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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40화 (40/130)

40화

박한수가 울상을 짓는 걸 보고도 태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괜히 바깥바람 쐰다고 분위기 띄운 박한수 잘못이지 뭐. 태서가 할 말 있냐는 식으로 바라보니 박한수가 입술을 달싹이긴 했지만, 꾹 다물었다. 표정엔 불만에 차올랐는데 아마 제 형질의 비밀까지 알아서 더 말을 못 하는 모양이었다. 딱히 마음 쓰이라고 말한 건 아니었는데.

“됐지? 나 간다.”

강인혁이고 서다래고 그냥 안 마주쳤으면 하는 인간들이라 따로 할 말도 없었다. 조 활동에 크게 불만이 없음을 드러낸 태서가 돌아섰다.

‘왜 연락이 없지?’

아까까지만 해도 언제 끝나냐는 메시지를 보내 왔는데 잠깐 사이에 연락이 뚝 끊겨 버렸다. 태서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강세헌을 떠올리니 방금까지 마음을 지저분하게 더럽혔던 기분이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다. 태서의 내려왔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뭐 먹자고 하지.’

오늘은 제가 맛있었던 곳으로 같이 가도 좋겠다. 이전에 많이 얻어먹었으니 이번엔 자기가 사기로 하고. 그런데 막상 그렇게 생각하니 갈 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윤태서가 되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질 않았다.

잠깐 고민하던 태서는 곧 적당한 장소를 추려 냈다. 아예 없지도 않으니 제 조건에 맞춰서 결정하면 될 일이었다. 무슨 메뉴까지 먹을지 결정한 태서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강세헌만 생각하던 태서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세 사람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평소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길에 선이라도 그어 놓은 듯 곧게 걷던 태서가 오늘따라 유난히 어지러운 선을 그리듯 걸어가고 있었다. 상체도 흔들리고 있으니 박한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방금까지 우리한테 까칠하게 굴어 놓고 설마 기분 좋아서 저렇게 걸어가는 건 아니겠지? 제 의심이 맞는 거 같지만, 박한수는 일단 태서에게 쏠린 신경을 끊어 냈다.

“태서가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가 봐. 이럴 줄 알았으면 빨리 집에 가서 쉬라고 할 걸 그랬네.”

그간 태서는 늘 예민하고 까칠하게 굴어 왔다. 그게 강인혁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욱 그랬고 그 피해를 가장 많이 본 게 서다래였다. 그러다 요즘 태서의 태도가 한결 누그러졌는데 오늘 예전으로 돌아간 듯이 구는 탓에 박한수가 혹시 오해할까 말을 덧붙여 왔다.

“태서는 신경 쓰지 말고 우리도 정리하자.”

박한수가 먼저 제 책을 쌓아 올리며 갈 준비하는 걸 보고서도 서다래는 선뜻 제 책에 손이 가지 않았다. 윤태서 때문이 아니었다. 아까도 낯선 인혁의 모습에 불안한 마음이 엄습했었는데 인혁이 여전히 태서에게 눈을 못 떼자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목을 죄는 듯한 답답함. 오늘따라 목까지 올라오는 티를 입은 게 문제였나. 서다래가 옷깃을 아래로 내리며 강인혁을 불렀다.

“인혁아, 우리도 가자.”

“……가야지.”

서다래의 말에 강인혁이 돌아보지도 않고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어딘가 찜찜함을 지우지 못한 강인혁이 느릿하게 노트북을 덮으며 가방을 싸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건물을 돌아 모습이 사라진 태서를 보던 강인혁은 급기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래야, 여기서 잠깐만 기다릴래? 아니면 먼저 강의실에 가 있어도 좋고.”

“너는?”

강인혁은 잠시 제 책을 대충 훑어보았다. 그건 책을 한데 모을 생각 때문에 본 게 아니라 그저 다른 곳을 보며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거였다. 서다래는 자신을 보지 않는 그 짧은 순간 불안감을 느꼈다. 오늘 강인혁은 자신과 줄곧 함께 했는데 마지막에 삐끗하고 어그러진 것만 같았다.

“나 태서한테 할 말이 있어서.”

강인혁의 대답에서 윤태서의 이름이 언급되자 서다래는 무너지려는 입가를 재빨리 다물었다.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적어도 강인혁이 제게 거짓말을 하고 윤태서를 만나러 가진 않았다. 거기다 이렇게 불안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냥 건넬 말이 있을 수도 있었다. 강인혁과 윤태서는 집안끼리도 서로 잘 알고 있으니까.

서다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강의실에 가 있을게.”

“어. 거기서 보자.”

강인혁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빠르게 제 물건을 정리해서 일어나자 박한수와 서다래만 덩그러니 남았다. 막 인사하고 멀어지려던 박한수가 타이밍을 놓친 채 어색한 눈으로 서다래를 보았다. 강인혁을 보는 서다래의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해 자리한 감정은….

박한수가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걸 눈치챘는지 서다래가 시선을 돌려 눈을 마주쳐 왔다.

“너도 가야지.”

“어, 그래야지.”

테이블 위에는 이제 서다래의 물건만 늘어져 있었다. 박한수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서다래에게 “간다.” 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돌아섰지만… 쉽게 걸음을 떼지 못했다. 방금 강인혁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어 주는 걸 봤는데 그가 가고 남은 서다래는….

‘예전 윤태서를 보는 거 같단 말이야.’

어딘가 강인혁을 향한 미련이 가득해 보였다. 분명 강인혁과 좋은 사이인 걸로 알고 있는데 미련이라니? 제가 착각했나 싶은 박한수가 가볍게 머리를 털었다.

‘내 일도 아니고 윤태서가 발현한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거 같네.’

그만 생각하기로 한 박한수마저 자리를 떠나니 서다래 혼자 남았다. 그는 제 낡은 노트북을 바라보다가 슬쩍 검지로 표면을 쓸었다. 윤태서와 강인혁은 같은 노트북을 쓰고 있었다. 그들의 깔끔한 최신형 노트북에 비해 제 것은 너무 초라해 보였다.

그게 신경 쓰여 서다래는 더욱 제 노트북을 많이 활용하려고 했다. 외양이 어떻든 잘 사용하는 것으로 보란 듯이 쓸모를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런데 제 노트북에 신경 쓰는 건 자기뿐이었다. 정작 윤태서도 강인혁도 제 것이 낡았단 생각조차 하지 않은 듯 보였는데…….

“나 왜 이렇게 못났지.”

서다래가 노트북에 그대로 팔을 얹고 얼굴을 묻었다. 방금 자신의 생각을 누군가가 알아채면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울 것 같았다. 단순히 노트북만 비교했다면 이 정도까지는 아닐 텐데.

“왜 나는…….”

서다래의 작은 혼잣말이 팔에 갇혀 맴돌다가 흩어졌다.

“윤태서의 노트북을 뺏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강인혁과 나란히 펼쳐 두고 쓰니 마치 둘이 연인 같아 보여서? 그래서 윤태서의 것을 뺏고 망가뜨리고 싶단 생각했던 걸까?

서다래는 복잡한 눈빛으로 제 것을 내려다보았다. 강인혁과 어울리면서 이제 제 모든 게 다 거슬리기 시작했다.

***

“회의?”

갑자기 회의가 잡혔다는 메시지를 읽은 태서의 걸음은 느려졌다. 그래서 연락이 없었던 건가? 강세헌과 만날 생각에 들떠 있던 태서의 표정이 금방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회의한다는데 차마 자기 보러 오라고 할 수도 없지 않나.

“하긴 나 만나러 온다고 일도 많이 미루긴 했어.”

오죽하면 비서가 그렇게 데리러 왔을까. 태서가 혼잣말을 뱉으며 아쉬움을 달래 보려 애썼다. 그런다고 아까처럼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집에 가야겠네.”

태서가 제 배를 어루만졌다. 그를 못 만난다고 하니 아까까지만 해도 고팠던 배가 지금은 잠잠했다. 강세헌이 없어도 잘 먹어야 하는데.

“페로몬이 묻은 물건이라도 달라고 해야 하나?”

그냥 내뱉은 말이었는데 막상 말하고 나니 왜 이제껏 생각 못 했나 싶었다. 강세헌의 페로몬이 묻은 물건을 품고 있으면 굳이 그와 있지 않더라도 안정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윤태서.”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태서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놀라서 쿵쾅대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누르면서 돌아본 태서가 의아한 눈으로 강인혁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혼자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해 굳이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서 강인혁이 제 말을 들었을까 싶어 섣부르게 말을 내뱉지 못했다.

“잠깐만 멈춰 봐.”

“……지금 날 부른 거야?”

심지어 옆에 서다래도 없었다.

“집에 가는 거야?”

“…그런데?”

태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강인혁의 주변을 살폈다. 역시나 서다래도 없고 박한수도 없다. 강인혁 혼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일단 제가 중얼거린 말은 못 들은 거 같은데 왜 불렀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할 말이 있어.”

“네가 나한테? 내 기사는 안 써도 된다고 아까 말했는데.”

“그게 아니야.”

“그럼 우리 사이에 나눌 말이 있었나?”

딱히 강인혁에게 악감정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순수한 의문이었다. 강인혁과는 이제 어지간한 건 다 끊어 냈다 생각한 태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요즘 강인혁과 만난 적도 없었고 서다래를 괴롭히지도 않았다. 가뜩이나 근래에는 학교에 오는 시간을 제외하고 제 생활은 대부분은 강세헌과 함께였다.

“혹시 세헌이 형 때문에 그래?”

그러다 문득 강세헌의 집에서 강인혁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가 떠올랐다. 딱히 강인혁과 좋게 헤어지지 않았었는데 설마 그걸 지금 와서 언급하려는 건가?

태서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강인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뒤늦게 제가 윤태서를 부른 게 잘한 짓인지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

이대로 서서 이야기하기엔 제 속이 정리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강인혁이 근처 카페에 가자는 말을 덧붙이자 태서는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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