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단순해서 좋네.”
강세헌이 재밌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기꺼이 태서의 계획에 맞춰 주겠다는 듯 그는 작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삼 태서는 어제 강인혁을 마주했던 게 생각났다. 그때 강인혁이 크다고 생각하면서도 강세헌이 더 크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지금 확인한 꼴이었다.
키와 덩치가 커서 더욱 그의 존재감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더 궁금해지고 말이야.”
강세헌이 제 넥타이에 검지를 끼워 넣고 좌우로 흔들었다. 그 작은 움직임에 태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면 되나?”
강세헌이 비죽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 밝히지 않으면 제멋대로 해석하겠다는 위험한 미소였다.
장난 한번 쳤다가 가슴 떨릴 경험을 할 것만 같아 태서가 급히 두 손을 들었다.
“제가 졌어요. 앞으로 그런 장난 안 칠게요.”
“아니야. 장난이라고 하지 마.”
“형이야말로 넥타이 끌어 내리지 마세요. 무서워.”
태서의 앓는 듯한 신음에 강세헌이 장난을 멈추고 그의 머리를 헝클어 왔다. 태서가 아무리 날뛰어 봤자 강세헌을 뛰어넘지 못 하는 걸 확인한 대화였다.
“애도 있는 뭐가 무서워.”
방금까지 은근했던 강세헌의 목소리도 어느덧 차분하게 돌아왔다. 태서가 눈동자만 위로 들어 강세헌을 보았다. 방금까지 나눈 대화는 정말 가볍게 주고받은 농담에 불과했지만, 나중엔 아닐지도 몰랐다.
실은 그걸 확인하고 싶었다.
“물어볼 게 있어요.”
태서가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강세헌을 향해 몸을 돌려 앉았다. 강세헌이 차분해진 것처럼 태서 역시 장난기를 쏙 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동안 우리가 밥 먹은 거 다 뭐였어요?”
태서는 이전에 강세헌과 한 일을 꼭 정의 내리고 싶었다. 제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찾아오고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집에 데려다주는 건 기본이었고 밤새 통화하느라 아침마다 핸드폰이 꺼져 있던 날이 부지기수였다. 그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닌 사이끼리 하기엔 너무도 친밀했다.
“그게 데이트였나 싶어서요. 그런데 우리가 사귀는 건 아니잖아. 그렇죠?”
강세헌은 이전까지 짓던 미소를 지운 채 약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태서의 부정이 그의 심기를 찔러 왔다.
“너와 밥을 먹고 싶었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였던 거야.”
“우리가 뭔데요?”
태서의 한마디로 처음의 좋았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테이블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유리잔과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당장 유리잔이 떨어지면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로 유리 조각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처음에 형이 우리가 잔 걸 가지고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말라 했잖아요. 그리고 이렇게 흘러 버렸어요.”
그게 원인이었을지 모른다. 이후에 강세헌이 제게 보인 행동이 선을 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이렇다 할 관계를 정의하지 않은 건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흘러왔다. 태서는 강세헌의 집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이었고 그의 부모님에게 인사까지 드렸다.
“태서야.”
태서의 가라앉은 눈빛을 본 강세헌이 답답한 듯 제 관자놀이를 눌렀다. 이건 그 또한 생각하지 못한 주제였던 듯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지금껏 잘 지내왔는데 갑자기 모든 시간을 부정당하는 것만 같아 강세헌의 목소리 역시 가라앉았다.
아슬한 분위기를 먼저 깬 건 태서였다.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자 강세헌은 순간적으로 태서를 잡으려는 충동을 참았다. 왠지 팔을 잡고 어딜 가지 못하게 막으면 안 될 거 같았다. 태서가 말한 둘 사이의 정의되지 않은 관계가 강세헌을 머뭇거리게 했다.
“어디 가려고.”
“잠깐만요.”
강세헌의 물음에 태서는 그에게 시간을 달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지 태서가 나가고 강세헌 혼자 남았다. 심각한 대화를 나누다가 억지로 흐름을 끊어 버린 것만 같은 찝찝함에 강세헌은 힘없이 소파에 앉았다. 태서가 이런 생각을 할 줄 몰랐다는 듯 강세헌의 미간에 진 주름이 펴지지 않았다.
“내가 윤태서를 어리게만 봤네.”
강세헌이 목구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답답함에 다시 넥타이를 부여잡았다. 제 목을 조르는 게 넥타이가 원인이 아닌 걸 알면서도.
어떻게 태서를 달랠까. 처음에 말한 대로 아무 관계도 아닌 사이로 돌아가되 아기만 공유하자고 하면 어떻게 거절해야 할까. 당장 태서를 놓아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강세헌이 고심에 찬 사이 태서가 돌아왔다.
“우리 대화가 필요한 거 같…….”
태서의 인기척에 고개를 든 강세헌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뒷짐을 지고 걸어오는 태서는 아까처럼 심각한 얼굴이었는데 걸을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따라왔다. 엉덩이에 부스럭거리는 무언가를 붙이고 오는 건 아닌지.
분명 심각했는데… 태서를 따라오는 소리가 뭐라고 웃음이 나는지 몰랐다.
강세헌의 앞에 선 태서가 아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눈빛을 띠었다. 어딘가 비장하고도 결연한 눈빛이었다.
“그래서 많이 고민했어요. 나 이제 형이랑 무슨 사이 해도 되지 않아요?”
태서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머릿속으로는 수없이 연습했는데 막상 입 밖으로 꺼내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목이 막혀 버릴 것만 같은데 잘 나올지 모르겠다. 태서가 억지로 침을 삼킨 후 강세헌과 눈을 마주쳤다.
아직 고백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숨이 차서 말끝이 흐려졌다. 태서가 잠깐 입을 다물고 숨을 골랐다. 고백하는 게 이렇게 두근거리고 떨리는 일이라는 걸 지금에서야 알았다.
“내 연인이 되어 주세요.”
태서가 제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한 건 오래되지 않았다. 강세헌과 어떤 사이가 되고 싶은 건지 고민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제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강세헌은 태서가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그건 태서가 부모에게 의지하는 것과 조금 달랐다.
이 세상에 흘러들어 온 제 영혼이 흔들릴 때마다 잡아 준 게 강세헌이었다. 그의 한마디에 위안을 얻었고 그와 있으면 모든 게 평온하게 흘러갔다.
그런데 그것의 감정이 뭔지는 생각하질 않았었다. 그냥 강세헌이라는 존재 자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에 불과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가랑비가 내리는 걸 보고 비를 맞겠다고 나왔다. 제 옷에 하나둘 스며드는 물방울을 느끼며 제 옷이 푹 젖기를 기다렸다. 강세헌을 향한 마음이 딱 그랬다. 그는 제게 찾아온 가랑비 같았다.
그는 제게 강한 첫인상으로 박혀 온 게 아니라 시나브로 스며들어 왔다. 정리하자면 태서는 강세헌이란 사람이 좋았다. 그의 향이 페로몬이라는 걸 알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강세헌이 좋다는 걸 알아챘을 때 그렇구나, 인식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고백도 쉬울 줄 알았다. 당신을 좋아해요. 우리 사귈까요. 이렇게만 말하면 되니까. 딱 그 정도만 생각했더니 심장이 태서를 비웃는 듯 강하게 쿵쾅거렸다.
“그래서 나 형이랑 연인하고 싶어요. 우리가 공유하는 시간을 데이트라고 하고 싶고 형의 연인이 나라고 떠들고 싶어요.”
태서가 제 소원을 말했다.
“나도 당당하게 애인이 생겼다고 말하고 다닐래요. 그렇게 해도 괜찮은 거라면 제 꽃다발을 받아 주세요.”
강세헌은 제 앞에 들이밀어진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커다랗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부풀어 있는 포장지의 몸집이 컸을 뿐이지 꽃은 한 종류로 송이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
제가 말하고 싶은 마음은 하나라서요. 제 고백을 받아 주세요.
지금 태서는 자신의 심경을 그대로 꽃으로 표현해 왔다.
강세헌은 태서가 내민 꽃다발을 받아 듦과 동시에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제껏 담백하게만 굴어 왔던 강세헌의 눈동자에 욕망이 스며들었다.
“그럼 입 맞춰도 되는 거지.”
태서의 대답보다 강세헌의 움직임이 빨랐다. 태서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그대로 강세헌의 입술이 닿아 왔다.
강세헌이 제 아랫입술을 살며시 빨아 들이고 혀를 내밀어 맛을 보니 태서의 눈이 천천히 감겨 왔다. 방금 하려던 말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지금은 강세헌과 나누는 키스가 우선이었다.
고백에 대한 대답은 제대로 듣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키스를 나눠도 되는 건지. 그런 태서의 생각을 눈치챈 듯 연인이니까, 강세헌이 중얼거림이 맞댄 입술을 통해 흘러들어 왔다.
***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검색해 본 서다래는 좀처럼 제가 원하는 답을 찾지 못해 답답한 표정이었다.
“오메가가 되었는데 어째서 알아채지 못했을까.”
그게 서다래가 답답해하는 이유였다. 서다래 역시 오메가였고 태서가 발현했다면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을 느낄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윤태서에겐 그 어떤 페로몬도 느낄 수 없었다. 일부러 페로몬을 감췄을까? 하지만 보통 발현하고 나면 얼마간은 페로몬의 조절이 능숙하지 않다. 그것을 조절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데 페로몬을 다스리기 미숙한 시기에도 때에도 태서는 줄곧 학교에 잘 나왔다.
“아니야.”
억지로 감춘 것 같지 않았다. 서다래의 감이 그건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었다. 윤태서는 오메가가 되기를 원해 왔다. 그가 자신을 괴롭혔던 건 강인혁과 제 사이를 질투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오메가가 되지 못한 답답함을 서다래에게 풀어낸 것도 있었다.
“대체 그 페로몬을 어떻게 감춘 걸까.”
서다래의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 그 자리를 빙빙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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