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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25화 (25/130)

25화

“그렇게 맛있냐?”

“먹어 보면 알잖아요.”

태서가 숟가락 가득 비빔밥을 퍼 올렸다. 중간에 어디 좀 들리자기에 뭐가 먹고 싶어 저러나 했는데 이 집 비빔밥이 맛있단다. 그래서 태서의 입맛대로 두 개를 포장해 왔다. 강세헌은 어느새 다람쥐가 볼에 도토리 가득 모으듯이 먹는 태서의 모습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너는 가만 보면 입에 가득 넣는 걸 좋아해.”

“……다음엔 만두를 사 먹어야겠어요.”

“응, 그래. 많이 먹고 커라.”

가득 넣는다고 하니 만두를 떠올린 애라 그냥 말을 말자는 듯 강세헌이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말은 이렇게 해도 태서가 맛있게 먹고 있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태서가 다 먹을 때까지 앉아 있을 요량이던 강세헌이 다리에서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냈다.

진규민으로부터 온 전화에 강세헌은 고민했다. 방에 들어가서 받을까 아니면 그냥 받을까. 태서 때문에 온 전화 같은데 자리를 피하는 것도 아닌 거 같아 강세헌이 핸드폰을 귀에 댔다.

“말해.”

[아무래도 한 번 더 나와야 할 거 같다. 몇 가지 추가 검진이 필요하다는 결과가 떴어.]

처음 검진하기 전에도 진규민은 추가적으로 검사할 항목을 늘릴 수 있다고 했었다. 그때와 같은 말인데 무게가 다르게 다가왔다. 강세헌이 제 이마를 쓸며 인상을 감춰 봤지만, 미미하게 찌푸려지는 눈가까진 가리진 못했다.

“왜 그러는데?”

[나도 봐야 알아. 정 신경 쓰이면 태서 씨한테 잘해 주든가.]

강세헌의 시선이 힐끗 태서에게 향했다 돌아왔다. 통화하는 강세헌의 시선에 보란 듯이 크게 밥을 밀어 넣은 태서가 열심히 입을 오물거렸다. 저렇게 맛있을까, 보는 강세헌이 더 목 메는 기분에 그의 앞에 물 잔을 놔주었다.

“전화로는 할 수 없는 말이야?”

[자세한 건 검사해 봐야 알 수 있을 거 같은데 어쨌든 내 예상이 맞다면…… 하아 다 모르겠고 일단 잘해 줘. 맛있는 거 많이 사 주고 힘들다고 하면 최대한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좋겠다.]

진규민의 진지한 음성에 강세헌의 입가가 굳어졌다. 이대로는 태서에게 제 감정이 그대로 전달될까 봐 강세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왔다. 문까지 닫아 태서와의 공간을 단절한 강세헌이 제자리를 서성거렸다. 태서가 페로몬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생각보다 큰일이었다.

“심각한 거야?”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겠지. 와서 들어.]

혹시 병이 있는 건 아닐지, 떠올리기 싫은 가정이었지만 한번 의식하는 순간 걱정은 걷잡을 수 없이 몸집을 부풀려 갔다.

“빠르게 날짜 잡아.”

강세헌이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방을 나갔다.

***

다음 날 아침, 하품을 하며 나오던 태서가 거실에 우뚝 솟은 누군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입을 가리고 하품하던 그대로 멈춘 태서의 눈동자가 돌아가 시계를 확인했다. 9시가 넘었으니 벌써 나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오늘 평일인데 일 안 가세요?”

“집에서 일할 거야.”

강세헌이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하니 태서가 그렇구나,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마저 이리저리 굳은 몸을 풀고 있다가 시선이 느껴져 강세헌을 바라보았다.

“왜요?”

“너야말로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아……. 과제 때문에 일찍 일어났어요.”

학교는 안 나가지만 일부러 알람까지 맞춰 놨던 태서가 아직도 잠이 덜 깼는지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그런 태서를 보던 강세헌이 책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밥부터 먹자.”

“저 아침 잘 안 먹는데…….”

“그럼 와서 앉아만 있든가.”

강세헌은 미리 차려 둔 것에서 식은 것만 다시 데우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태서가 화장실로 가서 재빨리 양치하고 나왔지만 정작 주방 앞에서는 어기적거렸다.

“아침 잘 안 먹는데…… 어? 맛있겠다.”

그러다 식탁에 하나둘 놓아지는 요리를 보던 태서가 눈을 빛내며 성큼 들어왔다. 샐러드와 수프, 부드럽게 으깬 감자 등을 보니 아침 안 먹는다던 말이 쏙 들어갔다. 거기다 은근하게 풍겨 오는 커피 향까지 맡으니 어제 같이 나가서 먹은 식당 못지않았다.

“이거 언제 다 차렸어요?”

“앉아.”

강세헌이 별 설명 없이 자리에 앉으니 태서도 엉거주춤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긴 언제부터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고. 그렇게 생각한 태서가 가장 먼저 끌리던 수프부터 맛봤다.

“어? 진짜 맛있다. 감자수프가 원래 이런 맛이었나?”

“시중에 파는 거랑 맛이 다르지. 애초 버터에 양파를 색이 변할 때까지 볶다가…… 그냥 먹어.”

태서의 눈이 동그래지는 걸 본 강세헌이 피식 웃으며 말하다가 왜 이런 걸 설명하고 있나 싶어 입을 다물었다.

“형은 진짜 못 하는 게 없네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만들어 주시게요?”

“말하라고 했지 만들어 준다고는 안 했는데.”

“그래 놓고 해 주면 누가 감동할 줄 알아요?”

“……진짜 만들어 주기 싫어졌어.”

그럼 그렇지, 강세헌의 정색에 태서가 입술을 씰룩이다 다시 수저를 움직였다. 흔한 수프 맛이 아닌데 전혀 거부감 없이 입 안을 부드럽게 감싸다 넘어가는 게 일품이었다.

만든 사람이 보람찰 정도로 수프를 맛있게 먹던 태서가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반응에 강세헌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밥 먹는 와중에 한숨이라니.

“맛있게 먹고 과제할 생각하니 심란해서요. 지금까지 어려워서 손을 못 대고 있었는데 오늘 종일 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내가 이 수업 왜 들었지. 아니, 내가 듣고 싶어서 들은 게 아니니까…… 과거의 윤태서는 왜 그랬을까요.”

태서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던 강세헌이 뒤늦게 그가 다닌다는 대학교가 어딘지 떠올렸다. 인혁이랑 같은 학교라고 했으니 제 후배가 되는 거였다.

“무슨 수업인데?”

“금융투자의 이해요.”

“……너 투자는 아냐?”

“그래서 과제가 어렵다는 겁니다.”

태서가 강세헌을 불만스럽게 보다가 포크로 샐러드를 푹 찍었다. 진짜 찍고 싶은 건 따로 있지만 풀때기로 만족했다. 상큼한 소스 덕분에 또 뚱한 기분이 풀어졌다. 이래저래 만족스러운 아침이었다.

“이게 아니야. 차라리 투자의 기본에 맞춰서 목차를 잡아.”

과제를 한다고 거실에 노트북을 가져와 앉은 태서는 강세헌의 잔소리를 겸한 도움을 받았다. 강세헌은 아예 소파를 등받이처럼 기댄 태서의 옆에 엉덩이를 대고 노트북의 화면을 콕콕 찔러 대고 있었다.

“어려운 용어를 쓰면 뭐 하냐 실속이 없는데……. 그냥 한눈에 들어오는 쉬운 용어로 해.”

“네네.”

태서가 나름 찾아내서 한쪽에 적어 뒀던 용어를 지워 버렸다. 안 그래도 과제의 주제가 어려워서 고민하다가 쓴 잔머리였는데 강세헌에게 고스란히 들통났다.

“주제가 어렵다고 그것을 다 어렵게 풀어 낼 필요가 없어. 차라리 네 식대로 해석하는 게 낫겠는데.”

“어어…… 그럼 이걸 아예 다 틀어서 해 볼까요?”

처음엔 강세헌의 도움을 가장한 잔소리에 입술을 삐죽이던 태서는 어느 순간 그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기분은 안 좋았지만,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안 것이다. 적절하게 던져 주는 조언을 양분 삼아 과제하던 태서의 손이 점점 힘을 잃어 갔다.

태서가 정리해 놓은 내용을 읽어 보던 강세헌은 별안간 ‘ㅎ’자가 끝없이 생겨나는 걸 보고 고개를 돌렸다.

태서의 고개가 꾸벅거리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다 싶더니 눈이 감겨 오는 모양이었다. 그의 머리가 막 테이블에 부딪히기 전 강세헌의 큰 손이 그의 이마를 감쌌다.

“성가신 놈이네.”

손도 많이 가고 신경 쓰이는 놈이다. 과제 할 게 많다고 했으니 다시 깨울까 싶던 강세헌은 곧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노트북을 밀어 냈다. 태서도 잠들고 싶어서 잠든 게 아니라 몸이 힘들어서 그런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깨울 마음이 사라졌다.

“나중에 숙제 못 했다고 징징거리지나 마라. 그깟 점수는 건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도 말고.”

강세헌이 귀찮다는 듯 태서의 이마를 밀자 그의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두툼한 러그 위로 풀썩 무너진 태서가 이내 고른 숨을 내쉬며 잠이 들었다. 강세헌이 그를 보다가 방에서 가져온 이불을 덮어 줬다.

“아프다니 봐준다.”

다시 옆에 앉은 강세헌은 적막한 공간을 메워 줄 음악을 틀고 마저 노트북을 들여다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막 잠에서 깬 태서가 반쯤 멍한 정신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과제 하다가 잠든 거 같은데…….

‘클래식?’

제 귀에 은은하게 감도는 클래식이 너무도 어색했다.

***

다시 병원을 찾은 태서는 예전에 봤던 진료실을 둘러보고 그보다 더 어색한 눈으로 강세헌을 보았다. 혼자 와도 된다고 했는데 굳이 같이 온 바람에 눈치가 보였다. 계속 출근도 안 했는데 괜찮나 싶었지만 제 오지랖인 거 같아 물어보진 않았다.

“다시 보네요. 추가할 게 많지 않아서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진규민의 인사에 태서가 고개를 숙이며 예의상의 미소를 건넸다. 추가로 검사할 게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혼자 온 게 아니라서 티를 내지도 못했다. 안 그래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 듯 강세헌이 더 예민하게 굴고 있었다.

“자세히 알려 줘야 대비하지. 지금 당장 입원실 잡아야 하면 그렇게 하고.”

“입원실까지는 필요 없을 거 같은데.”

“수술까지 진행해야 하면 최대한 빠른 날로 잡아.”

“수술은 바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진규민이 안경을 들어 올리며 강세헌을 바라보았다.

“더 검사해 봐야 한다며. 정밀 검사하는 이유가 뭐겠어.”

태서가 듣고 있다는 것 때문에 강세헌이 최대한 말을 돌렸다. 그런데 진규민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이며 강세헌과 태서를 번갈아 보다가 순간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언제 정밀 검사라고 했냐? 지금 추가 검진을 해야 할 건 산부인과 쪽이야. 확실하진 않은데 임신 가능성을 보고 있어.”

진규민은 원래 검사하기 전까지 말해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계속 지켜보다가는 엄한 사람 중증 환자 만들까 봐 털어놨다.

진규민의 설명에 강세헌과 태서가 굳어 버렸다.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강세헌은 아예 입을 다물고 있었고 태서는 이리저리 돌아보며 제가 들은 게 맞나 의심했다.

그러다 태서가 강세헌을 힐끔거리며 바라보자 진규민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만약 임신이 확실하다면 애 아빠는 저놈이구나.

‘임신?’

태서는 어제오늘 강세헌이 제게 보여 준 모습을 하나둘 떠올렸다. 회사도 안 가고 세끼 밥을 챙겨 주더니 과제도 봐줬다. 거기다 매끼 간식도 주고 낮잠 잘 때는 클래식까지 틀어 줬다.

태서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강세헌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나한테 잘해 줬구나.”

“그런 게 아니…….”

아닌데 누가 봐도 오해할 수 있는 상황에 강세헌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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