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lue I (3/8)

Clue I

“우드, 가의, 그분, 이라.….”

의자에 반쯤 드러누운 몸을 일으키느라 말이 뚝뚝 끊어졌다. 차민은 엄지와 검지로 눈꺼풀 위를 둥글게 문질렀다. 건조한 사무실에서 내내 시달렸더니 눈이 뻑뻑했다.

“연결해줘요.”

하지만 전화를 돌려달라고 말했는데도 대니얼에게선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신문을 정리하던 차민이 뒤늦게야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들자, 그가 곤란하다는 것처럼 먼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혹시 무슨 일 있습니까?”

차민이 뾰족하게 눈을 치떴다. 언제나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는 대니얼이 초조한 얼굴로 딴청을 부리자, 어쩐지 수상하게 느껴졌다.

“설마 루..., 우드가의 그분께서 멋대로 여기까지 찾아온 건 아니겠죠?”

“으음..., 네. 비슷합니다.”

비슷하다고? 묘한 뉘앙스에 차민의 눈초리가 조금 더 가늘어졌다.

“아. 혹시 그 작자가 밖에서 보자고 하던가요?”

“어, 음.... 네. 그런 셈이죠.”

차민은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며 데스크 위에 너부러진 제 짐들을 쓸어 모았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어디로 오라고 하던가요?”

L&C를 찾는 의뢰인들은 돈만 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시간당 출장비를 배 이상으로 지급하니, 회사에서도 어지간한 진상이 아니고서야 고객들의 요구는 눈감아 주는 편이었다. 특정 브랜드의 디저트나 한정판 신발 같은 걸 구해 오지 않으면 미팅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의뢰인들도 종종 있는 판국인데, 자기 편한 장소로 나오라는 것 정도는 까다로운 요구라고 할 수 없었다.

“대니얼? 약속 장소가.”

그와 동시에 지잉, 하고 골이 흔들릴 정도의 진동이 느껴졌다. 지진인가? 서부도 아니고 동부에 지진이라니? 핸드폰을 비롯한 소지품 두어 개를 쥔 차민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누군가 발목을 잡아챈 것처럼 몸이 크게 고꾸라졌다.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처박을 것 같아 팔을 허우적거렸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고서도 예견했던 충돌의 순간은 다가오지 않았다. 고통 또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의아해진 차민이 꾹 감았던 슬쩍 눈을 뜨자... 놀랍게도 사무실이 아닌, 알 수 없는 새카만 공간 속에 둥실둥실 떠 있었다. 제 몸도 내려다볼 수 없는 완벽한 어둠이었다. 광활 한심해 한복판에 내던져진다면 이런 기분일까? 감히 인간이 닿을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호흡이 어려워졌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지만 분명 바람도 세차게 불고 있었고 공기도 충만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제 몸만 피해 가는 듯했다. 무형의 공간은 이질적인 차민의 존재를 당장이라도 없애고 싶은 것처럼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차민은 입을 뻐끔거리며 조금이라도 숨을 쉬어보려 애썼다. 그렇지만 발버둥을 칠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한층 더 거세게 숨통을 틀어막아버렸다. 공포로 온몸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무거워진 몸뚱이는 한없이 어딘가로 추락하고 있었고, 곧 한계였다.

그리고 그대로 까무러치기 직전, 사무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발목이 덥석 붙들리더니 몸이 위쪽으로 쑥 당겨졌다.

“헉.... 커억....!”

누군가 흉강을 둔기로 내려치는 것만 같았다. 차민은 목을 붙든 채로 한참이나 컥컥거리며 밭은 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지만... 그래도 죽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효율적이지만 인간에겐 그다지 좋지 않은 방법이었던 것 같군.”

격하게 들썩이던 몸이 조금씩 차분하게 가라앉을 때쯤, 정수리 위로 여상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루카스였다.

“다시는....”

다시는 이따위 방식으로 사람을 부르지 말라고 화를 내려던 차민은…, 이내 스스로를 다스리려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카스와 길게 말을 섞을수록 불리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그는 L&C에서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아 하는 고객이었다. 더 불어 노아의 생명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그에게 아쉬운 것이 많은 제가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일은 잘 되어가고?”

그렇지만 사람을 극한의 공포로 몰아넣은 직후에 고작 업무 전체에 대해 뭉뚱그려 묻고 있으니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하. 겨우 그게 궁금해서 불렀어?”

“그러니까 제때 보고를 해줬어야지.”

“아아, 그래? 오늘 아침에 내가 보낸 건 메일이 아니고 쓰레기였나?”

루카스가 무슨 소리를 해도 참자고 다짐했던 것이 불과 몇 초 전이었는데, 말도 안 되는 트집에 사나운 말씨가 튀어 나가고 말았다.

매일 아침 7시에 루카스의 비서실로 보고서가 전달되고 있었다. 메시지나 전화로 긴급히 공조를 요할 때에도 끄트머리마다 아침의 보고서에 대한 이야기를 반드시 언급하곤 했다. 메일 참조인 목록에 루카스 본인은 물론이고 L&C의 대표 메일주소까지 떡하니 적혀 있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트집인지.

“그런 영양가 없는 소식이나 받아볼 거였으면 L&C에 그 돈을 줄 이유가 없지 않나? 업데이트된 내용이 전혀 없는데 그걸 보고서라고 할 수 있어?”

“고작 일주일 지났는데 늦다고 독촉을 할 거였으면 처음부터 알아서 해결을 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한낱 인간들의 로펌 따위에 찾아올 필요도 없었을 거 아니야.”

플린 미디어는 상대해야 할 사람이 워낙 많아서 그렇지, 그래도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처음에야 하나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플린이라는 성姓에 살짝 기가 죽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시무시한 우드가의 위명보다야 못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라에서 하지 못할 일은 없으니, 곧 최고의 로비스트들이 성과를 증명해 보일 터였다. 잘만 해결하면 L&C는 물론이고 우드가에 제대로 눈도장을 찍을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플린가를 구워삶았다는 포트폴리오마저 챙길 수 있는 둘도 없을 기회였다.

차민은 경쟁으로 불이 붙은 로비스트들의 몸값을 적당히 후려치다가, 그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법적 분쟁을 잘 짚어 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아니면 불법도 합법으로 둔갑을 시킬 방법을 찾아본다거나.

애초에 인간이 ‘비스트’를 상대로, 그것도 물질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요원했다. 그러니 플린 쪽의 일은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것이다.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 올렸던 혼인신고를 무효로 돌리는 소송인데.... 대역을 구하는 일이야 어렵지 않았지만 그 이후를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대역의 입막음을 보장할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속 모르는 직원 하나는 킬러를 고용하면 되는 일 아니냐고 했지만, 어떤 비밀은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방아쇠가 당겨지기도 한다.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이 의뢰에서 어떠한 허점도 남기고 싶지 않았기에 차민은 여전히 방법을 고심하는 중이었다.

“원래 우드가에서 알아서 다 해먹을 수 있는 거, 인간들의 눈을 속일 심사로 송사라는 절차를 택한 거잖아. 그러면 L&C가 내가 어련히 알아서 해줄 거라고 믿고, 제발. 적당히 좀 쪼아.”

날이 선 당부가 의외라는 듯 루카스가 빤히 차민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슬쩍 틀고는 픽 웃었다. 무언가를 되짚어보기라도 하는 듯, 몇 번이나.

“루카스.”

“아아…. 처음에 내 얼굴 마주하고서는 말도 제대로 못 했던 게 생각나서. 너 그때 라커룸 문 뒤에 숨어 있지 않았었나.”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주제에 차민의 미간이 콱 구겨졌다.

“지금 그게 뭐가 중요, ”

“나를 보고 넋을 놓다가 말이나 더듬던 네가 변호사가, 그것도 무려 L&C 소속의 변호사가 되었다는 게 아직도 신기해서.”

차민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가뜩이나 피로로 짓눌리고 있던 신경줄이 투둑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할 말이라는 게, 그게 다야?”

“당연히 아니지.”

딸각이는 소리와 함께 루카스와 차민을 둘러싼 배경이 바뀌었다. 말 그대로 눈 깜빡하는 사이였다. 클릭 한 번으로 슬라이드가 바뀐 것만 같은 손쉬운 공간의 이동이었다. 잠시 어벙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차민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렇게 쉽게 손을 쓸 수 있으면서. 방금 전에는 일부러 저를 괴롭게 한 게 뻔했다.

“물론 추측에 불과하지만... 네 감상을 듣고 싶어서.”

루카스가 기하학적인 디자인의 의자 위로 길게 몸을 기댔다. 고대 그리스의 오만하고 게으른 귀족 같은 모양새였다.

“그간 지나치게 평온하다는 생각, 해본 적 없어?”

“뭐? 평온?”

“그래. 나든, 우드가의 누구든 충분히 너를 찾아가 들쑤실 수 있는 상황이지 않았나. 무려 인간이 우드가의 피가 흐르는 아이를 낳았다는데.”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널 찾아가는 건 고작 카터 하나뿐이었지, 하며 루카스가 차민을 올려다보았다.

“환장할 노릇이었지. 카터에게선 그 어떤 각인의 흔적도 찾을 수 없고, 그렇다고 내 ‘반려’의 각인이 깨진 것도 아니고.… 네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다는 보고야 대충 받기는 했지만, 이상하게 누구든 마음먹고서 너와 그 애새끼에게 제대로 접촉해보려고 하면..., 교묘하게 시야가 차단이 되더란 말이지.”

차민은 혹시라도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할까 봐 아예 뒷짐을 지기로 했다. 애써 유지한 무표정이 자연스럽기를 바랐다. 루카스의 눈길이 차민의 허리춤에, 서성이는 발끝과 눈썹에 머물렀다. 저의 흠을 찾아내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카터와 나눈 맹약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알려준 정보이긴 했다. 간절히 바라면 우드가의 야수들과 그들의 복속이 자신과 노아를 찾아내지 못할 거라고.

아이를 낳아 루카스와의 각인은 여전히 유효하겠지만 차민이 온 마음을 다해 바라는 한, 그가 노아의 바로 곁을 스쳐 가도 눈치재지 못할 테니, 무사할 수 있을 거라고.

“너를 다시 만난 이후로는 더더욱 의아해지더군. 카터야 죽었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내 흔적마저 전혀 느껴지질 않았으니까. 그래서 생각해본 끝에 세 가지 결론을 내리기로 했어.”

잘 뻗은 몸을 일으킨 루카스가 차민을 향해 무심히 발을 내딛었다.

“첫째, 인간의 몸으로 인위적인 방법을 통해 야수의 아이를 갖게 되어 전례엔 찾아볼 수 없던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났다는 것. 어쩌면 네가 먹은 그 불완전한 약이 나의 기운이 든 카터의 기운이든 모조리 같은 것으로 인식해버린 걸 수도 있겠지.”

인간은 변수가 많다는 대전체는 맞았지만, 이후의 방향은 전부 틀렸다. 루카스는 차민이 두 개제에게 모두 정액을 받아내 고유의 기운이 섞여버렸다,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애초부터 루카스는 자신이 그와 카터, 모두와 잤다는 생각을 지워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둘째, 나든, 카터든 너에게 남겨진 모든 ‘비스트’의 흔적들을 그 애새끼가 모조리 흡수해버렸다. 이렇게 되면 너에겐 ‘반려’의 흔적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겠지. 이것 역시 제법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야. 고대 문헌에서 찾아 낸 사례니까.”

어느새 성큼 다가온 루카스가 차민의 어깨를 짚었다. 커다란 손이 제 팔뚝으로, 가슴께로 물 흐르듯 자연스레 흐르더니 기어이 재킷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루카스!”

갑작스럽게 흘러가는 섹슈얼한 분위기에 화들짝 놀라 루카스를 밀쳐내려고 했지만, 애꿎은 옷만 휴지조각처럼 찢어져버렸다.

“그래서 그 애새끼를 소환해보려고 했지. 일단 직접 마주하면 내 앤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런데 먹히질 않는 거야. 무슨 수를 써도.”

마지막 문장은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음색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셋째, 이런 상황을..., 그러니까 나 혹은 ‘비스트’들과 마주치게 될 상황을, 한때 나의 ‘반려’였던 네가 바라지 않았다. 정확히는 같은 ‘비스트’가 아닌 인간을 ‘반려’로 맞게 될 때에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더군.”

카터 역시 그렇게 말해준 적 있었다. 야수에 비해 한없이 보잘것없는 인간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선물 받은 마지막 방어선 같은 것이니, 절대 마음이 약해져선 안 된다고.

“그러니 노아를 데려와 그러고 싶다고 소원해, 지금 당장,”

커다란 루카스의 손을 멀거니 바라보던 차민은,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뿌리쳤다.

“...그렇게 말해줘도 난 전혀 모르는 일이야. 네 말대로 변수가 많은 인간이잖아. 혹시 실험 관찰을 하고 싶은 거라면, 네 연구소가 있으니....”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데려와. 노아.”

차민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맹약의 범위는 생각 보다 넓어서, 이 정도의 대화에서도 목소리를 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직접 보고 원인을 파악해야 너와 내 문제도 고칠 수 있을 거 아냐.”

입을 꾹 닫아버린 차민을 보고, 루카스가 신물이 난다는 듯 연신 마른세수를 했다.

“너나 그 빌어먹을 애새끼야 나를 안 보고 살겠다고 염불을 외우는 걸로 모두 끝내기로 한 모양이지만, 어이없게도 내 몸은 아직도 다른 ‘반려’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그 애새끼라도 봐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아냐!”

“아...”

루카스의 차가운 일갈에 차민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너야말로 새로운 실험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나와의 각인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는지? 아니면 잘난 네 아버지나 카터 그 새끼의 유언이라도 돼?”

“그건..., 그런 건 절대 아니야.….”

다행스럽게도 이 대목에선 목소리가 나왔고 고개도 저을 수 있었다.

루카스가 알게 되면 저를 죽이고 싶겠지만..., 사실 각인에 대해서는 지금껏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연구원의 아들이, 한낱 인간이 감히 우드가의 씨를 품었다. 여기서 카터가 중간중간 벌였던 일들은, 아마 루카스가 지금까지도 오해하고 있는 부분들은 조금도 참작되지 않을 터였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이후로, 차민의 사고는 그저 원초적인 본능에 기대어 흘러가고 있었다. 고작 스물을 갓 넘긴 어린 인간이 뭐 그리 대단한 해안을 가질 수 있을까. 그저 살고 싶었다. 그리고 살리고 싶었다. 멍청하게 속아 넘어갔던 저야 그렇다 치더라도, 부모님과 노아에겐 죄가 없었다.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조금만..., 시간을 주면….”

차민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맹약을 피해 갈 수 있는 단어를 고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답답했지만 그 와중에도 약간의 희망이 생기는 것도 같았다. 좋든 싫든 당분간은 서로 얼굴 볼 일이 많을 예정이니, 루카스 또한 언젠가 깰 수 없는 맹약에 대해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시간이라....”

그건 차민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당장 루카스의 동공에 스친 것은 명백한 살의였다. 사정을 모르는 그는 무엇을 말해도 시원스러운 답을 내주지 않는 자신이 답답할 법도 했다.

“네가 그렇게까지 나의 ‘반려’라는 오해를 풀고 싶지 않은 거라면....”

커다란 손이 차민의 턱 끝을 억세게 붙들었다. 그 바람에 자연스럽게 입이 열리자, 루카스가 부드럽게 검지를 밀어 넣었다. 손가락이 목구멍까지 닿자, 그제야 그가 저에게 무언가를 집어 삼키게 할 심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꺼이 이 재회를 기념해야겠지.”

“...이, 이게 뭐.….”

루카스가 목구멍 부근을 부드럽게 누르자, 자연스레 침을 꿀꺽 삼키게 됐다. 무언가 식도를 타고 넘어간 건 확실한데,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그래. 꼭 조그만 구슬 같았다.

“글쎄. 네 난잡함을 일깨워줄 보석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까?”

“무슨 말도 안.….”

사납게 루카스의 손을 내치려던 차민은 그대로 휘청거리며 주저앉아버렸다. 갑작스레 안쪽에서 맹렬하게 번지는 뜨거운 기운에 몸이 멋대로 너붓거렸다. 뭘 먹인 거야. 무슨 짓이야. 난잡함이라니? 채 끝내지 못한 말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의문들이 뻣뻣하게 굳은 혀뿌리에 맴돌았다.

“한차민.”

이름이 불리고, 아주 살짝 그와 손끝이 스쳤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속에서 지글지글 끓고 있던 무언가가 펑, 하고 터져버린 기분이었다. 온 혈맥이 쿵쿵 세게 뛰었다. 강도는 좀 다르긴 했지만 조금 전 겪었던 시커먼 공간 속에 잠겨 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정체 모를 압력으로 터질 것 같은 몸뚱이. 내가 내 몸을 통제할 수 없다는 두려움과 무력함.

“조만간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만나고 싶어질 때가 올 거야.”

차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직전에 루카스가 뭐라고 했더라.... 방금 삼킨 무언가로 인해 난잡함이 일깨워진다고 했던 가.

당장 생각나는 것은 미약의 기능이었다. 궁지에 몰린 거친 호흡이 제 귓가에도 생생히 들렸다.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곧 닥쳐올 곤란함이 두려웠다. 아마 눈이 뒤집힐 정도로 몸이 달아오르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무슨 일이 있어도.”

예전에도 그가 가져온 신기한 물건들 때문에 별 희한한 쾌락을 다 겪어본 바 있었다. 수업을 모조리 빠지고 루카스의 기숙사 침대 위에서 뒹굴었던 건 양반이었다. 끊임없이 진동하는 조그만 막을 유두에 부착한 채로 배터리가 나갈 때까지 폰섹스를 한 적도 있었고, 이상한 거울이 설치된 방 안에서 서너 명으로 불어난 루카스에게 동시에 범해졌던 적도 있었다.

분명 구멍을 쑤시고 있는 건 하나의 자지인데, 두 개가 동시에 꽂혀 뒤를 긁어내리는 것만 같았다. 루카스에게 박힌 채로, 거울 속의 또 다른 루카스들이 내내 빨려 크게 부푼 젖꼭지를 잘근잘근 짓이기기도 했다.

그래서 싫었냐고 물으면..., 물론 좋기는 했다. 상상도 못 했던 자극에 몸에 있는 모든 수분기가 빠져 나가는 듯한 극한의 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렇게 좋았음에도 다시 겪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좋아서 괴로웠다. 무서웠다. 그나마 루카스를 좋아하니까 끝까지 견딜 수 있었을 정도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성감이었다.

그리고 지금, 한동안 잊은 채 살았던 감각이 다시 빠듯하게 차오를 예정이었다. 차민은 온몸에 힘을 주었다. 하도 뻣뻣하게 굳은 탓에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멋대로 곱아들어가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조금 흐르자 거센 맥동이, 호흡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마치 평소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너, 나한테 뭘 먹인 거야?”

“아주 비싼 보석이라고 했잖아.”

“대체 그걸....”

루카스는 들은 체도 않고는 차민의 몸 이곳저곳을 훑었다. 엉덩이와 아랫도리, 귀 뒤쪽부터 쇄골까지. 성적인 의도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수색에 가까운 손짓이었다.

“아. 여기 있네.”

가슴 위를 배회하던 루카스의 손이 돌연 유두 부근을 쿡 찔렀다. 놀랍게도 살덩이가 아닌 단단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존재감이 크지는 않았고... 유륜에 조그만 피어싱을 한다면 딱 이 정도일 것 같았다.

“…뭐야, 이거?”

“‘버튼’은 기억나지? 예전에 몇 번 쓴 적 있는데.”

구멍 안쪽에 심어, 상대방이 허락하기 전까지는 사정할 수 없는 ‘비스트’들의 피임도구. 잊어버렸을 리가. 맨 정신인 루카스와 처음으로 섹스할 때 사용했던 장치였다.

“이건 ‘벨’이라고 해. 뱀 수인들이 주로 쓰는 도구지. 겉으로 보기엔 예쁜 장식처럼 보일 테니까 크게 거슬리진 않을 거야.”

루카스가 셔츠 위를 긁어내리자 손톱 끝에 무언가가 달칵 걸리는 소리가 났다.

“네가 한계까지 달아오르면 바로 나에게로 올 수 있어. 방금 전에 네 사무실에서 이곳까지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한계까지 달아오르면...? 그건 무슨 뜻이야? 내가 이것 때문에 조만간 발정이라도 난다는 뜻이야?”

“인간에게 발정기가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루카스가 갈고리처럼 구부린 검지로 차민의 미간을 톡 두드렸다. 어린아이에게 잘 생각해보라고 어르기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차민은 제 가슴 위를 손바닥으로 투박하게 더듬었다. 흘끗 내려다보니 과연 ‘벨’은 옷 위로 도드라지지는 물건은 아닌 것 같았다.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는 벗어봐야 알 것 같지만.

“잠깐만, 그러니까 앞으로 내가 널 찾을 일이 생기면....”

퍽퍽 내리치듯 제 가슴을 눌러보던 차민은, 뒤늦게 떠오른 루카스의 의중에 경악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설마 혼자서 자위라도 하라는 거야?”

“그럴 수도 있고.”

“제발, 말이 되는 소리 좀 해. 내가 지금 누구네 업무를 처리하느라 머리가 쪼개지는 중인데. 급한 와중에도 너와 만날 일이 생기면 사무실에서 좆이나 잡고 흔들라는 소리야?”

“내가 널 필요로 할 때도 이런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한 가? 난 네 고객인데. 오직 네 쪽에서 날 보고 싶어할 때 사용하게 될 거야.”

차민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먼저 널 보고 싶어 할 거라고? 그럴 일이 있을 것 같아?”

“글쎄.”

루카스는 미진한 웃음을 띤 채로 차민의 상박을 훑었다.

“참, 하나 알아둘 게 있는데, ‘벨’의 위치는 수시로 이동 해.”

차민은 눈을 깜빡이다 멍하니 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이동한다고? 이게?

“지금이야 여기에 달려 있지만 내일은 네 좆에 꽂혀 있을 수도 있고, 구멍 아래 박혀 있을 수도 있다는 거지.”

“뭐? 그런 걸 나한테 먹였다고?”

“아프지는 않을 거야. 다만, 네가 그때그때 가장 기분을 내기 좋은 곳에 알아서 박혀 있을 테니까... 날 부르고 싶어질 때 그 부근을 자극하면 조금 더 속도가 빨라지겠지?”

조명을 받은 루카스의 눈동자가 오묘한 색으로 빛났다. 조금 느리게 그의 말을 이해한 차민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지금은... 네 젖꼭지가 가장 예민하다는 뜻이겠군.”

차민은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가슴 또한 루카스가 집요하게 길들인 부위긴 했지만, 당장 자극에 목말라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내 운전기사에게도 다릴 벌리겠다고 했던 가? 그렇게 대꾸하기에 몸 로비에 제법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군. 빨린 지 꽤 오래된 모양인데.”

루카스가 엄지로 ‘벨’이 박한 바로 아래를 쓸었다. 빳빳한 셔츠에 쓸린 유두가 금세 도톰하게 부풀었다.

“이런 관계가 싫다면 노아를 내 앞에 데려와.”

루카스가 뾰족하게 솟은 차민의 젖꼭지를 꼬집듯 쥐고는 세게 비틀었다. 어깨를 웅크려보았지만 함부로 휘젓는 그의 손길에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인간의 피가 섞여 어떤 기운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골백번 죽여도 시원치 않은 카터의 씨라고 해도... ‘비스트’의 수장으로서 기꺼이 은총을 베풀어줄 테니, 앞에 데리고 오기만 해. 그렇지 않으면,”

“하, 흣..., 지마...!”

“네가 언제까지고 내 손에서 이렇게 놀아나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하겠어.”

발끝부터 찌릿한 전류가 올라왔다. 몸을 훑고 가는 쾌락의 궤적이 선명히 느껴졌다. 힘껏 루카스를 밀어냈지만 데인 듯한 강렬한 감각은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차민은 상체를 숙이며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무릎을 짚은 손끝이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뭐, 한낱 인간인 네가 과연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차민은 제 손 아래서 잔뜩 구겨진 검은 정장 바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쩌면 구겨져 시든 것은 제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

차민은 물에 젖은 손으로 습기 어린 거울을 닦았다. 손자국이 남은 표면 위로 한쪽 가슴에 달린 보석이 반짝이며 존재감을 자랑했다. 한 개가 아니라 대칭으로 두 개가 박혀 있어서, 피어싱 같지 않을까 예상했던 형태 그대로였다. 다만 만지거나 잡아당겨도 떼어지진 않았다. 얼핏 보기엔 스티커 같기도 한데. 대체 어떤 원리로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건지 전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루카스의 말에 따르자면 이 보석이 자기 멋대로 위치를 바꿀 수 있는 모양인데, 아직까지는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지 않았다. 더 민망한 곳에 가서 붙어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하아….”

샤워부스를 짚은 채 한참을 한숨만 내쉬던 차민은, 밖에서 들리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서둘러 젖은 머리를 털어냈다. 노아가 깬 모양이었다.

“노아, 일어났어?”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지만 노아는 방 안에서 눈을 비비며 방싯 웃고 있을 것이다. 곱실거리는 갈색머리가 제 멋대로 늘린 채로, 사과 같은 붉은 뺨을 하고서.

“배는 안 고프지?”

방문을 열자, 아기용 침대의 난간을 붙들고서 노아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간만에 차민이 집에 있어 기분이 좋은지, 말은커녕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면서 입을 연신 벙긋거리기도 했다.

“나는... 이게 가장 어려워. 너도 이제 열 살이잖아. 햇수로만 따지면.”

노아의 결 좋은 곱슬머리를 헝클어뜨리던 차민이 서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도 자라지 않은 아들과 눈높이를 마주했다.

“그런데 아직도 아기처럼 이유식을 줘야 하는 건지.... 식사 텀은 이대로도 괜찮은 건지.”

차민의 속도 모르고 노아가 장난을 치듯 콧잔등을 찡그리며 몸을 흔들었다. 유순한 고동색 눈동자가, 정수리와 뺨에서 풍기는 베이비파우더 향이 사랑스러웠다.

“그래도 다행이지? 갈수록 새로운 이유식도 많이 나오고 있잖아. 퓨레도 있고, 간식도 생기고.”

간식이라는 말을 들은 노아가 입술을 씰룩였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차민의 어깨가 그제야 부드럽게 풀어졌다. 노아를 보니 그간의 피로가 조금은 덜어지는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아이였지만, 워낙 격무가 많은 직업이다 보니 두 명의 시터가 교대로 노아를 봐 주고 있었다. 홍콩 지사에서도 만만치 않았는데 본사는 더 했다. 루카스의 일은 논외로 두고 보더라도 그랬다. 그래도 시간이 좀 흐르면 눈치를 봐서 집으로 일거리를 가져올 생각이었지만....

“아빠가 왜 노아라는 이름을 지어줬는지 알지?”

틈이 날 때마다 한 이야기였다. 노아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방실방실 웃으며 차민을 바라보았다.

“신의 사랑을 받아서, 세상이 무너지던 그날에도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의 이름이래. 물론 아빠는 종교 같은 거 믿지 않지만....”

결국은 다시 루카스와 마주치게 됐고, 흘린 말에 따르면 고대 문헌도 뒤적이고 있다고 하니 금세 발설할 수 없는 맹약에 대해서도 깨닫게 되지 않을까.

물론 숨어 살던 예전이라면 몰라도, 이왕 이렇게 됐으니 그에게 신호를 줄 수 있도록 차민 또한 여러 방안을 갈구해 볼 터였다. 물론 노아에게 카터의 피가 흐른다는 오해가 벗겨진다고 한들, 자신이 원하지 않는 한 루카스는 아이를 데려갈 수 없을 테고.

“적어도 네 신변이 무사할 거라는 확신만 생기면....”

우드가의 그 누구도 노아를 실험대상 따위로 여기지 않을 거라는, 절대 다치게 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만 지켜질 수 있다면.... 언젠가 한 줌 흙이 될 저보다야 루카스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을 듯도 하다.

“...노아, 방금 든 생각인데. 루카스한테 그 맹약이라는 걸 해보자고 할까? 효과가 제법 좋은 듯한데.”

차민은 턱을 괴고서 난간 너머의 천사 같은 얼굴을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10년간 자라지 않은 작고 통통한 손가락이 차민의 검지와 중지를 어설프게 붙들었다. 아빠의 복잡한 심정을 달래주기라도 하듯이.

“아이구, 예뻐라. 우리 노아가 제일 예쁘네.”

따끈따끈한 온기에 기분이 좋아진 차민이 손을 뻗어 노아를 품에 안았다. 분명 열 살인데도 외양이 한참 어려 보여서 그런지 자꾸만 아기처럼 어르게 된다.

“...노아?”

그런데…, 품에 안긴 노아가 조금 이상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멀쩡하게 웃고 있었는데, 차민에게 안기자마자 전원이 다 된 인형처럼 추욱 팔다리가 늘어져버렸다.

“아….”

힘을 잃은 조그만 머리가 어깨에 콩, 하고 닿았다. 차민은 노아를 세게 안은 채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뜨거웠다. 치익, 하고 수증기가 끓어오르는 소리가 났다. 노아를, 그리고 자신을 내내 지독하게 괴롭히던 이유 모를 고열이 다시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하, 하하….”

차민은 기가 막혀서 헛숨을 연신 들이켰다. 이래서..., 이래서 어제 루카스가 조만간 자신을 만나고 싶어질 거라고 했나.

바람 빠진 풍선처럼 허망한 웃음을 흘리던 차민은 제 살을 녹일 것 같은 무시무시한 열기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다급한 마음에 차민의 손이 자꾸만 헛돌았다. 지금 자존심 같은 걸 챙길 때가 아니었다. 우선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노아부터 조심스레 침대에 누이고, 어딘가에 너부러져 있는 핸드폰을 찾았다. 그렇지만,

“이 빌어먹을...!”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예견이라도 했는지 루카스를 비롯해 그의 비서진 전원의 핸드폰이 모조리 꺼져 있었다.

*

“한 변호사가 홍콩에서 일하던 시절, 곁의 사람들을 통해 수집한 정보입니다.”

루카스의 미간이 못마땅한 듯 찌푸려졌다. 대니얼이 내민 서류철의 두께가 생각보다 얇았던 탓이다.

“겨우 이거밖에 없다고?”

파일은 빠르게 넘겨볼 수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안에 적힌 이야기들은 그리 영양가가 없어 보였다. 자주 가던 마트의 직원, 맨션의 관리인들.... 이런 스쳐 가는 사람들에게서 무슨 숨겨진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베이비시터는? 언제나 둘 이상을 썼다며. 애가 도통 자라지를 않는데 당연히 의아하게 생각했을 거 아냐.”

“바뀐 주기가 일정한 데다 행적이 전부 묘연한 것을 보면 카터 쪽에서 처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카터, 카터라....”

중얼거리는 루카스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그 반편이 같은 새끼가 끝까지 발목을 잡을 거라곤 전혀 예상 못 했는데 말이야.”

사람들은 물론이고 ‘비스트’들에게도 설명하기가 어려워 카터와는 형제라고 말을 하고 있긴 했지만, 당연히 평범한 혈육 같은 게 아니었다. 카터는 제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처음 마주쳤을 때 반은 같은 피가 흘렀지만 나머지 반은 그렇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게 전부였고, 그 이유로 형제 같은 적당한 말로 둘러댔을 뿐이었다.

가장 강한 개체만 남기기 위해 모체나 부체를 죽여가면서까지 각인 상대를 바꾸고는, 형제들을 많이 낳아 무한한 경쟁으로 밀어 넣는 종도 있었다. 차민을 비롯한 인간들과 ‘비스트’들은 우드가 역시 전자와 같은 경우라고 이해하고 있었지만, 사실 우드가의 핏줄은 조금 달랐다.

루카스는 저를 낳은 모체가 있었다는 것은 어렴풋이 인지했지만, 부체 쪽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누군가 언급하기 전까지는 의식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와 관련한 기억만 도려낸 것처럼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모체, 그러니까 루카스를 임신한 쪽이 남성의 ‘비스트’였다는 건 알겠는데, 부체는 성별조차 모호했다.

이건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다른 우드가의 야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 숨통이 끊기기 직전에 그들이 헐떡이며 내뱉은 고백이니, 아마 틀리지는 않으리라.

본디 우드가의 어린 야수들은 ‘요람’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자연스레 타고난 힘을 다스릴 줄 알았다. 이 괴상한 생태계에서 자신의 존재가 어느 정도의 무게감을 지니는지도, 자신이 지닌 힘의 한계도, 언젠가는 가장 센 놈에게 갈가리 찢겨 죽을 운명이라는 것도.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체득한 본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루카스는 상당히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최초의 기억을 인지한 그 순간부터 이 세상에서 자신을 해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우드가의 핏줄에게 종족의 이름 따위를 붙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자신과 같은 우드가의 수장들은, 지금 발 딛고 선 이 지루한 땅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견디고 나면 언젠가는 신이 될 테니까.

“그래서, 한차민과는 가까워졌고?”

“진심으로 여쭈시는 건 아니지요? 그러면 그럴 틈을 좀 주시는 게 어떨까요? 폭탄처럼 업무가 터지고 있다고요. 전 심지어 변호사니, 로펌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고요.”

대니얼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는 차민에게 붙여주려 부랴부랴 L&C로 투입한 루카스의 손속이었다. 좀 더 정확히는, 루카스가 우드가의 수장으로 올라서고자 죽여버린 다른 형제들 중 하나의 아이였다.

처음 대니얼을 마주쳤을 때, 루카스는 그를 인간이라고 착각했을 정도로 ‘비스트’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힘이 아주 약한 ‘비스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대니얼은 당연히 있으나 마나 한 미약한 기운을 타고났고, 이를 마뜩찮게 여긴 부체, 우드가의 ‘비스트’에게 모든 권능을 빼앗겼다고 했다. 차민의 아이..., 그러니까 노아가 카터 혹은 루카스의 힘을 흡수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대니얼의 사례에서 실마리를 얻은 것이었다.

“그래도 사무실에서 사진을 봤다며. 그럼 이제 넌 그 애새끼 얼굴 정도는 인식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한 변호사가 집에 초대를 해주는 게 아니라면 아이를 직접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듯합니다. 심부름으로 서류를 보내느라 집 주소까지 명확히 인지가 됐음에도 쉽지 않았어요.”

심지어 문 앞까지 찾아갔는데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면서 대니얼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무슨 원리인지는 아직도 명확히 모르겠지만, 정제 모를 보호막이 어찌나 대단한지 차민의 허락 없이는 노아 근처에 접근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대니얼을 루카스의 사람이라 여기지 않은 차민의 무방비함 덕분에 이 정도까지 식별할 수 있게 된 거였다. 아무리 용을 써도 뿌연 안개에 가로막힌 듯 손에 잡히지 않았던 때와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야.”

루카스가 얼음 잔을 좌우로 기울였다. 한 치의 오차 없이 같은 크기로 둥글게 깎인 얼음들이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화려하게 반짝였다.

“인간들의 사회는 점점 복잡해지고 있어. 앞으로 플린 정도로 모든 조건이 충족되는 상대를 찾기도 힘들 거고, 무엇보다 한차민은 같은 수법에 더는 넘어가지 않을 테니..., 이번에 끝을 봐야 해.”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사실, 루카스도 그 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한차민과 다시 마주치기 위해, 그 망할 애새끼의 정보를 자연스럽게 손에 넣기 위해 아주 세심하게 사람들을 배치하고 이야기를 끌어다 모았지만....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뭘 어떻게 하고 싶은지 자기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계속해서 카터를 들먹이며 차민의 속을 긁어대고는 있는데, 사실 그런 이야기들이 시커멓게 타버린 제 속을 전부 설명해주지는 못했다. 카터와의 부정이, 차민의 배신이 원인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무래도 좋은 미움과 해묵은 원망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모르겠다. 그때의 너는 왜 카터의 말에만 귀를 기울였는지. 나는 그야말로 전지전능해서 하늘도 가르고 대지를 찢을 수 있는데, 이런 내가 어째서, 끝내 네 의지할 곳이 되지는 못했던 건지.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대니얼은 그대로 돌아서려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 루카스를 슬쩍 돌아보았다.

“주제넘은 말씀이지만, 제가 대표님 밑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러니까 뉴욕으로 불러들인 것부터가 처음부터 꾸민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한 변호사는 많이 상처받을 겁니다.”

“그럼 한차민을 예뻐해주려고 벌인 일이겠어?”

“음....”

대니얼은 쌀쌀맞은 루카스의 말투에 길게 침음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의 기척이 사라지자마자 루카스는 소파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괴었다. 협탁 위에 놓인 정체 모를 미술품의 장식 위로 피곤한 제 얼굴이 다각도로 비춰졌다.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던 루카스는 문득 유리에 비치는 제 모습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사실 그린우드에 다니던 시절부터 그의 외모는 전부 완성이 되어 있었다. 늙는다는 것 자체가 루카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인간들 틈바구니에 섞여서 산 탓인지 확실히 예전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신화 속 영생의 샘에 담갔다 꺼낸 것처럼 말갛고 반짝이는 피부는 그대로인데, 눈동자는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겹겹의 유리로 조각된 미술품을 바라보던 루카스는, 손을 들어 가장 큰 파편을 문질렀다. 거슬렸던 잔상이 투명하게 사라져버렸다.

“이래서... 용들이 다른 사람인 척 변신을 해도 정체를 숨길 수가 없는 거였군.”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내며 쌓인 감정들을 지울 수 없어서.

“...대체 무엇을 위한 영생인지.”

그새 살짝 녹은 얼음이 루카스의 말에 대꾸라도 하듯 와삭이는 소리를 내면서 잔 속에서 미끄러졌다.

루카스는 물처럼 술을 들이켰다. 대니얼은 우드가의 수장고에서 발굴한 귀한 물건이라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저에겐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린우드의 어린 ‘비스트’들과 인간들은 동이째로 술을 들이부어도 취하지 않는 그를 신기하게 여기곤 했다. 아마 루카스가 그 대단한 우드가의 차기 수장이고, 타고난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하고... 이런 사실들보다 훨씬 더 와 닿는 강함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자신이 오렌지 주스 고작 한 방울에도 어지러워한다는 건 꿈에도 몰랐겠지만.

잔을 흔들며 얼음들이 움직이는 방향을 무료하게 들여다보던 루카스는, 문득 미세하게 깨지는 공기의 흐름을 느끼고 눈썹을 크게 까딱였다.

“...벌써?”

턱을 치켜들자마자 바로 앞으로 공간이 크게 찢어지더니, 엉망이 된 인영이 풀썩 쓰러졌다. 당연히 차민일 터였다. 가장 잘 부리는 심복인 대니얼도 감히 자신의 앞에서 이런 술수를 쓸 수 없을 테니까.

“조만간이라고 점치긴 했지만... 생각보다 빠른데?”

차민은 형장의 사형수라도 된 듯 허옇고 가느다란 목을 드러낸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풀어헤친 옷가지가, 정제 모를 백탁액으로 젖은 손이 퍽 가련하게 느껴졌다. 루카스가 제시했던 조건을 충실히 이행한 모양이었다.

흠결 하나 없는 순도 높은 보석에 고유의 기운을 불어넣은 ‘벨’은, 사실 신혼인 ‘비스트’들이 즐겨 쓰는 애정 어린 장난감 같은 것이었다. 주로 애칭을 부르거나 특정한 문구를 외치면 곧장 ‘반려’의 곁으로 이동하게 되는 방식으로 활용하곤 했다. 물론 루카스는 그런 간질간질한 용도로 사용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으니 문제였지만.

“지금 많이... 아파.”

형편없이 웅크린 차민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루카스의 입매가 일자로 굳어졌다.

“노아가.….”

차민에게선 자신을 향한 분노도, 비참함도, 하다못해 견디다 못해 넘칠 듯한 흥분도 아닌... 아이를 향한 걱정으로 닳아 없어질 것 같은 초조함이 가득할 뿐이었다.

“...네 애가 ‘비스트’의 모든 것을 흡수해가는 건 맞는 모양이군.”

말마따나 안에 심어두었던 보석의 기운이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으음. 그렇다면 차민의 꼴이 저 모양인 것도 이해가 갔다.

애초에 루카스가 유도했던 것은 약간 몸이 달구어지는 정도였다. 그렇지만 곁에 둔 애새끼가 끝도 없이 ‘벨’ 속의 자신의 힘을 씹어 삼키기 시작하는 바람에 약간의 자위 정도로는 공간 이동의 발동 조건을 충족시키기 어려워졌을 터이다. 영문도 모르는 채 10년간 계속된 고열에 나동그라진 아이를 두고, 차민은 더 강한 자극을 쫓느라 좇을 훑거나 구멍을 들쑤셨을 게 뻔했다. 그것도 몇 번이나. 지금 해결책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자신에게 애원하기 위해서.

“저번에... 너는 줄 수 있다고 했지. 진짜 ‘요람’이라는 거.”

느릿느릿 고개를 든 차민은 얼굴에 엉망으로 번진 울음기를 완벽하게 지우고서, 덤덤한 얼굴로 바짓단에 젖은 손을 닦아냈다.

“물론 조건은 기억하고 있으니까, 빨리 하고 끝내. 어차피 너도 그냥 나 괴롭히고 싶은 거잖아.”

분명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에 일상적인 말투였지만... 차라리 우는 게 나을 듯한 서글픈 눈동자였다. 루카스는 제 모양을 잃고 거의 녹아버린 얼음 조각들로 눈길을 돌려버렸다. 만약 계획된 행동과 시선이었다면... 차민이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저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따져 물을 때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누구랑 하면 되는 거야?”

턱 끝에 매달려 있던 눈물과 땀을 닦아내면서 차민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뭘 누구랑 하겠다는 거야.”

“몸으로 하는 로비의 수준이 어쩌고 했던 건 너였잖아.”

내밸는 단어마다 한숨이었다. 차민은 더 이상 루카스와 어떠한 실랑이도 하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설마 네가 나와 자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을 거 아냐.”

아주 잠시, 미안함과 착잡함이 어려 있던 루카스의 눈매가 대번에 사나워졌다.

“루카스.”

차민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가늘게 눈을 떴다. 삼류 연극배우의 과장된 연기처럼 의도가 다분히 느껴지는 몸짓이었다.

“고작 나와 섹스나 할 목적으로 이런 복잡한 장치를 마련했다고? 나에게 그렇게까지 공을 들일 이유가 뭐가 있어. 어차피 넌 날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것 같은 자조적인 말투였지만, 기실 최소한의 선 같은 것도 지켜주지 않는 루카스를 비난하는 뉘앙스였다.

좀 더 정확히 묘사하자면 차민은 섹스는커녕 저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조차 싫은지 적의로 똘똘 뭉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차라리 다른 아무하고나 뒹굴고 말지, 너하고는 죽어도 싫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이전까지는 과거와 현재가 뒤엉켜 어딘지 복잡해 보이는 심사였는데, 지금의 차민은 우울함과 분노가 무럭무럭 자란 듯한 모습이었다. 아마 자신을 만날 목적으로 직전까지 벌였던 행위들 때문일 것이다.

“한차민.”

...그런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루카스가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자신의 분노와 실망만 정당하다는 듯이 구는 차민의 태도가 황당하게 느껴졌다. 분명 어제, 자신이 노아를 마주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음에도 차민은 여전히 제 사정만 딱한 것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우리, 말은 바로 하자.”

루카스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차민을 향해 상제를 기울였다. 짐짓 다정하게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지만, 과거의 ‘반려’를 위아래로 살피는 눈동자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고작 네 몸뚱이를 갖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서 벌인 짓이 아니라, 너라는 인간이 어디까지 뒹굴 수 있는지 시험해 본 거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실험과 관찰, 너 좋아하잖아?”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허옇게 질려버린 얼굴이 가관이었다. 고작 이 정도의 반격도 받아치지 못하는 주제에 왜 자꾸 속이 뒤집히는 말만 골라서 할까.

루카스는 차민의 뒤편에 놓인 미술품을 흘끗 바라보았다. 벌집 모양의 유리 조각들이 담쟁이 넝쿨처럼 기둥을 감싸고 있었다. 소파 옆 협탁에 놓인 것과 대칭되는 작품으로, 아트월을 장식할 목적이어서인지 크기는 저쪽이 훨씬 더 컸다.

“아프다는 애를 코앞에 두고도 결국은 좋아서 사정하지 않았어? 네 바지에 튄 허여멀건 거, 정액 아닌가?”

거대한 미술품은 다양한 각도에서 차민의 뒷모습을 투영했다. 여태까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었는데, 한차민의 모습이 잡히자 어쩐지 포르노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손아귀에 움켜쥐면 당장이라도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 가느다란 목과 땀에 젖은 셔츠 너머로 도드라진 척추…. 비슷한 구도 무엇 하나도 놓칠 수 없다는 듯 잔뜩 촉각을 곤두세운,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그런 식상한 연출.

그렇지만 식상하다는 점을 알고서도 두고두고 같은 기법을 차용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 와중에도 드러난 차민의 몸 선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을 보니, 확실히 그러했다.

루카스는 아랫입술을 감쳐물며 피곤한 눈을 감았다, 떴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차라리 자신조차 느낄 수 없는 오래 된 각인의 여파였으면 좋겠다. 대체 저 얼굴과 몸의 어디가 그렇게 특출하기에 이 와중에도 몰래 훔쳐볼 생각이 드는 것일까.

“...넌 네 자의식의 무게를 좀 덜어낼 필요가 있겠어. 내가 누구와도 각인할 수 없게 틀어놓은 원흉에게 평범한 쾌락을 선물할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다스릴 수 없는 제 시선을 꾸짖기라도 하듯 독한 문장이 술술 흘러나왔다. 유리 조각에 비친 차민의 뒷덜미가, 어깨가 얕게 흔들렸다. 제 앞에서 기죽고 싶지 않은지 침착 하려 애쓰고는 있지만, 그래도 역시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주제 파악 다 했으면, 전부 벗어.”

루카스는 몸을 일으키면서 뒤로 완전히 물러섰다. 소파 위에 앉아 잔을 굴려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차민이 저러고 있는 마당에 자신까지 뻔하고 후진 각본을 연출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니면 노아의 위치를 제대로 드러내든가.”

뻣뻣하게 굳어 있던 차민이 그제야 삐걱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노아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생각이었고, 어쨌든 ‘요람’을 줄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임을 다시금 인지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 좀 하자.”

루카스가 셔츠 위를 배회하던 차민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반쯤 의미 없이 매달려 있던 단추가 가해진 힘을 이기지 못 하고 바닥 위로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괜한 오기로 날을 세워봤자, 결국 너는 날 못 이겨. 네가 가진 무엇으로도.”

“······.”

“그럴 거면 괜히 신경 거스르는 말하지 말고, 앞으로는 얌전하게 굴면 어떨까. 너도 나도, 이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하고 싶지 않잖아.”

루카스가 검지로 차민의 아랫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그럼 이 지경으로 분위기가 험악해질 일도 없었을 거고. 안 그래?”

꾸역꾸역 내가 있는 곳까지 온 게 장해서 그토록 바라던 ‘요람’만 건네주고 끝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덧붙이는 루카스의 말에 차민의 고개가 푹 꺾였다. 입을 열어봤자 자기 손해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럼 다시 해봐.”

시키는 대로 기계처럼 옷을 벗다 말고서 난데없이 소파 위로 떠밀리자, 차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는 무슨 생각 하면서 갔어?”

“…루카스.”

급한 일도 잊고 사정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음탕한 상상이 뭐였느냐는 추궁에, 차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움이나 민망함 때문이 아니라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다스리느라 안간힘을 쓴 탓인 듯했다.

“필요한 게 이거 아니었나?”

루카스가 허공에서 손을 휘젓자 기다란 시약병 두어 개가 나타났다.

“여기에 내 피 몇 방울만 섞여도, 애새끼..., 미안. 노아라고 했었지. 그래, 노아는 당분간 끄떡없을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약병 안이 투명한 액체로 가득 찼다. 거창한 것은 아니었고 물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의 전해질이었다.

루카스는 응접실을 수놓은 유리 조각 하나를 소환해 약지 끝의 살을 거의 뜯어내듯이 긁어버렸다. 살이 벌어지고 피가 배어 나오자, 시약병의 뚜껑이 알아서 풍 하고 열렸다.

동글동글하게 뭉친 핏방울이 루카스의 손끝에서 시약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병 안의 액체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새끼손톱 반절만 한 자그마한 붉은 동그라미가 병의 가운데쯤에서 쉴 새 없이 회전하더니, 이내 시약병에 담긴 물 전체를 푸른색으로 물들였다. 이 물건의 정체도 잊어버리고서 감탄부터 튀어나올 정도로, 티끌 하나 섞이지 않은 경이로운 새파란 색이었다.

“또... 어쩌면 조금은 자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성장이 멈춰 있다며.”

차민의 눈이 홀린 듯 시약병을 쫓았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노아에게 필요한 약임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카터 또한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약을 건네줬다는 뜻일 텐데....

“그런 건 이제 바라지도 않아. 나는 그저.….”

진짜 ‘요람’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차민이 중얼거렸다. 끝의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발음이 온통 뭉개지는 작은 목소리였는데, 이상하게도 오히려 더 그래서 뚜렷하고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나타나니 이전까지의 모욕은 깡그리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래, 이게 그토록 가지고 싶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지?”

이젠 사람이 아니라 애완동물을 어르는 듯한 말투였다. 차민은 아직 잠겨 있는 셔츠의 단추를 전부 풀어냈다. 덜덜 떠는 탓에 손톱 끝이 몇 번이나 플라스틱에 긁히고 까이는 소리가 났다.

푹신한 러그는 옷가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차민은 추를 잔뜩 매단 것 같은 무거운 발을 움직여, 소파 위에 앉았다.

*

노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열기가 서서히 가시고 있었다. 좀처럼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조그만 얼굴만 내내 들여다보던 차민은, 그제야 한시름 놓으며 아기용 침대 난간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용도를 다한 텅 빈 시약병들이 바닥에서 너부러져 있었다. 물끄러미 빈 병들을 바라보던 차민은 손을 뻗어, 괜히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루카스가 준 ‘요람’ 비슷한 약은, 무어라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분명 붉은 피가 더해진 결과물임에도 그 어떤 불순물도 허락하지 않는 듯한 쨍한 파란색....

차민은 무릎을 모아 세운 채, 팔을 둘러 발목 부근을 끌어안았다. 이 잘난 걸 얻으려고 방금 전까지 루카스의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두 손으로 힘껏 젖꼭지를 비틀고, 회음과 구멍 사이에 경계처럼 박힌 ‘벨’을 그에게 확인시켜주었다. 그러다 홀로 제 좆을 잡고 흔들어댔지만, 여태까지 억지로 쥐어짜인 물건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초조해진 마음에 기어이 루카스가 보는 앞에서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고 말았다.

‘앞을 만지는 것만으로는 못 가는 모양이지?’

이후로도 상스러운 조롱은 계속되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더라도, 무슨 생각인지 충분히 루카스의 표정에서 읽히는 경멸은 차민의 속을 곤죽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저는, 그딴 취급을 당하면서도 기어이 끝을 보고야 말았다. 사정이 쉽지 않아 초조한 마음에 허리를 들썩이고, 검지와 중지로도 모자라 약지까지 전부 쑤셔 넣고서 앞 뒤로 세게 흔들어댔다. 저 약이 없으면, 적선하듯 흘려 넣은 피 몇 방울이 없으면, 노아는 눈을 뜨지 못할 테니까.

루카스는 불퉁한 얼굴로 서서 저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몇 번이나 이어진 사출로 자신의 몸이 뻣뻣하게 뒤틀리고 나서야 미진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행위를 멈추어도 좋다는 신호였다.

생각하지 않으려 애써도... 질린다는 듯 저를 바라보던 그 얼굴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되풀이되었다.

‘그래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지켜봤지만 시간 낭비였네. 조금도 당기질 않아.’

나락으로 떨어진 인간의 천박한 말로를 관조하는 것 같은 시린 말투가, 차민을 더욱 작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겠지. 자.’

루카스의 지시는 분명한 모욕이었다. 열로 고꾸라진 아이를 등에 두고서, 성감에 절어 몸을 헐떡여보라고 종용했으며, 역시 저의 그런 추태엔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다면서 비웃기까지 했다.

‘한차민. 혹시 다음에도 이런 일로 나를 찾게 된다면, 조금 더 꼴리게 움직일 순 없겠어? 그딴 몸부림의 대가로 넘겨주기엔 내가 너무 손해잖아.’

곧이어 루카스가 손등으로 젖은 제 뺨을 툭 치자, 시계 바늘을 되돌린 것처럼 눅눅한 욕실 안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찐득찐득한 손안에 쥐여진 푸른 시약병을 보고서야 방금 겪은 일이 꿈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제 몸 위로 타르를 한 트럭 부어버린 것만 같았다. 끔찍하고 꿉꿉한 감정들이 차민의 가슴을 거세게 할퀴고 갔다.

그런데... 그런 한편으로는 정말로 그게 끝이라는 게 이상 했다. 아무리 인간 세상에 감화되어 살아가고 있는 ‘비스트’라고 한들, 그들은 애초에 사람의 상식 같은 게 통용되지 않는 존재들이다. 아니, 인간인 제가 생각하기로도 그런 방향으로 사람의 이성을 혹은 존엄성 같은 걸 무너트릴 심산이었더라면... 결코 제 어설픈 자위 정도로 일을 마무리 지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이전에 제가 욱해서 했던 말처럼, 아무 사람이나 불러서 관계를 갖게 하고 화대랍시고 시약병을 던져주는 것도 이상 하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루카스는 그를 포함해 어느 누구도 자신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게 하고서 끝을 내버렸다.

차민은 발등 위로 뭉툭한 손톱을 꽂아 넣고는, 얇은 살갗을 꼬집듯 긁어내길 반복했다. 어릴 적부터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강박 증세였다.

“...아, 이 등신아. 최악의 시나리오가 아니면 다행이려니 할 것이지, 뭘 이상하다고 따져 들고 있어.”

차민은 무릎에 이마를 크게 찧었다. 그럼 루카스가 제 꼴을 보고 흥분해 날뛰기라도 했으면 싶었던 건가. 지금 할 줄 아는 모든 욕을 퍼부어도 모자란 와중에, 뭐 그리 이성적인 척 그의 입장을 헤아려주고 있는지.

혹시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걸까….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루카스는 그린우드 시절처럼 편안한 공간이동술을 베풀어주지 않았다. 시커먼 공간에 쪼그라들어 숨도 못 쉬다가, 호흡 곤란을 일으킬 때쯤에야 그의 앞에 엉망으로 내던져졌다. 더욱 최악인 것은, 성적 흥분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암흑 속에 던져지니 온 혈맥이 거세게 날뛴다는 점이었다. 압력이 원인인 걸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생각할 여력은 없었다.

차민은 앓는 소리를 내며 주먹으로 제 발등을, 바닥을 아무렇게나 내리쳤다. 쿵쿵 울리는 둔탁한 소리가 거슬리기라도 했는지 노아가 돌연 새액, 하고 길게 숨을 내쉬면서 몸을 뒤적였다.

“참 나.”

뚱하게 구는 노아가 어이없어 헛웃음이 픽 터졌다. 10년 째 쥐방울만 한 것이, 제가 무슨 짓을 해서 약을 얻어 온 줄도 모르고.

펜스 사이로 손을 넣어 조그만 코를 톡톡 두드리자, 노아는 귀찮다는 듯 오만상을 쓰며 몸을 팩 뒤집어버렸다.

“어쭈?”

혀를 차면서 노아의 볼을 쿡쿡 찌르던 차민은..., 불현듯 루카스와의 어설펐던 첫 데이트가 떠올랐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첫 데이트 때 루카스는 저와 마주치자마자 속사포처럼 조건 아닌 조건을 읊어댔다.

“나와 마주쳤을 때 고개부터 돌리는 거, 그 버릇 딱 질색이니까 고쳐. 학교 계단 같은 데서 무릎 모아 세우고 고개 처박고 있는 청승맞은 짓도 그만두고. 아직은 어렵다면 기다려줄 테니까 할 말이 있거든 빙빙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차민은 조금 시무룩해졌다. 앞머리도 빗어 넘기고 안경도 벗었는데.… 최대한 꾸민 제 모습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어... 어떻게 알았어? 나 여기 있는 거.”

“피자 먹자며? 여기가 브루클린에서 관광객들 제일 많이 오는 곳이던데.”

각인의 흔적 같은 것을 뒤쫓을 필요도 없었다며 루카스가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 단순해서 술래잡기 같은 건 어떻게 할래?”

“그건….”

“됐으니까 그거나 내놔.”

“어?”

“뒤에 숨긴 장미. 내 거 아닌가?”

“그렇긴 한데.….”

차민은 우물쭈물하면서 등 뒤로 숨기고 있던 손을 풀었다. 이렇게 건네줄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긴. 꽃을 살 때부터 계획은 틀어진 상태였다. 원래는 새빨갛고 커다란 장미 다발을 사려고 했다. 사람들이 돌아볼 정도로 풍성하고 커다란 꽃다발을. 그렇지만 처음으로 사본 꽃은 생각보다 비쌌고, 그래서 적당한 사이즈의 장미 대여섯 송이에 이름 모를 꽃들을 함께 장식하는 것 정도로 그쳐야 했다.

“생각보다 대담한데? 마주치자마자 또 덜덜 떨면서 고개나 처박고 있을 줄 알았는데….”

차민에게서 꽃다발을 건네 든 루카스가 미적지근한 얼굴로 웃었다. 아니, 음…. 분명 그보다 그럴싸한 표현이 있을 텐데 도통 생각이 나질 않았다. 웃을 듯 말 듯, 묘하게 일렁이는... 아, 그래. 어릴 때 박물관에서 본 미인도의 주인공들이 꼭 저렇게 웃고 있었다.

“제일 좋아하는 꽃이야.”

“그렇구나.….”

차민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자선의 밤에 저더러 장미 수인이냐고 물었던 게 떠올라서 충동적으로 장미꽃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분위기에 이끌려 걸음한 꽃집에서 충동구매를 하고 나서야 조금 후회가 밀려왔는데... 싫지 않다는 듯 저를 향해 턱짓을 하는 루카스 덕분에 모든 걸 잊었다.

“진짜 피자 먹을 거야?”

“아, 그런 게 별로면... 혹시 몰라서 알아놓긴 했는데, 여기에 스테이크 하우스도 있고… 또 레스토랑은.….”

“아니. 가격이나 메뉴의 문제가 아니라, 너 나랑 마주 보고서 뭘 먹을 수는 있겠냐고.”

오만하게 자신하는 그 모습이 유치하기는커녕 왕자님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우드가의 유일무이한 후계자라 점쳐지고 있으니 그 비슷한 거긴 했지만.

“그, 그러면 좀 걸을까? 여기에 유명한 다리가 있는데....”

“제안한 용기는 가상하긴 하지만... 데이트 코스 선택은 빵점이네.”

루카스가 손을 퉁기자 장미 꽃잎이 하늘 위로 나풀거렸다.

“저기를 어떻게 걸어, 순전히 떠밀려 다니는 거지.”

멀거니 꽃잎의 궤적을 쫓던 차민은 온통 시야를 덮은 하얀 천장에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어디야?”

순식간에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한 모양이었다.

“보면 몰라? 요트 위잖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차민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금빛으로 빛나는 허드슨 강을 굽어보았다.

루카스가 대뜸 저를 끌고 온 요트는 액자를 사면 끼워 주는 엽서의 한 장면처럼 전형적인 외관을 하고 있었다. 하얗고, 화려하고, 아담하지만 안정감 있는.

그에 대해 자신할 수는 없었지만 루카스는 여러 부문에서 클래식한 면모를 고수하는 듯했다. 장미 꽃다발을 좋아하는 것도, 어쨌든 첫 데이트에서 본인이 에스코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섹스 직후에는 외설적인 농담보다 부드럽게 제 의사를 돌려 물었던 것도.

“혹시 그거 때문...이야?”

“그거? ‘반려’를 말하는 건가?”

“아니. 세, 섹스 말이야.”

음, 그런 맥락에서 살펴보면 ‘반려’라는 것도 영 틀린 말은 아닐 듯했다. 결국 루카스는 저에게 남긴 흔적이 거슬려 지나치지 못했던 거니까.

“... 야.”

“아... 아니, 널 매도하려는 게 아니라... 분명히 너는 그 때... 기숙사에서 나한테 굉장히 화를 냈고, 다시 마주쳤을 때도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렇게 갑자기 잘해주니까.….”

꼭 너도 마음이 없지는 않은 것처럼 느껴지잖아. 도를 넘는 착각은 혀끝에 숨긴 채로, 차민이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잘해주다니? 지금까지 내가 뭘 해줬다고.”

“야, 약속 장소에도 나와 주고... 변변치 않은 꽃도 받아주고...”

“아하. 그래? 왜, 이렇게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하지?”

“무, 물론 영광이야. 엄청나게 영광이지.”

“······.”

차민의 재빠른 긍정에 루카스의 표정이 고무라도 씹은 듯이 일그러졌다.

“...인간이 ‘반려’가 되니까, 솔직히 많이 불편하고 답답해. 물론 인간들 중에서도 네가 꽤나 괴팍한 축에 속하는 것 같지만, 그건 논외로 치더라도.”

너드라서 미안하다는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 했지만, 이어지는 루카스의 말이 더 빨랐다.

“이 ‘반려’라는 시스템의 궁극적인 목적은 대를 잇는 거란 말이지. 피... 그 좆같은 피가 ‘비스트’들의 생태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

차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생을 혹은 영생에 가까운 생을 사는 존재들이 평생을 깰 수 없는 무거운 약속의 증표가 바로 둘 사이의 아이라고 했으니.

“그래서 한 번 ‘반려’의 흔적이 새겨지면 내 의사와 관계없이 몸이 당기게 되어 있어. 이성을 놓을 정도로 불이 붙기도 하지. 쉽게 말해 발정기가 없는 야수들도 어떻게든 넣고 싸고 싶어서 몸부림을 치게 된다는 거야.”

저를 돌아보는 루카스의 눈동자가 어쩐지 평소보다 짙은 것도 같았다. 차민은 이상한 감탄이 터질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정수리부터 벼락이 내리꽂히면 이런 기분일까. 이렇게 마주 보고서 장미꽃 이야기나 할 게 아니라, 무릎을 끓고 그를 숭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넌 인간이니까 그런 신호들이 몹시 희미하지. 그런데 무시하기엔 거슬려. 몸에 가느다란 거미줄 같은 게 칭칭 엉겨 붙은 것만 같단 말이야.”

그제서야 헐떡이는 차민을 보고 아차 싶었는지, 루카스가 먼 곳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이 어중간한 감각이 몹시 심란한 와중에, 정작 너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좀... 답답해.”

이것도 꼴에 각인이라고, 평소 같았으면 상대도 안 했을 답답한 놈에게 자꾸만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도 이상하고. 그런데 정작 나에게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하찮은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고서 그저 내가 좋다고 어쩔 줄을 모르고 있고.

“게다가 얼굴은... 이상해.”

루카스가 덥석 차민의 볼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이 워낙 큰 탓에, 뺨과 턱이 동시에 붙들려 붕어처럼 짓눌려버렸다.

“이래서 인간은 싫어. 변수가 너무 많아.”

“므, 므은....”

“봐, 그날 적지 않게 쏟아냈는데도 지금은 거의 느껴지질 않잖아.”

“으그즘....,르크스....”

뭉개진 얼굴을 하고서 필사적으로 뻐끔거리자, 루카스가 고개까지 뒤로 젖혀가며 크게 웃었다.

세 번째로-맨 정신을 기준으로- 가까이에서 본 그는... 변덕스럽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가 조금도 없어서 고작 몇 마디 말로도 쉽게 자신을 오해 하고는,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그렇지만 덜덜 떨면서도 솔직하게 속마음을 드러내려고 하면 뚱한 얼굴을 하고서도 끝까지 귀를 기울여주곤 했다.

“...엇, 노아?”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차민은, 어느 순간부터 원목 너머로 말간 노아의 눈동자와 마주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미안, 아빠가 딴생각을 했네. 이제 안 아프지?”

혹시나 싶은 기대로 노아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지만, 열만 멀끔히 가셨을 뿐 머리카락 한 뼘도 자라나지 않은 상태였다.

“아이고, 아냐. 노아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애써 한숨을 참는 듯한 차민을 보고는 노아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손을 뻗었다.

“아빠가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 미안해.”

엉덩이를 받쳐 안자마자 노아가 차민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통통한 손가락에 있는 힘껏 힘을 주고 저에게 매달리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노아는 유독 차민의 기분 변화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비스트’들은 모체의 배 속이나 알 속에 있을 때의 일도 기억하는 경우도 있다던데.… 차민은 노아가 이렇게 아기 코알라처럼 꼭 붙어 떨어지려 들지 않을 때마다, 혹시 태어나기 이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부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죽으라고 주먹으로 내려치고, 죽겠다고 몇 번이나 도로에 몸을 내던지고, 배 속의 애가 끔찍하다고 엉엉 울던 제 목소리를 들으며, 조그만 몸을 있는 대로 웅크리고 있었을 노아를 생각하면 가슴 안쪽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미안해, 아빠가... 늘.”

차민은 노아의 이마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고서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콩닥콩닥 뛰던 불안한 맥이 조금씩 제 속도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알지? 아빠가 노아랑 같이 살려고 무슨 일이든 다 했던 거.”

노아가 대답이라도 하듯 짜리몽땅한 손가락을 열심히 꼼질거렸다.

“우리 홍콩에 있을 때, 그 조그만 집에서 살 때도 아빠 슈퍼맨처럼 뭐든 해냈잖아. 그치? 그러니까 다 잘 될 거야.”

딱 적당한 온도로 따끈따끈한 작은 몸에 고개를 파묻으며, 차민이 취기 오른 사람처럼 몇 번이고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홍콩에서 변호사 겸 심부름꾼으로 진창을 구르면서 느낀 사실은,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급하게 노아의 존재가 필요한 것치고는 속도감이 너무 없지 않은가. 그의 추측처럼 카터와 손을 잡고 종적을 감췄던 게 거슬렸다면, 훨씬 더 즉각적이고 잔인한 방식이 얼마든지 있는데. 루카스가 굳이 자신을 이렇게 기이한 절망으로 밀어 넣으려는 이유가 분명 있을 터였다.

“엇? 배고파?”

노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슬쩍 몸을 물리고 이리저리 살펴보자 아이는 그저 천진한 얼굴로 배시시 웃기만 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보통 꼬박 앓고 나면 하루 이틀은 죽은 듯이 잠들곤 했는데....

“노아, 우리 맛있는 거 먹을까?”

그래봤자 지난번과는 다른 맛의 과일 퓨레 정도겠지만... 고작 그것만으로도 신이 나는지 노아가 입을 크게 벌리며 웃었다. 꽃잎을 물들인 듯한 분홍빛의 통통한 뺨이 이리저리 실룩거렸다. 노아가 가장 좋아하는 바나나맛, 사과맛을 슬쩍 중얼거리자 눈꺼풀에 얹혀 있던 약간의 남은 졸음까지 전부 털어내고는 작은 몸을 흥겹게 들썩인다.

“그래, 먹자. 일단 먹고 생각하자.”

작달막한 주먹이 차민의 어깨를 팡팡 내리쳤다. 온 힘을 다해 제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표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하나도 아프지 않아 안쓰러울 뿐이었다.

*

“아직 연락 없어요?”

- 우드 쪽을 물으시는 거라면 아직이고, 플린 쪽은 폭발 직전입니다.

“플린 쪽이야 신경 쓸 거 없고... 우드 쪽에서 반응이 오거든 바로 넘겨줘요.”

내선 전화를 끊기 직전, 대니얼이 한숨을 쉬는 것도 같았다. 차민은 어깨를 크게 으쓱이곤 의자에 몸을 내던졌다. 뒤로 크게 젖혀진 등받이가 노아의 바운서처럼 앞뒤로 출렁거렸다.

대니얼이 나름대로 신경을 써주고 있음에도 사무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던 서류와 책들은 전부 바닥으로 치워버리고, 플린 미디어의 주요 주주 명단만 덩그러니 앞으로 끌어다 놓은 상태여서, 적어도 데스크 위는 깨끗하다는 게 다행이었다. 어디까지나 그나마의 수준이지만.

차민은 탑처럼 쌓인 책들 위에 건달처럼 다리를 척 얹은 채로, 명단 옆에 나란히 놓은 핸드폰만 이따금씩 힐끔거렸다. 슬쩍 액정을 엿볼 때마다 징그러울 정도로 메일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신이 기다리는 이름은 아직 눈에 띄지 않은 상태였다.

“이 정도 들쑤셔놨으면 올 때도 됐는데....”

그제 밤, 플린 쪽에는 계약결혼과 관련한 모든 허위 정보일체를 알아서 해결하라고 통보했다. 물론 그 직후에 루카스의 비서실 쪽에도 관련 사실을 전달하긴 했다. 대표인 벨라는커녕 대니얼과도 상의하지 않은 채 독단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한 변호사님.”

대니얼이 너덜너덜해진 얼굴로 불쑥 나타났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묵묵부답인 차민을 대신해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집중포화를 견디고 있던 그는 노크를 할 여유조차 없는 것 같았다.

“죄송하지만 제발 어떤 대책이 있다고... 하다못해 주니어와 상의 중이라고, 뭐 그런 언질이라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으음... 그래도 뻔히 들킬 거짓말을 하는 건 좀.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든 될 테니까요.”

무책임한 차민의 말에 대니얼의 마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저를 들이받고 싶은데, 그럴 기운이 없어서 참는 것 같았다.

그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전처럼 불편한 방식으로 루카스와 마주치고 싶지 않으니, 그가 직접 움직이도록 유도하는 수밖에. 그렇지만 이 정도의 행보로는 꿈쩍도 않는 것을 보아하니... 좀 더 파격적인 방법을 떠올려봐야 할 것 같았다.

차민은 멍하니 발을 굴렀다. 불편한 의자가 하릴없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분명 통풍이 잘되는 천연가죽이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무료한 놀이기구라도 탄 듯 애꿎은 의자만 느릿느릿 돌리고 있는데, 다시 한 번 발을 크게 굴러 뒤쪽으로 축이 이동하는 순간... 텅 빈 공간에 타닥이며 불씨가 흩날렸다.

차민의 눈이 번쩍 뜨였다. 관성을 이기지 못한 의자가 핑핑 몇 바퀴 더 돌아갔다. 그사이 아른거리던 새빨간 불씨는 새카만 그림자로, 길쭉한 인영과 눈부신 금발로 순식간에 형체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루카스였다.

“이따위로 일을 해결할 거면 굳이 L&C는 중간상을 둘 이유가 있나?”

냉기가 풀풀 풍기는 목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서릿발처럼 책상 위로 신문 한 장이 내려앉았다. 숨어서 찍은 듯한 루카스의 옆모습이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었고, 여기저기 빨간 펜으로 정신없이 첨삭을 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마 내일 아침에 뿌려질 예정인 것을 미리 빼내 온 모양이었다.

“이 계약에 걸린 돈이 얼마인 줄은 알고서 멋대로 일을 벌인 거야?”

“하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없잖아.”

해내야 할 의뢰보다는 다른 목적에 관심을 두고 저지른 일이긴 했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기는 했다.

“제일 쉬운 건 돈을 먹이고, 적당한 대역을 고르는 일이지만... 사람을 썼을 때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 변수를 통제하는 게 너와 내 아랫사람들이 할 일 아니었던가?”

“그건 그렇지.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어. 네가 굳이 소송이니 뭐니 하는 쇼를 벌이는 것도 인간 세상에 잘 융화 하고 싶어서라며.”

차민이 검지로 신문을 톡톡 두드렸다.

“신문은 이렇게 사전협의라도 가능하다지만, 핸드폰은? 인터넷은? 전 세계에 최면이라도 걸 생각은 아닐 테고.”

“전문가의 무능함이 내가 고려할 요소였던가?”

“무능함이라니. 아주 미세한 리스크도 키우지 않겠다는 세심함이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그리고 실제로 이 일로 너와 우드가가 손해 보는 건 하나도 없어. 너는 몰랐다고 하면 되니까.”

“한차민. 어린애처럼 우기면 다야? 일이 그렇게 쉽게....”

“루카스.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어.”

불편한 침묵이 사무실 안으로 너울거리며 내려앉았다. 인간의 생에선 영원한 것도, 절대적인 것도 없다. 언젠가의 차민이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굳이 둘 사이의 해묵은 과거까지 겨냥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괜히 여지를 준 기분이었다.

“우리 쪽에서 그 어떤 방법을 들이밀어도 플린 쪽에 덮어씌우는 것만큼 깔끔한 방법은 없어.”

“그리고 나는 누구랑 결혼하는지도 몰랐던 등신이 되는 거고? 플린 쪽에서 정상 범위 내의 경영능력을 의심하는 뉴스를 내보내도 할 말이 없겠군.”

“...경험상 몰랐다는 말만큼 완벽한 알리바이는 없어. 플린쪽에서 있지도 않은 딸을 만들어서 너에게 들이밀었고, 너는 이런 황당한 사기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면 되니까. 우드가의 자산만큼 강력한 동기는 없을 테니 사실 설득력이 떨어지는 전개도 아니지. 실제로 너와 서류상으로의 결혼 이후로 플린가 관련 주들이 적어도 수십 배는 올랐던데.”

뻔뻔하고 단순한 차민의 계획이 어이가 없는지 루카스가 허, 하고 연신 헛숨을 들이켰다.

“다시 말하지만 루카스, 넌 쭉 몰랐다고만 하면 돼. 정략결혼이었으니 처음부터 상대방이 누구였는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고, 뒤늦게 알게 된 사실에 분노해 소송을 걸었다고 하면 되잖아.”

“이봐, 상대는 언론 재벌이야. 그런 허술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멋대로 일을 저지른 거야?”

“원래 법전에 쓰인 딱 한 줄만 가지고 죽어라 물어뜯는 게 소송이야. 부족한 디테일이야... 네가 가진 돈이 알아서 채워주겠지.”

아무래도 좋은 차민은 신문 뒤에 덮여 있던 주주 명부를 들췄다.

“그리고 이렇게 진행이 되면... 소송의 방향은 당연히 플린쪽에서 이 결혼으로 부당하게 봤던 이득을 전부 내놓는 쪽으로 가야 할 거고. 물론 추가적으로 찔러볼 수 있는 항목은 다 찔러봐야겠지. 사기든, 상표권 도용이든…. 어쨌든 이 이후론 직원이고 주주고 알아서 네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바라던 대로 잘 해결되는 거 아닌가?”

루카스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대신 삐딱하게 다리를 짚고 서서, 묘한 표정으로 차민을 훑어보기만 했다.

“왜?”

“새삼스러워서. 한편으론 너다운 것 같기도 하고.”

루카스가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크림색의 소파가 뿅 하고 나타났다. 대표의 사무실이나 귀빈 응접실에도 없을 것 같은 호화로운 물건이었다.

“사람들에게서 말이 새어 나갈 게 두렵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따로 있지.”

“죽음이 완벽한 비밀을 보장하지는 않아. 그게 가장 나은 방법이었다면 진작에 알아서 처리하고 너에게 연락 넣었겠지.”

차민은 컵 표면에 흐르는 물기를 닦아내며, 미지근해진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혹시 네가 말하는 나다운 모습이 사람 하나 처리하라는 지시도 못 내리고 쩔쩔맬 것 같은 멍청이였다면... 의외네. 그간 열심히 추적한 거 아니었나? 내 업무방식은 상당히 터프한 축에 속하는데.”

차민은 일부러 루카스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다만 의연한 표정으로 이미 물기가 마른 컵 표면을 공들여 닦아낼 뿐이었다.

방금 루카스가 보인 반응으로 추측했을 때... 어쩌면 그는 생각보다 저에 대해 알아낸 것이 많이 없을지도 모른다. 노아의 안전을 두고 실험을 해볼 생각은 없었던 터라 차민 또한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수상한 보호막의 위력이 생각보다 대단했던 모양이다. 루카스조차 제 행보를 모두 꿰뚫지 못했을 정도라니.

인과가 뒤바뀐 것 같지만... 어쨌든 다행이었다. 루카스가 ‘반려’를 맺는 방식이 온 마음을 다한 간절함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더라면, 카터의 말에도 그렇게까지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사이비 종교의 교리 같지 않은가. 간절히 바라면 은신할 수 있다니.

“카터에게서 ‘요람’을 받아내려면... 그가 지시하는 일은 그게 무엇이든 해내야 했어. 살인 또한 예외가 아니었지. 약, 총, 칼... 안 써본 게 없어.”

꼭 루카스를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늘어지는 말투였지만, 아주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느라 그랬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런 정보까지는 맹약의 제지를 받지 않는 것 같았다.

“계속 해봐.”

거대한 소파의 팔걸이 위로 느슨하게 팔을 늘어뜨리며, 루카스가 오만하게 턱 끝을 치켜들었다.

“지금 보니 플린 쪽 일은 핑계고,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어서 이 사단을 낸 것 같은데.... 아닌가?”

“그래.”

차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에 걸터앉았다. 여유로운 척 옆을 짚은 손이 어색하게 보이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다시 제대로 된 거래를 하고 싶어.”

“거래? 너 설마,”

“맞아. 그 ‘요람’이라는 거.”

놀랍게도 루카스에게선 아무 말도 없었다. 하다못해 분노한다거나 어이없어한다거나…. 뭐 그런 표정조차 읽을 수 없었다. 어떤 방향으로든 그의 속을 뒤집어놓을 이야기라고 각오하긴 했지만..., 이런 방향을 예상했던 건 아니었다.

“내 피가 제법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지?”

원래 예측할 수 없는 전개가 더욱 피가 말리는 법이었다. 데스크를 짚은 차민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아하. 그새 애가 조금 자라기라도 한 건가?”

굳이 답을 하지 않았지만 루카스 쪽에서도 딱히 진위를 확인할 목적으로 던진 질문 같지는 않았다.

사실 노아의 몸이 자랐다는 걸 바로 알아차리진 못했다. 좋아하는 퓨레를 먹이고, 뽀송뽀송한 새 옷으로 갈아입히려는데... 이상하게 소매가 겅중 뛴 것을 보고서야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노아의 소매만 어루만지던 차민은, 미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몇 년째 같은 사이즈인 조그만 옷을 전부 가져다가 입히고 벗기길 반복했다. 순한 아이가 있는 힘껏 인상을 쓰며 통통한 손을 버둥거릴 때까지.

“시키는 일은 전부 할 수 있어. 진심이야. 그렇지만 당장 숨이 넘어가는 애를 두고서 자위나 해야 너에게 닿을 수 있다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야.”

“내가 효율을 따져서 그런 귀찮고 저열한 수를 쓴 게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 테고.….”

루카스가 넥타이 매듭 안으로 손가락을 걸며 느슨하게 당겼다. 차민은 주먹을 쥐면서 떨리는 손을 감추었다. 새파랗게 날이 선 공기가 당장이라도 제 몸을 난도질할 것만 같았다.

“부디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대단한 조건이길 바라. 그렇지 않으면 나도 무슨 짓을 저지를지 짐작이 안 가니까.”

침을 삼킬 때마다 날카로운 이명이 들렸다 끊기기를 반복했다. 플린가에 멋대로 통보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긴장감이 밀려왔다.

차민은 제 구두 끝을 바라보며 내내 연습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간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구두코에 뽀얗게 먼지가 앉아 있었다. 바쁜 출근길에 여기저기에서 채인 탓인지 희미하게 운동화 자국 같은 것도 찍혀 있었다.

그런데 부끄럽기보다는... 이상하게도 고단함이 묻어나는 제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긴장이 풀어지는 듯했다.

루카스는 이런 신발을 신고, 걷는 삶을 알지 못할 것이다. 언제였더라. 센트럴파크 근처에서 세 번째 데이트를 했을 때였던가. 루카스는 소유한 제트기가 없다는 제 말에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다, 프라이빗 에어포트 연간 멤버십이 세금을 절약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듣긴 했다며 영문도 모를 소리를 했다. 헬기나 제트를 이용할 일이 없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는 것처럼.

처음엔 저를 놀리려고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루카스는 연구원인 아버지의 연봉 이야기를 듣고는 심각한 얼굴을 하더니, 그간 전혀 관심이 없었던 직원들의 복지 수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차민은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어서 어색하게 입꼬리만 올리고 말았다. 말단 연구원에게도 이만큼의 연봉을 책정해 주다니, 복권에라도 당첨된 듯하다면서 계약서를 읽고 또 읽던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인생 모르는 거라며 미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싣던 때가 아직도 선명한데.… 그래, 정말 인생 모른다고, 이렇게까지 알 수 없는 다른 계층의 삶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잠시 ‘요람’이니 뭐니 하는 것들에 정신이 팔려 잊어버리고 있었다. 루카스와 저 사이엔 처음부터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불멸자, 영생, 유한성... 이따위 것들은 다 치워두고서. 피보다 더 지독한, 보이지 않는 계급에서 기인한 숨 막히는 차이가.

이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루카스와 얽히는 것 자제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고 나니 오히려 덤덤해질 수 있었다.

“도와줄게. 네 ‘반려’를 찾는 일.”

차민은 낡은 제 구두와 새 것처럼 반질반질한 루카스의 구두를 번갈아 바라보다, 툭 말을 던졌다. 조금 전의 루카스처럼 덤덤해 보이길 바랐지만, 끝에 가선 죄 갈라지는 목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 뭐?”

“네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사람이, 아니 ‘비스트’가 생겨서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쪽과 반드시 각인이 되도록 도와줄 수 있어.”

약간의 광기와 분노마저 지운 채, 그저 피곤하다는 듯 이마를 쓸던 루카스의 손이 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가 고개를 치켜들고 자신을 바라보기까지의 찰나가 영원처럼 길었다.

“하하....”

루카스는 자꾸 웃기만 했다. 당연히 즐거워서 띠는 미소가 아니었다. 어쩐지 팽팽하게 조이고 있던 감정의 실이 와르르 끊겨버린 듯한... 그런 얼굴.

“죽었다는 네 부모가 숨겨둔 약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살의가 사무실 안을 맴돌았다. 벽을 따라 두른 LED 전등이 파삭이는 소리를 내며 조금씩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그런 건 아냐. 절대로.”

그 말에 차민 또한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혀가 뻣뻣하게 굳기 시작해, 이후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짐작했던 대로 ‘반려’에 대한 이야기는 루카스에게 직접적으로 전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면 노아가 누구의 아들인지를 명확히 밝히는 것과 진배없으니, 당연히 맹약의 제한 범위 내일 터였다.

“하지만 정말이야. 그럴 수 있어.”

“아하. 변수가 많은 인간이라서? 그것 참 대단하군. 나도 모르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니.”

그렇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긴 이후로 ‘반려’의 각인을 지울 수 있는 방법은 아이가 죽거나, 상대방이 죽는 것뿐이다.

더 이상 루카스에게선 어떤 향도 느껴지지 않지만, 노아를 낳게 되는 바람에 그의 ‘반려’ 자리를 여전히 제가 차지하고 있는 거라면... 그러면 제가 죽으면 모든 게 끝이 날 터였다.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쉽게 결정이 내려졌다. 내가 죽으면 된다. 그러면 노아도 괜찮아질 거고, 루카스도 결국은 속 시원해하지 않을까.

그러니 조금 답답해도 노아가 정상적으로 성장할 때까지만 버텨볼 생각이었다. 물론 남겨질 노아가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제가 죽고 없더라도, 우드가의 다른 ‘비스트’들이 적당히 보호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인간과의 혼혈은 매우 희귀할 테고, 또 노아가 카터처럼 루카스와 서열을 두고 다툴 항렬은 아니니까.

“믿을 수 없다면 무엇이든 걸게. 노아라도.”

그와 동시에 사무실 안에 자리하고 있던 작은 액자 몇 개에서 번쩍 빛이 났다. 분노로 잔뜩 날이 서 있던 루카스 또 한 일순 놀란 듯했다. 아마 방금 전 내뱉은 그 한마디 때문에, 이전까진 그에게 보이지 않던 사진 속 노아의 모습이 드러난 모양이었다.

손바닥만 한 원목 액자들이 둥둥 떠오르더니, 이내 루카스의 눈높이에 맞춰 보기 좋게 늘어섰다.

좋아하는 토끼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잠든 모습, 토끼 모양으로 깎아준 사과를 들고는 토끼가 죽은 줄 알고 대성통곡을 하는 모습.…

사랑스러운 노아의 몇몇 순간을 훑어보는 루카스는, 놀랍게도 직전까지의 흉흉하던 감정은 잠시 잊은 듯했다. 혹시 자기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카터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노아는 백인과 동양인의 혼혈 같은 외양을 하고 있어, 진짜 아빠가 누구인지 추측하기가 쉽지 않았다.

“노아가 제 나이로 자랄 수만 있게 해줘. ‘반려’의 일은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애 얼굴까지 드러내는 걸 보니 충분히 진심이라는 건 알겠는데.”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액자들이 일제히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루카스는 깨진 유리조각을 내려다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카스!”

막 쇼핑백에서 꺼냈다고 해도 믿을 법한 완벽한 마감의 가죽구두가, 박살이 난 유리조각을 짓밟았다. 환하게 웃는 노아의 얼굴 위를 시커먼 발자국이 사정없이 뭉갰다.

“그래. 좋아, 받아들이지. 네 제안.”

차민은 멍하니 깨진 액자와 망가진 노아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깟 피 조금 내어주는 게 뭐가 그렇게 대수라고.”

“······.”

“한차민. 왜 그런 얼굴을 해?”

성큼 다가온 루카스가 차민의 턱을 세게 붙들었다.

“그럼 내가 저 애가 간절해서, 아빠 노릇이라도 해주고 싶어서 그렇게 네 뒤를 추적했던 것 같아? 누구의 씨를 받고, 누구의 기운을 빨아먹으며 기생했는지도 모를 골치 아픈 애새끼를? 내가 대체 왜.”

루카스가 삐딱하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변수가 많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인간은 쉬웠다. 아주 작은 행동과 말로도 상처를 벌리고 헤집을 수 있다.

“만약 저 피의 절반이 내 것이라고 해도 기분이 더러운 건 마찬가지야. 저게 어떻게 생겼는지 잊었어?”

하물며 차민은, 그가 가장 가까이 두었던 유일무이한 인간이었다. 거의 십 년을 얼굴도 안 보고 살았다지만, 함께 어울렸던 짧은 시간 동안 루카스는 제가 줄 수 있는 모든 마음을 다 내주었다.

처음엔 거슬렸으나 그 다음에 마주쳤을 땐 조금 흥미가 일었다. 남들은 모르는 예쁜 얼굴을 자신만 알고 있다는 재미도 한몫 했다. 덜덜 떨면서도 구닥다리 같은 대시를 멈추지 않는 점도 웃겼고, 그러다 얼결에 좋아하게 됐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거기 있는 줄도 몰랐던 마음이 차민에게 전부 넘어가 버린 뒤였다.

“네가 먹인 약 때문이었잖아.”

그렇지만 진심을 내준 자신에게 돌아온 건 배신뿐이었다. 공휴일을 코앞에 둔 어느 날이었다. 이젠 딱히 이능력 같은 것이 없어도 그의 부모님에게 들키지 않고 애인의 방을 드나들 수 있었고, 그때도 여느 날처럼 작은 침대 위에 딱 달라붙어 뒹굴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대학 추천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사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는 짙은 향이 진동하고 있었다. 음료에는 피가 섞여 있었다. 그것도 루카스, 자신의 피가.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인 걸까. 조금 현실감이 없었지만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차민을 보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저를 해칠 수는 없다는 걸 아니까. 그리고 새파랗게 굳은 차민의 얼굴이 안쓰러워서. 그래서 그저 괜찮다며 웃어주었다.

그 관용의 결과가, 믿었던 대가가 이것이었다.

“그래도 난 괜찮았어. 네 아버지는 다른 인간들처럼 연구 성과 좀 내보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을 게 뻔했고, 너 역시 인간이니 가족의 압박을 이겨내기 쉽지 않았겠지..., 그런 추측이나 하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네 입장을 이해하고 싶은 걸 보니 내가 너에게 푹 빠지긴 했나 보다, 싶더군. 뭐 어차피 독성이 있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한들 나한텐 들어먹지도 않을 테니까... 이 정도는 기꺼이 속아 넘어가주자고 생각했어. 그런데 넌...!”

루카스의 감정에 동화된 듯 사무실의 전등 불빛이 크게 일렁였다.

“카터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다 했다고? 살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나? 그래, 그 새끼를 위해 그렇게 헌신했으니 네 앞으로 그 많은 동산과 부동산들이 넘어갔겠지.”

이미 단단하게 굳어버린 과거의 실타래는 부드럽게 어루만진다고 달래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차민이 저에게 최소한의 감정은 드러내주길 기대했다. 돈에 눈이 멀어 사과할 염치조차 잃었다면 차라리 뻔뻔하게 본색이라도 드러내주었으면 했다.

오히려 그러면 이 종잡을 수 없는 감정들도 좀 차분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한차민과 헤어진 이후부터 지금까지, 혈관으로 펄펄 끓는 물을 따라 부은 듯한 짜증과 괴로움이 조금은 가실 것도 같아서….

“그래놓고선 이젠 그 애새끼를 가지고서도 장난질을 하려는 거잖아. 너.”

그렇지만 차민은 여느 때처럼 굳게 입을 다물고서는, 고장난 인형처럼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또렷한 새카만 동공에는 그 어떤 감정도 묻어나질 않았다.

“그래, 자기 불리할 땐 입을 닫아버리는 그거, 끝까지 가련한 척이라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더 구역질이 나. 알아? 이제 와서 나한테 네가 불쌍하게 보일 이유가 뭐야? 이미 끝의 끝까지 다 본 사이잖아, 우리.”

“······.”

“아아, 카터 그 새끼 대신 나한테 챙겨 받고 싶은 건가? 그 대단한 화대?”

자신은 분명 신인데, 한차민이 떠난 이후로 저가 딛고 선 땅은 단 한순간도 지옥이 아닌 적 없었다.

“진작 말하지 그랬어.”

성큼 다가온 루카스가 차민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낡은 셔츠의 박음질이 우두둑 벌어지는 소리가 났다. 손가락이 길어서일까. 마치 지휘라도 하는 듯한 우아한 손놀림이었다.

“‘벨’이니 ‘버튼’이니 이것저것 쓸 것 없이 차라리 내 걸 바로 넣어달라고.”

차민은 눈앞에 들이밀어진 그의 손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 멈춘 것 같았던 이명이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망가진 현악기의 줄을 뜯고 긁어내는 듯한 끔찍한 소리였다.

“그래도 한때 죽고 못 사는 사이였는데 이 정도 적선이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옷깃을 틀어쥐었던 불같은 체온이 어깨와 쇄골 어딘가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갔다. 의도가 다분히 느껴지는 노골적인 접근이었다. 섹슈얼한 뉘앙스보다는, 그저 저를 놀리고 울리고 괴롭히고 싶은 게 분명한 과장된 몸짓.

“너 미쳤어?”

“왜? 네가 책임지고 내 ‘반려’를 찾아주겠다며. 방금 금쪽 같은 네 애새끼까지 걸면서 그랬잖아.”

견디다 못한 차민이 벌떡 일어서려고 했지만 루카스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랐다.

“그동안 ‘반려’도 가질 수 없었던 내 몸 좀 위로해주는 건, 네가 말하는 책임 밖의 일인가?”

자리를 피하기 직전, 그의 무릎이 제 다리 사이를 벌리며 파고들어왔다. 애초부터 책상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던 터라 물러설 곳이 없었다. 차민은 힐끔 뒤를 돌아보면서 여유공간을 확인했다. 하필이면 무시무시한 두께의 책들을 전부 치워놓은 탓에 명단 몇 장만 올려놓은 매우 간소한 상태였다. 슬쩍 밀면 상체가 젖혀지는 것 정도는 전혀 무리가 없어 보였다. 위험했다.

“그게 싫으면 다른 이유를 찾아볼까?”

칼날 같은 그의 시선이 식은땀이 맺힌 차민의 이마와 턱 끝, 숨을 멈춰 크게 부푼 흉곽까지 도려낼 듯 스쳐 갔다.

“내 돈으로 충분히 플린가를 구워삶을 수 있다고 했었지? 부족한 디테일은 어떻게든 채워보겠다고도 했고…. 그렇지만 그 이전에 독단적으로 일을 저지른 짓에 대한 책임을 물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만약 루카스가 이 사태를 해결할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고 해버리면 차민의 해고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로펌과 우드가, 플린가 모두에 역으로 소송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나와 플린 모두의 눈치를 보느라 어느 로펌에서도 널 고용해주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일 테고.….”

“협박을 하는 건 좋은데 어째서.”

“그렇게 되면 너로선 몹시 곤란해지겠지. 다른 건 몰라도 노아의 의료보험은 소중할 테니까.”

삐익-. 사망선고를 알리는 기계음이 귓가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반은 사람이 아니라곤 하더라도, 반은 또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네 아이가 평범한 병원을 아예 안 갈 것 같지는 않은데.”

“…노아는, 굳이 병원에 가지 않아도 상관없어. 네 말대로 반은 인간이 아닌 애인데 평범한 의사한테 데려가서 뭐 하겠어. 이상한 취급이나 받을 게 뻔한데.”

차민은 반쯤 입이 벌어진 채로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어지러운 와중에도 미리 외운 것 같은 변명이 술술 튀어나왔다. 제 직업이 변호사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하, 그래? 그렇지만 상관없는 얼굴이 아닌데?”

전부 맞는 말이었다. 평범한 아이들이 다니는 병원에 노아가 갈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비싼 보험에 가입해둔 것도 사실이었다.

노아가 어릴 때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여기저기를 돌며 성장에 관한 상담을 받았었고... 무엇보다 차민은 언제나 마지막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카터의 지시는 늘 위험했다. 일을 수행하는 동안에도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고, 이후로도 마음 편히 살 수 없었다. 그래서 본사로 발령을 받자마자 그린우드 출신이라는 의사 몇을 체크해두었고, 그들이 요구하는 조건을 모두 커버할 수 있는 의료보험으로 골라둔 상황이었다.

“한차민. 누구에게 약점을 잡히기 싫으면... 그런 표정을 짓지 말았어야지.”

또각.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가장 밑단에 자리한 단추가 풀렸다. 셔츠는 순식간에 배꼽 위까지 벌어졌다.

“네 배신을 따져 물었을 때는 눈썹 한 올도 까딱 안 했으면서, 아이 이야기 좀 했다고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면 어떡해.”

방금 전 의자에 앉아 빙글빙글 돌던 때처럼 축이 크게 비틀리더니, 상체가 완전히 뒤로 넘어갔다. 눈을 홉뜬 채로 천장을 바라보는데, 불쑥 다가온 큰 그림자가 반쯤 시야를 가려버렸다. 아. 망할. 덤덤하게 잘 넘어갔다고 생각했는데... 말만 그럴싸했나 보다. 몇 년 차인데 아직도 표정 하나를 다스리지 못해서....

“...하나만 묻자. 넌 무엇이든 할 수 있잖아.”

다소 뜬금없는 화제의 전환에 루카스의 눈썹이 크게 까딱였다. 차민이 또 얄팍한 수나 궁리하는 것 같다고 불쾌하게 여기는 듯도 했다.

“전지전능해서, 못 하는 게 없다고 했잖아.”

차민은 자꾸만 잠기려는 목청을 가다듬으며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루카스는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것으로도, 눈짓 한 번으로도 공간을 찢었고 없던 것을 있게도 만들었으며... 그야말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루카스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끝을 모르는 그의 권능이 경이로웠고 또 두렵기도 했다. 까마득한 시간 동안, 그와 같은 우드가의 ‘비스트’들에게는 어떠한 종의 이름도 붙이지 못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신이 현신한다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루카스를 보고 있노라면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니,

“그중 시간을 돌리는 방법은 없었어?”

차라리 그럴 수 있다면…. 아예 서로를 모르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러면 아무도 상처받지 않고 끝낼 수 있지 않을까. 내겐 너무 과분한 이를 혼자 짝사랑했던 정도로, 흔해서 사연거리조차 될 수 없는 평범한 결말로 끝이 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루...., 카스!”

잠시 어둑한 눈으로 차민을 내려다보던 루카스가 이내 좀 전의 기색을 말끔히 거두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손을 움직였다.

“여기 사무실이야!”

“지금 네 오피스에 누가 와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

“그걸 지금…!”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말 그대로였다. 루카스가 가진 돈의 규모는... 가히 권력이나 위력이라는 표현으로도 묘사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미친 자본주의의 나라에서 루카스는 그야말로 제왕이고 신이었다. 차민이 대낮에 사무실에서, 그것도 동성의 클라이언트와 섹스나 하는 사람이 되든 말든... 그건 루카스가 딱히 고려해야 할 요소가 아니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네가 멋대로 저지른 일을 몸으로 무마하는 거라고 여길 수도 있겠어.”

셔츠가 밀려 올라감과 동시에 드륵, 소리를 내며 파스너가 내려갔다. 루카스가 딱히 애쓰지 않았음에도 허무할 정도로 쉽게 옷이 벗겨졌다. 공휴일이 지난 직후의 싸구려 떨이 상품 포장지처럼.

“그러니까 앞으론 이따위로 사고 치지 마. 네 클라이언트는 이런 일에 몹시 민감하다고.”

루카스의 손이 차민의 머리 옆을 짚었다. 바짝 다가온 그의 얼굴은... 여전히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온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 꼭 정물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마치 조각상이나 정교한 초상화처럼.

“그래서, 루카스 넌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차민은 힘겹게 말을 꺼내며 고개를 돌렸다. 루카스의 눈에 제가 얼마나 얄퍅하게 보일지 알았다. 그렇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노아의 약을 주겠다는 말은 진심인지, 분풀이 같은 섹스에 기꺼이 응해주면 노아의 의료보험은 건들지 않을지, 그리고 어디든 좋고 어떤 가학적 행위도 감당할 수 있으니 사무실에서의 관계는 재고해줄 수 없는지.... 앞의 두 가지 조건은 가뜩이나 어지러운 루카스의 심기를 폭발하게 할 게 뻔했지만, 그래도.

“길게 말 늘이면서 시간 버는 짓은 법정에서나 하시고.”

이제 와서 말이나 돌리려는 얕은 수 같은 건 통하지 않는 다는 듯, 루카스가 차민의 얼굴을 움켜쥐고는 단단히 고정 했다.

“참고로 말해주자면 시도는 해봤어.”

한껏 몸을 뒤틀려던 차민은... 뒤늦게 루카스의 말을 이해하고서 버둥대던 것을 멈추었다.

“혹시 되돌릴 순 없을까 싶었지만…, 그 어느 때로도 안 되더군.”

“아......”

직전까지 남의 속도 모르고 자기 멋대로 추측하고 지껄이던 루카스가 미웠다. 그런데 몇 번이나, 각기 다른 때의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다는 꺼질 듯한 목소리를 들으니 이상하게 심장이 아래로 훅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첫사랑이 달콤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차민은 지난한 시간을 그를 원망하고 괴로워하는 데 소비했다. 반대로 말하자면 강산이 한 번 바뀌는 동안에도 루카스를 잊어 본 적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눈 안쪽이 불로 지진 듯이 뜨거워졌다. 울지 않으려 애썼는데, 별 수 없이 귓바퀴를 타고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간 혼자서 너무 많은 것을 끌어안고 있었던 탓일까. 이것저것 한데 뭉친 감정들을 말끔히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좋고, 싫고, 밉고... 이런 모든 것들을 떠나서 그냥 마음이 아팠다. 아프고, 외로웠다.

루카스와 다시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라거나, 혹시라도 그가 저를 아직 좋아하길 바라는 기대 같은 것들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지만 전능하던 그가, 영원을 산다는 루카스가 아무리 노력해도 저를 도려낼 수 없었다는 것이 자꾸만 차민의 가슴 어딘가를 툭툭 치고 갔다.

“우리는... 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

왜 노아를 데리고 찾아갔을 때 나를 만나주지도 않았어? 인간이라면 질색을 하는 카터가 그 많은 재산을 빼돌리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눈물로 시야가 흐려져, 그의 표정이 어떤지 제대로 살필 수 없었다. 루카스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퀴퀴하고 진득한 피 냄새가 굳어버린 혀를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잠시 상념에 젖어 느려졌던 그의 손이 속옷과 바지를 한 번에 끌어 내리고는, 제 몸을 세게 붙들었다. 가공할 만한 악력으로 허리와 늑골을 억세게 움켜쥔 탓에 숨을 쉬기 어려웠다.

“네가 악을 쓰든 앙앙 울든 내가 알 바 아니니까, 사람들 이목이 신경 쓰이거든 알아서 다스려.”

그가 찢어내듯 풀어낸 넥타이가 입가에 닿았다. 물고 있으라는 뜻인 것 같았다.

차민은 결국 모든 의지를 내려놓은 채, 눈을 감고 천천히 입을 벌렸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몸 위로 어른거리는 기적이 선명했다.

“...한차민.”

차마 문장이 되지 못한 그의 긴 숨이 차민의 눈가를 스치고 갔다. 루카스는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넌 대체….”

힘을 싣지 않은 긴 손가락이 젖은 얼굴을 가만가만 어루만졌다. 어르고 달래주는 보람도 없이 더운 눈물이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다시 마주친 이후로 서로에게 모질지 않았던 순간이 없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불쑥 다정했던 언젠 가의 습관이 튀어나오는 루카스가... 놀랍게도 가엾게 느껴졌다.

저에게 말도 안 되는 도구들이나 던져주고, 노아의 사진들을 발로 짓밟고, 기어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몸을 섞으려고 드는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저와 꼭 같은 크기로 키워왔을 그의 원망과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

우스운 일이었다. 영원히 풀리지 않을 오해를 껴안고, 서로를 지옥의 불구덩이로 처박아놓고서는... 이 엉킨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어이없게도 서로가 유일하다니.

문득 루카스의 얼굴이 궁금해진 차민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렇지만 시야엔 온통 한데 뭉친 빛 덩어리만 가득했다.

정말로 내가 죽어야... 온전히 끝이 나려나. 차민은 넥타이를 문 채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희미하게, 그간 완전히 잊고 살았던 달콤한 향이 코끝을 스쳐 갔다. 이것도 습관에서 비롯된 환각 같은 것일까.... 전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애써 초점을 맞춰보려 애쓰던 차민은, 차라리 다시 눈을 감아버리기로 했다.

*

“내, 내가 가도 되는 거야? 아무래도 그건 좀.….”

차민은 몸에 잔뜩 힘을 주며 버텼다. 꼭 치과 가기 싫어서 버티고 선 어린애 같은 꼴이었고,

“아, 안 될 게 뭐가 있어.”

물론 루카스는 그런 차민의 의사 따위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손을 잡아끌기 바빴다.

“그렇지만... 나, 난... 인간이잖아.”

“요즘은 안 그러는 것 같더니 또 말 더듬네. 야, 무단 침입 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어떻다고 그래. 너 나 죽일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지? 아니면 기밀이라도 빼돌릴 거야?”

“루카스!”

“그래, 아니잖아.”

촌스럽게 대체 왜 그러냐고 면박을 주면서도 콧잔등을 씰룩이는 것을 보니, 두리번대는 제 꼴이 그의 구미를 당긴 모양이었다.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루카스는 저의 어리바리한 모습을... 굉장히... 으음, 귀엽게... 여기는 듯했다.

사실 그간 루카스는 어이없던 첫 만남 이후로 차민을 심심풀이 땅콩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았다. 주변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의외로 웃긴, 그런데 희한하게 섹스는 좀 잘 맞는... 딱 그런 정도의 존재.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묘한 관계의 색이, 온도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사실 루카스와 관련한 일론 도통 자신감이 없는 차민은 조금 나중에서야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관계를 가질 때, 쾌락 그 자체에 집중했던 옛날과 달리 자꾸만 제 반응에 집중한다거나.... 아니면 길을 가다 루카스의 얼굴을 훔쳐보느라 정신이 팔리면 그런 저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넘어지지 말라고 어깨를 단단히 붙들어준다거나 하는.... 그런 일들이 자꾸만 반복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루카스는 수업이 끝나면 차민을 집에 데려다주곤 했다. 제가 다른 사람 눈치를 보는 걸 알았는지, 학교 뒤쪽의 조그만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만났다. 무시무시하게 생긴 차를 타고는, 괜히 툴툴거리며 걸음이 느린 차민을 타박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인간으로서 아주 보통의 속도로 걸었으며, 순간이동을 하는 네가 반칙이라고 대꾸하는 것이 하나의 일과처럼 자리 잡아버렸다.

메시지를 나누는 횟수도 늘었다. 하루에 두어 번은 꼭 통화를 했고, 특히 차민이 잠들기 직전에는 어디서 지켜보기라도 한 것처럼 반드시 전화가 걸려왔다.

그냥 아는 사이지 뭐, 수학 시험 도와주다가 알게 됐어. 낌새를 눈치챈 누군가가 물어보면 그렇게 답을 하려고 몇 번이나 연습을 했는데-물론 그린우드에서 내내 루카스와 붙어 있다고 한들 아무도 저에게 관심을 갖지 않겠지만-, 그런데 요즘은 외운 답을 내놓기가 조금 망설여졌다.

그렇게 답을 해버리면 누구 하나가 몹시 상처를 받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먼 발치에서 루카스를 훔쳐보던 때도 있었는데, 어느새 이런 사이까지 되어버린 것이다.

차민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나 훌쩍.

“나야말로 좀 묻자. 뭐가 그렇게 무서워? 문 열자마자 괴물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

“으음.....”

“한차민. 네가 다니는 학교가 그린우드라는 건 알고 있지?”

“그, 그게….”

그리고... 제멋대로 자라나버린 이 이상한 관계 탓에 싱숭생숭했던 건 루카스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이상하게 고집을 피우고 있었다. 뭐랄까. 오늘에야 말로 결판을 내고야 말겠다는 듯이?

토요일 아침부터 난데없이 전화를 걸어서는 그린우드 인근의 몰 앞에서 만나자고 하기에 쇼핑이라도 하려나 했는데.… 새카맣고 뾰족한 우라칸을 폭풍처럼 몰고 와서는, 난데없이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는 거였다. 그러니까 우드가의 저택, 신과 같은 ‘비스트’의 본거지로.

“말했지, 우리는 인간과 좀 다르다고. 어디서든 그렇긴 하지만 특히 여기서는 나를 거스를 수 있는 생명체는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루카스가 다소 우악스럽게 쥐었던 손을 풀어내고는, 조금 어색하게 차민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었다.

“너무 겁낼 거 없어.”

깍지를 낀 손이 너무 커다래서, 거의 그의 주먹 안에 갇혀 버린 것 같은 이상한 꼴이 되었지만... 싫지 않았다. 감히 싫어할 수 있을 리가. 차민은 애써 땅으로 시선을 떨구고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넌 내 ‘반려’잖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던 루카스가 아니지, 하며 가볍게 혀를 튕겼다. 미지근한 소다의 팝탑을 젖힐 때처럼 타닥, 하는 부드러운 소리가 났다. 차민은 적당히 발랄한 그 소리가, 연상되는 맛이 꼭 요즘의 루카스와 저 같다고 생각했다. 톡 쏘는 강한 탄산이 아니라, 간지러울 정도로 보글보글한 기포에 혀가 녹을 것 같은 시럽의 단맛.

“음, 인간들 표현으로 치자면... 남자친구라고 해야 하나?”

“…어?”

귀여운 상상을 하느라 자꾸만 삐죽삐죽 솟으려는 둥근 볼을 다스리려 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차민은... 어벙하게 입을 벌린 채로 저도 모르게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뭐, 라고?”

“그럼 아니야?”

새초롬하게 눈을 치켜뜬 루카스가 어이없다는 듯 차민을 흘겨보았다.

“나, 남자친구?”

“...그래, 자연스럽게 흘러가봤자... 넌 말로 정확히 짚어주지 않으면 혼자서 계속 삽질이나 할 것 같더라.”

그래, 확실히 조만간, 어쩌면 오늘.…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최근 루카스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 자꾸만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두곤 했으니까. 저에게 확인이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반려’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만 꺼내기도 했고….

신호라는 건 알겠는데, 의미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나마 눈치가 늘어서 좀 더 진지한 사이로 나아가거나... 아니면 그냥저냥 몸이나 섞다 자연스럽게 멀어지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루카스가 이렇게 난데없이, 그것도 만나자마자 훅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혹시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였다면....”

차민에게서 바라던 반응이 선뜻 나오질 않자, 마뜩찮다는 듯 루카스가 손에서 슬쩍 힘을 풀었다.

“아, 아니! 그럴...,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 그러니까.”

두 손으로 다급히 붙들자, 루카스가 이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옅게 웃었다.

“그래도 몇 가지 말해주자면... 본가엔 우드의 피가 흐르는 ‘비스트’들이 전부 모여 있어. 물론 우리 쪽에서 수족처럼 부리는 ‘비스트’들도 있고, 사람들도 있지. 그래서 집이라기보다... 좀 와글와글하게 같이 사는 공간 같은 느낌이야. 기숙사라고 하면 더 이해가 쉬울 것 같군.”

“가족...같은 느낌은 아니랬지?”

“아무래도. 나한텐 다들... 음, 내가 지켜줘야 할... 권속들? 부속품들? 그렇게 느껴져. 참고로 힘이 약할수록 이곳을 떠날 수 없어. 이것도 인간들과는 다르지? 보통 가장 센 놈이 본가를 차지하고 있잖아.”

“그, 그렇지.….”

“우리는 달라. 여기가 가장 강력한... 음, 그래, 결계 같은 게 있거든. 아무래도 힘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자기의 본가를 떠나면 생존 자체가 어려워지는 ‘비스트’들도 있어. 물론 어설프게 피가 섞인 놈들을 감시하려는 목적도 있고.”

루카스가 현관의 어딘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차민은 뻘쭘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프라이빗 로드라고 적힌 표지판 몇 개를 지나고서야 나타난 우드가의 저택은 예상 외로 평범해 보였다. 물론 보통 사람들이 사는 싱글 하우스와 비교했을 땐 성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거대했지만, 사람을 위축시키는 위압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의 건축물까지는 아니었다.

아, 어쩌면... 그린우드처럼 안으로 들어서면 끝도 없이 공간이 튀어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우드가의 저택이 생각보다 친숙하게 느껴졌다. 다시 살펴보자 전반적으로 학교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군데 군데 눈에 들어왔다.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공간은 사실 본가가 아닌 다른 곳이긴 한데... 그래도 먼저 여기에 널….”

쾅-!

난데없는 폭발음에 차민의 몸이 파드득 튀었다. 루카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무시무시한 굉음이 귀를 찔렀다.

“부, 불난 거 아니야?”

차민은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에 화들짝 놀라, 팔꿈치로 루카스를 쿡쿡 찔러댔다. 저택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아무렇게나 주차해두었던 차에서 나는 연기가 분명했다.

다소 엉뚱하고 불길한 상상 또한 연기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이 영험한 집이 인간인 제 출입을 경고하는 것 아닐까?

그나저나 저 차 비쌀 텐데, 아깝다. 차민의 입장에선 거의 드러눕다시피 앉아야 하는 좌석과 낮은 시야가 몹시 불편할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한 번 몰아보고 싶다고 그린우드의 누군가가 난리를 치던 것을 분명히....

“…어?”

조금 놀라 실없는 생각이나 하던 차민은, 문득 학교에서의 패턴이 떠올라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루, 루카스? 내 기억에는 학교에서도 네가 이렇게 주차를 하면....”

보통 그가 로비 앞에 아무렇게나 차를 대면, 그가 부리는 이들이 달려와 알아서 이후의 뒷정리를 해주곤 했다. 여긴 심지어 우드가의 본가였고, 루카스는 이 성스러운 핏줄의 지배자였다. 그러니 당연히....

“혁, 루카스! 저기 안에...!”

“괜찮아. 아무도 안 다쳤어.”

루카스가 안심하라는 듯 차민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신경 쓸 거 없어. 속이 뒤틀린 누군가가 엄한 남의 차나 들이받은 거니까.”

“뭐? 이, 일부러?”

과직, 하고 무언가 우그러드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사고의 여파인지, 루카스가 조종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다행히 불이 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고, 연기도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한차민, 내가 아까 말했지. 본가에는 우드의 피가 흐르는 모든 것들을 모아놨다고.”

“어? 응, 그랬...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여기 얹혀살고 있는 쓰레기 같은 새끼가 하나 있어.”

차민은 루카스의 얼굴과 수상한 사고현장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원래도 그는 본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우드 연구소에서 일하다 보니 차민이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했던 것도 있었다.

“괜한 시위나 할 거면 진짜 뒈져버릴 것이지..., 좆도 아닌 새끼가 가지가지하고 있어.”

“누군...데?”

그래서 아는 게 많이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아는 한, 루카스가 이렇게까지 날카롭게 반응하는 모습은 처음인 것 같았다.

“인간들에게는 이복형제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딴 건 절대 아니고,”

“루카스, 혹시 너야?”

낯선 목소리를 들은 루카스의 얼굴이 더욱 사납게 구겨졌다. 차민은 이상하게 몸이 움츠러들어, 루카스의 품으로 주춤주춤 파고들었다. 평소였다면 기어이 몇 마디 덧붙이며 면박을 줬을 그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저를 감싼 손에 조금 더 힘이 실리는 것 같았다.

“미안, 네 차인 줄 몰랐지.”

연기 너머로 얼핏 보이는 실루엣은 한참이나 거리가 있음에도, 들리는 목소리는 코앞인 것처럼 가까웠다. 그린우드에 다니며 온갖 초현실적인 광경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며칠 전에 베카가 차 이야기로 시끄럽게 굴었던 게 생각나서.”

검지 정도의 크기였던 실루엣이 어느새 성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연기는 차에 문제가 생기면서 피어오른 것 같았는데... 어느새 차민의 시야를 뿌옇게 흐리고 있었다. 꼭 목소리의 주인공과 함께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어?”

터벅터벅 걸어오던 남자의 걸음이 뚝 멎었다.

“인간이네?”

차민은 저도 모르게 더듬더듬 손을 뻗어 루카스의 상의를 움켜쥐었다. 머리털이 쭈뼛 솟는 기분이었다. 음산하게 목소리를 내리깐 것도, 다른 특별한 수를 쓴 것도 아닌데 남자에게선 저에 대한 적의가 생생히 느껴졌다.

“꼭 오늘.....”

루카스가 잇새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한 손으로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무어라 험한 소리를 중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명확히 들리지는 않았다.

“헉, 저게 뭐야....”

실루엣의 색이 새카맣게 선명해지더니, 이내 흐물흐물 무너지기 시작했다. 수면 위에 돌이라도 던진 것처럼. 차민은 으깨지는 그림자가 섬뜩해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루카스의 체면을 생각해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빠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그가 흘끔 이쪽을 바라보는 것도 같았지만…. 차민은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섹스 파트너 이상의 관계라는 확답을 얻었다고 해서 루카스가 전혀 다른 사람, 아니 ‘비스트’가 되는 건 아니었다.

“이런, 루카스.”

순간 강풍기 여러 대를 세게 켜놓은 것처럼 펑, 하고 큰 바람이 불더니 희뿌연 연기를 전부 다 몰아냈다. 수상한 실루엣의 주인공이 탄식한 것처럼, 아마도 루카스의 솜씨일 것이다.

화등잔만 하게 눈을 키운 차민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조심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까 잔뜩 긴장하던 모습을 들켰나? 혹시 저를 신경 써준 것일까? 그렇지만 루카스는 잔뜩 눈썹을 구긴 채 심각한 얼굴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착각했던 모양이다. 차민은 괜히 들떠 있던 스스로가 쑥스러워 발끝을 바닥에 툭툭 쳤다. 그래도 이렇게 덥석 안긴 저를 내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싶었다.

“내가 맛이 간 게 아니라면 저거 인간으로 보이는데?”

차민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아마 우드가의 ‘비스트’일, 대외적으론 루카스의 형제 정도로 여겨지는 저 ‘비스트’가 저에게 품은 건... 적의 같은 걸로 묘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저를 찢어 죽일 것 같은 깊은 살의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우리의 권속도 아닌, 말 그대로 인간 그 자제의 인간을 여기에 데리고 왔단 말이야?”

남자는... 하얀 피부에 눈부신 금발은 루카스와 같았으나 풍기는 기운이 전혀 달랐다. 습하고, 축축하고, 어두워서... 우드가의 일원이라기보다는 다른 ‘비스트’의 느낌이 났다. 뱀파이어라거나, 빛도 산소도 통하지 않는 늪지대 저 아래에 적을 두고 있다는 모리아히 일족 같은.

“아니지, 아주 미약하게나마 네 ‘반려’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도 같은데....”

하하, 하며 남자가 크게 웃었다.

“‘반려’를 여기로 데려온다는 게 무슨 뜻인 줄은 알고 그러는 거야? 게다가 인간을?”

저건 또 무슨 말이지? 차민은 답을 구하듯 루카스를 올려다보았으나, 앞만 바라보는 무심한 시선이, 그 중압감이 꼭 태산 같아서 쉬이 말을 걸기 어려웠다. 제가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저게 무슨 뜻이냐고 짹짹거릴 타이밍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간 네가 치고 다녔던 사고를 떠올려 봐도 이렇게 약한 흔적은 처음인 것 같은데.”

소리 없이 성큼 다가온 남자가 차민을 향해 몸을 숙였다. 무릎을 굽히고 눈을 맞추는... 동작 자체는 제법 친근하고 상냥했음에도, 심지어 직전의 말과는 달리 생글생글 웃고 있는데도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거부감이 있었다.

“인간 중에서도 특히 약한 개체처럼 보이는데, 대체 이런 반푼이를 뭐 하러....”

펑, 하고 아까와 비슷한 폭발음이 났다.

“카터.”

적당한 거리 밖으로 밀려난... 아마도 이름이 카터인 것 같은 남자는 투명한 실 같은 것에 칭칭 감긴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게 뭐....”

영롱한 은사가 실타래에서 풀린 것처럼 불어나더니, 양옆의 기둥에 돌돌 감겼다. 그 바람에 카터라는 남자는 꼭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처럼 보였다. 물론 거미줄 같은 것으로 표현하기엔 보석처럼 빛나는 저 물건이 지나치게 아름답긴 했지만.

“구성원의 소유물에 손해를 입힌 것에 대한 처분이다.”

“뭐? 소유물? 아니, 내가 네 차인 줄 몰랐다니까? 베카가 건방지게 배당금으로 뭘 샀느니 어쩌느니 해서.….”

카터가 어깨를 으쓱였다. 차민이 듣기로도 말도 안 되는 우김이었다. 저도 알고 있는 루카스의 습관을, 우드가의 일원이 모를 리가 없다. 게다가 여기는 우드의 본가 아니던가.

“베카의 것이었다면 용서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점이 이상하네. 언제부터 반푼이인 너에게 그런 권한이 있었지?”

차민은 그에게 바투 달라붙은 제 몸이 제발 진정하길 바랐다. 카터가 자신에게 무례하게 지껄였던 말을, 반푼이라는 표현을 굳이 되돌려주는 루카스에게 마구 뛰는 심장이 당사자에게도 느껴진다면...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아서.

“그리고 감히 나의 ‘반려’에게 위협을 하고서도 아무 일이 없을 줄 알았어?”

“뭐? 감히? 너 지금 나더러 감히라고 했어?”

“그래, 감히.”

“하하, 루카스. 너 지금 네가 진짜 수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데....”

“우스운 비약인데? 나는 그저 네 논리에 따라 강한 개체가 약한 개체에게 마땅한 처벌을 내렸을 뿐이야. 넌 구성원에게 옳지 못한 일을 행했고, 내 ‘반려’를 조롱하기까지 했어. 위험한 상황이라고 판단했기에 널 제재한 거고.”

루카스가 힘주어 안고 있던 팔을 풀며, 느슨하게 차민의 손을 잡았다.

“진심으로 반성한다면 알아서 구속이 풀릴 테니, 손님을 앞에 두고 네가 벌인 쪽팔리는 짓에 대해 잘 생각해봐.”

직전까지 살벌하게 욕을 중얼거렸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여서, 차민은 잠시 제 기억을 의심했을 정도였다.

“가자.”

카터가 무어라 말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그의 몸을 감싼 실타래가 꾸물꾸물 움직여 입까지 틀어막아버렸다. 저를 이끄는 루카스를 따라 돌아서기 직전, 스치듯 마주친 카터의 눈이, 그 안광이 무시무시했다.

“왜 그래, 비 맞은 똥개처럼.”

몸을 부르르 떠는 차민을 보고 루카스가 핀잔을 주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까처럼 자기 옆구리에 저를 꼭 붙이고선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말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내가 수장이 아니라서.... 감정적으로 다 때려 부쉈다간 불리해지기만 하더라고.”

그 말은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차분하게 행동하지 못했던 루카스에게 불리한 처우가 있었던 것도 같고.

“당연한 말이지만 힘의 논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개체들도 있어. 이해는 해. 그들이 원해서 약하게 타고난 게 아니니까. 게다가 내가 수장이 되려면, 몇몇은 반드시 내 손에 죽어야 하거든. 정확히 말하자면 힘을 모조리 빼앗기거나, 아예 존재 자체가 사라지거나.”

그래서, 하며 루카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익숙해진, 같은 학교를 다닌 또래의 얼굴이 아닌...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아온 ‘비스트’의 얼굴을 하고서.

“그렇지만 날 죽일 순 없거든. 아니, 털끝 하나 다치게 할 수 없지. 그게 억울한 몇몇은 약한 것들에게 살살 바람을 넣기 시작해.”

“그런 게 타격이 돼?”

“글쎄, 확실히 번거로운 일이 많이 생기겠지. 내가 혼자 ‘비스트’들 전체를 다스리려면…, 맙소사.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아.”

으음, 그러니까 모기에 물린 것과 비슷한 느낌일까? 죽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만 당장 귀찮고 신경이 쓰이는?

“하여튼 그런 이유로 거슬리게 구는 몇몇 놈들이 있고, 아까 그 새끼는 그 중에서도 가장 악질이야.”

아아. 차민은 그제야 카터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그래, 아버지가 보여주셨던 우드가의 족보에 있던 이름이었다. 자선의 밤에서 루카스와 마주쳤을 때, 분명 카터 때문에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고 하지 않았던가.

분명 달달 외우고 있던 이름이었는데 아까 전엔 잠시 생각이 나질 않았다. 심지어 루카스와 처음 사적으로 마주쳤을 때에도 단박에 떠올렸던 이름이었는데.... 하긴, 조금 전엔 이러다 죽는 건 아닌가 싶었을 정도로 두렵긴 했다. 처음으로 느껴본 죽음에 가까운 공포였으니.

“단순한 열등감으로 발작해서 돌아버릴 듯한 거라면, 그래서 홧김에 일을 벌이는 거라면 너그럽게 이해해줄 수도 있어. 어차피 내 손에 정리될 놈인데, 살아 있는 동안은 봐 주지 못할 것도 없지.… 그런데 카터 그 새끼는 도가 지나쳐. 매번.”

루카스가 혀로 볼 안쪽을 불룩하게 둥글렸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좁혀드는 미간을 바라보던 차민은 허둥지둥 분위기를 환기해보려 애썼다.

“어, 음, 그런데... 이건 다른 소리지만, 되게 어려운 것 같아.”

“뭐가?”

“네가 ‘반려’에게 흔적을 남기는 방법도 진심으로 바라는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방금 전 그... 거미줄 같은 것도 진심으로 반성해야 풀릴 거라고 했고.”

“아아. 맞아.”

루카스가 심각한 표정을 풀며 불량하게 웃었다.

“그래서 좀 억울해. 처음 너와 잤을 때 내가 얼마나 진심이었던 건지 기억이 안 나는 게.”

“그렇지만... 넌 나 말고도 ‘반려’는 많았잖아.”

제 입으로 말하기 속이 쓰렸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측정의 바로미터가 마음이고 진심이라니. 한없이 깊을 수도 있지만 한 뼘보다도 얕을 수 있지 않은가.

“뭐... 그렇긴 한데, 그래도 너에겐 유독 진지하게 임했던 것 같기는 해. 지금까지 그렇게 같이 뒹굴었는데도 겨우 이 만큼 흔적이 남는 걸 보면.….”

루카스가 검지를 구부려 차민의 이마와 콧등을 톡톡 두 드렸다.

“그때 얼마나 네가 마음에 들었길래 그 정도의 흔적을 남겨놨던 걸까?”

차민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사람이 단순한 동물이라 참으로 다행이었다. 극한의 공포로 덜덜 떨었으면서, 어쩐지 다시 몽글몽글하게 분위기가 잡혀가자 전부 잊고서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다른 것들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다, 이런 생각에 가까웠어. 그런데 너는... 조금 달라.”

“...어?”

루카스의 목소리에 집중하던 차민은, 발밑에서 무언가 파사삭 부서지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말끔히 다듬어진 잔디 위로 돌로 된 길이 조그맣게 나 있었고, 방금 아치형으로 세워진 조형물 아래를 지나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게 결계 같은 거였을까. 잔디 위로 금빛 물결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동화 같은 거대한 정원으로 풍경이 탈바꿈했다. 실감나는 팝업북이라도 보는 기분이었다.

“아까도 어물쩍 말하다 말았는데... 난 어중간한 거 싫어. 인간들은 어떠한 관계가 되자는 종류의 고백을 굉장히 유치하게 여기는 것 같지만....”

계절과 관계없이 화사하게 핀 꽃들을 배경 삼아, 루카스가 툭 말했다.

“너는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가끔 그건 애정보다 숭배에 가까워 보일 때가 있어.”

“…내가?”

“그래. 그래서 자기 마음도 잘 모르는 것 같은 네가 가끔 어이없었어. 이러다 졸업하고 나면 다른 새끼랑 하하호호 웃다가, 가끔 기억 속에서 날 끄집어내고는 첫사랑이랍시고 청승을 떨게 뻔히 보였지만... 뭐, 나도 딱히 인간과 진지하게 만나고 싶지는 않았던 건 아니니까. 일단 너와 하는 섹스는 좋으니, 질리기 전까지 즐기자고 생각했어.”

차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결코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린우드를 졸업한 이후에도 루카스와 이렇게 얽힐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접고 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거 되게 좆같아졌어. 아무리 애를 써도 인간인 너에겐 흔적이 희미하게만 남고, 나를 너무너무 좋아한다고 말하는 너는 사실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을 것처럼 아련하게 굴고.”

“...어, 루카스.….”

카터와 마주치기 직전에 남자친구 어쩌고 했을 때만 해도 조금은 귀엽고 가벼운 느낌이었는데.… 명치를 묵직하게 치고 가는 루카스의 고백에, 차민은 몇 번이나 입을 달싹였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너에게 아이 문제 같은 걸 말하고 싶은 건 아니야. 영생을 모르는 너한테 평생이나 영원 같은 걸 강요할 생각도 없고. 그렇지만…. 앞으로 나하고만 만나. 남자친구, 애인... 수식어야 뭐든 다 좋으니까, 그거 나하고 만 해.”

아.... 차민은 입을 틀어막았다. 드넓은 정원에 만개했던 모든 꽃들이 바람에 흩날리더니, 모조리 장미꽃으로 변해버렸다. 첫 데이트 장소였던 브루클린에서, 차민이 덜덜 떨며 건네주었던 그 꽃다발의 장미꽃과 꼭 같은 모양으로.... 한 송이도 빼놓지 않고, 그야말로 모든 꽃들이.

“한차민. 내 ‘반려’가 되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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