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 김현오, 스물네 살, 잊히지 않는 한여름 (6/13)

05. 김현오, 스물네 살, 잊히지 않는 한여름

내가 손님이 막 떠난 테이블을 닦던 중이었다. 윤아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빠. 찬이 씨랑 동거하게 됐다며?”

“…? 뭔 소리야?”

너무 당황해서 사레들릴 뻔했다. 동거라니. 절대 아니다. 그냥 방 한 칸 잠시 빌리는 것뿐이지. 동거라고 하니까 기분이 아주 이상해졌다.

“누가 그래.”

“사장님이 그러시던데.”

“오해야.”

“와. 근데 찬이 씨네 집이 좋긴 한가 봐. 요새 얼굴이 확 폈네.”

윤아는 별로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저 내 상황이 신기하고 재미있나 보다.

“그런데 오빠 원래 집은 어쩌고? 왜 둘이 살아?”

“아니, 오해라니까. 그냥 여름 동안만 걔가 잠시 방 빌려주는 거라고.”

“아, 뭐야.”

윤아의 얼굴에 급격히 흥미가 사라졌다.

“넌 김찬이한테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

“신기하잖아. 오빠한테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게. 친구라고는 한 명도 없는 줄 알았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신기할 만도 하지. 나도 내가 김찬이랑 이런 사이가 된 게 신기하니까.

김찬이네 집에서 지낸 지 6일이 흘렀다. 이틀간의 테스트 기간이 지나고서도, 나는 그 집을 떠나오지 못했다. 놀라울 정도로 불편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거절할 이유라고는 하나뿐이었다. 김찬이와 지나치게 가까운 사이가 될까 봐. 그래서 김찬이가 들러붙을까 봐. 그러나 괜한 걱정이었다.

김찬이는 정말로 바빠 보였다. 김찬이와 십 분 이상 마주한 적이 없었다. 내가 일을 끝마치고 집에 가면 새벽 두 시쯤이었다. 그때 잠깐 얼굴 보고 인사하는 게 전부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김찬이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대신, 포스트잇으로 제 흔적을 남겨 놓았다. 주로 이러이러한 반찬을 해 놓았으니 데워서 먹으라는 내용이었다. 우렁 각시가 따로 없었다.

이틀이 지났는데도 김찬이는 계속 집에 있을 거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나도 먼저 여길 떠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자연스레 그 집 작은방에 머물게 되었다.

“근데 여름 끝나면 그 집 나가는 거야?”

윤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생활비 내고 같이 살지. 어차피 남는 방이었다며.”

“뭐 하러.”

“아니. 오빠 얼굴이 진짜 확 좋아졌다니까. 원래는 다 죽어 가는 사람 같았는데.”

“내가?”

“맨날 얼굴 이렇게 찡그리고 그랬잖아. 처음 봤을 때 인상 사나워서 겁먹었다구.”

윤아가 미간에 일부러 주름을 만들어 보였다. 나는 괜히 윤아에게 툴툴댔다.

“이상한 소리 말고 얼른 계산하러 가.”

윤아가 사라지고 나는 슬쩍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매만졌다. 김찬이네 터가 좋은가. 사장님과 윤아 모두 내 안색이 좋아졌다고 한다. 하긴. 쾌적한 방에서 푹 자고 잘 먹고 있으니까. 왠지 김찬이에게 사육당하는 기분이다.

오늘은 토요일 밤이라 마감이 조금 늦어졌다. 대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는데 김찬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혀노야 언제 와?

왜? 다 끝났음. 마무리 청소 중

답장하자마자 이번에는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당황하며 왼쪽 어깨와 목 사이에 핸드폰을 끼웠다.

- 혀노야.

“너 목소리가 왜 그러냐?”

- 나 술….

징그럽게 웬 애교야. 술 마셨다는 건가. 김찬이의 혀가 평소보다 반은 짧아진 듯했다.

“말투 똑바로 해라.”

- 미아안….

“너 지금 어딘데.”

- 집 가는 중이야.

“진상 부리지 말고 얼른 들어가.”

- 웅. 근데, 혀노야.

“왜.”

- 혀노야, 혀노야.

“아, 왜 자꾸 불러!”

- 미아안….

얘 진짜 술 취했나 보다. 큰일이다.

“끊고 얼른 집 가라고.”

- 웅.

“귀여운 척하지 마라.”

- 내가? 나 취핸나바.

환장한다. 나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너 내가 집 들어갈 때까지 술 안 깨어 있으면 죽는다.”

김찬이가 시무룩해져서는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전화를 확 끊어 버리고 대걸레질에 속도를 더했다. 어디서 뭘 얼마나 마셨길래 저 상태가 돼? 정신 빠진 놈. 일주일 전에 위 아프다고 그 난리를 쳐 놓고.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오늘 교수님과 선배들이랑 술자리가 있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이례적으로 빠르게 청소를 마치고 가게를 나왔다.

집에 도착하니 김찬이가 현관까지 나와서 나를 마중했다. 얼굴부터 목까지 온통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아씨, 술 냄새.”

“현오야!”

다행히 아까보다 김찬이의 혀는 조금 길어진 것 같다. 나는 인상을 쓰며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김찬이가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이러지 말고 얼른 씻고 자라.”

“나 내일 학교 늦게 가도 되는 날이야.”

“그래서 뭐.”

“현오야. 게임 할래?”

“뭔 게임.”

내가 신경질적으로 바라보자 김찬이가 움찔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게임 한 판만 하면 안 돼? 우리 집에 플스 있어.”

“내가 왜 너랑 게임을 해야 하는데.”

“한 판만, 한 판만 하자. 그동안 제대로 얘기한 적도 없는데….”

날 바라보는 눈이 애처로웠다. 김찬이가 내 소매 끝을 붙잡더니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한숨을 쉬며 김찬이를 따라갔다. 그래, 뭐 뽀뽀 한 번 하자는 것도 아니고 게임인데.

게임이라면 나도 좋아한다. 요즘엔 별로 못하고 있지만. 고물 노트북으로는 게임이 안 돌아간다. 가끔 피시방에서 몇 판 하는 게 전부였다.

소파에 앉자 김찬이가 거실장을 뒤적여 게임 타이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저 안에 뭐가 있나 했더니 게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게임 오타쿠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김찬이가 내 옆에 앉더니 게임기를 건네주었다. 나는 슬쩍 엉덩이를 움직여 김찬이에게서 조금 더 떨어졌다.

“야. 딱 한 판만 하고 자는 거다.”

“응.”

우리가 한 게임은 <철권>이었다. 어렸을 때 오락실에서 온갖 버튼을 연타하던 추억이 떠올랐다. 김찬이가 이것저것 알려 주면서 해 보라고 했다. 몇 판은 혼자 연습해 봤다. 좀 잘하는 것 같아서 으쓱해졌다. 그러고 바로 김찬이와 붙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넋이 나갔다.

“이거 뭐야. 야, 그만. 아, 쫌! 그만해 보라고.”

김찬이의 캐릭터가 나를 무자비하게 코너로 몰아갔다. 내가 반격할 틈도 없이. 김찬이의 콤보가 끊이질 않았다. 당황한 나는 게임기를 엄지로 마구 두드렸다.

“아씨.”

K.O 버튼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김찬이를 돌아보았다. 김찬이가 해맑게 웃었다. 저 자식이.

“야. 한 판 더 해.”

“응.”

나는 게임기를 두 손에 꼭 쥐었다. 아무래도 김찬이는 남는 시간에 게임만 한 게 틀림없었다. 김찬이는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능수능란하게 캐릭터를 조작했다. 연속기가 들어가는 패턴을 모두 외운 것 같았다.

“아씨. 야. 다시 해!”

진짜 너무하다. 나는 초보자인데. 그럼 좀 봐주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내 캐릭터는 무자비하게 맞고만 있었다. 불쌍한 화랑…. 그래도 몇 판이 지나자 나도 간간이 김찬이에게 발차기를 날릴 수 있게 되었다.

“야. 김찬이. 빨리 좀 골라. 다시 하게.”

점점 이마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손바닥에 땀이 찼다. 정신을 차려 보니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물론 내가 이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누르며 게임기를 김찬이 쪽으로 내팽개쳤다.

“나 물 한 잔 먹고 올 테니까 딱 기다려라.”

“현오야. 괜찮아?”

“어. 완전 멀쩡하거든?”

김찬이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나는 씩씩대며 주방으로 갔다.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서 다시 거실로 왔을 때였다. 소파에 커다란 흰 덩어리가 웅크려 있었다. 김찬이였다.

그제야 김찬이가 술에 진탕 취했었다는 게 떠올랐다. 게다가 지금은 새벽 네 시를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김찬이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소파에 쓰러진 모양이었다. 아니, 쟤는 졸리면 졸린다고 말을 하지. 나는 잠시 바짝 굳은 채로 서 있었다. 김찬이가 자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새빨갛던 피부는 어느새 하얗게 돌아와 있다. 분홍빛 입술은 살짝 벌어졌고, 그 사이로 고른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높고 단단하면서도 끝은 둥근 코. 기다란 속눈썹. 잡아당기면 모차렐라 치즈처럼 쭉 늘어날 것 같은 하얀 뺨.

나도 모르게 그의 코앞까지 다가가 김찬이의 이곳저곳을 훑고 있었다. 미쳤나. 나는 손바닥으로 내 뺨을 살짝 후려쳤다. 하지만 좀처럼 멍한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소파에서 자면 불편할 텐데. 옷도 안 갈아입었네. …역시 내가 깨워야겠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김찬이. 일어나.”

“…….”

김찬이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떡하지. 내 손이 허공에서 움찔거렸다. 몸을 흔들어서 깨워야 하나. 김찬이에게 손을 대려니 갑자기 긴장되었다. 마른 입술을 이로 잘근잘근 깨물다가, 이윽고 김찬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야. 일어나. 옷 갈아입고 자.”

“으음….”

김찬이가 묘한 소리를 내며 살짝 뒤척였다.

“일어나라니까.”

두세 번 흔들었을 때야, 김찬이가 눈을 반짝 떴다. 김찬이는 어리둥절해하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갑자기 김찬이와 훅 가까워졌다.

“아, 현오야.”

김찬이의 어깨 위에 놓여 있던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서로 콧잔등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동그랗고 순한 눈동자가 바로 눈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딱 키스할 때의 그 각도였다.

침착해. 손을 떼고, 고개를 돌리고, 두 발자국 물러나자… 라고 머리가 말했다. 몸은 듣지 않았다. 너무 당황해서 그대로 굳어 버린 탓이다. 김찬이는 잠이 덜 깬 표정으로 지그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내 볼 근육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왜, 왜 저렇게 쳐다보지…. 뭐 하려고.

깜빡. 느리게 김찬이의 눈꺼풀이 움직였다. 다시 드러난 눈동자는 새까맣고 투명했다. 서클렌즈를 낀 것처럼 유달리 큰 눈동자. 순간 김찬이가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감상이 든 나에게 당황해서 몸이 더 굳어 버렸을 때였다.

김찬이가 말했다.

“미안. 잠깐 졸았네.”

얼음, 땡. 먼저 움직인 건 김찬이였다. 김찬이가 덤덤하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고 일어났다. 나는 황급히 김찬이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 냈다. 심장이 이상하게 벌렁거렸다.

“깨워 줘서 고마워. 현오도 얼른 자.”

“어….”

김찬이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웃더니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단정한 걸음새였다. 탁. 욕실 문이 닫혔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긴장을 풀고 소파에 주저앉았다. 손바닥으로 가슴팍을 두어 번 정도 세게 두드렸다. 갑자기 속이 콱 막혔다.

뭐야. 괜히 긴장했네. 제기랄. 왠지 억울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찬이는 날 좋아한다고 했다. 고백을 들으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지 않나? 내가 상대를 좋아하지 않아도 말이다. 아니, 나만 이런 걸까.

김찬이는 정말로 고백한 걸 잊은 듯이 행동했다. 아까 같이 키스 직전의 자세에서 어떻게 태연할 수가 있는지. 날 좋아한다면 조금의 동요라도 보였어야 하는 거 아닌가. 김찬이는 나한테 쥐뿔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내가 쟬 좋아하는 것 같다.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찰 때였다. 샤워를 마친 김찬이가 밖으로 나왔다. 김찬이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며 나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잘 자. 다음에 또 게임 하자.”

아주 담백하고도 상쾌한 표정이었다.

“…너랑 다신 안 해.”

“하하.”

김찬이는 입 벌려 웃더니 그대로 제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맥이 빠져 한참 동안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

더위는 도통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올해 여름은 유달리 지독하고 긴 느낌이다. 나는 벌써 2주 넘게 김찬이네에서 지내고 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평화롭고 단조로웠다. 이상한 일이라고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김찬이는 연기의 달인이었다. 2주간 한 번도 고등학교 때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나를 좋아한다는 뉘앙스조차 풍기지 않았다.

나는 점점 김찬이의 연기에 속아 넘어갔다. 정말로 우리가 이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 같았다. 특별함이라고는 없는 관계. 그저 담백하고 평범한 친구 사이.

김찬이가 간간이 먼저 하는 연락도 별거 없었다. 처음에는 모조리 씹어 주마 다짐했지만 이내 그럴 필요를 못 느꼈다. 대부분 집에 언제쯤 오느냐는 간단한 용무뿐이었다.

이쯤 되니 슬슬 헷갈렸다. 처음에는 날 꼬실 생각 없다는 김찬이의 말을 백 프로 믿지 않았다.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다. 언젠가는 음흉한 속셈을 드러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정말로 김찬이는 나를 안 좋아하게 된 것 아닐까. 같이 지내보니 별로였나 보지. 아니면 내가 게이가 아닌 걸 확실히 알았으니 포기한 걸지도.

같이 살다 보면 의도치 않게 몸이 닿는 순간이 있었다. 그때마다 화들짝 놀라는 건 나뿐이었다. 날 향한 김찬이의 눈에서 긴장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늘 평온했다. 아무리 봐도 나를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은 아니었다.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이지만, 나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어쩔 줄 몰라 했는데.

그간 김찬이는 아무 생각도 없는데 내가 괜히 경계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점차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김찬이가 바로 옆에 앉아 있어도 딱히 불편하지 않았다. 김찬이는 늘 무해한 식물처럼 놓여 있었다.

연기인지 정말로 그런 쪽으로는 관심이 식은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편했다.

오늘은 토요일 밤이다. 그나마 김찬이의 얼굴을 오래 볼 수 있는 날이다. 나는 가게 마감을 하고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김찬이에게서 카톡이 와 있었다.

언제 와?

지금 가는 중.

나는 손바닥으로 배를 매만졌다. 묘하게 허기가 졌다. 유달리 정신없고 바쁜 하루였다. 어느 과에서 단체 예약을 하는 바람에. 마감도 평소보다 조금 더 늦어졌다. 아까 가게에서 밥을 간단하게 먹었지만 금방 배가 꺼져 버린 모양이다. 나는 텁텁한 새벽 공기 사이를 가로지르며 핸드폰을 두드려 답했다.

근데 배고파.

답을 하자마자 김찬이가 바로 전화를 걸어 왔다.

“어. 왜.”

- 야식 시켜 놓을까?

“너 안 자?”

- 오늘은 조금 늦게 자도 돼.

“어차피 야식 시켜 봤자 나 혼자 먹잖아.”

- 같이 먹을 거야.

“음.”

- 먹고 싶은 거 말해 봐.

“그러면… 야채 곱창.”

- 술도 시켜?

“소주 한두 병만.”

전화를 끊고 걸음을 약간 빨리했다. 곱창 먹을 생각에 살짝 들떴다. 집에 도착하자 김찬이가 식탁에 식기를 세팅해 놓고 있었다.

“옷 갈아입고 나와.”

“어.”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손을 씻은 후 소파에 앉았다. 김찬이가 자연스레 내 옆으로 왔다. 우리 둘 다 무방비하게 소파에 늘어진 채 말을 주고받았다.

“오늘은 진상 손님 없었어?”

“야. 너희 학교 다니는 애들이 단체로 왔는데 완전 개판으로 해 놓고 갔어.”

“그래?”

“대학 다닌다는 놈들이 더해. 대학에서 도대체 뭘 배우는 거냐.”

김찬이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보통 쓸데없는 걸 배우지.”

“너도?”

“나도. 배워 봤자 실생활엔 쓸모없는 공부니까.”

나는 등받이에 파묻혀 있던 상체를 조금 바로 세워 앉았다.

“그런가. 근데 넌 걔들이랑 다른데.”

“그래?”

“생활을 잘하잖아. 살림도 잘하고 운동도 매일 하고.”

“현오가 좋게 봐 주니까 좋네.”

김찬이의 동그란 눈이 휘어졌다. 나는 왠지 민망해서 잠시 입을 벙긋거렸다.

“아니, 뭐…. 내가 널 딱히 좋게 봐 주는 게 아니라 다 그렇게 생각할걸.”

때마침 초인종이 울렸다. 김찬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배달 음식을 받으러 나갔다. 나는 냉큼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김찬이가 곱창을 개봉하고, 나는 소주를 잔에 따랐다. 그러고 보니 김찬이와 둘이서 술 마시는 건 처음이었다. 김찬이가 소주잔을 허공에 들어 올렸다. 김찬이가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짠.”

나는 머뭇거리다가 잔을 부딪쳤다. 술을 한 모금 마시고서 입을 열었다.

“김찬이. 근데 너 술 약하지?”

“약한가? 소주 세 병까지는 괜찮은데.”

“뭐야. 나보다 세네. 전에는 왜 그렇게 취했냐.”

“응? 아, 과 모임 있을 때? 선배들이 엄청나게 먹였거든.”

“그만 먹겠다고 해야지.”

“그러게. 그럴 걸 그랬네.”

김찬이가 순하게 웃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끔 쟤가 저런 얼굴을 할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나중에 사돈의 팔촌 보증이라도 덜컥 서 줄 것 같단 말이지.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말았다. 너무 걱정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나는 말없이 곱창을 먹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더 배고팠던 모양이다. 젓가락질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소주잔은 비워졌다가도 금방 채워졌다. 우리는 순식간에 곱창 한 접시와 소주 두 병을 다 해치웠다. 김찬이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빨리 먹었네.”

“배고파서. 너 먼저 씻어라. 내가 정리할 테니까.”

쓰레기를 정리하려고 일어서니까 순간 머리가 어찔했다. 술기운이 갑자기 확 올라왔다. 딱 기분 좋을 정도로 뜨거운 기운이 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아냐. 내가 정리할게.”

“아, 내가 한다니까.”

나는 찰싹 김찬이의 손등을 내쳤다. 그러고는 김찬이의 등을 욕실 쪽으로 꾹꾹 밀었다. 죄다 얻어먹었으니 정리는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김찬이는 약간 당황해서 나를 돌아보았다.

“현오야. 술 취했어?”

“아니.”

거짓말이다. 사실 좀 취했다. 평소라면 김찬이를 이렇게 막 만지지 않았을 테다. 나는 술 취하면 기분이 들뜨고 남한테 치대곤 했다. 김찬이는 어리둥절해하다가 마지못해 욕실로 들어갔다.

나 혼자서 부엌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발걸음이 가벼워진 기분이다. 둥실둥실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흥이 난 채 소주병을 씻어 분리수거 통에 버리고 욕실로 향했다. 마침 김찬이가 씻고 나오던 중이었다.

“다 씻었냐.”

“응.”

김찬이의 앞머리가 살짝 물에 젖어 있었다. 갓 세수한 피부는 더 투명해 보였다. 한번 만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현오야.”

어. 이상하네. 생각만 한 줄 알았는데. 언제 내 손가락이 김찬이의 뺨에 가 있었지.

“와. 피부가 좋네.”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나도 모르게 검지와 엄지로 김찬이의 볼을 쭉 잡아당겨 보았다. 예전부터 해 보고 싶었다. 역시 상상대로 모차렐라처럼 부드럽게 쭉 늘어났다. 기분 좋은 촉감이었다. 먹으면 맛있겠지. 구운 치즈처럼 고소할 테다. 김찬이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김찬이가 말했다.

“너 취한 거 같아.”

“아니라니까.”

나는 김찬이의 뺨을 놓아주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양치를 하면서는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씻고 나오자 김찬이가 거실에서 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김찬이. 운동하고 잘 거냐.”

“응. 그러려고.”

“술 더 마시자.”

김찬이가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더 마시자구?”

“이대로 자기 아쉬운데.”

“괜찮겠어?”

“왜. 나랑 마시기 싫냐?”

나는 얼굴을 구기며 투덜댔다.

“아니. 그럴 리가. 그럼 뭐 마실래? 편의점 가서 맥주 사 올까?”

“어. 안주는 그냥 대충 과자 같은 거.”

“알겠어. 잠깐만.”

김찬이는 순순히 매트를 접어 다시 구석에 넣어 놓고 일어섰다. 나는 소파에 드러누워 김찬이가 맥주를 사 오기를 기다렸다. 술을 너무 오랜만에 마셨나 보다. 소주 한 병 정도는 거뜬했던 거 같은데. 주량이 줄어든 게 분명하다. 술기운이 머리를 살살 간질였다. 몸은 후끈거렸다. 하지만 기분 나쁜 감각은 아니었다. 아직 더 먹을 수 있었다.

나는 내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아까 닿았던 김찬이의 피부가 잊히지 않았다. 한 번 더 만져 보고 싶었다. 김찬이는 잠깐 당황했으나 바로 덤덤해했다.

또 저런다. 내 한 가지 추측에 근거가 생겼다. 역시 김찬이는 이제 날 좋아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날 좋아했다면 내가 만졌을 때 얼굴이 빨개지지 않았을까. 걔는 툭하면 얼굴이 사과가 되고는 하니까. 아까는 피부 변화가 전혀 없었다. 딱히 부끄럽거나 하지 않았단 거지.

고백할 땐 그렇게 절절하더니. 게이가 아니라 하니 깔끔하게 정리한 건가. 이렇게나 빠르게?

물론 절대로 아쉬워하는 건 아니다. 난 김찬이가 나를 좋아하지 않기를 바라 왔다. 그저 조금 궁금할 뿐이다. 나한테 천만 원도 덜컥 빌려줄 기세로 들이대던 놈이 갑자기 이러니까. 같이 살면서 조금의 껄끄러움은 있겠지 싶었는데, 그런 게 전혀 없으니까. 김찬이는 정말로 나를….

아니, 내가 왜 이런 걸 고민하지?

띠리릭.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김찬이가 맥주 여러 캔과 과자를 들고 돌아왔다. 나는 조금 전까지 했던 고민을 미뤄 두고 김찬이를 맞이했다.

우리는 거실 테이블에 술과 안주를 늘어놓고 소파에 앉아서 먹기로 했다. 김찬이가 맥주 한 캔을 따서 나에게 건넸다. 목이 굉장히 말랐다. 맥주 캔을 냉큼 받아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김찬이는 나를 바라보며 맥주를 한 모금씩 홀짝거렸다.

순식간에 캔을 다 비웠다. 나는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아까보다 몸이 더 뜨거워진 것 같다. 좀 천천히 마실 걸 그랬나. 눈앞이 빙글거렸다. 빈 맥주 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몸이 이상해.”

“피곤하지. 잘래?”

김찬이의 말대로 이만 자러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슬쩍 들었으나, 나는 고집을 부렸다. 이 들뜸을 조금이나마 오래 누리고 싶었다.

“아니. 그냥 다리만 조금 무거운 거야.”

나는 막무가내로 소파에 누워 다리를 쭉 뻗었다. 당연히 김찬이의 공간을 침범하게 되었다. 김찬이의 허벅지 위에 다리를 툭 올려놓았다. 김찬이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비틀어 김찬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 불편하냐.”

“괜찮아.”

또 저 순한 웃음. 내가 말랐다 해도 체격이 작지는 않다. 키도 백팔십 가까이 된다. 당연히 무겁고 불편할 텐데. 쟤는 왜 아무런 불만도 말하지 않을까. 김찬이는 늘 저렇다.

나를 보고 긴장하거나, 성적으로 흥분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세상 누구보다 다정하게 대해 준다. 날 헷갈리게 한다. 문득 김찬이는 착한 사람이라서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저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갑자기 열이 오른다. 나도 모르게 말이 툭 나와 버렸다.

“너 그러면 안 돼.”

“현오야. 너 혀 꼬였어.”

“내가? 네 고막이 꼬인 거겠지.”

“응….”

“너는 너무 순해 터졌어. 그러면 못된 놈들한테 당해.”

“그런가?”

김찬이가 소리 내어 웃는다. 방긋거리는 얼굴이 어린애 같았다.

“누가 짜증 나는 짓을 하면 ‘싫어요, 안 돼요,’ 해야지.”

“응. 그럴게.”

“넌 너무 착하게 생겼어. 진짜 그러다가 큰일 날 거 같아.”

김찬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데.”

“맞아.”

김찬이가 미세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김찬이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까맸다.

“내가 그렇게 순해 보여?”

“어.”

“현오야.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본대.”

“뭔 소리야.”

“네가 나를 그렇게 보는 거야.”

김찬이가 손으로 제 입꼬리를 매만졌다.

“이것 봐. 입꼬리가 처져 있지. 가만히 있으면 이것 때문에 우울하거나 차가워 보인대.”

“누가 그래?”

“다른 사람들이.”

“전혀 안 그런데.”

“네가 날 착하게 봐 주는 거야, 현오야.”

대화가 머릿속을 빙빙 헤집었다. 갑자기 뜨거운 감정이 왈칵 일었다. 술기운 때문일 것이다. 왜 쟤는 자꾸 아니래? 그냥 착한 거라고 해. 나는 모두에게 이렇다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구는 놈이라고! 짜증이 난다. 나는 드러누워 있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내가 그렇게 보는 게 아니라 네가 착한 거라니까!”

내가 씩씩대는데도 김찬이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내가 우습나.

“그래. 너한테는 계속 착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

“노력하고 있어. 그렇게 봐 줘서 기뻐.”

나는 엉덩이를 움직여 조금 더 김찬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김찬이와 무릎이 부딪쳤다. 김찬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주 태연하고 평온한 표정이었다. 이것 봐. 피부가 여전히 하얗다. 전혀 빨개지지 않잖아.

나는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순간 김찬이의 저 포커페이스를 무너뜨려 보고 싶어졌다. 자꾸 나 혼자만 신경 쓰는 게 억울했다. 더는 헷갈리기 싫다. 감정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맨정신이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질문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되냐.”

김찬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 날 좋아한다며.”

김찬이의 얼굴에 어색한 웃음이 떠올랐다.

“현오야. 그건 갑자기 왜….”

“아직도 그래? 아니지?”

그만 말하는 게 좋겠어.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나 보면 흥분도 해?”

“너 진짜 취했다. 자야겠네. 이불 가져다줄게.”

김찬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벌떡 일어서려는 김찬이의 팔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내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쓰레기처럼 굴고 있다는 걸 아는데 멈출 수 없었다. 궁금했다. 날 좋아하는 건지. 안 좋아한다면 왜 이제 안 좋아하게 되었는지. 왜 이런 게 궁금할까? 모르겠다. 술에 취하면 원래 세상의 모든 게 궁금해지지 않던가. 길가의 전봇대만 봐도 쟤가 왜 이러고 서 있을까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을 뿐이라고.

“궁금해.”

나는 웅얼거렸다. 김찬이가 한숨을 쉬더니 다시 내 앞에 앉았다. 눈높이를 맞추더니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

어린애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다. 또 한 번 울컥했다. 순둥이같이 생긴 주제에. 나를 아주 애처럼 어르고 있잖아. 나는 눈을 부릅뜨고 김찬이를 노려보려 했다. 그러나 도통 눈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남자 좋아하는 게 어떤 건지.”

“…현오야. 지금 네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 아는 거야?”

김찬이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딱딱하고 진중해졌다. 나는 속으로는 살짝 쫄았지만 티 내지 않기 위해 쓰레기가 되는 쪽을 택했다.

“뭐. 알아. 나 술 안 취했어. 화났냐? 네가 막 대해도 된다며.”

“그냥 욕을 해 줘. 우리 이런 얘기는 하지 말자.”

“왜?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내가 너한테 어떻게 화를 내. 그냥 걱정돼서 그래.”

“무슨 걱정?”

김찬이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나는 상체를 쭉 빼서 김찬이에게 더더욱 다가갔다. 눈앞이 어지러워서 거리가 가늠이 안 된다. 얘랑 지금 얼마나 가까운 걸까? 김찬이가 살짝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친구처럼 지내자고 했잖아. 내가 솔직하게 말했다가 네가 나 싫어지기라도 하면….”

“안 그래. 술 취해서 내일이면 잊을걸.”

내가 진짜 왜 이럴까. 개망나니 같아. 야, 이 미친놈아. 내면의 내가 외면의 나를 질책했다.

“아까는 술 안 취했다며….”

“아, 그랬나? 좀 취한 거 같네. 솔직하게 말해 봐. 어떤데.”

김찬이가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조금 전과는 눈빛이 완전히 달랐다. 아예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김찬이가 아까 한 말을 이해할 것 같았다. 가만히 있으면 인상이 차가워 보인다더니. 정말로 그랬다. 처음으로 김찬이가 예민하고 날카로운 사람처럼 느껴졌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김찬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흥분해.”

“어?”

“흥분한다고. 너 보면. 아니, 네 생각만 해도 흥분해.”

갑자기 김찬이가 내 어깨를 꽉 붙잡았다. 나는 목을 움츠러뜨렸다. 쟤가 방금 뭐라고 했지? 뭘 한다고? 흥분을? 흥분이 뭐지?

갑자기 머리가 핑핑 돌았다. 솟구치는 취기 속에서도 하나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내가 크게 실수했단 걸.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되돌리겠다.

“현오야. 내일 되면 진짜 다 잊을 거지.”

나는 김찬이의 기세에 눌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볼 뿐.

“한 입으로 두말하면 안 돼.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김찬이가 점점 다가왔다. 왜? 뭐 하려고? 내 어깨를 잡고 있는 악력은 무시무시했다. 누가 김찬이 보고 토끼를 닮았다고 했지? 정말 사람 보는 눈 없네. 아, 나였나. 제기랄. 지금의 김찬이는 토끼라기보다는 사냥개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김찬이의 피부가 목부터 서서히 빨개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차분하던 김찬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흥분에 가득 찬 남자만이 있을 뿐. 김찬이와 콧잔등이 부딪칠 때가 되어서야 나는 간신히 입을 뗐다.

“김찬이… 자, 잠깐… 읏.”

그러나 곧바로 입이 다시 막혔다. 김찬이가 나에게 키스했기에.

김찬이의 혀가 내 입 속을 거칠게 파고들어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뇌가 정지된 것 같다. 김찬이의 키스를 받아 내며 간간이 코로 숨을 쉬는 것 말고는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게 키스였나. 정신이 멍해졌다. 누군가와 키스한 지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흐릿했다. 그간 타인과 부대끼는 걸 극도로 꺼리며 살아왔으니까. 말캉거리는 혓바닥이 내 입 안 점막을 누르고 헤집었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여태껏 키스는 다 달콤하고 간지러운 것인 줄로만 알았다. 아니었다. 실제로는 거칠고 진득하고 질척이며 숨이 막혔다.

“읏.”

김찬이의 이가 내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아릿한 통증과 함께 아랫배가 싸해졌다. 생소한 감각이 계속되고 있다. 김찬이는 능숙하게 내 입술을 핥고 깨물고, 굳어 있는 내 혀를 잡아당겼다. 점점 내 몸이 뒤로 밀렸다. 쿵. 이내 소파에 등이 닿았다. 김찬이가 내 위에 올라탄 채로 키스를 계속했다.

‘흥분한다고. 너 보면.’

김찬이가 했던 말이 내 귓가에 계속 윙윙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럴 리 없다. 분명 2주 동안 김찬이는 덤덤해 보였는데. 그게 결국 다 연기였다고? 말도 안 돼. 믿고 싶지 않았지만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다리에 닿는 딱딱한 살덩이가 김찬이의 말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우리의 다리가 서로 엉켰다. 김찬이의 하반신은 뜨거웠다. 내 어깨를 잡고 있던 김찬이의 손은 어느새 내 얼굴을 움켜쥐고 있었다. 꾹, 꾸욱, 하얗고 매끈한 손가락이 내 귓바퀴와 관자놀이 주변을 쓰다듬었다. 피부가 간지러운 걸 넘어서 욱신거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김찬이의 타액이 꾸역꾸역 입 속으로 넘어왔다. 한증막에 들어온 것처럼 숨이 자꾸 막혔다. 덥다. 너무 덥다. 몸이 뒤엉켜 있으니 자연스레 열이 났다. 고집스레 감고 있던 내 눈에 물기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김찬이가 틀어막은 입에서는 우스꽝스러운 신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됐는데. 김찬이랑 키스하고 있다니. 처음 겪어 보는 감각에 내 몸과 머리는 작동 중지되어 버렸다. 미칠 것 같았다. 키스가 끝나고 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니, 애초에 이 키스가 끝나기는 하는 건가? 김찬이는 영영 나를 놓아주지 않을 기세로 몰아붙이고 있다.

김찬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나는 눈을 살짝 떠서 김찬이의 얼굴을 확인해 보려 했다. 물기 때문에 시야가 흐렸다. 그 와중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건, 김찬이의 까만 두 눈동자.

“읍.”

나는 기겁하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당연히 눈을 감고 있을 줄 알았는데. 김찬이는 평소보다 눈을 더 부릅뜬 채 내 얼굴을 지그시 노려보며 키스하고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딸꾹질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잽싸게 다시 눈꺼풀을 닫았다. 김찬이와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기분 탓인가. 눈이 마주친 후로 키스가 좀 더 격해진 듯했다. 김찬이의 두 손이 이제는 내 뺨과 목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김찬이가 제 엄지로 내 귀 뒤를 꾹 문질러 댔다.

“흐읏.”

우스꽝스러운 내 신음이 계속 이어졌다. 흥분한 김찬이의 성기도 가라앉질 않았다. 나는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차라리 구역질이 날 만큼 불쾌했으면 좋겠다. 있는 힘껏 무릎을 세워 김찬이의 성기를 걷어차면 이 상황에서 해방될 수 있으리라.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내 발가락 끝은 조여들고, 뱃속은 뜨겁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김찬이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도 흥분하고 있다는 걸.

순간 잠잠하던 머릿속에 경종이 미친 듯이 울려 댔다. 이대로 있다가는 큰일이 날 것이다. 소파 아래에 무기력하게 떨어져 있던 팔에 애써 힘을 주었다. 나는 간신히 김찬이의 등을 퍽 쳤다. 뚝. 거짓말처럼 김찬이의 움직임이 멎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키스가, 끝이 났다.

김찬이가 느리게 입을 떼고 상체를 일으켰다. 나는 눈을 반쯤 떠서 김찬이를 올려다보았다. 처음 보는 김찬이의 표정이었다. 눈가, 뺨, 입술, 김찬이의 모든 게 빨갛다. 눈동자는 가라앉지 않은 흥분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김찬이가 무서워졌다. 순하고 토끼를 닮았던 그 얼굴이 그리웠다. 지금은 김찬이가 나를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허억, 허억….”

나는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움츠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에게 김찬이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내일 되면 정말로 다 잊는 거지?”

나는 마법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김찬이가 면접관처럼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게든 올바른 대답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들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어, 어….”

한참 후 김찬이가 대답했다.

“좋아. 그렇게 믿을게.”

그러더니 굳어 있던 표정을 펴고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익숙한 표정이다. 늘 보던 선하고 맑은 얼굴.

“그럼 잘 자, 현오야.”

김찬이가 내 가슴팍을 살짝 두드리고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넋이 나간 채 김찬이를 바라보았다. 김찬이의 면바지 중심은 아직도 묵직했다.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평소와 다름없는 굿 나잇 인사였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피부가 뜨거웠다. 술 냄새로 가득한 숨을 푹푹 내쉬며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내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기를. 정말로 다 잊어버리기를.

***

다음 날 아침. 늘 깨던 시각보다 늦게 눈을 떴다. 알람 소리를 못 듣고 계속 잔 모양이었다. 나는 이불 속에서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심호흡을 두어 번 했다. 속이 메슥거리고 목이 탔다.

자박자박. 갑자기 근처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며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방문 근처에서 김찬이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오야. 아직 자? 북엇국 끓여 놨는데.”

“…….”

“자나 보네.”

김찬이는 다시 몸을 돌려 방에서 멀어졌다. 나는 눈을 반짝 뜨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김찬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전혀 평온하지 못했다. 제기랄.

그 키스가, 잊힐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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