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집에 들어온 태서는 어색한 눈으로 안을 둘러보았다. 강세헌에게 고백을 받은 후라 그런지 폐쇄된 공간이라는 게 새삼 크게 다가왔다.
태서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제 목을 매만졌다. 아까 강세헌에게 키스와 함께 받은 선물이 손가락 사이에 걸려 왔다. 목걸이는 이제 제 체온과 비슷한 온기를 머금었지만 손은 목에 걸린 그것이 어색한지 자꾸 펜던트를 건들고 있었다.
태서가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돌아섰다. 덕분에 태서를 따라 들어오려던 강세헌이 얼결에 멈췄다. 왜 그러냐는 듯 바라보는 강세헌의 시선에 태서가 눈을 피했다. 강세헌의 앞을 막았으면서 전혀 비켜 주지 않던 태서가 몇 번 목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우리 연인인 거죠?”
“그럼 그 전엔 뭐였는데? 친구? 원나잇? 지나가는 사람? 네가 꽃다발 주며 고백한 건 잊었어?”
강세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우리 사이를 다시 정의하는 이유가 뭐냐는 시선이었다. 그러나 태서도 할 말이 있었다.
“아무래도 공개적으로 우리 사이를 밝혀야 할 거 같아서요.”
강인혁을 만나고 오면서 그 생각이 더 강하게 굳어졌다.
“그게 아니면 답이 안나와서요.”
강인혁이 한미순을 설득해야 하는데 아까 그 분위기를 생각하면 절대 해주지 않을 듯했다.
“아예 도장을 찍어두는 게 어때요? 제가 형 거라고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강세헌은 태서가 왜 이렇게 나오는지 알고 나니 웃으며 받아들였다. 누구든 우리 사이를 아는 거라면 당연히 제가 먼저 밝혀도 좋겠다.
“기자를 부를게. 아니면 기자회견이라도 할까?”
“그 정도는 아니어도 좋을 거 같은데…… 그냥 KH 사내 라인으로 먼저 발표하는 건요?”
“나쁘지 않네.”
“그럼 빨리 결혼날짜를 뽑아내는 게 좋겠어요. 할아버지한테 연락하면 바로 차를 준다고 하시니까…….”
태서가 중얼거리고 있으니 돌연 강세헌이 입을 맞대 왔다. 눈을 감을 새도 없이 벌어진 일에 태서가 눈을 뜬 그대로 강세헌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또 해 줄까?”
강세헌이 미소 지으며 하는 말에 태서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따뜻하고도 말랑한 입술이 제 입술을 부드럽게 감싸 왔다. 서로의 입술이 엇갈려 포개지고 숨을 나누니 이번엔 가슴이 간질거려 왔다.
더욱 깊은 입맞춤을 위해 태서가 강세헌의 옷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직 신발을 벗지 않은 덕에 태서가 애써서 높이를 맞추지 않아도 되었다. 애초에 이럴 생각으로 강세헌을 막기도 했지만.
강세헌이 태서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둘이 완전히 밀착했다. 태서가 강세헌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으며 고개를 기울여 입을 벌릴 때였다. 서로의 몸이 틈 없이 맞닿은 사이로 강세헌의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무시할 수 없는 진동에 태서가 떨어지려고 하는데 허리에 얹은 강세헌의 손이 태서를 강하게 붙잡았다.
“잠깐만.”
강세헌이 태서를 놔주지 않은 채 고개만 살짝 들어 핸드폰을 확인했다.
“급한 일 아니에요?”
몇 번 터치해서 내용을 확인하는 강세헌을 보고 물으니 그가 고개를 저었다. 핸드폰을 신발장 선반에 올려 둔 강세헌이 태서의 뒤통수를 잡아 다시 입을 맞췄다. 중간에 잠깐 떨어지긴 했지만 달아오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만큼 서로를 향한 마음이 여실히 드러나 태서가 웃었다. 웃음 짓느라 흘러나오는 서로의 숨이 얽혀 들어갔고 강세헌이 한껏 태서의 입술을 머금으려는 찰나 다시 핸드폰의 진동이 울려 왔다. 이번엔 전화가 온 듯 간격을 두고 연이어 이어지는 진동은 길고 거셌다. 심지어 선반에 올려 둬서 더 맹렬하게 울려 퍼졌다. 강세헌이 무시할 셈으로 가만히 있자 태서가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받아요. 그냥.”
“괜찮아.”
“꺼 놓을 거 아니면 그냥 받아요.”
이미 분위기는 식어 버렸다.
***
“어머, 인혁이 네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어서 들어와.”
한미순이 당황한 것도 잠시 인혁을 반겼다. 강인혁이 고개를 숙인 채 안으로 들어왔다.
“올 거면 미리 연락을 하지 그랬어. 응? 너 술 마셨니?”
강인혁의 비틀거리는 걸음에 한미순이 그의 팔을 잡아 지탱했다. 아들이라지만 인혁은 이미 다 큰 성인이었기에 한미순이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끌려가듯 흔들렸다. 하지만 다행히 넘어지지 않았다.
강인혁을 쓰러트리듯 소파에 앉힌 한미순이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 잠깐 아들을 지탱했다고 숨이 거칠어진 한미순이 손부채질로 달아오른 얼굴을 식혔다.
“얘가 술을 왜 이렇게 마셨어.”
취할 때까지 마시는 걸 본 적이 없었던 한미순이 강인혁을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흔들었다.
“얘 인혁아, 일어나 봐. 무슨 일 있니?”
“……서.”
“응? 뭐라고?”
한미순이 상체를 숙이며 강인혁의 얼굴에 귀를 댔다.
“태……서.”
“태서? 태서 말하는 거니?”
한미순이 아예 옆에 앉아서 강인혁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완전히 풀려 버린 눈을 보며 한미순이 강인혁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인혁아, 태서는 왜 말한 거야?”
“……윤태서가 자꾸 생각나요.”
강인혁의 느릿한 말을 인내심 있게 듣던 한미순이 놀란 표정을 드러냈다. 지금껏 둘의 관계는 태서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 한미순이 태서를 그렇게 붙여 주려고 할 때 강인혁은 전혀 반기지 않았다. 심지어 집에 다른 오메가까지 들여놔서 한미순의 속을 태우던 게 바로 제 아들이었다.
“태서가 생각나?”
“태서가…… 보고 싶어요.”
“어머. 너…….”
“잘해 줄걸.”
강인혁의 후회가 듬뿍 담긴 말에 한미순이 제 입을 막았다.
“날 좋아할 때…… 잘해 줄걸.”
“인혁아, 정신 차려 봐. 응? 그리고 다시 말해 봐.”
한미순이 인혁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그러나 강인혁은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한미순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나뿐이라고 할 때 잘할걸.”
“인혁아.”
“잘해…… 줄…….”
강인혁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이내 색색- 고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한미순은 강인혁을 깨우는 대신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제 아들이 돌아선 태서를 향한 미련에 술을 퍼부은 걸 알게 된 탓이었다.
지난번 상견례 자리를 완전히 훼방 놓으려 끼어들었다가 끌려 나갔다. 모두에게 드는 배신감에 윤태서고 뭐고 완전히 다 무너뜨리고 싶었었다. 실제로도 두 집안에 피해를 줄 만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아들이 나타났다.
한미순이 강인혁의 머리를 살살 쓸어내렸다.
“그래, 아직 늦지 않았어. 인혁아.”
강인혁의 눈물이 제 옷을 적시는 걸 느끼며 한미순이 낮게 중얼거렸다.
“엄마가 태서를 데리고 올게.”
어떤 수를 써서라도.
***
한가한 주말을 맞아 태서는 경영에 관한 책을 그리고 강세헌은 임신‧육아‧출산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각자 원하는 책을 고른 만큼 독서 시간은 조용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강세헌이 문득 책을 보다 말고 태서를 내려다보았다.
처음엔 같이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어느새 내려가 있는 태서를.
“바닥에 앉는 게 이제 습관이 된 거지.”
“바닥 생활이 익숙한 한국인인 거죠.”
태서는 아예 강세헌의 다리에 기대앉아 책을 읽었다. 책에 빠져든 태서를 바라보던 강세헌이 아예 턱을 괴고 본격적으로 관찰했다. 내용이 어려운지 한 장을 넘기는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지만, 태서의 집중력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태서를 방해하지 않은 상태로 강세헌이 다시 제 책을 들었다. 한편 태서는 책을 읽으면서 생각에 빠졌다.
‘어렵긴 하지만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야. 내가 기말을 어렵지 않게 공부했던 거랑 비슷한 이유일까?’
예전엔 그저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병원에 입원해 지냈을 때 어렴풋이 이유를 알 거 같았다.
‘내가 윤태서가 된 거야.’
그건 곧 윤태서의 몸만을 빌린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윤태서의 기억을 온전히 가져온 건 아니지만 잠재되어 있는 지식을 활용할 순 있었다.
거기다 병원에서 깨어나기 전 태서는 제가 온전히 윤태서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이제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거란 불안은 사라졌다.
‘그거면 된 거지.’
이제 윤태서로 살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정리한 태서가 다시 책을 들여다보았다.
강세헌의 다리가 뒤를 든든하게 받쳐 주니 소파에 기대지 않아도 될 정도라 만족스러워하는데 어디선가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려 왔다.
이젠 진동의 강도와 간격만 들어도 전화인지 메시지인지 파악이 될 정도였다. 강세헌이 핸드폰을 들어 귀에 댔다.
“무슨 일입니까.”
태서가 눈치껏 강세헌에게 떨어지니 그가 일어났다. 그는 태서에게 금방 오겠다고 소리 없이 말하면서 노래를 틀어 주고 방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공간에 부드럽게 퍼지는 음악을 듣던 태서가 고개를 내저었다.
“다시 태교에 힘써 주시는구나.”
제가 임신인지 모를 때도 클래식을 틀어 주더니 이젠 대놓고 틀어 놨다. 온 집 안에 선율이 떠도는 것만 같은 착각에 가만히 있기도 잠시 태서는 강세헌의 다리 대신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태서는 다시 책을 들여다보다가 슬쩍 눈을 들어 강세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빠.”
저번에도 강세헌과 진한 키스를 나누려고 할 때 연락이 와서 흐지부지되었다. 그 이후에도 분위기 좀 잡아 볼라치면 알람이라도 되듯 타이밍 맞춰 울려 대는 핸드폰 때문에 번번이 강세헌을 놔주어야만 했다. 그래도 오늘은 주말이라고 조금 한가한 거 같았는데 그것도 채 몇 시간을 버티지 못했다.
“하긴 저게 정상이지.”
오히려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 줬던 게 신기하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특히나 병원에 입원했을 때 제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으니 태서가 한숨을 한 번 내쉬는 것으로 강세헌을 봐줬다.
태서가 다시 책을 볼 요량으로 고개를 숙이는데 이번엔 제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집어 누가 전화한 건지 확인한 태서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응?”
얘가 나한테 무슨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