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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56화 (56/130)

56화

한미순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서은희가 몰아세우듯 물었다.

“동서, 나한테 말도 없이 자리 마련했더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형님도 참. 중요한 일이니까 직접 말하려고 이렇게 찾아왔죠.”

한미순이 능청스레 웃으며 핸드백을 옆에 내려놨다. 그 짧은 사이에 서은희의 귀에 들어갔지만 한미순은 전혀 놀랄 게 없다는 듯 굴었다. 애초 강세헌과 정해진을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 호텔 카페로 불러들인 게 그 이유였다. 많은 이가 보고 소문을 내 줬으면 하는 것.

“둘이 같이 있는데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몰라요. 역시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니까요.”

한미순이 아까 본 두 사람이 어땠는지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 사이 서은희는 제게 말하기 전에 일부러 벌인 한미순의 행동에 난감한 듯 제 머리를 짚었다. 저번부터 제 아들의 짝을 찾는데 유난스럽게 군다 싶었는데 기어코 일을 벌였다.

“다음엔 이러지 않아도 돼.”

“어머? 형님은 아직도 세헌이가 알아서 구해 올 거라고 믿는 거예요? 기다리려고요?”

도우미가 내 온 커피를 마시던 한미순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녀의 표정만 보면 서은희가 제 아들의 미래에 하등 관심 없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좋은 시간 다 가요. 세헌이가 언제까지 젊겠어요. 하루라도 빨리 짝을 지어 줘야지.”

“하아. 동서, 그러니까 세헌이가 알아서 할거라니까?”

“형님도 참 느긋하시네요.”

한미순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세헌이도… 그리고 인혁이도 그렇지만 미리 정해주는 게 좋아요. 요즘 세상에 형질이 얼마나 무서워요. 알파에게 오메가의 페로몬이이 얼마나 치명적인데. 그걸로 어쭙잖은 오메가가 우리 귀한 애들 건드리면 어쩌려고요. 그냥 남녀로만 나뉘는 세상이면 이런 고민도 안 하죠.”

세상에 페로몬이 그렇게 무섭다며 한미순이 과장되게 어깨를 떨다 갑자기 표정이 바뀌었다.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저야 우리 인혁이 짝으로 정해 둔 아이가 있으니 마음 편하게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 애가 얼마나 싹싹하고 하는 짓이 예쁜지. 그렇게 괜찮은 아이를 미리 찍어 두니까 얼마나 든든한지 형님은 모르죠?”

“인혁이는 좋겠네.”

왜 세헌이에게 소개팅을 시켜 줬냐고 물었다가 흐름이 인혁이로 넘어가 버렸다. 그러나 급할 것 없다는 듯 한미순이 다시 흐름의 방향을 부드럽게 돌렸다.

“그러니까 세헌이는 많이 늦은 거니 이제라도 부지런히 찾아 줘야죠. 그래서 제가 해진이 그 아이를 눈여겨 보고 데려온 거예요. 요즘 세상에 해진이만 한 애가 어디 있겠어요. 배운 것도 많고 침착하고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다니까요?”

그걸 서은희가 아닌 한미순이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전혀 이상할 것 없다는 듯 그녀는 당당하기만 했다. 거기다 정해진이라는 아이의 칭찬까지 덧붙이는 게 머릿속에서는 둘을 벌써 결혼식장까지 밀어넣어 버린 듯했다.

불편한 마음으로 한미순의 말을 듣던 서은희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됐으니 더는 한미순의 말을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세헌이 생각해 주는 마음은 고마워. 그런데 정말 안 해 줘도 돼. 실은 얼마 전에 세헌이 애인 소개받았어.”

“누구요? 세헌이 애인이요?”

한미순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되묻자 서은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건 진짜 어쩔 수 없어서 말한다는 듯 서은희의 표정이 무거웠다. 그녀는 한미순의 눈을 피하려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다는 듯 한미순이 기막힌 듯 짧은 도막 숨을 내뱉었다.

“뭐? 아니, 형님이야말로 왜 그걸 말 안 해 줬어요?”

“나도 그래. 직접 만나서 말하려고 그랬어.”

서은희가 괜히 제 두 손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얼마 전에 태서를 만났고 그때의 이야기를 전한 건 시아버지뿐이었다. 한미순에게는 그냥 불편한 마음에 가만히 있었던 게 지금 후회가 되고 있었다.

“그때도 자기가 알아서 한다더니 어쩜, 있었구나.”

한미순은 말하지 않은 서은희가 야속했지만 그보단 강세헌의 여우짓이 더 얄미웠다. 있으면 있다고 말하면 될 것을 괜히 아무도 없는 척하면서 자기 일은 알아서 한다고 했었다.

“그래서 상대가 누구래요? 괜찮은 아이로 데려왔나요?”

“응, 그때 세헌이가 말한 대로 애가 참 사랑스럽더라.”

서은희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그냥 그때를 떠올리며 나온 미소였지만 한미순은 왠지 그녀가 자랑하는 것 같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요? 그 아이에 대해 더 말해 봐요.”

강세헌에게 정해진을 붙여 주고 인혁이를 위로 밀어 올리려던 계획이 있기에 한미순은 더욱 그 아이가 궁금했다. 태서보다 못한 애로 데려왔어야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태서만 한 배경을 가지지 않아야 하는데.

한미순의 물음에 서은희가 곰곰이 생각했다. 태서가 어땠더라.

“잘생겨서 베타처럼 보였는데 가만히 보고 있으니까 오메가 같기도 해.”

그랬던 거 같다. 문이 열리고 드러난 태서를 봤을 때 큰 키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남자라는 것도 의외였지만 베타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었다. 그런데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태서에게 오메가의 느낌도 받았다. 물론 오메가냐고 물어본 영향이 더 컸지만.

“대학생이라서 세헌이랑 어떻게 만났나 물어보긴 했는데 실은 그거 말고 다른 건 잘 몰라. 세헌이가 워낙 빨리 일어났어야지.”

한미순이 서은희의 표정을 보았다. 잘 모른다고 하는 게 거짓말은 아닌지 보고는 한미순은 한 발 물러났다. 어쨌든 강세헌이 만나는 상대가 있다니 오늘 제가 벌인 일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아쉽지만 이젠 그 아이의 배경을 알아보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 마음에 이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한미순이 멈칫했다.

베타같기도 하고… 대학생이라니….

서은희의 말 몇 가지 걸려 와 한미순의 행동이 주춤거렸다. 그녀는 얼마 전 서은희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갑자기 윤태서를 아느냐고 물어왔었고…… 오메가라고도 말해 줬었는데? 왜 그 생각이 떠올랐을까?

“혹시 그때 세헌이가 소개시켜 줬다는 게 그럼 애인을 말하는 거였어요?”

“맞아. 태서와 사귄다고 했어.”

서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미순이 받은 충격을 모르는지 서은희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인혁이랑 아는 사이라니 동서한테도 미리 말할 걸 그랬어. 참, 인혁이 짝으로 정해 준 아이는 누구야?”

“…….”

한미순이 대답을 삼킨 사이 서은희가 혹시나 하는 눈빛을 보냈다. 아무것도 듣지 못했는데 그녀의 감이 제가 아는 사람인 듯하다.

‘설마 태서를…….’

서은희는 제 생각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

“어떻게…… 아니, 어떻게.”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밖을 나온 한미순이 자리를 서성거리며 끓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흥분해 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진정해 보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얼굴이 더 붉어지고 있었다. 제 마음대로 기분을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다.

서은희로부터 맞다는 말을 들은 순간 한미순은 그 자리에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왜 윤태서를 강세헌이 애인이라고 했냐며 소리치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나왔다.

“다 나를 가지고 논 거야. 다 날 속였어!”

한미순이 분에 차서 핸드백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강세헌을 상대하려고 제 아들과 태서를 붙이려고 했다. 그런데 제 아들은 엄한 애랑 놀아나고 그렇게 품에 끼고 싶었던 태서는 강세헌이 채가 버린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것도 베타가 아닌 오메가로 발현해 버린 그 아이를 눈앞에서 놓쳤다.

“뭐? 사랑스러워? 하, 대체 언제부터 만나고 있었던 거야!”

일전의 모임에서 언급한 게 태서일 테니 그전부터 둘이 만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자신은 정해진을 불러들이고 따로 시간 내서 만나고.

“그 앙큼한 것이.”

강세헌은 분명 태서와 인혁이 사이를 알고 있을 거다.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앙큼하게도 뒤통수를 치고 태서를 데려갔다.

“그 욕심많은 게 태서의 배경도 탐났던 거야.”

KH를 다 가져가려고 한미순에게서 태서를 빼앗아 갔다. 강인혁이 설 자리를 주지 않으려고 머리를 썼다. 그게 참 가당치 않아야 하는데 강세헌 그 무서운 것이 제대로 한미순과 제 가족을 구석으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한미순이 거친 숨을 다스리지 못하고 잠시 제 뜨끈한 이마를 짚고 있다가 윤태서에게 화살을 돌렸다.

원래 제 아이였다. 인혁이와 함께 제 자식처럼 옆구리에 끼고 품었다. 나중에 인혁이와 맺어 줄 요량으로 말이다. 피가 통하지 않았어도 평생 제 아이처럼 소중하게 여겨 주려고 했는데…….

인혁이한테 실망해서 그럴 순 있었다. 인혁이가 잠깐 한눈파는 것처럼 태서 역시 그럴 수 있다고 여기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상대로 강세헌은 아니었다. 그것도 가족한테 인사까지 했다는 건 단순히 만나고 있는 정도가 아니었으니 태서에게도 원망이 향했다.

“나한테 이러면 안 돼. 태서야. 내가 널 그렇게 예뻐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한테 가.”

제 아들을 탐내던 집안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태서가 오메가가 되기를 기다렸기에 더욱 배신감이 컸다.

한미순이 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방금 흥분하고 정신없이 소리쳤지만 그녀는 KH의 둘째 며느리였다. 제 틀어진 모습을 정리하면서 머릿속도 함께 정리했다.

태서를 만나야겠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우리 인혁이와 약혼할 생각이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만약 태서가 거절한다면…….

“인혁이를 위해서 어쩔 수 없어. 우리 가족을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 할 수 있어. 내 아들이 먼저니까 너는 날 원망하지 말아야 해.”

한미순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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