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김현오, 스물네 살, 이상한 여름
“…고등학교 때부터 나를 좋아했다고? 지금까지 계속?”
“응.”
나는 김찬이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눈물로 일렁이고 있다. 느리게 물결이 치는 바다 속 같다.
“야. 잠깐, 잠깐만.”
몸을 뒤로 돌렸다. 고개를 젖혀 깜깜한 하늘을 마주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속이 엉망진창으로 날뛰었다. 김찬이의 얼굴을 어떤 눈으로 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은 내 계산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 여기서 스무스하게 도망칠 수 있을까.
“현오야.”
등 뒤에서 나를 절박하게 부르는 김찬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찬이가 살짝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 누구한테 커밍아웃한 거 처음이야. 너한테 처음 말하게 돼서 기뻐. 좋아했어, 진짜로. 지금도 좋아해.”
순간 내 귀를 잘라 버리고 싶었다. 발을 마구 구르며 소리 지르고 싶기도 했다. 이 현실을 믿고 싶지 않다. 저런 애한테 다 거짓말이었다고, 사실 너 떼어 내려고 게이인 척했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건 너무 쓰레기 같잖아.
눈을 꾹 감고 두어 번 심호흡했다. 날뛰는 심장이 살짝 진정되었을 때 다시 김찬이와 눈을 마주했다. 김찬이의 눈가가 토끼처럼 붉다.
“야.”
“으응.”
“고백 못 들은 거로 할게.”
김찬이의 얼굴이 곧 죽을 사람처럼 무너져 내렸다. 어찌나 표정 변화가 급격한지 내가 엄청난 죄인이 된 것 같다.
“…왜?”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너는 내 취향 아니야.”
“하지만…!”
“미안.”
나는 이쯤 하고 그에게서 도망칠 작정이었다. 그러나 김찬이가 다급하게 내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거대한 그림자에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김찬이는 나보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었다.
“아까는 나 때문에 착각할 것 같다고 했잖아. 그러면 가능성 있는 거 아니야?”
불과 일 분 전에 내가 한 말을 떠올려 본다. 나는 남자 좋아하거든. 네가 자꾸 이러면 착각해서 곤란하다고. 아, 과거로 돌아가 내 입을 마구 후려치고 싶었다.
“…그냥 한 말이거든. 여하튼 너는 내 취향 아니니까 그만 놔주라.”
김찬이가 고개를 빠르게 좌우로 내저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푸슬푸슬 흔들렸다.
“잘할게.”
“뭘 잘해.”
아, 제발 좀.
“기회를 줘.”
“싫은데.”
“제발. 현오 네가 하라는 건 하고 하지 말라는 건 안 할게. 말만 해.”
“음, 그래. 하지 말았으면 좋겠는 거 하나 있네. 나 보러 오지 마. 됐냐?”
김찬이가 눈에 띄게 풀이 죽어서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리고 나는 네가 예전에 좋아한 그런 놈 아니야. 딱 보면 알잖아.”
“아니야. 옛날이랑 똑같아. 여전히 착하고 멋진데….”
“웃기네. 입술에 침이라도 바르고 거짓말해라.”
“진짜야.”
김찬이가 반항하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워낙 순하게 생긴 인상이라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김찬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물러진다. 걔의 눈동자 속에는 사람을 무장 해제 시키는 독특한 힘이 있었다.
포기 좀 하지. 김찬이는 나를 놓아주지 않을 기세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그의 페이스에 점점 말려들지도 모른다. 결국, 내가 쓰레기가 되는 수밖에는 없나.
김찬이를 보면 흐릿했던 옛날 생각이 자꾸 선명해진다. 그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김찬이가 나를 좋아한다니. 과거는 끔찍하고 사랑은 더더욱 끔찍하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김찬이는 고통 종합 선물 세트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정말 거들떠보지도 않고 포장째 버려 버리리라. 이기적으로 모질게 끊어 내자고 다짐하며 입을 뗐다.
“싫다고 했으면 한 번에 좀 알아들어라.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말고. 네 얼굴 보는 것도 싫다니까. 예전이랑 같기는 뭐가 같아. 너는 지금 내 꼴이 좋아 보이냐?”
“현오야, 그게 아니라….”
“넌 졸부 됐으니까 마음이 아주 여유롭고 그런가 보지. 나는 아닌데. 알바해서 월세 내고 생활비 쓰고 거기서 또 저축하고. 피 말려 뒈지겠는데. 제발 신경 거슬리게 좀 하지 마.”
가슴이 따끔거렸다. 이래도 되는 걸까.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 만큼의 주제가 못 되는데.
“그리고 다 거짓말이야.”
“응?”
“남자 좋아한다는 거 그냥 한 말이라고. 너 떼어 내려고.”
“…….”
눈가가 따가웠다. 근처 조명을 떠돌던 날벌레가 길을 잃고 내 눈 쪽으로 날아든 모양이었다.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둘러 벌레를 쫓아냈다.
“그만큼 너 보기가 싫다고, 나는.”
한번 말을 시작하자 멈출 수 없었다. 내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김찬이의 눈동자가 흔들릴 때마다 이건 좀 아닌데 싶었지만 악으로 깡으로 계속 못되게 굴었다. 나는 네가 알고 있던 그 멋지고 착하던 김현오가 아니라고 알려 줘야만 했다.
김찬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됐지. 놔.”
나는 김찬이의 손등을 툭 때렸다. 조금 전까지 꽉 붙잡고 있던 게 우스울 정도로, 김찬이는 바로 나를 놓아주었다. 스르륵. 김찬이의 손이 허공으로 떨어졌다.
“진짜 찾아오지 마. 알겠냐.”
나는 으름장을 놓고 몸을 돌렸다. 김찬이를 내버려 두고 성큼성큼 걸어 대운동장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집까지 단박에 달려서 도착했다.
단칸방 문을 열자 더운 공기가 내 얼굴을 덮쳐 왔다. 이번 여름은 유독 더웠다. 7월 초인데 벌써 밤잠을 못 이룰 정도로. 짜증이 확 일었다. 신경질적으로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 안에 들어갔다. 찬물을 정수리에 뿌리며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심장이 곧 폭발할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주제넘은 짓을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상처를 받는 건 오로지 나의 몫이어야 했다. 그래도 이번엔 어쩔 수 없었잖아. 안 그랬으면 김찬이가 떨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속으로 자기합리화를 해 보았다.
“아씨….”
아까 날아든 날벌레가 여전히 눈가에 달라붙은 듯하다. 나는 몇 번이고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그래도 한참 동안 눈이 간지러웠다.
***
며칠 뒤 오후, 나는 여느 날처럼 아르바이트하러 고깃집에 왔다. 사장님은 주방 아주머니와 함께 반찬 통을 채워 넣고 계셨다.
“사장님. 저 왔어요.”
“어, 덥네. 현오야, 에어컨 틀어라.”
“네.”
오 분 뒤 또 다른 아르바이트생인 윤아가 도착했다. 윤아는 이 지역 토박이였다. 여기서 좀 떨어진 대학을 다닌다고 하던데 지금은 돈을 모으기 위해 휴학 중이었다. 겨울에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간다나.
“아우, 더워.”
윤아가 눈을 찡그리며 잠시 에어컨 앞에 서서 땀을 말렸다. 나는 고기를 주방으로 나르고 있었다. 윤아가 갑자기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오빠. 그 사람 왜 안 와?”
“누구.”
“그 잘생긴 사람. 얼굴 완전 하얗고. 눈 크고.”
김찬이 말하는 건가. 달갑지 않은 화제였다. 나는 얼굴을 팍 구겼다.
“걔 얘기는 왜 해. 넌 자주 본 적도 없으면서.”
나는 매일 마감까지 풀타임으로 일하지만, 윤아는 주말 빼고는 마감 몇 시간 전에 퇴근한다. 윤아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요즘 우리 가게 핫 피플이잖아. 매일 오다가 요즘 안 오니까 당연히 궁금하지.”
“신경 꺼라.”
윤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설상가상 사장님도 뒤에서 거드셨다.
“현오야. 너 찬이한테 연락해 봤어?”
“아뇨. 바쁜가 보죠. 저 잠깐 담배 피우고 올게요.”
“뭐래? 너 담배 안 하잖아.”
“오늘부터 하려고요.”
이 대화를 피하고자 나는 가게 밖으로 후다닥 나갔다. 문을 경계로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 숨이 턱 막힌다. 온몸에 물이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 들 정도로 습도가 높았다. 다섯 시가 다 되어 가는데 아직 해가 쨍쨍했다. 손으로 차양을 만들고 눈을 찡그렸다.
김찬이의 얼굴이 안 보인 지 사흘째였다.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이제야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속이 다 후련하다. 김찬이가 없으니 조금 살 것 같았다. 한 달만 지나도 김찬이와 만났다는 사실조차 까먹을 것이다. 없던 일처럼 되겠지. 내 인생은 어떤 침범도 당하지 않은 채 무사히 흘러갈 것이다.
좋아, 만족스럽다. 정말로. 그런데 갑자기 눈이 시큰하고 간지럽다. 왜 이러지.
땡볕이 버거워질 무렵, 나는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골목 저쪽에서 낯익은 실루엣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내 몸에서는 맥이 탁 빠졌다. 설마설마했으나 김찬이였다.
김찬이는 이 날씨에 카디건을 걸치고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다. 나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터덜터덜 바닥만 보고 걷고 있었다.
“야.”
김찬이가 내 목소리를 듣고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냥 내버려 둘걸. 왜 굳이 말을 걸었지.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입이 먼저 움직여 버렸다.
“아, 현오야….”
김찬이가 입을 뻐금거렸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김찬이가 어딘가 이상했다.
“너 아프냐?”
립스틱도 안 발랐는데 항상 촉촉하고 붉던 입술이 허옇게 일어나 있었다. 눈가는 다크서클이 내려와 퀭했다. 시선을 내려 보니 김찬이가 손에 들고 있는 건 약봉지였다. 고깃집 바로 옆 건물에 병원이 있는데 거길 다녀온 모양이었다.
“아냐. 괜찮… 쿨럭.”
딱 들어도 기침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금방이라도 피 토하고 쓰러질 것만 같다. 김찬이가 자기 입을 손으로 가리고는 한 발자국 물러섰다.
“가 볼게. 미안.”
야. 뭐가 미안한데. 너 많이 아파? 그래서 못 왔어? 왜 갑자기 아파? 타이밍이 꼭 나 때문에 그런 것 같아서 기분 이상하잖아. 막 엄청나게 크게 상처 받고 그런 건 아니지? 날 좋아하긴 하지만 미치도록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 그렇다고 해 주라.
할 말은 목구멍 아래에 차곡차곡 쌓이는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머뭇거리는 동안 김찬이는 휘청이며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
대운동장 사건 후로 여섯 밤이 흘렀다. 길가에서 잠깐 마주친 걸 빼고는 김찬이의 코빼기도 본 적 없었다. 김찬이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걔가 아프든 말든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니까. 끊어 내기 위해 매몰차게 굴었으면 끝까지 매몰차야지. 중간에 쓸데없이 마음 써 봤자 더 나쁜 놈만 될 것이다.
김찬이가 사라진 내 일상은 어떠한 사건도 없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다. 아르바이트하고, 집에 가고, 습하고 더워서 미칠 것 같은 방에서 간신히 잠이 들고, 주인집 아저씨가 옵션으로 넣어 놓은 구식 텔레비전으로 의미 없는 채널 탐방을 하고, 그것도 지겨워질 때 즈음이면 가만히 누워 있고. 그러다 죽음을 생각하고.
그리고 이제 다시 일하러 갈 시간이다. 터덜터덜 방 밖으로 나갔다. 밖이든 안이든 덥기는 매한가지다. 옵션이라곤 낡아 빠진 텔레비전밖에 없는 반지하 방을 덜컥 계약하는 게 아니었다. 선풍기 한 대로는 습기를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물속에 빠져 사는 기분이었다. 며칠 더 지내면 아가미가 생길지도 모른다.
가게에 도착하자 조금 살 것 같았다. 에어컨 앞에서 바람을 쐬며 사장님께 웅얼거렸다.
“차라리 가게 바닥에서 자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집이 많이 더워?”
“더운 것보다는 습기요.”
“곰팡이는 괜찮고?”
“무서워서 장롱 뒤에 확인 안 했어요.”
안 그래도 요새 집에서 쿰쿰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벌레도 좀 더 자주 보인다. 집에 다시 돌아가는 게 갑자기 무서워졌다.
계약할 때는 보증금이 낮아서 좋았는데. 그 당시에는 보증금으로 낼 만한 돈이 없었다. 제대하고 바로 고시원에서 일 년 반 정도 살다가 처음으로 얻은 방이었다. 옆방 코 고는 소리에 잠을 설치던 고시원보다야 나았지만, 딱히 살 만한 공간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비슷했다.
“그럼 가게에서 자.”
사장님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정말요?”
“씻는 것만 집에서 하고. 여기가 네 집보다는 시원하지 않겠니? 선풍기도 훨씬 크고.”
“저야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죠.”
“좋아. 현오야. 그럼 내 심부름 좀 갔다 와라.”
“네. 다 시키세요.”
“잠깐만.”
사장님이 주방에서 봉지를 들고 오셨다. 나는 어리둥절해하며 그 봉지를 받아 들었다. 안에는 야채 죽이 가득 담긴 반찬 통이 있었다.
“이것 좀 갖다 줘.”
“누구한테요?”
“누구긴 누구야. 찬이지.”
“김찬이요?”
사장님과 죽과 김찬이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내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사장님이 눈썹을 살짝 치켜떴다.
“뭐야. 반응이 왜 그래. 찬이 아픈 거 몰랐어?”
“김찬이 많이 아프대요?”
“감기에 급성 위궤양에. 아주 애가 죽겠던데.”
“어떻게 아세요?”
“아니, 너야말로 어떻게 몰라? 친구잖아.”
“저 걔랑 안 친하다니까요….”
“그래? 찬이는 계속 네 안부만 묻던데.”
나는 봉지 끝을 꽉 움켜잡았다. 갑자기 가슴팍이 조금 갑갑해졌다. 심장 근처에 본드가 달라붙어 심장이 움직이지 못하게 쥐어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코도 먹먹했다. 나는 손으로 턱을 이리저리 매만지다가 사장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장님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어유.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하도 가게에 안 오길래 걱정돼서 내가 며칠 전에 연락해 봤지. 아프다고 하더라구.”
“사장님께서 걔 번호를 어떻게 아세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장님과 김찬이가 가까워졌다니.
사장님께 듣기로 두 사람이 친해진 사연은 이러했다. 초등학교 사 학년생 딸을 둔 사장님은 요즘 고민이 많았다. 학원을 안 보내고 직접 숙제를 봐주고 있는데, 점점 난이도가 사장님이 봐줄 수 있는 범위를 넘나들고 있었다. 특히 수학이.
김찬이와 그런 이야기를 하셨나 보다. 김찬이는 여름 방학 동안 딸의 수학 공부를 책임지겠다고 했다. 그것도 무료로. 하여간 쓸데없이 오지랖 넓고 호구 같은 놈이다. 자기가 거기서 왜 끼어들어? 사장님은 무료는 좀 그렇고 혼자 사는 김찬이에게 반찬 몇 가지를 제공해 주기로 했단다.
“저는 전혀 몰랐던 사실인데요.”
“그래? 나는 찬이한테 들은 줄 알았지.”
내 세계는 반지하 방과 이 고깃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세계의 절반에 김찬이가 이미 성큼성큼 들어와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내가 설 자리가 좁아져 간다. 왠지 김찬이를 영영 떼어 내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얼른 죽 갖다 줘.”
“제가 꼭 가야 해요?”
“곧 오픈 시간인데 사장인 내가 가리?”
“아니, 뭐 이렇게까지 해 줘요. 초등학생 수학 좀 봐 주는 건데.”
“아프다잖아. 아, 빨리 갔다 와.”
사장님이 내 등을 꾹꾹 밀었다. 나는 입술을 내밀었다.
“저 걔 집 어디인지도 몰라요.”
집 주소뿐이랴. 핸드폰 번호도 모른다.
“내가 알아. 문자로 보내 놓을게.”
“오픈 시간인데 알바생 없어도 괜찮으시겠어요?”
“지금 때에는 사람 별로 없어. 나랑 윤아로 충분해.”
“저는 일하고 시급 받고 싶은데요….”
김찬이의 집에 다녀오라니.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솔직히 조금 두려웠다. 아파서 골골대며, 퀭하고 열에 띤 얼굴로, 나를 ‘현오야’ 하고 부르는 김찬이. 그를 마주하기가 두렵다.
내가 심한 말을 하고 난 뒤로 김찬이가 바로 앓아누웠다니. 내 책임이 약간 있어 보이지 않는가. 괜한 죄책감 때문에 얼굴 볼 면목이 없기도 하고, 김찬이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뭔가를 부탁하면 도저히 거절하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그때 사장님이 불시에 내 등허리를 세게 후려쳤다.
“아, 좀! 내가 이거 시키고 시급을 까먹겠니? 찬이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대. 빨리 가!”
“아….”
“너 안 갔다 오면 가게에서 재워 주는 거 취소야.”
나는 갈등한다. 지금은 대략 7월 중순. 더위가 꺾이려면 한참 남았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반지하 방에서 바퀴벌레와 취침할 것인가. 나의 무른 마음을 담금질하며 김찬이에게 다녀올 것인가. 죽만 쓱 넘겨주고 오면 되지 않을까? 갈팡질팡하던 생각의 추가 후자 쪽으로 기울었다.
“…다녀올게요.”
나는 겁먹은 얼굴을 하고서 가게 밖을 나섰다. 사장님이 보내 주신 문자를 보고 김찬이의 집을 찾아갔다.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오피스텔이었다. 이 근방에서 가장 신축 건물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으로 올라가며 다리를 덜덜 떨었다. 604호 앞에 도착했을 때는 입술까지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목을 몇 번 가다듬고 초인종을 눌렀다. 안이 조용했다. 자고 있나? 초인종을 한 번 더 눌러 보았다. 또 조용했다. 주먹을 말아 쥐어 현관문을 쿵쿵 두드렸다. 이쯤이면 나올 법도 한데. 슬슬 불안해졌다.
“야, 김찬이.”
쿵쿵. 이번에는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드렸다.
“김찬이 문 좀 열어 봐.”
얘는 뭐 하길래 안 나와. 쓰러졌나?
“야! 나 김현오인데 문 좀…!”
덜컹, 그때 갑자기 현관문이 거세게 열렸다. 문틈 사이로 김찬이가 보였다. 허옇게 뜬 얼굴, 크게 벌어진 입술,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동그란 눈, 붉은 뺨. 얼빠진 표정의 김찬이였다.
“혀, 현오야.”
휙. 나는 잽싸게 손을 뻗어 죽을 김찬이에게 건넸다. 나머지 한 손은 등 뒤에서 꽉 주먹 쥐었다.
생각보다 김찬이의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저절로 연민과 보호 본능이 솟구치는 꼴이랄까. 여기까지 걸어오며 다잡았던 마음이 흐물거리려는 기미가 보였다. 나는 턱에 힘을 주었다. 안 돼. 죽만 주고 가는 거다. 바로 가야 한다. 엮이면 안 돼. 여기서 도망치자.
김찬이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꿈인가?”
“꿈 아닌데.”
나는 최대한 로봇처럼 보이려고 애쓰며 말했다.
“사장님이 가져다주래서 왔어. 난 진짜, 진짜 진짜 오기 싫었는데 사장님이 바쁘다고 나보고 대신 좀 가 달라고… 야!”
한 큐에 말하려고 준비해 왔던 멘트가 중간에 끊겼다. 쿵! 묵직한 소음을 내며 김찬이가 바닥으로 맥없이 쓰러졌기 때문이다.
***
아, 죽 하나 때문에 이게 뭔 짓이냐.
나는 완전히 진이 빠져 버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이 더운 날씨에 한참을 뛰어다녔으니 그럴 만도 하다.
결국 아르바이트는 못 나갔다. 사장님은 가게에 올 필요 없이 김찬이나 잘 돌보란다. 나는 화사하게 웃는 김찬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몇 시간 전, 죽만 주고 튀려던 나의 계획은 김찬이가 쓰러지면서 모두 무산되었다.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김찬이의 집 안으로 뛰어들고 만 것이다.
김찬이는 다행히 정신을 잃은 상태는 아니었다. 위가 아파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벌벌 떠는 김찬이를 두고 차마 그냥 갈 수가 없었다. 나는 바로 김찬이 쪽으로 등을 대고 업히라 했다. 김찬이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쩔쩔맸다.
“아냐, 괜찮아. 현오야, 진짜 나 괜찮으니까….”
미약한 힘으로 내 등을 슬쩍 밀어냈다. 그게 더 짜증 났다.
“좀 조용히 하고 그냥 업혀!”
나는 그대로 나보다 큰 놈을 업고 병원에 갔다. 김찬이는 나한테 업히자마자 반쯤 기절 상태로 접어들었다. 내버려 두고 갔으면 큰일 날 뻔했다. 등 뒤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대학 병원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오늘은 폭염 주의보였다. 다섯 시가 되었으나 여름 해는 쉬이 지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싶었지만 지갑을 가게에 두고 왔다. 제길. 뜨거운 볕 속에서 걷자니 자꾸만 힘이 빠졌다. 김찬이의 발이 바닥에 끌릴 것 같아 몇 번이고 힘을 주어 다시 업었다. 응급실에 도착했을 땐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팔다리는 갓 태어난 기린처럼 후들거렸다.
김찬이는 누워서 링거를 맞았다. 의사가 심각한 상태는 아니라 했다. 잘 먹고 잘 쉬어야 하는데 갑자기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김찬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나 때문인가 싶어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니까 사장님은 왜 나한테 심부름을 시켜서.
링거를 다 맞고 퇴원할 때는 택시를 이용했다. 김찬이 핸드폰 케이스에 카드가 꽂혀 있다는 걸 알았다면 올 때도 택시를 탔을 텐데. 김찬이는 아까보다는 혈색이 좋아졌으나 여전히 몸에 힘이 없어 보였다.
김찬이가 말했다.
“나 혼자 갈게.”
“됐어. 또 쓰러지면 어떡하려고.”
나는 김찬이의 말을 무시하고 같이 택시에 올라탔다. 김찬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동자를 굴리고 입술을 깨물어 댔다.
“현오야.”
“말 걸지 마.”
김찬이가 풀 죽어서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 꼴이 아주 처량하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자꾸 눈길이 간다. 나는 결국 손으로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뭔데.”
김찬이가 조금 화사해진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고마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고마워해야지, 그럼.”
“나 업느라 힘들었을 텐데.”
“죽는 줄 알았다. 가벼워 보여서 업어 준다고 했더니. 괜히 그랬지.”
내가 툴툴대자 김찬이가 푸스스 웃었다. 나는 김찬이를 힐끔 돌아보았다.
“살 만한가 보네. 이제, 뭐, 아픈 건 좀 괜찮고?”
“나 걱정해 주는 거야?”
“야. 사람이 눈앞에서 쓰러졌는데 그럼 걱정을 하지. 딱히 너라서 그런 게 아니라. 어? 네가 이뻐서 그런 게 아니라고. 무슨 말인지 알지.”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변명해 대. 입 좀 가만히 둬. 나는 마음속으로 나에게 외쳤지만 입은 도통 멈추지 않았다.
“응. 알아. 고마워.”
“그리고 너 아까 쓰러지기 전에 내가 한 말 들었어? 내가 너 걱정돼서 보러 온 게 아니라 사장님이 시키셔서 진짜 진짜 어쩔 수 없이 온 거… 아, 됐다. 그만하자.”
나는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려 차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무슨 얘기를 해도 김찬이의 눈빛이 반짝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김찬이는 들떠 보였다. 얼굴은 환자처럼 창백하면서도. 애초에 대화를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아무래도 내 무덤 파는 데에 소질이 있나 보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김찬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속이 울렁거린다. 김찬이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알아.”
“…….”
“나 보기 싫었을 텐데 그래도 와 줘서 고마워. 병원 데려다준 것도.”
갑자기 눈가가 간지럽다. 나는 손등으로 벅벅 눈을 문질렀다.
“현오 네가 나 그렇게 싫어하는지 몰랐어. 내가 눈치가 좀 없어. 알잖아. 고등학교 때도 그래서 애들이 나 싫어했던 거.”
아니, 난 뭐 그렇게까지 널 싫어하는 건 아닌데…. 가슴 어딘가가 콕콕 쑤셨다. 내가 김찬이의 상처를 후벼 팠을까 봐 겁이 났다. 쟤를 매몰차게 떼어 내려고 나쁘게 말한 건 맞지만, 너무 많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했는데. 그래, 안다. 다분히 이기적인 바람이었다. 나쁘게 굴려면 그만큼의 각오를 해야 했다.
“그런데도 난 현오 네 얼굴 보니까 좋다.”
“…….”
“미안.”
김찬이가 말을 끝내고 입을 다물었다. 택시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택시 기사가 미러를 통해 힐끔 내 쪽을 바라보았다. 기사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나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택시가 곧 김찬이네 오피스텔 앞에 멈추었다. 택시에서 내리자 어느새 사위가 캄캄했다. 나는 신발 코로 바닥을 툭툭 찼다.
“현오야. 잘 가. 죽은 데워서 잘 먹겠다고 사장님께 전해 줘.”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핸드폰에 알림음이 울렸다. 사장님께 온 문자였다.
「찬이 죽 먹이고 빈 통 받아서 가게에 가져다 놔.」
이어서 하나 더 왔다.
「시급 안 깔 테니 걱정 말고.」
나는 문자와 김찬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작게 한숨 쉬고 말했다.
“야, 같이 올라가자.”
“응?”
김찬이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장님이 너 죽 먹이고 통 받아 오래.”
“아, 정말?”
김찬이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화사해졌다. 그의 하얀 뺨에 붉은 기가 서서히 감돌았다.
“너 너무 노골적으로 좋아한다? 거절도 안 하네. 네가 직접 돌려주겠다는 입바른 소리라도 좀 해 보지.”
“미안. 네가 같이 더 있어 준다는데 싫을 리 없잖아.”
“하아.”
나는 그렇게 또 김찬이의 집에 발을 디뎠다. 김찬이네 현관에 서 있는데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잠시 망설이다가 집 안으로 들어오자, 김찬이가 겸연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좀 어지럽지? 아파서 정리를 못 했거든.”
“아니. 완전 깨끗한데.”
옷가지가 널브러져 있어 실제 면적보다 더 좁아 보이는 내 단칸방을 떠올렸다. 내 방에 비하면 이곳은 오성급 호텔이다. 김찬이네는 이십 평은 훌쩍 넘어 보였다. 난 오피스텔은 다 원룸인 줄로만 알았다. 웬걸. 여기는 거실에 방이 두 개나 딸려 있었다.
“…집이 크네.”
“좀 그렇지?”
“넌 왜 기숙사에서 안 사냐?”
“기숙사가 4인실밖에 없더라구. 누구랑 같이 지내는 게 좀 불편할 것 같아서 그냥 오피스텔 구했어.”
“아예 아파트로 구하지.”
“아파트까지 부탁하기엔 아빠한테 미안해서.”
그렇군. 나도 모르게 집의 위세에 위축되었다. 옛날에는 나도 이거에 두세 배만 한 집에 살았으면서. 그때가 아주 까마득하다. 열아홉 살 이전의 기억은 대부분 흐릿하다. 의도적으로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한 탓이다.
김찬이가 힘없는 걸음걸이로 에어컨 앞으로 갔다. 띠링. 에어컨이 켜졌다.
“김찬이. 에어컨은 왜 켜? 너 감기도 걸렸다며.”
“네가 더울 것 같아서.”
“아, 됐어.”
“땀도 많이 흘렸잖아.”
“네 몸이나 신경 써.”
“나 걱정 안 해 줘도 돼.”
“아니, 널 걱정하는 게 아니라니까… 됐다.”
김찬이와 입씨름해서 뭐 하나 싶었다. 나는 쭈뼛거리며 3인용 소파 귀퉁이에 걸터앉았다. 김찬이는 멀찍이 떨어져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호기심과 흥분을 간신히 억누르는 눈빛이었다. 쟤가 저런 눈을 할 때면, 정말로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 든다.
“죽이나 빨리 먹어. 얼른 가게.”
“아, 응.”
“에어컨 끄고.”
“괜찮아. 난 카디건 입고 있으면 돼.”
“그럼 그러든가. 어쨌든 빨리 해.”
땀은 식었지만 피부에 소금기가 남아 있었다. 가죽 소파에 닿은 피부가 찐득거리는 게 느껴졌다. 불쾌감이 치솟았다. 얼른 집에 가서 찬물로 샤워하고 싶었다. 목을 뒤로 꺾으며 중얼거렸다.
“아, 찝찝해 죽겠네….”
김찬이가 내 말을 듣고는 주방 쪽으로 걸어가려다 말고 슬쩍 뒤돌아보았다.
“현오야. 샤워할래?”
“됐거든. 내가 미쳤다고 여기서 샤워를 하겠냐.”
“갈아입을 옷 빌려줄게.”
“됐다니까.”
“욕조도 있는데.”
“…….”
“나 죽 먹을 동안 씻으면 되잖아.”
순간 혹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김찬이는 내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냉큼 한 발자국 더 다가와 말했다.
“걱정하지 마. 이상한 짓 안 해. 안 볼게.”
“그런 게 걱정돼서가 아니라….”
“그러면 더더욱 거절할 이유 없겠다. 그렇지?”
김찬이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하얗고 말랑거리는 볼이 위로 올라갔다. 귀엽고 무해한 표정이다. 마시멜로 같달까. 마음이 점점 물러졌다. 그래, 엮이기 싫었지만 이미 이리된 거 어쩌겠는가. 내가 얠 업고 뛰고 그 고생을 했는데 욕실 빌려서 샤워 정도는 할 수 있지. 게다가 우리 집보다 훨씬 쾌적할 거 아니야.
나는 찝찝함을 못 이긴 나머지 재빨리 자기합리화를 끝마쳤다.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럼 갈아입을 옷 줘.”
김찬이가 둥근 눈이 휘어지도록 미소 지었다.
“응. 알겠어. 잠시만.”
곧 김찬이는 후다닥 방으로 튀어 가더니 옷을 준비해 왔다. 팬티도.
“팬티까지?”
김찬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 별말도 안 했는데.
“이거 새거야. 입고 그냥 네가 가져가면 돼.”
“그래?”
“응. 진짜.”
김찬이가 자기를 믿으라는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공중에서 붕붕 떠서 움직였다. 팬티가 빳빳한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김찬이에게서 옷가지를 받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우리 집과는 비교가 안 되는 크기의 욕실이었다. 타일이 아주 예쁘고 욕조까지 갖춰 놓았다. 김찬이가 쫄쫄 따라와 문간에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욕조 쓸래?”
“아니. 그냥 샤워만 할게.”
“응. 저기 샴푸, 린스. 보디 샴푸는 이쪽.”
김찬이가 이것저것 설명해 주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욕실 문고리를 붙잡았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샤워 잘 해.”
김찬이가 욕실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잠시 거울을 바라보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더위에 피부가 익었나 보다. 뺨이 빨갰다. 머리도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고.
김찬이네 집에서 이러고 있는 게 과연 괜찮은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김찬이는 확실히 나쁜 놈은 아니다. 고등학교 때도 그랬던 것 같다. 김찬이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김찬이 하면 떠오르는 인상은 남아 있다. 걱정될 만큼 너무 순하고, 하얗고, 부드러운 녀석.
나쁜 놈이 아니니 더욱 떼어 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큰맘 먹고 모질게 굴었는데 아파서 쓰러지지를 않나.
김찬이가 만약에 고등학교 동창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그냥 이 지역에서 새로 만난 낯선 사람이었다면. 나는 옷을 하나둘 벗으며 상상해 보았다. 여전히 김찬이를 부담스러워했을까? 아니면 평범하게 친구처럼 잘 지냈을까? 왠지 후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 우울해졌다.
맨몸이 된 채 한숨을 쉬었다. 이런 가정이 무슨 의미가 있나. 어쨌든 현실은 모두 내 바람과는 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을 잔뜩 품고 있는 김찬이가 내 세계를 조금씩 침범해 오는 식으로. 나는 그를 막고 싶으나 도통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김찬이의 샤워기에서는 온수가 바로 콸콸 쏟아져 나왔다. 욕실 안은 팔을 이리저리 휘둘러도 벽에 부딪히지 않을 만큼 넓었다. 오래간만에 쾌적하게 샤워를 마치고 옷을 다 챙겨 입은 다음 욕실 밖으로 나왔다. 문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김찬이가 멀리서 말을 걸었다.
“다 씻었어?”
“어.”
“부엌 쪽으로 와. 간단하게 뭐 준비해 놨어.”
공기 중에 맛있는 냄새가 가득했다. 저절로 코가 반응했다. 나는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탈탈 털며 부엌으로 걸어갔다. 김찬이는 미리 식탁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불고기, 쌈 채소, 갖은 밑반찬이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너 배고플 거 같아서. 나 때문에 저녁도 못 먹었잖아. 보통 사장님이 주시지?”
“그건 그런데….”
“먹고 가.”
나는 어색하게 김찬이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걸 언제 했어?”
요리에 완전히 문외한인 나는 신기할 뿐이었다. 샤워를 그리 길게 한 것 같지도 않은데.
“별거 아니야. 얼마 전에 재워서 냉동해 놨던 불고기 굽기만 한 거야. 밥도 얼려 놨던 거 데운 거고.”
“너 요리도 해?”
“응. 아, 좀 심심할 텐데 어쩌지? 다이어트 때문에 간을 많이 안 해서.”
“상관없어. 나도 짠 거 그다지 안 좋아해.”
설렁탕을 먹으면 소금 한 통을 다 부을 기세로 간을 하는 나였지만 지금은 거짓말을 했다. 김찬이의 표정에 과할 정도로 초조함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조심스레 숟가락을 집어 들며 김찬이를 힐끗 관찰했다. 늘씬한 몸에는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반팔 소매 아래로 보이던 팔뚝이 탄탄했던 것도 기억났다.
“다이어트 더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김찬이는 말없이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나는 밥 한 숟갈을 입에 넣었다가 그제야 아차 했다. 아니, 나 샤워하고 빈 통만 받아서 바로 가려고 했는데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야? 아주 여우한테 깜빡 홀린 기분이었다. 토끼가 아니라 여우였나.
“야. 너 죽은 다 먹었어?”
그때 마침 띵 하는 소리가 전자레인지에서 들렸다.
“데우고 있었어. 지금 먹으려구.”
김찬이가 죽 그릇을 들고 와서 다시 나와 마주 보고 앉았다. 졸지에 나는 김찬이와 한 식탁에서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처음 일 분간은 무거운 침묵만 가득했다. 나는 말없이 우적우적 음식을 씹었다. 김찬이의 말대로 심심했으나 맛이 없지는 않았다. 간만에 건강식 먹는 기분이랄까. 밑반찬도 거의 다 풀 쪼가리고.
먼저 침묵을 깬 건 김찬이 쪽이었다.
“저기, 현오야.”
“왜.”
나는 고개를 밥그릇 쪽으로 처박았다. 김찬이의 시선이 내 정수리 부근에 닿는 게 느껴졌다.
“어쩌다가 사장님 심부름을 오게 됐어?”
“여름 동안 사장님이 가게에서 재워 주는 대가로.”
“왜 가게에서 자?”
“집이 더워서.”
“가게도 불편할 텐데.”
“반지하보다는 낫겠지.”
“반지하 살아?”
나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왜. 웃겨?”
“아니. 여름에 힘들겠다 싶어서. 습할 거 아니야.”
“좀 그렇지.”
“우리 집 방이 하나 남는데….”
나는 눈을 한 번 꾹 감았다가 떴다. 홀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뭐.”
“여기서 자도 되는데.”
“내가 미쳤다고.”
“귀찮게 안 할게. 그냥 게스트 하우스다 생각하고 써도 돼.”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버렸다. 김찬이와 눈동자가 정면으로 마주쳤다. 순간 목구멍이 꽉 막혔다. 김찬이의 하얀 뺨에는 분홍빛이 떠올라 있었다. 아이처럼 맑은 표정이었다.
“김찬이. 너 진짜 왜 그래?”
“부담스러웠다면 미안.”
“당연히 부담스럽지. 어떻게 나한테 고백한 놈 집에서 잠을 자?”
“그거 신경 쓰지 마. 그냥 잊어버려.”
“너라면 그럴 수 있겠냐?”
김찬이가 순하고 둥근 눈을 깜빡였다. 그의 목소리는 사근사근하고 나긋했다. 혼자 뾰족하게 열 내는 내가 나쁜 놈이 된 기분이었다.
“미안해. 현오야. 화내지 마.”
“아니, 화낸 게 아니라….”
“나는 네가 편하게 지냈으면 해서 그랬어.”
“너랑 있으면 하나도 안 편해.”
김찬이가 숨을 훅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턱에 힘을 꾹 주더니 입술을 모았다.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나는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응. 내가 괜히 말했다. 나 보기 싫을 텐데. 같이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들떠서….”
“…….”
“내가 주제넘었어. 미안해. 밥 먹자.”
김찬이가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다시금 식탁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김찬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자기 꼴 보기 싫다고 독하게 말했는데도 왜 나한테 친절하게 굴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왜 쟤만 나한테 주구장창 사과를 하는 걸까.
불고기가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어색하게 식사를 끝마쳤다. 김찬이는 아까보다 훨씬 위축된 자세로 나를 대했다. 먹은 게 얹힐 것 같았다. 김찬이는 죽을 담았던 통을 씻어서 나에게 건넸다.
나는 말없이 몸을 돌려 현관으로 가고 싶었건만 이상하게 발뒤꿈치가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여기를 떠나면 마음이 편해질까. 아니다. 아닐 것이다.
김찬이는 나를 좋아한다. 그것도 꽤 많이. 내 말 한마디에 김찬이의 마음이 다쳤다가 아물었다가 한다. 이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 정도로 특별한 존재여서는 안 되었다. 주제를 넘는 건 김찬이가 아니라 나지.
김찬이는 미련하고 멍청하다. 나라면 나 같은 사람에게 저리 마음 쓰지 않을 것이다. 이쯤 봤으면 내가 과거와 다른 인간이라는 걸 알 법도 한데. 김찬이가 불쌍하다. 하필이면, 나를 좋아하게 된 김찬이가.
김찬이는 좋은 사람이고 나는 아니다. 그 격차만큼 김찬이는 점점 불행해지고 말 거다.
김찬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쁜 애가 아닌데 고등학교 때 이유 없이 힘들었으니까. 그는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 그러니까 더는 나를 안 좋아해야 할 텐데.
“김찬이.”
“응?”
김찬이가 긴장한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불러 놓고 내가 놀랐다. 말을 걸려는 생각은 없었는데 입이 먼저 움직였다. 머릿속이 김찬이 생각으로 가득한 탓인가. 아까 상처받은 표정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결론은 달라지지 않겠지만, 부연 설명을 좀 더 해야겠다. 이유도 모른 채 불행을 맞이하는 것만큼 끔찍한 건 없으니까.
“난 너 보는 거 싫어.”
“아….”
김찬이의 속눈썹이 빠르게 떨렸다. 김찬이의 입술이 움찔거리더니 미안하다고 말하려는 듯했다. 나는 잽싸게 그의 말을 끊었다.
“그게 네가 잘못해서는 아니고.”
“…….”
“그냥, 그냥 이건 내 문제야. 내 마음 문제.”
김찬이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쟤가 내 얘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니까 미안하다는 말 그만 좀 해. 네가 모든 거에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갑자기 김찬이의 눈이 엄청나게 커졌다. 눈가는 붉었고 눈동자는 촉촉했다. 김찬이가 한참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간신히 말을 뱉었다.
“그 말….”
“뭐?”
“그 말 예전에도 네가 똑같이 했어.”
“뭔 소리야.”
“고등학교 때.”
“기억 안 나.”
과거에 대한 기억이라면 희미한 잔상처럼만 머릿속에 떠돌고 있을 뿐이다. 그 이미지만으로도 괴로운데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을 리가. 나는 신경질적으로 한숨 쉬고는 말했다.
“그래. 이게 문제야. 우리는 이게 문제라고.”
“응?”
“너는 나를 너무 잘 기억하고 있잖아. 난 그게 싫어. 다 까먹고 있었는데. 너랑 있으면 과거가 떠오를 것 같다고.”
꽁꽁 감춰 둔 치부를 살짝 내비치고 말았다. 말하다가 나도 모르게 흥분해 버렸다. 어느새 내 목소리는 엉망진창으로 떨리고 있었다. 아차 싶었다.
김찬이는 내가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고 있을 텐데. 이건 정말 내 개인적인 문제인데. 왜 그러느냐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캐물으면 어떡하지. 갑자기 겁이 났다. 내 마음의 속살은 너무 연약하다. 타인이 조금만 건드려도 바로 문드러지고 상해 버릴 테다.
끈질기게 연락해 대는 고모부는 종종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썼다. ‘너는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해. 트라우마가 너를 망치게 놔두지 마.’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쓸데없이 와 닿지도 않는 영어를 쓴다고 생각했다.
그냥 한마디로, 나는 망가진 사람인 거다. 망가져서 더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사람. 망가진 기계는 어떻게 되는가. 버려진다. 혹은 속속들이 해체되어 다른 기계 속으로 들어간다. 내 인생도 그래야 한다. 세상에서 버려지거나, 원래 김현오였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해체되어 다른 삶을 사는 것.
그 작업을 갑자기 김찬이가 가로막은 셈이다.
나는 급속도로 머리가 아파졌다. 이어질 김찬이의 말을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뭐가 됐든 내 속을 왕창 긁는 거겠지.
“현오야. 그러면….”
“어.”
“나랑 동창이었던 것도 까먹어 주면 안 될까?”
“뭐라고?”
“우리는 몰랐던 사람인 거야. 여기서 처음 만난 거지. 난 그냥 너희 가게 단골이고 넌 그냥 거기 알바생이었고. 그러면 되잖아. 어때? 내가 조심할게. 옛날 얘기는 하나도 안 할게.”
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이건 내 예상에 없던 전개였기 때문이다. 당황스러웠지만, 내 속을 긁지는 않았다.
“현오야. 나도 사실 내 과거가 너무 싫어.”
김찬이의 목소리가 지금껏 들었던 것 중 가장 무거워졌다.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김찬이의 음성은 매우 낮았다.
나는 순간 흠칫했다. 김찬이가 나와 닮은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김찬이를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면서, 잠깐 내비친 상처가 나와 닮았다고 치졸한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건 이로울 게 없는 유대감일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거기에 기대게 되었다.
나만 망가진 것이 아니다…. 달콤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가능하다면 너한테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 현재의 사람이 되고 싶어.”
김찬이가 아주 조심스레 내 눈치를 보며 되물었다.
“…그러면 안 될까?”
나는 멍하니 김찬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김찬이는 필사적이었다. 나는 무언가에 저렇게 필사적인 적이 있었던가. 문득 내 자신을 되짚어 보고 기분이 이상해졌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데.”
“너랑 친해지고 싶어.”
“그런 다음에 나 꼬시려고?”
“아냐. 고백은 잊어 달라니까. 그건… 네가 게이인 줄 알고 말한 거야. 이제 그런 기대 전혀 안 해. 걱정하지 마.”
“그러면 왜 이러는 거야.”
“널 도와주고 싶어.”
“너 나 동정하냐?”
김찬이가 재빠르게 양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야. 내가 너한테 보답하고 싶어서 그래. 현오 네가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내가 주고 싶어서.”
“보답? 무슨 보답?”
“네가 나 도와줬던 거.”
“언제?”
“열아홉 때….”
뭘 말하는 거지? 열아홉이면 내가 제일 엉망진창이었을 때다. 얘랑은 열여덟 때 만나지 않았나? 열아홉이면 난 전학 갔었을 텐데. 그사이 봄방학 때 뭔 일이 있었나? 내 미간이 자연스레 구겨졌다. 김찬이가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기억 안 나면 됐어. 나만 잊지 않고 있으면 돼.”
“그래. 기억하기 싫어.”
“응.”
나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김찬이는 빨갛고 도톰한 입술을 재빠르게 움직이며 쉼 없이 나를 설득했다.
“원래 그냥 지켜보는 거로 만족했어. 근데 네가 나 보기 싫다고 아예 오지도 말라고 하니까…. 그래서 안 갔어. 그러니까 미칠 것 같더라. 난 아직 너한테 못 갚은 빚이 많은데.”
“…….”
“도저히 안 되겠어서 미친 척하고 말하는 거야. 마지막일 거 각오하고.”
“너 진짜 이상해.”
“알아. 근데 한 번만 진지하게 생각해 줘.”
“나는….”
한숨을 쉬고 눈가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나는 네가 날 특별하게 생각하는 게 싫어.”
“현오야.”
김찬이가 절박하게 나를 불렀다.
“그러니까 이런 게 싫다고! 나 없으면 죽을 것처럼 ‘현오야’ 부르는 게 싫다고, 나는.”
“앞으로 안 그럴게.”
갑자기 김찬이가 거세게 기침했다. 피부는 한층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순정 만화에나 나올 법한 병약한 미소년 같았다.
“네가 은혜 갚는 까치냐? 난 기억도 못 하는데. 마음의 빚 좀 갚겠다고 나한테 붙어 있겠다고?”
“응.”
김찬이의 결심은 굳건해 보였다. 나는 김찬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빚은 굳이 안 갚아줘도 되는데.
“현오야. 한 달만 시험 삼아 네 옆에 있으면 안 될까? 거슬리지 않을 거야.”
“한 달 지났는데 여전히 싫으면?”
“그러면 네 앞에서 바로 사라질게. 고깃집 근처는 지나가지도 않을 거구. 약속해.”
“난 너한테 잘 대할 자신 없어. 지금처럼 막 대할 거라고.”
“응. 괜찮아. 막 대해도 돼. 꺼지라고만 하지 말아 줘.”
김찬이가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나는 김찬이를 쳐 내지 못했다.
뭔가 얘한테 자꾸 말리는 느낌이다. 회중시계를 든 흰 토끼를 따라서 이상한 세계로 들어간 김현오가 된 것 같다. 어, 어, 하다 보니 김찬이의 말을 거절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지나치게 성격이 무른 건가. 아닐 거다. 누구든 토끼 같은 얼굴로 사정하는 김찬이를 마주한다면 마음이 약해질 게 분명했다. 김찬이에게는 분명히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다. 초능력이라고 해도 좋겠다. 앨리스라고 흰 토끼를 따라가면 고생하게 되리라는 걸 알았을까? 그냥 어쩌다 보니 홀려서 따라가게 된 거겠지. 그러니까 나도 어쩌다 보니….
“현오야. 편안한 친구가 되도록 노력할게.”
“…딱 한 달이다.”
이 병약 미소년한테 홀리고 있는 거겠지. 제기랄.
***
나는 멍하니 가게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위이잉. 대형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영업을 마친 캄캄한 고깃집에는 나뿐이었다. 가게 2층의 긴 의자에서 자기로 했다. 머리 방향을 바꾸며 한참을 뒤척이는 중이었으나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가게에서 자는 첫날이라 그럴지도, 조금 전에 김찬이를 보고 와서 그런지도 모른다.
‘편안한 친구가 되도록 노력할게.’
나는 결국 창백하고도 순진한 얼굴로 말하는 김찬이에게 넘어가 버렸다.
‘현오야. 친구, 해 줄 거지?’
토끼 같은 그 눈망울을 무시하지 못했다. 정신 차려 보니 폰 번호까지 교환하고 있었다.
영 찝찝하다. 정말 괜찮을까? 김찬이는 자기 고백을 잊어버리라 했지만 그게 말이야 쉽지. 되겠느냐고. 김찬이의 소굴에서 벗어나 혼자 누워 있으니 갑자기 모든 게 후회가 되었다.
김찬이와 헤어지자마자 걔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현오야. 오늘 와 줘서 고마워. 우리 집에서 지내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