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인데 임신했다-57화 (57/130)

57화

정해진이라는 여자와의 선 자리를 방해해서 제 애인을 지켰다. 그 뿌듯함을 안고 집 앞에서 내린 태서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강인혁이 서 있던 자리를 봐서 그랬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아 밝은 사위는 고요한 가로등 밑까지 샅샅이 드러냈다. 빈자리를 훑던 태서는 집 대문 앞에서 몸을 돌려 계단에 주저앉았다.

집에 들어가라고 데려다준 강세헌은 태서가 이렇게 쪼그려 앉아 있는 줄 모를 것이다. 태서는 불룩 솟아오른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기댔다. 조용한 주택가, 지나다니는 차도 별로 없는 조용한 주위가 태서의 사색을 도와주었다.

태서는 자신을 찾아와서 혼란스러운 얼굴을 보였던 강인혁을 떠올렸다. 그땐 그냥 강인혁이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려 대서 그를 돌려보내는 것만 생각했다. 딱히 강인혁과 마주 보고 차근차근 대화를 나눌 분위기도 아니었고 이상하게 자신을 탓하는 듯해 불편했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강인혁을 떠올리고 있을까.

“왜 세헌이 형과의 관계를 반대하는 걸까.”

원작 소설은 강인혁과 서다래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니까 자신이 강세헌과 어울리는 건 굳이 다룰 이야기는 아니었다. 악역이 사라지는 허전함은 있겠지만. 그런데 굳이 강인혁이 나서서 자신과 강세헌의 사이를 언급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런 것도 소설에 나올까?”

악역과 제 사촌 형 사이를 신경 쓰는 주인공이라니.

“내 죽음은 여전히 예정되어 있을까?”

제 죽음에 대해선 강세헌으로부터 위로와 희망을 얻었다. 그의 말 덕분에 원작에서 제가 죽는다는 결말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털어 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태서 본인조차 짐작할 수 없어졌다. 그냥 강세헌과 자신이 이야기에서 빠지는 게 아닐 거란 느낌이 전부였다.

태서의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건 그것뿐이 아니었다.

“강세헌.”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게 이런 때 답답했다. 왜 그는 지금껏 사랑하는 상대가 없었던 걸까.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으로 쓰지도 못했나? 그런데 왜 제 앞에 나타나서는 한없이 다정하게 구는 거지?

정해진에게 들은 강세헌에 대한 말이 뇌리에 박혀서 떠나질 않았다. 그때처럼 제가 강세헌의 애인이고 자신을 사랑하게 될 사람이라고 간단히 생각하면 되는데. 혼자 있으니 생각이 불똥처럼 이리저리 튀었다.

어쩌면 그의 마음을 듣지 못해서 그런 걸까? 그럼 난?

태서가 턱을 괴던 손을 빼 무릎 위에 올렸다. 그러곤 팔을 겹쳐 제 얼굴을 묻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자는 생각에 잠겨 눈을 가물거리고 있자 크로스백에 넣어 둔 핸드폰이 울렸다.

[왜 아직 밖이야?]

“와, 귀신이네. 아니면 여기 달린 CCTV를 형이 보고 있나?”

태서가 핸드폰을 귀에 댄 그대로 대문에 달린 CCTV를 봤다. 진짜로 강세헌이 보고 있다면? 나름 반가움의 표시로 손을 흔들어 줬다.

[부끄러우니까 손은 내릴까?]

정말로 제 모습을 보고 있는 듯한 말에 태서가 멋쩍게 손을 말아 쥐고 내렸다. 진짜 뭐야.

“어디서 나 보고 있어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

“그만큼 내 생각도 많이 하고요?”

태서가 제 무릎을 감싸 쥐었다. 강세헌의 목소리를 들고 있으니 아까의 불안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너는?]

그러다 강세헌의 질문이 꽂혀 오자 태서의 생각이 뚝 멈춰 버렸다. 그에게 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한 질문이었는데 반대로 걸려들어서 당황해 버렸다.

“형 생각…해요.”

솔직히 인정하자 다시 마음이 차분해져 왔다. 방금도 강세헌을 생각하던 중이었다.

[말해 봐.]

태서가 핸드폰을 들고 이리저리 자세를 잡아보다가 괜찮은 자세를 찾았다. 제 무릎에 핸드폰을 올리고 그 상태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기댔다.

“생각해 보면 형은 참 담백했어요.”

태서는 생각나는 그대로 말했다.

“제가 히트 사이클을 겪었던 다음 날이요. 갑자기 히트 사이클이 온 오메가한테 엮일까 봐 참 담백하게 굴었어요.”

[나한테 히트 사이클을 핑계로 들이대는 애가 한두 명이 아니었거든. 평일 주말 할 거 없이 나타나는데 내 주변에는 왜 이렇게 히트 사이클이 많이 도는 걸까 싶었지.]

“페로몬이 강해지잖아요. 그거로 형을 꼬시고 싶었던 거죠.”

[그래, 그래서 더 힘들었어.

강세헌의 나긋한 목소리에 태서가 눈을 가물거리며 귀를 기울였다.

[각자 다른 페로몬을 가지고 사는데 그중에 내 마음에 드는 건 하나도 없었거든. 그래도 적당히 향수를 뿌렸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히트 사이클에 들어선 오메가의 페로몬은 내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게 아니라 더 바짝 차리게 만들더라. 너무 독해.]

“그럼 나는?”

지금껏 왜 안 물어봤지? 제 페로몬을 맡은 유일한 사람인데. 태서가 제 손목을 가까이 붙여 냄새를 맡아 보았지만 페로몬이라는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히트 사이클이 온 나를 이상하게 봤다는 건 알겠는데 그럼 내 페로몬도 그렇게 독했을까?

[네 페로몬은…….]

왠지 시험 보고 나서 몇 점 받았는지 듣는 기분이었다. 떨리고 기대되는.

[어디서 굴러들어 온 걸까, 싶었지.]

“…그게 뭔데요.”

시험 점수를 물었더니 몇 점 받았는지 대신 그럭저럭 잘 봤어. 고생했네. 라고 답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냥 지나칠 수 없이 달콤하고도 향긋한 페로몬이었어. 그래, 네가 내 앞에 나타난 게 아니라 내가 네 앞에 나타난 건지도 몰라. 멀리서부터 좋은 냄새가 나서 그 길을 따라 걷다가 널 발견한 거거든.]

“좋다는 거네.”

태서가 간단히 정리해 줬다. 제가 백 점 받았다는 걸 알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내가 처음인 걸로 할게요.”

멀리서 차가 들어오는 소리에 태서가 핸드폰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던 강세헌이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상대가 나인 거로 할게요.”

그렇게 해야 아까의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질 것만 같았다.

[태서야.]

태서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자신의 부모님이 차에서 내리는 걸 보자 태서가 손을 흔들었다.

[‘너인 걸로 할게’가 아니라 네가 처음이야.]

부모님과 눈을 마주치며 웃던 태서가 순간 제 모든 게 멈춰진 듯 굳어 버렸다.

[네가 처음이야.]

강세헌이 다시 반복하는 한마디에 태서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

“누가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나 했더니…. 그게 내 자식일 줄이야. 비밀번호는 잊어버렸니?”

“그냥 날씨가 좋아서 그랬어요.”

태서가 멋쩍은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딱 한 번 그랬을 뿐인데 어떻게 부모님에게 들킬 수 있는지. 태서가 제 앞에 내어진 시원한 음료를 들이켰다. 맛도 좋고 입 안이 시원해져 입도 떼지 않고 끝까지 마셨다.

오늘 더운 날씨에 밖에 앉아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누구의 고백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다. 아무 이유 없이 음료수가 달고 맛있어서 그럴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오늘 네게 할 말이 있었어.”

김미경이 조심스럽게 건네 오는 말에 태서가 빈 잔을 내려놨다.

“병원에 가기 전에 말한다는 게 늦을 뻔했지 뭐니.”

김미경이 윤석훈을 바라보니 그가 나직한 헛기침을 했다. 그러더니 등 뒤에 숨겨 놨던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김미경 역시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었다. 갑자기 무슨 일들인가 싶어 태서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임신 축하해.”

김미경은 꽃다발을, 윤석훈은 카드를 내밀었다. 태서가 그것들을 바라보고만 있으니 윤석훈이 아까보다 더 큰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축하한다.”

태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자기도 모르는 새 생긴 아기였다. 그래서 그냥 놀라기만 했는데 이렇게 축하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다.

“새로운 생명이 우리를 찾아온 거야. 네게 축복이 될 거고 새로운 행복을 줄 거야. 놀라서 이제야 말한 건 미안해.”

김미경의 말을 들으며 태서는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축하, 축복, 행복.

꽃다발에 손을 얹은 태서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다가 그냥 웃고 말았다. 부모님의 사랑에 고맙고 지금껏 아기를 축복이라 생각해 본 적 없던 게 미안해서.

“세헌 씨와 결혼할 거니?”

“…네. 그 형이 받아 준다면요.”

태서가 꽃다발을 끌어안고 카드를 살펴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준 다면?”

“고백은 했는데 청혼은 아직 안 했어요.”

이번엔 김미경과 윤석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기가 생겼고 집에 인사까지 왔는데 어째서 결혼은 미정인 걸까. 거기다 강세헌이 받아 줘야 하는 거라니.

“한 번에 두 가지를 다 하면 그중 하나는 기억에 안 남을까 봐 아껴 뒀어요. 그래서 할 거예요.”

“꼭 누가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세헌 씨가 네게 청혼할 수도 있는 건?”

“그러면 청혼을 받고 저도 해야죠.”

“처음부터 받을 생각이 아닌 줄 생각이구나.”

태서가 카드 뒷면에 적힌 이름을 보더니 소리 내어 웃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게 더 좋으니까요.”

‘우리 손주가 쓸 용돈’이라고 적힌 말이 너무도 좋아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강세헌의 마음이 어떤지 몰라 흔들렸던 그 모든 혼란이 가라앉았다. 자신은 처음부터 강세헌의 마음을 바란 게 아니었다. 제가 주고 싶은 만큼 주면 되는데.

꽃다발과 카드를 들고 방으로 돌아온 태서가 그것을 책상 위에 나란히 놓았다. 사진을 찍어 강세헌에게 보여 주려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막 그것을 가로로 든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강세헌이 집에 들어가서 전화하는 걸까 싶어 아예 영상 통화를 할까 싶던 태서가 의아한 눈빛을 띠었다.

“서다래?”

강세헌이 아닌 의외의 인물에게 연락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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