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날이 밝았으나 커튼으로 꽁꽁 가린 실내엔 틈새로 비친 얕은 빛 한줄기가 전부였다. 불도 켜지 않은 적막한 거실, 한 인영이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강인혁의 성마른 눈길이 어젯밤 거칠게 내려놨던 서류에 향했다. 강세헌에게 줬어야 할 서류. 그런데 그것을 보고 먼저 떠오른 사람은 윤태서였다.
강세헌의 집에서 윤태서를 본 순간의 놀랐던 감정이 아직도 선연하게 떠올랐다. 그때 자신을 올려다보던 태서의 눈이 잔상처럼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놀랐던 눈동자에 번져 드는 억울함과 서운함. 그게 강인혁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지금껏 윤태서가 벌였던 짓을 생각한다면 분명 따지고 들 일인데…… 그에게 잘못한 기분이었다.
혼란스러웠다. 만약 제가 정말 오해한 거라면?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윤태서를 다그쳤던 거라면……. 강인혁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제 눈을 가렸다.
“못났네.”
제 한심함에 강인혁이 괴로운 듯 목 울리는 소리를 냈다. 윤태서의 앞에서 창피한 꼴을 보였다고 억울해할 게 아니라 빨리 인정하고 나왔어야 했다.
나중에라도 윤태서와 마주친다면 어제의 일을 사과해야겠단 생각에 강인혁의 굳었던 입매가 미약하게 풀렸다. 어제의 일을 되새기며 후회만 하는 건 강인혁의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강인혁의 잠긴 목소리가 메마른 거실에 잘게 진동했다. 그만큼 거실이 고요했다. 강인혁이 아닌 다른 이의 존재가 잡히지 않았다. 초인종이 소리에 강인혁의 고개가 뻣뻣하게 돌아갔다.
강인혁이 스르르 움직여 현관문을 향해 다가가며 이제껏 신경 쓰지 못한 누군가를 떠올렸다.
“안 그래도 연락할 참이었는데 왜 집에 갔…….”
상대를 확인한 강인혁이 입을 다물었다. 어제 집에 들어왔을 때 서다래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를 갔는지 집을 둘러보는 사이에 메시지가 왔다는 걸 떠올리고 뒤늦게 확인했다. 집에 갔다는 간단한 내용. 왜 갔는지 언제 올 건지 물어봐야 하는데 강인혁의 마음이 그렇게 여유롭지 못했다.
서다래가 온 줄 알았는데 앞에 선 이는 제가 예상한 말간 얼굴이 아니었다.
“이야기 좀 하자.”
한미순이 강인혁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가 여기 무슨 일이세요.”
지금껏 잘 찾아오지 않았던 어머니의 등장에 강인혁이 내키지 않은 얼굴로 제 머리를 헝클었다.
“내가 내 아들 보러 왔지, 누굴 보러 왔겠니.”
한미순이 소파에 앉아 마땅찮은 눈으로 거실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강인혁은 한숨을 감췄다. 어제 강세헌에게 다녀온 후 한미순에게 전화하지 못한 게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싶었다.
“어제 서류 못 건넸어요. 정식 절차 밟으래요.”
“세헌이가 그러든?”
“그럼 누가 그랬겠어요. 그러니까 애초에 이렇게 주는 거 말도 안 된다고 했잖아요.”
강인혁은 어제 강세헌에게 제대로 된 대꾸를 하지 못한 걸 떠올렸다. 강세헌의 말이 구구절절 옳아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걸 시킨 사람이 한미순이라 말이 불퉁하게 나왔다.
“말이 안 되는 게 어딨어. 작은아버지가 잘되는 꼴 보기 싫어 그런 거지.”
“제발 그런 소리 마세요.”
강인혁이 답답한 듯 굴다가 문득 비소가 새어 나왔다. 어제 강세헌에게 자신이 이렇게 비쳤겠구나. 왠지 입맛이 썼다.
한미순이 그런 강인혁을 보다가 혀를 찼다.
“아주 입이 귀에 걸려 있을 줄 알았는데 그 꼴은 뭐니?”
“제가 뭐 어때서요.”
강인혁이 제 볼을 쓰다듬었다. 고작 하루 밤새웠다고 눈에 띄게 달라질 변화랄 게 없었다. 눈이 조금 충혈되는 정도겠지.
“깨를 볶고 있을 줄 알았더니…….”
한미순의 의미심장한 말에 강인혁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보았다.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집으로 간 다래와 뭔가 아는 듯한 어머니의 말에 강인혁이 설마 하는 얼굴로 말했다.
“다래를 만났어요?”
“그래.”
“왜요? 아니, 왜 말도 없이 오셨어요.”
어머니 때문에 서다래가 돌아갔다는 걸 알게 되자 강인혁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타이밍도 거지 같지, 자기가 윤태서를 만나는 동안 다래 역시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다.
“넌 내가 놀랄 건 생각 안 하니?”
“안 오셨으면 됐잖아요. 왜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해요.”
“태서가 있나 들렀어.”
“…….”
강인혁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왜 지금 윤태서를 들먹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태서가 너랑 지내는 줄 알고 확인하러 온 거야. 그런데 정작 집엔 다른 애가 있고…….”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히는지 한미순이 말을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 일이 이렇게 꼬인 건 강인혁의 탓도 있다는 양 한미순이 아까보다 언성을 높였다.
“너, 태서한테 신경은 쓰고 있어?”
“제가 왜 윤태서를 신경 써요. 걔가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한두 살 먹은 애들이었으면 이렇게 하지도 않았어. 네가 신경 쓸 건 태서야. 걔 요즘 많이 힘든 거 같은데 옆에서 보살펴 주면 좀 좋아?”
“그럼 어머니가 태서 보살피면 되겠네요.”
신경질적으로 말하던 강인혁은 문득 윤태서를 만난 곳을 떠올렸다. 강세헌의 집에 있었고 거기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으니 예상도 되지 않았다. 어머니한테 물어볼까 하던 강인혁은 입을 다무는 걸 택했다.
한미순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서류를 들었다.
“네가 약혼할 상대는 태서야. 그러니까 너 마음 다잡아. 그 애는 네 짝이 아니야.”
“제가 알아서 해요.”
끝까지 알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강인혁의 태도에 한미순이 울컥해서 한 소리하려다 애써 입을 다물고 돌아섰다. 쾅, 울리는 현관문 소리에도 강인혁은 한미순의 기분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강인혁이 곧장 핸드폰을 들어 빠르게 연락처를 훑었다. 그리고 서다래의 이름을 발견한 순간 지체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귓가에 핸드폰을 댄 채 다른 손은 거추장스러운 머리를 넘겼다.
“서다래, 다래야…….”
어제 메시지를 보고 바로 전화했어야 했다.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음성에 다시 전화를 거는 강인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벽에 기댄 그대로 제 팔에 얼굴을 묻은 서다래의 몸이 움찔거렸다. 끊어졌던 진동이 다시 울린 것이다. 고개만 옆으로 돌려 방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오는 누군가의 조급함에 서다래의 눈빛이 가라앉으며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시간 맞춰 왔네.
마침 짐을 다 정리했다고 말하려던 서다래는 강인혁이 아닌 낯선 얼굴에 당황스러운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너….
서다래를 본 적이 있던 한미순이 놀라서 검지로 그를 가르켰다가 입을 다물었다. 강인혁과 어울리는 오메가라는 걸 떠올리자 한미순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 버렸다.
-인혁이는?
-잠깐 나갔어요.
-그럼 주인도 없는 집에 너 혼자뿐이니?
-…네.
-난 또 태서가 있을 줄 알았더니…….
한미순은 대놓고 서다래가 못마땅한 티를 냈다. 어쨌든 인혁이를 기다리면서 겸사겸사 태서를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려던 한미순이 돌아섰다. 어차피 집에 들어가 봐야 서다래와 마주할 게 뻔하니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두어 걸음 걸어가던 한미순은 부글부글 끓는 속에 결국 반쯤 몸을 틀어 서다래를 봤다.
-인혁이 누구랑 약혼할 건지 알지?
서다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표정으로 보아 태서의 존재를 알고 있음을 눈치챈 한미순이 차갑게 말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빨리 정리하는 게 너한테도 좋을 거야. 지금 서로 좋아 봐야 한순간이지 그게 얼마나 이어지겠니. 인혁이는 돌아갈 곳이 있는 아인데.
언뜻 서다래를 걱정하는 말 같지만 결국은 다래와 인혁과의 사이를 절대 인정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세상에, 태서가 아니라 다른 애라니 중얼거리는 그녀의 혼잣말이 서다래에게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윤태서가 아닌 나…….”
그냥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면 이 정도로 우울했을까. 윤태서에 비교해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그 말투가 서다래를 작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는 가만히 강인혁의 이름을 응시하다가 핸드폰을 뒤집었다.
***
식당을 나올 땐 산책하는 것처럼 평화로웠는데 돌아가는 길은 출근길이 따로 없었다. 옆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돌아와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
“진짜 혼자 가도 좋은데 왜 같이 가려고 해요.”
“그럼 진작 갔어야지. 그렇게 비비적거리기만 해놓고 잘도 부지런 떠는 소리 한다.”
강세헌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태서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말대로 한번 가 봐야겠다고 생각만 하고는 정작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 가야 한다는 생각이야 있지만 몸이 학교와 집에 적응한 탓이었다.
그렇다고 강세헌과 가겠다는 게 아니었는데. 태서는 주말에 병원을 가게 된 엉뚱한 상황에 헛웃음만 지었다. 그러다 문득 아까의 일이 떠올랐다.
“그런데 아까 식당에서 왜 계산하셨어요. 자기가 먹은 건 자기가 돈 내자면서요.”
“나도 먹었는데.”
“한 입씩만 먹었잖아요.”
“그거면 충분하지.”
“그게 무슨 기미 상궁이 전액 결제하는 소리래.”
“병원 가는 이유나 말해 봐.”
강세헌이 핸들을 잡지 않은 팔을 창틀에 얹으며 물었다.
그의 질문에 태서가 잠시 입을 다문 채 고민했다. 페로몬이 느끼지 않는 이유를 말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설명하지?
“저번에 비슷한 말을 했었는데요. 세헌이 형한테 각인했나 해서요.”
태서의 말이 끝나기 전에 그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급정지에 태서가 앞을 바라보고 또 강세헌을 바라보았다. 태서의 시선을 느낀 강세헌이 굳은 얼굴 그대로 입술을 달싹였다.
“빨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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