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 김찬이, 열아홉 살, 사라지는 겨울 (5/13)

04. 김찬이, 열아홉 살, 사라지는 겨울

2학년이 다 끝나간다. 다음 주부터 봄 방학이었다. 교실의 분위기는 몇 달 전에 비해 확연히 무거워졌다. 이제 정말 고3이라는 압박감에 다들 짓눌려 있었다. 공부를 전혀 안 하던 애들마저 갑자기 모의고사 기출 문제집 등을 사며 호들갑을 떨어 댔다.

내 얼굴에도 남들 못지않게 그늘이 졌다. 그러나 수능이나 대학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현오를 더는 못 보게 될까 봐 무서웠다. 현오가 없는 교실은 끔찍할 테다. 매일 밤 3학년 때도 현오와 같은 반이 되기를 기도하며 잠들었다.

봄방학 직전 교실은 지루하고 조용했다. 선생들은 수업 대신 자습을 시켰다. 나는 문제집을 설렁설렁 풀다가 힐끔 창가 쪽 자리를 곁눈질했다. 현오가 손으로 턱을 받친 채 창밖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책상에는 문제집은커녕 필통도 올라와 있지 않았다.

현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현오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덤덤한 뒤통수가 그림처럼 거기 놓여 있을 뿐. 우리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학기 초를 제외하고는 현오와 짝이 된 적 없었다. 나는 늘 멀찍이서 현오를 지켜보기만 했다.

요즘 들어 잠 오지 않는 밤이 많았다. 중학교 때에는 잠잠하던 성장통이 뒤늦게 시작된 탓이다. 무릎과 발목을 누가 망치로 두드리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현오를 떠올리면 시린 통증도 조금 참을 만해졌다. 현오만큼 키가 커서 그와 같은 눈높이가 되는 상상을 했다. 현오보다 커지면 더 좋을 테다. 그의 정수리를 한 번쯤은 가만히 바라보고 싶었다.

밤마다 사소하지만 소중한 현오와의 추억거리를 한참 동안 공들여 곱씹기도 했다. 짝이 되었던 첫날, 도서관에서 마주친 날, 체육 수업 때 현오와 배드민턴을 했던 것 등. 아마 현오는 제대로 기억도 못 할 테지만.

2학기 때 함께 배드민턴을 했을 땐 정말 기뻤다. 수행 평가를 위해 출석 번호대로 두 명씩 짝을 지었다. 한 달 정도 체육 시간마다 현오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수행 평가 좀 같이 한다고 내가 현오와 친구가 되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동경하던 현오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내가 현오 옆에서 긴장해서 배드민턴 채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박정수가 다가와서 비아냥거렸다.

“야. 김현오. 너 쟤랑 해도 괜찮겠냐.”

현오는 박정수를 돌아보았다. 나는 긴장했다. 둘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박정수가 무섭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오에게 거부의 말을 듣는 건 세상 무엇보다 무서웠다.

“왜?”

“김찬이 때문에 수행 평가 망할 거 아니야.”

박정수는 혼자 있을 땐 나한테 돼지 새끼라고 욕하면서 현오가 있으면 그의 눈치를 보며 호칭을 바꾸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애들한테는 현오가 쓸데없이 선비 같은 놈이라며 욕하고 다녔다.

현오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잘할 거 같은데. 오히려 내가 배드민턴을 못해서.”

현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김찬이. 미리 미안하다.”

나는 깜짝 놀라 딸꾹질이 나올 뻔했다.

“응? 아, 아니야.”

박정수는 잠깐 입을 꾹 다물더니 휙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갔다. 나는 박정수에게 부드럽게 무안을 주는 현오가 멋져 보였다.

그런데 현오는 정말로 나와 복식 파트너가 된 게 짜증 나지 않을까. 나는 그 부분만은 궁금했다. 내 체중은 100kg가 넘었다. 몸 쓰는 거에는 도통 재능이 없었다. 그에 반해 현오는 운동이라면 뭐든지 곧잘 잘했다. 내가 현오의 발목을 잡을 거라는 건 누가 봐도 뻔한 일이었다.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현오에게 말을 걸었다.

“저, 현오야.”

“어.”

“근데 짝 바꿔 달라고 해도 괜찮아.”

현오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현오의 얼굴이 진지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그, 선생님이 짝 바꾸고 싶으면 말하라고 했으니까….”

“왜 그래야 하는데?”

“응? 어, 나 운동 못 하니까. 나 때문에 괜히 네가 점수 못 받을 수도 있잖아.”

“아. 그런 말이었어? 난 또.”

현오가 굳어 있던 얼굴을 풀고 어깨를 으쓱했다.

“상관없는데. 어차피 난 수행 평가 챙기지도 않고.”

“그래도….”

“신경 쓰지 마.”

“…응.”

나는 종일 체육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원래는 체육 시간이 제일 싫었는데. 한 달간 시간표의 체육 부분에 동그라미를 쳐 놓고 그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현오는 늘 날래게 움직였다. 상대편의 공을 받아치기 위해 몸을 날릴 때 가끔 헐렁이는 체육복 상의가 위로 말려 올라가곤 했다. 그러면 아주 살짝 현오의 매끈한 복근이 보였다. 나는 순식간에 얼굴이 뜨거워져 허둥지둥하다가 공을 놓쳤다.

내 배드민턴 실력은 형편없었다. 우리 복식조는 실력 차가 너무 났다. 체육 선생이 현오에게 실력이 비슷해야 서로 연습하는 보람이 나니 파트너를 바꾸는 게 어떠겠냐 넌지시 말하는 걸 엿들은 적도 있었다. 현오는 그냥 씩 웃고 말았다. 짝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현오가 나를 참아 주는 게 고마웠다. 굼뜨고 형편없는 나를.

현오는 알고 있었을까. 현오가 나를 버리면 나는 새로운 짝을 쉬이 찾지 못하고 아이들 사이를 돌고 돌며 수치를 겪었을 테다. 그 누구도 나를 원하지 않으니까.

처음으로 살을 빼 보고 싶었다. 현오처럼 날쌔게 움직여 보고 싶었다. 다른 애들이 나를 놀려도 난 살찐 게 죄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남들보다 체중이 조금 더 나갈 뿐이다. 누구도 내 몸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떠밀리듯이 다이어트 하기는 싫었다. 아빠의 잔소리도, 박정수의 모욕도, 나를 헬스장에 데려다 놓지는 못했다.

현오만이 가능했다. 현오만이 내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게끔 했다.

현오를 떠올릴 때면 내 사고 회로가 모조리 뒤바뀌었다.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그래서 무엇이라고 정의 내릴 수 없는 감정이 가슴에 넘실거렸다. 간밤에 현오의 꿈을 꾸고 나면 왜 애틋하고 슬픈 건지 나는 몰랐다.

나는 처음으로 밥을 굶어 보았다. 늦은 밤에 홀로 뜀박질하기도 했다. 배드민턴도 열심히 연습했다. 수행 평가가 있을 즈음에는 7kg 정도가 빠져 있었다. 그러나 평가 결과는 처참했다. 최하점이었다. 노력해 보았지만 난 운동에는 영 젬병이었던 거다.

체육관을 나와서 교실로 돌아가는 길에, 애들과 뒤떨어져 혼자 걸었다. 울고 싶었다. 내 바로 앞에는 현오를 포함한 남자애들 여러 명이 무리 지어 있었다. 애들의 시끌벅적한 수다 소리가 들려왔다. 박정수가 비아냥거리며 현오에게 말했다.

“김현오. 그러니까 짝 바꾸랬잖아.”

이번만은 나도 박정수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너는 김찬이를 좀 너무 챙긴다니까.”

맞아, 맞아. 박정수 주변에 있던 다른 애들이 동의하며 낄낄거렸다. 현오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네가 왜 그 새끼한테 잘해 주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박정수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담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수는 작년엔 나로 스트레스를 풀곤 했으니까. 올해에는 현오 때문에 재미있는 샌드백을 잃어버린 셈이다. 현오가 박정수보다 서열이 높았기에 박정수는 제 마음대로 굴 수가 없었다.

우리 반 남자애들은 크게 세 무리로 나뉘었다. 공부 잘하고 조용한 다섯 명, 모든 게 평범한 여덟 명, 공부에 관심 없고 얼굴이 반반한 다섯 명. 나는 어느 무리에도 속하지 못했다. 박정수와 현오는 마지막 무리였다. 현오는 박정수를 딱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그냥 같이 다닌다는 느낌이었다. 박정수도 그걸 알 것이다. 예민한 놈이니까. 한참 동안 박정수가 바짝 긴장한 채 현오의 눈치를 보던 게 기억난다.

현오는 박정수의 말에 그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내내 닫혀 있던 현오의 입이 열렸다.

“그래서 뭐. 불만이야?”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뭐?”

“불만이냐고. 딱히 김찬이한테만 잘해 준 적 없는데. 그냥 너한테 하듯이 똑같이 한 거지.”

“야, 김현오….”

예비종이 울렸고 현오는 고개를 휙 돌려 성큼성큼 먼저 걸어갔다. 다른 애들은 눈치만 보다가 현오를 따랐다. 박정수는 뒤에 혼자 남겨졌다. 나는 선뜻 박정수를 앞질러 가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박정수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씨발.”

그러더니 고개 돌려 나를 험악하게 바라보았다. 때리려나. 기분이 나쁘겠지. 힘들게 따라다니던 현오가 자기와 돼지 놈을 똑같이 대하고 있었다는데. 박정수는 금방이라도 주먹을 날릴 기세였지만 나는 무섭지 않았다. 실실 웃음까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두려움보다 기쁨이 컸다.

박정수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몸을 휙 돌려 걸어갔다. 현오가 정말로 나를 박정수와 동급으로 생각했는지는 모른다. 내게는 어쨌든 나를 감싸며 박정수에게 한 방 먹여 줬다는 게 중요하게 느껴졌다.

이후 박정수는 나만 보면 매섭게 노려보았으나 전처럼 나를 막 대하지는 못했다. 작년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평화롭게 시간이 흘러갔다. 가끔 현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먼저 말을 걸 용기가 없었다. 그저 멀찍이서 현오를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잘생겼고 키도 크고 다정하고 힘도 세며 부자인 현오. 현오에게 부족한 점이라고는 없었다. 현오는 어디에 서 있어도 단연 눈에 띄었다. 처음으로 교실이 좋아졌다. 현오가 있는 공간이기에.

가능하다면 영원히 열여덟 살에 머물고 싶었다. 외계인의 빔을 맞아 시간이 흐르지 않는 2학년 3반 교실. 그곳에서 평생을 보내는 공상을 하고는 했다. 지금은 현오와 출석 번호가 붙어 있다는 것뿐,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지만 평생을 함께 보내면 뭔가 달라질 것이다. 현오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열여덟 살의 365일은 훨씬 더 빠르게 지나간 듯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해가 넘어갔고 겨울 방학이 끝났다. 그리고 벌써 2월. 이제는 정말 신학기가 코앞이었다.

교실을 울리는 종소리에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현오를 훔쳐보며 지난 추억을 더듬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벌써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문제집을 내내 펼쳐 놨으나 딱 두 문제 풀었다. 이제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애들이 종 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급식실로 뛰쳐나갔다. 현오도 일찌감치 친구 두 명과 함께 밥 먹으러 나갔다.

나는 요새 입맛이 없어서 저녁을 아예 안 먹는 중이었다. 책상에 엎드려서 팔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눈꺼풀을 내렸다. 눈앞에 가득한 어둠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또, 현오 생각을 했다. 3학년에는 현오와 반이 갈리게 될까. 울고 싶다. 현오를 더 보지 못하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었다. 학년이 올라가기 전에 현오에게 다가갈 수는 있을까. 아마 불가능하겠지. 교실에는 무형의 계급이 존재한다. 나와 현오 사이에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계급 격차가 있다.

용기를 내어 먼저 말을 걸었다 해도 그다음이 문제였다. 무엇보다 두려운 건 현오의 반응이었다. 현오가 나를 조금이라도 부담스러워한다면, 그래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나는 죽고 싶어질 게 분명했다.

점점 따뜻해지는 날씨가 원망스러웠다. 겨울의 끝자락을 최대한 늘어뜨리고 싶었다. 그러나 겨울은 착실히 제 부피를 줄여 가고 있었다. 나는 얼굴을 더 깊숙이 파묻고서 죽어 가는 사람처럼 숨을 작게 내쉬었다.

“야.”

그때 내 정수리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상체를 세웠다. 당연히 교실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다. 박정수가 눈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일 학년 때 박정수와 같이 다니며 나를 팼던 두 명도 함께였다.

“씨발 새끼야. 나와.”

갑작스레 내 목덜미가 붙잡혔다. 쾅. 의자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우악스럽게 꽉 잡아 눌렀다. 나는 반쯤 구부린 자세로 박정수에게 질질 끌려갔다. 뒷덜미가 아팠다.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몇 분 동안 눈을 감고 있었던 탓에 시야는 뿌옜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박정수가 날 어디로 끌고 가는지, 몇 달 동안 잠잠하다가 왜 갑자기 이러는 건지.

내가 아는 건 오로지 하나였다. 박정수의 화난 목소리. 작년에 날 팰 때마다 꼭 저런 목소리를 내곤 했다. 지금 박정수 곁에는 현오가 없었다.

“존나 무겁네. 제대로 걸어. 계단에 대가리 깨지고 싶냐.”

박정수가 내 귓가에 대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헉헉대며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내가 휘청일 때마다 박정수가 내 뒤통수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억 소리와 함께 눈앞이 새하얘졌다.

마구잡이로 잡혀 끌려간 곳은 학교 옥상이었다. 교무실에서 옥상 열쇠를 훔쳐 온 모양이었다. 옥상 문을 열자마자 매서운 칼바람이 내 피부를 후려쳤다. 다른 놈들은 죄다 겉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나는 와이셔츠에 조끼 차림이었다. 곧 팔뚝 부분이 차가워졌다.

“씨발년.”

박정수가 날 바닥에 내팽개쳤다. 나는 초록색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낡은 옥상을 한 바퀴 굴렀다. 무릎과 발목이 이상하게 꺾인 듯했다. 시리고 아프다.

그리고 이유도 모른 채 맞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세 명의 발길질이 나에게 쏟아졌다. 복부와 척추, 정강이 등에 쉼 없이 충격이 가해졌다. 얼굴만은 건들지 않았다. 나는 억억 소리를 내며 옥상 바닥에 뺨을 갖다 댔다. 입이 저절로 벌어졌고 침이 뚝뚝 떨어졌다. 눈물과 콧물도 계속 흘러나왔다.

폭력에 거창한 이유가 꼭 필요하지 않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냥, 재미있어서. 가볍고도 간단한 동기로 누군가를 때릴 수 있다. 나는 그에 억울해하지 않는 법도 체득해 왔다. 몸에 가해지는 고통이 내 정신을 무너뜨리지 않게끔.

그런데 이번에는 정도가 심했다. 억울했다. 너무 아파서, 이 폭력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서, 이러다가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목구멍에서는 꺽꺽거리는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씨발, 개년아.”

박정수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거기서 나는 짙은 악의를 느낄 수 있었다. 왜 갑자기 때리는 거냐고, 내가 뭘 잘못했냐고 묻고 싶었다. 현오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하지만 대답은 듣지 못하겠지.

발차기가 얼마 동안 이어진 건지 모르겠다. 내가 느끼기로는 무한이었다. 박정수도 지쳤는지 잠시 폭력이 멈추었다. 나는 애벌레처럼 웅크린 채 쿨럭 기침했다. 옥상 초록색 바닥에 피가 묻었다.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숨 쉴 때마다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무시무시한 통증 때문에 숨을 한껏 참았다가 아주 느리고 약하게 뱉어 냈다. 아무래도 뼈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위에서 개자식들의 목소리가 웅웅 들려왔다.

“야. 쟤 저러다 죽는 거 아냐?”

“씨발. 죽기는 무슨. 살이 많아서 맞아도 멀쩡할걸.”

“피 토했는데? 문제 생기면 어떡해? 나 엄마한테 맞아 죽어.”

“걱정하지 마. 우리 삼촌들 다 경찰이야.”

“아, 그랬지.”

“그래. 괜찮다니까.”

박정수가 내 머리 쪽에 쪼그려 앉았다.

“야. 김찬이.”

박정수가 나를 불렀다. 내가 대답이 없자 손바닥으로 내 뺨을 후려쳤다.

“컥….”

얼얼했다. 입 안의 연한 살이 터진 것 같았다.

“눈 떠 봐.”

“…….”

“눈 떠 보라고, 씨발. 내가 너 때문에 일 년간 고생한 거 생각하면, 하. 김현오 그 새끼 때문에.”

박정수의 친구들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왜 김현오한테 그렇게 빌빌대?”

“뭐. 빌빌댄 적 없거든.”

박정수는 퍽 자존심이 상한 목소리였다.

“빌빌댔잖아. 김현오가 뭐가 무섭다고.”

“그 새끼가 무서운 게 아니라 걔 집이… 아, 됐다.”

“김현오네 집 잘살아?”

“하여간 아빠가 김현오는 건들지 말랬어. 뭐 이제 상관없지만.”

“그래? 야, 그러면 김현오도 데려올까?”

“데려와서 뭐하게. 걔 싸움 잘해. 너희는 싸움 전혀 못하잖아.”

“그래도 우리 셋이면 뭐 어떻게 되지 않겠냐.”

“흠. 그럴까. 한 번쯤은 그 새끼 면상을 갈아 버리고 싶긴 했어.”

현오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내 코끝이 시큰해졌다. 나는 억지로 눈을 떠서 박정수를 노려보았다. 하도 먼지를 들이마셨더니 성대가 갈가리 찢어진 것 같았다.

있는 힘껏 소리를 쥐어짜서 말했다.

“하지 마.”

박정수가 미간을 콱 찡그리고 내 멱살을 잡았다.

“뭐래. 씨발. 말할 정신은 있냐?”

“하지, 말라고.”

“맞기 싫으면 맞을 짓을 하지 말든가.”

“나 말고. 현오….”

“하.”

박정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내 뺨을 한 번 더 후려쳤다. 아까 때린 쪽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고였다.

“뭐? 현오? 이 새끼가 씨발. 주제도 모르고. 덜 맞았지?”

박정수가 이를 악물더니 벌떡 일어나 발로 내 복부를 갈겼다.

“어억….”

나는 상체를 구부리며 피를 뱉었다. 오른쪽 눈꺼풀이 마구 경련하는 게 느껴졌다. 너무 아팠다.

“일 년 동안 안 맞고 사니까 심심했나 본데. 야, 일어나.”

박정수가 발끝으로 내 뺨을 툭툭 쳤다.

“일어나라니까.”

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바닥을 벅벅 긁는 게 전부였다. 박정수가 신경질 내며 내 멱살을 잡아 억지로 나를 일으켜 세웠다.

“허억….”

일어서자마자 복부가 아까보다 배로 아팠다. 잇따르는 통증에 눈앞이 흐려졌다. 박정수가 나를 질질 끌고 가며 화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씨발. 뭐, 현오? 김현오 그 자식이 조금 잘 대해 주니까 친구라도 된 거 같았냐? 좆도 모르는 새끼가. 네가 뭔데. 너 김현오 뒤에 숨어서 나 무시했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박정수가 옥상 난간 앞으로 나를 데려갔다. 내 뒷덜미를 꾹 붙잡아 내 몸을 반쯤 난간에 걸쳐 놓았다. 허공에서 불어닥치는 바람이 매서웠다. 상체가 자연스레 아래로 향했고 눈앞에 아득한 땅바닥이 보였다. 발끝이 살짝 떠 있었다. 박정수가 손을 놓는다면 이대로 추락사하고 말 것이다. 갑자기 온몸이 덜덜 떨렸다. 입에서 침이 떨어졌다.

“야. 박정수. 왜 그래.”

박정수의 친구들이 근처에 다가왔다. 살짝 당황한 목소리였다.

“뭐. 너희는 가만히 있어.”

박정수가 내 뒷목을 더 거세게 움켜쥐고서는 나에게 속삭였다.

“겁먹었네.”

“…….”

“살고 싶어?”

나는 박정수의 눈을 노려보았다. 박정수가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게 웃긴가. 날 미친 듯이 패고 옥상 난간에 걸쳐 놓는 이런 짓이…. 내 고통이 쟤에게는 흥밋거리일 뿐이다.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너는 내가 왜 그렇게 싫은데? 억울했다.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이 돼지 새끼를 어떻게 족쳐야 잘 족쳤다고 소문이 날까.”

박정수가 행복한 고민을 하듯이 웃었다.

“그래. 여기서 옷 다 벗고 기어 다니면서 나한테 죄송하다고 해 봐.”

“…뭐?”

“어때. 그거 동영상 찍으면 존나 웃기겠다. 그치?”

박정수가 낄낄대며 자기 친구들한테 턱짓했다.

“야. 얘 바지 좀 벗겨 봐.”

“와. 너 내 친구지만 존나 악질이다. 쟤 저러다 자살하는 거 아냐?”

“자살하면 나야 좋지. 학교에서 이 새끼 썩은 면상 더 안 봐도 되고.”

뒤에서 누군가의 손이 내 엉덩이 쪽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우악스럽게 내 바지를 잡아당겨 벗기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부릅뜬 채 박정수를 바라보았다.

“하지, 하지 마.”

“왜? 그럼 나 손 놓는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박정수의 희번덕거리는 눈알과 땅바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내 바지와 팬티가 다 벗겨졌다. 맨 살갗에 닿는 겨울바람이 칼 같았다. 나는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내 울음을 보며 박정수는 웃었다.

“야. 이 새끼 우는 거 봐.”

너무 춥고 너무 아팠다.

“살 뒤룩뒤룩 찐 거 봐. 존나 토 쏠린다. 정육점 돼지 같아.”

“얘 오줌 싸는 거 아니야?”

“으.”

“살에 다 파묻혀 있는데 존나 웃긴 게 자지는 크네.”

“오. 야, 김찬이. 좀 쓸 만하다?”

“뭘 쓸 만해. 쟤가 저거 어디 놀릴 기회나 있겠냐.”

세 명이 내 헐벗은 다리와 엉덩이를 보고 나를 품평했다. 나는 도살되어 등급이 찍히기를 기다리는 살코기가 된 기분이었다. 죽고 싶었다. 난간에 걸쳐 있는 배 부분은 이제 아프다 못해 감각이 없었다.

나는 애처럼 계속 울었고 눈물과 콧물 때문에 숨이 막혔다. 저 멀리 보이는 운동장에는 애들 몇 명이 다니기 시작했다. 급식실 갔다가 운동하려는 애들일 테다. 저 애들이 나를 보기를, 그래서 이곳에서 날 구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다가 금방 아무도 날 발견하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치욕은 영영 비밀로 하고 싶었다. 누군가 날 보고 선생님을 불러 오면 어떻게 될까. 내일이면 곧 전교에 소문이 퍼질 것이다. 3반 그 돼지 새끼가 옥상에서 발가벗고 처맞았대…. 애들은 나를 동정할까. 안타까워할까. 아니, 대부분은 재미있어 할 것이다. 나를 흥밋거리 삼을 것이다. 급식을 먹거나 쉬는 시간에 떠들 때, 날 심심풀이 화제로 올릴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여기서 뛰어내려 죽고 싶었다. 박정수는 여전히 즐거워하며 손바닥과 주먹으로 내 엉덩이를 후려치고 있었다. 나는 박정수에게서 벗어나려 몸을 버둥거렸다.

“씨발. 이 새끼가 왜 이래. 떨어져 뒈지려고?”

순간 몸이 휘청이며 상체가 아까보다 더 지면 쪽으로 가까워졌다. 온몸의 장기가 거꾸로 서며 토가 나올 것 같았다. 머리통에 피가 쏠리고 눈물이 더 났다. 무서웠다. 죽는 것도, 이대로 박정수에게 농락당하는 것도, 누군가가 날 구해 주는 것도, 그 모든 게 다 무서웠다. 이런 일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때 저 멀리서 공을 차고 있던 애가 내 쪽을 돌아보는 것 같았다. 걔가 잠시 우뚝 서서 가만히 이쪽을 응시했다. 나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얼굴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거리였다. 그런데 왜인지 현오 같았다.

쿵! 박정수가 나를 난간에서 치우고 바닥에다 패대기쳤다. 나는 쿨럭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박정수가 자기 친구한테 말했다.

“야. 내가 찍을 테니까 와이셔츠 좀 벗겨 봐.”

“으. 존나 징그러워.”

질색하면서도 개자식들은 박정수의 말을 들었다. 나는 걔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버둥거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내 조끼가 벗겨지고 와이셔츠 단추가 하나둘씩 풀어졌다. 추워서 몸이 덜덜 떨렸다. 순식간에 나는 나체가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그저 아까보다 더 크게 우는 것뿐. 초록색 옥상 바닥이 내 침과 눈물과 피로 더러워졌다.

내가 성기를 손으로 가리고 몸을 웅크리자 박정수가 발로 나를 툭툭 찼다.

“야. 일어나서 나한테 기어와 봐.”

박정수 손에 들려 있는 핸드폰이 무서웠다. 내 몸이 저기에 담기고 있는 걸까. 나는 겁먹은 채 박정수를 올려다보았다.

박정수가 명령했다.

“얼른.”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여기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이 시간이 끝나기는 할까.

“어? 네가 잘만 하면 얼굴은 안 나오게 찍을게. 어때?”

박정수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굳어 있었다. 내가 한참 동안 가만히 있자 박정수가 흥이 식었는지 얼굴을 구겼다. 나에게 다가와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말을 안 듣네.”

박정수의 핸드폰이 내 몸 곳곳을 찍었다. 날 훑어 대는 모욕의 시선이 나를 짓뭉갰다. 박정수는 나를 인간으로 대하고 있지 않았다. 내가 가축인 것처럼 몸 이곳저곳을 뒤집고 쿡쿡 찌르고 비웃었다.

“돼지 자지도 찍어 볼까.”

박정수가 낄낄댔다. 내 성기 쪽으로 핸드폰을 가져다 대려 했다. 나는 박정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어깨를 비틀었다.

“하, 하지 마.”

“가만히 좀 있어. 또 맞기 싫으면.”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차라리 맞는 게 낫겠다. 나는 다리 사이를 오므리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성기만은 찍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곧 박정수의 친구들이 내 팔을 붙잡아 누르려 했다.

“하지 마!”

있는 힘껏 악 소리를 내질렀으나 개자식들에게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아까 내 몸이 걸쳐져 있던 난간을 힐끔 바라보았다.

떨어져 죽자. 이 모든 게 끝나면 뛰어내리러 가자.

내가 체념하듯 다짐하였을 때다. 쾅, 옥상 문이 열렸다. 박정수가 깜짝 놀라 문 쪽을 돌아보았다.

“뭐 하냐.”

나는 꼴사납게 울던 것을 멈추었다. 익숙한 목소리, 현오였다.

“김현오. 여긴 어쩐 일이냐.”

박정수가 애써 태연하게 일어섰다. 현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맨몸을 최대한 웅크리며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아프고 수치스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겁쟁이처럼 가만히 있었다.

현오가 말했다.

“박정수. 너희 여기서 뭐 하냐고.”

“네가 신경 쓸 바 아닌 거 같은데.”

곧 내 머리 위로 퍽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숨만 내쉬었다.

아까 운동장에서 본 사람이 정말 현오였다. 현오가 나를 보았고 나를 구해 주러 왔다. 기쁘면서도 끔찍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박정수가 비명 질렀다.

“그, 그만! 그만!”

그에게 아까 전 의기양양하던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윽고 세 명이 옥상 밖으로 달려가는 발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꾹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추워서 입술과 어깨가 덜덜 떨렸다. 툭. 내 몸 위로 현오의 겉옷이 떨어졌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돌려 위를 바라보았다.

“괜찮냐.”

“현오야….”

현오가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내 옷가지를 주워 왔다. 내 머리맡에 쪼그려 앉더니 옷을 내게 건넸다. 현오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춥겠다.”

현오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나는 숨이 콱 막혔다.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 내 온몸에 넘실거렸다. 눈물 때문에 내내 눈앞이 흐렸는데 현오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현오의 숨소리가 오케스트라의 현악기처럼 웅장하게 들렸다. 현오의 눈동자는 혜성처럼 밝았다.

내가 자주 하던 상상이 현실이 된 것 같았다. 고요하고 시간이 멈춘 자그마한 공간. 그곳에는 오로지 나와 현오만이 있다. 아무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다. 세계는 곧 현오고 현오는 곧 세계다.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영영 이대로 현오만 바라보며 현오하고만 이야기하며 살고 싶었다.

현오를 사랑하고 싶었다.

“얼른 입어. 안 볼 테니까.”

현오가 몸을 내 반대편으로 돌렸다.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옷을 집어 들었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폐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옷 입는 것까지 도와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고 엉성하게나마 옷을 챙겨 입었다.

“다 입었어?”

“응….”

현오가 그제야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걸을 수 있냐.”

“모르겠어.”

“구급차 부르자.”

“하지만….”

“왜?”

“그러면 다 알게 되잖아.”

현오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현오를 보면 눈물이 났다.

“그건, 그건 싫어. 나 영상도 찍혔는데….”

현오가 잠시 침묵하다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거 박정수 핸드폰이지.”

“어….”

“걔가 도망가면서 흘리고 갔어. 내가 가다가 하수구 같은 데 버리지, 뭐. 영상은 걱정하지 말고. 우선 병원부터 가.”

현오가 접힌 내 옷깃을 펴 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데려다주지는 못해. 지금 나 일이 생겼거든. 빨리 가야 해. 사실 좀 정신이 없어.”

“…….”

“구급차 부르고 병원 가서 치료받자. 나중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

“응….”

현오가 자기 핸드폰으로 119에 전화를 걸었다. 차분하게 주소를 말하고 신고를 마치고서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현오가 다른 인종처럼 보였다. 나와 같은 사람이라면 저렇게 멋질 수 없을 것이다.

“김찬이. 나는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현오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초조해했다. 나는 옥상에 쓰러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여기는 추우니까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리자.”

현오가 나를 부축해서 옥상 문 안쪽에 앉혀 주었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가쁘게 호흡했다. 현오가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려 했다. 나는 다급하게 현오를 불러 세웠다.

“혀, 현오야. 잠깐만.”

현오가 멈칫하고 나를 돌아보았다.

“…고마워.”

“어. 그래.”

“저기, 왜 구해 주러 왔어?”

“글쎄.”

현오가 잠시 고민하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별일 아니라는 투였다.

“딱히 이유는 없는데. 옥상에 너 있는 거 봤거든. 위험해 보여서.”

“응….”

“그 상황에 구하러 오지 않는 게 이상한 거지.”

이 세상에는 아무 이유 없이 휘두르는 폭력이 만연하다. 그러나 다른 면에는 아무 이유 없는 구원도 있었다. 나는 그걸 현오를 통해 처음 알았다. 현오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너의 이유 없는 다정함이 나를 살렸다고. 너만큼 멋진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고. 너를 사랑하고 싶다고.

그러나 말할 수 없었다. 거창한 말을 하기엔 지금의 나는 너무 초라했다.

“…고마워. 무서웠어.”

“당연히 무서웠겠지.”

“응. 다른 사람들이 몰랐으면 좋겠어.”

“난 말 안 할 거야. 너도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마. 네 마음대로 해.”

현오가 한 발자국 내려가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어쨌든 살아야지.”

멀어지는 현오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타닥타닥. 멀어지는 발소리에 집중했다. 현오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나는 눈을 꾹 감았다.

‘어쨌든 살아야지.’

그 말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어쨌든 살아야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왔다. 나는 반쯤 정신이 날아가 있었다. 들것에 실려 갔고 전교생이 창문으로 구급차를 구경했던 것 같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내 귓속을 괴롭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몸은 구급차에 태워져 병원으로 이송됐다.

그다음에는 기억이 흐릿하다. 치료를 받고 엄마가 오셨고 아마도 우셨던 것 같다. 온몸에 타박상이 남았고 갈비뼈는 부러졌다.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링거를 맞고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다.

내가 정신을 차리자 아빠도 와 있었다. 아빠는 열을 내며 이것저것 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 누구한테 맞은 거냐. 그동안 왕따를 당하고 있었느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서 담임도 나를 찾아왔다. 아빠와 똑같은 질문을 했다. 이번에도 침묵했다. 엄마는 계속 울며 전학 가자는 말만 반복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말한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 박정수가 나를 더는 괴롭히지 않을까. 걔가 한 것만큼의 벌을 받게 될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도 내가 당한 치욕을 모르기를 바랐다. 박정수를 벌하고 싶은 마음보다도 당장은 그게 더 컸다.

나는 대답을 내내 회피하다가, 담임에게 딱 한 가지 물어보았다.

“선생님. 혹시 현오는 몇 반 됐어요?”

담임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찬이야. 현오가 괴롭혔니?”

“아니에요. 현오가 저 발견하고 119에 연락한 거예요.”

현오가 보고 싶었다. 제대로 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그 무렵 나는 병원 침대에 누워서 현오 생각만 했다. 박정수가 저지른 끔찍한 짓이 떠오를 때마다, 현오에 대한 기억으로 모든 걸 덮었다. 현오는 달콤한 진통제 같았다.

“현오, 전학 갔어.”

“네?”

담임의 말을 듣자 갑자기 배가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전학이라니요? 왜요?”

“글쎄. 현오네 사정이 있겠지.”

“여, 연락처는요? 고맙다고 꼭 해야 하는데….”

담임이 현오의 핸드폰 번호를 알려 주었다. 나는 곧장 전화를 걸어 보았다. 없는 번호라고 떴다.

“선생님. 잘못된 번호래요. 없대요.”

숨이 턱턱 막혔다. 담임이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걸로 연락됐는데. 왜 갑자기 없앴을까.”

“현오 어디로 전학 갔어요?”

나는 필사적으로 담임의 손을 붙잡았다.

“마산이었나….”

“마산이요?”

열아홉의 나에게 서울 밖은 너무나도 먼 곳이었다. 마산이라니.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지역이었다. 아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현오가 왜 거기에 있는 걸까.

담임이 떠나고서 엄마는 내 뺨을 쓰다듬으며 미안하다고 전학 가자고 또 속삭였다. 조금 전까지는 전학 가기 싫다며 고집 피웠으나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현오가 없다. 현오가 떠났다. 나아가던 몸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나는 처음으로 며칠 밤낮을 드러누워 독감을 앓았다. 열이 펄펄 끓고 입술이 사포처럼 거칠어졌다. 아무것도 먹기 싫었다. 엄마는 울었고 아빠는 화를 내다가 다시 일하러 중국에 갔다.

죽을 것 같았다. 불구덩이 속을 더듬거리며 현오만 찾았다.

어쨌든 살아야지. 현오의 목소리가 윙윙거렸다. 나는 가물거리는 정신 속에서 그 말 하나로 나를 다잡았다. 나아서 현오를 찾으러 갈 것이다. 마산에 갈 것이다.

멀쩡해졌을 땐 이미 3월이 된 후였다. 엄마는 전학 수속을 다 마쳐 놓았다. 나는 박정수도 현오도 없는 학교에 나갔다. 얼마 후 현오가 전학 갔다던 학교에 전화를 해 보았다.

“혹시 그 학교에 김현오라는 학생 있나요?”

“그런 학생 없는데요.”

모아 둔 용돈으로 주말에 마산에 내려갔다. 마산은 내 예상보다 더 큰 도시였다. 길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현오를 만날 수 없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에서 내내 울었다. 나는 이제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았다. 현오를 처음 봤을 때부터 왜 그의 얼굴을 눈으로 좇았는지. 밤마다 왜 현오의 꿈을 꾸는지. 꿈에서 깨고 나면 왜 항상 그리도 애달팠는지. 현오가 없어지니 왜 이렇게 죽고 싶은지. 어쨌든 살아야지, 하면서도 너 없이 내가 어떻게, 하는 마음이 드는지.

나는 이미 현오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오는 이 세상에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김현오는 내가 만들어 낸 허상이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음이 무너질 때마다 나는 현오의 이름을 다시 불러 보았다. 김현오. 잊지 않으려고. 딱딱한 밥알을 씹듯이, 꼭꼭.

그의 이름 한 음절마다 다짐을 새겨 넣었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현오가 베풀었던 이유 없는 구원을 돌려주겠다. 그를 사랑하겠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