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김찬이, 열여덟 살, 울렁이는 첫봄 (2/13)

02. 김찬이, 열여덟 살, 울렁이는 첫봄

현오와 나는 출석 번호가 앞뒤로 붙어 있었다.

그저 자음과 모음의 순서 때문에 자연스레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 우연이 열여덟 내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나는 처음으로 내 이름이 좋아졌다. 원래는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김찬이. 마지막 글자에는 받침이 없다. 모든 일에는 마무리가 중요하다던데. 이름 끝을 받쳐 줄 것이 없어서 내 인생도 빈약하게 흘러가는가, 그런 생각을 종종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무시해도 되는 사람이 된 걸까.

새 학기가 되고 첫 한 달은 출석 번호 순으로 자리를 앉기로 했다. 나는 현오와 짝이었다. 그 후로 이름에 대한 고민은 싹 사라졌다. 대신, 다른 고민이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나는 왜 밤마다 현오가 등장하는 꿈을 꾸는가 하는.

내 망상에 끼어든 실존 인물은 현오가 처음이었다. 열여덟 봄. 스타워즈, 우주, 외계인 등보다 현오의 속눈썹, 솜털 같은 게 더 흥미로웠다. 현오는 왜 와이셔츠 단추를 꼭 목 끝까지 채울까. 현오는 왜 교과서를 자주 두고 다닐까. 현오는 왜 아무것도 안 해도 모두에게 인기가 많을까. 현오는 왜 그렇게까지 매력적일까.

나는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입술을 달싹였다.

“김… 현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말이 좋았다. 학교에 안 나가도 되니까. 집에서 종일 만화를 보고 스타워즈를 돌려 보고 심심하면 수학 문제를 풀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기 싫었다. 얼른 월요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현오가 보고 싶다.

현오와 처음 만났던, 새 학기 첫날을 떠올려 본다. 6교시 쉬는 시간에 박정수가 현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야, 김현오. 매점 가자.”

“아. 귀찮은데.”

나는 PMP에 넣어 온 애니메이션을 보며, 아니, 보는 척하면서 그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 슬쩍 음소거 버튼을 눌렀다.

“그래서 안 갈 거라고?”

“어. 혼자 가.”

박정수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지만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비어 있던 의자 하나를 끌고 와 현오 근처에 앉았다.

나는 박정수에 대해서 좀 안다. 작년에 같은 반이었다. 쟤는 2교시마다 한 번씩 뭘 주워 먹어야 하는 놈이었다. 지금도 배고픈 상태일 테다. 현오 말대로 혼자 매점에 가도 되지만, 박정수는 식욕 대신 현오와의 친분 쌓기를 택했다. 왜냐. 신학기니까. 박정수는 삼십여 명을 재빨리 스캔했을 것이고, 그중 잘나가는 애를 후딱 집어냈을 것이다.

김현오. 너 창민이랑 친하지. 나 걔랑 같은 수학 학원 다니는데. 폰 번호 좀. 하나의 접점으로 대화의 물꼬를 트고 라인을 탄다. 박정수의 동물적인 감각이랄까, 특기랄까. 뭐 나름대로 존경하는 바이다.

나는 좁은 교실에 삼십 명 넘는 사춘기 남자애들을 종일 가둬 놓는 이 시스템이 다분히 폭력적이고 위험천만하다고 생각한다. 호르몬은 폭발하고 공기는 또래 남자애들의 기름진 체취로 가득하다. 삼십 명을 다 담기에는 공간이 비좁다. 한정된 영역에서는 더 자주 부딪칠 수밖에 없다.

신학기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암묵적인 서열 정리가 시작된다. 서열에 따라 대충 무리가 나뉜다. 그러면 이제 모든 게 간편해진다. 서로 부딪쳐서 갈등이 발생하려 해도 두 개체의 서열이 다르다면 아주 재빨리 상황이 정리된다. 열등한 애가 우등한 애한테 양보 아닌 양보를 하며 고개를 조아리는 식으로.

물론, 개중에는 아예 무리에 들지 못하는 존재도 있다. 2학년 3반의 그 떨거지를 담당하게 된 사람은 다름 아닌 김찬이. 바로 나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다. 매년 그랬으니까. 해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냥 떨거지인지, 아니면 남들이 적극적으로 괴롭히는 떨거지인지. 작년에는 후자였다.

박정수는 턱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김현오. 근데 너 저 새끼랑 짝이라서 어떡하냐. 그냥 뒤에 빈자리 가서 앉아.”

나는 음소거 된 애니메이션을 계속 바라보았다.

“왜?”

현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의 표정처럼 무심하고 덤덤했다.

“돼지 새끼한테 냄새 안 나냐?”

박정수가 날 비웃었다. 내가 이어폰을 안 끼고 있었더라도 박정수는 내 앞에서 저런 말을 했을 것이다.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그랬다. 인간은 남의 험담을 하면서 곧잘 유대감을 형성한다고. 나는 유대감 형성에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소재였다. 작년의 반 애들은 나를 공공의 혐오 대상으로 지정하고 대화 주제로 삼곤 했다. 박정수도 그 책을 읽었을까? 안 읽었더라도 알겠지. 그놈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말이다.

“냄새?”

현오가 고개를 갸웃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괜스레 목에 힘을 주었다. 갑자기 접혀 있는 목살이 신경 쓰였다.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보는지는 관심 없었다. 돼지 새끼라고 하든, 오타쿠라고 하든. 알 바인가. 쟤들이 날 따돌리는 게 아니라 날 담기엔 세상이 너무 좁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했다. 그러니 나는 나대로 살면 된다.

하지만 현오에게만은 달랐다. 현오의 대답을 기다리는 몇 초가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박정수가 말했다.

“저 새끼한테 맨날 역겨운 냄새 나던데. 여름엔 존나 코 썩을 것 같다고.”

정말 그랬나.

“김현오. 너 코 막힌 거는 아니지?”

“안 막혔어.”

현오가 크게 숨을 들이켜는 게 들렸다.

“샴푸 냄새 같은 거만 나는데. 네 코가 이상한 거 아니냐?”

박정수가 살짝 움찔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박정수 네 인중에서 나는 냄새일 수도 있지.”

나는 손을 책상 아래로 내렸다. 무릎을 꾹 쥐었다. 손바닥에서 땀이 났다. 아주 많이. 박정수는 살짝 당황한 채 화제를 재빨리 다른 곳으로 돌렸다. 곧 종이 쳤다. 박정수가 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PMP를 넣었다. 빳빳한 새 교과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옆에 필기 노트를 폈다. 불쑥 옆에서 현오가 다가왔다.

“아. 나 7교시 교과서 안 가져왔네.”

현오의 한쪽 팔이 내 책상 위로 넘어왔다. 어깨가 닿을 것만 같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네가 봐.”

나는 재빠르게 현오의 책상에 내 교과서를 올려놓았다. 현오가 어리둥절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너 교과서 한 권 더 있냐?”

“응? 아니.”

“그럼 이걸 나 주면 어떡해.”

현오가 교과서를 다시 내 쪽으로 밀었다.

“네, 네가 봐도 되는데.”

“같이 봐.”

현오에게서는 샴푸 냄새가 났다. 지나치게 몸이 가까운 듯했다. 현오의 매끈한 뒷목. 매끈한 귀. 매끈한 손가락…. 현오는 평균보다 키가 훨씬 크고 어깨도 넓고 잘생겼다. 두툼한 손목에는 깔끔한 검은색 시계를 찼다.

현오의 시니컬해 보이는 인상은 사춘기 남자애들의 선망이 될 만하다. 왠지 남들 다 하는 거 현오는 안 할 것 같다. 여자 아이돌에 흥미 없겠지. 집 안 책장에는 외국 밴드의 한정판 CD가 꽂혀 있지 않을까. 새벽에는 라디오를 듣다가 잠이 들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조깅을 할지도 모른다.

내가 그렇게 현오의 일상을 망상하던 중, 현오가 나를 나지막하게 불렀다.

“야.”

나는 움찔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아까 왜 아무 말도 안 했냐.”

“응? 무슨 말?”

“아까 박정수한테.”

“…….”

“다 들렸잖아.”

“어떻게 알았어?”

“걔가 너 들으라고 엄청 크게 얘기하던데.”

“음…. 뭐라고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둘이 싸웠어?”

“아니.”

“근데 걘 너한테 왜 그렇게 말하냐.”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누군가 나에게 악의를 내뿜을 수 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모두가 현오를 좋아하는 것처럼.

현오는 나의 삶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현오가 내 편을 든다. 나를 멸시하지 않는다. 지금껏 박정수가 달라붙었던 소위 잘나가는 애들과는 달랐다. 걔들과는 닮은 점이 조금도 없었다. 나는 현오가 신기했다.

“박정수는 원래 말을 좀 그렇게 해.”

“그래? 이상한 새끼네.”

“응. 그런데 있잖아. 하나만 물어봐도 돼?”

“어.”

“나한테서 진짜 냄새 안 나?”

현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갑자기 내 손등에 코를 가져다 댔다. 말캉거리는 콧잔등이 피부에 닿았다. 나는 깜짝 놀라서 두 손을 등받이 뒤로 숨겼다.

“진짜 안 나. 약간 향긋한 거 같기도 하고.”

“…….”

“와. 너 갑자기 얼굴 엄청 빨개졌다. 신기하네.”

나는 어버버 하기만 하고 아무런 말도 못했다. 신기한 건 다름 아닌 너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현오가 피식 웃었다. 가지런하고 하얀 치아가 드러났다. 덧니 하나 없는 그 모습이 참 현오답다고 생각했다.

***

삼월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시간을 늘어뜨리고 싶었다. 멍하니 있을 때마다 시공간이 뒤틀리는 상상을 했다. 일 초가 억겁이 되는 자그마한 공간. 그곳에는 나와 현오밖에 없다.

엄한 상상은 아니다. 나는 현오의 털끝도 건드리지 않겠다. 그저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현오를 가만히 바라보고 싶을 뿐이다. 현오가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그 방을 가득 채우겠다. 현오가 내내 웃을 수 있도록.

그러다가 상상의 흐름이 끊겼다. 현오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현오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니까. 그저 자음과 모음의 순서에 의해 우연히 짝이 된 사이일 뿐이니까. 나는 내가 바라보는 현오를 바탕으로, 현오를 짐작할 수밖에 없다.

현오를 보지 못해 끔찍스러운 주말 낮. 나는 아빠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현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렇게 공부를 안 해서 어쩌자는 거냐.”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하고 있어요. 야자까지 다 하는데요.”

“주말에도 해야지.”

아빠는 옆에 앉아 있던 엄마에게 갑작스레 소리쳤다.

“당신은 여태껏 뭐 한 거야? 한 달 만에 집에 왔더니 아주 집 분위기가 엉망이잖아. 애를 그동안 이렇게 놀리면 어떡해?”

아니다. 원래는 집 분위기가 아주 멀쩡했다. 엉망으로 만드는 건 아빠다. 엄마도 아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찬이 너 공대 갈 거지?”

“네.”

공대에 안 갈 거지만 그렇게 대답했다. 알 게 뭐냐. 아빠는 해외에서 사업하느라 집을 자주 비운다. 아빠의 잔소리도 가끔 가다 한 번씩만 참아 주면 된다는 소리다. 여하튼 나는 숫자와 법칙으로 우주를 해설하는 공부를 할 것이다. 그게 멋져 보이니까.

엄마가 말했다.

“찬이 아빠. 너무 그럴 필요 없어. 찬이는 내버려 둬도 성적 잘 나와.”

“그렇게 놓고 있다가 순식간에 성적 떨어지는 거야. 남들은 종일 공부하는데. 어? 그리고 지금 성적도 내가 이만큼 학원을 보내 주니까 유지되는 거지.”

아빠는 뭘 모른다. 학원에서 하는 거라곤 멍 때리는 것밖에 없는데.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은 너무 뻔하다. 이런 걸 삼 년에 걸쳐 배워야 한다니. 가끔 일부러 한 문제씩 틀리기도 한다. 그게 쿨해 보이니까.

성적은 다 쓸데가 없다. 현오만 봐도 그렇다. 현오는 공부를 전혀 안 하지만 모두가 현오를 좋아한다. 심지어 선생님들까지도. 나는 늘 전교 십 등 안에 드는데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도대체 성적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니. 당신이야말로 몇 달에 한 번씩 와서 애 쥐어짜는 것밖에 안 하면서.”

“내가 일부러 그래? 일 때문에 그렇잖아, 일 때문에!”

“아주 일한다고 유세를 떤다, 떨어! 아유, 지긋지긋해!”

엄마와 아빠의 언쟁이 점점 격해졌다. 나는 자리에서 쓱 일어났다.

“저 도서관 갔다 올게요.”

그제야 아빠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나는 가방에 문제집 대신 만화책을 가득 담고서 집을 나섰다.

아빠가 안쓰러우면서도 짜증났다. 아빠는 가정에서 자기의 존재감이 흐려질까 봐 늘 전전긍긍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부재가 엄마와 나에게 아주 큰 타격이고 외로움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바람과 현실은 다른 법이다. 그렇다고 누구 탓을 하겠는가. 엄마가 말렸음에도 사업 확장을 위해 중국으로 간 건 아빠다.

집 근처 도서관 열람실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공기가 텁텁했다. 아무래도 여기서 제대로 된 독서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가방에서 만화책 여러 권을 꺼냈다. 책을 품에 안고 옥상 공원으로 향했다. 적당한 자리를 찾으려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대각선 벤치에 앉아 있는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다. 현오였다.

“…현오야.”

현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두 팔로 뱃살 쪽을 가렸다. 사복이 부끄러웠다. 아무거나 챙겨 입고 나왔는데, 티셔츠가 좀 꼈다. 허겁지겁 잠바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현오가 손을 들어 살짝 흔들었다.

“김찬이.”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현오가 불러 주는 내 이름 석 자. 우리 반 누구도 나를 김찬이라고 불러 주지 않는다. 박정수의 선동에 따라 야, 돼지, 돼지 새끼, 병신 등으로 부른다. 대부분은 나에게 말 자체를 아예 안 걸고.

그래도 작년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갑작스레 주먹으로 뺨과 뱃살을 후려 맞지는 않으니까. 나는 그게 현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오가 나를 꿋꿋하게 김찬이라고 부르는 것. 나에게 인격으로서의 이름이 남아 있는 것. 그게 무형의 보호막이 되어 내 주변을 감싸고 있다. 아무도 ‘그’ 현오가 이름을 부르는 상대를 쥐어 팰 생각은 하지 않는다.

현오가 나서서 왕따 없애기 캠페인을 벌인 것도 아니요, 나를 아주 친한 친구처럼 끼고 다닌 것도 아니었지만. 아니, 애초에 현오는 나를 보호하려는 의도조차도 없었겠지만.

나는 현오가 만들어 준 얄팍한 보호막 아래에서 편히 숨 쉴 수 있었다.

“현오야. 공부하러 왔어?”

쭈뼛거리며 현오에게 물었다. 현오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엄마가 보냈어. 김찬이 너는.”

“나는 아빠가 보냈어.”

“아, 공부하기 싫다. 근데 그거 만화책이냐?”

“응.”

“오. 나도 봐도 되나.”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오가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저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손으로 무릎을 꽉 쥐었다.

“현오 네가 1권부터 봐.”

“너는?”

“난 여러 번 본 거라 중간부터 봐도 돼.”

“좋아하는 건가 보네. 여러 번 읽을 정도면.”

“으응.”

현오가 <신세기 에반게리온> 1권을 가져가서 펼쳤다. 심장이 뛰었다. 내가 좋아하는 걸 누구와 공유하는 게 난생처음이었다. 그것도 아무나가 아니라 무려 현오다. 현오의 옆모습을 힐끔 훔쳐보며 나는 3권을 집어 들었다.

현오가 말했다.

“나 만화책 처음 봐.”

현오의 뺨이 살짝 움직였다.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그, 그래?”

“엄마가 이런 거 못 보게 했어.”

“그럼 무슨 책을 읽어?”

“그냥 소설이나 시.”

“책 읽는 거 좋아해?”

나는 용기 내서 질문을 던졌다. 현오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고 싶었다. 현오가 쓱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평소의 나였으면 습관적으로 시선을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그대로 박제당한 동물처럼 꼼짝 않고 현오를 바라보았다. 현오가 웃었기 때문이다. 설핏, 연한 바람 같은 모양새로.

현오는 날카로운 생김새와 다르게 잘 웃었다. 기뻐해야 할 거에 순순히 기뻐하고 슬퍼해야 할 일에 당당하게 슬퍼할 줄 아는 애였다. 하지만 이런 미소는 처음 보았다. 부끄러움이 살짝 감도는 눈빛, 어쩐지 비밀스러운 미소. 배 속이 간질거렸다.

“좋아해. 책 읽는 거. 가끔 쓰기도 해.”

현오가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좀 웃기지. 공부는 하나도 안 하는데.”

“아니. 전혀 안 그래.”

현오가 제 뺨을 손가락으로 긁적였다. 순간 나는 현오의 속마음을 조금 들춰 본 듯했다. 현오가 남들에게 잘 안 해 주는 이야기 한 페이지를 손에 쥔 것 같았다. 내 바람이 만들어 낸 착각일까? 글을 쓴다니. 역시 현오는 또래 남자애들과는 다르다. 처음 그의 눈을 볼 때부터 그럴 줄 알았다. 현오가 나보다 몇 살은 많은 것처럼 느껴졌다. 멋지고 쿨해 보였다.

“네가 쓴 거 보고 싶어.”

“아, 그건 안 돼.”

현오가 재빠르게 거절하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심장 부근이 뜨거워졌다. 현오의 기분을 상하게 한 건 아닐까 싶어 식은땀이 났다.

“미안. 주제넘었지.”

“사과할 필요는 없는데.”

“아냐. 미안해.”

“그냥 내가 부끄러워서 그런 거야. 누구 보여 줄, 그런 건 아니거든. 그냥…. 하여간 좀 그래.”

“그렇구나….”

“어쨌든 사과할 거 없다고. 만화나 보자.”

현오가 만화책을 휙 들어 올렸다. 나는 네가 쓰는 글이면 다 멋질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현오가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옥상 공원의 바람은 선선했다. 앉아서 만화책 세 권 정도 읽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현오는 말없이 만화를 보고 말없이 다음 권을 손에 집었다. 나는 만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현오와 한 벤치에 앉아 있는데, 어찌 그러겠는가. 학교에서 짝으로 붙어 있을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여기에는 박정수도, 선생님도, 다른 애들도 없다. 우연히 자음과 모음에 의해 짝이 된 게 아니라, 현오가 직접 내 곁으로 걸어온 거다. 나는 자꾸만 목이 말랐다.

한두 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다. 현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다음 권 없어?”

첫마디가 그거였다.

“집에 더 있어.”

“가져다줘.”

“재미있어?”

“어. 재밌네.”

나는 가슴이 뛰었다.

“이, 이거 애니메이션으로 나온 거야. 95년도에….”

“아. 그래? 한참 전이네. 나 아기 때잖아. 유명한 거야?”

“응. 엄청 유명해.”

“왜 난 몰랐지?”

현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순간 현오가 귀여워 보여 웃음이 살짝 터졌다. 현오가 눈썹을 꿈틀하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입을 합 다물었다.

“미안.”

“뭐가?”

“웃어서.”

“아니. 너는 뭐 맨날 미안해하냐. 웃는 걸 왜 미안해해?”

그러게. 나는 우물쭈물하며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현오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현오의 우주처럼 까만 눈동자가 코앞에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안에서 영원히 무한히 헤엄치고 싶었다.

“모든 거에 미안해할 필요 없어.”

“…응.”

나는 주문에 홀린 사람처럼 대답했다. 현오가 벌떡 일어나 기지개를 쭉 켰다. 그의 등이 늘씬한 표범처럼 움직였다.

“책 봤더니 졸리다. 나 좀 자러 열람실 간다.”

“응, 안녕. 잘 가.”

현오가 자연스레 나에게 손바닥을 뻗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짝. 경쾌한 소리가 났다. 내 인생 처음 해 보는 하이파이브였다. 현오가 몸을 돌려 걸어갔다. 나는 현오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등을 빤히 바라보았다. 현오의 발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을 때 나는 숨을 헉 뱉어 내며 상체를 푹 숙였다.

“아….”

온몸이 뜨거웠다. 팔다리가 덜덜 떨렸다. 피부는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팔뚝에 분홍빛이 감돌 정도면 얼굴은 완전히 새빨갛겠지. 현오와 닿았던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진정하려 애썼다.

나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다. 아직은 알 수 없는 감정의 실마리를 좇으려 머리가 핑핑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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