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9화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정리하던 공룡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는 태서를 알아챘다.
“형 뭐 해요?”
“아까 수업 전에 온 동영상이 있어서 보고 일어나려고.”
태서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하니 공룡이 몸을 기울여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윤서?”
“응.”
“과자 먹네요? 이거 맛있나?”
“뻥튀기 맛.”
태서가 다른 동영상을 재생했다.
“먼저 가.”
“형은…… 집에서 보는데도 영상으로도 보고 싶어요?”
“응.”
다음 동영상을 재생시키는 태서가 공룡을 향해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고 있으면 좋아. 앗, 너무 귀엽다.”
“윤서가 유독 귀엽게 생기긴 했어요.”
“아니, 윤서 말고 세헌이.”
“…….”
“누구 남편인지 아주 잘생겼네.”
세헌이가 누군지 생각하던 공룡은 질색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체념한 듯 굴었다. 윤태서란 사람과 어울리면 편하고 재밌긴 한데 이렇게 애정을 드러내는 건 몇 번을 경험해도 낯설기만 하다. 진짜 이렇게 스스럼없이 애정 표현하는 사람일 줄 몰랐다.
그냥 갈까? 아니면 물어볼까.
고민하던 공룡은 곧 하나를 정했다.
“이건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 건데…….”
공룡이 가까이 다가와 태서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기 말고 배우자한테도 막 좋아한다는 말 자주 해 주고 그래요?”
“세헌이 형한테?”
태서가 확인을 위해 물어보니 공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많이 하지.”
“그럼…… 그분도?”
공룡이 부드럽게 넘기는 질문에 태서가 피식 웃었다.
“내가 아니라 세헌이 형이 궁금했구나.”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미지가 있다 보니…… 그분 되게 차갑고 이지적인 분위기를 가지셨잖아요. 그게 겉으로만 보이는 이미지라고 해도 아무튼 거리를 좁힐 수 없이 어려운 느낌이 드니까.”
“무슨 느낌인지 알 거 같아.”
태서도 그를 처음 봤을 때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거 같았다. 다만 자신은 벗은 모습이 처음이라 당황스러움이 커서 그렇지만 정상적으로 만났다면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세헌이 형이 또…… 엄청 다정한 사람이라 가까운 사람들은 알지. 꼭 모두가 세헌이 형의 다른 점을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상관없지만.”
“어…… 그 다른 면모를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될 거 같은데요?”
공룡의 중얼거림에 태서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공룡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가 보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린 태서는 멀지 않은 곳에 선 강세헌을 발견했다.
“아, 미쳤어. 진짜…….”
태서가 좋아하는 걸 보고 공룡도 고개를 들어 다시 바라보았다.
“아기를 안고 나타나셨네.”
그것도 막 한 팔에 아기를 앉혀서 데리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아기 띠라는 아이템을 사용하다니…….
“저 모습 인터넷에 뜨겠죠?”
태서는 공룡의 예상을 반박하지 못했다. 대신 빠르게 책상 위의 모든 것을 가방에 쓸어 넣고 일어나자 공룡이 뒤늦게 서둘러 움직였다.
“어? 같이 가요.”
태서가 힐끗 공룡을 보았다. 왜 따라오는지 몰라 따라오지 말라고 하려다가 공룡이 ‘윤서’라고 하니 따라오는 걸 말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강세헌의 앞에 나타난 태서는 거친 숨을 정리하지 않은 채 반가움을 드러냈다.
“회사는요?”
“미리 일정 빼 뒀어.”
“그리고 저 만나러 왔어요? 저야 좋지만…… 일정 미루면 그만큼 일이 많아지잖아요.”
“기뻐하든지 걱정하든지 하나만 할래?”
강세헌의 말에 태서는 제가 웃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면 걱정을 미룰게요.”
태서가 좋아하는 동안 강세헌의 시선이 줄곧 뒤편에 있던 공룡에게 닿았다.
“안녕하세요. 공해찬이라고 합니다.”
공룡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니 강세헌이 그의 얼굴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그 집요한 시선에 공룡은 예의상이라도 웃지 못했다.
‘선배님이 말한 다정하고 따뜻한 남자는 어디 있습니까.’
제 앞에 있는 사람은 집착과 소유욕이 다분한 사람인데요.
“반가웠어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보죠.”
멀뚱히 서 있는 공룡은 내버려 두고 강세헌이 태서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돌아섰다. 원하던 바를 이룬 강세헌은 마음 놓고 태서에게 집중했다.
“네. 그런데 진짜 그냥 온 거예요?”
“집에 가기 전에 호텔에 잠깐 들르려고.”
“아 맞다, 어머니가 한번 시간 내서 오라고 했는데 깜박했어요.”
태서가 그걸 왜 까먹었나 싶어 제 머리를 두드렸다.
“네가 바쁜 거 아니까 어머님이 나한테 전화했어.”
“제가 형보다 바쁘다니.”
“나는 회사 일 아니면 육아만 하는데 넌 아니잖아.”
강세헌의 말에 태서는 찔리는 게 있는지 입을 열지 못했다.
“학교 수업도 듣고 육아도 하고…… 경영 공부도 하지.”
지금 듣고 있는 수업과 별개로 호텔 쪽을.
“들켰네.”
지금껏 틈틈이 시간을 쪼개 공부하면서 가끔 새벽 시간도 썼던 태서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일부러 숨기려는 건 아니었어요.”
오히려 강세헌이 알면 공부하다가 막히는 부분을 물어볼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건 강세헌이 걱정할까 봐 그랬다. 조금만 있으면 학교를 졸업하는데 그 몇 개월을 기다리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최대한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 알았어요?”
“네가 책 사이에 호텔 경영 자료를 몰래 숨겨 다닐 때부터.”
그 정도면 처음부터 안 것과 다름없다. 하긴 강세헌인데…….
“몇 개월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까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조금씩 공부한 게 다예요. 더 없어요.”
태서는 강세헌이 걱정할 만큼 무리하지 않았다는 걸 강조하려고 했다.
“이제 저녁에 해.”
“네?”
“윤서 8시에 자니까 그때부터 해. 그러면 새벽에 안 해도 되잖아.”
“어…….”
말리지 않을뿐더러 더 좋은 방법을 제시해 주니 태서가 잠깐 복잡한 눈빛을 띠곤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돼요?”
“아무것도 안 해서 불안하다면 차라리 공부하고 준비하는 게 낫겠지.”
“역시 형이라면 제 마음이 어떨지 이해해 줄 알았어요.”
강세헌이 받아들여 주니 이제 숨기지 않아도 되겠다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태서가 허공에서 달랑거리는 윤서의 발을 잡았다.
“아빠가 다니는 대학교 어때?”
윤서의 동그란 눈이 이곳저곳 구경하기 바빴다. 유난히 커다란 동공에 빼곡히 들어찬 호기심을 읽은 태서가 발을 흔들어 대며 말을 걸었다.
“저기 저 벤치에서 네 아빠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아?”
“가족 계획.”
강세헌이 대신 대답해 줬다.
“내년에도 올까요? 그때는 윤서가 걸어 다니겠죠?”
“귀엽겠네.”
“그렇죠? 그런데 저 아까 형 보자마자 귀여워서 웃은 거 알아요?”
태서의 재잘거림과 윤서의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오는 오후였다.
***
만족할 만큼 책과 서류를 들여다보던 태서가 뒤늦게 허리를 폈다.
“으아, 너무 무리했나.”
태서가 잔뜩 앓는 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켜며 굳은 어깨를 풀었다. 강세헌이 윤서를 재우겠다고 들어가고부터 태서는 낮에 이야기한 대로 호텔 경영을 공부했다.
허락받았다는 것 때문인지 평소보다 집중이 잘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들여다봤더니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새벽 2시를 넘어서는 시침을 본 태서가 뒤늦게 걱정을 했다. 이렇게 무리하지 말라고 배려해 준 건데.
태서가 책을 정리해 한쪽에 쌓아 두고 일어났다. 어쨌든 가서 자야 내일 강세헌과 얼굴 보고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부터는 적당히 조율해 가며 공부하겠다든지 그런…….
발소리를 죽이고 방에 들어선 태서는 판판한 침대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여기서 안 자고 있으면…….’
곧장 돌아서 윤서의 방으로 향했다. 아까보다 더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간 태서가 수면등 불빛 아래에서 곤히 잠든 윤서와 강세헌을 보고 미소 지었다.
윤서를 재우며 같이 잠든 건지 둘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바닥에 깔린 매트가 침대만큼 푹신하지 않을 텐데 서로의 체온에 기대 깊게 잠에 빠져들었다.
가만히 둘의 얼굴을 바라보던 태서는 도로 나가더니 이불을 들고 들어왔다. 그것으로 강세헌의 몸을 덮어 주고 윤서는 아기 이불을 따로 덮어 줬다.
베개는 둘 다 깰 거 같아 생략한 태서가 강세헌의 옆에 가서 누웠다. 그가 여기 있으니 침대에 가서 혼자 자기 싫었다. 강세헌의 팔에 머리를 기대고 이불을 끌고 와 덮은 태서는 작게 하품하며 눈을 감았다.
“잘 자요.”
방금까지만 해도 잠들려면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싶었던 게 무색하게 금방 눈꺼풀이 무거워져 왔다. 곧 잠이 들려는 찰나 무언가가 제 몸을 끌어안은 것만 같은데 착각인지 모르겠다. 그냥 그것에 기대서 잠들었으니까.
이마에 닿았다 떨어진 것도 깊게 생각하지 않고 넘겼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한 도우미가 거실을 둘러보았다.
“이상하네.”
평소엔 자신을 반겨 주던 고용주가 보이지 않았다. 윤서를 보고 있나 싶어서 도우미는 곧장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윤서가 자고 있을까 조용히 문을 연 도우미가 작게 놀란 숨소리를 터트렸다.
“어머.”
손으로 입을 막은 도우미는 나란히 잠이 든 가족을 보았다.
팔다리를 대자로 쭉 뻗은 채 곤히 잠든 윤서는 자다가 저도 모르게 빙 돌았는지 아빠와 반대 방향으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안 보인다 싶었던 고용주 부부는 윤서와 함께 자고 있었다. 어른이 덮는 이불은 발밑에서 굴러 다니고 아기 이불을 사이좋게 나눠 덮은 채 부족한 온기는 서로에게 붙어 채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고른 숨소리가 느껴지는 평화로운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