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인데 임신했다-22화 (22/130)

22화

몸을 따뜻하게 감싸 주던 이불이 사라지면서 태서가 제 팔을 끌어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방이 추운 건 아니지만 워낙 따뜻하게 자고 있었기에 시원한 공기가 차게 다가왔다.

“으음…… 이불.”

“일어나.”

강세헌이 태서의 이불을 뺏어 가며 말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가 잠이 한 번에 달아날 정도로 귀에 콕 박혔다. 태서는 아직 뻑뻑한 눈을 비비며 몸을 돌렸다.

“졸려요.”

“오늘을 기다렸지.”

강세헌은 지금까지 일을 나가야 해서 늦잠을 자는 태서를 지켜봐야만 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태서가 일어나기 싫다는 듯 잔뜩 인상을 썼다. 가만히 놔두면 또 식사도 건너뛰고 계속 잠만 자겠지.

아무리 기다려도 태서가 일어날 생각이 없자 강세헌이 한쪽 눈썹을 슬쩍 올리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천천히 그러나 착실하게 내려간 손이 태서의 볼을 스치고 미끈한 코를 살살거리며 따라 올라갔다.

태서는 제 얼굴에 닿는 강세헌의 손끝에서 향수가 멍울져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향이 기분 좋다고 생각하자 저절로 몸에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 이젠 이불이 없어도 다시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은 그 순간이었다.

“웁!”

강세헌의 손이 태서의 얼굴 전체를 쥐어 버렸다. 손가락마다 느껴지는 악력에 단숨에 잠에서 깬 태서가 그의 손목을 붙잡고 바둥거렸다. 한 손으로는 턱도 없어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아 쥐어뜯듯이 당기자 그제야 제 얼굴을 압박하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태서가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강세헌을 향해 소리쳤다.

“무슨 사람 얼굴을 공 잡듯 잡아요.”

“나와.”

태서가 잠이 깬 걸 확인한 강세헌이 미련 없이 돌아섰다. 방을 나가는 그의 등을 바라보던 태서가 열 받아 제 옷자락을 펄럭이다가 베개를 던져 버렸다. 강세헌이 나간 걸 확인하고 난 후의 분풀이라 따지러 들어오는 이는 없었다.

***

억지로 잠에서 깨서 대충 눈꼽만 떼고 나온 태서가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하품했다. 예의상 손으로 가려 줘야 하는데 두 손은 후드티에 푹 넣어 둔 상태라 꺼내기 귀찮아서 놔뒀다. 그런 태서를 보던 강세헌은 아예 후드를 머리에 씌워 주었다.

왜 모자를 씌워 주지? 혹시 바람이 차다고 챙겨 주는 건가? 싶어 바라보는데 강세헌이 끈까지 잡아당겨 후드를 쭈글쭈글하게 만들었다.

“머리 떴다. 같이 다니기 창피하니까 가리자.”

“…….”

태서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모자 안으로 손을 넣었다. 대충 물기 묻은 손으로만 정리한 머리카락이 다시 부스스하게 뜨고 있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듣는 사람 서운하게 대놓고 말하다니…….

“자기야. 같이 가. 팔짱 끼고 가야지.”

태서는 일부러 남들 들으란 듯 크게 외치며 종종걸음으로 강세헌에게 달려가 붙었다. 창피하다고 했으니 더욱 붙어 주마.

“응, 그래. 자기야. 딱 붙어서 와.”

강세헌이 태서에게 맞춰 주며 그의 어깨를 다정하게 안아 주었다. 세상 몸서리처질 정도로 느끼한 목소리에 태서가 정색하며 바라보았다. 미치셨냐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강세헌이 웃는 얼굴을 한 채 잇새로 중얼거렸다.

“딱 붙어 있어야 나랑 비교되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깔끔하게 차려입은 강세헌과 후드티로 겨우 초라함을 감춘 자신. 붙어 봐야 제 손해라는 걸 깨달은 태서는 슬금슬금 그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어디 가는데요?”

“밥 먹으러.”

강세헌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며 10분만 걷자고 했다. 다시 그보다 걸음이 늦어지면서 줄레줄레 쫓아가게 된 태서가 10분씩이나 걷냐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되돌아가 차를 가져올 생각이 전혀 없는 강세헌의 굳건한 걸음에 어쩔 수 없었다.

‘날씨 좋네.’

비척거리며 걷던 걸음이 점점 안정적으로 변해 가면서 태서가 해가 뜬 곳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눈을 뜰 순 없었지만 얼굴을 데워 주는 따뜻한 햇살과 살랑거리는 바람에 점점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억지로 강세헌을 따라가던 마음이 나중엔 식당에 빨리 도착한 아쉬움으로 바뀌었다.

“아침은 한식이어야죠.”

태서가 메뉴판을 뒤적이며 괜히 꼬투리를 잡았다. 눈은 샐러드부터 브런치를 보고 있으면서 입으로는 밥과 국을 찾아 댔다.

“너, 저녁엔 다 잘 먹으면서 아침엔 입맛 까다롭더라.”

“어떻게 알았어요?”

“난 다 알아.”

강세헌이 먼저 시킨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대답했다. 냉장고를 열어 태서가 뭘 먹었는지 보거나 일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무거나 다 잘 먹을 거 같은데 의외로 아침엔 냄새나는 건 손도 대지 않았다.

곧 샐러드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메뉴를 시킨 태서는 아무것도 안 시킨 강세헌에게 뒤늦게 물었다.

“안 드시게요?”

“네 거 뺏어 먹으려고.”

“제가 너무 많이 시켰다고 돌려 구박하시는 거 아니죠?”

“자기가 먹은 건 자기가 계산하자.”

“와…….”

그래서 자기가 막 시킬 때 지켜보기만 했구나, 은연중에 강세헌이 데리고 나왔으니 사 주려나 싶었던 태서가 치사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바깥을 바라보고 있으니 아까 걸어오며 느꼈던 기분 좋은 햇살이 이젠 뜨겁게 느껴졌다.

“딱 알맞을 때 걸어왔네.”

“네가 조금만 늦장 부렸으면 뙤약볕 아래를 걸었겠지.”

“우리 그냥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사이좋게 있으면 안 될까요?”

강세헌이 대답 없이 태서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는 정말로 각자의 시간을 즐기기 시작했다. 태서는 제가 시킨 메뉴가 나오기 전까지 테이블에 엎드려 밖을 바라보았고 강세헌은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핸드폰으로 기사를 읽었다.

“아, 좋다.”

아무것도 안 하는데도 마음이 풀어져서 참 좋았다. 태서가 눈을 감고 제 주변을 맴도는 강세헌의 향을 맡으며 연한 미소를 지었다. 태서는 아예 고개를 세워 팔에 기댔다.

“저 실은 형이랑 이런 자리를 가질 줄 몰랐어요.”

처음의 강렬한 기억 때문인지 강세헌을 만나면 피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런데 그와 한 번, 두 번 만나면서 대화를 나누고 명함을 받고 그의 집에 빌붙고. 이런 건 전혀 생각 못한 전개였다.

윤태서라는 인물의 하루는 항상 강인혁을 중심으로 돌아갔는데 그는 어느새 궤도를 벗어난 듯 멀어지고 새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누구를 미워하지도 않았고 괴롭히지 않아도 되었다. 그냥 졸리면 자고 머리 싸매 가며 공부하고 방금처럼 산책하듯 걷는 평범한 나날이었다. 그게 참 좋았다.

특히나 매일 저녁 강세헌과 얼굴을 마주하고 식사를 할 때가 제일 좋았다. 혼자 밥 먹지 않아서 좋았고 자신에게 편견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 대화하기도 편했다.

“실은 늘 불안했거든요. 나는 이제 안 그러고 있는데 혹시나 내 운명이 다시 정해진 대로 흘러갈까 봐 마음을 놓을 수 없었어요.”

태서의 고백을 듣던 강세헌이 커피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는 태서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더 듣고 싶었지만 하나둘 나오는 메뉴에 대화가 끊겨 버렸다.

“진짜 맛있다.”

태서가 강세헌 앞에도 식기를 놓아주곤 마음껏 끌리는 것부터 먹었다. 샐러드가 싱싱하면서도 특히나 새콤한 유자 소스가 입맛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버터에 구운 빵은 느끼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발사믹 소스와 함께 부드럽게 넘어갔다.

“네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나오면 되지. 얽매일 필요가 없잖아.”

“어… 그렇죠. 그런데 그게 제 마음대로 안 될까 봐.”

“나한테 억지로 끌려 나오니 기분이 어땠는데?”

“갑자기 왜 질문이 그리 튀어요? 당연히 싫었죠. ……처음엔.”

지금은 싫지 않은 걸 소심하게 붙였다.

“앞으로도 불안하면 말해. 내가 네 운명을 틀어 줄 테니까.”

오늘처럼 갑작스러운 외출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산책도 시켜 주겠다고 말한 강세헌이 포크를 들었다. 그러고는 태서가 먹은 것들을 한 입씩 맛보았다.

그는 입맛에 맞지 않는지 두 번 손대진 않았다.

“아…….”

강세헌의 말을 곱씹던 태서가 갑자기 멍해졌다.

‘그러네.’

제가 죽을 운명이라는 생각 때문에 다른 걸 돌아보지 못했다. 강세헌과 함께 사는 일이라거나 이렇게 마주 보고 밥을 먹는 건 윤태서라는 인물에게 전혀 없던 일이었다. 운명을 불안하게 여기기엔 이미 자신은 궤를 다르게 틀고 있었다.

서다래에게 먹이려던 약도 제가 먹어서 오메가가 되었고 집을 나오기까지 했는데 난 뭘 두려워한 거지.

“표정이 왜 그래?”

“뭐가요?”

“고민이 풀린 표정인데.”

“아…… 그런가?”

“그럼 해결된 거냐? 쫓아내도 돼?”

강세헌의 말대로 지금껏 제 속을 꽉 막고 있던 고민이 풀어졌다. 그러니 이젠 집으로 돌아가는 게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런데 그걸 말하자니 정말로 그의 집을 나가야 할까 봐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태서는 괜히 제 빨대를 휘저으며 강세헌의 말에 다른 대답을 꺼냈다.

“그런 게 아니고요. 갈 데 있었는데 깜박했다가 지금 떠올라서 그래요.”

“어디 가려고 했는데?”

“아, 병원 좀 가 보려구요.”

“병원? 어디가 아픈데.”

“꼭 아프다기보단…….”

“같이 가.”

“음?”

태서가 빨대를 입에 문 채로 강세헌을 올려다보았다. 같이 가자고 한 것도 당황스러운데 그가 벌써 일어났다.

“주말이라 병원 문 닫았으니까 나 아는 데로 가자.”

“아니,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너는 까먹을 게 따로 있지 병원을 까먹냐.”

강세헌이 태서에게 어서 일어나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침에 자신을 깨울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제 마음대로 하겠다는 저 단호한 분위기에 태서는 살짝 후회했다. 괜히 병원을 핑계로 들먹였나?

“어디가 아픈데? 아니면 이 기회에 검진 받아 볼래?”

강세헌의 추진력에 태서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