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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110화 (110/130)

110화

서다래가 당기는 힘에 태서가 발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럼에도 상체가 앞으로 굽으며 그와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당장 균형이 무너질 듯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태서는 서다래의 눈을 보았다.

눈동자에는 자신을 향한 증오가 가득했다.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태서의 손목을 잡은 서다래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원래라면 제게 미치지 못할 힘이지만, 지금 태서는 앞으로 쏠린 무게 중심에 넘어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그에게 잡힌 손목을 빼 보려고 애를 써 봤지만 빠지지 않았다.

‘서다래의 힘에 넘어가면 안 돼. 내가 무너지는 순간 축복이도 위험해질 거야.’

자기 혼자만으로 끝나지 않을 문제였다. 피가 통하지 않아 손끝이 희게 질려 오면서 태서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서다래, 진정해.”

“너만 아니었어도…….”

서다래의 눈동자에 괴로움이 차올랐다.

열심히 살았고 강인혁에게 호감 어린 시선을 받았고 슬픈 날보다 괜찮은 날이 더 많았다. 그런데 그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다 어그러졌다.

“내가 이렇게 망가지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나와 똑같이 망가져야 해.”

그래서 날 증오하는구나.

서다래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그간 억눌렸던 모든 감정을 대변해 오고 있었다.

“너는 내가 슬퍼하는 걸 보고 싶은 거야?”

“그래. 어떻게 너만 행복할 수 있어!”

억울하다고 외쳐대는 서다래가 밉다기보다 불쌍해졌다.

그 착하고 순수하다던 서다래가 왜 이렇게 된 걸까.

“그만해.”

태서의 작은 소리에 서다래가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얼굴에 의문을 띄웠다.

“그만하라고!”

태서가 강하게 외쳤다. 이 이상으로 더 치달으면 서다래는 결코 원래의 그가 될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간절히 담았지만 안타깝게도 서다래에게 닿지 않았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서다래, 나는 네가 바라면 무릎이 닳도록 사과할 거야. 그러니까 이제 너 자신에게 집중하라고!”

서로의 감정이 격해지기 시작하며 큰 소리가 오갔다.

“나한테 집중하라고? 지금 나한테 남은 게 뭔데?”

“왜 없어. 너, 온전한 네가 있잖아!”

이젠 서다래보다 더 흥분에 찬 태서가 크게 외치자 아랫배가 살살 아파 왔다. 그것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니 서다래가 기가 찬 웃음을 흘렸다.

“나? 지금 나라고 했어?”

서다래가 얼굴을 찡그리는데 마치 그게 소리 없이 우는 것만 같았다.

“네가 보기엔 나에게 기회가 있을 거 같아?”

“당연하잖아.”

“아니. 없어. 나는 이미 전부를 잃었다고. 나 자신까지!”

“아직 늦지 않았어.”

“나는 너 때문에 죽으려고 했어. 바다에 뛰어들어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그런데 늦지 않았다고?”

말도 안 된다는 듯 서다래가 고개를 저었다.

“웃기지 마. 나는 이미…….”

“서다래, 제발.”

정신 차리라고 말하려던 태서가 그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 힘을 주었다. 그런 태서의 돌발 행동에 놀란 서다래가 반사적으로 힘을 주면서 태서의 몸이 갸우뚱 앞으로 기울어졌다. 다급히 다리를 내려 무게 중심을 잃지 않으려 했지만, 대비하기 전에 몸이 먼저 앞으로 푹 쏠렸다. 축복이의 무게 때문이었다.

서다래가 다급히 태서에게서 손을 뗐다가, 그가 제 옆으로 스치듯 떨어지자 황급히 놓았던 손목을 다시 잡으려 했다. 그러나 태서가 제 배를 부여잡는 바람에 서다래의 손은 빈 허공을 움켜쥘 뿐이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태서가 계단 아래로 굴렀다. 등과 무릎, 머리까지 계단에 부딪히자 몸이 아픔을 호소했다. 계단 턱에 걸려 몸이 튕길 때마다 비명이 나올 것 같은데 입을 벌릴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다 모서리에 뒤통수를 세게 찧었을 땐 알아서 입이 벌어졌다.

계단을 다 구르고 나서 벽에 부딪혀 멈추자 태서에게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끄윽…….”

팔로 감싼 배에서 올라오는 격통에 숨이 막혀 왔다.

“아아…….”

몸을 구르듯 옆으로 돌려 누우며 태서가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겨우 한쪽 눈을 뜨니 운동화가 보였다. 자신을 향해 선 운동화를 본 태서가 부들거리는 손을 들었다.

“도……와줘.”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이리 만든 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온몸이 아픈 것보다도 점점 그 고통의 궤를 달리하고 있는 배가 태서를 조급하게 했다. 필사적으로 제 배를 감쌌지만, 온전히 지키지 못했나 보다.

‘축복이가 아파해.’

축복이가 울고 있었다.

“제발.”

아직 제 앞을 떠나지 않은 운동화를 보며 태서가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 짜내 부탁했다. 욱신거리는 다리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낀 순간 찬바람에 에는 듯 아릿한 고통이 올라왔다.

“서…….”

…다래 도와줘.

뒷말이 바람 빠지는 소리로 흘러 버렸다. 겨우 버텼던 몸이 점점 늪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똑같이…… 똑같이 겪어 보라고.”

이제 쉭쉭거리며 숨만 겨우 내쉬는 태서의 가물가물한 정신에 서다래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런데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아이를 임신한 윤태서에게 내가 무슨 짓을……. 내가 미쳤어. 내가…….”

‘그렇게 중얼거릴 시간에 날 좀 구해 달란 말이야.’

서다래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자 태서는 마지막 발악과도 같은 생각을 했다.

강하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찬바람보다 더 차게 느껴지는 건 제 착각이 아닐 것이다.

원작대로 살지 않았으니까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줄 알았다. 원작의 윤태서가 죽는 날에도 긴장하고 있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다 괜찮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러면 안 되잖아.’

자신은 이미 원작대로 살고 있지 않는데.

힘없이 지은 미소가 태서의 얼굴에 신기루처럼 스쳐 지나갔다.

***

길고 긴 이사회가 드디어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강진한이 일어나 간단한 소감을 이야기하는 것을 끝으로 사회자가 마무리했다.

“강진한 부회장님의 취임식과 언론 발표를 준비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사회자가 이사회가 끝났음을 알리자 강학중 회장과 강세헌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특히나 중간에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던 강학중 회장은 심기가 불편한지 헛기침을 내뱉었다. 곳곳에 남은 강수학의 사람들이 좀처럼 수긍해 오지 않으니 이사회가 치열하게 돌아갔다. 마지막이 되어서야 결론이 났지만, 찝찝한 기분으로 강학중 회장이 핸드폰을 들었다.

강세헌 역시 비슷했다. 지금쯤 진료가 끝났을 시간이니 태서에게 온 연락을 살펴보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부재중 전화가 쌓여 있었는데 전부 진규민이었다. 그에게 태서를 부탁한 게 떠오른 강세헌은 이마를 찡그러뜨렸다. 불길한 예감이 차올랐다.

그에게 전화를 걸며 자리에서 일어난 강세헌이 가장 먼저 대회의실을 나갔다. 전화를 받자마자 들린 커다란 소음에 강세헌이 눈을 찌푸렸다.

[왜 이제 전화해.]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들리는 진규민의 초조한 음성에, 강세헌은 진규민의 목소리 너머로 들리는 소음에 집중했다. 여러 번 반복되어 흘러나오는 알림 방송, 뛰어다니는 듯한 구두 굽 소리, 그리고 진규민의 거친 숨소리가 강세헌의 불안함을 부추겼다.

[태서 씨가 사라졌어.]

그 순간 소음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머리가 깨질 듯한 이명이 소음을 밀어 냈다.

“정확히 말해 봐.”

[그러니까, 그게… 태서 씨랑 대화하고… 유자차만 두고 사라져서, 금방 올 줄 알았어… 진료를 보러 간 줄 알고…… 산부인과에 갔는데 태서 씨가…… 안 왔대.]

“그래서 태서가 어딨는지 모른다는 거야.”

강세헌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진규민이 더욱 답답하다는 듯 날뛰었다.

[지금 찾고 있는데…… 태서 씨!]

진규민의 다급하고도 강한 외침이 들리자 강세헌이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을 내리곤 차가 있는 곳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서다래마저 사라진 지금, 누군가 찾아오길 기다릴 수 없었다.

‘축복이가 울고 있잖아.’

제 귓가에 아기의 울음이 들려왔다. 다리를 적시는 축복이의 눈물이 태서가 눈을 감을 수 없게 지탱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해.’

핸드폰은 아까 구를 때 어디로 떨어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지금 자신은 층과 층 사이에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든 아니면 구르듯 내려가야지만 비상문을 열 수 있다.

‘내려가는 건 안 돼.’

지금도 온몸이 아팠다. 그러나 그보다 배가 가장 아팠다. 여기서 다시 굴렀다간 축복이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태서가 부들거리는 손으로 계단을 짚었다. 엉금엉금 두 손과 두 발로 하나둘 계단을 올랐다. 다시 구르지 않게 계단을 긁을 듯 손가락을 굽혔다. 손톱이 깨지고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계단을 쥔 손의 힘을 줄이지 않았다. 단 한 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구를 것만 같아서.

‘조금만 참아. 축복아.’

아빠가 너를 지켜 줄게.

눈물이 차면 앞이 안 보여 헛손질할까 봐 태서는 입술을 강하게 깨물며 울음도 참았다. 임신인 걸 알았을 때 축복이를 낳아야 할지 고민했던 게 미안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거 같은 자책감이 들었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배의 통증이 끊임없이 태서의 머릿속을 흔들어 놨다.

이를 악물고 입술을 깨물어대며 계단의 중간쯤 올라왔을 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함께 훈기가 느껴졌다.

“태서 씨!”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태서의 얼굴에 처음으로 안도감이 느껴졌다. 다행이다.

‘날 구하러 와 주었구나.’

축복아, 조금만 더 버티자.

가물가물했던 정신이 완전히 끊어지기 직전 누군가가 자신을 안아 드는 걸 느꼈다.

축 늘어진 태서를 안은 진규민이 곧장 산부인과로 달려갔다.

“여기요. 빨리 와 주세요!”

진규민의 외침에 간호사를 비롯해 막 지나가던 의사까지 달려왔다. 그 중 태서의 얼굴을 알아본 간호사가 짧은 비명을 외치며 담당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 여기 윤태서 님이 있어요. 어서 와 주세요.”

그사이 진규민이 급히 태서를 침대에 눕히고 옆으로 빠졌다. 그만큼 빈공간으로 의사들이 들어오면서 태서의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빠르게 주고받았다.

대화 사이에 유산이라는 단어가 간간히 들릴 정도로 긴박한 상황 속 담당 의사와 강세헌이 나타났다.

“윤태서!”

강세헌이 태서의 옆으로 뛰어와 그의 얼굴을 만졌다. 눈을 감은 태서의 볼을 쓰다듬으며 침대 밖으로 삐져나온 손을 잡았다.

-저 요즘 너무 행복해서 불안해요.

태서가 바다를 보며 했던 말이 스쳐 갔다.

“태서야…….”

당장 수술실로 들어가야 한다며 침대가 움직였다. 그 탓에 강세헌은 잡고 있던 태서의 손을 놓쳤다. 태서의 팔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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