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김현오, 스물네 살, 끌려가는 가을
그 영화를 보는 게 아니었다.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영화에서 예전 일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나왔다.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되는 주인공의 얼굴. 무엇도 이해할 수 없다는, 얼빠진 표정. 방관자의 눈빛. 역겨운 눈물.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피곤해졌다는 핑계로 끝나지 않은 영화를 내버려 두고 김찬이와 침실로 들어갔다. 김찬이는 아무 말 없이 TV를 껐다. 우리는 키스했다. 유달리 키스가 길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정신이 좀처럼 맑아지지 않았다. 숨이 가쁘고 손끝이 떨렸다. 완벽히 깨어나지도 잠들지도 못한 상태. 나는 가위에 눌렸다. 뭐라고 소리치고 싶은데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 뇌에서는 움직이라 명령하는데, 발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들었다.
꿈은 지독하게도 길었다. 꿈속에서 나는 5년을 살았다. 현실에서도 그 시간만큼 누워 있었던 듯이 몸이 무겁다. 물에 젖은 솜처럼. 영화 주인공의 그 역겨운 눈물이 내 몸속에 가득한 것 같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간신히 가위에서 풀려났다. 숨을 몰아쉬고 어깨를 움츠렸다. 다급하게 팔을 버둥거렸다. 무엇이라도 손에 쥐고 싶어서.
그때 손바닥에 따스한 게 닿았다. 김찬이다.
김찬이는 자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주변을 훑어보았다. 김찬이의 침대 위다. 키스하고, 서로의 몸을 주무르다가, 어찌 되었더라. 그래, 여기서 그대로 잠들었구나.
“아….”
머리로는 좌절감이 드는데 몸은 점차 편안해졌다. 이상한 일이다.
김찬이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방이 밝았다. 아침 여섯 시쯤 되었으려나. 김찬이는 도톰한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 속눈썹이 길다.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매끈하다. 평소에도 순한 얼굴인데, 자고 있으니 아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는 무심코 김찬이의 뺨을 건드렸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황홀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홀린 듯이 몸을 꿈틀대 김찬이에게 더 가까이 붙었다. 김찬이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조금 전까지 가빴던 호흡이 마법처럼 가라앉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평소엔 쉽게 진정되지 않아 고생하였는데. 과호흡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내 과거와 비슷한 장면을 마주할 때마다 이러는 건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을 때도 있고, 오늘처럼 지독한 악몽에 시달릴 때도 있었다. 종잡을 수 없어 더 힘들었다. 내 정신 상태를 예측할 수 있다면 대비라도 할 텐데. 갑자기 몰아닥치는 고통 속에서, 제발 호흡이 돌아오기를, 남들처럼 숨 쉴 수 있기를 기도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김찬이의 숨소리에 집중했다. 부드럽고 규칙적이다. 거기에 집중할수록 몸에 힘이 더욱 풀렸다. 어째서 이런 게 가능한지, 신기하고 당황스러웠다. 이대로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으며.
나른함이 밀려들 때쯤 조심스레 다시 눈을 떴다. 김찬이가 웅얼대며 몸을 뒤척였다. 곧 김찬이의 팔이 내 등허리에 얹혔다. 우리는 반쯤 끌어안은 자세였다. 벗어나서 내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만. 실행은 하지 못했다.
김찬이는 무슨 꿈을 꾸는지 헤실헤실하며 웃었다. 그러다가 잔뜩 뭉개진 발음으로 잠꼬대했다.
“현오야.”
“…….”
“현오….”
내 이름을 불렀다.
김찬이가 이번에는 칭얼대듯이 머리를 침대 시트에 치댄다. 하얀 뺨이 침대에 눌려 퍼졌다.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듣기 힘들 정도의 발음으로 또 한 번 말했다.
“응…. 좋아해.”
곧 애교 가득한 미소가 김찬이의 얼굴 가득 떠올랐다. 나는 김찬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가만히 있었다.
맨정신이 아니라면, 너는 이렇게 웃으며 이렇게 고백하는구나. 누가 보아도 행복에 몸부림치는 모양새로. 이렇게 나를 좋아하는구나.
원래라면 치 떨렸을 테다. 나만을 향하는 김찬이의 애정이, 저 순진한 얼굴이, 모두 짜증 났을 것이다. 몸에서는 소름이 돋아났겠지. 나를 끌어안고 있는 팔을 쳐 내고 허둥지둥 여기서 나가서는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는 곳에 혼자 웅크려 있겠지.
그런데 지금은 그저 편하다. 싫지가 않다. 어째서? 김찬이가 너무 익숙해졌다. 내 일상에서 김찬이가 차지한 자리가 너무 커졌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하지만 김찬이가 주는 안락함 속에서는 그런 위기감 따위 녹아 없어질 뿐이었다. 악몽에 허덕였던 몸에 잠기운이 서서히 퍼졌다.
이러면 안 된다고, 이대로는 정말로 큰일 난다고…. 속으로 나를 다그치던 말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
나도 나를 모르겠다. 하물며 김찬이를 어떻게 알겠는가. 요즘은 해가 지면 제법 쌀쌀하다. 여름의 흔적은 아주 희미해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김찬이 집에서 산다. 김찬이는 나와 섹스한다.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나는 왜 이곳을 떠나지 않는 걸까.
김찬이가 날 좋아한다는 걸 아는데도, 어째서 그의 곁에서는 늘 편안한가.
일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 현관문 앞에서 김찬이가 나를 맞이했다. 몸에 고기 냄새가 배어 있을 텐데 김찬이는 스스럼없이 나를 끌어안고 뺨을 만지작거렸다. 연인같이 살가운 짓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만 어쩐지 나는 또 가만히 있다. 김찬이의 손길에 길들기라도 한 건지.
“아, 맞다. 현오야.”
“왜.”
“나 오늘 서점에서 책 몇 권 사 왔는데 너도 읽을래?”
“책? 갑자기 웬 책?”
“그냥 소설. 오래간만에 읽고 싶어져서.”
김찬이가 내 손목을 붙잡아 이끌었다. 거실 테이블에 소설책 몇 권이 쌓여 있었다.
“읽고 싶은 거 있으면 읽어.”
“됐어.”
나는 애써 고개를 돌렸다. 책을 읽지 못한 지도 한참 되었다. 돈과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활자를 보는 것 자체가 힘들어졌다. 특히 소설이 그랬다. 종이에 가득 담긴, 현실보다 현실 같은 사람 사는 이야기. 생생한 삶은 나와 너무 달라 보기 싫었고, 죽어 가는 삶은 나와 너무 닮아 보기 버거웠다. 글을 좋아하던 때도 있었다. 아주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진다.
김찬이는 굳이 또 권하지는 않았다. 그냥 말없이 과일을 깎아다 주었다. 사과 한 조각을 씹어 먹으며 책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난 책 읽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그래? 안 읽어도 돼.”
김찬이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 손등을 어루만졌다. 아랫배가 살짝 간지러워졌다. 김찬이의 손가락이 점점 손목 위로 올라왔다. 유혹하는 건가. 곤란하다. 어제 그렇게 해 놓고서.
“나 오늘 피곤한데. 손님 엄청 많았어.”
“응. 안 할게.”
“그럼 만지지를 마.”
“그냥 손잡는 것도 싫어?”
“만지면 하고 싶어지잖아.”
김찬이의 입가가 꿈틀댔다.
“나는 현오가 그런 말 하면 하고 싶어져.”
“뭐. 어떤 말.”
“나 때문에 흥분한다는 말.”
김찬이가 제법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침을 삼켰다.
“야. 너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당연히 누가 만지면 흥분하지.”
“누구라도 다?”
“어.”
김찬이는 별다른 대답 없이 눈웃음만 지었다. 나는 거짓말했을 때처럼 가슴이 따끔했다. 김찬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이 정도로 섹스에 미치지 않았을 것 같다. 이제 김찬이의 손짓 하나에도 흥분한다. 김찬이라서, 김찬이었기에, 별거 아닌 거에도 열이 오른다는 걸 내심 알고 있지만 인정하기는 싫었다.
내 얼굴을 끈덕지게 훑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소파에서 황급히 일어섰다.
“먼저 씻는다.”
“응.”
김찬이는 날 더 붙잡지 않았다. 그저 웃는 얼굴로 올려다볼 뿐. 김찬이와 눈이 마주치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먹먹하다고 해야 할까. 요즘 들어 가끔 이럴 때가 있다. 김찬이의 미소가 달라진 것 같다. 정확히 어디가 그러느냐 하면 딱 집을 수는 없지만. 웃는데도 우울해 보인다. 내 기분 탓일까.
샤워하는 내내 신경이 쓰였다. 혹시 내가 김찬이에게 뭔가 잘못한 걸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말실수를 했다거나. 찬찬히 요 몇 주간을 되짚어 보아도 딱히 집히는 게 없었다. 샤워기를 들고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현오야.”
똑똑. 김찬이가 노크했다. 시간이 꽤 흐른 모양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괜찮아?”
“어.”
“너무 오래 있길래.”
“지금 나가.”
나는 수건으로 몸에 묻은 물기를 재빨리 닦아 냈다. 어느새 몸에 한기가 돌았다. 욕실 문을 열자 바로 앞에 김찬이가 서 있었다. 몸이 부딪힐 뻔했다. 김찬이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와?”
네 기분을 짐작하느라 그랬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내가 침묵을 지키자 김찬이가 한 마디 덧붙였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멀쩡해. 자러 들어간다.”
“…응. 잘 자.”
김찬이가 다정하게 말하더니 갑자기 내 뺨을 손으로 매만졌다. 키스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긴장했으나 김찬이는 그저 내 얼굴에 남아 있는 물기를 닦아 주려던 것뿐이었다. 상냥한 손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피부를 떠나갔다. 당황한 게 들킬까 싶어 황급히 김찬이를 스쳐 지나갔다. 방 안에 들어가 이불 위에 드러누웠다.
“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가슴이 아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심호흡하며 심장 박동을 늦추려고 노력했다. 김찬이의 웃는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보일 때마다 나는 예민해진다. 이런 내가 나도 낯설다. 요 몇 년간 타인의 감정은 신경 쓰지 않으며 살아왔는데.
애초에 주변에 친한 사람도 없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진득하게 나누는 것, 서로의 기분을 살피는 것, 그렇게 시간이 쌓이고 그 사람과만 공유하고 있는 추억이 생기는 것. 모두 나에게는 버겁다.
버거운데도 나는 이 집을 나가지 못하고 있다. 김찬이가 싫지 않아서 곤란했다. 내가 지금의 다정함과 편안함을 뿌리치고 혼자로 돌아갈 만큼 강하지 못한 사람이라 화가 난다. 알게 모르게 외로웠었나. 이러다가 어느샌가 김찬이를 좋아하게 될까 봐 두렵다.
사랑이 싫어서가 아니다. 사실은, 사랑이 좋다는 걸 알고 있다. 과거에는 모든 것을 쉽게 사랑했고 그만큼 쉽게 사랑을 받곤 했다. 깊은 애정이 사람을 얼마나 풍족하게 해 줄 수 있는지 이미 느껴 보았다. 그래서 지금은 더더욱 안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와 사랑을 하여, 그 사람과 서로를 소유하고,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나고. 이런 행복을 누릴 자격이 나에게는 없다. 아직 행복해서는 안 된다. 언제쯤에야 행복이 편안해질까. 이제는 불행에 파묻혀 지내는 게 나의 의무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고모부의 말처럼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나를 망치는 중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누군가의 인생을 짓밟고서 삶을 얻었다. 그 대가는 치러야 하지 않을까.
불을 끄고 누웠지만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오늘따라 생각이 많다. 며칠째 김찬이가 평소와 미묘하게 다른 탓이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밖으로 나가니 사방이 캄캄했다. 김찬이는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나는 거실 소파 한가운데에 앉았다. 몇 분 지나자 어둠에 적응된 눈에 책이 들어왔다. 오늘 김찬이가 사 온 것이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그중 한 권을 집어 방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제대로 읽지도 못할 텐데 왜 가져왔지. 잠시 후회하다가 책을 열었다. 뭐, 글씨를 바라보고 있으면 졸음이 올지도 모르니까.
눈을 가늘게 뜨고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예상외로 한 페이지를 순식간에 다 보았다. 이상한 일이다. 늘 몇 줄 읽다가 속이 메스꺼워 덮고는 했는데.
그 후로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손은 끊임없이 다음 장을 넘겼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완결까지 단번에 읽어 버렸다. 얼마나 집중했으면 눈이 시큰거릴 지경이었다. 눈을 몇 번 깜빡여 보았다. 다 읽고서도 어리둥절했다. 왜 아무렇지 않을까.
사실 이 책은 내가 제일 버거워할 만한 이야기였다. 어쨌든 살아가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어떻게든 사랑도 하는 사람들. 몸을 뒤척여 옆으로 눕고서 작가의 말을 읽어 보았다.
언젠가 인류가 멸망하고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이 한줌 재로 돌아갈 그날에도 사람들은, 당신은, 우리는 사랑을 할 것이다. 아주 많은 이들이 남긴 사랑의 말은 고요해진 지구를 유령처럼 바람처럼 떠돌 것이다. 사랑은 남는다. 사라지고 사라져도 여기 있을 우주처럼.
해가 지는 곳으로, 최진영, 192쪽
사랑. 속으로 읊어 본다. 가슴이 철근처럼 무거워졌다.
바로 옆방에서 자고 있을 김찬이를 떠올린다. 사랑. 너는 날 사랑하지. 결국엔 나도 널 사랑하게 될까. 모든 게 무너져도 사랑은 남는다면, 사랑이 그토록 위대하고 힘 있는 것이라면, 나 같은 사람은 해선 안 되는 게 아닐까. 내가 너를 사랑해도 괜찮을까. 너에게 사랑에 빠지지 않고 내내 이대로 버틸 수 있을까.
솔직히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김찬이를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
가게 오픈 시간 전이었다. 바닥을 닦고 있던 내 곁으로 사장님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지금도 찬이 집에서 지내지?”
“네. 어쩌다 보니.”
“잘됐다. 원래 너 살던 집 계약 기간도 거의 끝나간다며.”
“다음 달에 끝나요.”
“그럼 계속 찬이랑 동거하는 거니?”
사장님의 물음에 잠시 말을 잃었다.
“…잘 모르겠어요.”
“아직도 잘 모르면 어떡해. 이사 갈 거면 슬슬 준비해야지.”
“그러게요.”
나도 대책 없는 스스로가 답답했다. 언제부턴가 회피하는 인간이 되었다.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어떠한 선택도 할 필요 없게끔.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마음이든 김찬이의 마음이든 그중 하나는 변할 것 같아 무서웠다.
“찬이만 괜찮다고 하면 계속 같이 살았으면 좋겠네.”
“왜요?”
“둘이 있는 게 좋아 보여서.”
사장님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우리 관계를 알고서 하시는 소리는 아니겠지만. 사장님이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주방 쪽으로 들어갔다. 나는 느리게 걸레질하며 침착하려 노력했다. 그때 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죄송합니다. 아직 오픈하기 전인데요.”
“현오야.”
익숙한 목소리가 내게 대답했다. 온몸의 장기가 쿵 발바닥 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내 기억 속의 모습보다 조금 더 마르고 늙어 버린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고모부.”
고모부가 가게 안을 두리번거렸다.
“여기서 일하는구나.”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나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뒷걸음질 쳤다.
“들었다.”
“누구한테요?”
“네 친구한테.”
“제 친구라니…. 도대체 누구….”
현재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김찬이밖에 없는데. 김찬이가 고모부의 연락처를 알 것 같지는 않다. 설령 알았더라도 김찬이가 나 모르게 뭔가를 꾸몄을 리는 없다. 그냥 그런 확신이 들었다.
“우선 이야기 좀 하자. 지금 밖에 고모도 기다리고 있어.”
“고모요?”
고모라는 말을 듣자마자 몸에 핏기가 싹 가셨다. 아빠를 닮아 우울하던 고모의 인상이 떠올랐다. 갑자기 몸에 오한이 들었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아, 저 못 가요. 안 가요.”
“현오야. 이러지 마라. 고모가 너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지금 여기서 너 혼자 뭐 하고 있는 거야.”
“돌아가 주세요. 저 알바 해야 해요.”
“김현오!”
밖이 소란스럽자 주방에 있던 사장님이 나왔다.
“무슨 일이시죠?”
“여기 사장이십니까?”
“네. 그런데요.”
“저 현오 고모부 되는 사람입니다.”
사장님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곳으로 이사 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일 년이 되었으나 사장님에게 가족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맨 처음 물어보셨을 때 애매하게 반응을 한 후로는 사장님도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고모부가 사장님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나는 기겁하며 그를 붙잡았지만 고모부가 바로 나를 쳐 냈다. 어른 둘이서 대화를 잠시 나누었다. 나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을 꾹 감았다. 드문드문 들리는 말소리가 참담했다. 우리 현오가, 열아홉 때, 사고로… 예, 그래서 잠시 데려가려고, 예…. 그대로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고모부가 이야기를 마치고서 다시 내 근처로 왔다.
“가자. 사장님이랑 얘기됐어. 허락받았다.”
“무슨 허락이요?”
“당분간 너 못 나올 테니 그리 아시라고.”
“왜 제 의견은 듣지도 않으시고….”
고모부가 내 말을 끊으며 한숨을 크게 쉬었다.
“현오야. 너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니. 이제 열아홉 살 아니잖아.”
“네. 그러니까 제 앞가림은 제가 하겠다는 겁니다.”
“너는 그러고 살면 마음이 편하니? 네 고모는? 너 어떻게 사는지 알고서 여기 오는 내내 울더라. 우선 나가서 고모랑 말은 나눠야지.”
나는 고개를 힐끔 돌려 문밖을 바라보았다. 차 한 대가 가게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검은색 벤츠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고모부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내 어깨를 붙잡아 이끌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모부를 따라갔다. 사장님이 나를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고모부가 벤츠 앞에서 나에게 턱짓했다. 차에 타라는 뜻이었다. 나는 멈칫하다가 바지 주머니에 꽂혀 있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뜬금없게도 김찬이가 생각났다. 김찬이는 나와는 표면적으로 아무런 사이도 아니며, 나와 내 가족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전혀 모르는데도.
나는 김찬이의 학교 쪽을 잠시 바라보다가 허리를 움츠리며 뒷좌석에 올라탔다. 문을 열자마자 커다란 울음소리가 나를 덮쳤다.
“현오야…!”
그새 많이 늙은 고모가 나를 다짜고짜 끌어안았다. 고모의 몸은 애처로울 정도로 말랐다. 나는 숨이 막혔다. 깊은 물속으로 점점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고모가 내 등을 연신 쓸어내렸다. 차는 갑자기 출발했다. 나는 깜짝 놀라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고모부.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우리 집으로. 우선 거기 가서 더 얘기하자꾸나.”
내려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고모의 오열이 내 입술을 붙여 놓았다. 나는 고모를 마주 안지도 밀쳐 내지도 못한 채 멍하니 있었다. 고모는 내 티셔츠의 어깨 부분이 흠뻑 젖을 때까지 울었다. 마치 나에게 주문을 걸듯이 중얼거리며.
“현오야. 네 잘못이 아니야. 응? 네 탓이 아니라니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대답했다. 네, 고모. 하지만 이 세상에는 내 잘못이 아니더라도 내가 떠안아야만 하는 고통도 있더라고요. 고모는 모르실 거예요. 그날, 그 장소에 없으셨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