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사모님, 인혁 학생 왔어요.”
요즘 들어 집에 자주 오는 아들이 반가워 한미순의 얼굴에 화색이 띠었다. 어디로 갔는지 묻기도 전에 강인혁이 보이자 한미순이 가방도 대충 내려놓고 그에게 다가갔다. 강인혁의 등에 손을 대자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고개를 들어 한미순과 눈을 마주쳤다.
“오늘은 일찍 들어왔네. 오랜만에 우리 가족 다 같이 식사할 수 있겠다.”
“어머니.”
“응?”
강인혁이 한미순을 보던 시선을 내려 제 손을 바라보았다.
“저 태서한테 고백했다가 차였어요.”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는 평온한 듯하지만 어딘가 위태로운 느낌이었다.
“너…… 태서가 임신한 건 알고 있어?”
강인혁의 씁쓸한 미소에 한미순이 마음 아픈 듯 아들의 두 손을 잡았다.
“그랬죠. 태서가 임신…… 임신했다고 했을 때 많이 놀랐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결국 제 생각은 변함없었어요.”
그 생각이 뭔지 알 것만 같아 한미순이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세헌이 형의 아이를 가졌어도 상관없어요. 그 아이까지 다 사랑해 줄 수 있는데 태서가 절 봐 주지 않아요.”
다 상관없다고, 오히려 제가 태서를 일찍 알아주지 못한 탓인 것만 같아 제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만약 태서가 포기하기 전에 그를 돌아봤다면 강세헌의 아기를 밸 일도 없었을 거다.
“인혁아.”
한미순이 제 아들의 손을 보았다. 이제 아들의 손이 제 손안에 다 들어오지 않았다. 그만큼 커 버린 아들이건만 지금은 길을 잃은 어린아이 같았다. 한미순은 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가 도와줄게. 다 방법이 있어.”
“방법……이요?”
“그래.”
“정말로 도와줄 수 있어요?”
한미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술을 마시고 집에 왔던 날에도 잠결에 태서를 찾았어. 그때부터 미리 생각해 둔 거야.”
강인혁이 고개를 들자 한미순이 아들의 얼굴을 잡으며 눈을 똑바로 마주하곤 말했다.
“방학 동안 본사에 인턴으로 들어가. 거기서 세헌이가 하는 거 잘 보고…… 그대로 엄마한테 말해 주면 돼.”
나머지는 엄마가 알아서 할게.
***
1층 카페에서 음료수를 시키고 앉아 있던 태서가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가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어어?”
빠른 걸음으로 제게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도 어떤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우리 애기가 왜 여기 있어?”
“……해진이 누나.”
“그래그래, 네 누나 여기 있어. 애기야. 아이고, 귀여워.”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다가온 사람은 정해진이었다. 그녀는 강세헌과의 선 자리 태서가 방해하면서 알게 된 사인데 어쩌다 보니 친해져 버린 사람이었다. 그녀가 제 볼을 비벼 댈 걸 알고 막고 싶었지만, 꾹 참고 얼굴을 내어 준 태서가 뻐끔거리며 중얼거렸다.
“누나는 오늘도 절 귀여워해 주시네요.”
정해진에 비하면 어리다고 해도 다 큰 성인이다. 더욱이 밖에만 나가면 교복 입고 다니는 애기들 천지에 아장아장 걸어서 유치원 다니는 아기도 있는데. 하지만 태서는 굳이 아기가 아니라고 입 아프게 설명하지 않았다.
“누나는 여기 무슨 일이세요? 혹시 세헌이 형이랑 만나요?”
“아니, 다른 볼일이 있어서 들른 거야. 그나저나 태서 너 누나한테 소홀한 거 아니야? 연락 한 번 없고.”
“뭐 드실래요?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태서가 먹고 싶은 거 다 마셔도 좋다고 말하며 지갑까지 꺼냈다. 뻔뻔하게 상황을 말을 맞받아치자 정해진이 졌다는 듯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난 마셨어. 그리고 곧 가 봐야 돼.”
정해진은 시간이 얼마 없다며 일어나 태서를 제 옆자리로 끌어앉혔다. 덕분에 정해진과 나란히 앉게 된 태서가 어색하게 웃으며 음료수를 집어 들었다.
“강세헌이랑은 잘 지내?”
“그럼요.”
“싸우지 않나 보네. 네가 귀여워서 그런가?”
“그것도 영향이 있긴 하죠.”
태서가 인정했다. 확실히 강세헌과 자신은 싸우는 편이 아니었다.
“세헌이 형이 절 많이 좋아해요. 그래서 형이랑 있으면 시간 가는지 모르거든요. 오늘도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요? 눈을 떠서 나오니까 밥하고 있었어요. 제가 그런 남자랑 삽니다.”
태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해진이 무슨 생각에선지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곧 점심 먹을 시간이네. 그거 알아? 여기 큰길가 따라서 쭉 걸어가다가 첫 번째 골목에 들어서면 형님네 순두부찌개가 있거든? 자글자글 끓는 찌개 국물도 맛있지만 무엇보다 숭덩숭덩 들어간 순두부가 기가 막혀. 거기 주인이 직접 두부를 만들어서 그렇다는데 한 번 먹어 봐.”
상상만으로도 헛구역질이 올라와 태서가 제 가슴을 때리며 음료수를 마셨다. 시원하고도 뒷맛이 깔끔한 음료 덕분에 울렁거리던 속이 가라앉았다.
“아니면 그 골목에서 더 들어가면 언니네 곰탕이 있거든? 커다란 솥에다가 우족이랑 꼬리 넣고 푹 곤 국물이 얼마나 고소한지…… 거기다 깍두기 국물 넣어서 먹으면 매콤한 게 아주 죽여줘. 그것도 아니면 누님네 순댓국이 또 기가 막혀. 내장이 정말 많이 들어가 있거든. 들깻가루 두 숟갈, 양념장 반 숟갈 넣고 휘휘 저은 다음에 새우젓으로 마무리하면 그 국물이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
정해진은 어떤 걸 먹을지 행복한 고민을 하는데 정작 태서는 연신 음료수를 마시며 속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또 있다.”
“이제 그만 소개해 줘도…….”
“할머니네 냉면이 있거든? 그게 제일 맛있어. 그건 잡내가 안 나고 끝맛이 엄청 깔끔해.”
처음으로 솔깃한 태서가 귀를 기울였다. 그걸 본 정해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제 말에 속이 안 좋은지 표정을 굳히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태서를 보며 정해진은 적당히 놀렸다 싶으니 바로 괜찮은 메뉴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고 보니 수박은 어때?”
“수박이요?”
“응. 일모작으로 나온 수박이라 당도가 아주 높아. 아예 한 통을 잘 정리해 놓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 먹으면 그 음료수보다 맛있을걸?”
“원래 안 좋아했는데 누나 이야기 들으니까 먹고 싶네요.”
“그렇지? 임신하면 깔끔하고 시원한 게 입맛에 잘 맞거든. 그래서 생전 냉면 안 먹던 사람도 한 그릇씩 먹고 수박도 몇 통이나 먹더라니까?”
정해진이 핸드폰을 꺼냈다.
“주소 불러 봐. 내가 보내 주라고 할게.”
태서가 정해진과 딱 붙을 정도로 몸을 기울이며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정해진이 잘 받아 적을 수 있게 또박또박 주소를 불렀다. 그리고 무인 택배함에 넣어 달라고 말을 덧붙였다.
주소까지 다 알려 주고 나서도 둘의 거리는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거리가 마음에 든다며 정해진이 태서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강세헌이 서운하게 하면 누날 찾아오고 부탁할 게 있으면 누날 찾아와. 아니다. 그냥 보고 싶을 때마다 전화하면 내가 만나러 갈게.”
“그럴게요.”
빈말이라도 거절하지 않고 대답하자 정해진은 그럴 줄 알았다며 웃었다.
“회장님이 예뻐하실 만하네.”
정해진이 태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
태서는 정해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정해진을 만나 금세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해진이 누나 만났다고 하면 무슨 말을 할지 궁금… 어? 세헌이 형이네.”
뒷모습뿐이지만 분명 강세헌이 맞았다. 태서가 웃으며 빠르게 그 뒤를 쫓았다. 그리고 강세헌을 부르려고 하는데 뒤늦게 발견한 상대를 보고 멈춰 섰다.
“서다래?”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강세헌을 바라보는 서다래의 표정이 너무도 밝았다. 일전에 정해진과 선을 볼 때도 뻔뻔하게 끼어들어 강세헌을 지켜 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렇게 하면 되는데 발이 땅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걸 보던 태서가 쥐고 있던 핸드폰을 들었다. 연락처에 들어가 정해진의 이름을 검색해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는 동안에도 태서는 강세헌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간혹 보이는 그의 표정은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아니, 간간이 미소도 짓고 있는 거 같았다.
강세헌과 서다래가 어째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 둘이 그렇게 나눌 대화가 뭐가 있지?
[애기애기 태서네.]
“누나, 아까 보고 싶을 때 전화하라고 했잖아요. 속상한 일이 생길 때도 전화해도 돼요?”
[무슨 일인지 말해 볼래?]
“세헌이 형이 아주 다정하고 상냥하고 멋진 사람이란 걸 들킨 거 같아요.”
원래 자신만 알고 있어야 하는데 서다래도 알게 된 모양이었다. 그래서 소문도 그렇게 나왔나?
“형은 내 사람이니까 지켜야 하는 게 맞는데…… 저 애한테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네요.”
강인혁이 서다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를 괴롭혔다. 원작의 윤태서가 그랬지만 다시 또 강세헌을 지키겠다고 서다래를 야멸차게 밀어 내기가 쉽지 않았다.
[자세히 말해 봐.]
“누나랑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어머나, 강세헌 또 선보니? 아닌데. 회장님이 그렇게 둘 리가 없을 텐데.]
“선을 보는 건 아니고…….”
태서가 발끝으로 땅을 툭툭 쳤다. 당장 강세헌을 향해 다가가고 싶은데 그것을 참으려고 애꿎은 바닥만 괴롭히는 거다.
[그래서? 보고만 있으려고?]
“일단 기다렸다가 둘이 떨어지면…… 어? 어어?”
서다래가 강세헌을 향해 두 손을 뻗는 걸 본 태서가 다급한 소리를 냈다. 가만히 보고 있다가는 강세헌의 목을 끌어안을 것만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