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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83화 (83/130)

83화

다른 사람이 아닌 서다래라서 싫었다. 서다래가 미운 게 아니라 다시 얽히게 될 게 달갑지 않았다. 제발 각자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왜 자꾸…….

“미안해.”

태서의 오갈 데 없는 시선이 흔들렸다. 바로 앞에 강세헌의 얼굴이 있는데도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강세헌이 눈을 마주치기 위해 태서의 턱을 들었다.

“널 불안하게 하려던 게 아니야.”

강세헌이 태서의 눈에서부터 찬찬히 얼굴을 쓸어 내려갔다.

“네가 쓰러진 게 서다래 때문이라는 걸 알았어. 그래서 찾아가서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말했고 다신 널 건들지 말라고 했는데 그때 뭐가 기억에 남았는지 오늘 날 찾아온 거야.”

“예전에 만났었다는 거네요. 그럼 서다래가 내 이야기도 했겠어요.”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 다만 네 이야기보단 그때의 일을 짚고 넘어가는 게 우선이었어. 그리고 잘 기억나지 않지만 서다래는 내 말 한마디에…….”

“잠깐!”

태서가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막았다. 그 탓에 억지로 말이 끊긴 강세헌이 바라보고 있자 태서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이제야 어떻게 된 건지 알았어요.”

“아직 다 말하지 않았는데?”

“보나 마나 뻔하죠. 형은 서다래한테 왜 우리 예쁜 태서를 괴롭혔냐고 했을 테고 걘 억울하다고 난리 쳤을 거잖아요.”

“그렇지.”

“거기서부터 잘못된 거네요. 형이 무심코 흘린 매력을 서다래가 알아 버린 거죠.”

“……매력?”

태서는 서다래가 언급한 제 이야기는 아예 못 들은 듯 흘려 버렸다. 대신 강세헌의 얼굴을 잡아 입을 맞췄는데 태서의 눈동자에 소유욕이 넘실거렸다.

“왜 갔어요. 차라리 나한테 알아 둔 걸 다 말해 줬다면 내가 걔를 찾아갔을 텐데.”

서다래가 그랬다는 걸 의심했지만 강세헌에게서 확신을 얻을 줄은 몰랐다.

“형은 가만히 있어도 멋있는데 입을 열면 더 빠져드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내가 형한테 끌려간 거죠. 그걸 서다래도 느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안 좋네요. 거기다 아까 걔를 보고 웃기까지 했어.”

“우리 태서는 질투를 그런 식으로 하는구나. 네가 생각나서 웃은 것뿐인데 이 억울한 마음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강세헌의 중얼거림에 점점 태서의 시선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바닥 모르고 가라앉던 기분은 이제 미로를 헤매고 있었다.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 주니 더 불안하네요. 대체 어떤 생각을 했길래…….”

“살찐 윤태서.”

윤태서가 헛숨을 들이켜며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모르고 강세헌이 태서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한 손으로 태서의 볼을 눌러 얼굴을 잡았다. 금붕어 입술이 된 태서가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뻐끔거렸다.

“굴러다니면 진짜 볼만할 거 같은데 오늘부터 한번 노력해 볼까?”

“무슨 노력이요. 설마…… 진짜 날 살찌우려고?”

“원래도 잘 먹이긴 했지만 찌우는 건 다른 거니까. 본격적으로 하려면 준비할 것도 많으니 장부터 봐야겠네. 지금 바로 가자.”

강세헌이 창문을 두드리자 이제껏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비서가 운전석의 문을 열었다. 차에 시동까지 걸며 당장 어디든 가려는 태세에 태서가 급히 손을 뻗었다.

“잠깐만요.”

비서가 백미러로 무슨 일이냐는 듯 눈짓하는 사이에 태서가 강세헌을 돌아보았다.

“진짜 병원, 아니 장 보러 가자고요?”

“응. 스케줄 조정해서 괜찮아.”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바쁘다더니 그것도 다 조정 가능한가 보다.

“제가 안 괜찮아요. 저 여기 할아버지 보러 온 거라서요.”

“……회장님?”

태서가 고개를 끄덕이니 강세헌이 앞뒤 사정을 맞춰 봤다. 회사에 왜 태서가 나타났나 했는데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보러 왔다니…….

“이거 조금 서운하려고 하네.”

“서운하다고요? 아니 서운하려면 내가 서운해야지. 여기 오지 않았으면 서다래랑 있는 거 못 봤을 거 아니에요.”

태서가 아까 있었던 일을 다시 처음부터 짚어 봐야겠냐고 협박했다. 아직도 서다래랑 있던 장면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데 말이다.

그러나 태서가 어떻게 나오든 강세헌은 서운함을 전혀 감추지 않았다.

“나를 만나러 온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이라니. 윤태서 그렇게 안 키웠는데.”

“……그래요. 형도 먹여 주고 재워 줬으니까 따지지 않을게요.”

솔직히 자기 같아도 서운할 거 같긴 하다. 태서가 바로 인정하고 사과했다.

“미안해요.”

“그렇게 빨리 인정하면 재미없는데.”

“그래도 할아버지만 보려고 오는 게 아니에요. 형한테 들렀다가 오라고 해서 빨리 왔어요. 형이 보고 싶어서.”

태서가 재빨리 상황을 반전시켰다. 솔직히 강세헌이 바빠 보여 회사에 찾아올 생각도 못 한 거지 그가 보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 기회를 할아버지가 마련해 준 것인데 서운하다며 아깝게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여기서 보니까 더 멋있는 거 같고.”

그 말은 사실인 듯 강세헌을 바라보는 태서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

“방금 전무님이 사람 안고 간 거 봤지?”

“막 짐짝 메듯 한 거 같은데 아니야?”

“어깨에 메긴 했지만 조심스러웠던 거 같은데…….”

“어쨌든 누구를 들었다는 거잖아. 누구지?”

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까 강세헌이 있을 땐 다가오지도 못하고 거리를 둔 채 멀리서 봤으면서 자신만 남은 지금은 상관없다는 듯 굴어 댔다. 서다래는 혼자 남겨진 것도 모자라 두 사람이 사라진 몫까지 떠안아 사람들의 시선을 다 받아 내야 했다.

‘내가 윤태서가 아니니까 그런 거겠지.’

강세헌이 윤태서를 안고 가 버리는 바람에 서다래 혼자 남았다. 강세헌이 윤태서를 안고 감으로써 사람들이 둘의 관계가 심상치 않은 것과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챈 것이다.

강세헌과 조금이라도 친밀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실은 윤태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헷갈리게 하고 싶었는데 다 틀어져 버렸다. 속상한 기분도 잠시 서다래는 아까 본 윤태서를 떠올렸다. 강세헌과 제가 함께 있는 걸 봤고 당황해서 다가왔다. 그리고 사이에 끼어들기도 했으면서 정작 아무 말도 못 했다.

강인혁을 좋아한다고 자신을 괴롭힐 땐 얄미울 정도로 당당했고 또 이후엔 다 상관없다는 듯 무심했었는데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나를…… 의식한 걸까?’

그거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윤태서한테서 강세헌을 빼앗을 수 있다면…… 나만큼 괴로워하겠지.’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위로해 준 강세헌을 제 알파로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소유욕이 끓어올랐다. 강인혁과의 관계가 풋풋한 사랑이었다면 강세헌은 달랐다. 가벼운 연애가 아니라 진지한 관계를 이어 가고 싶었다.

***

“안 그래도 지루했는데 너를 부르길 잘했다.”

막 회장실로 들어와 주변을 둘러보던 태서에게 강학중 회장이 말을 건넸다. 그러자 태서가 울상을 지었다. 아까 있었던 강세헌과 제 일을 다 들은 게 분명했다.

“할아버지.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누가 뭐래냐.”

강학중 회장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서가 본사에 들어온 순간부터 모든 일을 실시간으로 전해 들었던 강학중 회장이 즐겁다는 듯 소파에 앉았다.

“회사라는 게 아무래도 같은 일이 반복되다 보니 재밌어 보이면 다들 관심을 가지게 되는 거지.”

“뭐라는데요?”

“너는 모르겠지만 강 전무가 제법 인기가 많아.”

태서가 바로 받아쳤다.

“당연하죠. 잘 생겼잖아요. 능력도 좋고 말도 잘하고 매력이 넘치죠.”

“집안 좋은 건 말 안 하냐?”

강학중 회장이 넌지시 제 핏줄임을 강조하니 태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건 너무 당연해서 말 안 했죠. 강세헌이 아닌 박세헌, 안 어울리잖아요.”

할아버지의 손주라 다행이라는 태서의 말에 강학중 회장은 민망한 듯 부러 헛기침을 했지만 좋은 내색이 숨겨지지 않았다.

“알면 됐다. 세헌이가 너를 안아 들었다지? 사무실 곳곳에 울리는 핸드폰 진동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그게 제가 아픈 줄 알고 병원에 가자고 해서…….”

이유를 말하던 태서가 새삼 기막힌 기분이 울컥 솟았다. 아니 아프다고 생각했으면 기대라고 할 것이지 왜 다짜고짜 안아 들어 가지고.

“세헌이 형이 힘이 좋아요.”

“그래?”

“네, 좋아도 너무 좋아서 문제예요. 왜 사람을 그렇게 덥석덥석 잘 든대요? 제 키가 180이 넘거든요?”

실은 180을 넘진 않았지만 제 억울함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살짝 올렸다.

“그래, 그래 보인다. 잘 컸다.”

“키만 큰 게 아니라 몸무게도 제법 나간단 말이죠. 그런데 얼마나 손쉽게 들었는지 아세요?”

“그럼 그 등치에 비실비실한 게 좋겠냐.”

“그건 아니지만요.”

태서의 빠른 대답에 강학중 회장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이제 네 이야기를 들어 보자. 무슨 부탁이 있어서 내게 전화했지? 그것부터 해결하고 나가서 식사를 하자꾸나.”

“고민이 생길 때마다 할아버지한테 연락하는 게 죄송스럽긴 하지만 너무 답답했어요.”

“나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 얼마든지 말해 봐라.”

강학중 회장이 다 들어주겠다는 듯 자세를 잡으니 태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학교에 소문이 퍼졌어요. 저에 대한 것만이라면 상관없는데 세헌이 형까지 얽혀 있어서요. 그게 형한테 안 좋은 영향을 끼칠까 봐 걱정이에요.”

태서가 긴 한숨을 쉬었다. ‘소문’과 ‘강세헌’이라는 단어의 조합이 퍽 흥미로운지 강학중 회장이 아까보다 더 호기심을 드러냈다.

“더 자세히 말해 봐라.”

“서다…… 아니, 음. 그러니까요.”

이걸 말하려면 서다래와 강인혁까지 다 언급해야 하는데 그러면 너무 복잡해질 거 같았다. 서다래와 강인혁의 사이가 얼마나 진척되었는지도 모르는데 말하는 것도 그렇고.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까 생각하던 태서가 검지를 세웠다.

“남자애가 한 남자애를 좋아해서 그 남자애가 좋아하던 남자애를 괴롭혔거든요? 그러다가 남자애가 좋아하던 남자애가 아닌 다른 남자애랑 서로 좋아하게 되었는데 처음에 괴롭혔던 남자애 때문에 좋아하는 남자애가 바뀐 거 아니냐는 소문이 돈 거죠.”

남자애, 남자애, 남자애, 남자애.

말하다 보니 괜히 이름 대신 남자애로 바꿨나 후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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