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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임신했다-124화 (124/130)

에필로그 7화

“안녕하세요. 선배님.”

가방을 내려놓기 무섭게 누군가 말을 걸어오자 태서가 고개를 돌렸다. 세 명의 어린 병아리.

“신입생이구나.”

“네, 저희 알아보세요?”

알아보냐는 질문이 웃겼는지 태서가 웃음을 터트렸다.

“왜 모르겠어. 다른 교양에서도 보잖아. 같은 학과인 데다가 신입생이라 더 기억에 남았는데…….”

마지막 학점을 채울 겸 전공과 교양을 골고루 넣었더니 신입생을 만날 기회가 꽤 있었다. 무슨 명찰을 달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이제 막 1학년이 되었다는 건 바로 알겠다.

‘웃음소리가 맑아서 그런가?’

어쨌든 잘 웃는 병아리들이 말을 걸어오니 태서도 기분 좋은 미소를 드러냈다.

“실은 선배님 처음 봤을 때부터 인사하고 싶었어요.”

“아, 누가 자꾸 날 보나 했더니 너희들이었구나. 미안해. 내가 먼저 말 걸었어야 했는데 부끄러워서…….”

제가 말 걸면 부담스럽다고 싫어할까 봐 지켜본 게 컸기에 태서가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럼 저희가 이렇게 용기 낸 게 더 잘됐네요.”

“그러네. 먼저 말 걸어 줘서 고마워.”

태서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니 병아리들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것을 보던 태서가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렇게 기분 좋게 웃지? 보는 나까지 전염될 거 같아.”

태서의 감탄에 병아리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들은 생각보다 반갑게 맞아 주는 태서의 반응에 더욱 용기를 내어 말했다.

“아직 수업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괜찮으시면 저희랑 카페 다녀오시겠어요?”

태서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일부러 넉넉히 시간을 두고 왔더니 카페에 다녀올 시간이 충분해 보였다.

“그럴까?”

어차피 가방만 내려놓고 앉지 않았으니 바로 가도 무방하다 싶었다. 그런데 의외의 방해꾼이 태서의 앞을 막았다.

“선배님.”

웃음기 없이 바싹 메마른 목소리가 진중하게 울려 왔다.

“커피요.”

공룡이 내민 커피를 얼떨결에 받아 든 태서가 병아리들을 보았다.

“그…… 카페는 다음에 갈까?”

“네.”

잔뜩 아쉬워하는 그들의 모습에 태서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보내 주었다. 자리에 앉으니 자연스럽게 공룡이 옆에 엉덩이를 내리곤 제 몫의 커피를 마셨다. 그를 따라 태서도 커피를 마셨다가 제법 놀랐다는 눈빛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나 라떼 계열 좋아하는 줄 아는데…….”

한두 번 라떼를 들고 다녀서 그런지 아니면 카페에서 종종 마카롱 같은 달콤한 디저트를 먹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제가 단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음료를 택해도 그런 계열이었는데 다 임신하면서 입맛이 달라져서 그런 거였다. 당연히 지금은 단 걸 잘 먹진 않았고.

그런데 공룡이 준 커피는 1샷만 들어간 연한 아메리카노였다. 부드러웠고 진하지 않은 향이 마음에 들었다.

“선배님 아메리카노 좋아하시는 거 같아서요.”

“너…….”

태서가 공룡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센스가 좋구나.”

“제가 이런 세세한 부분을 잘 봐요.”

아까의 그 엄숙한 표정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공룡은 살짝 볼을 붉혔다.

“그래, 이건 인정할 만해. 그런데 왜 다른 친구들이 다가온 건 막은 거야?”

태서가 커피를 마시며 받아쳤다. 공룡이 미리 커피를 사 와서 카페에 다녀올 필요가 없다는 건 알겠는데 제 옆자리를 사수하듯이 앉을 때 눈치챘다.

얘가 다른 사람을 은근히 경계한다는 걸.

“……쟤네들은 귀엽잖아요. 저는 아니고요.”

“음?”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아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니 공룡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덧붙였다.

“지금까지 저를 되게 어린애 보듯 한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제 얼굴과 덩치를 보세요. 쟤네가 가까이 다가오면 비교될 거 아니에요.”

그런 의미였구나.

공룡은 한번 말하기 시작하니 아예 쌓인 걸 다 풀 기세로 쏟아 냈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인데 제 분위기가 무거워 봐야 얼마나 무겁겠어요.”

페로몬이 무겁긴 하다만…….

“제가 말하면 다들 분위기 잡지 말라고 하고요.”

목소리가 낮아서 그런가?

그런데 고민을 듣다 보니 재밌는 건 지난번과 말이 다르다는 거였다. 그땐 다른 사람들이 계속 보는 게 불편해서 제게 왔다고 했다. 제가 눈에 띄는 걸 알고 있다는 투였는데 이번엔 또 달랐다.

남들이 보는 제 이미지가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별로야?”

“그런 건 아니지만 벌써 제 이미지가 굳어지는 거 같다는 거죠.”

아, 싫은 건 아니구나.

공룡이 힐끔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쳤다.

“선배님이 귀여워하는 게 좋다고요.”

쑥스러워하면서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단단한 표정과 곧은 눈빛으로 전해 오는 좋다는 표현에 태서가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저런 표정을 제가 아닌 다른 이가 봤다면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았을까?

제가 봤을 때 남들이 저 공룡을 귀엽게 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저거겠다. 쟤는 평범하게 말해도 얼굴과 목소리 때문에 자신을 유혹하는 건지 착각하게 되는 거다.

“내가 널 귀엽게 본 건…….”

태서가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덩치만 컸지 세세히 들여다보면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내 남편을 매일 보다 가끔 널 보기 때문이야.”

“…….”

“너는 내 남편보다 키도 작고 덩치도 작고 얼굴도 어리지. 거기다 목소리도 뭐 형에 비하면 분위기 있는 것도 아니고 페로몬도 형이 무겁다 보니 너는 딱히? 거기다 세헌이 형이 진짜 플러팅이 장난 아니야. 막 갑자기 들어오고 그러니까 정신을 차릴 수 없다니까?”

강세헌의 한마디에 휘둘릴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손가락을 셀 수 없다.

“그런 남편을 매일 보다가 널 보면 당연히 귀엽지 않겠냐?”

공룡이 정색을 띠며 머리를 뒤로 뺐다. 그 탓에 머리카락을 더 만지지 못한 태서가 아쉬운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진짜 선배님만큼 남편 자랑, 자식 자랑하는 사람을 못 본 거 같아요.”

“플러팅만 시도 때도 없이 하란 법 있냐?”

“뻔뻔해, 뻔뻔해.”

공룡이 고개를 저어 댔다.

“고민은 그게 다야?”

“……있어도 말 못할 거 같아요.”

“내가 다 해결해 줄 수 있는데?”

“괜찮을 거 같아요.”

공룡이 책을 폈다. 아직 교수님이 들어오지 않았는데 공부하겠다니 공룡의 부모님이 보면 아주 뿌듯해하겠다.

“예습도 하고 착하네.”

“회피인데요.”

“복습도 같이 해. 내가 성적이 꽤 나와서 하는 말인데 예습은 다 복습이 탄탄해야 잘 되는 법이거든.”

“잔소리…….”

공룡의 중얼거림을 흘리며 태서도 함께 책을 폈다.

병아리 사이에 낀 공룡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공룡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어쨌든 공룡의 고민을 해결해 준 것만 같아 기분 좋게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살짝 식었지만 맛있다.

***

“공룡이 커피를 사 줘서 카페에 안 갔어요.”

태서는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했고 강세헌은 커피를 마시며 귀를 기울였다.

“아메리카노 사 줘서 그거 마셨죠. 그리고 계속 선배님, 선배님 해서 다음부터는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어요.”

태연하던 강세헌이 멈칫했다. 잠깐 커피잔을 톡톡 두드리더니 입을 열었다.

“형?”

“네. 계속 부담스럽게 부르니까요.”

태서가 아무 생각없이 말을 붙이느라 강세헌의 달라진 표정을 알아채지 못했다.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은 어느새 테이블에 올라갔고 틈틈이 보던 태블릿 PC도 내려놓은 걸.

“거기다 같은 조 하기로 해서 앞으로 수업이 없는 날에도 만날 거 같아요.”

“많이 친해지겠네.”

“복학하자마자 제일 대화를 많이 한 상대가 1학년인 게 신기한데 또 대화가 잘 되는 거 같아서 좋아요.”

가끔 공룡이 태서의 말에 정색할 때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대화가 막힘없이 이어지는 게 대부분이었다.

태서가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냈다. 미래와 함께 보자는 박한수의 메시지를 눈으로 보고는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간단한 답을 보냈다.

“공룡이 편한 이유가 또 있긴 해요.”

전공에서 마주치는 고학년 후배들을 보며 느낀 점을 중얼거렸다.

“저한테 강인혁에 대한 걸 언급하지 않아요.”

어쩌면 이게 제일 큰 차이가 아닐까? 순수하게 지금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니 그게 참 좋았다.

말하고 보니 공룡이 괜찮다고 생각한 이유를 알겠다며 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강세헌에게 생각이 미쳐 그를 바라보았다.

평소엔 제가 소파 아래 바닥에 앉아 있었는데 오늘따라 위치가 바뀌었다. 태서는 소파에 있고 강세헌은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래서 평소와 다르게 그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생각하니 태서의 손이 움찔거렸다. 장난치고 싶었다.

해도 되나 싶은 고민은 짧았고 실행은 빨랐다.

태서가 대뜸 강세헌의 머리에 손을 얹었고 의아해하는 그의 눈빛에 손을 살살 움직였다.

“이렇게 공룡 머리를 쓰다듬어 줬어요.”

핑계가 아주 좋았어.

공룡보다 훨씬 큰 체격을 가졌으면서 뭐가 이렇게 머리카락이 부드러운지. 평소엔 머리를 넘기고 다녀서 더 예상치 못한 촉감이긴 했다.

‘윤서가 형을 닮은 건가?’

아직 아기라서 부드럽다고만 생각했는데 만약 강세헌을 닮는다면 계속 그럴 거 같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쓰다듬고 있으니 강세헌이 고개를 살짝 들어 눈을 마주쳐 왔다.

“그래요. 태서 형?”

어?

태서가 얼음처럼 굳었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려 강세헌과 눈을 마주쳤다. 제가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차 물었다.

“세헌아.”

“네, 형.”

강세헌이 착한 얼굴로 대답해 오니 태서의 입가가 슬쩍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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