잃고 책을 쿠션들 사이에 대충 던졌다.

알파는 자신을 낳은 오메가에게도 똑같이 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모인데. 그러나 하준이 부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때는 궁금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궁금했다.

똑똑-.

“윤서하 님. 저녁 준비되었습니다.”

“네.”

저녁을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하준의 표정이 궁금해서 식탁으로 갔음에도 하준이 나와 있지 않았다. 앉지 않고 멀뚱멀뚱 식탁 앞에 서 있으니 하준은 몸이 안 좋아 거르겠다고 홀로 먹어야 한다고 정웅이 말해 줬다.

“많이 안 좋대요?”

“네, 그러니 오늘은 혼자 드셔야 할 것 같습니다. 초기니까 앞으로 몸가짐도 조심하고 식사도 거르지 말아야 합니다. 잘 아셨죠?”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하준도 없겠다 목적이 사라져 부엌에서 나온 서하는 하준의 방문 앞에서 멈춰서 문을 두들겼다. 똑똑 거리는 소리에 답이 없자 점점 빨리 문을 두드리던 서하는 이상하게 답이 없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

몸이 안 좋다는 게 맞나 보다. 하준은 침대에 누워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제대로 역린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침대맡에 앉아 하준을 구경하고 있는데 인기척을 느낀 하준이 눈을 떴다.

“…….”

“…….”

반쯤 눈을 뜨며 자신에게로 손을 뻗는 하준을 제지하지 않은 서하는 뭘 할지 지켜보았다. 조심스럽게 뺨을 쓰다듬고 손의 깍지를 껴 오는 하준은 절박해 보였다. 앓아누울 정도로 상처를 줬건만 가지 말라고 말하는 하준을 이해하지 못했다.

“윤서하…….”

“내가 너한테 뭐길래 이렇게까지 참는 거야?”

“…….”

“나를 사랑하기라도 해? 그래서 이런 거야?”

머리가 울려 서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웅얼거렸으나 사랑하냐고 묻는 말은 똑똑히 들렸다. 사랑한다고 해도 말할 수 없었다. 말해서는 안 됐다. 손을 풀어내려고 하는 서하를 보니 다급해진 머리는 뭐라도 말을 하라며 부추겼다.

이성과 본능이 치열하게 싸웠으나 약해진 몸으로 인해 본능이 우위를 점령했다. 그토록 숨겨 왔고 감췄던 마음이 입 밖으로 나왔다.

“사랑해.”

“……뭐?”

경멸하는 표정을 두 눈으로 담은 하준은 쓰게 웃었다. 인과응보였다. 이제 방을 나가겠거니 생각했는데 서하는 나가지 않고 피식피식 웃었다. 아니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

“사랑해? 네가 나를? 근데 난 너를 사랑하지 않아. 너랑 박승언이랑 나에게는 똑같이 내 인생을 짓밟은 쓰레기 새끼들이야.”

“…….”

“네가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걸 바칠 수 있을 정도로 간절해. 사랑한다는 말이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이왕이면 평생 가지고 있다가 그대로 죽어 버려.”

“……그래.”

***

모든 음식 냄새가 역했다. 처음에는 자의에 의해서 음식을 거부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음식을 먹지 못하니 정웅이 안절부절못했고 하준 역시 갈수록 말라 가는 서하를 보며 혀를 찼다.

“먹고 싶은 건 없나. 하다못해 음료수라도 좋으니…….”

“비켜. 네 얼굴 보니까 더 메슥거려.”

배가 고픔에도 입에 넣기만 하면 역하니 짜증이 나는 건 서하도 매한가지였다. 물에서 비린내가 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아 입 안이 바싹 말랐음에도 불구하고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산책이라도 할까? 그러면 조금 나아질 수도 있어.”

“다 죽은 풀 보라고? 아니면 온통 시꺼멓게 차려입은 감시자들?”

“…….”

“됐으니까 네 할 일이나 해. 네가 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집 안에서 음식을 하지 않은 지 꽤 됐음에도 불구하고 음식 냄새가 집 안 전체를 덮어 놓은 것 같았다. 결국, 화장실로 뛰어간 서하는 먹은 게 없었음에도 헛구역질을 반복했다.

“하…….”

입 안을 헹구고 비척거리며 화장실에서 나오니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인물이 집 안에 들어와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맴돌아 정신 사나워 짜증을 내니 먹은 건 있냐며 안부를 물어 왔다.

“검사는 한가해? 여기 있지 말고 일이나 해.”

“아무것도 못 먹는다고 해서 왔어. 신 과일은 괜찮다고 해서 사 왔는데 먹어 볼래?”

봉지에 담긴 귤을 보니 입맛이 돌았다. 봉지를 건네받은 서하는 소파에 앉아서 귤을 까 입에 넣었다. 새콤한 게 먹을 만했고 굶주린 배는 음식물이 넘어오는 게 반가운지 계속해서 식욕을 자극했다.

“잘 먹으니 다행이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말랐네.”

“그쪽도 못 본 사이에 많이 퀭해졌네. 아직도 집에서 내 사진 보면서 자위해?”

“……싹 버렸어. 말했잖아, 널 좋아한다고.”

승언의 핸드폰으로 사훈에게 메시지를 분명히 보냈는데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사훈에게서 이렇다 할 연락이 오지 않았다. 메시지가 가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사훈과 지호가 배신하고 승언에게 붙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전자보다는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여 겨우 돌았던 입맛이 사라졌다.

“어……? 맛없어? 다른 거라도 사 올게.”

“형.”

“어, 말해.”

오랜만에 서하에게 형이라고 불린 승언은 미소를 지으며 무슨 말이 나올지 기대했다. 거리를 두면 서하가 찾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알맞았다. 방을 빼고 처음 마주쳤을 때는 경기를 일으키며 손에 잡히는 건 다 던지더니 두 달이 지난 시점에서부터는 나란히 앉아 있을 정도까지 왔다. 다행히 각인을 맺은 흔적은 없었다. 지금도 희미하게나마 파우더 향이 맡아졌다.

“혹시 지…….”

“이건 또 왜 와 있는 거지?”

“쓸모없어.”

지호와 사훈과 연락하고 있는지 물어보려고 한 순간 하준이 나와 훼방을 놓았고 서하는 혀를 차며 하준을 힐난했다. 옆에서 승언이 표면적으로 진정하라고 했지만 더 해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이 새끼나 저 새끼나 나이도 많은 주제에 하는 짓은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이상한 거 냉큼 받아먹지 마.”

“…….”

“그러는 이사님께는 이상한 것도 못 먹이고 뭐 하셨어요.”

설전이 오가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귤 몇 개를 꺼내 품에 넣고 서재로 들어갔다. 귤 즙이 묻은 손으로 책을 만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책상에 올려져 있는 휴지로 손을 닦고 무릎을 굽혔다.

“저번에 어디까지 읽었더라.”

아무렇게나 꽂아 놓은 줄 알았던 동화책은 순서가 정해져 있었다. 하준이 설명해 주지 않아 짐작일 뿐이었지만 왼쪽에 책은 손때가 많이 묻고 메모가 많은 반면에 오른쪽으로 갈수록 새것과 다름없었다.

무료했던 일상을 해소해 줄 거리라 매일같이 서재에 와서 책을 꺼내 읽었다. 얇은 동화책 안에 어찌나 빼곡하게 메모를 해 놓았는지 몇 권을 읽으면 날이 저물었다.

책을 빼낸 서하는 메모를 읽어 내렸다.

“최하준 찌질했네.”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울었다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메모만 봐서는 겁도 많고 애교도 많아 보여 현재 하준과는 영 딴판이었다.

똑똑-.

“들어갈게.”

“…….”

담요를 가져온 하준은 역시나 차가운 방바닥에서 책장에 기대 책을 읽고 있는 서하를 보고 한숨을 쉬며 어깨에 담요를 덮어 줬다. 보이고 싶지 않았던 치부를 낱낱이 보여 불쾌했으나 무기력하지 않고 뭐라도 하니 다행이다 싶어 동화책을 없애지 않았다. 그 사람의 기록을 읽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아이를 가진 서하였기에 한편으로 오묘했다.

“박승언은 돌아갔어.”

“…….”

눈을 비비는 손을 잡아 내린 하준은 눈을 찌르는 속눈썹을 입김을 불어 떼어 냈다. 좀 더 함께 있고 싶지만 회사 일을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고 회사에만 집중하자니 몸이 점점 안 좋아지면서도 몸을 챙기지 않는 서하에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내일 정기 검진 날이라고 했지. 일정 조율할 테니 집에 있어. 같이 가게.”

“혼자 가도 상관없어. 신경 쓰지 마.”

입 안이 텁텁해 귤이라도 먹을까 싶어 바닥을 더듬으며 귤을 찾는데 잡히지 않았다. 같이 갈 테니 집에 있으라는 말과 함께 입 안에 귤이 들어왔다. 옆에서 시중드는 인간도 있겠다 책을 읽는 데 집중하는데 꽃에 관심이 많다는 메모가 보였다.

“꽃 좋아해?”

“좋아……하지. 그런 것까지 적혀 있나?”

하긴, 마당에 꽃이 많이 있기는 했다. 예전에 냉이 가지고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되살아나니 역겨워 하준이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 들어오니까 여기로 와.”

“…….”

“내가 나갈 테니까.”

“최하준.”

“그래.”

“책 구해 줘. 임용 고시 관련 책.”

구해 봤자 오메가인 서하가 임용 고시를 볼 수 없다. 입을 달싹이던 하준은 결국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음식을 먹고 평온한 서하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알았다고 말한 하준은 숨을 죽이고 서하를 지켜보았다. 책이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이대로도 좋으니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핸드폰 벨소리가 평온을 깨뜨렸고 서하의 눈초리를 받으며 하준은 양해를 구하고 서재 밖으로 나왔다. 급한 일은 집에서 처리하고 있으나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아우성인 로운을 진정시킨 하준은 전화를 끊고 서재의 손잡이를 잡으려던 찰나 문고리가 돌아가면서 문이 열렸다.

“어디?”

“씻으러 갈 거야.”

욕실에 들어가 옷을 벗은 서하는 여전히 판판한 배를 문지르며 불안해졌다. 배 속에 아이가 있기는 한 건지 이상하게만치 배가 나오질 않았다. 내일 병원에 가서 물어보기로 하고 씻은 서하는 맨몸으로 욕실 밖을 나왔고 습한 욕실과는 다르게 서늘한 방밖에 공기가 닿아 몸을 떨었다.

“안에 수건이나 가운 둘 다 있는데.”

“아.”

옷을 입지 못했던 경험이 이따금 이런 식으로 나타났다. 욕실 안으로 다시 들어갈까 했는데 하준이 가운과 수건을 들고 있었다. 서하는 하준의 손에서 가운과 수건을 잡아채 물기를 닦아 냈다.

“책은 내일 도착할 거야. 무리하지 말고.”

“어.”

소파에 앉은 서하는 창문 앞에 앉아 바깥을 보았다. 자신의 모습이 앙상한 정원의 가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영양분을 뺏어 가면서 먹지는 못하게끔 방해하는 존재가 달갑지 않았다. 이왕 임신했으면 얌전한 아이였으면 좋겠는데 초장부터 별나기 짝이 없었다.

“밤이 늦었습니다. 방에 들어가시는 게 어떨까요?”

“팀장님. 팀장님은 아이 좋아해요?”

창문에 입김을 불고 꽃을 그리는 서하를 주시하며 호철은 아이를 좋아한다고 했다. 사실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서하가 임신을 했으니 기분이 상하지 않게 하고 싶은 의도가 컸다.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는지 시큰둥한 반응을 한 서하는 본격적으로 꽃을 그리고 있었다.

“잘 그리시는군요.”

“그래요? 학교 다닐 때 최하점 받았는데. 교과 공부는 잘했는데 미술이랑 음악은 항상 최하점 받았어요.”

“제 눈에는 예쁩니다. 내일 스케치북이라도 사 올 테니 오늘은 그만하고 들어가시죠.”

사람이 간사한지 상대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숨이 막혀 왔다. 하준과 승언에게 정을 주기는 싫었고 하준의 수족인 정웅은 더더욱 싫었다. 유일하게 집 안에 있고 편의를 봐 주는 게 호철이었기에 서하는 호철에게 이따금 학창 시절 이야기도 할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손가락이 시려 알겠다고 하고 일어난 서하는 도살장에 가는 소처럼 움직이지 않은 발걸음을 옮겨 하준의 방으로 들어갔다.

“왔어?”

“…….”

킹사이즈의 침대가 빠지고 더블 사이즈 침대 2개로 바뀌었으니 하준과 같은 공간에서 자야 한다는 게 탐탁지 않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노트북을 달고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만 보면 노트북을 덮고 말을 걸었다.

“내일은 아침 일찍 나갈 거야. 밥 잘 챙겨 먹고 마당에 나가고 싶으면 마 팀장이랑 동행하고. 병원 갈 때는 따뜻하게 챙겨 입고, 또…….”

“닥쳐.”

입을 다무는 걸 확인한 서하는 침대에 올라가 이불을 얼굴 끝까지 덮고 하준에게서 등을 돌렸다. 말이 너무 많았다. 잠든 척을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으니 스탠드가 꺼졌다.

아이를 가져 좋은 점은 금방 잠에 빠져들 수 있다는 거다.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하준은 핸드폰 불빛을 의지하며 방을 나가 서재로 들어갔다. 서하가 읽고 바닥에 고이 놔둔 책을 펼친 하준은 메모를 손으로 쓸어 보았다. 글씨는 사람을 나타내는 거니 예쁘게 쓰라고 누누이 말했던 사람이었다.

“아직 마주할 용기가 없습니다.”

놓여 있던 상태대로 바닥에 둔 하준은 거실로 지나치다 창문을 보았다. 군데군데는 지워졌지만 몇 군데는 엉성한 꽃들이 남아 있었다. 거실에 나가 있더니 그새 그린 모양이었다. 거실 불을 켜고 꽃이 지워지기 전에 사진을 찍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잠깐 사이에 이불을 걷어차고 몸을 웅크리고 자는 서하의 몸을 펴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오랜만에 보는 혈색을 띠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손을 서하의 배 위에 살포시 올렸다. 아이로 인해 서하가 힘들어하는 게 불쾌했다. 몸을 더 안 좋게 만든다면 아이를 지워서라도 서하를 지켜 내리라 생각하고 침대에 누웠다.

***

“너무 얇게 입고 온 거 같은데.”

“못 입고 다녔을 때보단 나으니까 상관하지 마.”

겉옷도 없이 목이 휑하니 드러난 니트 하나만을 입은 서하에 하준은 한숨을 쉬며 집 안에 다시 들여보내려고 했으나 서하는 이미 차에 올라타 문을 닫아 버렸다. 운전석에 앉은 호철이 난색을 보이며 창문을 내렸고 차 안에서 괜히 와서 지체한다는 불평이 들려왔다.

“붙지 마.”

“그러지.”

안전벨트를 한 걸 확인한 하준은 차 문에 합체된 듯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시트에 몸을 기댄 서하는 구석에 구겨져 있는 하준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욕먹는 게 취향인가 싶을 정도로 끈질겼다. 저래 봤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본색을 드러낼 거라 생각하며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점심은?”

“…….”

“못 드셨습니다.”

하품을 하며 대답할 의지가 없는 서하 대신 호철이 룸미러를 보며 하준의 질문에 응답했다. 오전까지만 하더라도 다 죽어 가는 낯빛으로 몸을 웅크리고 겨우 숨만 쉬다가 화장실을 들락날락하기 바빴다. 하준에게 부가 설명을 하려고 했으나 룸미러로 목을 긋는 제스처에 입을 다물었다. 정말이지 강인한 사람이다.

“집에 들어갈 때 간단한 거라도 사서 가지.”

“어차피 버릴 건데 살 필요가 있어? 돈지랄이 심하네.”

생긋 웃으며 말한 서하는 하준의 반응을 기다렸다. 어디까지 비위를 맞춰 줄까. 군림하는 게 천직인 사람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건 힘들 거다. 예상과는 다르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서하는 떨떠름해 인상을 썼다.

“도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열기도 전에 문이 열리면서 찬 공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몸을 보고 무감각하게 고개를 올린 서하는 하준에게 비키라고 했다. 하준이 순순히 옆으로 비키니 하준이 막아 주었던 바람이 체온을 빼앗아서 몸이 떨려 왔다.

“찬 바람을 오래 쐬면 좋지 않으니 들어가지.”

“……이딴 짓 하지 마.”

어깨 위로 두툼한 코트가 얹어지면서 따듯한 공기가 몸을 휘감았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코트를 잡아채 하준에게 돌려주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홀로 들어가 접수를 하니 웃고 있던 직원의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한껏 퉁명스러워졌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윤서하입니다. 오후 2시로 예약했습니다.”

“오메가증 가져오셨나요?”

“아, 두고 온 거 같은데 신분증으로도 가능할까요?”

“하…….”

대놓고 한숨을 쉰 직원은 서하에게 불평을 했다. 알파도 없이 혼자 오고 무안을 줘도 묵묵히 듣고 있는 서하에 직원은 비난을 날리다 선심 쓰는 척 신분증을 받았다.

SD 기업의 이사인 최하준이 보호자로 되어 있었고, VVIP이니 각별히 유의하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만행에 숨을 들이켠 직원은 상황을 무마시키려고 웃음 지었다. 그때 하준이 서하 옆에 섰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멀리서도 언성을 높이는 게 들려서 말이지.”

“신경 쓰지 마. 내가 집에 물건 두고 와서 그래.”

서하에게 짓지 않았던 표정을 지은 하준은 직원을 내려다보았다. 앉아 있는 직원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상황 파악을 한 건지 입을 달싹거리며 죄송하다는 말을 속삭이고 있었고 하준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혀를 찼다.

“겨우 그걸 사과랍시고…….”

“네가 더 시끄러워. 조용히 해.”

베타인 자신의 말에는 묵묵히 듣고 있던 오메가가 알파에게 눈을 흘기며 명령조로 말했다. 알파의 시선이 오메가로 옮겨 간 건 다행이었으나 걱정이 됐다. 걱정이 무색하게 표정을 풀은 알파가 잘못했다며 오메가에게 사과를 했다.

“저…… 접수된 건가요?”

“……네! 여기서 앉아 계시다가 들어가시면 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가리키니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서하가 의자에 앉았고 하준은 앉지도 않은 채 뒤에서 서성거렸다.

“저 직원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네.”

“안 보이길 바라나?”

“……쯧.”

모니터에 뜬 이름을 확인한 서하는 혀를 차며 의자에서 일어나 진료실 문을 밀었다. 하준이 뒤에 있는 건 알았지만 문을 밀어 닫은 서하는 평온하게 자리에 앉았다. 시커먼 게 없어지니 깨끗하고 밝은 것들만 보였다.

드르륵-.

“아…… 끈질기네.”

“흠. 불편하신 점은 없으셨나요? 저번보다 많이 마른 거 같은데 식사는 잘하고 계시고요?”

고개를 젓는데 뒤에서 하준이 근래 먹었던 음식들을 나열하고 있었다. 의사가 난처하게 웃는 걸 본 서하는 의자를 뒤로 밀어 하준의 입을 다물게 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못 먹겠는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본인과 아이를 위해서라도 잘 드셔야 합니다.”

“네.”

몇십 년 동안 병원에 있으며 산모라는 용어가 입에 붙었으나 미간이 찌푸려지는 서하를 본 하준이 이름을 부르라고 언질을 줬기에 무의식적으로 잘못 쓸까 진땀을 빼며 진료를 이어 나갔다. 아이가 제대로 있는 건지 궁금했던 서하가 의사에게 묻자 잘 자라고 있다는 말과 함께 저번에 듣지 못한 심장 박동을 들려주겠다 했다.

“아…….”

진료실 안에 콩닥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말로 있었다. 내 배 속에 아이가 있었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기분이었고 굳이 말하자면 싫은 쪽에 가까웠다. 옷매무새를 정리한 서하가 생각에 잠긴 듯 보여 이번에도 하준이 안내 사항을 들었다.

초음파 사진을 받아 든 서하는 어디로 보아도 아이가 보이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주머니에 사진을 넣고 복도를 걷는데 사진이 떨어져 있어 주워 든 서하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걸 알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주우신 건가요?”

“네. 그쪽 건가요?”

사진을 건네주니 소중한 보물인 듯 품에 넣고 안도하는 여성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이상했다.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하는 여성에게 괜찮다고 하니 어느새 진료실에 나온 하준이 곁에 있었다.

차에 올라탄 서하는 여성을 떠올렸다. 평범한 베타였으면 나도 저랬을까. 의미 없다고 생각한 서하는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하준의 허벅지에 던졌다.

“뭐가 보여?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응. 잘 보여.”

하준에게서 아까의 여성이 얼굴이 보였다. 같은 사진을 보고도 하준과 자신의 표정은 상극이었다. 하준이 평온하게 웃는 게 싫었다. 자애로운 척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의 얼굴을 짓는 건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네 얼굴 보니까 짜증 나서.”

하준의 손에서 사진을 낚아채고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버렸다. 경악하며 바닥에 손을 뻗어 주우려는 하준에게 줍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니 손이 다시 거두어졌다. 바닥에 미련을 못 버리는 하준을 보니 통쾌보다는 악행을 저지른 것 같은 죄책감이 몰려왔다.

“팀장님, 저 앞에 타고 싶습니다.”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차가 갓길에 멈췄고 문을 열고 내려 앞 좌석으로 옮겨 탔다. 뒷자리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으나 관심을 주지 않았고 차가 멈추자마자 내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사님은 다시 회사로 가신답니다.”

“알려 주실 필요 없어요.”

“네…….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안 좋든 말든 최하준은 알 바가 아니니까…….”

“이사님 말고 윤서하 님 말씀입니다. 아까부터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거울을 보니 웃음기 없는 얼굴만 보였다. 호철에게 사진을 찢은 게 잘못이냐고 물은 서하는 고심 끝에 그렇다는 대답을 들었다. 호철이 아이는 죄가 없다고 덧붙였으나 떨리는 서하의 눈동자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아이는 죄가 없다. 없나? 아니지, 없죠. 아닌데…… 최하준 자식이잖아?”

하준의 아이이기도 서하의 아이이기도 했으나 서하의 머릿속에는 최하준의 아이라고만 여기는 듯했다. 신경을 거슬리지 않게 하기 위해 뒤로 한 발짝 물러난 호철은 하준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서하를 주시했다.

“모르겠네요. 아, 청소하기 힘들 텐데 찢어서 죄송해요.”

“아뇨……. 그 문제는 괜찮습니다.”

저녁으로 귤을 몇 개 까먹고 소파에 앉아 고민했다. 해가 지고 호철과 정웅을 올려 보낸 서하는 불도 켜지 않고 호철이 남긴 말을 곱씹어 보았다. 최하준은 뭐라고 생각할까.

띠리링-.

양반은 되지 못하는지 하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집 안에 불이 꺼져 있으나 서하가 잠들었단 보고를 받지 못한 하준은 발걸음을 바삐 옮겨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온기조차 없는 침대를 만진 하준은 불안감에 방을 나와 거실의 불을 켰다.

인기척도 없이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서하에게 다가간 하준은 서하가 소리를 삼키며 울고 있음을 알아챘다. 뭐가 또 너를 힘들게 했을까. 한쪽 무릎을 꿇은 하준은 서하의 팔부터 어깨까지 천천히 올라가며 어루만졌다. 뿌리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기며 어깨를 잡고 조심히 고개를 들게 하니 만져지는 볼이 뜨거웠다.

“왜 그래. 왜 여기서 혼자 울고 있어.”

“최하준. 배 속에 아이는 죄가 있을까?”

“뭐……?”

“네 아이니까 싫어하려고 하는데 그게 잘 안 돼……. 왤까. 아니다. 그냥 네가 잘못한 거야. 그치? 그런 거지? 나도 아이도 잘못 없어. 나쁜 건…… 나쁜 건 다 너야.”

한 글자 한 글자 터트리듯 내뱉는 서하의 손을 잡고 주무르며 하준은 다 자신의 잘못이라며 네 잘못이 없다고 나지막이 말을 했다.

***

아이에게 태명이 없다고 하니 의사의 표정이 미묘하게 찡그려지며 태명을 지어 주고, 태아가 들을 수 있게 종종 말을 걸어 주라는 조언을 떠올리며 배를 쓰다듬었다.

“태명…… 뭐가 좋을까. 혹시 듣고 있어……?”

미동도 없는 배에 머쓱해져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나온 서하는 서늘한 공기에 몸을 움츠렸다. 바깥은 한여름의 더운 날씨였다. 에어컨 바람은 서하에게는 쾌적보다는 뼈에 바람이 들어오는 듯해 전원을 껐다.

“나갈 거면 말하지 그랬어.”

하준의 손에 들린 담요를 받아 들어 어깨에 걸친 후 리모컨을 찾아 거실을 돌아다녔고 발에 차인 리모컨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줍기 어렵겠다. 허리를 조금만 숙여도 끊어질 것 같아 하준에게로 시선을 돌리니 하준이 리모컨을 주워 손에 쥐여 줬다.

“배는 이제 괜찮은 거 맞지?”

“……가끔 아파.”

태동이 잘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이따금 배가 아플 정도로 크게 고통이 밀려왔다. 하준의 페로몬이라도 맡으면 안정이 되었지만, 하준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고 혼자 감내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베타가 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붙잡으며 서하는 견디고 또 견뎠다.

“아이 이름은 정했나. 고민하던 거 같던데 아직 짓지 않았으면 내가…….”

“그걸 네가 왜 지어. 미래로 할 거야.”

배가 갑자기 아파 와 몸을 옆으로 웅크린 서하는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 앓았다. 충동적으로 지어 아이가 상처를 받았나 보다. 몸을 더더욱 웅크리며 서하는 고통을 참았다.

“진정하고. 미래…… 예쁜 이름이니 아이도 좋아할 거야.”

“흐으……. 끝까지 위선 떠네.”

서하를 안아 들어 방 안에 들어온 하준은 묵묵히 들으며 손수건으로 서하의 식은땀을 닦아 냈다. 소식의 수준을 넘어서 음식을 입에 전혀 대질 못하는 서하로 인해 하준 역시 덩달아 체중이 감소하고 수척해져 갔다.

더운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찬 바람을 쐬지 못하고 더위를 타는 서하의 옆에서 하준은 손으로 부채질을 해 미약한 바람을 일으켰다.

“뭐 해?”

“조금이라도 시원해질까 싶어서.”

갈수록 사람이 이상해져 간다. 미친 건 아니고 뭐랄까, 어벙? 찌질? 그래, 빙구 같다.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부채질을 하는 광경을 보니 더욱 짜증이 몰려와 손을 쳐 냈다. 엎드려서 안 보고 싶은데 엎드릴 수 없는 몸에 눈을 감고 보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아…….”

“왜 그러지? 어디 아픈가? 병원? 병원에…….”

“좀…… 닥. 아니다. 그냥 나가.”

미래가 행여 들을까 봐 욕을 도로 삼킨 서하는 마지막으로 인내심을 쥐어짜 내 방문을 손으로 가리키며 축객령을 내렸다. 순순히 나가는 하준을 보고 웬일인가 싶었으나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 무언갈 바리바리 싸서 들어왔다.

“내 몸 건드릴 생각 하지 마.”

“잠시면 되니 거기까지만 허락해 줘.”

바닥에 놓인 대야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고 하준의 손에는 수건이 들려 있었다. 수건을 물에 적셔 짜낸 하준은 서하의 손을 수건 위에 올리고 천천히 주물렀다. 얼음장 같던 손이 따뜻해질수록 서하의 미간도 서서히 펴지는 걸 본 하준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미소를 지었다.

“회사에서 잘렸어? 너무 한가해 보이는데.”

“잘리면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있으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뭐라는 거야. 근데 지금 모습은 이사보다는 노예가 더 적성에 맞아 보이기는 하다.”

손 저림이 사라져 손을 접었다 폈다 한 서하는 이번에 발을 마사지하고 있는 하준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애 한번 끔찍이 여기는 모양이었다. 미래야, 너 버려지지는 않겠다. 배를 만지며 미래에게 말을 건 서하는 발을 움직여 물장구를 쳤다.

“집사님이 보면 기함할 광경이네.”

“상관은 없다만.”

“그래?”

가장자리를 발로 눌러 대야를 엎은 서하는 서서히 젖어 가는 하준의 바지를 보았다. 물이 식어 뜨겁지는 않겠으나 발을 씻은 물이라 기분이 나쁠 터였을 텐데 하준은 여분의 수건을 들어 서하의 발에 물기를 제거하고 침대 위로 다리를 올려놓기 바빴다. 머리 위에서 실소가 들려왔지만, 하준은 일어나 이불을 덮었다.

“덥더라도 손발이 따뜻한 게 몸이 좋으니 덮고 있고, 바닥에 물기가 있으니 내려오지 말고 기다려.”

“와……. 어이없어.”

닫힌 문에 베개를 집어 던진 서하는 곧바로 밀려오는 근육통에 후회하며 몸을 눕혔다. 언젠가는 저 가면을 벗겨 내고 마리라. 씩씩거리고 있는데 오랜만에 식욕이 돌았다. 고기 먹고 싶다. 쌈장에 찍어 먹기도 하고 양파 소스를 묻히고 양파 채를 얹어 한입에 먹고 싶어졌다.

움직이기만 하면 극단적으로 움직이던 미래가 애교 수준으로 배를 툭툭 쳤다. 마치 동조하는 것만 같았다.

“너도 먹고 싶어?”

배에 손을 올리니 이번에도 손바닥에서 미세하게나마 감각이 느껴졌다. 바닥을 닦을 수건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온 하준은 배를 쓰다듬으며 동의를 구하는 서하의 말을 듣고 걸음을 멈췄다. 혼잣말이 끝나길 기다리는데 고개를 돌린 서하가 하준에게 고기가 먹고 싶다며 처음으로 먹고 싶은 걸 말했다.

“고기……? 잠시, 잠시만 기다려. 어떤 고기를 먹고 싶지?”

“집에서 말고 고깃집 가고 싶어. 옛날 분위기 고깃집. 드럼통 가운데에서 고기 굽고 양파 소스 나오는 곳.”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던 하준은 입을 다물고 서하가 말하는 가게가 어디 있을지 생각했다. 하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생기 있던 얼굴이 점차 사라지면서 서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종국에는 베개를 끌어안고 실망해 뒤로 돌아눕는 서하를 본 하준은 나가자고 다급하게 말했다.

“여름이라고 얇게 입지 말고. 가게 내부는 추울 수 있으니 카디건이라도 챙겨.”

“우리…… 조용히 하고 나가면 안 될까?”

추리닝 바지와 품이 큰 카디건을 걸친 서하는 신발을 구겨 신고 마당으로 나갔다. 숨이 막힐 듯한 열기가 느껴졌지만 고기를 먹겠다는 일념으로 대문을 향해 걸었다. 마당에 있던 경호원들이 수군거리기는 했으나 행동을 제지당하지는 않았고 수군거림조차 하준이 나오자 조용해졌다.

“모자 정도는 쓰는 게 좋을 것 같군.”

차에 먼저 올라타라고 한 하준은 로운에게 전화를 걸어 서하가 원했던 고깃집을 설명했다. 전화기 너머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로운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하준이 재차 물으니 찾아보겠다며 잠깐의 침묵이 발생했다.

“마침 아는 곳이 있습니다. 근데…… 서하 씨가 싫어할 것 같은데요.”

“양파 채가 없는 곳인가? 일단 보내 봐.”

후기를 찾아보니 서하가 말한 모든 게 충족이 되어 호철에게 주소를 넘긴 하준은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서하를 보았다. 드디어 식욕을 찾은 서하에 한숨을 돌린 하준이 차에 오르자 출발했고 서하는 점점 익숙한 곳으로 가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어 창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차가 멈추고 고깃집 안에 들어온 서하는 기억이나 손바닥에 주먹을 톡 쳤다.

“와 본 적이 있던 곳인가? 로운이 추천해 준 곳인데.”

“같이 왔어. 내가 먼저 오고 나중에 걔가 오고.”

자리에 앉은 서하는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벽에 허리를 기댔다. 순간 기분이 잡칠 뻔했으나 테이블에 준비된 여러 부위의 고기를 보자 행복해졌다. 고기를 굽던 하준은 다리를 흔들어 부딪히는 서하의 다리를 붙잡고 제지하니 젓가락을 입에 문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고기라니. 그래도 먹고 싶은 게 있어서 다행이군.”

“그러게. 하필 여기 온 것도 놀라운데 맛있어서 좋다.”

뜨거운 고기를 양파 소스에 푹 찍으니 먹기 적당한 온도로 되어 입 안에 가득히 넣었다. 콜라도 마시고 싶었으나 몸에 좋지 않다며 묵살당했고 콜라 대신 탄산수가 상 위에 올라왔다. 아까부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직원이 탄산수를 내려놓고도 가지 않고 쭈뼛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 혹시. 저번에…….”

“네, 저 맞아요.”

직원이 하준을 쳐다보며 눈을 굴렸고 서하는 괜찮다고 말하며 직원을 보냈다. 영문을 모르던 하준이 묻고 싶은 눈치였으나 말로 꺼내지 않았고 서하도 사서 말해 줄 필요가 없어 고기를 먹는 데 집중했다.

“소란스러운데 잘 먹으니 다행이야.”

“이게 시끄러워? 곱게 살아서 그런가.”

저녁 시간이 되니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북적거렸으나 시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불판의 열기로 더워져 카디건을 벗을까 하다가 집이 아님을 인지한 서하는 도로 여몄다. 스스로도 몸이 변하는 걸 받아들이는 데 오래 걸린 만큼 얼마 없는 오메가, 특히 남자 오메가가 임신하는 모습을 잘 보지 못한 사람들은 거부감을 보일 게 뻔했다.

“신경 쓰이면…….”

“넌 생각하는 거 하나하나가 별로야. 입만 열면 너무 깨. 저길 봐. 저게 내가 원하는 가족상인데…… 네가 다 망쳤어.”

서하가 고갯짓으로 가리킨 방향을 보니 가족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고 있었다. 아련한 눈빛의 서하를 본 하준은 쓰게 웃으며 고기를 구웠다. 탄산수를 손에도 대지 않은 걸 확인하며 콜라를 주문하고 편히 먹을 수 있도록 고기를 잘라 앞접시에 올리는데 한 남성이 다가와 서하에게 알은척을 하며 자리를 잡았다.

이건 뭐야. 남자를 위아래로 훑은 하준은 영락없이 조폭으로 보이는 인물에 경계하며 서하를 보호하고자 몸을 일으키는데 서하 역시 쌈을 입 안에 넣고 오물거리며 남자에게 눈인사를 하고 있었다.

상황 파악이 덜된 하준이 주춤거리자 고기를 목으로 넘긴 서하는 고기나 구우라고 하고 남자에게 제대로 인사했다.

“사장님 오랜만이네요.”

“직원이 연락 줘서 와 봤는데. 빈말이라도 좋아 보이지는 않네.”

눈빛 한번 살벌하다. 어깨를 으쓱인 서하는 폭발 직전인 하준을 보고 슬슬 말려야 할 것 같아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하준의 눈앞에 내밀었다. ‘아.’라는 소리와 함께 입을 벌리는 시늉을 하니 하준이 곧이곧대로 받아먹었다.

“잘 먹네. 나 양파 좀 더 가져다줘, 셀프래.”

하준에게 접시를 쥐여 주고 손을 내저어 보낸 뒤 사장을 보았다. 말을 아끼라 조언한 서하는 배를 빤히 쳐다보는 사장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그렇게 되었다고 얼버무렸다. 바깥 한번 나오기 힘들었다.

“이 정도면 되나?”

“어, 충분해.”

“엥? 너 오메가냐? 남자 새끼가 배만 튀어나왔길래 뭔가 했더니 오메가구만. 재수 없게 말이야.”

젓가락을 접시 위에 내려놓고 탁자 위에 팔꿈치를 대고 손을 겹쳐 턱을 받쳤다. 술을 꽤나 거나하게 마신 모양이었다. 외출할 때마다 종종 겪었던 일이라 대처 방법을 터득한 서하는 생긋이 웃었다. 상황을 진정시키려는 사장의 팔을 붙잡아 말린 서하는 상황 처리의 제격인 하준을 불렀다.

“하준아. 네 말대로 조금 소란스러운 거 같아. 오랜만에 먹는 건데 먹기 싫어지네.”

“먹고 있어. 해결하고 올 테니.”

하준이 남자의 멱살을 붙잡고 입구로 끌고 가니 반항도 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 나갔다. 경쾌한 종소리를 들으며 젓가락을 다시 쥔 서하는 하준이 리필해 온 양파에 고기를 싸 먹고 있으니 처음에는 어이없어하던 사장이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쥐고 사네, 아주 꼼짝을 못 해. 저놈이 예전에 너 잡으려고 깽판 친 놈이야?”

“맞아요.”

“그래도 괜찮다고 해야 하나. 사람이 바뀐 모양이야. 아주 꿀이 뚝뚝 떨어지더라. 내가 앉으니까 패려고 하던데. 혹시 내일 가게 폐업 처리 아니면 뉴스 뜨는 거 아니냐?”

“하,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에요. 본성은 안 바뀌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나간 그대로 단정한 차림으로 돌아온 하준을 보며 서하는 속으로 다시금 되새겼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사장에게 물냉면과 비빔냉면을 주문하고 가게를 둘러보았다. 소란을 정리하기 위해 하준이 모든 비용을 지불했고 소란을 피운 일행은 내보냈다.

아닌 척 구경하는 눈빛들이 달갑지 않았으나 원래부터 동물원 동물 같은 눈빛을 많이 받아 왔기에 서하는 애써 무시했다. 직원에게 냉면을 받아 든 서하는 매콤한 게 끌려 물냉면을 하준에게 주고 냉면을 먹었다.

“아까 말했던 말 무슨 뜻인지 듣고 싶은데. 로운이랑 같이 왔다는 말도…….”

“음, 네가 나 잡으라고 시킨 날. 여기로 도망 왔어. 사장님이 그때 도와줘서 겨우 탈출했는데 하필 도망간 곳이 박승언 집이었지? 운도 더럽게 없어서…….”

“큽, 실, 실례하지.”

사레가 들린 하준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계속해서 기침을 해 댔다. 한로운이 말한 게 이런 의미였나. 좌불안석인 하준과 반대로 먹기에 바쁜 서하는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하준의 물냉면을 쳐다보았다.

“그땐…… 내가 생각이 짧아서…….”

“물냉면 안 먹을 거면 나 줘.”

“어? 그래.”

말을 끊은 서하는 물냉면까지 야무지게 먹고 만족하여 활짝 웃고 일어났다. 일어나니 몸이 휘청이며 약간 기울어지자 하준이 옆에서 부축했고 중심을 잡을 때까지만 도움을 받은 서하는 카디건을 여미고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와 차에 올라탔다.

“잘 드셨습니까.”

“엄청 맛있네요. 팀장님도 나중에 여기 와 보세요.”

호철과 잡담을 나누던 중 지하터널에 들어가면서 시시각각으로 빛이 들어오고 사라졌다. 서하에게 사과를 할 타이밍을 노리던 하준은 호철과 수다를 끝낸 서하에게 과거의 과오에 대해 잘못을 빌었다. 따뜻한 주황빛이 차 안으로 들어오면서 언뜻 미소를 띤 서하의 얼굴을 본 하준은 안도했다가 빛이 사라지자 미소가 아님을 깨달았다.

“용서 빌지 마. 받아 줄 생각도 없으니까. 넌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방패막 역할만 해.”

***

선선한 가을이 왔고 마당에 있는 나무들이 울긋불긋 물이 들어 시간이 날 때마다 감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서하가 우위를 점령했으나 몸에 밴 두려움은 종종 하준을 의식하고 외현해 아슬아슬한 관계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준이 해외로 출장을 가던 날 같이 가지 않껬냐는 제의를 했으나 서하는 거절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을 하라며 핸드폰을 받았으나 연락할 일이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연락하는 게 더 웃긴 짓이었다.

「오늘 돌아가는 날이야. 최근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안 좋아졌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되도록 외출하지 말고 집에서 보지.」

미리 보기로 뜬 내용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쿠션들 사이에 던진 서하는 배를 쓰다듬었다.

“미래야, 얼마 남지 않았네. 우리가 헤어질 날.”

이상하게도 미래는 헤어짐을 입에 담을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움직여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괜찮아, 미래에게도 자신에게서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몸을 숙이기 힘들 무렵부터 동화책에 적혀 있는 메모를 읽는 걸 그만뒀다. 읽지 않아도 뻔했다.

자식을 뺏긴 오메가. 심지어 사랑했던 아이였다. 비참했을 거다. 그리고 당신도 예상을 했겠지. 아이가 커서 어떤 사람이 될지.

너덜너덜해진 개념서를 들고 서하는 서재를 벗어나 거실로 나갔다. 하준이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남아 소파에 앉았다. 운신이 힘들지만 가만히 있으면 숨이 막혀 왔다. 괜찮은데, 정말 괜찮은데 홀로 남겨진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아…… 제발. 그만해.”

번번이 태동을 느껴 벗어나기는 했으나 그럴수록 죄책감이 더욱 불어났다. 너는 나를 구해 주는데 난 너를.

“팀장님.”

“네. 외출하실 생각이신가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서하는 따듯하게 챙겨 입고 카페로 들어갔다. 한산한 카페에는 자신 말고는 아무도 있지 않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외출을 할 수 있을지 몰랐다. 미쳐 버릴 것만 같았던 날. 하준에게 소리를 지르며 발광을 했더니 자신이 돌아오기 전까지 외출을 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바퀴가 끌리는 소리가 들려 서하는 눈을 떴다. 까르륵거리며 배시시 웃는 아기에게 손 인사를 건네고 위를 쳐다보았다. 피곤한지 하품을 하는 사훈에게 앉으라고 눈짓을 했다.

“오랜만이네.”

“넌 인사가 나와? 아직도, 난 아직도 너 만날 때마다 어이가 없어. 어떻게…… 하.”

“진정해. 도율이 놀란다. 서하 삼촌이야. 안녕.”

서하 앞에 놓여 있던 차가운 음료는 벌컥벌컥 마신 사훈은 너무나 태평한 서하 대신 울분을 터트렸다. 승언의 폰으로 받은 메신저를 처음 봤을 때는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 서하를 찾는 데 열중했었기에 믿지 않았으나 한번 의심을 하니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지호와 논의한 끝에 서하를 되찾기 위해 일을 꾸미던 중 서하에게서 연락이 온 게 두 달 전이었다.

“박승언 그 또라이 새끼.”

“애가 듣는다니까?”

저번보다 말랐으나 눈빛만큼은 또렷해 안심한 사훈은 근황을 물으니 임용 시험을 볼 거라는 말을 듣고 생각을 고쳤다. 정상이 아니었다.

“임용 시험……? 보건으로? 너 복수 전공 안 하지 않았어?”

“국어과 볼 거야. 국어 선생님 하고 싶어.”

볼 수 없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입을 다물었다.

‘서하야, 무슨 일이 있던 거니?’

오랜만에 공부를 하니 재밌다며 웃는 서하에게 사훈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빠!”

“어, 도율아. 배고파? 저기 과일 파는 데 가 볼까?”

도율을 안고 쇼케이스로 가 과일컵을 고르는 사훈을 보며 서하는 생각에 잠겼다. 행복해 보인다. 오메가도 사랑이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구나. 빈 잔의 표면을 어루만지고 있다가 도율의 웃음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떨어뜨린다. 받아, 받아!”

“어? 어…… 내 것까지 사 온 거야?”

한 손에는 도율을 안고 나머지 손으로 음료 3개와 과일컵 3개가 담긴 쟁반을 들고 부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입 안으로 과일을 넣고 의무적으로 씹으며 부자를 보았다. 사훈이 도율에게 사과를 잘게 잘라 넣어 주니 엉성한 포크질로 과일을 집어 사훈에게 서로 먹여 주고 있었다.

“둘이 잘 노네.”

“으엉? 우리? 도율이랑 있으면 재밌어. 눈은 나 닮았는데 성격은 지호처럼 활달해.”

“다행이야. 형 닮아서. 지호 얼굴 닮았으면 마음 아팠을 거야.”

방울토마토는 즙이 터지고 뒷맛이 안 좋아서 음료수를 마셨다. 아이의 이름을 정했냐고 물어보는 사훈에게 미래라고 말하니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해 달라고 했다.

“미래라니까?”

“아니, 그건 태명이잖아. 그리고 뜻도…….”

“아, 상관있어? 어차피……윽. 아악……!”

배가 갑자기 당기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 몸을 웅크렸다. 아직 예정일은 많이 남았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사훈은 서하가 앉아 있는 자리로 가 어깨를 쓸어내리며 상태를 보았다.

“괜찮아? 집에 가 봐야 하는 거 아냐?”

“거기가 왜 집이야! 아…… 미안, 형. 미안해…….”

“으아앙, 바바!”

도율을 달래라고 사훈의 어깨를 떠밀어 보낸 서하는 시트에 몸을 묻고 심호흡을 했다. 미안하지만 생각을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도율의 울음이 그치자 고통도 점차 사라졌고 음료로 목을 축인 서하는 시원한 창가에 몸을 기댔다.

“페로몬이 부족한 거 아냐? 아, 사이가 좋을 일은 없구나.”

“페로몬? 하긴 최하준이 있으면 편해지긴 하더라.”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사훈은 한숨을 쉬었다. 아이에 대해 애정이 생기지 않을 상황이란 건 이해가 가나 아이와 서하 모두 망치고 있는 꼴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몸 안 좋을 때는 페로몬이나 풀라고 해. 너 페로몬 불안해.”

“주위에 오메가가 형밖에 없어서 몰랐는데 그렇게 불안정해?”

단호하게 긍정을 한 사훈은 몸을 챙기라고 잔소리를 했고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뒤에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지호랑 나랑 네 부모님에 대해서 알아봤는데.”

“형.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알고 싶지 않아.”

노을은 사라지고 어둠이 깔리는 하늘을 보다가 사훈에게 일어나자고 했다.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마지못해 일어나는 사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들 나아가고 있는데 멈춰 있는 것만 같아 가슴이 욱신거렸다.

“형 안녕. 도율이도 안녕.”

“다음에 볼 때는 밥 먹을 준비해. 카페 말고.”

“어, 그때는 오메가가 아니니까 편하게 먹을 수 있겠다.”

“뭐?”

사훈에게 덧붙이기 전에 차가 출발했고 나중에 만날 때 말해 주기로 하고 창문을 열었다. 배가 계속해서 당겨 왔고 속은 메슥거려 호철에게 빨리 가 달라고 해 차가 멈추자마자 튕겨나가듯 차에서 내렸다.

“괜찮으십니까? 병원에 가시는 건.”

“아니에요. 과일 먹은 게 얹힌 거 같아요.”

호철의 부축을 받아 집에 들어와 방에 들어왔다. 쿠션에 등을 받치고 손을 주무르는데도 차가운 손은 따듯해질 줄 몰랐다. 이불을 겹겹이 하여 둘러쓰고 온풍기를 틀었음에도 추위가 느껴졌다. 설상가상 미래가 움직이면서 복부가 당겼다.

“제발. 얌전히 있어 줘라.”

똑똑-.

“서하 님. 잠시 들어갈게요.”

호철에게 상황을 들은 정웅은 서하의 상태를 보러 왔다가 한겨울 이불을 겹겹이 덮고 쿠션을 끌어안고 떨고 있는 서하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얼굴을 보기 위해 자세를 낮추고 이불을 걷으려 하니 얼음장 같은 손이 막아섰다.

“언제부터 이러셨어요?”

“잘…… 모르겠어요. 집 안이 너무 추운데 온도 좀 올려 주실 수 있나요?”

정웅이 다급하게 나가고 홀로 남으니 춥고 숨이 막혀 왔다. 불을 켜지 않은 방은 열린 문틈으로 옅은 빛이 들어와 길을 만들었다. 나가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이불을 어깨에 걸치고 방 밖으로 나온 서하는 휘청거리며 거실을 걸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몸이 이끄는 대로 걸은 서하는 하준의 방으로 들어오고서야 하준이 없음을 깨달았고, 하준을 찾는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어 당황했다.

“힘들어. 추워.”

괜찮지가 않았다. 사라지고 싶다. 편해지고 싶었고 누구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거실에서 정웅이 찾는 소리가 들렸고 무너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머리와 어깨에 부딪히는 섬유의 향기를 맡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구원 줄처럼 옷을 잡아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주위에 하준의 옷으로 빼곡히 들어찼고 옷의 무더기 위에서 안정을 취하며 속으로 괜찮다고 되뇌었다. 숨을 크게 들이쉴수록 나아지는 기분에 옆으로 몸을 눕힌 서하는 옷을 이불처럼 덮고 숨을 내쉬었다.

어둠이 가득한 방이 환해지면서 숨을 막히게 했다. 가슴을 두들기며 일어난 서하는 빛을 없애기 위해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고 외출 전 두고 갔던 핸드폰임을 알아차렸다. 유일하게 저장되어 있는 하준의 이름이 액정에 떠 있다가 부재중으로 넘어갔다.

「윤서하, 어디 있어.」

「전화 받아.」

하준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었으면. 전화를 받은 서하는 울먹이면서 토해 냈다. 감정이 조절이 되질 않았다.

[지금 갈게. 그니까, 잠, 시. 잠시만 기다려.]

“개새끼야……. 으헝엉. 무서워. 너무 무서워. 나 어떡해? 내가 미친 걸까?”

[아냐. 괜찮아. 윤서하. 서하야. 넌 괜찮아. 다 내가 잘못한 거고 넌 아무 잘못 없어. 다 내 탓이니 날 원망하고 널 자책하지 마.]

전화기 너머로 바람 소리가 크게 들려 하준의 목소리가 중간중간 끊겼다. 꼴도 보기 싫었는데 지금은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짐도 찾지 않고 달려가는 하준을 따라 로운도 달렸다. 달리는 이유라도 알려 달라고 했지만 점차 간격이 벌어졌고 잡길 포기한 로운은 제자리에 멈춰 숨을 골랐다. 며칠 동안 잠도 안 잔 인간이 너무 빨랐다.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스피커 모드로 서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며 하준은 액셀을 밟아 집으로 향했다. 페로몬의 영향을 잘 받지 않은 체질인 거 같다는 의사의 말을 믿은 게 화근이었다. 옆에 있을 때는 서하가 잘 때마다 페로몬으로 덮어 놓았지만 출장을 간 일주일 사이에 반응이 올지 몰랐다.

“윤서하. 듣고 있는 거 맞지?”

[……무서워. 추워. 숨 막혀.]

“금방 갈 테니까…… 윤서하?”

전화가 끊겼다. 혹시 쓰러진 거 아닐까 싶어 핸들을 내리친 하준은 속도를 올렸다. 아이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으니 서하만 무사하면 됐다. 정웅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하니 쓰러지지는 않았으나 혼잣말을 하면서 열지 못하게 막고 있다고 했다.

“거의 다 와 가니 들어가지 말고 근처에 불 켜져 있으면 다 꺼 줘.”

[네, 위험해 보이는데 괜찮을지…….]

속력을 지키지 않고 달렸다. 클랙슨과 급정거하여 타이어가 쓸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하준은 속도를 더 높일지언정 줄이지 않았다.

집 앞에 차를 멈춘 하준은 집 안을 가득 채운 불안정한 페로몬에 숨을 멈췄다. 서하가 어디 있고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페로몬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드레스룸 앞에 멈춰 선 하준은 페로몬에 반응을 하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윤서하.”

안쪽에서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을 달래 본 적 없던 하준은 당황했으나 앉아 있을 서하를 예상하며 무릎을 꿇은 하준은 문에 손을 대고 서하를 불렀다.

“서하야.”

“죽을…… 것 같아. 숨 막혀.”

숙면을 취하지 않았던 몸은 가라앉고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들었으나 하준은 서하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며 페로몬을 풀었다. 한 번에 많은 양을 풀면 서하가 눈치채고 거부감을 일으킬 것만 같아 옅게 흘려보냈다.

“서하야.”

성을 떼고 부르는 게 낯설었지만 하준은 대답해 주길 바라며 몇 시간 동안 애타게 서하의 이름을 불렀다.

“강제로라도 열까요? 이러고 계신 지 벌써 4시간째예요. 도련님도 그렇고 서하 님도 몸 상태도 안 좋은데 무슨 일이라도 생길지…….”

“괜찮으니까 가 봐.”

정웅을 내보내고 문을 닫은 하준은 머리를 문에 대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게 내색하지 않으려 필사적인 건 알고 있었다. 무서울 거다. 원치 않게 모든 걸 포기했고 증오하는 사람의 아이를 갖게 됐다.

“들어가도 될까? 거긴 춥고 어두우니까. 밝은 곳이 더 따뜻할 거야.”

“……어.”

작고 끊어질 듯한 목소리였지만 허락의 말을 들은 하준은 장장 4시간 만에 무릎을 펴고 문을 열었다. 달려가면 겁을 먹겠지. 불을 켜자 서하가 옷을 둥지처럼 쌓아 두고 그 가운데 누워 숨을 색색거리며 내쉬고 있었다. 옷에 남은 페로몬을 맡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빛이 눈에 들어가자 인상을 찌푸리는 서하를 보고 불을 끈 하준은 서하의 페로몬에 의지해서 걸음을 옮겼다.

“윤서하.”

“……추워.”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몸은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진저리칠 것을 예상하고 품에 안았는데 거부하기는커녕 떨리는 손으로 매달리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하준이 페로몬을 더 풀어내자 더더욱 매달리며 덩달아 페로몬을 풀어냈다. 참아야 한다. 목덜미를 물고 싶은 충돌이 들었다.

“서하야, 이거 놓자. 응? 서하야.”

“추워. 너무 추워.”

손바닥에 파고든 손톱은 알싸한 고통을 안겨 줬으나 그것만으로는 참을 수가 없었다. 무방비한 서하가 비키길 기대할 수도 없었다.

“최하준. 힘들어.”

서하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으면서 오스스한 느낌과 함께 숨을 들이켜니 페로몬이 강하게 맡아졌다. 문다. 서하의 목을 잡은 하준은 치아가 목에 닿은 느낌에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손목을 물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더 이상 윤서하의 인생을 망칠 수 없다.

“흐으…….”

“추워. 가지 마, 최하준.”

온기를 찾는 원시적인 행동이었으나 하준에게는 더한 자극을 선사했다. 손목에 피가 흐르면서 옅게 흉터로 잡은 목덜미로 떨어졌다. 비켜야 한다. 참을 수 없을 것이다. 형질이 저주스럽다.

“왜…….”

“물어. 최하준.”

고개를 든 서하는 목덜미를 하준에게로 내밀었다. 쓰게 웃는 서하를 본 하준은 숨겨진 의미를 파악했다. 항상 저 얼굴로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하준은 짧게 헛웃음을 짓고 서하의 목을 물었다. 전혀 기쁘지 않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 결국에 이렇게 되네. 고맙다고 해야 하나. 덕분에 다른 알파 새끼들은 내가 오메가라는 걸 모르게 됐네.”

“몸은…… 괜찮아?”

“챙겨 주지 마. 더 이상 볼일 없으니까.”

그 뒤로 체온이 낮아지는 일도 숨이 막히지도 않았다. 문 자국 또한 이제는 남아 있지 않아 각인이 실감나지 않았다.

“더 필요하면 말해.”

“아니 된 것 같아.”

***

오후 7시, 이제는 일과로 자리 잡은 페로몬 맡기였다. 하준의 페로몬을 맡고 나면 한동안 멍했으나 쉬어서는 안 됐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 움직여야 했다.

“어디 가?”

“공부. 접수까지 얼마 안 남았어.”

서재에 들어간 서하는 책상 구석에 놓여져 있는 책을 끌고 와 폈다. 하도 봐 눈에 익은 글자였지만 늦은 만큼 더 열심히 해야 했기에 입으로 연신 외웠다.

“무리하면 몸에 안 좋으니 오늘은 이만 쉬는 게 어때?”

“……내 몸이니까 알아서 해.”

움직이는 것조차 힘에 부쳤으나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옆에서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하준이 책 위에 아주 작은 신발을 올려놓았다. 고개를 든 서하는 하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지나가다가 예뻐서 사 봤는데. 아이가 태어날 때 물건을 미리 준비해 놓으면 건강하게 잘 태어난다고 해서……. 마음에 들어?”

“……거지 같아. 미래도 마음에 안 든대.”

머리를 긁적이며 하준이 다음에는 같이 사러 가자고 제안했으나 서하는 대답을 하지 않고 신발을 어루만졌다. 다음은 없을 거다. 이 집을 떠나고 없을 테니까.

“엄청 작네.”

“늦었으니 자고 일어나는 건 어때. 예정일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알겠다고 한 서하는 신발을 책 위에 그대로 두고 하준과 방으로 들어왔다. 며칠 뒤면 다 끝난다.

자신은 잘못하지 않았다고 눈을 감고 되뇌었을 뿐인데 아침이 밝아 있었다. 서랍장 위에 하준이 쓴 듯한 쪽지가 놓여 있었다.

「빨리 올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해.」

쪽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넣고 방에서 나와 서재로 갔다. 방, 서재, 마당 단조로운 루틴이었으나 이제는 머지않았기에 즐기고 있었다. 콧노래를 부르는 서하를 따라다니던 호철은 자연스럽게 책장에서 책을 꺼내 서하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힘드시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게 많던 책도 이제 3권밖에 남지 않았다. 갈수록 적어지는 메모에 흥미를 잃어 가던 찰나 펼친 책은 앞과는 다르게 메모가 가득했다. 불안정한 상태에서 작성했는지 유려하던 필체가 망가져 있었고 내용 또한 원망의 문구였다.

“쯧.”

“무슨 일이라도?”

호철에게 괜찮다고 한 후 다시 메모를 읽어 내렸다. 하준을 영준에게 빼앗긴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개차반으로 자랐구나. 기분이 나빠져 책을 덮은 서하는 의자에 목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미래야. 너는 개차반이 되지 마렴.”

“크흡.”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며 웃는 호철을 무시하고 서하는 미래에게 해 줄 수 있는 조언을 해 줬다. 마지막이긴 하니 하준에게도 선심을 쓸까 싶어 마당으로 나가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차가 부드럽게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의자에서 일어난 서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하준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다녀왔어?”

“……추운데 왜 나와 있어…….”

“잘 다녀왔냐고.”

“그래.”

재킷을 벗어 서하의 어깨에 걸쳐 준 하준은 어깨를 붙잡고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작별 인사를 하는 건 알아차렸으나 서하에게 뭐라고 정정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입을 다문 하준은 서하에게 말을 걸었고 기분이 좋은지 성심껏 답변이 돌아왔다.

“아, 오늘 책 읽어서 2권 남았어.”

“뒤에는 읽을 만한 게 못 될 텐데.”

“재밌더라고.”

마지막 한 권은 감추기로 한 하준은 서하의 손에 과일을 집은 포크를 쥐여 줬다. 연차를 냈다고 한 하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를 먹다가 화장실에 갔다.

“어……?”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던 하준은 한참을 지나도 나오지 않아 문을 두들겼다. 물소리도 들리지 않고 조용한 화장실에 문을 연 하준은 넋이 나간 듯한 서하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내려 하체를 봤다.

“…….”

“진정하고 일단 조심히 나와.”

머릿속이 새하얘져 움직이지 못한 서하 대신 하준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언제 챙겨 놨는지 모를 가방을 들고 서하를 차에 태운 하준은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괜찮을 거야. 서하야, 침착하고.”

그 뒤로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배는 꺼져 있었고 빈 느낌이 났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니 칼로 쑤시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앉는 것만으로 기력이 딸려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병실의 문이 열렸다. 하준인가 싶어 고개를 돌린 서하는 로운의 얼굴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깨어나셨네요. 이사님이 아니라 저여서 죄송합니다. 방금까지 곁을 지키다가…… 아, 가까이 오라고요?”

로운은 어디서 힘이 난 건지 넥타이를 잡아채는 서하에게 순간적으로 힘에서 밀려 침대 위로 몸이 쓰러졌고 순간적인 임기응변으로 다행히 침대 시트에 손을 올렸다. 몸은 생각도 안 하는지 조심성이 없었다.

“서하 씨……? 이러지 않아도 안 도망가니까 놓고 말해 볼까요?”

“페로몬 맡아져요?”

“그건 또…….”

넥타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자 목이 졸린 로운은 서하의 바람대로 숨을 들이켰다. 하준이 이 광경을 보면 자신만 죽어날 게 뻔했기 때문에 빨리 풀어 주길 바랐는데 맡아지지 않는 페로몬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각인했어요? 대박…….”

“쯧. 쓸모없네요.”

살인 충동을 느낀 로운은 하준을 불러오겠다며 나갔고 홀로 남은 서하는 초조해져 입술을 물어뜯었다. 베타가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하준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병실이 또다시 열렸고 이번에야말로 하준의 얼굴을 본 서하는 미소를 지었다.

“아들이야. 이름은…… 일단 미래라고 했어.”

“원래 미래라고 하려고 했어. 마음에 안 들면 바꾸든가.”

단도직입적으로 하준에게 페로몬을 맡아 보라고 했으나 시간이 지나도 하준이 영문 모를 표정만 지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됐다. 하준의 페로몬도 맡아지지 않았기에 서하는 해맑게 웃으며 하준의 손을 잡았다.

“……퇴원은 몸이 회복되면 상황을 봐서 나가자.”

“그래. 보통 언제 퇴원할 수 있어?”

임용 시험의 접수 기간을 고려하니 아슬아슬할 것 같았다. 미래를 보러 가지 않겠냐는 하준의 제안에 잠시 멈칫했지만 서하는 거절했다. 봤다간 정이 들 것 같았다.

병원에서의 나날은 평화로웠다. 하준이 대부분 수발을 들었고 하준이 없으면 호철이 상주해 있었다.

“승언 님께서 오늘 오시고 싶답니다.”

“……왜요?”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읽고 있던 책을 떨어뜨리니 호철이 주워 들며 퇴원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호철의 말대로 2시간 뒤쯤 승언이 선물이라며 아기 신발을 들고 왔다. 처연하게 웃는 얼굴이 점차 다가올수록 험악하게 찌푸려졌고 어깨를 잡아 뒤로 밀었다.

“윽.”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너 뭐야. 왜 안 맡아져.”

서하에게서 페로몬이 맡아지지 않았다. 잠깐 스치듯 서하에게 말한 이야기가 생각났지만 고개를 저었다. 베타가 된 게 아닌 하준과 각인을 한 것이다. 서늘하게 서하를 내려다보니 잡힌 어깨가 아픈지 몸을 뒤틀었다.

“이제 오메가 아니어서 그래.”

“뭐……? 아…… 맞아. 기억하고 있어. 우리 서하 이제 오메가가 아니구나.”

최하준도 불쌍한 건 매한가지였다. 웃음을 참으며 승언은 서하에게 다시 찾지 않겠다고 했다. 페로몬이 맡아지지 않으니 서하에 대한 마음이 사라졌기에 아쉽지 않았다. 그래도 오래 함께한 정이 있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한 뒤 병실에 나갔다.

“지랄하고 있네.”

“…….”

손가락으로 욕을 한 서하는 분이 풀리지 않아 한참을 씩씩거렸다.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와 상태를 확인하고 아이를 안아 볼 거냐 물었지만 서하는 거절하고 침대에 누워 퇴원하기만을 기다렸다.

“아이가 정말 순해요. 울지도 않고.”

“……네.”

“잘 가, 미래야.”

하준의 품에 안긴 아이를 보며 얼떨떨하게 대답을 하고 차에 올라탔다. 차 안이 낯설 텐데도 울지도 않고 조용히 있어 신기하게 바라보는데 눈이 마주쳤다. 웃는다. 순간 손을 흔들 뻔한 서하는 흠칫 놀라며 차 구석에 좀 더 붙었다.

“안아 보겠어?”

“……아니.”

고개도 잘 못 가누고 픽픽 꺾이는 목을 보니 더더욱 안을 마음이 없어졌다. 잘못 안으면 다칠 것 같았는데 하준은 아이를 잘 안고 있었다. 아닌 척 미래를 흘끔 쳐다보던 서하는 차가 멈추자마자 차에서 내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미래 도련님 물건은 서하 님 방 안에 넣어 놨어요. 편히 쉬세요.”

방 안에 들어가니 아기 용품으로 가득 차 있어 몸을 돌리려는데 하준이 아기를 안고 들어와 나가지 못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전화 좀 받고 올게. 미래가 울면…… 밖에 있는 사람 부르고.”

“……응.”

하준이 요람에 미래를 눕히고 나갔고 침대 위로 올라가 앉은 서하는 멀찍이 미래를 지켜보았다.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던 미래가 돌연 울기 시작했고 당황한 서하는 정웅을 불렀으나 오지 않아 발을 동동 굴렀다.

“울지 마…….”

“흐에에엥.”

하준이 안았을 때는 달리 서하가 안자 불편한 듯 미래가 더 힘껏 울었고, 울고 싶어지는 기분에 이름을 부르며 달랬다.

“미래야, 울지 마. 응?”

“우엥엥……. 흐읍…….”

이름을 아는 것처럼 이름을 불러 주자 울음을 그치고 배시시 웃는 미래에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 요람에 내려놓으려고 하니 또다시 울먹이는 미래에 한참을 안고 어르고 달래다가 하준이 들어왔고 서하는 미래를 넘기고 방을 빠져나왔다.

“아빠가 힘들어서 그래. 아빠 미워하지 말고 날 미워하렴.”

하준은 미래의 등을 어루만지며 아이를 재우고 요람 위에 눕혔다. 퇴원 수속을 밟다가 받은 증명서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다가 반을 접어 수첩에 끼워 넣었다. 미래의 출생 신고를 하루빨리 마치고 자료를 폐기하기로 했다.

***ㅎㅇㅅㄹ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잠들어 있는 미래였지만 예측 불가능하게 이른 아침부터 깨서 울음을 터트리자 하준이 능숙하게 미래를 안고 달랬다. 황량한 정원이 뭐가 좋은지 창밖을 보는 걸 좋아하는 미래를 위해 거실에도 요람이 놓였다.

“착하지. 울지 말고.”

금세 조용해지는 미래를 보며 서하가 작은 소리로 감탄을 하자 하준이 미래를 안고 서하에게로 다가왔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바닥으로 내려온 서하는 하준의 무릎 위에 올라와 있는 미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작아.”

“아기니까.”

“너랑 똑같이 생겼어. 눈이랑 코랑 입이랑.”

미래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는 듯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앉은 서하를 보며 하준은 묵묵히 앉아 있었다. 무릎에 앉은 미래가 서하에게 손을 뻗어 가슴에 닿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나는 서하 대신 하준이 손을 잡고 흔들었다.

“곧 나가 봐야 해.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하고.”

“……뭐?”

“나가 봐야 하니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응, 가 봐.”

정신이 딴 데로 가 있는 서하에게 재차 말한 하준은 미래를 요람에 눕히고 모빌을 흔들며 미소를 지은 뒤 몸을 돌려 서하를 보았다. 시선의 끝에는 요람에 있어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드니 놀라는 서하에 피식 웃으며 머리를 헝클였다.

“안아 보지 그래?”

“내가 왜.”

하준이 방에 들어가고 소파에 다시 올라가 앉은 서하는 요람에서 애써 시선을 거두고 TV로 옮겼다. 하준이 집을 나서고 정웅도 호철에게 미래를 부탁하고 장을 보러 가 집 안에 호철과 미래, 서하 셋만이 남았다. TV를 끈 서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뒤에 있던 호철이 자리를 비켰다.

“부!”

“…….”

작다. 태어날 때보다 많이 자랐으나 작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멀뚱멀뚱 쳐다보는 미래에게 모빌을 흔들어 준 서하는 아까와 같이 요람 안을 쳐다보기만 했다. 안아 줘야 하나. 수백 번 수천 번 고민했지만 답은 하지 말자였다. 책임지지 못할 사랑은 주지 않는 게 나았다.

“나한테 태어나고 싶어서 온 게 아닐 텐데.”

말을 이해하지 못한 미래는 서하의 목소리를 듣고 그저 웃음을 터트렸다.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며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으나 서하는 모빌을 흔들거나 딸랑이를 흔들어 줄 뿐 미래의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바!”

“배고파?”

부엌에 들어가 능숙하게 분유를 탄 서하는 수유 쿠션을 미래에게 기댄 뒤 병을 물려 먹게 했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양손으로 병을 잡고 열심히 먹어 병을 비웠다.

“웃는 모습, 예쁘네.”

머리를 거치지 않은 말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와 입을 막고 요람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멍한 상태로 빈 병을 설거지하고 돌아오는데 때마침 도어 록이 눌리면서 정웅이 들어왔다. 양손에 짐을 들고 온 정웅은 무표정으로 거실을 활보하는 서하를 보고 불안한 마음에 짐을 내려놓고 요람으로 갔다.

“나가 있는 동안 안 우셨나 보네요.”

“그런가 봐요.”

미래를 두고 자리를 비운 호철을 속으로 욕하며 부엌에 들어간 정웅은 물기가 남아 있는 분유병을 보고 설마 서하가 먹였나 싶어 입을 열었다.

“미래 도련님 밥 주셨어요?”

“…….”

“물기가 남아 있는데 서하 님 아니세요?”

“팀장님이 먹이셨나 보죠.”

그러면 그렇지. 정웅은 아이에게 소홀히 대하는 서하를 욕하며 저녁을 준비했다. 정웅이 일을 하면서 미래를 챙기는 걸 본 서하는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가 웃옷을 들쳤다.

“씨…….”

어두운 티셔츠를 입어 젖은 티가 나진 않았으나 젖고 조금만 스치기만 해도 통증이 일어났고 열기를 띠고 있었다. 며칠은 참을 만했는데 아까는 미래의 미약한 손이 닿은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기에 빨리 해결하기로 했다.

스스로 풀어 보고자 가슴에 손을 댔지만, 저절로 숙여지는 상체에 엄두가 나지 않아 손을 뗀 서하는 결국 단념하고 욕실을 나왔다.

“씻고…… 온 건 아닌 것 같고.”

“남 이사 뭘 하든 무슨 상관이야.”

옷을 갈아입으려고 했으나 생각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온 하준으로 인해 혀를 찬 서하는 두툼한 후드티를 챙겨 욕실로 향했다.

“불편하면 내가 나가지.”

“…….”

“근데 집 안에서 후드티는 불편하지 않겠어?”

욕실 손잡이를 돌리려던 찰나 하준이 다가와 뒤에 섰고 서하는 숨을 멈췄다. 쓸데없이 예리해서는 포개진 손을 떼 내고 몸을 돌린 서하는 하준을 마주 보았다.

“비켜.”

서서히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훑어보는 하준으로 인해 서하는 행여 들킬까 싶어 팔짱을 껴 숨겼으나 하준은 미약하게 찌푸려지는 서하의 미간을 놓치지 않았다.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서하의 어깨를 잡으니 비명을 지르며 팔을 떨쳐 내는 서하에 놀란 하준은 손을 황급히 떼어 냈다.

“좀! 만지지 마…….”

“무슨 일이야. 어디 안 좋아?”

쭈그리고 앉는 서하에 덩달아 자세를 낮춘 하준은 비명을 듣고 문을 연 정웅에게 고개를 돌렸다. 상황을 지켜보던 정웅은 하준은 불러내 설명을 했다.

“미래 님에게는 분유만 주니까 뭉쳐서 아픈 겁니다.”

“아…….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정웅이 손짓을 하면서 설명을 할수록 하준은 너무나도 어려운 과제에 숨을 들이켰다. 더 고통스러워하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는 정웅의 말에 비장하게 방 안으로 들어온 하준은 그새 옷을 갈아입고 누워 있는 서하에게로 다가갔다.

“윤서하.”

대답할 여력이 없던 서하는 눈을 감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지만 하준이 기어이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 앉게 했다.

“왜. 이제 잘 거야.”

“아파 보이는데?”

후드티 안으로 들어온 하준의 손에 당황한 서하가 손을 쳐 내려고 했으나 어깨를 붙잡혀 점차 가슴팍으로 올라오는 손을 제지하지 못했다. 올라온다. 고통을 예감한 서하는 눈을 꾹 감았다. 판판한 가슴에 몽우리가 져 뭉쳐 있는 부분을 꾹 누르니 울먹이는 서하에 손을 뗀 하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저, 개새끼가…….”

선반이 열리고 물소리가 나 무언갈 꾸미고 있음을 예감한 서하는 방을 나서 2층으로 올라가 호철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쉬고 있던 호철은 난데없이 들어온 서하에게 익숙하게 침대를 내어 주고 의자에 앉았다.

“여긴 왜 올라왔습니까?”

“왜겠어요.”

단 네 글자만으로 설명을 한 서하가 옷장을 열고 들어가자 호철이 옷장 문을 닫아 줬다. 숨이 막히긴 했으나 시간을 벌어 옷장에 기대 있는데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윤서하가 사라져서 말이지.”

“서재나 마당에 계시는 거 아닐까요? 같이 찾겠습니다.”

방에서 벗어나려는 수작을 부리는 호철의 어깨를 잡고 밀친 하준은 약하게 페로몬이 흘러나오는 옷장 앞에서 멈춰서 노크를 하듯 두들겼다. 이왕이면 하준이 다치길 바라며 서하는 문을 세게 열었으나 서랍에 기대 있는 하준을 보고 아쉬워하며 바닥으로 내려왔다.

“방에 들어온 것도 모르다니 실력이 한물간 모양이야.”

“아니면 너 없는 사이에 팀장님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거일 수도 있어.”

죽고 싶지 않았던 호철은 부정했으나 하준은 호철의 목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하준이 분노했음에도 페로몬이 맡아지지 않아 안도한 서하가 방을 나가니 하준 역시 서하를 따라 방을 나섰다.

거실 요람에서 푹 잠든 미래를 안고 방 안으로 들어와 눕힌 하준은 준비했던 수건을 들고 침대에 앉아 핸드폰을 하는 서하의 뒤로 갔다.

“뭔데. 너, 읏. 하……지 마.”

가슴을 만지는 손길에 놀람과 수치심보다는 고통이 먼저 엄습해 핸드폰을 떨어뜨린 서하는 상체를 숙이며 몸을 피했으나 침대 헤드에 기댄 하준은 자신의 가슴팍에 서하를 기대게 했다.

“놔두면 계속 뭉친다고 하던데. 더 아프고 싶지 않으면 협조하지 그래? 스스로 풀 자신 있으면 지금 물러나고.”

스스로 풀 자신은 당연히 없다. 붉어진 목과 분한지 어깨가 떨리는 서하를 보던 하준은 허락을 받고서야 서하의 옷을 천천히 벗겨 냈다. 옷감이 가슴에 스치지는 않아 다행이었으나 두툼한 후드티가 사라져 공기가 고스란히 느껴졌고 몸을 움츠렸다.

“추워?”

“소리 낮춰.”

충분히 속삭이듯 낮은 소리였으나 요람을 흘끔 쳐다본 서하가 타박을 해 하준은 조용히 입을 닫고 대답 대신 서랍장에 올려 둔 수건을 들어 서하의 가슴 위에 올렸다. 뜨거운 건 아니었으나 무게감에 짓눌린 가슴에 살짝 몸을 뒤트니 하준이 귓가에서 이름을 부르며 진정을 시켰다.

“아프면 말하고.”

“조용히……흣. 하라고……으흑.”

수건 위에 손을 올린 하준은 전체적으로 가슴의 근육을 풀어내고자 조심스럽게 가슴을 움켜쥐고 주물렀다. 힘을 많이 가하지 않았음에도 앓는 소리를 내는 서하에 심호흡한 하준은 힘을 더더욱 풀었다.

“많이 뭉쳐 있는데.”

“더…… 말하지 마.”

조용히 했으면 좋겠는데 계속해서 말을 거는 하준으로 인해 얼굴을 가린 서하는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간간이 고통에 찬 숨소리가 울려 퍼졌고 수건이 차가워졌을 때 서랍장에 수건을 둔 하준은 맨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서하의 심장 소리가 손에서 느껴져 잠시 행동을 멈춘 하준은 펜을 오래 잡아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에 서하가 아파할까 서랍장에서 윤활유를 꺼내 손에 부었다. 엄지와 중지로 유륜을 뭉근히 누르는 손짓에 어느새 서하도 앓는 소리가 아닌 편안하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놔.”

“하는 김에 더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팔뚝을 할퀴고 주먹으로 내리치는 서하를 내버려 두고 하준은 손가락 끝으로 젖꼭지를 살짝 누르며 유륜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음…….”

손가락에 닿은 액체에 손을 들어 올리려고 하니 서하가 손목을 잡아 들어 올리지 못하게 막았다.

“서하야?”

“보지 마. 제발…….”

보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으나 보지 말라는 서하의 말을 따라 가만히 있었고, 서하는 하준의 손을 훔쳐 닦아 냈다. 이 정도면 괜찮다고 벗어나기 위해 바르작거렸으나 하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까와는 반대로 아래에서 위로 손짓을 해 가슴을 풀어냈다.

“미……친. 그, 그만……해 줘.”

“어중간하게 하면 더 안 좋아지니 조금만 더 참아 봐.”

아까와 같이 뭉쳐진 곳은 만져지지 않았고 고통 어린 신음보다는 물기 어린 신음과 함께 서하의 몸이 튀어 올랐다. 뭉쳐지긴 개뿔. 더 이상 아픔보다는 가슴을 주무르는 손길에 몸이 예민해져 갔다. 하준에겐 보이지 않지만 몇 방울에 그쳤던 모유가 줄을 이어 새어 나갔고 하준의 손 근처에 다다랐다.

“아.”

“이, 개새……끼가. 내가, 으흑…….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몇 방울이 아닌 손등을 타고 느껴지는 액체와 함께 귀까지 붉게 달아올라 있는 서하를 본 하준은 고개를 숙여 톡 튀어나와 있는 목뒤에 입을 맞췄다. 곧바로 서하의 팔꿈치에 명치를 맞긴 했으나 이제는 익숙해진 하준은 서하를 놔주었다.

“…….”

“달아.”

한 마디 해 줄 요량으로 뒤를 돈 서하는 손등에 묻은 모유를 혀를 내밀어 핥는 하준을 보고 말문이 막혀 어버버거렸다. 일부러 보라는 듯이 손등에서 손가락까지 핥으면서도 눈은 서하에게로 고정된 하준으로 인해 얼굴까지 새빨개진 서하가 벗어 놓은 후드티를 챙겨 입으며 욕을 내뱉고 침대 밑으로 내려갔다.

“너무 넘치면 도와줄까? 윤활유도 묻었는데 씻어 내야지?”

“……들어오면 죽일 거야.”

물소리가 들리고 서하가 씻는 동안 마찬가지로 침대에서 내려온 하준은 윤활유가 묻은 손을 티슈로 닦아 냈다. 마실 생각은 없었는데 눈이 점차 커지는 게 귀여웠다.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았고 휴지통에 휴지를 버린 하준은 요람으로 가 팔을 기댔다. 언성을 높이지 않기는 했지만 깨지도 않고 세상모르고 자는 미래를 보았다.

서하는 자신을 더 많이 닮았다고 하지만 하준은 반대라고 여겼다. 외관은 어떨지 몰라도 귀신같이 유리한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게 서하와 판박이였다.

당장이라도 나갈 기세였던 서하가 나가지 않은 이유가 미래가 아닌가 싶어 하준은 숨을 죽이고 서하의 곁에서 머물렀다. 스스로를 베타라고 믿는 서하에게 긴장의 끈이 풀려 하준이 페로몬을 푸는 순간 셋의 관계는 완전히 끊기는 거였다.

잠에서 깼음에도 울지 않고 시선을 마주치려는 미래에게 이불을 덮어 주던 중 물소리가 멈추고 목에 수건을 걸친 서하가 욕실 밖으로 나왔다.

“흐…… 흐엥.”

“이것 봐. 똑똑하기도 하지.”

서하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것처럼 울음을 터뜨린 미래에 하준이 안아 등을 토닥이며 달래 줬다. 말로는 표현 안 하지만 눈빛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보는 서하에게 단순히 잠에서 깬 거라 설명한 하준은 침대에 앉았다.

“우리…… 아니, 미래는 똑똑하단 말이지.”

“잘 자다가 깨네.”

결국 일어난 미래와 눈을 마주한 서하는 배시시 웃는 미래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뭐가 좋은지 하준의 무릎 위에서 들썩이는 미래를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재워야 하는 거 아니야?”

“더 놀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잠깐 놀아 주지 그래.”

팔다리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아이에게 놀아 준다고 해 봤자 곁에 있어 주는 게 전부였다. 무릎에서 아이를 내려 침대에 눕힌 하준이 일어나자 침대 주인인 서하는 뻣뻣하게 굳어 하준을 쳐다보았다.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갯짓을 하는 하준의 얼굴에 목에 걸쳐져 있던 수건을 던진 서하는 미래의 옆에 앉았다.

“우.”

“…….”

수건을 잡아 든 하준이 방을 나갔고 침대에 누운 서하는 미래의 옹알이를 잠자코 듣다가 종종 맞장구를 쳐 주었다. 잘 보이지 않을 터인데도 눈동자에는 자신만이 담긴 미래를 보며 서하는 실소를 자아냈다. 미래 네 세상은 내가 전부구나. 어쩌면, 아주 어쩌면 미래와 단둘이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 서하는 미래의 손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아.”

“자야지.”

어설픈 손짓으로 미래의 배를 토닥이며 재운 서하는 잡힌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떠나기 위해서는 아이에게 정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답답했다.

“이만 잘까.”

“미래 데려가.”

하준이 들어오자 황급히 손가락을 빼낸 서하는 침대에서 일어나며 말을 하자 하준이 미래를 안아 들어 요람 안으로 넣고 불을 껐다.

침대 위에 누운 서하는 웃기지도 않은 야광별이 붙어 있는 천장에서 아직도 감각이 남아 있는 손가락으로 시선을 옮겨 보고 또 보았다. 혼란스러웠다.

***

남들이 있을 때는 미래에게 일절 손을 대지 않는 서하는 하준과 정웅이 보살피는 걸 먼 데서 구경했다. 정웅이 답답해했으나 하준이 서하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말라고 해 입을 다물었다.

“책 좀 그만 보시고 미래 도련님 좀 챙기세요. 부모가 돼서 방치하는 것도 학대라고요!”

“원해서 낳은 아이 아닌데요. 그리고 애초에 우리 거래 생각해요. 들어줬는데 애까지 돌보라고……?”

언성이 높아지자 분위기를 귀신같이 감지한 미래가 울음을 터뜨렸고 정웅이 한숨을 쉬며 미래를 달래러 갔다. 책을 보던 서하는 시험을 접수하기 위해서 형질을 정정하기로 하고 책을 덮었다.

“나갔다 올게요.”

“네? 어딜 가시겠다고.”

“상관하실 바 아니잖아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나가는 서하를 정웅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호철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보건소에 온 서하는 형질을 정정하러 왔다고 하니 일그러지는 직원의 표정을 보며 찬찬히 설명했다.

“아……. 오메가에서 베타가 되셨다고요? 죄송하지만 바빠서요.”

“말이 안 되는 거 아는 데 정말이라니까요?”

오메가증을 받아 든 직원은 전산망에 윤서하라는 이름을 넣었다. 최근에 출산한 기록과 함께 보호 알파의 이름으로 최하준이라고 적혀 있었다. 거물급을 물어 응석을 많이 부리나 보다. 원하는 대로 검사를 해 적당히 보내기로 한 직원은 잠시만 기다리라고 해 서하는 안도했다.

“윤서하 님.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진료실에 들어가니 안경을 쓰고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의사가 차트를 넘겨 보고 있었고 서하는 건너편 의자에 착석해 설명을 하려고 하니 의사가 손짓으로 막아섰다.

“오메가에서 베타가 되셨다고요? 무슨 연유로 그렇게 생각하신 거죠?”

“일단 페로몬이 안 나오고…… 각인 알파 페로몬도 안 맡아지고 제 페로몬도 안 맡아진다고 했습니다.”

의사가 안경을 벗고 한숨을 쉬어 서하는 눈을 굴렸다. 차트에 볼펜을 두들기던 의사가 아이를 낳은 오메가는 일시적으로 페로몬이 나오지 않는다고 설명해 서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정했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둔탁한 소음을 자아냈지만,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실을 말했다.

“안내를 드렸을 텐데 듣지 않으셨나 보네요. 아니면 잊으셨든가. 정 원한다면 검사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해, 해 주세요.”

검사 키트를 준비한 의사는 서하에게 따끔할 거라며 고지를 하고 피를 채취해 키트 위에 떨어뜨렸다. 보라색으로 변하는 키트를 본 서하는 노심초사하며 발을 구르는데 의사가 표를 보여 주며 푸른색은 알파, 보라색은 오메가라는 설명을 해 주며 오메가가 맞다고 확진을 내렸다.

“하…….”

“그럼 궁금증은 해결된 걸로 알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보건소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가니 호철이 차에서 내려 다가왔다. 호철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서하는 실성한 듯 웃었다. 다 거짓이었다. 베타는커녕 여전히 오메가였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박승언…… 그 개새끼가.”

“서하 님?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희번덕거리는 눈을 본 호철은 입을 다물고 뒷좌석의 문을 열어 줬다. 승언의 욕을 한참을 말하던 서하는 차에 올라탔다. 최하준. 그놈이 말한 게 사실이었다. 얼마나 웃겼을까. 창문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고 있던 서하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병신 같았을까.”

“네……?”

창문에 머리를 쿵쿵 박으며 생각을 정리하던 서하는 이 순간만을 위해 참아 왔던 일들이 생각나 억울해졌다.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피해자인 미래가 떠올랐다.

집에 도착하고 차에서 내린 서하는 잔뜩 뿔이나 방 안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진정하자. 한숨 자고 나면 차분해진 마음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흐엥……. 흐에에에엥.”

“시끄러…….”

“우아아아앙!”

달래 줄 사람이 없는 것인지 미래의 울음소리가 점차 거세져 갔다. 짜증이 솟구친 서하는 이불을 들추고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미래의 울음소리가 날카로워질수록 가까스로 억눌렀던 감정이 다시금 튀어나왔다.

“시끄러워.”

“흐읍……읍……흐엥엥.”

조금 사그라들더니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미래가 다시 울어 댔다. 미래를 달래 주지 않고 요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서하는 하준을 닮은 얼굴을 보자 속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최하준에게 할 수 있는 복수는 이것뿐인 것 같았다.

결심한 듯 요람 안으로 두 손을 뻗어 아이의 목 위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요동치고 손이 떨려 왔다. 조금만 힘을 줘도 다칠 것 같았다. 최선이지. 이게 최선인 거지. 틀리지 않았다고 중얼거리며 서하는 울먹거렸다.

“으바!”

“왜, 왜 웃는 거야……. 네가 지금 무슨, 일을 당하는 줄 알고…….”

미래가 손가락을 잡아 왔다. 작고 미약하기 그지없었으나 행동을 멈추는 데는 충분했다. 화들짝 놀라 손을 뗀 서하는 두 손을 내려다봤다. 무슨 짓을 한 건지. 죄책감에 빠진 서하가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아이의 뺨으로 떨어졌다. 뭐가 좋은지 배시시 웃는 아이에 다리에 힘이 풀린 서하는 무너졌다.

“미안해, 크흡. 미래야……. 내가, 내가 잘못했어……. 이러면 안 되는데……. 넌, 잘못이 없는데…….”

“서하야!”

보건소에서 연락을 받은 하준이 급히 집에 들어왔고 울먹이며 바닥에 꿇어앉은 서하와 해맑게 웃는 미래의 목소리는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진실을 알게 된 서하에게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생각을 하기 전에 서하를 추스르는 게 먼저라 판단해 다가갔다.

“하준아, 최하준아…….”

“그래. 서하야.”

비척거리며 일어난 서하는 요람 안으로 손을 넣어 미래를 품에 안았다. 불편한지 몸을 뒤틀던 미래가 이내 자리를 잡고 서하에게 손짓을 하며 옹알거렸다.

“나…… 놔줘. 이 정도면…… 만족했잖아.”

“…….”

“제발…… 너무 힘들어. 응? 빌게요, 이사님. 가진 건 없지만 제발…… 저랑 미래 놔주세요…….”

아무 말 없던 하준이 다가오자 서하는 미래를 단단히 껴안고 상체를 틀었다. 그러자 다가오던 하준이 멈춰 섰다. 바닥을 내려다보며 간곡하게 비는 서하 위로 그림자가 짙게 깔렸다.

머리 위에서 하준의 짧은 허망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 집과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마련해 줄게.”

차마 서하를 잡을 수 없었다. 바라서는 안 될 존재였고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무너질 것만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관계를 끊을 때가 됐다. 나에게는 미래가 없지만 너의 미래는 존재해야 했기에 서하를 보내 주기로 했다.

***

미래의 나이가 5살이 되었다. 점차 커 가면서 하준의 눈매가 드러났다. 거부감이 잠깐 들 때도 있었으나 미래에게 죄책감이 들어 서하는 더더욱 아이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빠, 오늘 삼촌들 언제 와?”

“조금 있다가 온다고 했으니까 오기 전에 청소해 둘까?”

“응! 미래 청소 잘해.”

짧은 다리로 총총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장난감을 치우는 미래를 보며 서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내려오기 위해 무리하게 땅 끝 가까이 내려왔다. 마을 사람들이 오메가냐며 서하를 떠봤으나 서하는 응해 주지 않았고 뒤에서는 수군거리더니 어느 순간 잠잠해졌다.

미래가 방을 청소하는 동안 거실 청소를 하던 서하는 장난감들 사이에서 이름 모를 들풀들과 흙이 뒤섞인 걸 발견하고 한숨을 쉬며 치웠다.

“아빠, 나 청소 다 했어요.”

“우리 아들. 잘했어. 마실 거 줄까?”

미래를 안고 부엌에 간 서하는 의자에 미래를 앉히고 냉장고를 열어 오렌지 주스를 꺼내 컵에 담았다. 미래에게 건넨 후 물을 따라 마신 서하는 오랫동안 고민하던 문제에 대해 미래에게 말했다.

“미래야. 아빠가 그동안 미래 혼자 둬서 미안해. 미래도 친구 사귀어야 했는데…… 아빠가 밖에 잘 나가 주지도 않고.”

“아냐. 아빠 바쁜 거 미래도 알아. 그리고 미래 친구 있어. 모르는 거 있으면 알려 주고 꽃 이름도 다 알아. 엄청 똑똑해.”

마을에 미래 또래 친구는 없었다. 동물이랑 친구라도 먹은 건가 싶어 물어보려고 하는데 초인종이 울려 퍼졌고 컵을 내려놓은 미래가 현관문으로 뛰어나가 문을 열었다.

“삼촌들 왔다!”

“삼촌!”

지호와 사훈이 바리바리 상자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고 미래가 사훈의 바지를 붙잡고 반가움을 표하고 있었다.

“미래, 삼촌들한테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그래, 미래야. 안으로 들어가자.”

사훈과 지호에게 앉으라고 한 서하는 냉장고를 다시 열어 먹을 것이 있는지 확인했다. 미래의 간식거리만 가득 있었고 서하는 계란과자를 접시에 담고 콜라를 꺼내 거실로 갔다. 서하에게 안부를 묻던 지호는 테이블에 놓인 과자를 보고 서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미래를 무릎에 앉히고 슬금슬금 눈을 피하는 서하를 보며 지호는 부족한 게 있으면 말하라고 잔소리를 시전했다.

“잘 먹고 사는 건 맞지……?”

“당연하지. 요즈음 세상 좋아서 전날 밤에 시키면 아침에 와. 둘 다 이렇게 안 와도 괜찮아.”

“너 보러 오는 거 아니야. 미래 잘 크고 있나 보러 온 거지.”

사훈이 미래에게 손 인사를 하며 아빠가 오지 못하게 한다고 투정을 부렸다. 서하의 무릎에 앉아 있던 미래가 고개를 위로 올리고 뒤통수를 서하의 가슴에 부딪히며 삼촌들을 못 오게 하지 말라고 엄포를 뒀다.

“미래는 우리 편인가 봐.”

“…….”

지호에게 나잇값을 하라고 눈빛을 보낸 서하는 도율이는 데려오지 않은 것이냐 물었다.

“저번에 미래랑 엄청나게 싸웠잖아. 삐졌는지 안 오겠대…….”

“도율 형아 싫어! 우리 집 오지 말라 그래!”

미래가 신경질을 내며 발을 땅바닥에 굴러 댔고 서하는 진정시키며 미안하다고 사과하니 지호와 사훈이 더욱 자신의 잘못이라고 했다.

“미래, 버르장머리 없이 뭐 하는 거야! 아빠가 삼촌들한테 예의 잘 지키라 했지. 어서 사과드려.”

“그치만. 형이…… 나한테 왜 아빠가 한 명뿐이냐고……. 그리고 성도 없다고 그랬단 말이야……. 난 아빠만으로 충분한데. 왜…… 나한테 그래?”

울먹이더니 끝내 울음을 터트린 미래가 서하의 무릎에서 내려와 방으로 뛰쳐 들어갔다. 채 잡을 시간도 없이 벌어진 일에 서하가 황망한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있자 사훈이 따라가 보겠다며 서하의 어깨를 눌러 앉게 했다. 답답하고 미안했다. 아이를 데려오고 심리 치료를 받고 교육 서적도 찾아 읽었지만 못 해 준 게 너무 많았다.

“잘하고 있어.”

“…….”

지호의 말을 들은 서하는 고마움에 미소를 지었다. 형식적인 말이지만 너무나 큰 위로로 다가왔다. 서하는 미래를 부를 때 성까지 합쳐 부른 적은 없었다. 자신의 성도, 하준의 성도 거부감이 들었다. 미래는 미래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미래가 나중에 크면…… 다 알게 되겠지?”

“……그렇겠지.”

“그때도 미래가 나를 좋다고 해 줄까? 경멸하면 어쩌지.”

“그럴…… 리가 있겠어? 하나밖에 없는 아빠인데.”

하준을 닮아 가는 얼굴과 또래보다 월등한 발육 속도를 고려한 서하는 입을 다물었다. 높은 확률로 알파 아니면 오메가로 발현될 아이였다. 알파든 오메가든 베타든 서하는 다만 아이가 자신을 경멸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힘든 일은 없고? 마을 사람들이랑은 좀 친해졌어?”

“아니. 내가 잘 안 나가니까 친해질 겨를도 없지. 근데 이제는 밖에 나가 보려고.”

콜라를 마시던 지호가 웬일이냐는 듯이 눈을 크게 떴고 서하는 과자를 입에 넣으며 미래를 유치원에 보낼 생각이라고 했다. 지호와 시답지 않은 소리를 주고받으면서도 닫힌 방문에 시선을 두며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미래. 잘 데려왔다고 생각해?”

“…….”

“갑작스러울 수도 있는데 견디기 힘들면…….”

“아빠! 으엉헝. 미래가 잘못했어. 미래 미워하지 마. 흡.”

문이 열리자마자 미래가 뛰쳐나와 서하의 품 안으로 들어왔다. 지호가 입을 막으며 못 들은 거로 해 달라 했으나 서하는 지호가 할 말을 눈치채고 옅게 웃으며 무릎에 엎어져 있는 미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빠?”

“…….”

침묵만이 맴돌자 사훈이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이 가지고 온 상자를 열며 장난감과 퍼즐북을 꺼내 미래에게 보여 줬다. 화기애애 노는 사훈과 미래를 뒤로하고 서하는 지호에게 괜찮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재차 말하는 지호에게 그만하라고 한 서하는 남은 상자를 열었다.

“반찬…… 너무 많은데.”

“잘 먹으라고. 미래는 잘 먹는 거 같은데 너는 왜 갈수록 말라 가냐. 웃음으로 무마시키지 말고.”

들켰다. 서하는 잘 먹겠다고 하며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 미래를 뒤에서 안아 올렸다. 한글책을 들고 가르쳐 달라는 미래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식탁에 앉은 서하는 미래가 볼 수 있도록 책을 펼쳤다.

“아빠 이건 뭐예요?”

“미음이라는 거야. 우리 미래 이름에도 이 글자가 들어가.”

공책에 미래, 서하, 사훈, 지호, 도율의 이름을 차례대로 쓴 후 한 글자, 한 글자씩 설명을 해 줬고 미래는 눈을 반짝이며 어설프게나마 글자를 따라 썼다. 사훈과 지호가 한글은 너무 빠른 거 아니냐고 야유를 보내면서도 흥미로운지 각자 자리를 잡고 보고 있었다.

서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미래에게 다른 단어들도 알려 주었다. 음성 언어와는 달리 문자 언어로 표현해 어수룩했으나 연필을 손에 꼭 쥐고 삐뚤빼뚤 쓰는 게 보기가 좋았다.

“우리 미래 잘하네. 너무 무리하지 말고 그만하고 싶으면 그만해도 괜찮아.”

“아냐. 아빠가 가르쳐 주는 거 재밌어. 선생님 같아!”

속이 뒤집혔다. 구역질이 올라오는 느낌에 서하는 쥐고 있던 연필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연필이 굴러가며 바닥으로 떨어졌고 미래가 놀라 손을 멈추고 서하를 올려다봤다.

선생님. 선생님이라는 말을 미래에게서 들을 줄은 몰랐다.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입을 손으로 가리고 화장실로 뛰쳐 들어갔다.

“우욱.”

“미래야, 삼촌이랑 잠시만 있자.”

밖에서 미래가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으나 서하는 변기를 부여잡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다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물을 내리고 입을 헹군 서하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똑똑-.

“…….”

“미래는 사훈 형이랑 있어.”

“…….”

“아까 하려고 했던 말인데. 미래……. 최……하준. 그 새끼한테 보내자.”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서하는 화장실 문을 열고 지호를 마주 봤다. 지호가 재차 미래를 하준에게 보내라고 했고 서하는 거절했다.

“아까, 왜 그런 거야?”

“속이 안 좋아서 그랬을 뿐이야. 네 말대로 밥을 잘 안 챙겨 먹었거든.”

“……선생님이라는 말 때문은 아니잖아.”

저건 또 무슨 소리인가. 선생님이라는 말 때문에 반응을 한 건데 지호는 그게 아니라고 했다. 코웃음을 치며 정말 속이 안 좋아서라고 했으나 지호는 무표정으로 미래에게서 누구를 보고 있냐고 했다.

“뭐……?”

“미래는 미래야. 최하준이 아니라고. 미래에게서 최하준을 보고 있는 거면…… 차라리 보내.”

벌거벗겨진 기분이었다. 얼굴이 달아오르게 느껴졌고 서하는 아니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지호의 시선을 피해 바닥을 내려다봤다. 지호의 말대로 미래에게서 하준이 보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최하준의 집에서 데리고 나온 순간부터 미래는 자신이 책임져야 했다.

“아냐……. 그럴 수는 없어. 미래는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키워야 해.”

“윤서하……. 지금 너 위태로워. 최하준이 싫다면…… 우리한테도라도 보내. 네가 안정되면 그때…… 다시.”

“지호야……. 나 미래 못 보내. 어떻게 보내. 내가 미래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미안해서라도 절대 못 해.”

주저앉는 서하를 받아 들고 소파에 앉힌 지호는 서하의 어깨를 다독였다. 생각이 많은 듯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훌쩍이던 서하는 입을 뗐다.

“내가…… 미래 목을 졸랐어.”

“뭐라고……?”

“미래가 태어난 지 얼마 안 지났을 때…… 내가 죽이려고 했어. 근데…… 내 손을 잡는 그 손가락이…… 내가 무슨 짓을 한지도 모르고 날 보면서 웃는데……. 내가 쓰레기고 자격이 없는 것도 아는데……. 지호야. 나 못 보내. 우리 미래 절대 못 보내.”

지호의 한숨 소리가 들렸고 서하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만 참으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었다. 미래가 나중에 커서 하준의 존재를 찾으면 어쩔 수 없지만, 그전까지는 미래와 함께하고 싶었다.

달칵-.

“서하야. 이제 괜찮니?”

“네, 형. 미래는…… 자는구나.”

“너한테 가겠다고 울다가 잠들었어. 괜찮아졌다니 다행이다.”

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이불을 다시 덮어 준 서하는 색색거리며 잠든 미래를 보았다. 잘못 안으면 부서질 것 같던 아이가 많이 컸다. 호흡에 따라 배를 토닥이고 있으니 사훈이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 너도 미래도.”

“그렇겠죠? 항상 고마워요, 형.”

사훈이 서하에게 핸드폰을 보여 줬고 액정 안에 도율의 사진이 있었다. 자식 자랑인가 싶어 박수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사훈이 잘못 보여 줬다며 종이를 들고 있는 도율을 보여 줬다.

“미래 싫다고 아침부터 난리 치더니 사실 미안했나 봐. 어머님, 아버님께 도움받아서 사과 편지 썼대.”

“귀엽네요, 아이들은.”

두 사람은 방에 불을 끄고 나왔고 사훈은 석상처럼 소파에 앉아 있는 지호에게 다가갔다. 불러도 대답이 없는 지호에 사훈은 종아리를 발로 툭 차며 청승 떨지 말라고 한 뒤 일으켜 세웠다.

“밥이라도 먹고 가요. 여기까지 오느라 오래 걸렸을 텐데.”

“입이 댓 발 나와 있는 아들 챙기러 가야 해서. 다음에 같이 내려올게.”

“조심히 올라가요. 너는 안전 운전 하고.”

사훈과 지호가 가고 미래까지 잠들어 있으니 집 안이 조용했다. 서하는 부엌으로 들어가 두 사람이 가져온 밑반찬을 꺼내고 간단하게 계란찜을 만들었다. 예쁜 계란찜을 만들기 위해 뚝배기 위에 그릇을 위에 덮어 부풀린 서하는 만족스럽게 식탁 위에 음식을 차렸다.

방 안으로 들어가 미래를 조심히 흔들어 깨웠다. 잠기운이 가득해 밥을 먹지 않겠다는 미래에게 애원하는 수준으로 밥을 먹이고 씻긴 후 다시 이부자리에 눕혔다.

“오늘 아빠가 갑자기 속이 안 좋아서 미안해. 재밌게 놀고 있었는데.”

“아냐. 아빠 아픈 거 싫어. 미래는 괜찮아.”

“우리 미래 유치원 갈래? 아빠가 평소에 많이 못 놀아 주는데 낮에는 친구들이랑 놀고 밤에는 아빠랑 놀자.”

“미래 친구 있어. 매일은 못 보는데 맛있는 것도 주고. 내 말도 엄청나게 잘 들어 줘. 저번에 목마도 태워 줬어.”

기껏해야 마을에 사는 동물에게 이름을 붙인 줄 알았는데 목마를 태워 줬다는 걸 보면 또래가 아닌 성인 같았다. 위험한 사람인가 싶어 미래를 흔들어 깨워 봤지만 노곤한지 일어나지 않았다. 잠든 미래 옆에서 서하는 한숨을 쉬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자신을 위해서라도 바뀌어야 할 때가 왔다.

***

“미래야, TV 가까이서 보지 말고 물러서. 눈 나빠진다.”

“으응. 아빠, 오메가가 뭐야?”

부엌에서 시금치를 데치던 서하는 심장이 철렁해 가스 불을 끄고 미래에게 다가갔다. 분명히 형질에 대해 나오는 채널은 금지했는데 미래가 어떻게 알게 된 건지 영문을 몰랐다. 순순한 표정의 미래가 TV를 가리키며 재차 물어봐 고개를 돌린 서하는 믿을 수 없는 문구를 보았다.

「지방 선거 사상 최초 오메가 당선자」

앵커의 말과 함께 당선자의 인터뷰가 시작됐다.

[인터뷰에 선뜻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오메가 국회 의원 당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오메가라는 게 중요할까요? 오메가와 베타, 알파는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서만 믿고 오메가를 차별했던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평소에 생각했습니다.]

희롱도 조소도 깔려 있지 않은 인터뷰에 헛웃음을 지은 서하는 리모컨을 쥐는데 미래가 오메가에 대해 알려 달라며 발을 굴렀다. 제 입으로 말하게 될 줄은 몰랐다.

미래에 닥쳐올 일이기에 서하는 목을 가다듬고 세 형질과 오메가는 신의 죄를 받아 차별을 당했음을 말했다.

“아빠는 그럼 뭐야?”

“……아빠는 오메가. 미래를 낳은 사람.”

“그럼 아빠도 차별당했어?”

“흐읍……응. 많이. 아빠 사실 선생님 하고 싶었는데…… 오메가여서 안 된대.”

“울지 마……, 아빠. 내가 훌륭한 사람 돼서 다 바꿔 줄게. 아빠 선생님 하고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게 해 줄 거야.”

미래를 품에 안은 서하는 소리 없이 끅끅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못 해 준 게 너무나 많은데 미래는 구김 없이 잘 자라나 오히려 자신을 위로해 줬다. 영원히 아이로 남아 크지 않길 바랐던 추악한 마음이 미안해 품에 안는데, 미래가 바동거리더니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 줬다.

“미래야……. 아빠랑 약속해 줘.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응. 약속.”

미래에게 우는 모습을 보일 수 없어 눈물을 훔치고 부엌에 들어간 서하는 과자를 꺼내 거실로 나왔다. TV 삼매경이 된 미래의 입에 과자를 넣어 주는데 화면에서 하준이 나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희 SD그룹은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설립 이념대로 평등한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몇 년 전 이슈가 되었던 오메가 클럽은 폐쇄했으며 합당한 처벌을 받아 오메가의 인권에 대해 힘쓰겠습니다.]

“아빠가 채널 돌려도 괜찮지? 다른 거 보자.”

“어! 미래 더 볼래…….”

뒤숭숭한 마음에 채널을 돌려 버렸다. 미래의 고함이 귀를 파고들어 채널을 다시 돌렸으나 이미 하준은 사라져 있었다. 심통이 잔뜩 난 미래의 마음을 돌리고자 밤늦게만 돌아오지 말라고 하니 며칠 내내 마을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어제처럼 늦게 들어오지 말고.”

“응! 그리고, 미래 야채 싫어.”

“……그래. 오늘만이야.”

눈빛이 초롱초롱해져서 고개를 든 미래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했다. 어른스러운 척해도 애는 애였다. 놀고 오겠다는 미래를 배웅하고 집 안으로 들어와 노트북을 켰다.

최하준은 몇 년 사이에 사장이 된 모양이었다.

“하……. 봐서 뭐 하냐. 나만 빡칠 뿐이지.”

미래가 없으니 집 안이 휑했다. 같이 나가서 놀 걸 후회하다가 청소라도 할까 싶어 미래의 방으로 들어갔다.

“미래……. 들어오기만 해 봐.”

장난감 통 안이 들풀로 가득했다. 다 시들어 메마른 꽃을 한 움큼 치워 내고 장난감을 소독하니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들어올 때가 됐는데 얼마나 신나게 노는 건지 사소한 복수를 하기 위해 당근을 가득 넣은 볶음밥을 만들었다.

“너무 늦는데…….”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밭두렁에 빠진 건 아닐까 싶어 부랴부랴 나간 서하는 이름을 부르며 마을을 뛰어다녔다. 호흡이 턱 끝까지 차올라 상체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더 늦기 전에 찾아야 한다. 명치를 움켜쥐며 일어난 서하는 한 바퀴를 다 돌았음에도 보이지 않아 길이 엇갈렸나 싶어 다시 집 쪽으로 뛰어갔다.

“미래야!”

“어, 아빠다.”

미래를 본 것까지는 좋았으나 미래의 손을 잡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누구지. 가로등으로 인해 그림자가 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마을 사람 중에서 볼 수 없었던 체격이었다. 위험한 사람일 수도 있어 미래를 다그치며 부를수록 남자에게서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당신 누……최하준.”

“……미안하게 됐어. 눈에 안 띄기로 약속했는데…….”

“네가 어디라고 여길 찾아와!”

조용히 미래를 데리고 집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약속을 어기고 찾아온 건 불쾌했으나 미래와 평화롭게 사는 거에 만족하기로 했다. 둘 사이에 냉기가 흐르자 가운데에서 눈치를 보던 미래가 하준의 손을 잡으며 같이 집 안으로 들어가자며 이끌었다.

“미래. 이상한 사람 집으로 들이면 돼? 안 돼?”

“이상한 사람 아냐! 미래 친구야!”

“하……. 저 사람 친구 아니야. 다음 주부터 유치원 다닐 거니까. 일단 들어가자.”

“흐에엥. 아, 아빠가 안 놀아 줬을 때 흡. 이 아저씨가 미, 미래 친구 해 줬는데……. 아빠 나빠! 맨, 맨날 비밀로 하고……. 안 가르쳐 주고……. 다시는 안 볼 거야!”

집 안으로 뛰쳐 들어간 미래를 보니 두통이 밀려와 서하는 머리를 짚었다. 애 키우기 힘들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하준을 흘겨본 서하는 마뜩잖지만 고갯짓으로 하준에게 들어가라는 모션을 취했다.

“못 알아들었어요? 처들어가라고.”

“……실례하지.”

하준이 들어가자 언제 울었냐는 듯 미래가 밝아졌고 허탈한 서하는 만들어 준 볶음밥을 담아 식탁에 올려 뒀다. 좌불안석인 하준이 돕겠다고 부엌에 들어왔으나 집기 하나라도 건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에 미래를 무릎 위에 올리고 말벗이 되어 주고 있었다.

“미래야, 밥 먹자. 댁도…… 드시든가.”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밥을 먹이며 미래를 살살 추궁하니 하준과 오래전부터 만났음을 알아냈다. 하준은 멀리서만 지켜보려고 했으나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미래를 놀아 주며 시간을 보냈다고 해명했다. 어쩐지 마을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졌다 했더니 알파가 있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하준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말하려던 찰나 포크를 내려놓은 미래가 하준에게 말을 붙였다.

“아저씨도 오메가예요?”

“푸흡.”

“……아저씨는 알파야.”

물을 뱉어 낸 서하는 눈빛으로 잘 말하라고 암시를 줬고 하준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이 가득한 5살의 질문 퍼레이드가 시작됐고 진지하게 답변하던 하준은 가족이 있냐는 미래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있었는데…… 아저씨가 잘못했어.”

“사과하면 되잖아요.”

“사과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받을 필요는 없단다. 아저씨가 너무 잘못해서…… 아저씨 보기도 싫을 거야.”

“잘 알고 계시네요. 하긴, 평생 안 볼 줄 알았던 얼굴이 보이면 짜증 나긴 하겠어요.”

컵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은 서하는 하준을 보았다. 미래를 위해서 들여보낸 거고 앞으로는 들여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러면 아빠한테도 알파가 잘못한 거야? 알파가 아빠 괴롭혔어?”

“…….”

“그럼…… 미래 때문에 아빠 불행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불행이 아니라고 소중한 아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미래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어색한 식사가 끝나고 문을 나선 하준은 서하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고 약조했다. 서하의 다리에 매달려 있던 미래가 울음을 터뜨렸고 점점 아파 오는 머리에 반 포기한 서하가 방문을 허락했다.

“그렇다고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그리고 행여나 미래 데려갈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마.”

“알고 있어. 문단속 잘하고.”

한숨을 쉰 서하는 현관문에 몸을 기댔다.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는 했으나 너무 많은 일을 겪었기에 하준을 대하는 데에서 슬픔도 기쁨도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함께하면서 추억이라 할 건 없었기에 미래를 안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이상한 사람 따라가는 거 아니야. 아빠한테 미리미리 말했어야지.”

“아빠 알파가 저 아저씨면 좋겠어. 착하니까 아빠 안 괴롭힐 거야.”

“…….”

미래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장가를 불러 준 서하는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몸을 일으켰다. 생각 같아서는 하준의 얼굴을 보기도 싫었다. 하지만 미래는 하준이 필요할 수도 있었기에 떼를 쓰면서도 좋아하는 미래에게 모질게 굴 수 없었다. 막막한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 마당으로 나가 밤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혹시 회사 망했어……?”

“그러면 더 자주 올 수 있겠군. 물론 서하 네 허락이 있어야겠지만 말이야.”

뻔뻔한 새끼. 하루가 멀다 하고 하준이 찾아왔다.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어 냉장고와 식탁 위에는 각종 간식이 쌓여 있었고 미래의 장난감 상자는 가득 차다 못해 넘치고 있었다. 초반에는 학을 떼며 하준에게 집 안 청소와 마당 풀 제거를 시켰다. 정장을 입은 상태 그대로 청소를 하고 잡초를 제거해 흙이 묻고 풀물이 들어도 꿋꿋하게 버텼다.

이제는 들어오자마자 집 안 청소를 하는 하준이었다.

“아저씨, 오늘 무슨 날인지 기억하고 있죠?”

“당연하지. 미래랑 물놀이 가기로 했잖아. 아저씨가 그래서 일도 다 제치고 왔어.”

서하의 눈치를 보던 하준은 미래의 채근에 할 수 없이 안아 주었다. 한 손으로는 미래를 받치고 나머지 손으로는 서하의 손에 들린 짐을 든 하준이 현관을 나갔고 서하는 뒤를 따랐다. 조수석에 날름 앉는 미래에 분노 게이지가 올라갔으나 진정하며 뒷좌석에 앉은 서하는 심호흡을 했다. 참아야 한다. 좋은 날이니 참아야 한다.

“바다! 아빠 바다야!”

“뛰지 말고. 넘어져.”

서하와 미래가 바다에 들어가 물놀이를 하는 동안 하준은 파라솔 아래 돗자리를 펴고 집에서 만들어 온 도시락을 꺼냈다.

“살려 줘.”

“내가 아빠 이겼어!”

다리를 잡아챈 미래에게 밀린 서하는 물에 잔뜩 젖었지만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소리 내 웃어 본 게 오랜만이었다. 배가 아플 정도로 웃고 있는데 머리에 수건이 떨어졌다.

“젖어 있으면 감기 걸려. 몸 좀 말리고 다시 들어가자.”

“알 바…….”

“네. 미래 배고파요.”

미래를 수건으로 감싼 하준이 돗자리로 걸어갔고 알 바냐고 하려고 했던 서하는 입을 다물었다. 미래 앞이니 언행에 조심하기로 하고 돗자리로 가니 세 명이서 먹기에는 상당한 양의 음식들이 펼쳐져 있었다.

“아빠, 이 유부 초밥 진짜 맛있어. 이거 먹어 봐.”

“그래.”

직접 만들었다는 하준의 말을 들은 서하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을 보내며 유부 초밥을 삼켰다. 하다 하다 요리까지 하는구나. 새벽부터 음식을 만들고 있을 하준을 상상하니 멋지기보다는 하찮아 보였다.

“또 놀래.”

“……조금만 더 쉬자. 아빠 힘들어.”

입이 댓 발 나오기 시작한 미래에 결국 서하가 일어났다. 아직 춥긴 했지만, 물에 들어가면 괜찮아질 거라 여기며 미래에게로 손을 뻗는데 하준이 자신이 놀아 줄 테니 앉아 있으라며 미래를 데리고 물가로 나갔다.

언제 가져왔는지도 모를 튜브를 미래에게 씌우고 물장구를 치는 두 사람을 구경했다. 닮긴 많이 닮았구나. 웃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먹은 도시락을 정리하던 중 가방에 있는 인절미 마카롱을 보았다. 오랜만이다. 비닐에 새겨진 브랜드도 같았다.

“어린이 모래 놀이 세트 배달 왔습니다. 배달비까지 해서 15,000원입니다.”

“아…… 잠시만요.”

현금을 들고 다니지 않던 서하는 당황하여 눈앞에 보인 하준의 지갑을 들었다. 자기가 주문했으니 화내지는 않겠지 하며 지갑을 열고 이만 원을 꺼내 주고 오천 원을 거슬러 받았다. 거스름돈을 지갑에 넣고 닫으려는데 신분증을 넣는 투명한 칸에 다 찢어진 사진이 들어 있었다.

“……어이없어.”

갈기갈기 찢어 버렸던 초음파 사진이 테이프로 얼기설기 붙여져 있었다. 하준과 미래가 돗자리로 다가왔고 지갑을 닫아 원 상태로 둔 서하는 미래에게 모래 놀이 세트를 보여 줬다.

“놀다 올게.”

“물에 들어가지 말고 아빠 보이는 곳에서 놀아.”

삽으로 땅을 파는 미래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하준을 보았다. 내키지는 않지만,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 하나는 인정해 주기로 했다.

“최하준아.”

“그래.”

몸이 잘게 떨리는 서하에게 챙겨 온 겉옷을 어깨에 덮어 준 하준은 서하가 마저 말하기를 기다렸다. 최근 과분할 정도로 행복하기는 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하더라도 담담히 받아들이고자 했다.

“내 미래에 앞으로 당신은 없는데 미래라는 축복을 준 건 고마워. 그냥 그 말이 하고 싶었어.”

“나야말로 곁에 있게 해 줘서 고마워. 쉽지 않았을 텐데.”

무릎에 팔을 올리고 머리를 얹은 서하는 모래성을 만드는 미래를 응시했다. 바람이 불자 무너지는 모래성에 좌절하다가도 조그마한 손으로 다시 쌓아 올리는 모습을 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미래가 조금 더 크면 말해 줘. 지갑에 품고 다닐 정도면 아빠 노릇은 하겠지. 무작정 숨기는 것도 미래한테는 가혹하고…….”

“……잘할게.”

아마 자신이 서하를 웃게 해 줄 수는 없을 거다. 하준은 웃는 서하를 보며 덩달아 미소를 지으며 미래를 보았다. 서하를 닮아 포기를 모르는 미래라면 서하를 지켜 줄 수 있으리라 보았다.

“다 놀았어? 손에 흙 다 묻었다.”

“아빠, 미래는 오늘이 너무 좋아. 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좋겠어.”

“응, 아빠도. 그리고…… 미래가 있어서 아빤 정말 행복해. 저번에 바로 말 못 해 줘서 미안해.”

석양이 비치는 해변은 아름다웠지만, 곧 헤어져야 할 시간을 의미해 하준은 못내 아쉬워 미래를 바라보았다. 한바탕 놀아 지치는지 서하에게 안긴 미래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돌아가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창문을 내린 서하는 눈을 감고 바닷바람을 쐬었다. 집에 도착하고 짐을 정리한 하준이 등을 돌려 차 안에 다시 타고자 하니 서하가 하준을 잡았다.

“미래, 유치원 보낼 건데 나만으로는 허가가 안 나. 괜찮으면 우리 집에서 오늘 자고 미래 아빠로 사인해 줬으면 좋겠는데.”

서하와 미래의 공간에 하준이 초대받았다. 언젠가 서하가 말한 우리 집에 일원이 될 수 있기를 꿈꾸며 따뜻한 온기를 지닌 집 안으로 하준은 들어갔다.

if 외전. 오메가가 알파보다 우위라면?

“하준아, 구멍에 넣고 싶어?”

“…….”

침대에 앉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하준을 내려다보던 서하는 발을 들어 하준의 앞섶을 뭉근하게 쓸어내렸다. 더 커지는 게 느껴지는 성기에 서하는 비소를 날리며 상체를 낮추고 하준과 눈을 마주 보았다.

“이건 뭐…… 발정 난 개가 따로 없네. 잘 짖으면 상으로 박게 해 줄게.”

분한지 죽일 듯이 눈을 치켜뜨고 있는 하준을 보며 서하는 전율을 느꼈다. 애원하면서 박게 해 달라는 널리고 널린 알파보다는 길들여지지 않은 하준이 취향이었다. 다른 오메가보다 관대했던 서하는 하준이 옷을 입고 생활할 수 있게 해 주었는데 자신이 관용을 받는다는 자각이 없는지 짐승처럼 날뛰기 바빴다.

“원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하는 무릎을 꿇고 있는 하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위치를 자각시키면서 부드럽게 손가락을 지나가는 머리카락에 신난 서하는 얼굴과 목선, 상체까지 내리며 하준을 만져 댔다.

“크흡…….”

“왜 갑자기 발정 났어? 아니다, 넌 아까부터 발정 나 있잖아. 천박하게.”

또다시 자신을 노려보는 하준의 눈빛은 맹수 같았다. 머리에 스쳐 지나가는 흑표범의 모습에 다음에는 머리띠와 꼬리를 달아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손으로 가슴을 쥐었다.

손에 가득히 잡히는 단단한 근육에 흡족한 서하는 촉감을 즐기고자 주물럭거렸다.

오메가를 공격해서도 안 되고 반항해서도 안 된다고 각인된 알파들은 신체적인 우월함에도 불구하고 몸을 흠칫거릴 뿐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을 주무르다가 맨살을 보고 싶어 서하는 근육을 가리고 있는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냈다.

“와……. 지금 너무 좋은데.”

“이러지 마십시오…….”

세 번째 단추까지 풀어내자 터질 듯한 가슴 근육이 드러났다. 서하는 주먹으로 가슴을 툭툭 치며 감탄했다.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이며 거부의 말을 하는 하준을 교육시킬까 하다가 좋은 일을 앞두고 있으니 좋게 가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저 말해 봐. 뭘 원한다고?”

“각인을 원합니다. 저를…… 제외……한 알파는 맞이하지, 말아 주십시오.”

“내가 왜? 각인하면 나만 손해인데 내가 해야 할까?”

상체에서 하체까지 손이 내려와 앞섶을 쥐고 있는 서하에 하준은 반응하지 않고자 주먹을 쥐고 떨면서 말했다. 알파들끼리 싸움을 붙여 구멍에 박게 하지 않고, 품평회에 내보지 않아 감사하다고 느끼고 있으나 이왕이며 혼자서 서하를 독차지하고 싶었다.

“서하……님도 제가……흣,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음……. 마음에는 들지. 근데 좆만 마음에 들고 다른 건 영 별로여서. 특히 쓸데없이 고지식한 성격 같은 거.”

급격하게 기분이 나빠져 서하는 손에 힘을 주어 하준의 앞섶을 움켜잡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몸을 떨었고 안 그래도 큰 가슴이 더욱 부각되었다. 다른 알파를 품을 생각조차 없었지만 하준이 아양을 떨기 바라며 서하는 모진 말을 계속했다.

“제가…… 잘……하겠습니다.”

“어떻게 할 건데?”

하준의 곁에서 떨어져 침대 위에 앉은 서하는 하준이 무엇을 할지 기대하며 지켜보았다. 취직한 회사에서 사원들에게 희롱당하고 있는 하준을 보았고, 얼굴과 양복을 입은 몸매가 취향이라 그대로 집에 들어앉혀 욕구를 푸는 데 사용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하준은 명망 있는 오메가 집안에서 알파로 발현된 미운 손가락이었고, 서하에게 정식 알파로 맞아 주길 바랐다.

하준은 반쯤 벗겨진 와이셔츠에 손을 가져다 대 남은 단추를 풀어 벗고,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었다. 살결에 바람이 닿아 몸이 떨렸으나 서하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도록 하준은 속옷마저 벗었다. 속옷은 서하가 건조하게 만졌던 손길만으로도 사정하여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수치스러웠지만 서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성기를 손으로 잡고 흔들어 발기했다.

“잘하겠다는 게 좆 보여 주고 싶은 거였어? 그건 당장 밖에 나가도 보여 줄 애들 엄청 많은데.”

“예쁘다고 해 주지 않았……흡……습니까……. 서하 님이 만족하는 곳도 제가…… 알고 있습니다.”

확실히 곧고 두꺼운 하준의 자지는 서하의 마음에 들었다. 가끔은 벗겨 놓고 자지만 구경한 적도 있을 정도였고 자신이 시켜서 자위를 할 때마다 흥분하여 엉덩이의 보조개가 생기는 것도 음심을 동하게 만들었다. 조금만 더 울리다가 박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서하는 페로몬을 풀어냈다.

“흐윽……. 제발. 서하 님. 예뻐해 주십시오.”

“페로몬 맡으니까 혼자서 줄줄 새네……. 묶어 놓고 나오지 않을 때까지 페로몬만 맡게 해 보고 싶다.”

곧은 성기에서 프리컴이 줄줄 흘러 댔고 쾌감에 젖어 허리를 떨어 대는 하준이었다. 허공에 허리 짓을 하는 하준을 가엾게 여긴 서하는 하준을 밀쳐 침대에 눕혔다.

“움직이면 안 되는 거 알지?”

“네……. 안 움직이겠습니다…….”

하준의 위에 올라탄 서하는 발기되어 있는 성기에 구멍을 맞추고 내려앉았다. 아래에서 하준이 흥분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서하는 자신의 쾌락이 중요하여 하준을 생각하지 않고 움직였다.

“흐으으, 앙! 좋아……. 최하준, 으윽, 어디 가서, 좆…… 함부로, 아앗! 놀리기만 해 봐.”

“제겐…… 서하 님, 크읍……뿐입니다.”

눈은 풀리고 입은 살짝 벌린 채 말을 하는 서하의 얼굴이 예뻐 하준은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하니 더더욱 발기가 되었다.

“왜, 더…… 으읏, 커지는데! 내가…… 좋아?”

“좋습니다……. 서하 님…… 사랑합니다.”

“힉! 하읏, 형, 더…… 박아 줘……흐으.”

형이라는 호칭에 이성이 끊긴 하준은 서하의 골반을 잡고 위치를 바꿔 서하를 침대에 눕혔다. 서하를 만난 걸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하준은 서하의 구멍에 성기를 더 깊이 넣었다.

파르르 떨어 대는 서하의 허벅지에 입을 맞추며 하준은 끊임없이 아프지 않냐고 물었지만 멈추거나 성기를 빼내지는 않았다. 자신이 유일하게 허락받은 이 시간 동안 서하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잠식되어 속도를 올리니 서하가 자지러지게 울어 대기 시작했다.

“으흐으……. 형, 더, 더 해 줘……. 좋아! 으흣!”

“사랑한다고 말해 주세요, 서하 님.”

하준이 몸을 숙이며 귓가에 속삭였고 예민한 곳에 닿은 숨결과 깊게 들어오는 성기에 서하는 생리적으로 눈물을 흘렸다. 이에 손으로 눈물을 닦아 주며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는 하준의 표정은 뭐랄까 절박해 보였다. 결혼이 취소되면 버려지는 건가 싶어 손을 뻗어 하준의 얼굴을 만지니 손깍지가 껴지고 손등에 입술이 내려앉았다.

“간지러워…….”

“사랑합니다. 제가 비록 보잘것없지만 힘들 때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그거 청혼이야……?”

알파에게 청혼을 받다니, 신기한 경험을 한다는 생각에 웃음을 터뜨렸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움직이라 명령하니 하준은 표정을 찌푸리면서도 곧이곧대로 움직였으나 전처럼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준의 페로몬이라도 맡으면 흥분할까 싶어 페로몬을 풀라고 했으나 흥분은커녕 하준의 침울한 기분이 느껴져 불쾌해졌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기분 잡치게 할 거면 당장 나가.”

“알겠습니다…….”

구멍을 가득 채우던 성기가 빠져나가고, 등을 돌린 하준이 거슬려 팔을 잡고 멈추게 했다. 애매하게 흥분된 몸에 짜증이 나 몸을 돌리니 하준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서하가 당황하여 팔을 놓았으나 하준은 팔을 뻗어 서하를 껴안았다.

힘겹게 토해 내듯 사랑한다고 말하는 하준을 서하는 감흥 없이 지켜보았다. 오메가의 지위를 이용하려는 알파가 많았기에 하준도 같은 부류라 생각한 서하는 하준을 떼어 내려고 했으나 그럴수록 하준은 더욱 달라붙었다.

“모진 말을 해도…… 상처 줘도 괜찮으니…… 옆에만 있게 해 주십시오.”

“…….”

“당신이 원한다면…… 뭐라도 할 수 있습니다. 제발…… 버리지 말아 주세요. 사랑해요.”

언제부터였을까 하준이 자신을 줄곧 쳐다보고 있기는 했다. 단순히 반항하는 거라 여기고 있었지만 경호도 두지 않은 자신에게 힘으로 덤빈 적은 없었다. 진심인가 싶어 하준의 어깨를 손으로 밀어내니 순순히 밀려났고 눈을 마주 보았다. 온전히 자신을 담고 있는 눈동자에 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손으로 하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서하 님……?”

“아직까지 믿기지는 않아. 사랑한다니……. 너랑 나랑은 만남도 나빴고, 방금까지도 사이 안 좋았잖아.”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더 음란하게 구는 게 취향이면 바꾸겠습니다…….”

성격을 바꾸겠다고 말하는 하준이라니. 오늘 신기한 일을 많이도 겪는다 생각하며 서하는 푸스스 웃었다. 섹스 중에 청혼하며 우는 알파라니, 누군가에게 말할 수도 없는 내용이었다. 간질간질한 가슴에 의문을 느끼면서 서하는 하준을 떠보기 위해 질문을 했다.

“만약 내가…… 다른 알파를 만난다면 어쩔 거야?”

“죽여 버릴 겁니다. 서하 님을 만진 손가락은 하나씩 부러뜨리고 만약 입으로 핥았다면 혀를 뽑고, 더러운 입으로 감언이설을 했다면 다시는 말할 수 없게 만들 겁니다.”

“어…… 좀 무섭네…….”

무섭다고 하자마자 눈빛을 바꾸며 볼에 뽀뽀를 하는 하준을 서하는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생각보다 소유욕이 심한 하준이어서 어떻게 해결해야 고민하고 있는데 하준이 서하의 귓바퀴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자살할 겁니다. 알파를 죽였으니 처벌은 피할 수 없을 테지요.”

“나는 어쩌고 자살을 해……?”

하준을 곁에 둔다고 가정하고 말했지만 서하 본인은 눈치채지 못했고, 하준은 서하의 미래에 자신이 있음에 활짝 웃으며 계획했던 일을 말했다. 서하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서하 님도 같이 갈 겁니다. 무섭지 않게 먼저 보내 드리고 바로 뒤따라갈 테니 행여나 버리고 갈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뭐……?”

자신도 죽는 미래에 서하는 눈을 크게 뜨며 하준에게 해명할 것을 요구했으나, 하준은 서하를 다시 눕히며 입을 맞추었다. 하준은 서하하고 영원히 함께할 날을 고대하였고, 서하는 될 대로 되라 싶어 키스를 하였다.

if 외전. 알파, 오메가, 베타가 평등한 관계라면?

“저희 왔어요.”

“어서 오렴. 오는데 힘들지는 않았고?”

추석을 맞아 서하와 하준은 집에 인사를 하고자 방문했고, 미경은 하준에게 무겁다며 선물 세트를 내려놓게 하였다. 기분이 나쁜 서하는 거실 바닥에 누워 바닥을 굴러다녔고 하준은 깍듯하게 인사를 하며 서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눕지 말라고 했잖아.”

“우리 집은 바닥이랑 소파 상관없다고 하는데.”

차가운 바닥에 눕지 못하게 서하를 일으키던 하준은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안색을 살폈다. 의도하고 말한 건지 바닥에 누워 실실 웃고 있는 서하에 하준은 집에 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미경이 하준의 편을 들어 서하에게 일어나라고 했다.

“오랜만에 집에 오니까 좋다.”

기지개를 편 서하는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며 쪼르르 부엌으로 뛰어갔고 홀로 남은 하준은 경직된 채 서하가 누워 있던 자리에서 서 있었다. 서하가 돌아오길 바라며 부엌으로 신호를 보냈으나 눈치도 없이 미소를 지으며 전을 집어 먹고 있는 서하를 보니 착잡했다.

“그래, 앉지 않고 뭐 하나 최 서방.”

“네, 장인어른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바닥에 앉는 정호에 따라서 바닥에 앉은 하준은 정호에 말에 충실히 대답하였다. 대다수가 서하와 관련된 내용이었고 말 속에 서하가 슬퍼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뼈가 담겨 있어 하준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엄마, 저것 봐 봐. 아빠가 최하준 잡는다.”

“결혼한 사람한테 최하준이 뭐야. 형이라고는 해야지.”

“아파! 왜 때려.”

미경이 서하의 등짝을 때리며 하준의 편을 들어 주라고 하였고 서하는 욱신거리는 등을 문지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배를 채운 다음에 도와주기로 마음먹고 애호박전을 먹으며 하준을 구경했다. 회사에서는 기 하나 죽지 않고 휘두르더니 아빠 앞에서는 순한 양 같은 모습에 서하는 물을 떠 와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구경했다.

아들의 철없는 모습에 미경은 한숨을 쉬며 접시에 음식을 담고 서하에게 내어 가라고 했다. 하준의 안색이 점차 나빠지는 걸 본 서하는 접시를 받아 들고, 술을 꺼내 하준과 정호 앞에 내려놓았다. 하준에게 젓가락을 주는데 왜 이제야 왔냐는 눈빛을 받고 모른 척하며 하준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형, 애호박전 완전 맛있어. 먹어 봐.”

하준의 입에 애호박전을 넣어 주는 서하에 정호는 아들을 헛키웠음을 느꼈다. 두 쌍의 젓가락을 가지고 와서 하나는 하준의 손에 쥐여 주고 나머지 하나는 애호박전을 집어 하준의 입에 물려 주었다. 아들이 온다고 해서 아침부터 애호박전을 만들었는데 도둑놈 같은 놈의 입에 들어가고 있었다.

“자네 술은 좀 하나?”

“사회생활 할 정도는 합니다.”

“주정뱅이들.”

왕년에 술 좀 마셨던 몸으로서 하준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고 생각한 정호는 서하가 가져온 술을 술잔에 가득 부었다. 하준이 취해 추태를 부리는 모습을 서하에게 보여 줘 콩깍지를 벗겨 내겠다는 일념하에 정호와 하준의 술판이 벌여졌다.

술만 연거푸 마시는 정호를 보다가 서하는 젓가락이 모두 하준에게 가 있는 것을 보며 정호가 왜 술을 권한지 알았다. 부엌으로 들어가니 식탁에 앉아서 정호의 객기를 구경하던 미경은 서하에게 가지 말고 앉아서 밥을 먹으라고 했다.

“형도 아직 밥 안 먹었는데.”

“네 아빠 술 못해. 저러다가 먼저 취해서 괜찮을 거야.”

서하가 밥을 먹으며 정호가 어렸을 때 해 줬던 무용담을 말해 주니 미경이 질린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술도 못하는 양반이 사위한테 질투해서 술로 시비를 거는 꼴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싶었다.

밥을 반 공기 정도 먹었는데 하준이 서하의 어깨를 감싸며 머리를 기대 와, 정호는 어떻게 된지 물으니 난감하게 웃으며 취하신 거 같다고 했다.

“제가 그만 마셨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최 서방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어여 앉아서 밥 좀 먹어.”

“제가 덜어서 먹겠습니다.”

분명히 자신의 집이었는데도 어느 곳에 무엇이 있는지 더 잘 아는 하준에 서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설명해 보라고 하였다. 밥을 먹던 하준이 입을 다물었으나 서하가 계속해서 물으니 종종 찾아뵈었다고 실토했다. 정호가 없는 식탁엔 웃음꽃이 가득했다.

밥을 다 먹고 후식을 가지고 거실로 나오니 얼굴이 빨개져 있는 정호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미경이 무슨 추태냐며 정호를 흔드니 소중한 아들을 호랑 말코 같은 놈에게 빼앗겼다며 하소연을 했고, 서하가 손가락질을 하며 하준에게 호랑 말코라고 말하며 웃어 댔다.

“그치……. 8살 차이면 호랑 말코 맞지…….”

“알고 있으니……. 하.”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자책하는 하준에 서하는 더 기분이 좋아져서 방방 뛰며 하준을 놀려 댔고, 미경이 서하를 붙잡으며 송편이나 만들자고 했다. 거실 바닥에 송편 반죽과 콩, 설탕이 놓였고 송편을 만들어 본 적 없는 하준은 멀뚱멀뚱 반죽만 지켜보았다.

어느새 술이 조금 깬 정호도 송편 만들기에 동참하고 있었고 하준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쭈뼛거렸다. 미경은 하준에게 하고 싶으면 손을 씻고 오라고 했고 자리에 앉은 하준은 숙달된 정호를 보며 따라 했다.

“처음 해 보는 겐가? 잘하는구만.”

“장인어른께서 너무 잘 만드셔서 따라 하기 쉬웠습니다.”

“띄워 주는 데는 일가견 있구만.”

서하는 처음 하는데도 파는 거 못지않은 하준의 송편을 보고 자신이 만든 송편을 바라보았다. 너덜너덜해진 반죽을 뒤로 숨긴 서하는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고자 하였다.

“둘은 언제쯤 낳을 생각이니? 낳는다면 몇 명?”

아이 계획을 묻는 부모님에 서하가 경기를 일으키며 말하지 말라고 했으나 하준은 진지하게 아들딸 상관없이 한 명만 낳아 잘 키우고 싶다고 하였다. 서하가 하준의 허벅지를 발로 차니, 물론 서하의 동의를 얻고 마음의 준비를 한 뒤에 일이라고 덧붙였다.

“송편을 잘 만들면 예쁜 아이를 낳는다는 속설이 있는데 최 서방 송편을 보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감사합니다, 장모님. 서하가 왜 예쁜가 했더니 장모님 송편을 닮았던 거군요.”

“최 서방도 참……. 기분은 좋네.”

서하는 미경의 손에 들린 송편을 바라보고 하준에게 진심이냐고 물어보았다. 자신이 만든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처참한 송편을 보고 닮았다고 말하다니 얼굴이 처참하다는 뜻인 거 같아 해명할 것을 종용했다.

“서하야……. 네 송편은 왜 그러니…….”

“엄마 송편이랑 피차 다르지 않아…….”

미경이 웃으며 서하에게 앞으로 집에 올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하며 하준과 정겹게 대화를 했다. 누가 아들이고 누가 사위인지 모를 정도에 서하는 툴툴거리며 심혈을 기울여 송편을 만들었으나 갈수록 창의적인 모양의 송편이 완성되었다.

“서하 애는 최 서방을 닮아야겠어.”

“아빠!”

정호마저 하준의 편을 들어 줬고 서하는 자신의 편은 없다며 송편 만들기를 중단했다. 삐딱한 얼굴로 하준을 방해하고 있는 서하에 미경이 마실 음료수나 사 오라고 하였고 서하가 일어나자 하준도 따라 나왔다.

“최하준 말고 윤하준 하는 거 어때요? 아들이 따로 없던데.”

“동생하고 결혼할 마음은 없어서 말이지.”

이마에 입을 맞추는 하준에 서하는 마음이 풀렸다. 춥다는 핑계로 서하가 하준의 손에 깍지를 끼니 살짝 웃어 보인 하준이 손을 꼭 잡고 주머니에 넣었다. 간질간질한 기분에 올라간 광대가 내려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음료수를 사서 집에 올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송편 먹으렴.”

“벌써 다 쪘어?”

확실히 하준이 만든 송편이 예뻐 서하는 하준이 만든 것만 골라서 먹었고 하준은 서하가 만든 송편만 먹었다. 두 사람의 애정 행각을 보던 정호와 미경은 서하에게 하준에게 보여 줄 앨범이라도 찾아오라고 보냈다. 서하가 방으로 가자 미경은 하준에게 어렵게 말을 했다.

“알다시피 우리 서하가…… 베타 집안에서 오메가로 된 거라…….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해서 걱정했거든……. 정말 고맙네, 최 서방.”

“아닙니다. 서하같이 좋은 사람을 만난 제가 더 감사하죠.”

“우리 집안이 최 서방 집안과 비교하면 한참 떨어지는 거 알아……. 그래도 우리 서하 잘 부탁하네.”

정호도 합세하여 서하를 잘 부탁한다고 하였고 하준은 평소에 서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무뚝뚝한 얼굴에서 서하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은은한 웃음기를 띠고 있어 안심하며 미경은 고였던 눈물을 훔쳐 냈다.

우당탕.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에 정호와 미경은 감흥 없이 고개를 저었지만 하준은 놀라 벌떡 일어나 서하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책들에 혹시 다치지 않았는지 서하의 몸을 돌려 보며 확인한 하준은 그제야 안심했다.

“조심 좀 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난 일상인데…….”

입을 삐쭉거리며 따박따박 말하는 서하에게 진 하준은 서하가 찾은 졸업 앨범을 보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몸만 컸지 달라진 게 없는 서하였고 대학교 졸업 앨범까지 보았다.

“얘가 제일 친한 친구 지호. 지금 학과 선배랑 결혼해서 살고 있어요.”

“알파인가……? 결혼했다니 안심이군.”

“참나. 각인해서 어차피 다른 알파 페로몬도 못 맡는데.”

하준이 행여나 다른 알파는 만날 생각하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고, 서하는 하준이 마음에 안 들면 바람을 피울 거라고 협박을 했다. 이제야 좀 웃는 서하에 하준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으니 서하가 하준을 몸으로 밀어 침대에 눕히고 하준의 품으로 들어갔다.

“그냥 무서운 꿈 꿨어.”

“꿈? 귀신이라도 나왔나?”

품에 파고드는 서하가 귀여워 꽉 안은 하준은 서하가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입술만 달싹거리더니 하준이 자신을 막 다루고 다른 알파에게 넘겼다며 생각하기도 싫은지 몸을 떨었다. 하준은 황당하여 서하를 품에서 떼어 내며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하니 서하가 정색을 했다.

“그런 일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러면 넌 뒤지는 거야.”

“나름 내가 연장자인데 말이지…….”

“아빠 말 못 들었어? 호랑 말코 도둑놈은 변호할 권한이 없어. 그냥 ‘네.’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하죠.”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한 방이었고 서하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하준의 심장에 귀를 대고 눈을 감았다. 일정한 텀으로 뛰던 심장이 점차 빨라졌고 서하가 웃으며 지적하니 하준이 모른 척해 주는 게 예의라고 했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러면…… 절대로 나 용서하지 마.”

“말했잖아, 죽여 버릴 거라고…….”

“그래, 죽이고 행복해져야 해. 슬퍼하지도 말고 울지도 말고 행복해져야 해, 서하야.”

감정이 북받치는지 페로몬이 흘러나오는 하준에 서하는 진정하라며 페로몬을 풀어 주었다. 하준은 파우더 향을 더 맡고 싶어 서하를 으스러뜨릴 정도로 껴안았다. 서하에게는 호언장담했지만 사실 그럴 상황이 왔을 때 서하를 놓아줄 자신이 없었다.

오히려 정신 못 차리고 서하를 억압하고 옥죄는 게 아닐까 싶었고 하준은 스스로에게 염증을 느끼며 제발 그런 상황은 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서하가 자기를 죽인다면 모를까 살아남는다면 평생을 후회하다가도 서하에게 손을 뻗을 것만 같았다.

“서하야, 나 사랑해?”

“응? 갑자기? 당연하지 사랑하니까 결혼했지.”

“다시 한 번만 나…… 사랑해?”

“응, 나보다 8살 많고 회사에서는 남들 기분 따위 알 바 아니면서 우리 부모님한테는 쩔쩔매는 최하준을 사랑해.”

장난기 하나도 없는 서하의 얼굴을 보고 안심했지만 방 안에 퍼진 페로몬을 맡으니 생리적으로 발기가 되었다. 서하가 질색하며 참으라고 하준을 협박했으나 옷 안으로 들어오는 손에 허벅지를 찰싹찰싹 때렸다.

“집 가! 집! 집에서!”

“그러도록 하죠.”

집에 돌아온 하준과 서하는 침대에 갈 겨를도 없이 현관에서부터 서로를 탐하고 관계를 맺었고 침대에 왔을 무렵에는 지친 서하는 그만하라고 애원하였으나 하준은 지분거리며 성기를 빼내지 않았다.

“흐으…… 힘들어. 나…… 죽어, 형.”

“말할 여유가 있는 거 보면 아직 할 수 있어.”

이대로면 복하사로 죽어서 뉴스에 뜨지 않을까 싶어 서하는 저번에 하준을 멈췄던 비장의 무기를 쓰기로 했다. 얼굴 옆에 있는 하준의 양손을 잡으며 서하는 입을 뗐다.

“형……. 서하…… 아파요.”

눈동자가 탁해지는 하준을 보며 서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고 성기가 한 번에 빠지고 다시 훅 들어와 소름이 끼쳐 몸서리를 치며 헤드 쪽으로 기어갔다. 페로몬이 흉흉하게 퍼지는 하준에 서하가 진정하라고 했지만 하준은 멈추지 않았다.

“으허엉……. 개새끼……. 그만하라고 했는데…….”

“싫었어? 싫다고 하면 건들지도 않을게.”

솔직히 말하면 좋았기 때문에 서하는 눈치 없다고 하준을 타박했다. 하준은 축 늘어져 있는 서하를 씻기고 무언가 고민하는 서하를 건들지 않고 앞에 앉아 지켜보았다.

시간이 흘러 결론을 내렸는지 감탄을 내뱉으며 하준을 부르는 서하였고 하준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 말해 보라고 하였다.

“계속 고민했는데…… 계속 빌면 언젠가 용서해 주지 않을까?”

“무슨 소리야……. 용서하지 말라니까.”

“그치만 이 얼굴을 어떻게 용서 안 해. 얼굴도 아래도 잘생겼는데. 그냥 개처럼 기어! 그럼 용서해 줄게!”

도발에 넘어갈 뻔한 하준은 서하의 몸을 생각해서 아무 짓도 하지 않으니 아쉬운지 서하가 심통을 부렸다. 용서해 주겠다고 말하는 서하에 하준은 앞으로도 서하를 슬프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서하를 껴안고 잠이 들었다.

외전. 학예회와 캠코더

“아빠, 나 너무 떨려.”

“그래. 내일 안 졸고 잘하려면 자야 하지 않을까?”

초롱초롱한 미래의 배를 토닥이며 재우려고 했지만 미래는 떨린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대사를 읊고 있었다. 자는 건 무리겠다. 감기는 눈을 가까스로 뜨며 미래에게 맞장구치던 서하는 하준도 온다는 소리를 듣고 잠이 달아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최하…… 아니, 아저씨도 불렀어?”

“응! 미래 공연한다고 하니까 와 준다고 했어. 제일 앞자리에 앉을 거라고 했으니까 싸우지 말고 둘이 손잡고 와야 해?”

입술이 파르르 떨려 왔으나 미래 앞이니 표정 관리를 한 서하는 미래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한동안 안 온다 싶더니 미래와 거래를 한 줄은 알지 못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미래와 대사 연습을 하고 반쯤 감긴 눈으로 미래를 배웅하고 커피를 내렸다.

“너무 졸려…….”

누굴 닮아서 다른 배역의 대사도 전부 암기하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공연을 하기 전까지 일이라도 할까 싶어 노트북을 켠 서하는 모의고사 문제를 출제했다. 지호의 추천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재택근무이고 페이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아 미래를 보내고 난 뒤에 틈틈이 하고 있었다.

“끝!”

시계를 보니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공연이 시작되기 전까지 3시간 정도 남아 있어 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최하준 씨.”

[그대로 처리해. 어. 서하야.]

“둘이 작당하고, 저 모르게 약속을 하셨더라고요. 지금 장난하냐?”

[그게…… 미안하군, 주변에 고깃집 예약해 놨는데 이걸로는 사죄가 안 될까?]

용서해 주기로 한 서하가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옆에서 로운의 목소리가 웅얼거리며 들려왔다. 결혼이라는 단어가 언뜻 들렸으나 더 듣고 싶은 마음이 없어 하준에게 데리러 오라고 한 뒤 미련 없이 전화를 끊었다.

학예회는 핸드폰으로 찍으면 되겠지 싶어 충전기를 꽂고 마당으로 나간 서하는 조화롭게 심어진 꽃들을 보았다. 잡초만 무성했던 마당에 언제부터 꽃을 심었는지 모르겠으나 눈에 한번 밟히니 차마 관리를 안 할 수가 없어 시간이 날 때마다 물을 줬다. 슬슬 힘들어질 찰나 대문 앞에 차가 들어와 멈췄다.

끼익-.

“마당 관리는 나한테 맡기지 그래.”

“미래랑 내 집이야. 아저씨는 상관하지 마세요.”

호기롭게 말을 했으나 어수룩한 몸짓에 서하는 흙이 묻은 옷가지를 털어 내며 집 안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핸드폰을 챙겨 차에 타니 하준이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은데.”

“미래한테 앞자리에 앉기로 약속했거든.”

“그 덩치로 앞자리 앉으면 민폐야. 알아보는 사람 있어서 뉴스라도 나오면……. 알은척하지 마. 멀리 떨어져 앉아.”

세 번째 구석 줄에 앉겠다고 합의를 하고 차에서 내린 서하는 입구에 전시되어 있는 아이들의 연습 사진을 보았다. 수많은 아이들이 찍혀 있었으나 미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아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며 하준에게 유치원을 옮길 계획이라고 말했다.

“잘 다니고 있는 유치원을?”

“선생이 유출한 건지 내가 오메가인 걸 학부모들도 알고 있더라고. 나 욕하는 건 상관이 없는데 미래도 차별당할까 봐. 한 명이 유독 심해.”

서서히 모여드는 인파에 인상을 쓴 서하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높은 목소리의 여자가 서하를 붙잡았다. 하준에게 떨어지라고 한 뒤 입가에 미소를 띠며 뒤를 돌은 서하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길 바랐으나 정도를 모르는 여자가 계속해서 나불거렸다.

“처음에 우리 유치원에 오메가 자식이 들어왔다고 해서 놀랐잖아요. 하긴, 애가 인물이 범상치 않아서 왜인가 했더니 아버님을 닮은 거네요. 아니다. 낳았으니까 어머님이라고 해야 하나?”

“미래가 잘생기긴 했는데 저를 닮았다고 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이번 공연에서 맡은 게 변변치 못하다던데 인물이 멀쩡하면 뭐 해요. 써먹지 못하는 게……. 안 봐도 뭐로 발현될지 뻔하네요.”

“그만하시는 게 어떨까요?”

“애 공연에 혼자 온 것만 봐도. 어렸을 적에 얼마나 몸을 굴리고 다녔으면……. 애들이 뭘 보고 배울지 무섭네요.”

자신은 건드려도 애는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가까스로 참고 있던 서하는 표정을 굳히고 여자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여자는 뒤로 움찔거리며 물러나면서도 지껄여 댔다. 어디서 소문이 퍼졌는지 모르겠으나 유치원을 옮겨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하고 여자에게 다가갔다.

“하제 어머님. 치과 의사시라고 하셨나요?”

“어머, 네 맞아요. 이라도 썩었나 보죠? 저희 치과에 보내시면 할인…… 아니다, 무료로 해 드릴게요.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해야죠.”

“입으신 옷차림은 고상하신데 하시는 말씀은…… 격 맞지 않으시네요.”

오메가에게 한 소리 들었다는 게 황당한지 여자가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주먹을 쥐고 부들거렸다. 자기가 한 짓은 생각 못 하는 건가. 여자에게 더욱 가까이 간 서하는 상체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치아에 대해서 많이 배웠어도 입 터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못 배웠나 봐? 할 말 못 할 말 구분도 못 하는 걸 보니. 그럼, 하제 어머님. 공연 관람 잘 하세요.”

“너! 애 혼자 키우는 오메가라고 안타깝게 여겼더니 뭐……? 입 터는 방법을 잘못 배워? 내가 한 마디라도 하면!”

“왜 언성을 높이세요. 더 이상 설전은 시간 낭비인 것 같네요. 그럼 이만. 최하준 씨 들어가죠.”

한 공간에 있기 싫어 계단으로 올라간 서하는 나열되어 있는 의자에 자리 잡았다. 상당히 화가 난 서하에게 말을 붙이지 못한 채 하준은 옆자리에 착석했다. 무대에 불이 꺼지고 미래를 찾은 하준은 서하의 소매를 잡고 귓속말을 했다..

“나오는군.”

“보고 있어.”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낸 서하는 진지한 표정으로 캠코더를 들고 촬영하는 하준을 보고 기함을 금치 못했다. 요즈음 시대에도 캠코더를 쓰는 사람이 있는지는 둘째 치고 아이의 장기 자랑치고는 너무 전문적이었다.

“잘하는군.”

“……그래, 찍어라. 나는 모르겠다.”

고화질의 캠코더가 있으니 공연 감상에만 집중하기로 한 서하는 생각보다 파격적인 내용에 빠져들었다. 아이들이 떨지도 않고 부모를 보고서도 알은척하지 않아 대견했다. 우리 미래만 빼고.

“저 나무 애는 왜 이렇게 떨어?”

“손 흔드는 거 같은데……?”

나무 옷을 입은 미래가 나뭇잎이 붙여진 손을 흔들어 대자 학부모들이 웅성거렸다. 손을 몇 번 흔든 서하는 그만하라는 의미로 엑스 자를 그렸으나 더더욱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귀엽군.”

“아니, 지금 혼자서 태풍 만난 것처럼 흔들고 있는데……. 저기요. 뭐 하세요?”

아이가 왜 반응하나 했더니 하준이 원흉이었다. 왼손으로는 캠코더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미래에게 연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사람이 하찮아지면 심해를 뚫고서라도 하찮아질 수 있음을 깨달은 서하는 고개를 저으며 하준을 짜게 보았다.

2시간 가까이의 공연이 끝나고 아이들이 하나둘씩 무대 위에서 내려왔다. 뛰지 말고 계단으로 내려오라고 했으나 무대 한가운데서 점프를 한 미래를 하준이 받아 들어 목마를 태웠고 다른 아이들의 시선을 끌고 말았다.

“혹시 오늘 오기로 한 이유가 다시는 얼굴 들고 다니지 말라는 의미라면 성공하셨네요.”

“의도치 않게 미안하군.”

하준이 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하니 웃는 미래와 함께 건물을 나서는데 하제의 부모가 또다시 불러 세웠다. 무시하려고 했으나 상당히 분한지 고함을 질러 서하는 숨을 깊게 내쉬고 뒤를 돌았다.

“미래 아버님. 아까의 언행은 참을 수가 없군요. 진정성 있는 사과 부탁드립니다.”

“어머님. 제 기억엔 미래에 대한 험담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사과라뇨……? 아이들도 있는데 그만하시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사실대로만 말했는데 무슨! 애가 얼마나 멍청하면 저 얼굴로 나무 역할을 해요. 그것도 나무1도 아니고 3이라며!”

나무3을 맡은 이유를 말해 봤자 터무니가 없을 테니 서하는 입을 다물었다. 서하가 뭐라 말하지 않자 기세등등해진 하제의 부모가 쌍으로 서하와 미래를 비난했고 잠자코 듣고 있던 하준은 미래를 땅에 내리고 손을 잡았다.

“아저씨가 마지막에서 4번째 대사가 기억 안 나서 그러는데 알려 줄 수 있니?”

“숲속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면 난 날아오를 수 있을 거야.”

“고마워. 그럼…… 하제, 저 친구가 3번째로 말한 대사도 아저씨한테 알려 줄래?”

“난 혼자가 아니야. 다람쥐도 바위도 배도 모두 내 친구야. 근데 원래 대사는 배가 아니라 해인데 하제가 실수했어. 이것 말고도 생쥐인데 시궁쥐라고 하고 요정인데 마법사라고 했어.”

미래의 머리를 쓰다듬고 품에 안은 하준은 몸을 일으켜 하제의 부모를 보았다. 서하보다 큰 키이기에 중압감이 더 강력했고 서로의 눈치만 보던 하제의 부모는 얼굴이 빨개진 채 괜히 아이만 채근하며 돌아섰다.

“하제 부모님. 아이들이 하는 공연에서 역할의 경중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물며 배운 분들이 이러신다니 안타깝군요.”

페로몬을 풀어내지 않았으나 한쪽 눈썹을 올리며 말하는 하준으로 인해 충분히 불편한 공기가 흘렀다. 반강제로 미래와 서하에게 사과를 한 뒤 자리를 떠났고 세 사람은 고깃집에서 내렸다.

“미래야, 유치원에서 하제나 다른 애들이 괴롭혀?”

“아니! 하제랑 민율이랑 현서랑 다 좋아. 근데 아줌마랑 아저씨들이 나 막 째려보고 안 들리게 소곤거리는데 사실 조금 들려…….”

어딜 가나 부모가 화근이었다. 아이들은 좋은 것 같지만 미래를 위해서라도 유치원을 바꿔야 해 아이를 달랠 걸 각오하고 입을 열었다.

“친구들이랑 헤어져서 싫을 수도 있는데, 도율이 형이랑 같은 유치원 다닐래?”

“응, 좋아. 나 아저씨, 아줌마들이 아빠 나쁘게 말하는 거 싫어. 애들도 괜히 미워지려고 해. 그리고 도율이 형 좋아.”

생각보다 순순히 승낙을 하는 미래에 안도한 서하는 알겠다고 한 뒤 사훈과 지호에게 카톡을 보냈다. 입학 서류는 알아봐 준다는 카톡을 받고 핸드폰을 집어넣은 서하는 대본을 달달 외웠음에도 나무3을 맡은 이유에 대해 물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사람 역할은 재미없어.”

“그럼 대사 있는 다른 역할도 많았잖아. 서 있기만 하고 대사도 없는데 나무는 왜 고른 거야.”

“꽃이 좋은데 꽃은 없어서 나무 골랐어. 그리고 나무 역할 잘하려면 다른 친구들 대사도 알아야 해.”

서 있기만 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 대본을 통째로 외운다는 전제가 이해가 가지 않은 서하는 맞은편에 앉은 하준을 쳐다보았다. 하준 역시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미래의 편을 들며 앞접시에 고기를 놓았고 서하는 고개를 저으며 이상하다는 말만 내뱉었다.

“그리고 외우는 건 쉬워. 나무의 마음을 아는 게 어려웠어.”

엉성한 포크질로 냉면까지 야무지게 먹은 미래는 차에서 잠이 들었고 돌아오는 길에 하준은 주거지에 관해 말을 꺼냈다.

“도율이라고 했던가? 그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은 지금 살고 있는 곳이랑 가까워?”

“아니. 서울에 살아. 미래 교육 생각해서 올라가려고……. 모아 둔 돈도 있으니까 집 알아봐야지.”

“아직 구한 게 아니라면 내가 구해 주고 싶은데.”

룸미러로 눈치를 보는 하준과 눈을 마주친 서하는 싱긋 웃어 보였다. 수작을 부리는 게 너무 눈에 보여 잠자코 듣고 있는데 아이의 안전과 환경을 고려해서 재고해 달라는 말이 덧붙여졌다.

“그럼 나 그 집에서 살게 해 줘. 미래 태어났을 때 살았던 집.”

“거긴 안 돼.”

“그럼 내가 구할게.”

서하에게 괴로운 기억만 가득한 공간이기에 무슨 생각으로 집을 달라고 하는지 몰라 하준은 반대했고, 그 집이 아니라면 받지 않겠다는 서하가 부딪혔다. 철옹성인 서하에게 하준의 회유가 먹혀들지 않았고 결국 하준은 항복하며 이유라도 들어 보자 했다.

“미래 태어났을 때 못 해 준 게 많아서 다시 해 보려고 그 집에서.”

“하아……. 그러면 리모델링이라도 해 줄 테니 이건 받아 줘. 나도 더 이상은 못 물러나.”

승낙을 한 서하는 서재는 리모델링을 하지 말아 달라고 했고 하준 역시 서재는 추억이 많았기에 알겠다고 했다.

***

2달 뒤 리모델링이 끝났다는 연락을 받은 서하는 사훈과 지호의 도움을 받아 이삿짐을 날랐다.

“집, 진짜 좋네.”

“좋으면 뭐 해. 여기 갇혀 있었다는 거잖아. 넌 무슨 정신으로 여길 골랐어? 걸어 다니는 ATM기인데 더 비싼 거, 더 좋은 집 달라고 해야지.”

“사훈 형 진정해. 여기가 형 집이랑도 유치원이랑도 가까워.”

구시렁거리며 서하를 나무라던 사훈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하준을 보고 도끼눈을 뜨며 욕을 내뱉었다. 지호가 만류했으나 기어코 사훈이 하준의 멱살을 잡았고 뒤따라온 호철이 기함하며 둘을 떼어 놓았다.

이삿짐을 정리하고 지친 사람들이 거실에서 쉬고 있는데 지치지도 않는지 미래가 하준의 무릎 위에서 껌딱지처럼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아저씨도 우리랑 같이 살아요?”

“…….”

“아니. 아저씨는 집이 따로 있어. 미래는 아빠랑 둘이 살아야지.”

볼을 부풀리며 아쉬워하는 미래에게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춘 하준이 집이 가까워진 만큼 더 자주 놀러 오겠다고 약속하니 그제야 미래의 볼에서 바람이 빠졌다.

지호와 사훈이 미래를 하룻밤 맡아 준다고 데려갔고 하준과 서하만이 집에 남게 되었다.

“불편할 테니 나도 이만 가 보지.”

“뒤에 일정 없으면 술이라도 마실래?”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식탁에 올려 두니 하준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안주도 말도 없이 술만 마시니 식탁 위에는 빈 캔이 점점 늘어났다. 취기가 올라오는 것 같아 손등으로 얼굴을 만진 서하는 따뜻한 걸 느끼고 술을 내려놨다.

“더 마실래?”

“아니. 지금이 딱 좋은 것 같군.”

가겠다는 하준을 굳이 붙잡은 이유에 대해서 고민하던 서하는 캔 바닥에서 찰랑거리는 술을 입 안으로 모두 털어 넣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싶었다. 볼이 빨개진 채 턱을 괴고 풀어지는 얼굴을 감상하던 하준은 집의 소유권을 서하이 이름으로 이전했음을 밝혔다.

“와……. 이렇게 집주인이 되네. 근데 괜찮겠어? 이 집 너한테 소중한 곳이잖아.”

“이편이 정착하는 데 좋을 것 같아서.”

맥주 캔을 잡으며 말하는 하준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턱을 괴고 있던 서하에게도 전해졌다. 너도 기구하구나. 취기가 오르니 생전 생기지 않았던 동정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서하는 하준에게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소원……?”

“응, 단 내가 들어줄 수 없는 건 안 돼.”

“소원 있어. 들어줄래?”

식탁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나간 하준이 집 밖으로 나가 서하는 벽에 기대 상황을 지켜봤다. 잠시 뒤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와 함께 하준의 얼굴이 비디오폰에 나타났고 열림 버튼을 눌러 문을 열었다.

“다녀왔어.”

“하, 이게 소원이야?”

“응. 한 번쯤은 들어 보고 싶었거든.”

“어서 와.”

집문서도 받았겠다. 이 정도야 장단을 맞춰 주기로 한 서하가 웃으며 하준을 맞이하니 하준도 옅게 미소를 지었다. 상황이 끝나자마자 춥다며 거실로 들어가는 서하를 따라 들어갔고 새벽이 무르익고 아침이 밝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외전. 히트사이클

몸이 으슬으슬한 게 예감이 좋지 않아 옷을 겹겹이 입은 서하는 침대에 앉아 후회했다. 단순한 감기인 줄 알고 감기약만 먹었는데 상황을 보니 감기가 아닌 히트사이클이었다. 미래를 낳고 나서는 히트사이클이 온 적이 없었기에 당황했고 일단 미래를 사훈의 집에 보내기로 했다.

“미래야, 오늘 도율이 형 집에 갈래?”

“응, 좋아.”

지호에게 전화를 건 서하가 상황을 설명하니 도리어 지호가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미래를 지호에게 맡기고 히트사이클이 끝날 때까지 집에서 나오지 않기로 하고 미래의 옷가지를 가방에 챙겼다.

“아빠, 미래 옷은 왜 넣어?”

“몇 밤 자고 오라고. 도율이 형이 미래 오래 보고 싶대.”

놀고 오는 건 괜찮지만 자고 오는 건 싫은지 미래는 서하에게서 가방을 가져가 짐을 다 꺼내 바닥에 내팽개쳤다. 근육통처럼 몸이 점점 욱신거린 서하는 화를 낼 기운도 없어서 미래의 손을 잡고 상황을 찬찬히 설명하니 울먹거리는 미래가 서하를 껴안고 아프지 말라며 위로했다.

띵동-.

“미래야, 삼촌 왔어.”

“안녕하세요. 지호 삼촌.”

“삼촌!”

공손하게 인사하는 서하에 당황한 지호가 뒷걸음질 치며 행동의 이유를 물으니 맡기는 처지기에 예의를 차린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직은 상태가 괜찮다고 판단한 지호는 사훈이 가지고 있던 억제제를 서하에게 건넸다.

“고마운데 효과 없을 것 같다.”

“왜? 내성이라도 생겼어?”

베타에서 오메가로 발현을 한 사례라 그런지 먹는 약마다 효과가 너무 심하거나 미약해 중간이 없었고 부작용도 막대했다. 자연스럽게 억제제를 끊게 되었고 버티는 게 최선이라 설명하니 지호가 안타깝다는 듯 어깨를 두드리며 미래의 손을 잡았다.

“아빠. 죽으면 안 돼…….”

“안 죽어……. 며칠 뒤에 보자.”

손을 흔들어 배웅을 하고 집에 들어온 서하는 침대에 눕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조금씩 새어 나오던 페로몬이 미래가 떠나자마자 뚫리기라도 한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술에 만취한 마냥 열기는 오르고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지는 몸을 웅크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후…….”

미래에게 이 광경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서하는 부엌으로 비척거리며 걸어가 물을 마셨다. 지호가 가져온 억제제라도 먹어 볼까 싶었으나 아무도 없는 집에서 사체로 발견되고 싶지 않아 이불을 둘러쓰고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짜증 나, 흐으…….”

구멍에서 울컥하며 애액이 흘렀고 몇 년 만에 느껴 보는 질척한 느낌에 인상을 쓰며 베개를 꼭 껴안았다. 한 번 만지면 걷잡을 수 없이 쾌락을 원해 머리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손이 바지 안으로 들어갔고 결국 참지 못하고 성기를 손으로 잡고 흔들었다.

“으흣…… 하아.”

얕은 쾌락이 성기를 흔들수록 점차 거세졌고 더 큰 쾌락을 원해 손놀림이 점차 빨라졌다. 두 무릎과 왼손으로 지지를 하고 허리를 높게 뜬 자세에서 헐떡이는 숨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윽, 하아. 부족해.”

침대 시트가 아닌 손에다 사정해 끈적끈적한 정액을 닦은 김에 땀에 젖어 찝찝한 몸을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찬물이 몸에 닿으면서 열기를 앗아 간 건 좋으나 물줄기조차 간지럽게 느껴지더니 몸을 긁고 내려가는 거 같아 물을 끄고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진정하자.”

알파의 페로몬이 없이는 쉽사리 진정되지 않겠지만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하준을 부를 수는 없었기에 가운을 입고 거실로 나왔다. 창문을 다 열었음에도 잠잠했던 열기가 슬금슬금 다시 올라와 미친 척하고 억제제를 먹을까 고심하던 중 벨이 눌렸다.

사람을 맞이할 여력이 아니었기에 무시한 서하는 약 뚜껑을 열고 손바닥에 약을 올리고 물을 따르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가는데 포기를 모르는지 벨을 계속해서 눌러 댔다.

“어떤 미친 새끼가 한밤중에 난리야.”

식탁 위에 약을 내려놓고 현관으로 나간 서하는 비디오폰으로 보이는 하준의 얼굴에 본능에 휘둘려 전화했나 곱씹었으나 기억에 있지 않았다. 바깥까지 페로몬이 맡아지는지 벨을 누르지 않고 현관문 두드리는 하준에 서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무슨 일이야. 미래는 며칠 다른 집에 가 있으니까 나중에 다시 와.”

“미래가 아빠 살려 달라고 해서 온 건데 목소리가 많이 안 좋아 보이는군. 무슨 일 있나?”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말하기는 했으나 페로몬이 현관문 바깥까지 퍼져 나갔을 것이고 하준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눈앞에 알파가 있는데 굳이 부작용이 큰 억제제를 먹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 알면서 왜 떠보고 그래. 들어올래?”

“하……. 무슨 생각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지.”

현관 안으로 들어간 하준은 어깨에 머리를 묻는 서하로 인해 잠시 멈춰 섰다. 장미꽃의 바디 워시와 파우더 향의 페로몬이 어우러져 있었다. 하준은 언짢은 눈으로 젖은 머리칼에서 흘러내리는 물기를 손으로 문질렀고 고개를 뒤로 젖힌 서하와 눈이 마주쳤다.

“왜, 오랜만이어서 내외해?”

“도발하기에는 여유가 없어 보이는데.”

맞는 말을 한 하준이었기에 별말을 하지 않았다. 검지를 까닥거려 하준의 고개를 숙이게 한 서하는 입을 맞췄다. 하준의 페로몬을 들이마시기 위한 행위에 가까운 원초적인 키스였지만 하준과 서하 모두 서로의 숨을 탐했다.

금세 몇 년 만에 하는 키스의 주도권을 쉽사리 빼앗긴 서하는 하준에게 농락당했고 숨이 막혀 하준의 어깨를 밀어냈다.

“하아……. 하아…….”

“페로몬 더 필요하지 않아?”

이마를 맞대고 속삭이듯 말한 하준에 눈썹을 위로 올린 서하는 다시 입을 맞추었다. 아까보다는 느리고 집요한 키스가 이어졌다. 치열을 훑는 것까지는 괜찮았으나 입천장을 쓸어내리는 느낌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아 뒤로 물러났다.

하준과 서하 둘 다 눈을 감지 않았고 오기가 생긴 서하는 하준의 와이셔츠 윗단추를 아래로 잡아 뜯었다. 단추가 튕겨 바닥 위를 굴러다녔고 서하의 돌발 행동에 잠깐 놀랐으나 하준은 평정심을 되찾고 서하의 귓가를 어루만지며 키스를 이어 나갔다.

하준이 조금만 더 입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서하가 무릎을 들어 하준의 성기를 지그시 눌렀다. 점차 존재감을 과시하는 성기를 보며 하준의 남은 단추를 하나씩 풀어냈다. 세 번째 단추가 풀리면서 가슴팍이 드러났고 나머지 단추도 풀어내려고 하니 하준이 입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놀랐어?”

타액으로 인해 번들거리는 입술을 엄지로 훔친 서하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입고 있던 가운의 끈을 잡아 풀었다. 서하의 손을 핥아 내리듯 바라보던 하준은 매듭이 완전히 풀리는 순간 서서히 벌어지면서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가운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여기서 할 생각 아니면 들어가는 게 어때?”

“윤서하.”

얼굴은 붉게 물들이고 눈을 살짝 접으며 웃는 서하를 안아 올린 하준은 방 안으로 곧장 들어갔다. 처음 들어와 본 서하의 방엔 심플하고 밝은 톤의 가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침대는 혼자 쓰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큰 사이즈라 침대에 눕히며 서하에게 질문했다.

“미래랑 같이 잔다고 감안해도 큰 사이즈인 거 같은데.”

“남 이사 뭐 쓰든지 알 바 아니잖아.”

하준의 눈빛에 불만이 가득했으나 서하는 하준의 턱에서 귀까지 쓰다듬으며 하던 거나 마저 하자고 부추겼다. 그러나 하준은 움직이지 않아 서하는 애가 달아 인상을 썼다.

“뭐가 문제인데?”

“……다칠 것 같아서 말이지.”

히트사이클이라 다칠 가능성이 적었지만 하준은 불안한 마음에 인상을 찌푸리고 망설였다. 상황을 파악한 서하는 손을 뻗어 서랍장을 열어 콘돔과 윤활유를 꺼내니 하준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또 왜 그러는데.”

“이게 왜 집에…… 있는 거지.”

지호가 새 출발을 하라며 장난삼아 주고 간 물건이었으나 하준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도록 가만히 있었다. 이거 또 색다른 묘미다.

언짢아하면서도 윤활유를 손에 적시고 서하의 배 밑으로 손을 넣어 허리를 들게 한 하준은 구멍에 검지와 중지를 밀어 넣었다.

“아, 차가, 으흣……. 아파.”

“천천히 할 테니 조금만 참아 봐. 페로몬 더 풀어 줄까?”

오랜만에 무언갈 집어넣은 구멍은 빠듯해 침입을 거부했고 하준의 손가락에 의해 벌어지는 게 적응이 안 돼 서하는 베개를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베개에 손톱을 박아 넣고 숨을 옅게 쉬어도 고통이 가시질 않아 흐느꼈다.

“괜찮아?”

“흐으…… 그냥 차라리 빨리하면 안 돼?”

넓히지 않고 넣었다가는 유혈 사태가 일어날 듯했다. 손가락 두 개도 온몸이 빨개질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는 상황에서 성기를 집어넣을 수 없었던 하준은 어깨부터 척추 선을 따라 손가락을 훑어 내렸다.

“뭐…… 하는 거야.”

“긴장하지 말고.”

말을 마친 하준은 손등에 윤활유를 부으니 손등을 타고 내려오던 윤활유가 체온에 의해 데워졌고 손가락을 거쳐 내벽 안으로 들어갔다. 허리가 잘게 떨리고 조금씩 앞으로 빠져나가려는 서하의 골반을 붙잡고 내벽 곳곳을 꾹꾹 눌렀으나 메마른 신음이 섞여 나왔다.

“후으……. 아파, 찢어질 것 같아.”

“힘을 풀어야지.”

괜히 하준을 집 안에 들였다 싶은 서하는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감각이 예민해지니 쾌감만 극대화 되는 게 아닌 고통도 덩달아 극대화 되었다. 예전에 하준의 성기를 넣어 봤음에도 지금은 불가능하다고만 사료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더 아파하는 서하로 인해 하준은 손을 뻗어 서하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하준은 알지 못하지만 이미 한 번 사정했던 서하는 성기가 잡혀 진저리를 쳤으나 하준은 개의치 않고 성기를 흔들었다.

“놔! 그거 아냐. 하읏, 흐으으.”

앞에서는 성기가 흔들리고 뒤에서는 하준의 두껍고 긴 손가락이 내벽을 건드렸다. 배에 힘이 들어가면서 숨이 깊게 들이쉬고 내쉬어졌고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서하의 반응을 샅샅이 보고 있던 하준은 경직된 허리를 보고 혀를 찼다. 허리도 안 좋을 텐데 오기로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 서하가 야속했다.

“히익! 야. 지, 지금 뭐, 뭐 하는 거야.”

“……이러면 허리 다치니까 힘 좀 빼라는 의미에서.”

서하의 허리를 혀로 핥아 내린 하준은 여유 있는 손이 없다며 뻔뻔하게 허리를 핥고 가볍게 이로 물었다. 울먹이며 반강제로 팔로 지지해 허리를 편 서하는 수작 부리지 말고 하준에게 넣으라고 언성을 높였으나 손가락이 하나 더 들어오기만 할 뿐 원하는 대로 되질 않았다.

“잠만, 놔 봐. 아니 손……. 손 치워.”

“왜? 싸고 싶은 거 아냐?”

참기가 힘들었다. 발가락은 안으로 굽어지고 겨우 힘을 빼놓았던 허리가 다시 경직되었다. 서하가 마음껏 쾌락을 표현하지 못한 것도 자신의 잘못이 컸기에 조금이라도 다정한 섹스를 하고 싶었다.

“하아, 흣, 너…… 짜증 나. 놓으라고 했는데.”

“미안하군. 그래도 페로몬은 한층 안정된 거 같은데?”

구멍이 어느 정도 풀린 걸 확인한 하준은 손가락을 빼내고 잠시 동안 서하가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천장을 보고 누운 서하의 배에 정액이 옆으로 흘러내렸다. 침대 시트로 대충 정액을 닦아 내는데, 정액이 묽어 하준은 인상을 찌푸렸다. 콘돔과 윤활유, 묽은 정액까지. 서하에게 다른 알파가 생긴 건가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사 생겼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이를 악문 하준은 괜찮다고 스스로를 되뇌며 셔츠를 벗었다. 벨트를 풀고 바지와 속옷을 벗으니 튀어나오는 성기에 서하는 표정을 찌푸렸다. 손가락으로 푼 정도로 하준의 성기를 넣을 자신이 없어졌다.

“참…… 한결같네. 쓸데없이…… 커다래서.”

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콘돔을 주운 서하는 껍질을 까 하준의 성기에 씌웠다. 단단한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 근육이 도드라지고 성기가 더욱 발기되어 속으로 욕을 한 서하는 고개를 들어 하준을 보았다.

“변태야……? 이걸로 왜 커져?”

“넌, 하……. 아니다.”

무심하게 콘돔을 끼우는 서하를 보니 더욱 확신으로 변했다. 서하가 만나는 알파는 누구일까. 알파가 아닌 베타일 수도 있다. 엎드리는 서하의 어깨를 잡고 천장을 보게끔 눕힌 하준은 허벅지의 여린 살을 원을 그리며 천천히 쓸어내렸다.

간지러운지 서하가 허벅지를 오므리자 손가락을 내려 회음부로 내려온 하준은 옅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 웃어?”

“아니 웃은 적 없는, 읏……, 정말이지.”

다리를 들어 발끝으로 하준의 성기를 아래에서 위로 눌러 지그시 힘을 가한 서하는 하준의 입을 다물게 했다. 달콤한 말을 하지도 아직 관계를 맺지도 않았으나 페로몬은 질척이고 농염해져 두 사람의 기분을 고양시켰다.

호기롭게 도발한 것치고 막상 뜨거운 성기가 구멍에 닿자 서하의 허벅지가 떨리며 겁을 먹었음을 대신해 보여 줬다. 정말 솔직하지 못하단 말이지. 잘 들어가지 않는 성기에 하준이 낮게 신음을 내뱉었고 아래에 깔린 서하는 서하대로 넓게 벌어지는 구멍에 숨을 들이켰다.

“윤서, 하. 힘, 빼야, 읏, 지.”

“아……. 이건 아니……흐읍, 잖아.”

손가락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넓어지는 구멍을 믿을 수 없어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몸을 떨었다. 하준의 손목을 붙잡으며 어디까지 들어왔는지 물어보니 귀두밖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서하는 얼굴을 가리고 괴로워했다.

서하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하준은 반응을 보며 조금씩 성기를 밀어 넣었고 서하의 두 손이 떨리는 걸 보며 이를 악물었다. 허리를 잡은 손을 떼 내고 서하의 양어깨 옆에 손을 둔 하준은 고개를 숙여 손등에 입을 맞췄다 뗐다.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과 상대적으로 서늘한 코가 닿자 손등을 펼친 서하는 하준의 눈과 마주치고 놀라 얼굴을 가렸다.

자연스레 구멍이 더욱 조여졌으나 하준은 쉬지 않고 손등과 살짝 드러난 이마, 쇄골 등 곳곳에 입을 살짝 맞췄다 떼어 냈다.

“하, 하지 마. 이상하니까 그만.”

섹스라고는 하준과 승언이 전부였고 둘과의 섹스는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서하는 적응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욕구는 풀려고 했지 하준과 다정한 섹스를 원한 게 아니었으며 예전에는 주야장천 했던 게 이 정도로 고통스러울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후우. 얼굴, 가리지 마.”

낯간지러운 짓을 그만하겠다는 확답을 받고서 손을 내린 서하는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는 하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하준의 이상 행동에 적응하기도 전에 끊임없이 들어오는 성기로 인해 뱃가죽을 뚫지는 않을까 겁이 났다.

“쉬이. 괜찮아. 잘하고 있어.”

“무슨……. 그냥, 흐으……. 들어와.”

생리적인 고통으로 인해 눈물이 맺혔고 눈가가 젖어 들어갔다.

속도를 조절하던 하준은 가장 굵은 부분에서도 적응한 듯한 서하를 보고 성기를 한 번에 밀어 쳐올렸다.

“히익! 잠, 잠만. 아, 아파! 아파……! 멈춰…….”

“내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으면 물지 않아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예상대로 입술을 씹어 대는 서하를 말리기 위해 입을 맞춘 하준은 행여나 혀를 씹히지 않기 위해 송곳니 부분을 톡톡 건드리니 하준을 해칠 의도가 없던 서하는 턱에 힘을 풀었다. 조금씩 허리를 움직이니 성대가 진동했으나 타액으로 만족하지 못한 하준의 혀가 소리도 모두 앗아 갔다.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그러면서도 서하의 히트사이클이 충분히 안정될 수 있도록 해야 했기에 하준은 뭉근하게 허리 짓을 했다. 서하의 몸 곳곳을 알고 있던 하준은 많이 느끼는 지점을 기억해 내며 한곳을 내리찧었다.

서하는 눈을 크게 뜨면서 다리를 조였고 안타깝게도 하준의 허리를 조이는 결과만을 불러일으켰다.

“읍, 으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공격하는 서하이기에 하준은 아직까지 혀가 씹히지 않음을 안도하며 갈 곳 없이 방황하는 손을 붙잡아 깍지를 껴 침대에 내리눌렀다. 곁에 맴돌며 육안으로 봤을 때도 말라 보이긴 했으나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만져져 가슴이 욱신거린 하준은 미안함에 입술을 떼고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었다.

“미쳤, 미쳤어. 최하준 너…… 몇 년 사이에 취향이라도 변한 거야……?”

“미치긴 했는데 취향이 변한 건 아닌 것 같군,”

윤서하 너에게 미쳤다고 하면 경기를 일으킬 게 안 봐도 뻔했기에 말을 생략한 하준은 시선을 올곧이 서하에게 두며 움직였다. 위로 조금씩 밀려 올라가는 서하의 허리를 잡아 내리고 제 품 안에 가둔 하준은 느리지만 집요하게 탐했다.

“차라리 막, 해 줘.”

“이젠…… 그럴 생각 없어.”

거칠게 했던 삽입이 차라리 견디기가 수월했다. 몰아치는 쾌락이 아닌 야트막하고 끊어질 듯하면서도 이어지는 자극에 가슴께가 간질거렸고 눈꺼풀이 떨려 왔다. 페로몬을 들이마시는 서하의 숨결에 따라 내벽이 수축했다가 펴지면서 하준의 성기를 조여 왔다.

“흐윽.”

아픔이 점차 사라지고 쾌감이 비중을 늘려 자리 잡았다. 잔뜩 열에 올라 냉철했던 표정은 사라지고 흐트러진 얼굴을 보니 성기가 더욱 부피를 키웠다. 짧게 신음을 내뱉은 하준은 침대에 디딘 손에 힘을 주고 깊게 박아 넣어 그 상태로 사정했다.

“하으…….”

성기가 구멍 밖으로 나가는 감각에도 허리를 떨며 고개를 위로 올린 서하는 하준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콘돔을 묶어 쓰레기통에 버린 하준은 서랍장을 열어 콘돔 하나를 손에 쥐고 서하의 머리맡에 앉았다.

“서하야, 만족해?”

“흐읏.”

땀에 젖어 사방팔방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준 하준은 서하에게 동의를 구했다.

한 번 가지고 만족할 리 없었다. 알고 있으면서 묻는 낯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대답을 하지 않으면 더 해 주지 않을 눈빛이라 서하는 더 해 달라고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하준이 소유욕이 강한 눈빛으로 콘돔을 입으로 물어뜯은 걸 본 서하는 잘못된 선택을 내렸음을 직감했으나 돌이키기에는 늦어 버렸다.

삽입할 때는 유리를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러우면서도 견딜 만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 하준이 몰아쳤다.

“으, 흡.”

“서, 하야. 오늘 힘들겠는데?”

전립선이 눌릴 때마다 반응한 서하의 성기에서 프리컴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두 번째 사정이니 힘들겠지만, 한동안은 페로몬이 날뛰지 않을 거라 생각한 하준은 웃을 뿐 성기를 빼내거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 그만. 진짜 힘들어. 힉.”

“두 번 정도 싸면 개운할 거야.”

귀두를 타고 조금씩 흘러내리는 프리컴을 보며 서서히 허리 짓을 해 반응을 보던 하준은 두 번째가 아닌 세 번째라는 말을 듣고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왜 젖어 있나 했더니 자위를 하고 씻은 모양이었다.

“혼자 했나 보군.”

“내가 대답해야, 힉!”

성기를 반쯤 빼내고 그대로 박은 하준은 입을 벌리고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완전히 묽은 정액을 사정한 서하의 목덜미를 잡고 일으켰다. 사정의 여파가 큰지 잘게 떨리는 몸이 진정도 하기 전에 위에서 아래로 찌르던 성기가 역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와 얼굴을 찌푸렸다.

“뒤처리가 깔끔한 거 보니 콘돔이라도 끼고 했나 보군.”

“……흐으, 아닌데?”

좋을 대로 생각하고 결론을 내린 하준은 낮아진 목소리로 단호하게 부정하는 서하의 어깨를 잡고 재차 물었다.

최대한 편한 자세를 찾으려던 서하는 몸을 뒤척이면서 아니라고 확인 사살을 했다.

하준은 넋이 나갔다가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눈 똑바로 떠. 잠시만, 야!”

허리를 한 번 쳐올리자 자세가 무너진 서하가 완전히 하준의 무릎 위에 주저앉았다. 깊숙이 들어온 자세에 머리가 새하얘지고 또다시 발기하는 성기에 절망하며 하준의 어깨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페로몬이 아직 불안정한 것 같지?”

“아니, 네 으흡. 눈이, 불안정…….”

말을 끝맺지도 못했는데 몸을 꽉 부여잡고 움직이는 하준으로 인해 자극을 오롯이 받아들여야 했다. 쾌감에 파르르 떨리는 몸과 계속해서 풀리는 서하의 팔에 고개를 들어 올린 하준은 타액도 제대로 삼키지 못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고 사정할 뻔했으나 사정감을 누르기 위해 숨을 들이켰다.

“제발……. 하, 흐읏.”

진이 빠진 서하가 결국 하준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흐느끼는 지경에 갔음에도 하준은 고개가 흔들리지 않게 목덜미만 받쳐 줄 뿐 아래는 상냥하게 대해 주지 않았다. 몇 년 만에 하는 성관계이기에 체력이 없던 서하는 멈추길 바라는 마음에 하준의 귓가에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이름을 불렀다.

“하준아, 나 힘들어.”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전율이 든 하준은 일순간 행동을 멈추고 서하를 꽉 껴안았다. 바둥거리지도 않고 숨만 몰아쉬는 서하에게 한 번만 더 이름을 불러 달라고 요청하니 서하는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최하준이라는 이름 석 자를 불러 줬다.

원망도, 애정도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심장이 빨리 뛰며 억누르고 있던 자극이 터졌고 서하를 끌어안은 상태로 사정했다.

배 속에 퍼지는 열감이 없었으나 탁해진 하준의 눈빛으로 끝났음을 짐작한 서하가 하준의 가슴팍을 톡톡 치니 성기를 빼 주었다. 콘돔을 사용한 의미가 없게 서하가 싼 정액으로 서하뿐만 아니라 하준의 배에도 묽은 정액으로 지저분했다.

“마지막에는 언제 쌌는지 모르겠는데.”

“시끄러. 아무 말도 하지 마.”

“동시에 간 건가? 그러면 좋겠는데 말이야.”

망할. 주절주절 떠드는 저 입을 막아 버리고 싶었다. 자리를 피하고자 일어난 서하는 온몸에서 질러 대는 비명을 간과했고 발을 내딛다 허망하게 주저앉았다. 침대에서 일어난 일이라 다치지는 않았으나 하준이 전부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수치심이 몰려왔다.

“첫날부터 열심히 하긴 했군,”

“그냥…… 가 줘.”

서하를 씻기고 침대 시트를 간 후 눕힌 하준은 안정된 페로몬에 안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쯤 눈을 감고 있던 서하는 하준의 이름을 불렀다.

“뭐 필요한 거라도 있나?”

“저 콘돔 지호가 사 온 거야. 이사할 때 왔던 키 큰 애.”

굳이 서하가 오해를 정정해 주는 이유가 뭘까. 희망을 품은 하준은 서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더 말해 주길 기다렸으나 서하는 야속하게 눈을 감았다.

하준은 그런 서하를 바라보았다.

잠이 들었다 깼다 하는 건지 또다시 눈을 뜬 서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그렇다고.”

“알려 줘서 고맙군. 잘 자, 서하야.”

하준의 말을 끝으로 방에는 서하의 고른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받아 준다는 의미로 해석할지 고민하던 하준은 서하가 깨길 기다리며 서재로 갔다. 몸이 약한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책을 꺼내 훑어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 가서야 남아 있는 메모를 손으로 짚었다.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진심을 다하거라. 네 아버지가 나에게 했듯이. 또 우리가 너에게 했듯이. 잘못을 했을 때는 인정을 하고 사과하렴. 물론 상대방이 네 사과를 받지 않을 수 있지만 받아 준다면 다시는 상처받지 않게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 주길 바란다. 사랑한다, 하준아.」

너무 많은 걸 잃고 나서야 읽게 된 게 후회가 됐다. 부모님, 서하, 미래.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만 줬다. 눈물을 삼킨 하준은 미래의 방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펼쳐 놓은 그림일기를 주워 첫 장을 보았다.

서하와 있었던 일들이 일기에 고스란히 나타났고 두 사람의 애착 관계를 엿볼 수 있었다. 자신이 둘 사이의 끼어들 수는 없어 보였다.

날이 밝을 때까지 앉아 있던 하준은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갔다.

“거기서 잤어? 밥 먹고 가.”

“움직여도 괜찮아?”

걸을 때마다 아팠지만 이를 악물고 걷던 서하는 부엌으로 들어가 아침밥을 준비했고 도중에 하준에게 주도권을 뺏겨 앉아 있게 됐다.

간단하지만 아침상이 차려졌고 마주 보며 식탁에 앉은 두 사람은 밥을 먹었다.

“페로몬이 날뛰면 불러. 시간 빼서 올 테니.”

“음……. 그렇게까지 안 해 줘도 괜찮아. 정 안 되면 억제제도 있고.”

“건강에 안 좋으니 하는 말이지.”

“너, 아직도 나 사랑해?”

하준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고 서하는 침묵 속에서 의미를 파악했다.

“난 사랑하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우리 엄청 악연이잖아. 용서해 줄 생각은 없는데 이 관계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먹은 그릇을 정리하고 집을 나선 하준은 벽에 기대 손을 흔드는 서하에 맞추어 손을 흔들며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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