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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72화 (72/130)

72화

태서가 임신했다는 걸 밝힌 순간 한미순의 표정에 여러 감정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거짓말인가 하는 의심이 떠올랐다가 누구도 부정하지 않으니 당황했고 이내 경악에 가까운 얼굴로 소리쳤다.

“말도 안 돼!”

강세헌은 한미순을 말려도 안 된다고 여겼는지 태서의 귀를 막아 줬다. 덕분에 소음에서 벗어난 태서의 얼굴이 편안해졌지만, 소란은 여전했다.

“임신이라니 누구 마음대로?”

“미순아! 이제 그만해.”

보다 못한 김미경이 큰소리를 내며 한미순을 말렸다.

“이게 그만하게 생겼어? 그래, 언니는 당연히 그만두라고 하겠지.”

한미순이 기가 찬 듯 토막 숨을 내쉬며 모두를 노려보았다. 마치 자신을 배신한 자들을 보듯 그녀의 눈빛이 매서웠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우리 인혁이를 좋아한다고 그래 놓고 나중에 뒤통수를 칠 작정이었다고.”

그게 아니라 강인혁은 원래 서다래한테 빠져서 윤태서를 돌아보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믿을 리도 없고. 태서만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두들겼다. 잠시 태서를 돌아본 강학중 회장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비서에게 눈짓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끌고 나가.”

“뭐? 아니요. 전 지금 말해야겠어요. 어?”

한미순이 절대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와중에 그녀의 양팔이 하나씩 비서에게 잡혔다.

“나오십시오.”

“이거 놔!”

한미순은 끌려 나가지 않으려 발에 힘을 주었지만, 그녀의 구두만 벗겨질 뿐 버텨 내질 못했다. 한미순이 나가자마자 직원이 곧장 문을 닫았다.

비서가 한미순을 데리고 나가며 얼추 상황이 정리되었다. 아까의 화목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서로 눈치를 보며 애꿎은 물잔만 괴롭혀 댔다. 먼저 입을 연 건 강학중 회장이었다.

“미안합니다.”

강학중 회장의 사과에 윤석훈이 괜찮다고 받아치는 것도 모자라 김미경까지 나섰다.

“아니에요. 미순이랑은…… 아,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서요. 결혼하기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동생이었어요.”

김미경이 한미순을 친근하게 불렀다가 뒤늦게 변명처럼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가 자주 만나니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잘 어울렸어요. 태서가 오메가가 되면 결혼시키자고 했었는데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제가 더 죄송하죠.”

한미순이 억울해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경우 없이 들이닥칠 건 예상 못 했다. 어색하게 굳어 버린 상황 속에서 태서는 자꾸만 한숨이 치밀어 올랐다.

제가 어떻게 만들어 놓은 자린데.

할아버지에게 예쁨받으려 평소보다 더 밝게 웃고 자기 괜찮지 않냐며 남이 보면 민망할 짓도 꾹 참고 했다. 그것뿐일까. 강세헌이 나설 땐 당황했지만 나름 나쁘지 않다 싶었다.

이왕이면 할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싶었고 사돈이 될 테니 좋은 관계가 됐으면 했다. 그런데 한미순이 들어오면서 좋았던 분위기가 다 깨졌다.

이대로 포기하면 좋으련만.

한미순이 자신을 원하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다래를 야멸차게 밀어 냈고 강인혁과 대립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것뿐이면 말을 안 해.’

원작에서 제가 서다래를 위험에 빠트린 것처럼 한미순 역시 강인혁을 위해 해서는 안 될 일까지 저질렀다. 다행히 강인혁이 서다래를 지키고 둘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어서야 반성했지만, 그전까지는 지금과 다름없었다.

태서가 복잡한 마음에 제 관자놀이를 누르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제껏 잠자코 죽여 놓았던 핸드폰을 꺼낸 태서가 제게 달라붙는 시선에 강세헌을 돌아봤다.

“전화 좀 하고 올게요.”

강세헌의 다녀오라는 눈빛을 뒤로하고 태서가 밖으로 나왔다. 핸드폰을 들고 머뭇거리기도 잠시 태서는 하나의 연락처를 찾았다.

“이건 인혁이랑 정리해야 끝날 일이야.”

한미순을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은 강인혁뿐이었다. 몇 번의 연결음 끝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상대의 기척이 들리자마자 태서가 입을 뗐다.

“나야.”

[……네가 무슨 일이야?]

강인혁의 낮은 목소리엔 놀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목을 가다듬는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태서는 흥분에 차 듣지 못했다.

“오늘 나한테 아주 중요한 날이었거든?”

전화하자마자 다짜고짜 오늘 중요한 날이라고 하니 강인혁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숨소리만 내뱉었다. 그걸 알지만 태서는 제 할 말만 했다.

“그런데 너희 어머니가 찾아와서…….”

차마 다 망쳤다고 말할 수 없었던 태서가 답답한 마음에 제 가슴을 통통 쳤다.

“만나. 만나서 얘기해.”

[만나자고?]

“그래. 만나야 해.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어.”

절대 강인혁에게 매달리지 않겠다 했건만 어쩔 수 없었다.

통화를 끝내고 돌아온 태서는 다들 일어설 준비가 다 된 걸 알아챘다. 차라리 어색한 분위기를 더 유지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강세헌에게 다가갔다.

“바로 집으로 갈 거야?”

“아니요. 갈 데가 생겨서요.”

그게 강인혁을 만나러 가는 거라는 걸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태서가 더 말하기 꺼려 하는 걸 눈치챈 강세헌이 그를 달래려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나도 볼일이 있으니 우리 집에서 보자.”

무슨 볼일인지 생략한 강세헌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결제하겠습니다.”

카드를 받아 결제를 마치고 내민 서다래가 손님을 향해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손님이 옆으로 커피를 받으러 가자 서다래의 얼굴에 잠깐 미소가 사라졌다. 시간을 확인한 서다래는 홀을 나와 스태프 룸으로 들어갔다. 제 사물함을 열어 앞치마를 벗던 서다래의 손길이 부지런히 움직이다 점점 느려졌다. 앞치마를 끌어 내리고 그것을 옷걸이에 걸고 셔츠의 단추를 잡았을 때 서다래의 손이 멈췄다.

“하아.”

서다래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사물함에 등을 기댔다.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를 보냈지만 정신은 어디로 나가 버린 것처럼 종일 멍했다. 가슴이 조이는 듯한 통증 때문에 제대로 숨을 쉬는 것 같지가 않았다. 서다래는 앞섶을 쥐어짜듯 잡았다. 그러나 통증은 전혀 가시지 않았고 서다래는 급히 허리를 숙여 격한 기침을 내뱉었다.

콜록, 손등으로 입을 막아 남은 잔기침을 막아 낸 서다래의 얼굴이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점점 차오르는 절망에 서다래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나는 당한 대로 갚은 것뿐이야. 윤태서도 줄곧 그랬잖아.”

자신은 늘 당해 왔다. 윤태서가 괴롭히면 괴롭히는 대로 울컥하면서도 그와 똑같이 행동하지 않았다. 그게 제 자존심이었고 절대 넘어서는 안 될 선이었다.

그런데 그 선이 뭉개졌다. 자신을 지탱하던 강인혁의 애정이 흔들리면서 스스로 서 보고자 윤태서에게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저질렀다.

“아니야, 신경 쓸 거 없어. 그냥 알아보려던 것뿐이잖아. 사람을 죽이는 일도 아니고…….”

“때에 따라선 죽을 수도 있어.”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서다래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언제 문이 열려 있었는지 장신의 남자가 문을 막고 서 있었다. 마치 수문장과 같은 그의 위압감에 서다래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등에 닿은 사물함으로 인해 막혔다.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죠? 그리고 당신은 누굽니까?”

“애초에 불법인 건 이유가 있는 거야. 죽지 않는다고 써도 되는 게 아니지.”

강세헌이 안으로 한 걸음 들어오는 동시에 서다래가 움찔했다.

“죄책감이라도 가졌다면 네 상황도 이해해 보려고 했는데 뻔뻔하기 짝이 없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는 직원 외의 사람은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니 나가세요.”

서다래가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지만 강세헌은 물러나긴커녕 한 걸음 더 거리를 좁혀 왔다. 아까는 단순히 수문장처럼 느껴졌다면 지금은 자신을 잡으러 온 저승사자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의 다 안다는 눈빛에 제가 지레 겁을 먹은 걸지도 몰랐다.

“태서에게 한 짓, 용서받지 못할 일이란 걸 알고 있나?”

태서의 이름까지 나왔으니 이젠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잡아뗄 수 없게 되었다. 목울대가 크게 울렁일 정도로 크게 침을 삼킨 서다래가 강세헌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이제야 상대가 누군지 알았다. 윤태서가 어울리고 있다던 남자.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당황해서 그의 얼굴을 제대로 살피지도 못했다.

강세헌이라는 이름까지도 떠올린 서다래가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벌인 일에 대해 의심하고 찾아온 게 아니었다. 그는 제가 저지른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윤태서가… 오메가가 됐다고 하니까, 그저 오메가가 된 걸 확인해 보려고 한 것뿐이었어요.”

“그래서 같이 영향을 받을 걸 알고도 저질렀고.”

강세헌의 말이 맞았다. 윤태서에게 알파의 페로몬을 묻히기 위해 제 손에 먼저 묻혔다. 덕분에 히트 사이클이 일어났고 지금은 주기가 완전히 틀어져서 다음 사이클을 대비하기 어려워졌다.

“절대 윤태서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고요. 아니, 죽지 않았으니 제 말이 사실이라고 설득할 필요도 없겠네요.”

“내가 한 말 그새 잊었어? 때에 따라 죽을 수 있다고 했지.”

“페로몬으로 사람이 죽진 않아요. 설령 윤태서가 히트 사이클이 일어나서…….”

서다래가 잠시 말을 멈췄다. 불법인 약을 쓴 것도 문제였지만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것까지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다른 알파가 손을 댄다 할지라도 걔는 지켜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그래? 강인혁이 흔들리니까 질투심에 그랬다고.”

“나는…….”

정곡을 찔러 오는 강세헌의 말에 서다래가 제 사정을 말하려고 했지만 쉽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지켜 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누군가가 태서를 강압적으로 데려가려 했다면?”

“그런 억지를… 그래서 태서가 위험해졌나요?”

“잘 지나갔으니 다행이다? 단순하다. 그렇지?”

지금까진 차분하게 응수하던 강세헌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다. 그의 숨길 수 없는 적의에 서다래는 뒷덜미가 서늘할 정도의 공포를 느꼈다.

“그게 아니라…….”

“내 아이를 죽일 뻔했어.”

강세헌의 한 마디에 서다래는 모든 게 멈춘 듯 굴었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바로 받아들이지 못한 사이 강세헌이 바짝 다가와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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