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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71화 (71/130)

71화

“상견례요?”

한미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서은희가 그녀를 팔을 잡아 도로 앉혔다.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 봐.”

“아니, 아버님께서 직접 가신 게 무슨 상견례라고…….”

한미순이 기가 막힌 듯 중얼거리는 소리에 서은희는 난처한 눈빛을 드러냈다. 아까 아들과 전화하는 걸 들은 한미순이 무슨 이야기인지 물으며 말하기 전까진 일어나지 않겠다고 해 어쩔 수 없었다.

“형님은 어떻게 나한테 말을 안 할 수 있어요. 그 아이 내가 인혁이 짝으로 생각해 둔 애라고 말했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동서 혼자 정해 둔 거니까. 그리고 내가 할 말이 있다고 만나자고 하니까 바쁘다고 했잖아.”

“형님.”

만나지 않아서라니, 궁색한 변명에 한미순이 큰소리를 냈다. 그러자 서은희가 두 손을 들며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다.

“알았어, 알았어. 솔직히 말할게. 아버님이 괜히 일 키우지 말라고 하셨어.”

“아버님……이요?”

“그래. 아버님이 아니면 왜 동서한테 미리 말을 안 했겠어. 동서가 태서를 어떻게 여겼는지 알면서도 나라고 조용히 있는 게 마음이 편했을까.”

서은희는 이렇게 된 거 다 털어놓겠다는 듯 숨을 푹 내쉬었다.

“동서가 아는지 모르지만 태서가 아파서 입원했었어. 그때 아버님이 직접 병문안을 다녀오시더니 태서한테 부담 주지 말라고 하시더라고…….”

서은희의 목소리가 잦아들었고 결국 조용해진 와중에 한미순의 거친 숨소리만 남았다.

“어차피 태서는 우리 세헌이랑 결혼할 마음을 굳힌 거 같은데 동서도 그만 놔주면 안 될까?”

“형님!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내가 태서를 봐 온 시간이 얼만 줄 알아요?”

“알아. 아는데 이제 우리 세헌이랑 결혼할 거잖아.”

“우리 세헌이, 우리 세헌이. 형님 지금 저 열받으라고 그래요?”

한미순은 서은희의 말 중간중간 끼어들어 있는 ‘우리 세헌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래요, 형님에겐 아들 세헌이가 우선이죠. 그런데 나도 내 아들이 먼저예요.”

한미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엔 제게 잡혀 줄 것 같지 않아 서은희는 바라만 보았다.

“동서, 인혁이한테 미안하지만 사람 인연이라는 게 그렇잖아. 결국 세헌이랑 이어질 운명이었다 생각해.”

“아니요. 저는 절대 용납 못 해요.”

한미순이 돌아서서 서은희의 사무실을 나왔다. 신경질적으로 걸어가는 그녀는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꼭 쥐었다.

“이렇게 두고 보기만 할 순 없지.”

아니, 자신을 우습게 보는 게 싫어서라도 절대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한미순은 핸드백을 뒤적여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몇 번 두들기더니 그대로 귀에 댔다.

“지금 회장님 어디로 갔죠?”

강학중 회장의 자취를 쫓는 한미순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

태서가 제 앞에 있는 물을 마시며 숨을 돌렸다. 처음엔 부모님들을 기다리며 긴장해서 목이 말랐었는데 지금은 말을 많이 해서 목이 말랐다. 강학중 회장이 나타났을 때 놀랐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 자리가 편하게 다가왔다.

“또 물잔이 비었다. 음식이 짰니?”

“아니요. 하나도 짜지 않고 맛있었어요.”

태서가 그런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젓는 동안 강세헌이 빈 잔을 채워 줬다. 태서가 제 잔을 보더니 눈을 들어 강학중 회장과 강세헌을 차례로 훑어봤다.

강학중 회장은 태서의 빈 잔을 알아챘고 강세헌은 빈 잔을 채워 줬다. 부모님이 태서를 챙길 틈도 없이 조손이 챙겨 주니 태서의 입가엔 줄곧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다행이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상견례가 아주 유쾌하게 마무리될 것 같았다. 태서가 몇 번 분위기를 띄우기도 했지만, 강세헌을 비롯한 모두가 이 자리를 즐겁게 받아들였다. 딱 이대로만 있다가 헤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저도 이 자리에 껴도 될까요?”

문이 활짝 열리며 들어온 한미순을 본 태서가 놀라 숨을 들이켰다.

“아, 안녕하세요.”

태서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니 한미순이 반갑게 받아쳤다.

“네가 여기 있다는 거 듣고 왔어.”

“아…….”

“어떤 자리인진 못 들었나 봅니다. 작은 어머님.”

태서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목소리만 흘리고 있으니 강세헌이 나섰다. 이곳에 올 자격이 없다는 듯 굴었지만, 한미순은 외려 더 안쪽으로 들어왔다.

태서와 가까운 쪽의 의자를 꺼내 앉은 한미순이 강학중 회장을 비롯해 윤석훈과 김미경에게도 차례로 눈을 마주쳐 인사했다. 너무도 무례한 그녀의 행동에 강학중 회장의 얼굴이 붉어졌고 김미경은 얼굴을 굳혔다.

자신이 불청객인 것을 알면서도 한미순은 뻔뻔하게 자리를 지켰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한미순은 태서를 향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태서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제 잔만 매만졌다. 갑자기 찾아온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왜? 내가 와서 많이 놀랐니?”

“솔직히 말하면…… 네.”

“나도 이렇게 찾아오고 싶진 않았어. 그런데 어쩌니. 네가 오질 않으니 내가 오는 수밖에.”

한미순은 태연히 자리한 것도 모자라 아예 직원을 불러 제 잔을 달라고 하니 바로 일어날 기세가 아니었다. 주변의 분위기가 어떤지 살펴보던 한미순은 도로 태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태서 네가 인혁이와 잘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구나.”

한미순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숨길 수 없는 가시를 세운 채 태서를 보고 있었다. 태서는 방금까지 계속 물을 마셨음에도 목이 마르는 걸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인혁이랑은 친구죠.”

“친구라기엔 네가 우리 인혁이를 많이 좋아했지. 그렇지 않니?”

“한때는 좋아했는데…….”

태서가 난감한 듯 말을 끝맺지 못했다. 소설 속 윤태서는 강인혁을 좋아했고 그의 애정을 바라던 인물이었다. 태서 또한 그것을 알지만…… 지금 자신은 강인혁을 좋아하지 않는데 한미순의 말이 교묘하게 과거를 꺼내 오고 있었다.

“첫사랑이죠.”

태서가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강세헌이 대신 대답했다.

“한때라면 첫사랑 아닙니까. 아니면 짝사랑인가.”

“……둘 다 맞는 거 같아요.”

태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일단 부정하지 않았지만 이 자리에서 꺼내기엔 불편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 단어를 꺼낸 강세헌은 담담히 굴었다.

“다 지나간 감정일 뿐이죠.”

“그건 세헌이 네가 할 말은 아닌 거 같다. 지나갔는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아니. 혹시 그걸 바라는 건 아니고?”

한미순의 빈정거리는 말에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았다. 강학중 회장이 불편한 헛기침을 하는데도 한미순은 강세헌을 향한 원망의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누구 한 사람이 화를 낼 것만 같아 보다 못한 김미경이 나섰다.

“미순아, 그런 건 따로 말하는 게 좋겠어.”

“그럴 필요가 뭐가 있어. 인혁이가 남도 아니고 아버님에겐 다 같은 손주니까 말해 주는 게 좋을 거 같아서 그러지.”

한미순이 강학중 회장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래서 태서를 우리 인혁이와 결혼시키려고 했는데 세헌이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버님?”

“나는 세헌이가 더 잘 어울린다고 본다.”

“이 자리에 세헌이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요?”

한미순은 아예 칼을 갈고 나온 듯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물러날 수 없었다. 이제껏 형님네가 KH의 중심에 선 게 늘 불만이었다. 언젠가 보란 듯이 상황을 뒤집고 싶었다. 그래서 태서를 인혁이와 맺어 주려고 한 건데 이대로 가다간 강세헌의 등에 날개를 달아 주게 생겼다.

“지금이라도 저는 태서를 세헌이가 아니라 인혁이와 붙여 주고 싶어요. 이게 무슨 추태냐 싶지만 어쩌겠어요. 제 것을 지키려면 이렇게 나올 수밖에요.”

한미순이 무표정을 가장한 채로 말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온통 불만에 차 있었다.

“세헌이야 잠깐 지나가는 인연이지만 인혁이랑은 아니죠. 태서 너도 잘 알지 않니. 네가 인혁이를 좋아했던 시간이 훨씬 더 길고 깊어.”

한미순은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는 듯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다시 생각해 봐. 혹시 인혁이가 널 봐 주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거라면 내가 나설 거야. 인혁이도 네가 좋다고 했어.”

“정말이요?”

기쁜 마음에 되묻는 게 아니었다. 강인혁이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태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인혁은 서다래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였다. 하지만 의아한 듯 구는 태도를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 한미순이 달갑게 말했다.

“당연하지. 너랑 결혼할 생각 있어.”

한미순은 태서의 마음을 돌리려 살살 그를 흔들었다. 강세헌과 만나 봐야 얼마나 오래 만났을까. 인혁이가 강세헌에게 비하면 아직 부족한 게 많지만 그건 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다.

“지금이라도 인혁이 연락해서 오라고 할까?”

한미순이 핸드폰을 꺼내자 태서의 당황한 손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강학중 회장이 나타났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이 당황스러운 일의 연속이었다.

태서를 대신해 강세헌이 나섰다.

“죄송하지만 그건 어렵겠습니다. 보다시피 이 자리는 태서와 제 결혼 이야기를 나누는 곳입니다. 작은 어머님의 실례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래, 네 억울한 마음도 알겠다만 태서가 택한 건 저 아이다.”

강학중 회장까지 나서서 한미순을 말렸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라. 내 너에게는 따로 연락할 테니…….”

“아버님. 태서는 우리 인혁이의 오메가라고요.”

“그만!”

강학중 회장의 강한 일갈에도 한미순은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작은 어머님. 그만 하세요. 우리 태서 놀랍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강세헌이 태서의 어깨를 짚었다. 태서가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만했으면 하는 마음에 간절한 눈빛으로 한미순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한미순은 절대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이제는 그냥 이 자리를 파해야 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는 걸까 싶었다. 좋은 분위기로 마무리가 되었으면 했는데……. 그런 태서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강세헌이 한 마디 덧붙였다.

“배 속의 아기에게도 좋지 않고요.”

강세헌이 태서가 임신 중인 걸 밝히자 한미순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 분위기를 읽은 태서가 슬그머니 강세헌에게 기대며 제 배를 어루만졌다.

“축복이라고 해요.”

강세헌과 맺어진 사랑의 결실…… 뭐 그런 거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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