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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에필로그 (13/13)

12. 에필로그

고깃집 사장 황윤미는 요즘 걱정거리가 늘었다. 초등학생 딸이 남들보다 조숙하다 싶었지만 벌써 사춘기가 올 줄이야. 게다가 성실한 아르바이트생 하나가 근무 시간을 절반으로 줄이겠단다. 한 명 더 뽑아야 할 텐데 그만한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

윤미는 양해를 구하는 현오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당분간 공부에 집중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 알겠어. 어쩔 수 없지.”

“감사합니다.”

“시험이 언제랬지?”

“4월이요.”

윤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오가 윤미네 가게에서 일한 지도 이 년이 다 되어 간다. 현오만큼 오랫동안 버틴 사람은 없었다. 이제 아르바이트생이 아니라 한 가족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윤미는 기분이 묘해졌다. 아쉬우면서도, 현오가 무언가에 새롭게 도전한다니 기특했다. 현오는 스물다섯이 되던 연초부터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한 달밖에 안 남았네. 공부는 잘 돼가?”

“그냥, 나름….”

“찬이가 좀 도와주나?”

“가끔이요. 요즘엔 걔도 바빠요. 4학년이라.”

“참, 개강했지.”

“뭐 또 대학원 준비 같은 걸 해야 한다는데. 저도 잘은 몰라요.”

윤미는 현오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지는 걸 눈치챘다.

“그래? 많이 바쁘대?”

“뭐….”

“현오 혼자 심심하겠네.”

“아, 아니요. 제가 뭐 애도 아니고…. 아, 저 이만 바닥 청소하러 갈게요.”

현오가 윤미의 시선을 피하며 허둥지둥 움직였다. 현오의 뒷목이 붉었다. 윤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반찬 통을 부엌으로 들고 갔다. 현오 쟤도 참 거짓말을 못 한단 말이야. 처음에 둘이 같이 지낸다고 할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같이 살 줄은 몰랐는데.

현오는 반지하 월세 계약이 끝나고 나서 새집을 구하지 않았다. 대신 얼마 없던 짐을 모두 찬이의 집으로 옮겼다.

윤미는 현오가 처음 가게에 찾아왔을 때를 떠올려 본다. 아르바이트 모집 광고를 보고 왔다며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지. 인상이 서늘하고 어두웠다. 채용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현오는 윤미의 망설임을 눈치채고서 허리를 구십 도로 숙이며 말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 매일 나올 수 있어요.’

목소리 끝이 떨리고 있었다. 윤미는 그 절박함을 내버려 두지 못했다. 내일부터 나오라고 하자, 현오가 지었던 희미한 미소가 아직 선명하게 기억난다. 제대로 웃어 본 지 몇 년은 된 사람처럼 어색한 얼굴이었다.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으나 도대체 무엇이 이 아이에게서 웃음을 빼앗았을까 의아했다. 스물셋밖에 안 되었을 땐데.

현오의 고모부에게 간략한 사정을 전해 듣고서야 이해했다. 그녀도 누군가를 잃어본 사람으로서 도저히 견디지 못할 만큼 커다란 상실이 있다는 걸 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떠한가. 현오는 많이 달라졌다. 제법 잘 웃는다. 윤미는 그게 찬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둘이 완전히 동거하기로 했을 때 윤미는 진심으로 기뻤다. 같이 살아도 좋을 만큼 편한 친구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니까. 게다가 상실까지 메꿔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거의 기적 아닐까.

윤미가 부엌 정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현오도 마감 청소를 끝내고 외투를 입는 중이었다.

“수고했어. 조심해서 가.”

“네.”

현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윤미가 미소 지은 채 현오에게 손을 흔들었다. 집 쪽으로 사라지는 현오의 등을 한참 바라보다가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새벽 공기는 아직도 겨울처럼 차가웠다. 윤미가 어깨를 움츠리며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고 손바닥을 비볐다. 손이 어느 정도 따뜻해졌을 때 핸들을 붙잡았다.

윤미도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눈이 뻑뻑하고 피로했다.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집에 가서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우선 할머니와 함께 자고 있을 아이의 얼굴을 한 번 쓰다듬어 주자. 그다음 남편이 생전에 좋아했던 떡갈비를 만들어 놓고 잘 생각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셋이서 떡갈비를 먹고 집에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납골당에 갈 것이다.

윤미가 곁눈질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두 시 십 분. 열두 시가 넘은 지 한참 되었다. 벌써 오늘이 그의 기일이다. 오 년 전만 해도 이맘때마다 울며 보냈다. 이제는 그리울 뿐 눈물에 잠기지는 않는다. 딸이 많이 컸다. 무슨 대화를 해도 엄마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딸이 자라나며 텅 비어 있던 자리가 차차 메꿔졌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도, 다시 일으키는 것도, 결국 사람이었다.

윤미는 현오가 찬이와 오래 함께하기를 바라며 액셀을 꾹 밟았다.

***

현오가 두 시간 만에 기지개를 켰다.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났다. 보던 인강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등학교 때도 안 하던 공부를 스물다섯 먹어 다시 하려니 만만치 않았다.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거실에 나왔다. 집 안이 조용했다. 그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현오는 자책 중이었다. 분명히 알람을 맞춰 놓았는데 왜 일어나지 못했을까. 아침에 김찬이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김찬이한테 깨우라고 할 걸 그랬나.

그때 찬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현오가 늘어져 있다가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어.”

- 현오야….

찬이의 목소리는 우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왜 그래?”

- 나 오늘 완전 늦을 것 같아. 미안해.

“알겠어.”

현오는 담담하게 대답했으나 입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 내일모레가 팀 실험 발표 날인데 문제가 조금 생겨서….

“몇 시에 오는데?”

- 잘 모르겠어. 아침에 들어갈 것 같기도 하고.

“잠도 못 자겠네. 피곤해서 어떡하냐.”

- 괜찮아. 중간에 쪽잠 자면 돼.

“뭐, 너 체력 좋은 거야 알지만….”

- 응. 참, 현오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고 있어.

“어.”

전화를 끊고 나서 현오는 소파에 다시 누웠다.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오늘 밤에도 김찬이가 없다니, 쓸쓸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흐느적거리며 부엌으로 걸어갔다. 그제야 냉장고에 자잘하게 붙어 있는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찬이가 아침에 붙여 놓고 간 메모였다.

현오야. 냉장고 두 번째 칸에 된장찌개! 냉동고에 불고기! 샐러드 그릇은 랩핑해 놨어. 맛있게 먹어~ 이따 보자^^

-찬이가-

현오는 포스트잇 구석에 소심하게 박혀 있는 하트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따 보자면서 못 보겠네. 그리고 이왕 하트 그릴 거 크게나 그리든가. 그는 피식 웃었다. 손끝으로 찬이의 단정한 글씨를 몇 번 문지르다가 조심스레 포스트잇을 떼어 주머니에 쏙 넣었다.

현오는 찬이가 알려 준 대로 음식을 꺼내 조리하여 상을 차렸다. 찬이가 만든 음식은 현오의 입맛에 늘 잘 맞았다. 음식만 그럴까. 김찬이라는 사람 전부가 그렇다. 몇 개월 동안 같이 살았으면서도 현오는 새삼 찬이가 신기했다. 운명의 짝이라서가 아니라, 찬이가 세심하게 노력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현오는 많이 변했다. 다시금 샐러드의 맛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애정을 주고받는 게 즐거워졌다. 이전에 망설이던 게 무색할 정도로 찬이로 가득 찬 일상은 평화로웠다. 새로운 것이 더는 크게 두렵지 않았다. 공부를 다시 시작한 것도 그래서였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취득하면 그 후에 무엇이 되리라 명확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을 가거나 취직을 하거나.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현오는 막연히 이야기를 다루는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다. 무엇이든 간에 변화는 일어날 것이다. 찬이의 손을 잡고 이 집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매일은 새로운 내일이다.

현오는 뚝 끊어진 과거를 애써 무시해왔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걸 이어보려 한다. 과거를 죽이던 작업은 그만두었다. 대신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가 호흡이 가빠지고 손끝이 떨리면 현오는 찬이를 찾았다. 언제나 찬이는 숱한 불안과 고통을 순식간에 무찔러준다.

현오가 밥을 다 먹고서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찬이의 생각을 한다. 지금쯤 수업 듣고 있겠지. 현오가 엄지를 까딱거리다가 찬이에게 카톡을 했다.

1

밥 먹었음

망설이다가 하나를 더 보냈다.

1

고마워

현오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보고 싶다고 덧붙이려다가 실패했다. 아직도 솔직하게 말 한마디 전하는 게 어려운 자신이 부끄럽다. 네가 없으면 심심하다고, 오늘 얼굴을 한 번도 못 봐서 외롭다고, 그립다고, 속에 쌓인 말은 그득한데.

현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설거지를 했다. 몇 년간 든 습관이 쉽게 바뀌지는 않았다. 여전히 진심을 내비치는 게 망설여질 때가 있다. 생각해 보니 김찬이에게 영진이 얘기를 했던가. 현오가 기억을 되짚어 보다가 멈칫했다. 그대로 몸이 굳은 채 흐르는 물만 가만히 바라보았다.

“말 안 했었구나….”

현오가 딱히 숨긴 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말할 타이밍을 놓쳤던 것뿐이다. 현오는 찬이의 맑고 흰 얼굴을 속으로 떠올려보았다. 그를 바라보며 과거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는 자신도 상상해 본다. 놀랍게도 머뭇거림이 전혀 없다. 그토록 무서웠던 과거를 마주하는 순간인데 고통스러울 것 같지가 않다.

현오가 싱크대 수도꼭지를 잠그고 잠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곧 한숨이면서도 헛웃음 같은 것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가슴팍이 뻐근해졌다. 새삼 또 신기했다. 모든 걸 괜찮게 만드는 김찬이가, 그를 이토록 사랑스럽게 여기는 자신이. 그리고 우리를 만나게 한 기적 같은 순간들이.

***

찬이가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과 건물에서 나왔다. 동트기 직전 새벽하늘은 희미하게 밝았다. 아침 다섯 시다. 정문 쪽으로 걸어가는 찬이의 발걸음이 급했다. 얼른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공강 때 잠깐씩 잠을 자두었기에 몸이 피곤한 건 아니었다. 하루 동안 현오를 못 본 게 제일 문제였다. 정신적으로 피로하다.

중간에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사실 저번 학기 학점이 아주 엉망이었다. 갓 시작한 연애에 완전히 혼이 빠져 버린 탓이었다. 찬이의 머릿속에는 온통 현오밖에 없었다. 이제 대학원 진학을 위해서 학점 관리를 해야만 했다.

찬이가 평소보다 두 배는 빠르게 집에 도착했다. 찬이의 표정이 시무룩했다. 현오는 요즘 아르바이트를 줄이고 공부한다며 일찍 자는 중이었다. 당연히 지금도 자고 있겠지. 찬이가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나 집에 들어서자마자 눈앞에 현오가 보였다.

“…현오야.”

찬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왔냐.”

“왜 깨어 있어?”

찬이가 허겁지겁 신발을 벗어 던지고 현오에게로 다가갔다.

“뭐, 그냥. 잠이 안 와서.”

그러나 현오의 얼굴에는 졸음이 묻어 있었다. 목소리도 잠긴 채였다. 찬이가 현오의 팔을 덥석 붙잡고 그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정말로?”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에 찬이의 뺨이 새빨개졌다. 고스란히 느껴지는 현오의 체온이 얼마나 반가운지 쌓여 있던 스트레스가 한 번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현오는 찬이의 어깨에 슬며시 고개를 기대고는 웅얼거렸다.

“공부도 할 겸….”

“공부하고 있었어?”

찬이가 손으로 현오의 등을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어, 아니. 사실은….”

“응?”

“그러니까.”

“응.”

“너… 기다렸는데.”

현오가 힘겹게 말을 내뱉고서 찬이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찬이는 잠시 숨을 참았다.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혹시나 하던 기대가 현실이 된 순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현오가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을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현오의 귓가와 턱을 더듬었다.

현오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찬이는 한참 동안 가만히 현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현오의 마음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게 느껴질 때면 찬이는 몇 년 전 어느 사거리를 상상해본다. 그가 가본 적 없는 곳이다. 그곳에서 살아남고 그 후로도 계속 살아와 준 현오의 시간을 짐작해본다. 모든 게 기적이다.

무수한 행운이 얽히고 얽혀 지금을 만들었다. 10개 반 중에 하필이면 3반. 현오와 출석 번호가 붙을 수 있게끔 짜인 자음과 모음. 갑자기 지방으로 이전된 학과. 빠지려다가 친구가 떼써서 참석하게 된 술모임. 그렇게 우연히 들어간, 그 고깃집. 마법처럼 그곳에 존재하던 현오.

“현오야….”

찬이가 절박하게 현오를 부른다. 현오가 없으면 곧바로 죽어 버릴 사람같이.

“왜.”

현오의 귀 끝이 붉었다.

“나 보고 싶었어?”

찬이가 고개를 숙여 현오와 반쯤 입술을 맞댄 채 소곤거렸다.

“응?”

“…….”

“나 좋아해?”

찬이의 눈동자가 집요하게 현오를 훑었다. 점점 달아오르는 현오의 피부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현오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아, 알잖아.”

찬이는 혀로 현오의 아랫입술을 간질이기만 했다. 더 제대로 된 대답을 재촉하듯이. 기다란 손가락은 현오의 등허리를 톡톡 건드렸다.

“현오야.”

“…그만 불러.”

“나 좋아해?”

“…….”

“아니야?”

현오가 마른침을 삼켰다. 찬이만큼 얼굴이 새빨개진 채 눈썹을 움찔거렸다. 한참을 쩔쩔매더니 손끝에 힘을 주어 찬이의 옷자락을 붙든다. 꾸욱, 현오가 도장을 찍듯이 찬이에게 키스하고는 말했다.

“…맞아. 좋아해.”

찬이가 크게 숨을 내쉬며 현오를 세게 끌어안았다. 현오는 숨이 막혔지만 밀쳐 내지 않았다. 둘은 아무 말도 없이 몇 분을 가만히 안고만 있었다.

창밖에는 마침내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집 안이 서서히 환해졌다. 현오는 힐끔 시선을 위로 올렸다. 찬이의 흰 피부에 점점이 떠오른 붉은 기가 더 잘 보였다. 찬이가 현오를 마주 보며 생긋 웃었다. 현오는 그 순한 미소를 좋아했다.

“현오야. 고마워.”

“뭐가?”

“좋아해 줘서.”

현오가 머쓱해져서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고마워해야 하는 건 나 아닌가. 찬이 때문에 과거를 지우며 살아온 반쪽자리 인생에 변화가 생겼다. 삶의 이유를 그에게서 찾곤 한다. 하지만 직접 말로 표현한 적은 없다. 너무나도 무거운 감정인 것만 같아서. 속마음을 다 드러내도 부담이 되지 않을 때가 온다면 조심스레 말해볼 생각이다.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었을까?

현오는 찬이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돌려주려 한다. 그때까지 헤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찬이의 옆자리가 욕심날수록 점점 그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뭘 하면 기뻐할지, 어떻게 해야 변치않고 내내 사랑해 줄 것인지. 좋은 것만 그에게 주고 싶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랬다. 애정을 조금이라도 더 퍼 주려 안절부절못하는 것.

현오는 지난여름 찬이가 자신에게 퍼 주었던 애정 섞인 호의를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조금 더 사랑에 빠졌다.

“김찬이.”

“응.”

둘은 여전히 서로의 몸을 바짝 끌어안은 채였다.

“너 배 안 고파?”

“아, 현오 배고프구나. 뭐 해 줄까?”

찬이가 당장에라도 부엌에 갈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응?”

“…어, 너 오면 먹으라고 뭐, 좀 만들어 놨는데. 배 안 고프면, 음, 안 먹어도 되고.”

현오가 말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찬이의 눈동자가 갈수록 더 커지고 동그래졌다.

“정말?”

찬이가 다짜고짜 현오의 손목을 붙잡고 부엌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현오는 불안한 눈으로 찬이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벼, 별로 맛은 없을 건데….”

“맛없을 리가.”

찬이가 식탁 위에 가지런하게 놓인 샌드위치와 수프를 발견하고는 현오의 양 뺨을 와락 붙잡았다. 그러고는 콧잔등과 입술에 쉴 새 없이 쪽쪽 키스했다.

“야, 야. 그만 좀….”

“와아. 진짜 나 감동했어.”

찬이가 활짝 웃었다. 물기 서린 눈이 반짝거렸다. 현오는 멍하니 찬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찬이 주변에만 새하얀 빛 가루가 동동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찬이가 이렇게 기뻐할 줄 몰랐다. 뿌듯했다. 순간 매우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기분에 자신감도 차올랐다. 현오의 발가락이 꿈질거렸다.

“새벽에 이거 만들고 있었어?”

“어. 근데 얼마 안 걸렸어.”

거짓말이었다. 현오는 요리에 서툴렀다. 요리법을 보면서 한참을 낑낑대다가 겨우 완성했다.

“고마워. 맛있게 먹을게.”

“네가 해 주는 음식에 비하면 별거 아닌데….”

“그럴 리가.”

둘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찬이가 팔을 쭉 뻗어 현오의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얼른 먹어.”

“응. 근데 아까워서 못 먹겠어. 나 사진 좀 찍고.”

“야. 아, 뭔 사진이야. 부끄럽게.”

“잠깐만 기다려 봐.”

찬이가 핸드폰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는 동안 현오는 두 눈을 꾹 감고 있었다. 별거 아닌 거에 열렬히 반응해 주니 민망했다.

“다 찍었어?”

“응. 이제 먹자.”

현오는 찬이의 눈치를 살피며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주 못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썩 맛있지도 않았다. 차라리 편의점에서 사 올 걸 그랬나, 후회하고 있던 도중에 찬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와. 진짜 맛있어.”

“거짓말하네.”

“진짠데?”

“싱겁잖아. 소스 좀 더 넣을걸.”

“내 입맛엔 딱 맞아.”

새하얗게 웃는 찬이를 바라보며 현오가 슬쩍 안심했다. 맛이 어땠든 찬이가 기뻐하는 듯 보이니 되었다. 찬이가 현오의 손을 끌어당겨 제 뺨에 문질렀다.

“고마워. 감동해서 눈물 날 것 같아.”

“야, 무슨 눈물까지야. 별것도 아닌데.”

“아냐. 특별하지. 현오가 나 기다리면서 만들어 준 거잖아.”

“…앞으로 자주 해 줄게. 찔린다. 넌 맨날 해 주는데.”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야. 그냥, 현오도 날 좋아하는 게 좋아서.”

“누가 들으면 오늘부터 사귀기로 한 줄 알겠네.”

현오가 부끄러워서 툴툴대자 찬이가 미소 지었다. 뜨거운 현오의 손바닥 정중앙을 꾹 입술로 찍어 눌렀다.

“익숙해지지 않을 거 같아. 매일 벅찰 거 같아.”

“내가 널 좋아하는 게?”

“응.”

“이제 좀 익숙해져.”

“그러기엔 현오는 나한테 너무 대단한데.”

현오가 잠시 고개를 푹 숙였다. 눈가가 시큰거렸다. 찬이의 눈동자는 순수하면서도 진지했다. 연인 사이에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란 걸 안다. 그래서 벅차고 울컥하고 몹시도 행복해진다. 자신도 이른 아침 연인과 식탁에 마주앉아 이러한 행복을 누려도 될 사람일 거라고, 믿게 된다.

현오가 눈을 한 번 꽉 감았다가 뜨고는 고개를 들었다.

“김찬이.”

찬이가 다정하게 대답했다.

“응. 왜?”

“그… 갑자기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나서.”

“뭔데?”

찬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예 현오의 옆에 와 섰다.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란 걸 벌써 눈치채고서.

둘은 마주잡은 손을 깍지 꼈다. 현오가 찬이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한참 후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영진이라는 애가 있는데….”

현오가 자신의 가장 여린 속살을 내비친다. 김찬이에게라면 그래도 괜찮으리라는 확신을 하며.

<우리는 서로를 짐작할 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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