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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119화 (119/130)

에필로그 2화

수업이 시작되기 전, 태서는 턱을 괴고 강의실을 둘러보았다. 학기가 시작하는 게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여기저기 설렘이 공기처럼 두둥실 부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뭔가 몽글몽글하고 색깔로 치면 분홍분홍한 그런?

“나랑 상관없어서 그런가 엄청 낯서네.”

정말 와닿지 않았다. 차라리 윤서의 침 냄새가 가득한 손바닥에 코를 묻는 게 더 와닿겠다.

“이 수업…….”

“……알파…….”

언뜻 들리는 몇 가지 단어와 들뜬 얼굴들을 보니 이 수업에 유명한 사람이 오나 보다.

‘예전에 강인혁이 나타날 때 저랬던 거 같은데…….’

학기 초가 아닌 얼굴에 익숙해졌을 중반부임에도 강인혁이 나타날 때마다 은근한 시선이 따라붙곤 했다. 이제 강인혁을 떠올려도 아무렇지 않아서 신기했다. 그를 향한 마음이 애절하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신경 쓸 게 없어졌다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잘 지내고 있나?’

강인혁이 외국으로 나간 뒤로는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일 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지만,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긴 하다.

“어련히 잘 지내려고.”

거기서 힘든 일을 할 리도 없고 그냥 멋진 풍경 보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면서 속상한 마음을 달래고 있겠지.

“……차였다는 슬픔을 와인을 마시며 곱씹는 거 아니야? 느끼한 자식.”

눈물 흘리면서 스테이크 써는 상상을 하자 소름이 돋는지 태서가 제 팔을 비볐다.

“윤태서 선배님?”

태서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부른 상대를 바라보았다. 강인혁 생각에 빠져 있다 보니 누군가 다가온 걸 알아채지 못했다.

아까 봤던 그 공룡이었다. 공손하게 말을 걸어오는데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앳된 얼굴에 눈이 갔다.

‘얘구나.’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는 게, 아마 모두가 기다리던 놈이 이 공룡인가 보다.

“저 옆에 앉아도 될까요?”

“아니.”

태서가 단박에 거절했다.

그대로 옆에 앉혔다간 어떤 눈초리를 받을지 몰랐다. 강인혁 때문에 학교에서 나름 유명했고 강세헌과 결혼한 것 때문에 이제 팔릴 얼굴도 없는데 공룡까지 옆에 끼면…….

벌써 지끈거리며 두통이 올라오는 기분에 태서는 공룡을 멀리 밀어 내기로 결정했다.

“다른 데 가서 앉자. 아, 말 놔도 되지?”

“말은 놔도 되는데 다른 데 가서 앉으라는 건 취소해 주면 안 돼요?”

“응.”

“왜요?”

가라면 가지, 이렇게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면……. 태서는 점점 따가워지는 시선에 빨리 설명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너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더라. 그러니까 나보단 너와 친해지고 싶은 사람한테 가는 게 맞지.”

태서의 말에 공룡의 표정이 티가 날 정도로 환하게 밝아졌다.

“저에 대해 유심히 관찰하셨나 봐요.”

“관찰 안 했는데.”

그냥 보였다. 강인혁이 수업에 왔을 때와 다름없는 반응이라 알아차리는 게 어렵지 않았는데 공룡은 이상한 소리를 시전하려 준비 중이었다.

“친해지고 싶다는 사람들 사이에 앉으면 엄청 불편할 거 같아서 왔어요. 저 한 번만 살려 주시면 안 돼요?”

“안…… 돼.”

단어 사이의 망설임이 길었는지 공룡이 옆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앞의 ‘안’은 못 듣고 뒤의 ‘돼’만 들었구나.

“하아, 마음대로 해라.”

싫지만 끝까지 매몰차게 내치지 못한 건 공룡의 입에서 나온 ‘불편’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자신도 다른 이들에게 꽤 많은 시선을 받아서 불편한 게 무엇인지 알지 않나. 물론 공룡에겐 호의적인 관심이겠고 자신은 호의적이지 않은 관찰이지만.

공룡이 자리하니 강의실 안의 분위기가 가라앉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애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으니 공룡이 말을 걸어왔다.

“선배님 실물이 훨씬 더 잘생기셨네요.”

“어디서 봤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엄청 못생기게 나왔나 보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너 잘났다.”

태서가 고개를 돌려 공룡의 얼굴을 보았다. 부드러운 선을 가진 고운 얼굴인데 눈썹이나 코 때문인지 마냥 여리게만 보이지 않았다. 덩치에 비해 앳된 얼굴이라고 느껴지는 그 때문이었나 보다.

누군가와 비교해서 누가 더 잘생겼다거나 그럴 거 없이 잘난 놈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래.”

“저는 공해찬이라고 합니다.”

“응, 그래.”

반가워, 공룡.

태서가 대충 인사를 받아 주고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교수가 들어와 강의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저에 대해서 궁금한 거 없으세요?”

“나에 대해 아는 거 말해 볼래?”

공룡의 물음에 태서가 태블릿 PC를 켜며 받아쳤다.

“KH그룹 강세헌 전무와 결혼했고 아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기를 낳아야 해서 휴학하면서 결혼까지 했다고 들었고 박한수 선배님이랑 친하다는 것도요.”

“그게 다야?”

대외적으로 나와 있는 정보 말고 더 없냐는 물음에 공룡이 잠시 머뭇거렸다.

“섬세하고 순수하시다고…….”

“그게 무슨 소리냐. 예민하고 신경질 많이 부린다는 걸 그렇게 표현하는 거야 지금?”

얼추 비슷하게 맞았는지 공룡이 말이 없었다. 이러니 말 안 하려고 했던 거구나.

딱히 제 소문이 좋게 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서 이상할 것도 없었고 당황스러울 것도 없었다. 당황은 오히려 자신보다 공룡이 한 거 같고.

“나도 다 아니까 그만해도 된다.”

“……데요.”

“뭐?”

교수의 오티를 듣는 태서가 공룡을 보았다.

“저는 잘 모른다고요.”

공룡이 태서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니까 그런 소문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말 안 하려 한 거였어요.”

“와.”

공룡의 진지한 대답에 태서가 감탄을 흘렸다. 아까 스치듯 한 번 보고 대화를 나눈 건 지금이 처음인데 머릿속에 제대로 박혀 버렸다.

공룡이 옅은 미소를 지어 왔다.

“제가 너무 진지했죠?”

“너 얼굴 빨개.”

공룡이 재빨리 제 얼굴을 가리는 걸 본 태서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아니 이 등치로 부끄러워하는 게 말이 되나?

“저 되게 없어 보였어요?”

“아니야, 귀여워. 너 꼭…….”

태서가 말끝을 흐리자 공룡이 손을 살짝 내려 눈만 드러냈다. 소문으로만 듣던 선배를 만나서 신기했다. 예상보다 대화가 즐거웠고 거기다 결혼했다던데, 그런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냥 학교 다니는 일반 선배들과 첫인사를 나누는 느낌…….

“윤서 같아.”

이었는데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이름에 당황하고 말았다.

“윤서요?”

“내 아들.”

태서가 부랴부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배경 화면을 보여 주니 공룡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귀엽지?”

“그러네요.”

“안 귀여워?”

“네?”

“반응이 엄청 딱딱한데?”

“아니 그냥…….”

공룡은 어느새 원래의 얼굴색을 찾았지만, 해괴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는 사진과 태서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솔직히 말했다.

“되게 어려 보이는데 아기가 있다고 하니까…… 그리고 저랑 대화하는 사람 중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아기로 화제가 넘어가는 경우는 처음이라서 당황했어요.”

“애 아빠랑 대화하면 다 이래. 세상 사람들한테 내 자식 자랑하고 싶어서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온다?”

“그렇구나…….”

“너는 싫다니 그만 말할게.”

“아니요. 싫다는 건 아니고 어색했다고요. 다시 보여 주세요.”

태서가 정말인가 싶어 슬쩍 쳐다보니 공룡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고는 알아서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보며 말했다.

“아기는 누워 있거나 엎어져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앉아 있는 거 보니까 더 귀엽네요.”

“앉아 있을 때 뒷모습은 더 장난 아니야. 엄청 귀여워.”

“그래요? 사진 없어요?”

“……잘 못 찍었어.”

“왜요?”

태서가 잠깐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뒤태가 귀엽다고 넋 놓고 있으면…… 그사이에 사고를 치더라고.”

“그건 모든 아기가 다 그래요? 아니면 부모님 닮은 거래요?”

“……글쎄.”

아무리 뻔뻔한 태서라도 윤서가 장난 칠 때마다 강세헌의 시선이 제게 향한다는 걸 말할 순 없었다.

수업을 듣다가 갑자기 왜 이런 잡담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제 자식 자랑할 수 있단 생각에 태서는 다른 걸 돌아보지 못했다.

이를테면 그들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진다거나 그런?

***

“강의실에 앉는 것까지 확인하고 왔습니다.”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닐 텐데? 불량 처리를 어떻게 했는지 알아보라고 했더니 웬 딴소리야.”

“그것도 알려 드리고 겸사겸사 다른 것도 알려 드리면 좋을 거 같아서요.”

강세헌의 질책에도 박한수는 꿋꿋하게 보고서를 내밀며 말했다.

“페로몬 때문에 오랜만에 가는 학교가 다르게 느껴진다고도 했습니다.”

“……옆에 누가 앉는지 봤나?”

강세헌이 묻자 박한수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태서의 모든 것에 신경 쓰는 사람이니 궁금해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앉는 것만 보고 잠깐 있다 왔지만, 제가 볼 때까지는 혼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신경 쓸 부분은 없으실 겁니다.”

혹시 누가 태서에게 다가가는 건 아닐까 걱정할까 봐 박한수가 염려 놓으라고 식의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강세헌은 다른 염려를 드러냈다.

“다 졸업해서 혼자 남았네.”

“아…… 그, 밑에 학번 애들한테 연락해 볼까요?”

“됐어. 태서가 알아서 하겠지.”

“워낙 사교성이 좋으니까 충분히 잘할 것입니다.”

“그 사교성으로 거추장스러운 사람들을 끌어들일까 걱정되네. 내 오메가인 걸 알면서도 들러붙는 놈은 없겠지?”

하나를 막힘없이 대답했다 싶으니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박한수가 제 관자놀이를 긁었다. 간지럽다고 생각했는데 땀이 난 거였다.

상사로는 존경스럽고 모시기 좋은 분인데 태서를 향한 애정을 드러낼 땐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어쨌든 박한수는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답을 꺼냈다.

“설마 있으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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