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강세헌의 입가에 뜬 미소를 본 태서가 시선을 돌렸다. 나쁘지 않다고 하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고 말하나. 뭐, 솔직히 거절당하지 않아서인지 제 기분도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야, 나쁘지 않다니 너무 물 흐르듯이 넘겨 버리는 거잖아.’
뒤늦게 태서가 제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경각심을 일깨웠다. 이렇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굴면 안 되는 일이었다. 결혼이라는 게 쉬운 일도 아니었고 아이를 낳는 건 그보다 더 어렵고 복잡한 문제였다.
그런데 왜 말랑말랑한 분위기로 흘러가는 걸 막지 못하는지.
그때였다. 태서를 직접 바라보지 않고도 그의 복잡한 심경을 눈치챈 듯 강세헌이 입을 열었다.
“네가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줄게.”
“안 그래도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오늘은 그저 강세헌에게 뭐 하냐는 문자를 하나 보냈다가 만나게 됐을 뿐이고, 태서는 계속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진짜 가볍게 생각해 보기도 하고 아기를 낳은 미래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계속 고민하는데 그럴수록 더 어렵네요.”
태서가 턱을 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모님한테는 말했어?”
“저번에 본 이후로 거의 못 만났어요.”
강세헌이 데려다줘서 집으로 들어간 날, 부모님을 만났다. 그때 태서는 바쁜 부모가 집에 있다는 게 놀랐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부터 다시 또 잠깐 얼굴 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다 보니 인사하기도 바쁠 시간에 제 심각한 상황을 말하기도 애매했고.
“할 말이 있다고 하면 시간을 내 주시지 않아?”
“당연히 그럴 분들이시죠. 그래서 더 말 안 했어요.”
그게 부모님이 일을 다 미루고 올 정도일까 봐. 정 급하면 태서가 직접 찾아가서 말하면 되는 거였다.
“비밀로 하진 않을 거지만, 일단 저부터도 조금 확신이 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러니까 밑도 끝도 없이 나 임신했어, 어떡해?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태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던 강세헌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게 되자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앞을 지나다니는 학생들을 구경하게 되었다. 실제로 각자의 생각에 빠져든 거지만, 적어도 겉보기엔 벤치에 나란히 앉은 것에 불과했다.
막 앞을 지나가던 박한수가 둘을 발견한 것도 모를 정도로. 태서가 볼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도 톡톡 두드렸다. 적어도 오늘 강세헌을 만난 보람이 있었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결혼은 왜 긍정인지 그 이유를 들었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줄게. 그 와중에 나한테 물어볼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고.”
오늘처럼.
강세헌의 뒷말은 소리 없이 지나갔지만, 태서의 귀에 똑똑히 들린 것만 같았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서가 슬쩍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자신의 선택을 우선시해 주는 것도 고마웠지만, 그도 연관이 있기에 초조할 수 있는데도 기다려 주겠다는 말이 고마웠다. 그게 마치 그만의 여유인 것만 같았다.
태서는 새삼 강세헌이라는 남자에게 감탄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 괜히 멋쩍은 마음에 슬쩍 농담을 건넸다.
“그럴 일은 없지만…… 제가 진짜 오래 고민해도 괜찮아요?”
“마음대로 해.”
“그러다 정말 시간이 밀려서 우리가 결혼해야 할 수 있는데도요?”
“그건 아까 다 대답한 거로 아는데.”
강세헌이 대뜸 손을 뻗어 왔다. 원래도 큰 그의 손이 갑자기 다가오자 태서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강세헌의 큰 손이 태서의 머리통을 감싸듯 덮어 왔다.
“생각하는 시간을 충분히 준다고 했지 쓸데없는 생각을 반복하라고는 안 했어.”
“……내가 어떤 생각하는지 모를 거면서.”
“걱정하지 마. 그건 네 얼굴에 잘 드러나니까.”
“내가 말을 말아야지.”
태서가 머리를 흔들어 강세헌의 손을 털어 냈다. 그에게 장난쳐 봐야 제대로 먹히지도 않는데 왜 했나 모르겠다.
“내일 수업은 몇 개야?”
“한 개요. 점심 전에 하나 넣어 둔 게 다예요.”
“그럼 끝나는 시간 메시지로 보내. 맞춰서 데리러 올 테니까.”
당연하다는 듯 말하고 일어나는 세헌의 뒷모습을 태서는 할 말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생각할 시간 충분히 준다며.
***
“윤태서.”
대뜸 어깨를 짚어 오는 손길에 태서가 화들짝 놀라며 옆을 돌아보았다.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제 챙을 들어 올리며 태서와 눈을 마주쳐 왔다. 박한수가 빙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수업 끝난 지 한참인데 네가 안 나와서 내가 와 봤다.”
태서가 제 어깨를 털어 냈다. 그러자 박한수가 곧장 그의 옆으로 엉덩이만 내릴 뿐, 태서를 향한 시선은 그대로였다.
태서가 박한수를 무시하고 강의실을 둘러보자 어느새 수업이 끝나고 자리엔 드문드문 남은 학생들이 전부였다. 박한수도 강인혁도 만나지 않는 수업이라 집중이 잘되는 강의였는데 오늘 처음으로 내용의 대부분을 놓치고 말았다.
아쉬운 것도 잠시 태서가 옆에 둔 가방을 끌고 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해?”
“너 때문에 다 까먹었어.”
분명히 무슨 생각이든 했던 거 같은데 박한수가 어깨를 짚어 오는 바람에 완전히 날아가고 말았다. 뭐였더라, 적당히 제 임신에 관한 생각을 했던 거 같은데.
“너 그런데 어제 그, 그분 있잖아.”
“누구?”
“나란히 앉아 있던 그분 말이야.”
박한수의 말에 태서는 누구를 말하나 싶어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도 쉽게 떠오르지 않아 말이 없으니 박한수가 아예 정답까지 알려 주었다.
“강세헌.”
“음? 네가 세헌이 형을 어떻게 알아?”
“그 얼굴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박한수가 제 핸드폰을 꺼내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태서가 잘 볼 수 있도록 들이밀자 눈 앞에 강세헌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리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젊고 돈 많은 사업가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아무튼 너 어제 이분이랑 같이 있더라.”
“봤어?”
“응. 어쩐지 내가 그렇게 손을 흔들어도 반응하지 않는다 했어.”
박한수가 어제 태서를 발견했음에도 자신을 보라고 손을 흔들지언정 다가가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그는 태서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가 곧장 강세헌을 알아봤고 그 자리에 멈춰 섰던 것이다.
괜히 끼어드는 게 될 거 같아서 지나쳤는데 역시나 태서는 박한수를 알아채지 못했다.
“아무튼 그분이랑 친한가 봐.”
“그런 셈이지.”
대충 흘려서 대답한 태서가 가방에 책과 필기도구를 넣고 있으니 박한수가 오묘한 시선을 보내왔다. 보다 못한 태서가 가방을 어깨에 메며 일어서는 동시에 박한수의 모자를 깊게 눌러 버렸다.
“너는 요즘 나한테 관심이 많은 거 같아.”
“너 같으면 너한테 관심이 안 가겠어?”
“그러니까 관심 끄라고 했다.”
태서가 박한수의 모자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이제 적당히 해도 좋으련만 어제는 또 어떻게 보게 된 건지. 그러나 쉽게 포기할 박한수가 아니었다. 그는 곧장 태서를 따라 일어났다.
“그래도 나는 나은 거 알지?”
“왜?”
“적어도 너한테 직접적으로 물어보고 이상한 오해는 하지 않잖아.”
“오해?”
막 강의실을 나가 걸어가던 태서가 이상한 단어에 걸려 멈춰 섰다. 그러자 기회라도 잡은 듯 박한수가 태서의 앞으로 와서 그를 향해 마주 섰다.
“어제 너랑 강세헌 그분이랑 같이 있는 거 본 사람이 많아.”
“그래서?”
만나선 안 될 사람을 본 것도 아니고, 얼추 강세헌의 유명세 때문에 그러는 거 같은데 같이 있는 게 뭐가 문제일까 싶었다.
“둘이 무슨 사인가 싶은 거지.”
“내가 있는 집 자식이라 세헌이 형이랑 친한 건 생각하지 않는 거지?”
“뭐, 그것도 그렇고.”
“아니면 뭐야. 그리고 이상하지 않아?”
태서가 박한수를 옆으로 밀어 내고 걸어가면서 말했다.
“베타인 남자와 알파인 남자를 두고 왜 그렇게 떠들어 댈까?”
적어도 제 형질이 오메가인 걸 아는 게 강세헌 뿐이라 태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 왔다. 보통 같은 성별이라면 오메가와 알파가 아닌 이상 잘 엮지 않는 게 이 세상이었다. 그렇다고 베타이면서 동성의 결혼을 반대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럴 확률이 적아서 적어도 스캔들로 엮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말이야.”
태서의 의심에 박한수가 제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는 태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미래가 보고 반해 소개팅을 조를 정도로 태서를 바라봤을 때의 첫 느낌은 잘생긴 베타 남자 딱 그 이미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태서는 강인혁도 그렇고 강세헌과 있어도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세히 말해 보라고 하면 말할 수는 없겠는데 그런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태서가 강인혁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났는데도, 소문의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보다는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어쨌든 어제 일로 슬쩍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이거야.”
“그러면 내가 세헌이 형이랑 같이 있는 걸 볼 때마다 소문이 커지겠네?”
박한수의 말에 태서가 담담하게 제게 붙어 올 소문을 덧그려 보았다. 강세헌과 윤태서 사이에 뭐가 있는 거 아니냐는 말이 돌 거라는 건데…….
“그렇겠지?”
박한수가 얼떨떨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여왔 다.
“그런 소문이 뭐가 대수라고.”
이미 강인혁과 자신을 둘러싼 무성한 소문에도 아무것도 안 들리는 척 굴어 왔다. 이제는 강인혁에게 다가가지 않음에도 자신과 마주친 학생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건 여전했다. 원래도 그냥 흘려들었는데 지금 다른 소문이 생긴다고 딱히 신경 쓰일 거 같진 않았다.
“얼마든지 커지라고 해.”
태서가 박한수에게 가겠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더불어 소문따 위는 하등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의미가 포함된 손짓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뒤에서 네 이름이 언급되는 게 좋은 건……. 어?”
태서가 너무 신경 쓰지 않는 것만 같아 박한수가 제 나름대로 말하던 와중에 놀라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자신을 남겨 두고 앞서 가는 태서가 자연스럽게 그의 앞에 선 차의 보조석을 열었던 것이다.
그 안에 언뜻 비친 강세헌의 얼굴에 박한수가 검지로 그를 가리킬 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나 간다.”
그런 박한수를 향해 태서는 가벼운 인사를 던지고는 미련 없이 차 문을 닫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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