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그 약이 태서는 물론 아이까지 위험하게 했다고. 오메가인 걸 확인하려고 했다고? 그것 때문에 태서가 얼마나 많은 검사를 받았는지 알고 있지?”
강세헌의 몰아쳐 대는 말에 서다래는 입술이 희게 질리도록 깨물어 댔다.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은 서다래가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으려는지 강세헌이 못을 박았다.
“모른다고 할 생각은 아니겠지?”
“나는 그저…….”
“태서한테서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런 거겠지?”
강세헌의 말이 맞았다. 정말로 윤태서가 오메가라는 게 믿기지 않아서 일을 벌였다.
“임신했다는 건 전혀 고려하지 못했겠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용서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강세헌이 시선을 내려 서다래의 떨리는 손끝을 보았다. 제 말에 동요하고 있었다.
“……이게 다 윤태서 잘못이에요.”
서다래가 떨리는 손을 맞잡아 비비더니 그것으로 제 머리를 쥐어뜯듯 휘어잡았다.
“그러게 왜 오메가로 발현해서는…… 인혁이가 신경 쓰잖아요. 인혁이, 인혁이가 윤태서에게 흔들리니까.”
고개를 숙인 서다래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약을 쓴 거잖아요. 페로몬을 묻혀서 괴롭히고 싶은 거잖아요.”
강인혁에게도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고 잡아뗐던 서다래가 인정했다.
“윤태서도 날 괴롭혔으니까, 날 알파에게 매달리는 그런 하찮은 오메가로 여겼으니까…….”
꿋꿋하게 살아오던 제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비웃던 이가 윤태서였다.
“그런데 왜 나는 안 돼요?”
서다래가 잔뜩 일그러진 눈으로 강세헌을 노려보았다. 윤태서는 참으로 운도 좋지. 강인혁 때문에 자기를 괴롭힐 때는 언제고 강세헌과 이어지다니.
이 상황이 너무도 우습게 여겨지는지 서다래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윤태서가 인혁이를 좋아했던 건 아시죠?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나를 핍박하고 무시했는데 나는 고작 페로몬을 묻힌 게 다란 말이에요”
말로는 잔뜩 윤태서를 탓했지만 서다래는 강세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바들거리며 떨리는 손을 주춤거리며 뒤로 숨겼다.
윤태서가 임신했다는 건 전혀 몰랐다. 그것 때문에 페로몬이 흘러나오지 않았다는 건 전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러나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엔 억울한 게 많았다. 자신은 이제껏 윤태서의 그 어떤 괴롭힘에도 묵묵히 버텨 왔다.
“그러니까 받은 대로 돌려준 것뿐이다?”
“그, 그래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강세헌이 간단히 정리해 주자 서다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고, 그게 맞으니 자신은 잘못 없다고.
“내가 오메가인 게…… 인혁이가 날 좋아하는 게 그게 그렇게 잘못이에요?”
서다래는 입술을 꽉 깨물고 강세헌을 올려다보았다. 그에게 어떤 말을 듣는다 해도 자신은 절대 상처받거나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모두가 자신을 외면한대도 인혁이 하나만 서다래를 품어 준다면 다 버틸 수 있었다.
“윤태서가 그렇게 날 비웃었어도 부모님이 창피해한 적 없고 괴롭힌대도 죽을힘을 다해 버텨왔다고요.”
그러니 강세헌이 그 어떤 모진 말을 한 대도 코웃음칠 수 있었다. 아니,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생했다.”
강세헌이 윤태서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의 큰 손이 제 어깨를 온전히 덮으며 전해 주는 온기가 방금 제가 들은 게 진짜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자신이 윤태서에게 나쁜 짓을 했고 방금까지 그 사실로 자신을 몰아세우던 사람이 지금은 자신을 다독여 주고 있었다.
“그래, 부모님을 창피해하면 안 되지. 너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건 네가 맞아.”
강세헌은 서다래의 어깨를 두드렸던 손을 내렸다. 그에게서 풍겨 오는 알파의 향이 이렇게나 진한데 오메가인 제 몸을 위로하고자 고작 어깨만 만진 게 전부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강세헌은 더는 서다래에게 손을 뻗어 오지 않았다.
“그동안 네가 억울했던 거 잘 알겠어.”
“그래서…… 그러니까 나는 윤태서한테…….”
강세헌이 제 편이 되어 주는 듯 굴자 서다래의 말이 꼬여 가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머릿속이 실타래가 엉키듯 꼬여 버렸다. 방금까지 윤태서에게 잘못했지 않냐고 몰아붙이던 사람인데 왜.
“다만 정직하지 못한 방법은 틀렸어.”
이 부분은 아쉽다는 말에 서다래는 울컥 올라오는 마음을 참아 내기 위해 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다고 제가 뉘우칠 줄 알아요? 아니요. 저는 절대 그러지 않아요. 나중에 어떤 끔찍한 벌을 받을지언정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요.”
“너…….”
강세헌이 차마 서다래를 향한 말을 끝맺지 못했다. 서다래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가만두지 않으려 했다. 제 아이를 위험하게 했고 태서가 눈뜨지 못한 시간이 너무도 괴로웠는데 지금 서다래를 보고 있으니 스스로 갉아먹은 게 굳이 제가 손대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네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으로도 충분히 괴롭겠다.”
그래서 강세헌은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강세헌이 나가는 걸 보던 서다래는 아까부터 깨물어 대던 입술에서 기어이 피 맛이 나는 걸 느꼈다.
“윤태서, 너는 정말…….”
한없이 강직하고 바른 강인혁을 좋아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멋진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정작 윤태서는 참 야비하고 못됐는데 어쩜 사람 보는 눈만 그렇게 좋을 수 있는지.
저 남자는 다른 이가 아닌 윤태서를 사랑한다. 그게 너무 질투 나고 부러웠다. 제 잘못을 곱씹고 뉘우쳐야 했지만 그런데도 서다래는 강세헌을 가진 윤태서를 향한 미움이 커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
태서가 강인혁을 부른 장소는 대학교 근처에 자리한 술집이었다. 방학이었지만 간간이 찬 테이블로 가게 안은 제법 시끄러웠다. 그 속에서 유독 한 테이블만은 어색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테이블의 두 남자는 각기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강인혁을 불러낸 태서는 어디서부터 이야기할지 고민했다. 대뜸 ‘너희 어머니가 내 상견례를 망쳤어.’라고 말하면 강인혁이 알아들을 것 같지 않았다.
강인혁은 어딘가 기대에 들뜬 기색을 숨기려 몇 번이나 혀로 입술을 축였다. 태서를 힐끗거리던 강인혁이 말을 걸었다.
“네가 먼저 연락할 줄 몰랐어.”
“일단 주문부터 하자.”
태서가 강인혁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하곤 고개를 돌려 다가온 직원에게 말했다.
“여기 맥주 두 개 가져다주세요. 안주는 따로 시킬게요.”
“알겠습니다.”
직원이 멀어지자 태서는 얼음이 가득 든 물컵을 들었다. 아까 낮에 그렇게 마시고도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갈증에 자꾸 물을 마시게 되었다.
‘이러다가 화장실에서 살겠네, 살겠어.’
덕분에 화장실까지 자주 들락거리고 있어 미칠 지경이었다. 태서가 이 술집을 고른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술집인데 화장실이 고급 호텔 못지않게 지어졌다는 것.
직원이 맥주 두 개를 들고 와 각자의 앞에 하나씩 내려놨다. 태서가 그것을 일단 제 품 가까이 끌고 왔다. 그런데 순간 강인혁이 손을 뻗어 태서를 제지하더니 맥주를 다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너 맥주 마시면 안 되잖아.”
강인혁이 한 말을 곱씹은 태서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내가 임신한 거 알고 있었어?”
“……들었어.”
“언제?”
“네가 쓰러졌을 때.”
“아…….”
강인혁이 알고 있을 줄 전혀 생각도 못 했다. 병원에 누워 있느라 바빴고 강세헌이 챙겨 주는 밥 먹느라 바빴다. 그리고 뭐, 가끔 서다래 생각도 했고 이래저래.
막 머리를 굴리던 태서가 새삼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한테 관심이 없었구나.”
놀라운 마음에 눈을 크게 뜨고 태서를 바라보던 강인혁이 눈가를 좁혀 왔다.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 이유가 뭐야.”
“응? 이유라니,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한 것뿐인데. 내가 이제 정말 널 안 좋아하긴 한다 싶어서.”
태서는 강인혁이 가져간 맥주 대신 물컵을 제 쪽으로 끌고 왔다. 어차피 맥주를 시킨 것도 앞에 아무것도 없으면 허전할까 봐서였다.
“어쨌든 그렇게 됐다. 오메가로 발현했고 임신했어. 애 아빠가 누군지 궁금해? 말해 줄까?”
“……아니.”
“그래, 듣고 싶지 않다니까 말 안 할게. 어쨌든 세헌이 형이랑 결혼하려고. 애 아빠라서 그런 건 아니고 날 좋아한대. 결혼하려고 상견례까지 했어.”
“너…….”
“계속 들어. 상견례 분위기 아주 좋았고 예쁨 많이 받았어. 너만 날 안 좋아했지, 날 좋아하는 사람 많은 거 알지? 특히나 어른들은 날 아주 많이 좋아해.”
“지금 그게 무슨…….”
“계속 들으라니까? 그래서 그 자리가 아주 잘 끝나는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망했어. 그것도 날 굉장히 좋아하는 너희 어머님의 난입으로.”
태서가 테이블을 탁 치는 것으로 제 할 말이 끝났음을 알렸다. 태서는 강인혁이 받아들일 시간을 주기 위해 더 이상의 말 없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아예 주변까지 둘러보며 나름의 여유를 즐기는 사이 강인혁의 시선은 오갈 데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당황해서 목이라도 마르면 술이라도 마시든가. 아니면 물 먹을래?”
태서는 어는 것이든 상관없다는 듯 친절하게 두 개를 인혁의 앞으로 밀어 줬다. 그리고 아직 시키지 않은 안주 대신 뻥튀기까지 건넸다.
강인혁은 속이 타서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마셨다. 그걸 지켜본 태서가 심드렁히 말했다.
“물 먹었구나.”
둘 중에 물을 택했어,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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