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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97화 (97/130)

97화

아주 멋진 고백 후에 두 사람이 한 일은 야경을 배경 삼아 달콤한 대화를 나누거나 분위기 좋은 곳에서 잊지 못할 식사를 하는 게 아닌…… 늘어지게 자는 거였다.

멋진 야경을 구경하거나 우아한 저녁 식사를 하는 그런 계획도 다 피곤하지 않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축복이를 품은 몸으로 빨빨거리고 돌아다닌 탓에 태서는 급격히 피로감을 느끼고 종국엔 강세헌에게 안겨서 집에 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부터 돌아다니지 않고 쉴 걸 그랬어요.”

태서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리니 강세헌이 그의 볼을 쓰다듬고 귀를 매만졌다.

“그랬다면 더욱 너를 집에서 빼내려 했겠지. 어머님께서 도와주신다고 했으니 넌 무조건 그 자리에 있었을 거고.”

강세헌은 무조건 태서가 그곳에서 영상을 보도록 할 생각이었다. 이왕이면 생각도 못 할 때 볼 수 있도록 김미경에게 도움을 청했다. 다른 이유로 태서를 그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강인혁이 딸려 올 건 생각 못 했지만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그런가?”

태서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더 힘이 빠졌다. 졸려서 나른한 눈꺼풀이 천천히 깜박였다.

“그래도 아쉽다.”

강세헌과 조금 더 뜻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면 최고의 날이 되었을 텐데. 임신한 몸으로 움직이는 건 천천히 부담이 쌓여 가는 게 아니었다. 인식하지 못한 제 탓이라는 듯 한 번에 몰려오는 피곤에 태서는 가물거리는 눈을 감았다.

“같이 있으니 다른 건 아무 상관없는데.”

강세헌의 말이 위로가 되었는지 잠에 빠져들려는 태서의 입가가 휘어졌다. 그 웃음 그대로 태서는 강세헌의 페로몬을 이불 삼아 잠들었다.

강세헌은 태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미동 없이 꾹 감긴 눈과 작게 벌어진 입술. 그의 얼굴을 톡톡 건드려도 잠에 빠져서인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태서야.”

강세헌이 제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축복이한테만 집중하면 돼.”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

***

“아버님 제발요.”

한미순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강학중이 보던 신문을 내렸다. 돋보기안경을 벗으며 뱉은 그의 침음이 한미순의 억울한 목소리에 눌렸다.

“이번 한 번만 그이 도와주세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둘째 아들이잖아요.”

“나보고 손해를 메꾸어 달라는 거냐.”

“아직 손해가 난 건 아니에요.”

“그런데 무엇을 도와달라는 거냐? 원하에서 만든 핸드폰을 밀어주면 되느냐?”

강학중 회장이 대놓고 물어 오자 말없이 있던 강수학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요새 제가 벌인 일이 제법 잘되고 있어 팽팽했던 이마가 주름으로 자글거렸다.

입 다문 강수학을 대신해 한미순이 나섰다.

“그건 어디까지나 이이의 사업을 뒷받침해 줄 도구일 뿐이에요. 다른 계열사의 판매로를 조금만 내어 주세요.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그건 안 된다.”

강학중 회장의 마른 음성이 한미순의 높은 목소리를 잘라 냈다.

“아버님.”

“처음부터 되지 않을 사업이었다. 그런데 억지로 밀어붙이더니 결국 이렇게 되지 않았느냐.”

“처음부터라니요. 이이도 다 잘해 보려고 그런 거잖아요. 그리고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으니 충분히 뒤집을 수…….”

“계약부터 말이 안 되는 걸 무슨 수로?”

강학중 회장은 단조로운 목소리가 한미순의 고집을 눌렀다. 그의 눈빛을 읽은 한미순은 날 것의 감정이 드러날 것만 같아 몇 번이나 입술에 힘을 줬다. 강학중 회장이 알고 있었다.

일정 부분 이상의 판매를 달성하지 못할 시 모든 손해는 강수학이 떠안도록 계약한 것을 말이다.

지금껏 한미순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던 분위기가 한순간 뒤집혔다.

“나는 여태 수학이를 내치지 못했다. 그 아이의 능력이 출중하지 못한 것도 다 내 탓이라 여겼어. 사업에 감이 없지만 주변 사람이 도와준다면 적어도 망하진 않겠지 싶었다.”

강학중 회장이 강세헌에게 했던 말이었다. 둘째라서 무르게 대했던 제 방관의 결과가 돌아왔다.

“수학이는 실패했어. 그것도 조카에게 밀렸으니 더 말해서 뭐 하나.”

강학중 회장의 객관적인 평가에 한미순은 할 말이 많은 눈빛을 띠었다.

그리 하나만 잘나게 낳은 건 아버님의 탓이 아니냐, 강세헌은 그 잘난 첫째가 낳은 자식이니까……. 온갖 변명이 떠오르는데 강학중 회장이 미리 잘라 냈다.

“끌어안은 것을 놔주기 힘들었는데 네가 알아서 잘라 내 주는구나. 잘했다.”

지금껏 그리 애썼으니 이번은 도와줄 수 없다는 말을 예상했지만 완전히 빗나갔다. 한미순이 당황해서 강학중 회장을 불렀다.

“그게 무슨…… 아버님?”

공기 속에 떠도는 불길한 징조를 읽은 강수학의 몸도 반쯤 들렸다. 두 사람의 불안한 눈빛을 바라본 강학중 회장이 선고했다.

“해외로 나가라.”

***

강수학, 한미순이 강학중 회장을 만나는 그 시각, 강인혁 역시 누군가를 만나러 본가에 들어왔다. 부모님이 이곳에 있다는 고용인의 말은 적당히 흘려들었다. 부모님이 할아버지를 만나는 거야 특별할 게 아니니까.

그보다 자신을 부른 이가 할 말이 궁금했다. 강인혁이 서둘러 속도를 올렸다.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강인혁이 가볍게 방을 둘러본 후 창밖을 바라보던 이를 불렀다.

“사촌 동생이 보고 싶어서 부른 건 아 닐테고.”

강인혁의 목소리에 강세헌이 돌아보았다.

“왔니.”

강세헌이 책상에 엉덩이를 걸터앉으며 강인혁을 보았다. 지금껏 회사에서 보던 딱딱한 인상 대신 한결 부드러운 눈빛으로 동생을 맞이했다. 너무 오랜만이라 생소하다면 생소한 눈빛에 강인혁이 제 뒷머리를 긁적이다 말을 돌렸다.

“그런데 왜 불러도 여기야. 오랜만에 옛 추억에 젖고 싶었어?”

갑자기 연락해서 부른 곳이 강학중 회장의 한옥이다. 강인혁이 벽을 따라 걸으며 방을 돌아보았다. 한창 자라는 청소년의 키에 맞춘 침대와 책꽂이에 빽빽하게 찬 참고서와 문제집, 그리고 경영학 관련 책. 정돈된 테이블까지 계속 사람이 살았던 듯 생활감이 묻어났다.

“여기 진짜 오랜만이네.”

이곳은 강세헌이 머물던 방이었다.

“어릴 때 많이 놀러 왔던 거 같은데…….”

“그래. 나 공부할 때마다 들어와서 많이 방해했지.”

강세헌이 고개를 끄덕이니 그의 무게를 지탱하는 책상이 보기 싫은 소리를 울렸다. 한때 모자람 없이 쓰던 책상은 이젠 커져 버린 강세헌을 버거워했다.

“갑자기 추억 놀이 하자는 것도 아닐 테고.”

강인혁은 숨겨 왔던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미 이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머리 한 꼭지를 누군가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그 모호한 정체를 파악하기 전에 강세헌의 목적부터 확인하려 들었다.

“여기서 널 봐야 내 목소리가 부드러워질 거 같아서. 네가 내 말을 더 잘 이해할 수도 있을 장소이기도 하고.”

강세헌이 몸을 일으키자 책상은 더 이상 듣기 싫은 소리를 내지 않고 잠잠해졌다.

“우리 어릴 때 제법 잘 지냈었어. 그렇지? 나중에 이 그룹을 어떻게 조각낼지 그런 생각 따위 안 하고 살았잖아.”

강세헌이 방을 가로질러 강인혁의 앞에 섰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각자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 잘 살아왔어.”

강세헌의 말대로였다. 강인혁은 강세헌의 능력이 뛰어난 걸 알고 있었고 쉽게 그를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강세헌의 말대로 각각의 영역이 있으니 적어도 제가 차지할 영역의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충분히 잘할 거란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우리의 영역에 겹치는 유일한 사람이 있지? 처음엔 네 친구였고 발현과 동시에 네 약혼자로 내정될 뻔했던 태서 말이야.”

강세헌의 말을 듣는 동안 강인혁은 제 머리를 당기던 꼭지의 정체를 알아냈다.

“이제 태서가 온전히 내 영역에 들어왔음에도 인정하지 못하면 우리는 더 틀어지겠지.”

강세헌이 강인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금껏 네 영역을 건들지 않았던 내 배려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걸 잘 모르는 거 같아서 알려 주는 거야.”

각자의 영역이 있는 게 아니라 강세헌이 제 영역의 일부를 떼어 준 것처럼 말해 왔다. 그제야 강인혁의 입가가 비스듬히 휘어 올라갔다.

왜 지금껏 자신은 강세헌이 봐준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내가 네 모든 것을 빼앗지 않게 잠깐 내 눈 밖에 있어라. 어떤 명분이 좋겠어?”

유학?

강인혁이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태서에게 온전히 버림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억지로 이 나라를 나가게 되어 버렸다.

한때 자신만을 바라보던 윤태서를 품지 못한 대가였다.

‘윤태서, 넌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냐?’

***

눈을 끔벅이며 잠에서 서서히 깨어난 태서가 주변을 둘러봤다. 잠들었던 침대에서 그대로 일어나긴 했는데 달라진 게 있었다. 자신을 품에 안고 페로몬을 뿜어내던 연인이 없어졌다.

주방에서 요리하고 있을까? 아니면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나? 그런데 이 집 어딘가에 제 알파가 있을 거 같지 않았다.

있어야 할 이가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공간이 휑하게 느껴지자 태서는 느릿하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끌리는 바지부터 제 것이 아니건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서는 그저 방을 나가는 데만 신경이 쏠렸다.

방문을 열고 나와 거실과 주방을 차례로 훑으니 휑한 느낌만 감돌았다.

눈을 떴을 때 강세헌이 없던 순간은 많았다. 새벽에 회사에 나가기도 하고 잠시 바깥을 나갈 때도 있었다.

안 보이면 전화해서 어디냐고 물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어 왜 이럴까 생각하던 태서의 눈이 크게 떠졌다. 방금 제 몸속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나 지금…….”

태서의 손이 제 배로 향하는 순간 기계음과 함께 현관문이 열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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