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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112화 (112/130)

112화

“슬슬 이름을 정해야 하지 않아?”

강세헌의 질문에 태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따로 생각해 둔 이름은 없고 아침에 양쪽 집안의 어른들이 다녀가시면서 알아서 이름을 지으라 하시긴 했다. 그렇긴 한데…….

“아직 축복이 태어난 지 3일밖에 안 됐어요.”

창밖에서 축복이를 바라보던 태서가 이르지 않냐는 듯 말하며 돌아보니 강세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 안 듣고 있구나.”

표정을 보니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거다. 이렇게 되니 안 물어볼 수 없었다.

“하고 싶은 이름 있어요?”

“응.”

강세헌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이번엔 진짜였다. 다 큰 어른인데 왜 저 모습이 귀엽게 보이는지……. 태서가 강세헌에게 바짝 붙었다.

“말해 봐요. 내 마음에 들면 그거로 이름 짓지 뭐.”

태서가 달래듯 살살 꼬드기자 강세헌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서.”

“뭐라고요?”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윤서.”

“…….”

강세헌이 내뱉은 이름에 태서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입 다물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누가 이 남자보고 사랑 따위 안 할 인간이라고 했었던 거 같은데 누구야. 당장 데려와서 이 대화를 들려 주고 싶었다.

“이상해?”

“누가 봐도 내 이름에서 가운데 ‘태’자 하나 뺀 건데 그럼 좋겠어요?”

어쩐지 망설이더라. 태서가 기가 막히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다시 축복이를 보았다. 정해진 시간에만 볼 수 있으니 지금 보지 않으면 오후까지 기다려야 한다. 물론 아기를 낳은 자신은 제외였지만.

“다른 이름 생각해 봐요. 안 그러면 저는 축복이 이름 강헌이라고 주장할 테니까.”

말하고도 제법 괜찮은지 몇 번 입에 굴려 보던 태서가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신생아실 옆의 호출 벨을 눌렀다. 문이 열리며 안으로 쏙 들어간 태서를 바라보던 강세헌이 아쉬운 얼굴을 하며 근처의 의자에 앉았다. 아기를 낳은 이만 들어갈 수 있으니 어차피 강세헌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신생아실 안으로 들어와서 자리 잡은 태서는 속싸개로 칭칭 감은 번데기 같은 축복이의 모습에 미소 짓곤 조심히 넘겨주는 아이를 받아 들었다.

“한 손으로 목이 있는 곳을 받쳐 주고 다른 손으로 몸을 잡아 주세요.”

이미 두 번이나 안아 봤지만 여전히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니 간호사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말을 들으며 엉거주춤 손을 뒤집으니 축복이가 닿아 왔다.

“와.”

작지 않게 태어났다고 하는데 제가 느끼기엔 너무 가벼웠다.

제 품에 안긴 축복이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어떻게 제 배 안에 있었을까 신기하고 감격스러웠다.

“으으.”

태서가 축복이를 끌어안고 싶은 걸 참으며 부들거리고 있으니 간호사가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둘이 남자 태서는 아까 강세헌과 나눈 말을 고대로 축복이한테 전해 줬다.

“네 아빠가 아빠를 너무 사랑하나 봐. 네 이름을 윤서로 하고 싶다고 그러는데 어떡할까? 윤서라니 다시 생각해도…….”

엉뚱한 사람이라고 말하려던 태서의 목소리가 잦아들어 갔다. 알아듣는 건지 못 알아듣는 건지 ‘윤서’라는 이름을 말할 때 축복이가 방긋거렸다.

“야야, 그렇게 웃지 마. 아니 웃는 게 맞나?”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가 웃을 수 있는 게 맞는지 몰라 헷갈리는데 축복이의 입이 벌어지며 하품을 해 왔다.

“웃는 게 아니라 하품하려던 거였나?”

난 또 웃는 줄 알았네, 태서가 바람 빠진 미소를 짓다가 무슨 생각이 든 건지 축복이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강헌아. 야, 강헌. 강헌강헌강헌아.”

몇 번을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아예 잠에 빠져든 걸 본 태서는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네. 네가 선택한 거다. 강윤서.”

제 이름을 땄으니 성은 강세헌의 성을 물려 주는 게 좋겠지?

잠결에 태서의 목소리가 들려서 그런지 축복이, 이제 강윤서가 될 아기가 꼼지락거렸다.

***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와요.”

태서가 강세헌의 옷을 훑어보고 밖을 가리켰다. 일하던 복장 그대로 와서는 삼 일이 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정장 차림이었다. 강세헌이 말하기를 중간에 한 번 갈아입었다고 하는데 하필 똑같은 정장이라 안 갈아입은 줄 알았다.

태서가 어서 가지 않고 뭐 하냐는 듯 보았지만 강세헌은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듯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밖에 한 비서님 있어요. 그러니까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차라리 옷을 가져오라 하고 냄새나면 자주 씻을게.”

강세헌이 나름의 타협점을 제시했지만 태서는 단호히 고개 저었다.

“여기에만 있지 말라고요. 계속 그렇게 망설이면 윤서한테 다 이릅니다.”

태서의 협박에 강세헌은 움찔하면서도 버텼다.

오히려 태서가 윤서라는 이름을 받아 준 게 기뻐서 미소 짓기만 했다.

“하아. 올 때 도넛도 사다 주세요.”

임신했을 때 먹은 게 아직도 떠오른다고 말하니 그제야 강세헌이 굼뜨지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렇게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니 외려 태서가 더 걱정될 지경이었다.

“계속 형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빨리 다녀와요.”

아예 강세헌을 조련하겠다는 생각으로 밖을 가리키고 나서야 드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제야 나갈 생각이 들었나 보다 싶은 그때 강세헌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다른 이의 목소리가 간간이 섞여 들려왔다.

‘뭐지?’

소란이 일어나는 듯 큰 소리도 났다. 돌아가라는 누군가의 외침, 높낮이가 거의 없지만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평소보다 말이 더 짧은 강세헌의 목소리까지. 직접 확인해 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라 태서가 문을 열었다. 바로 보이는 건 강세헌의 등이었다. 마치 누군가로부터 안을 지키려는 듯 그의 넓은 어깨와 굳건한 등이 태서의 시야를 한가득 채웠다.

“돌아가세요.”

한 비서의 목소리에 등에서 눈을 뗀 태서가 앞에 있는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틈 사이로 고개를 기울였다.

“서다래…….”

이래서 막았던 거구나.

저번처럼 모자를 깊게 눌러쓴 서다래는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며 그냥 돌아가지 않겠다는 듯 그 자리에서 단단히 버티고 있었다.

“비켜 줘요.”

“태서야.”

왜 서다래를 안으로 들이냐는 듯한 강세헌의 마땅찮은 부름에 태서가 고개를 들었다.

“걱정되면 형도 같이 들어와요.”

어차피 둘이 해결한다며 강세헌을 밖에 둘 생각은 없었다. 대신 서다래와는 제대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마음 편하게 축복이를 보고 싶었고 온전히 이 행복을 누리기 위해선 이대로 서다래를 돌려보내기 싫었다.

태서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강세헌이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서다래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고 곧 강세헌이 뒤따라 들어오며 문을 닫아 버렸다. 문이 닫히기 직전 한 비서가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것을 끝으로 단절된 공간에 세 사람만 남았다.

“형은 제 안전에만 신경 써 주세요.”

그 외에는 끼어들지 말라는 것으로 선을 그은 태서가 서다래를 마주 보았다. 벌써 병원에서 두 번째였다. 그때 제가 도와달라는 걸 뿌리치고 갈 때는 언제고 더 초췌해져서 나타났다.

“내 꼴을 보려고 온 건 아닌 거 같은데.”

태서가 먼저 운을 떼자 서다래가 움찔했다.

“보다시피 나랑 축복이 다 무사해.”

태서가 제 몸을 잘 보라는 듯 팔을 벌렸다. 서다래의 시선이 태서의 몸을 훑었다. 꾹 닫힌 입술이 아주 조금 벌어졌다. 그 사이로 안도의 한숨 비슷한 게 나오려는 순간 태서의 싸늘한 목소리가 잘라 냈다.

“계단을 구르면서 찢어진 곳은 꿰맸어. 팔도 찢어지고 다리도 찢어졌지. 거기다 양수가 터져서 축복이를 더 품고 있질 못하게 되면서 응급 수술을 해야만 했어. 세헌이 형이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고 빠르게 오지 않았다면… 더 위험했겠지.”

태서가 강세헌을 보며 말했다. 그는 늘 제게 일이 생기고 난 후 한발 늦게 나타난다고 괴로워했지만, 태서한테는 정말 시기적절하게 나타나 준 사람이었다.

“네가 나를 당겨 버린 장소가 병원 비상계단이 아니었다면… 때마침 세헌이 형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태서가 담담하게 읊어대는 가정에 서다래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너는 평생 죄책감을 달고 살았겠지.”

서다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나 때문에 네 인생이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거 이해해.”

자신은 그저 윤태서가 되어서 죽지 않기 위해 강인혁과 서다래로부터 벗어나려고 한 것뿐이었는데 그게 원작을 비틀어 버린 원인이 되어 서다래의 운명이 바뀌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다래야.”

태서의 말이 이어질수록 서다래의 눈빛에 혼란이 차오르고 있었다. 처음엔 무사하다고 하더니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나열해 주며 자신을 원망하는 듯하더니 또 제 걱정 비슷한 것을 해 왔다.

이제는 제가 그렇게 태서를 원망하던 마음을 꼬집어 오는데 그게 자신을 공격하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모든 일에는 네 선택이 있었잖아.”

“…선택?”

“그 선택이 지금의 너를 만든 거야.”

제가 원인이라 할지라도, 강인혁의 마음이 돌아섰다 할지라도 서다래가 꿋꿋하게 버티고 살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말이었다.

“나는 너를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아. 그렇다고 널 위로해 줄 마음도 없으니 너는 네 망가졌다는 인생이나 알아서 챙겨.”

연인이었던 강인혁조차 저를 달래고 둘러대는 말을 할 뿐, 제 불안의 근원은 없애 주지 못했는데 태서의 말을 들으니 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제야 제가 저지른 일이 뭐였는지 그동안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하나둘 떠오르며 서다래의 낯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질투에 눈이 멀어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다. 주먹을 꼭 쥔 서다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하다.”

그 어떤 변명 한마디 없이 돌아선 서다래는 병실을 나갔고… 경찰서로 갔다는 걸 전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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