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태서가 빨대를 들었다 내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강인혁이 가자는 카페는 저번에 박한수와 함께 왔던 곳이었다. 여기서 먹었던 디저트가 제법 괜찮았다고 생각하며 빨대를 물었다. 차가운 에이드가 입 안을 시원하게 훔치며 내려갔다.
‘이것도 괜찮네.’
태서가 빨대에서 입을 떼며 레모네이드를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메뉴가 많지 않아서 억지로 시킨 거라 별 기대가 없었다. 시기만 할 줄 알았는데 끝이 깔끔하니 텁텁하지 않아 의외로 입맛에 맞았다.
‘이런 맛에 레모네이드를 마시나 보다.’
다시 빨대를 입에 문 태서는 음료를 힘차게 빨아들였다. 앞에 앉은 이가 제 커피를 마시는 둥 마는 둥하는 것을 알지만 먹으라고 권하지 않았다. 대신 약한 협박을 들먹였다.
“나 다 마셔 가는데 그전까지 아무 말 안 할 거면 그냥 간다.”
태서가 빨대를 치아로 문 그대로 웅얼거리며 말했다. 발음이 뭉개졌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지는 제 알 바 아니었다. 지금 강인혁이 하자는 대로 순순히 카페에 온 것만으로도 태서는 할 일을 다 했다.
‘내가 악역만 아니었어도 절대 안 따라왔을 텐데.’
원래 태서는 강인혁에게 까질하게 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윤태서라는 인물이 원래 그런 인간이라는 걸 이용해서 강인혁에게 마음이 없다는 걸 드러내기 위한 거지 그에게 어떤 복수를 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일전에 강인혁에게 서운하다는 마음까지 내비쳤지만 어디까지나 윤태서가 벌인 일은 윤태서의 잘못이었다. 어떤 이유가 있다 한들 그의 행동이 정당화될 순 없었다.
그걸 윤석훈이 날카롭게 집어 주었다. 아들이 저지른 잘못을 두고 윤석훈은 그들에게 잘못했다고 말하라고 했다. 그것 때문에 태서는 강인혁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잘됐단 생각이었다.
“말 안 할 거면 나부터 한다. 내가 파티에서 서다래한테 약 먹이려고 했어.”
“너…….”
강인혁의 눈썹이 일그러지기 무섭게 그의 언성이 높아지려는 걸 태서가 재빠르게 손을 내밀었다.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그 약 서다래가 안 먹게 하려고 노력했어. 내가 벌인 일은 맞는데 내가 수습했다고.”
태서가 그날의 일을 차분하게 풀어 나갔다. 강인혁의 얼굴이 굳어진 걸 알지만, 동요하지 않았다. 그건 지금 상황을 전달하는 데 있어 조금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서다래는 그 약 안 먹었어.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어.”
“약을 안 먹었대도 그런 일을 벌인 것 자체가 잘못이야.”
“알아. 그래서 사과하려고. 서다래에게도 너에게도.”
태서는 진심을 담아 강인혁에게 사과했다.
“어떤 변명도 안 할게.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나 말고 다래한테 사과해.”
“그럴 거야.”
강인혁의 날카로운 대답에도 태서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받아들였다.
“지금은 너랑 마주하고 있으니 네게 먼저 말할 뿐이야. 너도 기분 나빴을 거잖아.”
“…….”
“너무 늦게 말해서 미안해.”
그동안 제 사정이 급해서 이제야 사과하게 되었다. 전부 핑계라고 할 수 있지만, 어쨌든 태서는 잊지 않고 있었다. 느려도 차근차근 나아가는 게 맞다고 여겼다. 보는 사람은 답답할 수 있지만, 제가 한 걸음씩 나아갈 수만 있다면 충분히 걸어갈 만했다.
“…난 됐어.”
“그럼 내 사과 받아 주는 거냐?”
태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강인혁에게서 그렇다는 대답이 듣고 싶었다. 그가 성에 안 찬다 싶게 굴면 정말 무릎이라도 꿇을 생각이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다음에도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데 이대로 넘어가야 할지 모르겠다.”
강인혁의 한숨이 섞인 말에는 태서를 향한 불신이 가득 차 있었다.
“지금껏 나 되게 조용하지 않았니?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면 되지. 정 못 믿겠으면 다음에 내가 또 그랬을 때 망설이지 말고 내 뺨을 때려.”
태서가 제 한쪽 볼에 바람을 넣으며 강인혁에게 내밀었다. 정말 또 그런 일을 하면 제가 직접 강인혁에게 얼굴을 내밀고 기다리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이 부담스러웠는지 강인혁이 상체를 뒤로 물렸다. 아까의 굳었던 표정은 이미 다 풀어지고 대신 황당하다는 눈빛만 가득했다.
“그렇게 장난으로 넘길 일이 아닐 텐데.”
“장난 아니야. 진짜로 때려. 그만큼 나 다신 안 그럴 자신 있으니까.”
“……널 믿어도 될지 모르겠다.”
강인혁이 제 이마를 쓸며 내뱉는 말에서 제 사과를 받아들였음을 느낀 태서가 히죽 웃었다. 은연중 제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으면서도 강인혁이 사과를 받아 주니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럼 이제…….”
네 차례라고 말하려던 태서가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고개를 숙였다. 삐쭉 머리만 나온 핸드폰의 상단에 뜬 이름에 태서는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그것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 테이블에 올리려다가 앞에 앉은 강인혁을 의식해 옆에 놔둔 가방 위로 올려놨다.
아직도 회의 중이라는 메시지를 읽은 태서는 미소가 비집고 나오려는 걸 입술을 깨물어 참고 답장을 보냈다.
「일하셔야죠.」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지금 회의하고 있다면서요.」
「나는 보고 받는 입장이라.」
중간에 메시지 확인하는 여유가 충분하다는 듯한 대답에 태서가 코웃음 쳤다.
‘자기는 임원이다 이거지?’
안 그러는 거 같으면서도 은근히 잘난 척할 때가 많단 말이야.
태서가 빨대를 잘근잘근 물으며 메시지를 몇 번이고 읽었다. 그냥 알았다고 답하기는 재미없고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괜히 진 기분이 들어서 어떻게 반응할지 고민했다.
“나 역시 너한테 사과할 일이 있어…….”
강인혁이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는 사이 태서가 은근슬쩍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생각났다.
「자기야, 그렇게 내가 보고 싶어? 그래서 자꾸 온다는 거야?」
메시지를 적는 와중에 이것을 받은 강세헌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한 태서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회의하고 있다니까 조금이라도 당황했으면 했다. 눈썹만 들썩거려도 제 목표를 달성했다고 봐도 좋겠는데.
“내 말 듣고 있어?”
“응? 응. 계속 말해.”
뒤늦게 강인혁의 존재를 떠올린 태서가 억지로 웃음을 삼키며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그때 당황해서 네게 다짜고짜 화부터 낸 거 사과할게.”
“아, 그때? 괜찮아.”
강인혁이 사촌 형을 만나러 온 집에서 생각지도 못한 자신을 만났으니 예상하지 못했을 건 이해했다. 그래서 당황한 나머지 화를 낸 거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괜찮아?”
강인혁이 확인차 물어보는 말투가 길게 늘어졌다. 그러나 핸드폰을 힐끗거리던 태서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때 너도 당황했을 텐데 뭐.”
그리고 그때 강인혁이 화내긴 했지만 강세헌이 있어서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미 그날의 일은 기억 속에서 지워진 상태였다. 지금 태서는 앞에 앉은 강인혁보다 당장 강세헌에게 올 답장이 궁금했다.
「자기야, 제발 예고 좀 하고 들어오자.」
진동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뜬 메시지에 태서가 급히 제 입가를 가렸다. 실실거리며 웃음이 터지려는 걸 막긴 했는데 입꼬리가 올라가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계속 입을 가리던 태서가 손을 옆으로 옮겨 볼을 톡톡 두드렸다. 진짜 강세헌과 대화하고 있으면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 일은 잊어.”
메시지를 읽고 돌아온 태서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간간이 미소까지 지으며 에이드를 마시고 있으니 그 분위기에 동화된 듯 강인혁의 표정 또한 누그러졌다. 언제 윤태서와 이렇게 평화로웠었나 싶어 감회가 남달랐다.
윤태서와도 잘 지내던 때가 있었는데… 강인혁의 눈동자에 몇 년 전의 추억이 아련하게 피어올랐다.
***
“이제 너한테 무작정 화부터 내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너도 아까 한 말 다 지켜.”
“그럴 거야.”
계속 강인혁에게 날 선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다. 물론 모든 감정이 풀어지지 않겠지만, 태서는 이제 강인혁을 신경 쓰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쩌면 아버지도 이런 것까지 생각한 건 아닐까.
“가라.”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태서가 강인혁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이제 서다래에게 사과하고 완전히 관계를 정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그 기분 그대로 태서는 곧장 강세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깐의 연결음 끝에 울리는 강세헌의 목소리가 태서의 기분을 완전히 끌어 올려 주었다.
[여보세요.]
“회의 끝났어요?”
[자기 덕분에 빨리 끝났지.]
강세헌이 능청스러운 대답에 태서는 아까처럼 참지 않고 웃었다. 전화만 하는데도 왜 이렇게 웃음이 나는 거지. 태서가 곧 웃음을 지우며 강세헌의 장난을 받아 주었다.
“자기 소리에 뭐가 이렇게 반응이 좋아. 앞으로도 불러 드려요?”
[좋지. 이왕이면 다른 사람 앞에서 불러 주면 더 좋고.]
“다른 사람이요?”
[그래. 이를테면 내 가족이라든가.]
가족이라는 말에 태서의 걸음이 느려졌다. 강세헌의 부모님이라…… 언젠가 그를 검색하면서 본 직계의 얼굴이 떠올랐다. 강세헌이 제 부모님을 만나러 왔으니 이번엔 태서의 차례였다.
[우리 부모님도 자기를 보고 싶어해.]
내가 아주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말해 놨거든. 강세헌의 목소리가 태서의 귀를 간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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