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인데 임신했다-63화 (63/130)

63화

“뭐 필요한 건 없어?”

“없어요.”

태서가 고개를 저었다. 걷는 게 힘든 것도 아니고 부족한 건 누군가 다 채워 주고 갔다. 그러자 김미경이 태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운 물음을 던졌다.

“병실에만 있는데 답답하지 않아? 아니면 의사한테 가서 퇴원해도 좋을지 물어볼까?”

“그것도 괜찮아요.”

태서가 병실을 둘러보더니 더욱 크게 고개를 내저었다. 병실이 넓어서 답답함을 느낄 새도 없을 것 같았다. 태서의 생각을 알아챘는지 김미경도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미소를 보였다.

“그럼 다 괜찮아?”

“네, 그러니까 어서 가세요. 차 막히겠어요.”

출근하기 전에 들른 김미경의 팔을 밀어 내며 어서 가라고 등 떠밀었다. 그러자 김미경은 태서에게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도 올 테니까 편히 쉬고 있어.”

김미경이 태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서가 그녀를 따라 일어서 옆에 둔 핸드백을 건네줬다. 그러자 막 비서에게 연락하려던 김미경이 그것을 보고 웃으며 받아 들었다.

“저 이제 아무렇지 않으니까 내일부터는 안 오셔도 돼요.”

“하지만 아들이 병원에 있는데 어떻게 안 오겠어. 종일 붙어 있어도 부족한데…….”

늘 바쁘다는 핑계로 평소 자주 보지 못했는데 아픈 아들 옆에 있어 주지도 못했다. 그게 마음에 남아 김미경이 쉽게 걸음을 옮기지 못하니 태서가 그녀를 바라보다 손을 잡았다.

“아기 태명 정했어요. 축복이라고요.”

“예쁜 태명이네.”

“네, 뭐, 잘못했다가 ‘과일고기밥’이 될 뻔했지만요.”

“음?”

태서가 코끝을 찡그렸다.

“제가 잘 먹는 걸 태명으로 할 뻔했다니까요? 다 잘 먹어도 문제예요.”

“어머나?”

“세헌이 형이 해 주는 밥이 맛있어서 그런 것뿐인데 말이죠.”

“밥을 해 줘?”

김미경이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물으니 태서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 요리 진짜 잘해요. 형 집에 있을 때도 매일 밥해 줬어요.”

“일도 바쁜데 그런 능력이 있었어?”

“엄청 맛있어요. 아무튼 축복이라 안 하고 과일고기밥아, 라고 부를 뻔했어요.”

“재밌네.”

둘의 이야기를 재밌게 듣는 김미경의 반응에 신나게 떠들던 태서가 아차 싶었다. 지금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보내려고 한 건데 자기도 모르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다음에 또 말할게요. 어서 가세요.”

“꼭 말해 줘야 해.”

김미경은 태서와 맞잡은 손을 한번 힘줘서 잡아 주고는 나갔다.

혼자가 된 태서가 가볍게 몸을 풀며 돌아섰다. 이제 찾아올 이도 없고 잠깐 잠이나 자 볼까?

“여기 윤태서 이름 있네.”

막 침대에 한 발을 올리던 태서가 움찔하며 뒤를 돌아봤다.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노크 소리가 울렸다.

“똑똑.”

…입으로도 노크 소리를 내는 저 인간을 들여 말어.

“쟤를 친구로 둔 내 탓이지.”

태서는 잠깐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올렸던 다리를 내렸다. 터덜터덜 걸어가 문을 열자 한 번 더 노크할 예정이었던 박한수가 그 자세 그대로 눈만 동그랗게 떴다.

“걸어 다니네?”

직접 문을 열어 준 것에 대한 응답이 저거다. 태서가 도로 문을 닫으려 손에 힘을 준 순간 박한수가 발을 들이밀었다.

“병문안 온 친구한테 이렇게 야박하게 굴기야? 나는 네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날아왔는데.”

“나 병원에 있다는 게 찾아오라는 의미는 아니었어.”

“하나뿐인 친구인 내가 안 오면 누가 와.”

박한수가 한마디도 지지 않고 쏘아 댔다. 여기서 지면 병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아는 모양이었다.

태서가 그를 흘겨보더니 문에서 손을 뗐다. 괜한 실랑이로 진 빼지 말고 침대에 눕는 게 이득이었다.

“이게 뭐야, 병실이 이렇게 화려해도 돼?”

박한수가 안을 둘러보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부모님께서 여기 잡아 주신 거야? 아니면 세헌이 형? 누가 됐든 부럽다.”

“둘 다 아니야.”

침대에 올라간 태서가 이리 오라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잠결에 울리는 전화를 받지만 않았어도 박한수에게 제가 병원에 있다는 걸 말 안 했을 텐데.

그냥 존재만으로 부산스러운 박한수가 들어오니 넓은 병실이 언제 조용했냐는 듯 소란스러워졌다.

“이게 그 특실이구나. 나 처음 와 봐.”

“나도.”

“응? 너희 집 부잔데 이런 데를 처음 와 본다고?”

태서가 그것도 모르냐는 듯 혀를 찼다.

“신체 건강한 내가 병원에 올 만한 일이 뭐가 있어.”

“아, 그렇지.”

박한수가 제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왔다. 그러다가 코를 킁킁거리는 게 이 병실의 특이한 점을 또 하나 알아본 모양이었다.

“꽃 냄새가 장난 아니게 난다 싶더니 여기 무슨 꽃이 이렇게 많냐? 나는 무슨 꽃집 온 줄 알았잖아.”

박한수가 제 양손에 든 걸 차례로 바라봤다. 비타민 음료 한 박스와 꽃다발. 그런데 제 꽃은 아무래도 이 병실에서 눈에 띄지 못할 성싶다.

“이 특실을 잡아 준 분이 사 줬지.”

태서가 한숨을 내쉬며 양반다리 위에 제 팔을 올렸다. 어제 퇴원해도 좋다고 했는데 일주일이 연장되어 버리며 하루아침에 병실까지 바뀌었다.

1인실도 충분히 넓고 좋았는데 그것을 넘어서 특실로 오니 황당할 지경인데 취소도 할 수 없었다.

“누가 잡아 줬는데?”

“회장님.”

“회장? 어떤…….”

“KH그룹 회장님.”

제 입원을 연장한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 태서는 모든 걸 받아들였다.

박한수가 제 귀를 후비며 태서를 보았다. 제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냐는 눈빛에 태서가 혀를 찼다.

“네 친구가 많이 잘나서 그런 거니까 그만 놀래라.”

“그렇지. 내 친구가 만나는 사람도 KH니까.”

“……내가 거기까지 말해 줬었나?”

강세헌이랑 만나냐는 박한수의 물음에 대답을 대충 흘린 거 같은데 어떻게 알았을까.

“남들이야 긴가민가하지만 나는 알지.”

“어떻게?”

“그냥 감으로.”

태서가 박한수를 흘겨보다 고개를 돌렸다. 감이 좋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실은 원작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서다래가 입원했을 때 갑자기 병실이 옮겨지더니 얼마 있다 회장이 찾아왔었다. 자신이 서다래는 아니지만 직접 병실을 옮겨 줬으니 이제 회장이 올 차례였다.

“그런데 너 왜 입원한 거냐. 전화로 물어도 말 안 해 주고.”

“쓰러졌어.”

“혹시 영양 실조같은 그런 거?”

“아니. 페로몬 때문에…….”

“맞다. 너 오메가였지. 자꾸 까먹는다.”

페로몬 때문에 쓰러진다는 게 와닿지 않았던 박한수가 태서의 형질을 중얼거렸다. 늘 봐 왔던 얼굴이 형질이 바뀐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박한수는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니 더욱 그랬다. 더불어 태서는 서다래처럼 부드럽고 가는 선을 가진 게 아니었다.

그냥 잘생긴 친구지 뭐.

“지금은 괜찮고?”

“퇴원해도 될 정도.”

이건 박한수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회장님이 잡아 준 특실인데 나가겠다고 못 할 것이다.

“네가 그래도 세헌이 형을 많이 사랑하나 보다.”

“그건 맞는데 뭘 보고?”

“이렇게 회장님 말에 고분고분 따르잖아. 퇴원해도 된다는데 여기 있는 이유가 뭐겠어.”

“음… 그것 때문이라면 아니긴 한데.”

태서가 사방에 놓인 꽃을 보았다.

“그럼?”

“오실 거 같아서.”

“설마 회장님 말하는 거야?”

“응. 그래서 기다리는 거야.”

이미 핸드폰으로 회장님의 사진까지 검색해 봤다. 어디선가 본 거 같기도 하고 괜히 친근한 기분이었다. 일단 얼굴도 익혀 놓고 병문안을 온다면 바로 알아볼 수 있게 준비해 두었다.

“앉아서 별생각을 다 했구나.”

박한수가 슬쩍 제가 가져온 비타민 음료를 하나 꺼내 마시며 엉덩이를 내렸다. 병문안을 와서 태서가 괜찮은지 확인했는데 바로 갈 생각은 없는 듯했다.

태서도 박한수가 바로 갈 거라 여기지 않았다. 휴학하는 것도 왜 말 안 했냐면서 만나자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놈이라 그냥 포기했다는 게 맞았다.

대신 태서는 침대에 등을 기대며 심각한 듯 눈썹을 찡그렸다.

“있잖아.”

지금껏 자신을 찾아온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복잡한 속내를 털어놓을 상대가 나타났다.

“내가 쓰러졌다고 했잖아. 그게 페로몬 때문인데…….”

태서는 박한수가 얼마나 이해하든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말만 이어 갔다.

“내가 오메가라서 쓰러졌단 말이야. 그럼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오메가는 영향을 안 받을까?”

“너는 발현한 지 얼마 안 됐잖아. 그러니까 이제 막 오메가가 된 사람만 영향을 받은 건 아닐까? 아니면 너만 어설퍼서 못 피한 건가? 다른 오메가도 영향을 받았는데 그게 나중에 나타났다거나?”

박한수가 이렇게 저렇게 던져 보는 말을 듣던 태서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어설퍼서 그걸 조절 못 한 거고 그 오메가는 참고 있다가 나중에 나타났다면?”

***

도어 록이 해제되는 소리에 강인혁이 고개를 들었다. 안으로 들어오던 서다래가 강인혁의 시선을 알아채고 고개를 들었다.

“어디 다녀와?”

“……집에.”

서다래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강인혁을 지나쳤다. 지금 강인혁과 마주한 채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서다래를 그냥 놔주지 않았다.

“무슨…….”

강인혁은 지나치는 서다래의 팔을 잡는 것도 모자라 손목을 제 코끝에 댔다.

달콤한 꽃 향이 짙다. 평소 서다래의 페로몬을 생각해 봐도 꽤 진하게 다가왔다. 특히나 일부러 페로몬을 풍기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럴 경우는 하나였다.

“히트 왔었어?”

강인혁의 물음에 서다래가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탓에 그의 목덜미에서 은은한 페로몬이 느껴졌다. 스스로 조절한대도 아예 감추지 못할 때는 히트 사이클과 관련이 있었다.

“…어.”

“그런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히트가 와서 집에 갔던 거야?”

“약이 집에 있어서.”

서다래가 강인혁에게 잡힌 손목을 빼냈다. 제 손목을 어루만지는 서다래는 여전히 강인혁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다. 일전에 태서의 일로 서로 부딪힌 이후로 서다래는 줄곧 강인혁을 보지 않았다.

결국 강인혁이 서다래에게 먼저 다가갔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서다래를 붙잡고자 아무 말이나 꺼냈다.

“그런데 원래 주기보다 일찍 왔네.”

“……그러네.”

서다래가 미소를 지었다가 스스로 생각해도 어색하다는 걸 알고 손을 들어 막았다.

“이렇게 빙빙 돌려 봐야 시간만 버리지. 태서 일로 할 말이 있어. 그날 태서가…….”

“그만.”

“다래야.”

“윤태서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그만해.”

서다래가 강인혁에게 완전히 돌아섰다. 그에게 등을 보인 서다래는 더는 제 표정을 감출 필요가 없어 손을 내렸다.

“이제 나한테 윤태서는 그만 언급했으면 좋겠어.”

“다래야. 그때 태서가 병원에 갔었는데…….”

“알아. 너 병원에 다녀왔다며. 그다음은 말할 필요 없어.”

서다래가 강하게 강인혁의 말을 밀어 냈다. 자신은 이제 윤태서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쓰러졌고 병원에 실려 가서 검사받고 있다는…… 그런 건 그날 강인혁을 통해 충분히 들었다. 이제…… 그만 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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