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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46화 (46/130)

46화

“다 좋은데 뭔가 순서가 엉킨 거 같지 않아요?”

“앞에 설명을 붙여 주면 좋을 거 같은데…….”

“앞을 보세요.”

강세헌이 고개를 돌리자 태서가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막 빨간불에서 파란불로 바뀌는 신호에 강세헌이 액셀을 밟자 차가 앞으로 나아갔다. 옆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보던 태서는 어딘가 복잡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하다가 나온 말이었어요.”

태서가 창문에 머리를 기대자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 진동이 마음에 들어 계속 기댄 체 태서는 앞을 바라보았다. 강세헌과 같은 곳을 바라보지만, 머릿속엔 온통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찼다.

강세헌이 찾아와 제 부모님과 함께 식사했을 때, 강세헌의 부모님을 만났을 때.

‘다 좋아, 다 좋은데…….’

두 번의 자리는 제 걱정 이상이 무색하게 무난히 잘 지나갔다. 제 부모님은 별말 없으셨고 강세헌의 부모님은 따로 이야기를 듣지 못했지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니 다 수월하게 지나갔다 싶은데 이상하게 뒤처리를 덜 한 것만 같은 찝찝함이 들었다.

강세헌이 기꺼이 자신의 알파라고 소개를 하기도 했고 또 병원에서는 당연히 아기 아빠가 될 것을 표현해 왔다. 그러니까 제 아기를 함께 키우는 건 너무도 당연하게 되었는데…….

-세헌이랑 어디서 처음 만났어요? 내 아들이지만 딱히 상냥한 편은 아니라 연애하기도 힘들 줄 알았거든요.

강세헌의 어머니가 했던 물음이 계속 제 마음에 걸렸다.

‘우리가 언제부터 연애를 한 거지? 아니, 연인이 맞나? 결혼하는 거겠지?’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하자 꼬리에 꼬리를 문 의문이 줄지어 떠올랐다. 갑작스럽게 임신한 탓에 강세헌과의 사이를 재정비할 새도 없이 흘러가 버렸다.

‘같이 밥 먹고 커피 마시는 게 데이트였나?’

태서가 팔짱을 끼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관계의 정립이라는 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지만 적어도 태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그 탓에 고심에 찬 태서의 콧등과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그게 또 강세헌의 눈에 한없이 귀엽게 보인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태서는 제 나름 진지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이미 목적지에 다다른 강세헌은 차의 시동을 끄고도 태서의 상념을 방해하지 않고 지켜만 보았다. 뭐가 되었든 태서가 먼저 말을 걸기를 기다렸다.

“있잖아요.”

“이제야 말할 생각이 들어?”

강세헌이 달가운 듯 바로 반응해 주자 태서가 다시 입을 다물게 되었다. 원래 강세헌에게 우리가 어떤 사인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의 미소에 생각이 바뀌었다.

어떤 사인지 묻는 대신…….

“휴가 있으세요?”

“있긴 하지.”

대뜸 꺼내는 휴가에 강세헌이 살짝 의아한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회사든 휴가는 존재하니 강세헌의 일터도 다르지 않았다.

“세헌이 형도 남들 다 쉬는 그날에 쉬어요?”

“나는…….”

지금껏 휴가라는 명목으로 쉬어 본 적이 없던 강세헌이 뒷말을 흐렸다. 어떻게 태서에게 설명해 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다시 질문이 들어왔다.

“언젠데요?”

강세헌이 대답 대신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메시지를 보냈다. 금방 답장이 온 듯 진동이 울리자 강세헌이 그것을 확인하고 답해 줬다.

“내 휴가는 다음 주 목요일부터 주말까지야.”

“다음 주요?”

태서가 순간 제 기말고사를 떠올려 보며 날짜를 가늠해 보았다. 보통 직장인의 휴가가 7월 말인 걸 생각해 보면 한 달이나 일렀다.

태서의 의문을 알아챘는지 강세헌이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임원이잖아.”

그러니 남들과 휴가 기간이 다르다는 식으로 굴어 오는데 회사를 다녀 보지 않은 태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강세헌이 비서에게 자신의 휴가 일정이 언제인지 물어본 게 아니라 시간을 뺄 수 있는 날을 물어본 것도 모르고.

“그런데 주말이야 원래 쉬는 날이니 그렇다치고 평일이 그거밖에 없어요? 휴가가 참 앙증맞네요.”

“짧다는 걸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거야?”

“그렇다고요.”

어쨌든 다음 주라고 하면 멀지 않았다. 한동안 기말에 치중하고 나면 금방 돌아올 시간이었다.

“그럼 그 주 중 하루는 나랑 보내요.”

끝까지 어떤 이유인지 말해 주지 않은 태서는 미리 강세헌의 시간을 제게 줄 것을 요구했다.

***

한창 과제에 집중하던 서다래가 노트북 너머 강인혁을 힐끔거렸다. 자신과 다름없이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는 마지막 확인차 과제물을 출력하고 있었다.

“발표할 거는 한수가 오늘 안으로 보낸다고 했으니 우리는 오타가 있는지만 확인하면 될 거 같아.”

“그럼 다 한 거네.”

“기말이랑 겹치지 않아서 다행이지.”

오랫동안 해 온 과제가 끝을 보이자 강인혁이 개운한 얼굴로 기지개를 켰다.

“진짜 힘들었다. 그렇지?”

“그건 발표까지 다 끝내고 난 후에 봐야 할 거 같은데?”

“네 건 다했어?”

“아…….”

서다래가 제 개인 과제물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했어.”

테이블에 놔둔 제 과제물을 톡톡 두드린 서다래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지만 하나둘 처리하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끼던 참이었다.

“그럼 우리 저녁은 나가서 먹자.”

강인혁이 눈짓했다. 오늘 종일 과제만 하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참이였다. 거기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싶은 마음에 강인혁이 손으로 술을 마시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마침 서다래도 간절히 바라고 있었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여기는 대충 정리하고…….”

강인혁이 테이블에 어지럽게 흩어진 과제물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는데 불현듯 초인종이 울려왔다.

“이 시간에 누구지?”

따로 찾아올 사람이 없기에 강인혁이 의아한 얼굴로 일어났다. 혹시나 박한수가 말도 없이 들이닥친 거라면 가차 없이 엉덩이를 걷어차 줄 생각이었다. 강인혁이 바깥에 선 사람을 확인하고는 서다래를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서다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가 오셨어.”

“그럼…….”

강인혁이 왜 그런지 알아챈 서다래가 할 말을 잃은 사이 초인종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아까와 다르게 괜히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아 서다래가 급히 방을 가리켰다.

“나는 방에 들어가 있을게.”

“……그럴래?”

강인혁이 미안한 눈으로 바라보니 서다래가 그의 손을 한 번 잡았다 놔준 후 방으로 갔다. 그사이 참지 못한 한미순이 다시 초인종을 눌러 댔다. 강인혁이 문을 열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안으로 들어왔다.

“집에 있으면서 왜 이제야 열어.”

“화장실에 있어서 몰랐어요.”

강인혁이 옆으로 비켜서지 않았다면 그를 밀고 들어올 기세로 한미순이 씩씩거렸다. 문을 늦게 열어 줘서 그런 것치고는 반응이 꽤 거세서 강인혁은 왜 연락도 없이 왔냐고 말할 새를 놓치고 말았다.

“내가 진짜 속이 터져서.”

한미순이 핸드백을 집어 던지다시피 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강인혁이 주변에 늘어진 종이를 대충 수습하며 맞은편에 자리했다. 그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본 강인혁은 노트북마저 덮으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강인혁이 한미순의 표정을 살피는 사이 문이 닫히는 소리가 그의 신경에 걸렸다. 연락도 없이 찾아온 어머니 때문에 서다래는 일단 방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한미순이 방을 뒤지면 문제겠지만 당장 다른 수가 없었다.

방문이 꼭 닫힌 걸 확인한 강인혁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가 다시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머니와 다래가 마주치면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 다래를 숨겨 놓고 안심했지만 그게 하등 좋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 문뜩 떠올라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러나 당장 어머니에게 다래를 잘 봐 달라고 해 봐야 절대 먹힐 리 없었다. 다래도 그걸 알고 알아서 방으로 들어간 거다.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은 피하는 게 낫다고 여긴 것이다.

강인혁이 서다래를 신경 쓰는 사이 한미순이 대뜸 본론을 꺼내 들었다.

“너 태서가 발현한 거 알고 있었니?”

“……태서요? 태서가 발현했다고요?”

바로 알아듣지 못한 강인혁이 한 템포 늦게 반응했다. 지금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확인하는 물음에 한미순이 격하게 반응했다.

“그래. 그것도 모르고 나는 또 기다려 준다고나 하고, 아휴.”

한미순이 강인혁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분명 김미경은 태서가 오메가가 된 걸 알고 있었으면서 제게 입도 뻥끗 안 했다. 배신감에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한미순이 열을 식히려 손부채질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미경 언니를 찾아갔는데…… 아니야.”

할 말이 많은 듯 한미순이 바로 입을 뗐다가 바로 손을 저었다. 그러고도 강인혁이 빤히 바라보니 아예 몸을 반쯤 틀어 버렸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아휴, 덥네.”

한미순이 다른 데 관심을 돌리려는 듯 손부채질로는 부족하다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강인혁이 대충 한곳에 모아 둔 종이 다발을 보고는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생각에 빠진 강인혁이 뒤늦게 그것을 알아채고 손을 뻗었다.

“에어컨 틀어 드릴게요, 그건 이리 주세요.”

“종이 구길까 봐 그래? 잠깐만 쓰고 내려놓으면…….”

엄마가 더운 것도 신경 쓰지 않는 제 아들이 야속한지 한미순이 토라진 듯 말하다 멈칫했다. 종이의 하단에 적힌 서다래의 이름을 본 한미순이 기가 찬 듯 짤막한 숨을 연신 뱉어 냈다.

“너 아직도 얘랑 사는 거니?”

“같이 과제하던 중이었어요.”

“그걸 왜 집에서 해. 밖에 널리고 널린 게 카페인데. 학교에서는 못 하고?”

강인혁의 대답을 변명으로 취급한 한미순이 신경질적으로 종이를 던져 버렸다. 한껏 던졌는데도 나풀거리며 천천히 떨어지는 종이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한미순의 눈매가 더 날카로워졌다.

“너는 태서가 발현한 줄도 모르고 엄한 애랑 놀고 있기나 해? 뭐가 우선인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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