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서다래와 통화를 종료한 강인혁이 서류를 들고 한숨을 쉬었다. 부모님이 왜 제게 이것을 강세헌에게 가져다주라고 했는지 알고 있었다.
이번에 KH마트에서 벌이는 사업에 KH전자를 같이 엮고 싶어 했다. 같은 회사이니 윈윈하는 전략으로 가면 되지 않냐라는 생각이었지만 상대는 강세헌이었다. 사업성을 보고 적당한 수준이라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게 딱 그였다.
안 그래도 며칠 전에 아버지가 전화해서 운을 띄웠을 때도 강세헌의 반응이 미적지근했다니 말 다 했지. 아버지의 성격상 아랫사람에게 시키고 나 몰라라 하고 싶은데 어머니가 옆구리 찔렀을 것이다. 어떻게든 이 사업을 성공시켜서 아버지의 자리를 중심부로 옮기고 싶으시니까.
그리고 아버지로는 안 되니 자신까지 투입된 것이다. ‘일단 아버지가 통화해 볼 건데 안 되면 네가 세헌이를 찾아가라.’라고 했었다. 왜 사업과 관련된 일에 제가 끼어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어머니가 그랬다. 강세헌이 자신한테는 그래도 많이 봐준다고 말이다.
“언제는 세헌이 형 밀어 내라면서요.”
그런데 이렇게 이용하려는 건 또 뭔가요. 강인혁이 고개를 젓고는 회사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정확히 5분 후 강인혁이 아까보다 더 표정을 굳힌 채로 나왔다.
늘 늦게까지 일하던 강세헌이 오늘따라 집에 일찍 들어갔단다. 그를 찾아 움직여야 하는 만큼 시간이 늘어지게 되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서다래에게로 생각이 미쳤다.
“되는 일이 없네.”
이렇게 계속 엇갈릴 수도 있는 건가. 그래도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으니 강인혁이 강세헌의 집으로 방향을 잡았다. 막 주차장으로 돌아온 강인혁이 시동을 걸기 전 서다래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하려고 그랬다.
그런데 화면이 켜지며 박한수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왜.”
[전화 받는 말투 참 예의 바르다.]
인사를 생략한 강인혁의 목소리에 박한수가 시큰둥하게 받아쳤다. 그러나 강인혁은 지금 박한수에게 친근하게 대꾸할 기분이 아니었다. 집에는 제가 그토록 바라던 서다래가 있는데 바로 들어가지 못한 탓에 은근한 조바심이 올랐다. 거기다 오늘 내내 엇갈리는 일이 생겨서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 전화했는데.”
[아, 다른 게 아니고… 너 혹시… 음…….]
박한수가 답지 않게 말을 끌자 강인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얘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윤태서라 설마 지금 걔를 언급하려는 건가 싶었다.
[태서 말이야.]
역시나. 강인혁이 핸들에 팔을 올리며 제 이마를 갖다 댔다.
[혹시 어딨는지 알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겠지.”
요즘 심심치 않게 박한수와 윤태서가 어울리는 걸 보았다. 그런 박한수가 윤태서의 행방을 물어 오니 강인혁이 바로 삐딱하게 받아쳤다.
[내 말은 그 뜻이 아니고, 나도 너한테 전화 안 하려고 했는데 누가 물어, 아니 여쭤…….]
“그만.”
강인혁이 박한수의 말을 잘랐다. 누가 자꾸 물어본다는 말에 강인혁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바로 소개팅이었다. 윤태서는 제 앞에서 박한수와 통화했고 대놓고 소개팅을 요구했다. 지나가다 언뜻 들었을 때 박한수가 언제 걔한테 연락할 거냐고 물어보는 게 이미 만난 것 같았다. 그러니까 박한수를 통해서 윤태서를 찾는 이라면 그 소개팅 상대일 게 뻔했다.
“나 지금 윤태서에 대한 건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거 말할 거라면 끊어라.”
강인혁은 대답도 듣지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그러나 바로 시동을 걸진 않았다. 핸들을 쥔 채 손가락을 툭툭 두드리던 강인혁은 서다래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던 것도 잊은 채 생각에 잠겼다.
박한수와 몇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그의 말이 자꾸 뇌리에 맴돌았다. 어디 있는지 아냐는 말.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끝까지 듣고 전화를 끊을 걸 싶기도 했다.
저번 수업 시간에도 윤태서를 봤고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딱 하나, 윤태서가 이용하던 차가 안 보이긴 했지만 그걸 가지고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만약 하루 이틀 사이로 사라졌다면 박한수가 자신한테 연락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윤태서의 주변에 있는 인물이라면 손꼽힐 정도로 적었으니까. 그 스스로 벽을 세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이 그 안에 들어가는 것 또한 알았고.
예전엔 그래도 우연히라도 그를 자주 마주쳤지만, 지금은 학교에서가 아니라면 윤태서의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한때는 그렇게 그가 귀찮고 거슬렸는데 이제는 보이지 않으니 더 불안해졌다.
갑자기 윤태서가 좋아졌다는 게 아니라 그가 이번엔 어떻게 나올까 싶어서 그랬다. 안 보이는 사이 더 큰 일이 벌어지기라도 할까 봐.
찝찝한 마음을 지우지 못하며 강인혁은 거칠게 시동을 걸었다.
***
“아직 멀었습니까?”
[다 와 갑니다.]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오지 마세요.”
강세헌의 주의를 들은 비서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통화를 끝내고 나온 강세헌은 무의식적으로 태서를 찾았다. 자신이 있을 땐 제 방에 있겠다고 하더니 요즘 같이 저녁을 먹고 잠들기 전까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젠 잘도 나와 있곤 했다.
태서가 안 보이니 방에 들어갔나 싶어 걸어가던 강세헌의 시야에 까딱이는 발이 들어왔다. 발을 따라 시선을 올리니 소파와 테이블 사이로 러그를 이불 삼은 채 배에 베개를 대고 엎어진 태서가 보였다.
테이블에 올려 둔 노트북은 쓰지 않는지 화면이 꺼진 지 오래였고 태서는 두꺼운 책에 이리저리 펜을 그어 대며 공부하고 있었다.
자기 편한 자세로 공부하는 건데 바라보는 강세헌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책상에 앉아 허리를 펴고 공부해야 하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남의 집에서 공부하면서 티가 허리 위로 올라간 걸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품이 넓은 티를 입어서 보이지 않았던 태서의 잘록한 허리가 드러나 강세헌의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단 한 번이었지만 그날 태서의 나신이 어땠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옷을 입은 상태로는 잘록한 허리가 드러나지 않았다. 날씬하다는 느낌은 있지만 몸 선이 두드러지진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더욱 허리에서 눈을 돌리기 힘들었다. 몸이 예뻤던 걸 기억하고 있는 제 기억의 문제보단 눈치 없는 태서 쟤가 문제다.
강세헌의 시선을 느꼈는지 태서가 엎어진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나오셨어요?”
“너는 왜 거기 그렇게 뒹구는 거냐.”
“여기가 좋아서요.”
“나중에 나갈 때 러그 챙겨 줄게. 가지고 가.”
“진짜요? 안 그래도 이거 진짜 마음에 들었는데 감사해요.”
태서가 거절할 마음이 전혀 없는지 냉큼 받아들였다. 그걸로도 모자라 러그를 손으로 쓸어 대니 그 자국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저 인테리어용으로 깔아 둔 건데 저게 그렇게 좋나 싶을 정도였다.
“먹여 주고 재워 주니까 아주 편하지?”
태서는 그의 허리를 보고 순간 마음이 흔들렸던 강세헌이 부러 툴툴거리는 건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대답했다.
“너무 편하고 좋아요. 특히 밥이 맛있어요.”
정말 좋긴 좋은지 태서의 얼굴도 나날이 혈색이 돌았다. 이전에도 그렇게 안쓰러운 얼굴은 아니었는데 요즘은 정말 피부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맛집을 잘 아세요?”
저녁을 강세헌이 사 오는 것으로 먹거나 아니면 그가 직접 만들어 주곤 했는데 그게 태서의 입맛을 제대로 사로잡은 모양이었다. 보다 못한 강세헌이 낮엔 뭘 먹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저녁에 맛있는 걸 먹을 거라며 낮에는 먹는 둥 마는 둥 한단다.
“원래도 네 말은 안 믿었는데 지금은 더 못 믿겠다.”
“뭐가요?”
“있는 듯 없는 듯 있겠다던 네 말.”
“아, 그랬죠.”
태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다 살짝 억울한 듯 눈썹을 씰룩였다. 자기도 강세헌이 들어오는 시간에는 방에 있으려고 했다. 근데 그럴 때마다 밥 먹으라고 부르던 인간이 누군데.
지금은 으레 거실에 있어도 되나 보다 해서 나온 거지 원래 눈치 잘 볼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방에 들어갈까요?”
“공부나 해라. 그래도 학교는 꼬박꼬박 다니는 거 같더니 공부도 하는구나.”
“저 과제도 하는데요? 이거 봐요, 아까는 과제 했어요. 지금은 공부하고 있고요.”
무슨 여섯 살짜리 애가 부모에게 자랑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강세헌이 자기를 공부 안 하는 애로 보니 태서 나름의 어필이었다.
“기특하다.”
강세헌이 됐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니 태서가 슬쩍 몸을 바로 했다. 이러나저러나 저 아저씨의 마음이 약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리고 다시 공부에 집중하려는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태서는 강세헌의 집이라 방에 들어가 있어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강세헌이 엎어진 태서의 다리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가서 문 열어.”
“여기 제집 아닌데요.”
“집주인 명령이니까 가서 열어라.”
강세헌은 계속 허리를 드러내고 있는 꼴이 보기 싫다는 이유로 태서를 건드렸다. 어차피 누가 올지 알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미리 말해 두려고 태서를 찾아다닌 셈이었다.
“내 집도 아닌데 자기가 열어 주면 될 것을.”
“그래, 네 집이 아니니까 언제 쫓겨날지 모르겠지?”
강세헌의 협박에 태서가 재빠르게 일어났다.
“가요. 간다고요.”
꼭 공부하는 사람 옆구리 찔러서 심부름이나 시키고……. 이래서 서럽다고 중얼거리며 태서가 현관문을 향해 다가갔다.
“누구세요.”
태서가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
그리고 막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한 태서는 꼼짝없이 굳어 버렸다.
“네가 왜…….”
강인혁의 말끝이 혼란으로 점점 잦아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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