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초음파를 보고 나온 태서가 흐트러진 옷을 정리했다. 계절이 바뀌어 두꺼운 옷을 입으니 금방 옷에 배가 가려졌다. 오메가 남성의 경우 배 속의 공간이 제법 있어 배가 많이 나오지 않는다더니 태서가 그랬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보통 산모의 7개월일 때와 비슷했다.
“이제 막달에 접어들었으니 산부인과에 오는 횟수가 늘어날 겁니다. 귀찮아도 꼭 오세요.”
“축복이 보러 오는데 귀찮지 않아요.”
태서의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힐끗 바라본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다행이네요. 일주일에 한 번씩 오게 될 테니 나갈 때 일정 잡으세요.”
두 손을 깍지 낀 그가 태서의 배를 바라보았다. 아까 초음파할 때는 나온 게 보였는데 어느새 두툼한 옷에 가려져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겠다.
“이제부터는 언제든 아기를 낳아도 위험하지는 않습니다만 이왕이면 주 수를 다 채우고 나오는 게 가장 좋아요. 초산의 경우 예정일보다 늦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방심하지 말고요.”
의사는 차분하게 출산에 관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보통의 경우 알파의 페로몬은 출산 후 지친 오메가의 몸을 보살필 때 필요하지만, 간혹 긴급히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아기는 나올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출산해야 한다거나 하는 위급 상황이 발생하며 배우자분의 페로몬이 꼭 필요하다는 걸 충분히 주지시켜 주세요.”
태서는 열심히 듣는 척 귀 기울였지만 실은 잘 듣고 있지 않았다. 축복이가 나온다는 말은 알아듣겠는데 출산 때 겪을 일은 머나먼 이야기 같았다.
“아이가 아직 진통을 겪지 않아 봐서 걱정이에요. 이게 가진통인지 진진통인지 알 리가 없을 텐데…….”
그래서 든든한 지원군을 데려왔다.
누구보다 의사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인 어머니와 함께한 태서는 두 사람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깔끔한 진료실은 주기적으로 찾아오면서 천천히 정이 들고 있었다. 축복이가 태어난 후에는 이 진료실에 몇 번이나 더 들어올까 싶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어머니와 의사의 대화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몸이 무거워진 만큼 조심하세요. 부드러운 마사지로 긴장한 몸을 풀어 주시고요.”
이건 알아들었다.
“궁금한 거 있습니까?”
항상 마지막에 나오는 질의응답 시간에 태서가 반색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가도 될까요? 만삭 여행이라고 다들 가는데 저도 가까운 곳이지만 다녀오고 싶어서요.”
“많이 걸으면 배가 뭉치고 숨이 찰 테니 힘들겠지만…….”
의사의 신중한 목소리에 태서가 저절로 긴장해서 마른침을 삼켜댔다.
“무리하지만 않으면 괜찮습니다.”
허락이 떨어지자 태서의 얼굴이 환해졌다.
“충분히 조심하고 있습니다. 건강하게 만날게요.”
태서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자 의사는 진료 내용을 마저 적으려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의사의 스치듯 지나간 미소는 김미경만 알아챘다.
***
침대에 누운 태서는 이리저리 뒹굴며 굳은 몸을 풀었다. 산부인과 하나 다녀왔는데도 온몸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축복아, 아빠 체력을 이렇게 실시간으로 깎아 먹어도 되는 거냐?”
별거 안 했는데도 금방 지쳐 버리는 통에 종일 서 있는 건 불가능이었다. 제 이름에 반응이라도 하듯 발차기를 해 대는 느낌에 태서는 눈을 감았다.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태동이 거의 없지만 이렇듯 누우면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발차기를 해 왔다.
“알았다. 네 잘못이 아니라 이거지?”
눈을 감고 중얼거리는 태서의 목소리가 금방 잦아들어 갔다. 낮잠에 빠진 태서의 색색거리는 숨소리에 잠시 문을 열었던 김미경이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두 시간이 지나고 잠에서 깬 태서가 눈을 비비며 반대로 몸을 굴렸다. 피곤함은 덜었지만 한 자세로 오래 잠을 잤더니 몸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누운 채로 손발을 빙글빙글 돌려대며 제 방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곧 축복이가 나온다…….”
머릿속으로는 오전에 다녀왔던 산부인과를 떠올렸다.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축복이를 만날 때가 머지않았다는 것.
“방 정리를 할까?”
생각해 보니 윤태서가 되어서 한 번도 방을 뒤져 보지 않았다. 밖에 나와 있는 것만 사용했고, 그것에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려면 뭐가 있는지 다 살펴봐야겠지?”
한번 생각을 정하자 움직이는 건 쉬웠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상자를 끌어당겼는데 생각보다 무거워서 멈칫했다가 힘을 줘 내려놨다.
“뭐가 들어 있을까?”
보물찾기를 하는 것만 같아 약간의 흥분이 담긴 손으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앨범이구나.”
상자의 반쯤만 차 있는 4권의 앨범.
그중 하나를 꺼내 표면을 쓸어 봤다. 별거 없는 앨범인데 쉽게 열지 못하는 건 제가 아닌 진짜 윤태서의 과거를 보는 거라 그랬다.
“이제 내가 윤태서니까.”
혼잣말을 중얼거린 채로 앨범을 펼쳤다.
“와…… 이게 언제야. 초등학생? 중학생?”
어린 윤태서의 얼굴을 보니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지금도 잘생겼지만 어릴 때는 새하얀 피부에 예쁜 얼굴이었다. 그 얼굴로 표정 하나 없이 사진을 찍으니 인형이나 다름없었다.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태서의 눈빛이 점점 감탄에서 의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로 보이는 사진 중 눈에 익은 게 있어서 그랬다.
“어디서 봤더라.”
윤태서의 과거를 본 때가 많지 않아서 금방 떠올릴 수 있을 거 같은데…….
“생각났다.”
태서의 고개가 번쩍 들리더니 침대 옆에 놔두었던 핸드폰을 보았다.
SNS 비공개 앨범에 있던 사진.
초반에 윤태서가 되어서 과거를 알아야겠다고 이것저것 살펴본 뒤로 잊고 있었다. 태서가 손만 뻗어 핸드폰을 가져왔다.
“강인혁이 나온 사진만 여기로 옮겨 둔 거구나.”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지워도 앨범으로 볼 수 있게끔 따로 정리해 둔 정성이라니.
“그래, 강인혁을 많이 좋아했었네.”
“그랬구나, 우리 태서가 인혁이를 많이 좋아했구나.”
혼자 있던 방에서 들려온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태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지 강세헌이 팔짱을 낀 채 문가에 기대 있었다.
“언제 왔어요?”
“우리 태서가 열심히 사진을 보고 있을 때?”
“그게 언제지?”
태서가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다가 곧 쓸모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언제 일어났는지 앨범을 볼 때가 언젠지 모르는데 시간을 본다고 알 리가.
태서가 조용히 핸드폰을 내려놓고 앨범도 덮었다.
“어차피 과거를 다 알고 있으면서 처음 들은 것처럼 굴기 있어요?”
“그렇게 열성적이었던 줄은 몰랐어서.”
강세헌이 성큼 안으로 들어와 손을 내밀었다. 그게 핸드폰을 달라는 뜻인 걸 알고 얌전히 손 위에 올려 줬다. 여기서 괜히 싫다고 하면 강인혁을 향한 마음이 남은 것처럼 보일 테니까.
“저는 이제 아무 감정도 없어요. 이건 진짜 제가 아니라 과거의 윤태서, 정확하게는 형과 히트를 보내던 그 몇 시간 전까지의 윤태서라고요.”
“우리 태서는 명확하게 선도 잘 그어.”
“그럼요. 창립 파티를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졌다니까요?”
태서가 이젠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걸 강조했지만 강세헌은 말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신중하게 사진과 간단하게 붙인 글을 읽어 대는데 은근한 긴장이 감도는 시간이었다.
“다 삭제하라면 할게요.”
딱히 소중한 것도 아니라서요.
“이리 와서 앉아. 바닥 딱딱해.”
강세헌이 손을 내밀어 제게 기대 올 수 있게 배려했다. 태서는 순순히 그의 옆에 앉으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까는 신경 쓰인다는 듯 굴었는데 지금은 또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네요?”
무슨 변덕이 이렇게 심해?
“그 김에 핸드폰도 돌려주면 좋겠는데…….”
굳이 팔을 뻗을 필요 없다는 듯 제 손이 마중 나갔는데 좀처럼 핸드폰이 돌아오지 않았다.
“주면 바로 사진 다 내릴게요. 어차피 비공개라 누구도 보지 못하는 건데 남겨 두는 건 신경 쓰이잖아요.”
어서 달라는 듯 손을 흔들거리는데도 강세헌은 태서가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더 빨리 만나지 못해서 아쉽네. 아주 어릴 때부터 봤다면 이렇게 사진으로 만족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거야 그럴 운명이었던 거죠. 저는 아주 어릴 때 만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는데요?”
강세헌이 왜 그러냐는 듯 눈으로 물으니 태서는 눈이 가늘어지도록 웃었다.
“그때 임신할 순 없잖아요.”
우리가 딱 만나자마자 히트로 깊은 밤을 보낼 수 있었는데 더 일찍 만나면 안 되지.
“그저 좋은 관계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임신부터 생각하네, 우리 태서는.”
“그저 좋은 관계로 남을 게 아니니까.”
태서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근데 형은 욕심도 많네요. 지금도 어린 연인을 두고…….”
태서가 손가락을 꼽았다. 만약 한두 살만 더 어릴 때 만났다면? 큰일 날 일이네.
“이제 주세요.”
“바꾸자.”
“바꿔요? 뭐랑 뭐를?”
“이 핸드폰이랑 저 앨범 전부.”
태서가 고개를 돌려 흐트러진 앨범을 봤다. 4권이고 아직 한 권도 다 보지 못했지만 어떤 사진일지 뻔했다. 다시 고개를 돌려 강세헌과 눈이 마주친 태서가 고민할 게 없다는 듯 제 핸드폰을 가져갔다.
“제 어릴 때 사진이 가지고 싶으면 줄게요. 그런데 보통 한 장 정도만 달라고 하지 않나? 형은 무슨 앨범 통째로 다 달래요? 우리 부모님이 찾으면 어쩌려고.”
“그건 따로 앨범 있으시던데…….”
“우리 부모님한테도? 봤어요?”
“그래.”
언제 봤지? 자신도 모르는 걸 강세헌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럼 가져간다.”
미리 차에 옮겨 둔다며 상자째로 들고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태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핸드폰이랑 앨범을 바꾸는 거래가 잘 성사되었는데 뭔가 이상하다.
“나 방금 당한 기분인데.”
내 것과 내 것을 두고 거래를 한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