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김찬이, 스물네 살, 짐작하는 초가을 (9/13)

08. 김찬이, 스물네 살, 짐작하는 초가을

가위바위보를 하면 현오는 언제나 보자기를 첫 번째로 냈다. 현오는 몰랐을 테지만.

오늘은 팔월의 마지막 날. 나는 눈에 힘을 주고서 지금을 하나하나 다 머릿속에 담으려 노력했다. 현오가 내 아래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다. 반쯤 우는 채로. 오르가슴이 찾아올 때면 현오는 언제나 눈물을 글썽였다. 눈가와 코끝이 빨갛다. 군살 하나 없는 현오의 가슴팍은 들썩거렸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현오는 직접 보지 못한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현오가 갑자기 회의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섹스 직후엔 늘 저래 한다. 현오가 얼굴을 자기 손으로 가린 채 웅얼거렸다.

“빼….”

내 성기는 아직 현오의 안에 있었다. 조금 더 현오를 느끼고 싶었지만, 순순히 현오의 말에 따랐다.

“응. 미안.”

느리게 허리를 움직여 성기를 빼냈다. 현오가 몸을 부르르 떨며 어깨에 힘을 풀었다. 풀썩, 현오의 옆에 누워 그의 어깨에 콧잔등을 갖다 댔다. 쿨쩍, 현오가 눈물을 닦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습관대로 오늘을 복기한다. 현오가 어떻게 신음했는지, 어떻게 울었는지, 어떻게 사정했는지. 하나하나 보고서처럼 정리하여 머릿속에 저장해 둔다. 아, 금세 가슴이 뻐근해진다.

현오가 집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현관문 앞에서 키스를 나누었다. 현오는 잠시만 혼자 둬도 고민이 많아지는 성격이기에, 되도록 틈을 주지 않아야 했다. 키스하며 욕실 앞까지 함께 걸어갔다. 가능하다면 같이 씻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현오가 날 밀쳐 내며 말을 더듬거렸다. 나, 나가…. 현오의 목소리는 톡 건들면 무너질 것처럼 가느다랬다.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속눈썹은 또 어떤가. 아랫배에 열이 솟구쳤다.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이럴 때마다 현오가 뭐라 울부짖든 듣지 않고, 그를 넘어뜨리고, 옷을 찢어발기고, 맨피부에 가득 내 자국을 새기고 싶었다. 거칠게 골반을 움켜잡은 채 삽입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있는 힘껏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한다면 짐승이나 다를 바 없겠지. 나는 현오가 싫어하는 것은 하지 않겠다. 평소에 섹스할 때도 늘 그의 반응을 살폈다. 느리고, 진득하게. 섣불리 템포를 올리는 법은 없었다.

현오가 씻고 나오자마자 우리는 다시 엉겨 붙었다. 침실까지 뒤뚱뒤뚱 걸어갔다. 우리가 가는 길마다 옷가지가 하나씩 떨어졌다. 침대에 도착했을 때는 알몸이었다. 나는 기쁘게 현오의 가슴을 매만지고 옆구리를 더듬었다. 나는 이제 현오를 어떻게 만져야 현오가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

나는 현오를 뒤에서 껴안은 채 성기를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내벽은 언제나 뜨겁게 나를 감쌌다. 현오의 뒷목에 끊임없이 키스했다. 가끔 이를 세워 피부를 잘근잘근 깨물기도 했다. 마음 같아서는 콱 송곳니를 박아 넣어 시뻘건 흔적을 남기고 싶었지만….

현오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신음을 흘렸다. 아, 끙끙거리는 모양새가 견딜 수 없이 귀여웠다. 손으로 현오의 손목을 꽉 잡아 눌렀다. 좀 더 거칠게 마구잡이로 구멍을 휘저으려다가 참았다. 대신 현오가 가장 잘 느끼는 부분을 찌르는 데에 집중했다. 어쨌든, 늘 중요한 것은 현오니까.

현오가 반쯤 울면서 사정했다. 성기를 한 번도 매만지지 않았는데 사정한 건 처음이었다. 그 사실이 나름 충격이었는지, 현오는 오랫동안 어깨를 떨었다. 현오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자세를 바꾸었다. 현오는 잡아먹히기 직전의 초식 동물처럼 바들바들 떨며 나를 바라보았다. 눈가가 붉고 축축했다. 현오가 수치스러워하는 걸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너무 세게 성기를 쳐올리고 말았다. 참아야 했는데, 실수다. 현오가 흠칫하며 왈칵 남아 있던 정액을 또 뿜어냈다. 이로써 오늘의 복기를 마친다.

우리가 섹스를 몇 번이나 했더라. 처음 하고 난 후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우리는 정말로 섹스에 미쳐 있었다. 절제란 없었다. 시간이 아주 잠깐이나마 났다 싶으면 몸을 겹치기에 바빴다. 현오와는 놀랍도록 몸이 잘 맞았다. 게다가 현오가 자신이 바텀을 하는 것에 대해 별말이 없어 기쁘다. 포지션을 바꿔 달라 했으면 퍽 난감했을 테다.

나는 여전히 얼이 빠져 있는 현오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갑자기 현오의 눈동자에 복잡한 기운이 스몄다. 또 무슨 고민이라도 생긴 걸까.

“현오야.”

“…….”

현오가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다. 나는 불안해졌다. 현오의 맨어깨를 어루만지며 낮게 속삭였다.

“왜 그래? 고민 있어?”

현오가 결의를 다지려는 듯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나 모르게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나는 은근슬쩍 몸을 붙여 현오와 다리를 겹치려 했으나 현오가 아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오늘은 진짜 집에 돌아가야겠다.”

“집에 간다구?”

“이제 내일이면 구월이잖아.”

“…여기서 나갈 거야?”

“어.”

나는 현오의 맨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이제 정말 가을이 다가왔구나. 현오가 나가겠다 한다면 내가 그를 억지로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들었다. 현오가 단칸방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고 편안하게 해 줄 자신 있었다. 나는 상체를 세워 앉았다. 현오의 손목을 꾸욱 잡았다.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꼭 그래야 해?”

“그러면 여기서 계속 살라고?”

“그러면 안 돼?”

부담 주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늘 현오다, 머리로 수백 번은 외운 문장이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요동쳤다. 현오는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손바닥으로 자기 얼굴을 감쌌다. 현오가 저렇게 고민하고 어쩔 줄 몰라 할 때마다 나는 울고 싶다. 현오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고서 말했다.

“이러는 거 진짜 너한테 못할 짓 같아.”

“왜?”

“도대체 어느 섹파가 한 집에서 같이 사냐. 너한테 결국 상처 주는 꼴이 될 거라고.”

나는 고개를 재빠르게 가로저었다.

“난 지금 너무 행복한데. 현오는 나랑 같이 사는 거 힘들었어?”

“아니.”

“그러면 된 거 아니야?”

“…정신 차려. 호구야? 생활비도 다 네가 내고. 섹스도 하고. 그러면서 사귀지는 않고. 너는 이게 괜찮아?”

“저번에 괜찮다고 했잖아.”

“도저히 안 믿겨서 그래. 나는 왜 네가 나한테 거짓말하는 것 같지.”

“그럴 리가.”

“내 머리로는 이해를 못 하겠다고.”

나는 숨을 훅 내쉬고 현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안타까울 정도로 착한 나의 현오. 사랑스러운 현오.

현오와 내가 지닌 마음의 크기가 달라서, 그게 나에게 상처를 주게 될까? 언젠가 먼 훗날엔 그럴 수도 있겠지. 같이 지낸 시간이 쌓일수록 알게 모르게 기대를 품게 될 수도. 그러나 현오는 제일 중요한 걸 모르고 있다. 현오를 사랑하면서 겪는 아픔은 아픔이 아니다. 그런 고통이라면 몇 번이라도 달게 받겠다.

애초에 현오와 연인이 되기를 바란 적도 없었다. 나는 오 년 전 내가 했던 다짐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현오를 사랑하려 했다. 현오가 나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끊임없이, 이유 없이, 베풀려 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섹스까지 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나에게는 엄청난 행운 아닌가. 하지만 현오는 이해 못 하겠지.

나는 현오의 젖은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라 미안해.”

현오가 한숨 쉬며 살짝 내 쪽으로 몸을 기댔다.

“하지만 내가 걱정돼서 나가려고 하는 거면 그러지 말아 줘. 난 진짜 괜찮아. 거짓말 아니야.”

“…….”

“항상 현오의 행복만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현오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평소보다 목소리에 배는 힘을 주어 말했다.

“내가 널 좋아하게 될 일은 없어.”

마치 자기한테 다짐하듯이. 나한테 으름장을 놓듯이.

“섹스했다고 달라지지 않아.”

현오가 눈을 부릅뜨고서 나를 노려보았다. 저 작은 눈동자에 어째서 그토록 고민이 많이 담겨 있는 걸까. 다 사람이 너무 정이 많아 그렇다. 다른 사람을 이용해 본 적이라곤 없겠지. 안쓰럽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현오에 대한 사랑이 새삼스럽게 또 가슴에 차올랐다. 뻐근한 흉통이 기꺼웠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슬며시 번진 모양이었다. 현오가 이 상황에서 왜 웃느냐며 타박했다. 그런데도 웃음이 멈추지 않아서 꽤 난감해졌다.

나는 현오의 어깨와 목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너를 사랑하는 게 나의 일이라는 걸 언젠간 알아주길 바라며 말했다.

“응. 다 알아.”

“…호구 같은 놈.”

현오는 퉁명스레 말했으나 나를 밀쳐 내지는 않았다. 열 몇 시간 후 구월이 된다. 현오가 이 집을 나가게 될까? 그렇다면 아주 슬퍼지겠지. 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겐 현오를 붙잡을 자격이 없다. 짝사랑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관계라는 건, 그런 거다. 그래도 난 감당해 낼 것이다. 끈기 하나는 자신 있으니까.

***

구월이 되었다. 현오는 집을 나가지 않았다. 나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섣부르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저 나를 자기 곁에 둘 필요를 느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현오가 가끔가다 이전과는 다른 미소를 보여 주어도, 문득 내 손을 평소보다 오래 붙잡고 있다는 걸 깨달아도, 애써 기대를 죽였다.

현오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속으로 되뇐다. 설사 좋아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그걸 먼저 눈치채서는 안 된다. 현오는 분명히 화를 내고 도망가 버릴 테니까. 나의 몫은 또 기다림뿐이다. 기다림의 결말에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

개강 날이 되었다. 이번 학기 시간표는 유달리 빡빡했다. 1교시 수업이 많아 걱정이었다. 현오가 아르바이트를 끝마치고 집에 오면 새벽 두 시쯤 된다. 현오와 조금이라도 붙어 있으려면 아무래도 잠자는 시간을 줄여야 할 듯싶다.

첫날 전공 수업을 다 마치고 마지막 교양 강의를 들으러 갔다. 뒷자리에 앉아서 노트를 펼쳤다. 손목시계를 보니 현오가 아르바이트하러 나갈 시각이다. 핸드폰을 초조하게 놓았다가 쥐기를 반복했다. 한참 고민하다가 카톡을 보냈다.

가게 나갔어?

별 내용 없는 짧은 문자 하나를 보내기 위해 몇 분 동안 고민한다는 걸 너는 알까.

가는 중

현오에게서 답장이 왔다. 나는 잽싸게 답을 보내고서 잠시 멍하니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았다.

잘 다녀와

내 핸드폰에 현오의 흔적이 남는 게 아직도 신기하고 벅차다. 핸드폰 화면을 톡톡 두드렸을 현오의 마르고 긴 손가락을 상상해 본다. 갑자기 가슴이 간질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수업 빼먹고 가게로 가서 현오를 보고 싶었다.

때마침 교수님이 강의실로 들어와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김찬이.”

“네.”

짤막하게 대답하고서 다시 현오에 대한 생각으로 정신없을 때였다.

“박정수.”

“예.”

익숙한 이름 하나가 나를 행복한 공상에서 억지로 끄집어냈다. 대답은 내 바로 뒷줄에서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동명이인이기를 바랐으나 내가 아는 박정수가 거기에 있었다. 박정수와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박정수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차츰 눈이 가늘어지더니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걸렸다. 뒤늦게서 날 알아본 것이다.

박정수는 옆에 앉아 있는 여자들과 꽤 큰소리로 쑥덕거렸다. 아마도 후배들인 것 같았다.

“야, 오빠가 말이야. 고등학교 때 얘기해 줬나? 잘나갔거든.”

교수님이 출석 부르다 말고 박정수 쪽을 한 번 노려보았다.

“그쪽 조용히 좀 해요.”

“아, 죄송합니다.”

박정수가 능글맞게 대답했다. 그러고서는 여자들에게 목소리 낮춰 속삭였다.

“나중에 얘기해 줄게. 재미있을걸?”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책상 쪽으로 숙였다. 숨소리가 거칠게 흔들렸다. 날 보는 박정수의 시선이 느껴졌다. 무릎을 붙잡고 있는 내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 눈앞에 그날의 잔상이 마구 떠다닌다. 초록색 옥상 바닥. 붉은 피. 묵직한 통증. 날카로운 바람. 목구멍을 자꾸 틀어막던 가래침. 박정수의 모욕. 나의 알몸.

필사적으로 심호흡했다. 괜찮다. 여기는 옥상이 아니다. 그 겨울도 아니다. 나는 벗어났다. 나는 과거의 김찬이가 아니다. 속으로 쉼 없이 중얼거렸다. 가끔 과거를 후벼 파는 꿈에서 깨어난 아침 날, 이불 속에서 웅크려 몇 번이고 외운 문장들. 다른 것을 떠올리자. 따스한 것. 좋은 것. 향기로운 것. 아프지 않은 것….

현오.

어느새 내 손은 핸드폰을 움켜쥐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현오에게 카톡을 보냈다.

1

현오야

그 어떤 설명도 없이, 비명 같은 부름이었다.

보내자마자 후회했다. 현오가 자주 연락하지 말라 했는데. 현오는 아마도 답을 안 할 것이다. 가게 열 준비하느라 바쁠 때이기도 하다. 그러면 나는 실망하겠지. 혹시나 현오가 답을 한다면… 아니다. 섣부른 기대는 독이 될 뿐이다. 이건 내가 홀로 견뎌야 하는 순간이다. 과거처럼 현오가 구해 주러 올 리는 없다. 그런데도 내 손가락은 애타게 핸드폰 액정을 더듬거리고 있다. 현오가 보고 싶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눈을 꽉 감았다. 교수님이 수업을 시작했다. 낮은 목소리가 강의실을 울렸으나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호흡이 진정될 때까지 몇 분을 그러고 있었다. 나는 괜찮다, 속으로 한 글자씩 말해 본 후 눈을 떴을 때였다. 답장이 와 있었다.

내가 카톡을 보내자마자 왔던 한 개.

몇 분 후, 한 개 더.

뭔 일 있어? 왜 그러는데

간신히 진정됐던 숨이 다시 가빠졌다. 물음표 찍힌 문장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째서 늘, 현오는 내가 절박할 때마다 손을 뻗어 주는가 생각한다. 신을 믿지 않지만 사랑에 때가 있다는 건 믿는다. 나의 힘든 시간은 모두 현오를 사랑해야만 하는 때였다.

이유 없이 이유도 모른 채, 매번 나를 구원해 주는 현오.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손 떨림이 차차 멎었다.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가 탁 풀렸다. 어차피 현오에게 박정수에 관한 말은 하지 못한다. 우리에게 과거는 없던 일이니까. 그래도 현오가 나를 걱정해 줬다는 것만으로 모든 게 괜찮아졌다.

아무것도 아냐

현오에게 바로 답장이 왔다.

네가 용건도 없이 연락을 다 하고

미안

늘 현오에게 연락하기 위한 핑계를 만들었었다. 아무 이유 없이 하면 귀찮아할 것 같아서. 현오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현오가 나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해진다. 아주 사소한 거라도.

야 근데 나 착각했어

뭘?

오늘 알바 쉬는 날이었음

그럼 오늘 밖에서 저녁 먹을래?

너 학교 언제 끝나는데

사십 분 있으면 끝나

그럼 좀 이따 내가 정문 쪽으로 감

예상 못 하던 전개였다. 몇십 분만 지나면 현오를 만날 수 있다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덕분에 내 뒤에 앉아 있던 박정수가 덜 신경 쓰였다. 나에게 현오는 언제나 달콤한 진통제였다. 수업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현오와 주고받은 카톡만 몇십 번씩 다시 읽었다. 단어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쏟았다. 현오가 어떤 생각을 하고 나에게 저 말을 했을까. 어떤 표정이었을까. 나 혼자서만 의미 부여를 해 본다. 물론 현오는 별다른 생각 없었겠지만.

“오늘은 첫날이니까 일찍 끝낼게요. 다음 수업 때 봅시다.”

교수님이 수업 종료를 선언하셨다. 나는 의자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가방을 챙겼다. 뒤에서 다시금 박정수의 시선이 느껴졌다. 애써 무시했다. 피부에 소름이 돋아나려 할 때마다 절실하게 속으로 현오의 이름을 세 번 읊었다. 김현오, 김현오, 김현오. 가슴팍 주변에 싸한 기운이 조금씩 가셨다.

강의실을 재빠르게 벗어나 정문 쪽으로 내려갔다. 거의 뛰다시피 했다. 현오보다 먼저 현오와 만나기로 한 곳에 도착하고 싶었다. 정문 근처에 다다랐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김찬이!”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의 목소리인지 이미 알고 있다. 잠시간 부름에 응할지 고민했다. 현오를 만나기 직전 기분을 최악으로 떨어뜨리기 싫었다. 하지만 무시한다고 나를 놔줄 박정수도 아니지.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박정수를 바라보았다.

박정수는 나를 따라잡느라 꽤 달린 모양이었다. 그가 숨을 헉헉 몰아쉬더니 물었다.

“야. 너 김찬이 맞지? 동오 고등학교.”

박정수는 제법 의기양양한 표정이다.

“나 기억 나냐?”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내가 자기를 잊어버릴 일 없다는 걸 잘 알 텐데. 일부러 저러는 거겠지. 내가 스스로 그 과거를 떠올리게끔 하려고. 박정수는 사람이 어떨 때 비참함을 느끼는지 잘 안다. 나는 박정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고등학교 때보다 살이 조금 쪘다. 박정수가 나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오자, 담배 찌든 냄새가 훅 콧속으로 들어왔다. 불쾌했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대답했다.

“기억하지, 그럼.”

“이야, 너 많이 달라졌다. 살 쫙 뺐네. 예전엔 돼지였잖아.”

김현오, 김현오, 김현오. 속으로 세 번 왼다.

“왜 그동안 한 번도 못 봤지? 우리 학교 다니는지 몰랐잖아. 근데 너 공부 잘하지 않았나?”

박정수는 능청스레 나와 친한 척을 해 온다. 나에게 손을 뻗어 악수까지 하려 했다. 죽이고 싶다. 마음 같아서는 그 손등에 가래침을 뱉고 싶었으나 참았다. 대신 있는 힘껏 손을 마주 잡았다. 박정수의 손을 쥐어짜려는 듯이. 박정수가 움찔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서울캠퍼스에서 다니다가 올해에 우리 과가 여기로 이전돼서.”

“아하. 본교였구나. 어쩐지.”

박정수가 웃으면서 손을 빼내려 했다. 놔주지 않았다. 더 억세게 박정수의 손목까지 움켜잡았다. 박정수의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다. 분명히 아플 텐데. 박정수가 고집스레 웃으며 말했다.

“난 제대하고 이번에 복학했거든.”

“그래? 좀 늦었네.”

“재수해서.”

“아하.”

“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연락하고 지내자. 번호 바꿨어?”

미친 새끼. 입 밖으로 욕이 튀어 나갈 뻔한 걸 간신히 참아 냈다. 나도 모르게 박정수의 팔을 살짝 비틀어 버렸다. 박정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아, 씨발.”

그제야 박정수가 웃음기를 거두고 나를 노려보았다. 박정수가 어깨를 이리저리 비틀며 신경질 냈다.

“야. 놔라. 존나 아프네.”

“싫은데.”

“씨발.”

박정수가 내 발을 밟으려 하길래 무릎을 걷어찼다. 있는 힘껏. 아마 멍이 들었을 거다. 박정수가 억 소리 내며 상체를 숙이더니, 잠시 후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 나를 바라보았다.

박정수가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너 설마 아직도 그때 일로 빡쳐 있는 건 아니지?”

박정수의 눈빛이 매서웠으나 이상하게 겁이 나지는 않았다. 분명 몇 분 전만 해도 박정수의 시선이 역겨웠는데. 박정수가 이렇게 힘이 약했던가. 생각해 보면 예전에도 싸움을 잘하는 놈은 아니었다. 대단히 두려워할 만한 존재감도 없었다.

박정수가 무서운 게 아니라, 그때의 기억이 무서운 거였다. 박정수 같은 놈한테 무력하게 당했던 나로 돌아가는 게 무서웠다. 현오한테 제대로 말도 못 붙여 보았던, 그래서 현오와 허망하게 헤어져야 했던.

나에게 과거란 후회였다. 하나하나 들춰 볼 때마다 속살이 후벼 파인다. 겉도 속도 과거와 달라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과거를 잊은 건 아니었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나는 과거를 끈질기게 붙잡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물건을 모두 상자에 모아 놨을 정도로.

아무것도 매듭짓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현오에 대한 감정도, 박정수에 대한 혐오도. 어쨌든 살아야지. 그래서 어떻게든 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것이,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나는 여전히 열아홉 과거의 끝자락을 붙잡고 현재와의 경계선에 서 있다.

박정수가 비웃는 표정을 한 채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맞아.”

“어?”

“그때 일로 빡쳐 있는 거 맞다고. 너 죽여 버리고 싶고 그래.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박정수는 도대체 왜 나를 비웃고 있는 걸까. 내가 그날의 상처를 잊지 못했다는 게, 웃길 일인가? 내가 그걸 부끄러워할 줄 알았나? 자신의 폭력이 나를 짓뭉개는 데에 성공했다는 게, 즐겁고 뿌듯할까? 친구들과 술 마시며 무용담처럼 자랑을 늘어놓을지도 모르겠다. 열아홉 때 김찬이라는 자식이 있었는데….

이해되지 않는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김찬이. 몇 년 지난 거로 왜 그래. 찌질하게. 지금 와서 뭐 어떻게 할 건데. 신고하게? 신고하려면 그때 했어야지.”

갑자기 속이 확 끓어올랐다. 시발새끼. 박정수의 뒷목을 움켜쥐고 질질 끌고 갔다. 고등학교 때 박정수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가해자를 용서하는 선택지는 영영 사라졌다. 그럴 줄 알았으나 역시나, 박정수는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도 않을 거다. 고등학교 때엔 치욕을 드러내기가 무서워서 혼자 속으로 삭였다. 하지만 그건 예전이다. 어쨌든 살아야만 했을 때. 지금은 아니다.

박정수가 쿨럭거렸다. 나는 최대한 사람들이 적은 곳으로 향했다. 공대 건물 뒤편에서 박정수를 놓아주었다. 박정수가 얼굴이 벌게진 채로 한참 기침했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켜 소리쳤다.

“너 미쳤냐?”

“너야말로 미쳤어? 상황 파악 안 돼?”

“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덤비는 거지.”

“왜. 때리기라도 하려고? 이야, 너 진짜 변했다.”

“내가 못 팰 것 같아?”

내가 한 발자국 다가가자 박정수가 움찔했다. 박정수가 침을 삼켰는지 목울대가 크게 꿀렁였다. 박정수는 자기보다 힘이 센 사람을 귀신같이 알아보는 재능이 있다. 박정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뻗댔다.

“그래. 때려라, 때려. 경찰서 가. 나는 절대 합의 안 해 줘.”

“그럴래? 그럼 화 풀릴 때까지 때려도 되지? 휴학하게 되도 모른다.”

박정수가 입을 꾹 다물고 숨만 씩씩 내쉬었다.

“아. 아까 수업 때 같이 앉은 후배들 말이야. 걔들한테 고등학교 때 얘기해 주겠다며. 그거랑 휴학 소식은 내가 대신 전해 줄게. 일진 뒤 핥아 주다가 이제 뒤에 숨을 새끼 없어졌으니 나한테 당했다고 하면 되나? 추가할 거 있으면 말하고.”

“아. 이 새끼가, 진짜.”

박정수는 부들거리면서도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박정수 같은 애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허세일 테다. 사실 속이 텅 비어 있어도 겉이 그럴싸하면 된 것이다. 대학교 와서도 달라진 게 없다니. 어떻게 보면 쟤도 안쓰럽다.

“진짜 뭐. 빨리 정해. 나한테 처맞고서 경찰서 신고하고 휴학할 건지, 아니면 앞으로 나한테 아는 척도 안 할 건지. 나 바빠.”

박정수가 무슨 대답을 할지는 이미 알고 있다. 저 성격에 창피를 참을 수 있을 리가. 설사 내가 여기서 좀 때린다 해도 신고하지는 못할 것이다. 갓 복학하고서 허세 부리고 다니는 것 같은데, 센 이미지를 제 입으로 무너뜨리긴 싫겠지.

박정수는 욕을 중얼거리면서 슬금슬금 뒤로 걸어갔다. 내 제시안 중에 후자를 택한 것이다. 가만히 박정수를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다리가 튀어 나갔다.

“억.”

그냥 보내기엔 뭔가 아쉬워서. 내 발이 박정수의 배 한가운데에 박혔다. 박정수가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그가 물기 서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조, 조용히 가고 있었잖아! 왜 때려.”

“때리고 싶어서.”

“아, 씨발….”

박정수가 어깨를 떨며 몸을 일으켰다. 울상을 지으며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이제 가. 다음부터 아는 척할 때마다 한 대씩 맞는다고 생각하고.”

“미친 새끼….”

“싫어?”

박정수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분에 차서 나를 노려보고 있다. 자존심이 퍽 상한 모양이었다. 저 느글거리는 눈을 보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린다. 본능이 외친다. 그냥 뒷목을 붙잡고서 아스팔트에 얼굴을 갈아 버리자.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응하는 게 옳은 방법 아니었을까. 박정수의 얼굴에 내내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새겨 주고 싶다. 거울 볼 때마다 나를 떠올릴 수 있도록. 팔다리 중 하나는 부러뜨리는 것도 좋겠다.

그쯤 되면 박정수가 원하지 않더라도 경찰이 개입되겠지. 그래도 괜찮다. 난 돈이 많으니까. 조금 성가셔지긴 하겠지만 내 인생이 그로 인해 크게 무너지지는 않을 터다. 급작스레 부자가 되고 나니 돈이 넘칠 때와 아닐 때의 차이를 더욱 극명하게 느낀다. 돈이 많으면 무슨 짓을 해도 바닥까지 추락하지는 않는다.

나는 박정수를 위아래로 훑었다. 재킷 팔꿈치 부분이 조금 늘어져 있다. 대충 견적이 나온다. 박정수는 나만큼은 돈이 없을 것이다. 나는 팔꿈치가 늘어질 때까지 같은 옷을 입지 않는다.

갑자기 마음이 요동친다. 나는 돈이 많고, 박정수는 그보다 적다면, 모든 건 간편해진다. 박정수에게 건넨 제안을 거두고 싶어졌다. 애초에 선택지 따위 주지 말고, 분이 풀릴 때까지 패 버릴 걸 그랬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기 합리화가 시작된다. 나는 박정수와 똑같은 놈이 되는 게 아니다. 쟤는 이유 없이 폭력을 쏟아 냈지만, 나에겐 명백한 이유가 있으니까. 바로 복수다.

충동이 몸을 뜨겁게 했다. 입 안이 바짝 말라 갈 즈음, 바지 주머니에 꽂혀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아, 현오. 나는 깜짝 놀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어디야? 왜 카톡을 안 보냐.

“아, 수업이 늦게 끝났어.”

현오의 목소리를 듣자 들끓던 열기가 갑자기 가라앉았다. 박정수는 기웃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 목소리가 이상하네. 뭔 일 있냐.

나는 차분히 심호흡했다. 웃고 싶지 않아도 웃을 수 있는 유일한 때는, 현오 앞에서뿐이다. 격앙되어 있던 목소리 끝을 가다듬었다. 최대한 부드럽고 다정하게. 평소에 현오에게 말하던 톤으로.

“아니야. 아무것도. 좀 피곤해서. 기다리게 해서 미안.”

박정수는 기겁하며 나를 귀신 보듯이 한다. 현오가 가끔 나에게 순해서 걱정된다고 할 때마다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든다. 나는 그리 착한 사람이 아닌데. 자주 이기적이고 가끔 충동을 참지 못한다. 그저 현오에게만은 속 깊숙이 묻혀 있던 선함까지 벅벅 긁어모아 대할 뿐이다. 잘해 주고 싶어서. 현오는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

핸드폰 너머에서 현오가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 기다리다가 심심해서 정문 안으로 들어왔는데 어딘지 모르겠어.

“내가 그쪽으로 갈게. 주변에 뭐 보여?”

- 커다란 삼각형 기둥 같은 거.

“아, 바로 근처네. 지금 갈게.”

전화를 끊고서 목을 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몇 미터 떨어진 벤치에 현오가 앉아 있었다. 현오와 박정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난감해졌다. 둘을 만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현오는 과거라면 질색하니까. 내가 잠시 말이 없자 박정수도 힐끔 주변을 살펴보았다. 나는 다급히 박정수의 어깨를 밀쳤다.

“박정수. 저쪽으로 가.”

“왜?”

“가라면 가.”

박정수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그러나 더는 어쩌지 못하고 현오와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나는 숨을 돌리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몇 번 문질렀다. 현오 앞에서는 굳어 있는 표정을 풀어야 한다. 입가 주변을 검지로 꾹꾹 눌렀다. 조금 전의 분노는 모두 잊고 평온하게 구는 거다.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하며 현오에게로 다가갔다.

“어, 왔네. 기다렸잖아.”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현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순간,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얼굴에 힘이 풀렸다. 현오가 나를 기다렸다니. 사랑스럽다. 몇십 분 전만 해도 내 머릿속을 꽉 채웠던 치욕스러운 기억이 점점 흐릿해진다. 아플 정도로 거세게 뛰던 심장은 이제 기분 좋은 두근거림 정도로 제 속도를 낮추었다. 최악의 날이 될 뻔했던 오늘이 현오 덕에 달라지고 있다.

현오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작게 투덜거렸다.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다고.”

“미안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현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나는 현오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현오와 재회하지 못했더라면, 그래서 오늘 현오가 내 곁에 없었다면, 나는 어땠을까. 아까처럼 박정수를 몰아붙이고 그의 눈을 쏘아볼 수 있었을까. 글쎄.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다. 현오가 있어서 다행이다. 가능하다면 현오와 영영 함께하고 싶다. 내 바로 옆에 놓인 저 손을 잡고 싶다. 현오가 나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그저 곁에 두기만 하면 안 될까. 좋은 것을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현오가 원한다면 학교도 보내 줄 수 있는데. 성심성의껏 봉사할 자신 있다. 그러려면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해야겠지. 아버지가 허락할까. 고등학교 때 트라우마로 죽어 가는 척 연기하면 될 것 같다. 오피스텔에 예전 가해자와 닮은 사람이 산다고 하자.

새집에는 현오의 방을 더 멋지게 꾸며 줄 것이다. 책을 좋아하니 서재도 둬야겠지. 현오가 좋아하는 이야기로만 가득 채우면 기뻐할까. 그러다가 현오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집에서 나가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때 현오가 말했다.

“왜 그렇게 보냐.”

“응? 아니야.”

나는 다급하게 현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가슴팍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브레이크 없이 달려가던 상상이 뚝 멈추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도대체 방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그저 아찔해졌다.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기다림의 결말에 공허뿐이더라도 견디기로, 현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그를 사랑하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현오가 떠난다고 상상하자 순간 화가 났다. 나보다 현오에게 더 잘해 줄 사람은 세상에 없을 텐데. 제삼자가 현오의 사랑을 독점하게 된다니, 용납할 수 없다.

나는 간신히 감정을 억눌렀다. 나에게 기겁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현오를 사랑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치부가 헤집어진 기분이다. 나도 모르게 욕심내고 있었나.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을 감추어야 할 때가 자주 올 것만 같다.

“김찬이. 너 진짜 무슨 일 있지?”

현오가 걷다 말고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재빠르게 가로저었다.

“진짜 진짜 괜찮아.”

“조용하니까 이상하잖아.”

“미안.”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네가 곁에 있어만 준다면 모두 괜찮을 거라는 말은 저 아래로 숨긴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부담과 약속을 주고받을 사이가 못 되니까.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네가 내 절박한 애정을 치 떨려 하지 않을 날이.

***

그다음 교양 수업 날에 강의실에 가 보니 박정수는 여전했다. 나한테 벌벌 떨던 모습은 싹 숨기고 여자들한테 또 먹히지도 않는 훈수를 늘어놓고 있었다. 후배들도 마지못해 들어 주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일부러 박정수 근처에 앉았다. 쿵. 세게 가방을 내려놓자, 박정수가 잠깐 움찔했다. 이후 박정수의 목소리가 살짝 작아졌다.

따분한 수업이 끝나자마자 강의실에서 나갔다. 도서관에서 공부 좀 하고 헬스장 들렀다가 집에 갈 예정이었다. 그러고 현오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키스도 해야지. 여건이 되면 섹스도. 나무랄 데 없는 계획이다.

그런데 도서관으로 걸어가던 중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신경 쓰였다. 고개를 뒤로 돌리니 박정수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왜 따라와. 아는 척하지 말라고 했는데 기억 안 나나 봐.”

“따라온 거 아니야.”

“그럼 지금부터라도 다른 길로 가든가.”

“아니, 여기서 돌아갈 길이 없는데….”

“그럼 적당히 짜져 있다가 나 사라지면 가.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박정수랑 말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다. 고등학교 때 쟤가 나한테 했던 걸 그대로 갚아 줬어야 했나. 다시 몸을 앞으로 돌려 걸어가려는데 박정수가 날 다급히 불러 세웠다.

“잠깐만, 김찬이.”

열이 머리끝까지 올랐다. 저벅저벅 걸어서 박정수 코앞까지 다가갔다.

“너 사람 말 못 알아들어?”

“아, 아니.”

박정수가 어깨를 한껏 움츠리고는 말을 이었다.

“기, 김현오! 어제 김현오 봤다고!”

현오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솟구쳤던 열이 순식간에 내려갔다. 놀랍도록 빠르게 머리가 차가워졌다. 저번에 저 자식이 현오가 벤치에 앉아 있던 걸 봤던 모양이다. 진정해야 했다. 박정수가 왜 현오 얘기를 꺼내는지 의심스러웠다. 고등학교 때 박정수는 현오한테 자격지심을 품다 못해 해치려 했다. 물론 일방적으로 현오에게 맞았지만.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현오는 많이 마르고 약해졌다. 요즘 현오를 살찌우기 위한 식단을 고민하느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니까. 현오에게 피해가 가서는 안 된다. 육체적인 것은 물론, 정신적인 것까지. 박정수가 현오의 마음을 헤집게 두지 않을 것이다.

“어쩌라고. 용건이 뭐야.”

“왜 그렇게 화를 내. 아니, 난 그냥 네가 김현오랑 연락되는 게 너무 신기해서…. 너도 그때 장례식에 왔었어? 둘이 진짜로 친했었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장례식이라니. 언제, 누구의?

“내가 오죽 궁금했으면 너한테 말을 걸었겠냐. 와, 난 김현오 죽은 줄 알았는데.”

박정수가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머리가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박정수의 팔꿈치를 꽉 움켜잡았다.

“아, 씹. 아파!”

“그게 무슨 소리야.”

“어?”

“장례식이라니. 현오가 죽는다니. 무슨 소리냐고.”

“너 몰랐어? 둘이 친해 보이길래 아는 줄 알았는데.”

박정수가 얼떨떨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빨리 말해.”

“…열아홉 살 때 걔 가족 다 죽었잖아. 사고 나서.”

언젠가 현오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너는 나를 너무 잘 기억하고 있잖아. 난 그게 싫어. 다 까먹고 있었는데. 너랑 있으면 과거가 떠오를 것 같다고.

“김현오 혼자 살아남았다고 하던데. 뭔 사고였더라. 자세히는 몰라. 여하튼 장례식 가 보니까 김현오가 없더라고. 다들 잠적했다고도 하고. 자살한 건 아니냐 하기도…. 근데 뭐 아니었네.”

“그게 언제야? 넌 어떻게 알았어?”

“열아홉 살… 언제였지. 봄방학 끝나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그런 거 같은데. 아빠가 김현오 아버지네 회사 거래처였거든. 개인적으로 친하기도 했고. 부고 문자 받고 나 데려갔지.”

나는 과거에서 도망치려 애쓰던 현오의 눈을 떠올린다.

“야. 너 진짜 전혀 몰랐냐?”

“…….”

“야, 김찬이. 어디 가? 야!”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다. 비틀거리면서도 계속 걸었다. 현오의 냄새가 배어 있는 우리 집을 향해서. 미리 세워 놓았던 계획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현오를 보고 만지고 싶다. 미끈한 피부, 두근거리는 심장, 따스한 체온. 현오가 내 곁에 무사히 살아 있다는 걸 확인 받고 싶다.

***

새벽 두 시경. 나는 멍하니 소파에 앉아 현오를 기다리고 있다. 현오는 오늘 하루를 마치고 이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내가 모르는 현오의 시간을 짐작해 본다. 그에게 어떠한 불행이, 왜 찾아왔었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아는 거라고는 그럼에도 현오가 버텨 냈다는 것, 어쨌든 살아가고 있다는 것뿐이다.

머리가 아프다. 박정수 이야기를 괜히 들었던 걸까.

현오의 과거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거다. 고깃집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현오가 궁금했다. 예전과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기에. 내 눈에는 여전히 멋졌지만, 그의 얼굴에 서린 예민과 우울을 읽어 내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섣불리 묻지 못했다. 괜한 호기심은 상대를 상처 입힐 뿐이다. 그저 주변을 맴돌기만 했다. 현오가 힘든 순간에 나를 이용해 주기를 바라며. 그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언제든 손 닿는 거리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나에게 현오의 비밀을 파헤칠 자격은 없다. 현오가 먼저 말해 줄 때까지 모르는 척하려 한다. 나는 오늘 박정수에게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거다. 현오가 내내 숨겨 왔으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테다. 만약 현오가 나에게 과거를 털어놓는다면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위로와 공감은 하여도, 이해는 아니겠지. 내가 남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만큼 위험한 착각도 없다.

나는 현오를 조심스레 사랑하고 싶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현오가 편해질 일은 없을 것 같다. 늘 현오 앞에서 긴장하며, 그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려 애쓰며, 어려워하며, 존경하며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다. 현오는 중요한 사람이니까.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목이 탔다. 도대체 몇 시간 동안 소파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그때 바로 옆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몸을 돌리자 놀랍게도 현오가 거기 있었다.

“…현오야.”

“뭐 해? 나 들어오는 소리도 못 듣는 거 같던데.”

“아, 생각을 잠깐 좀.”

원래 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만 들려도 현오구나 싶어 현관 앞에 달려가곤 했다. 방금 전에는 정말로 정신을 빼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현오가 내 옆에 앉았다.

“뭔 일 있냐.”

나는 도리질했다. 손을 뻗어 조심스레 현오의 뺨을 감쌌다. 현오는 피하지 않았다.

“키스해도 돼?”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손바닥에 현오의 살갗이 느껴진다. 어쨌든 살아야지. 현오는 나에게 했던 그 말을 자신에게도 해 보았을까. 내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아픔을 견뎌 내고서, 현오가 지금 여기에 있다.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눈물이 날 것 같다. 내가 너를 다시 사랑할 기회를 주어 고맙다. 살아가 주어 기쁘다.

나는 현오와 천천히 입술을 맞댔다. 현오는 아무래도 내가 이상한지 도통 키스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현오가 눈을 감지 않고 나를 빤히 본다. 나는 현오와 눈을 마주했다. 혀로 현오의 입술을 핥고 문지르면서.

현오의 상처는 그의 안에 얼마나 깊이 박혀 있을까. 나는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그저 현오를 짐작할 뿐이다. 억울하지는 않다. 현오도 마찬가지니까. 내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거야 알겠지만, 내가 어떤 각오로 사랑해 왔는지, 사랑해 갈 것인지는 모를 테다. 현오가 짐작하는 내 사랑은 필시 실제보다 얕으리라. 우리는 서로를 짐작할 뿐이다.

그래도 나는 그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탐험해 보고 싶다. 내 짐작에서 희뿌연 한 부분을 최대한 줄이고 싶다. 한없이 뒤틀리고 어둡더라도 괜찮다. 그것마저 사랑하겠다. 물론 그럴 기회가 주어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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