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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모두가 잠든 시간에 혼자 일어났다. 9시에 음악 방송 녹화가 있어서 목을 풀 겸, 며칠 전 팬사인회에서 받은 음식을 정리할 겸 일찍 일어난 것이다.
가방 안에 음식들을 주워 담고 나갈 준비하는데 끼익 문소리가 들렸다. 제이다.
“또 몰래 뭐 하냐?”
방금 깬 것 같지도 않은 말끔한 모습이다. 저 새끼는 그냥 스물네 시간 잘생겼다.
“아, 목 좀 풀려고. 넌 왜 일어났냐?”
“이 시간에?”
“나 원래 활동 때는 일찍 일어나. 넌 왜 깼냐니까?”
“..가방엔 뭐가 그렇게 들었어.”
“먹을 거. 그럼 간다. 잠이나 자라.”
“연습실?”
“응.”
“나도 가.”
이 자식 요즘 들어 왜 이러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어쩔 수 없이 제이랑 갈 생각도 없었던 연습실에 동행했다.
건물 2층에 있는 연습실의 비번을 누르고 불을 켰다. 텅 빈 연습실 문을 여는데 좋은 생각이 났다.
“아, 나 녹음실 갈게. 목 풀 거라서.”
“여기서 풀지?”
“거기가 방음이 되니까.”
“같이 가.”
제이가 주섬주섬 벗었던 외투를 입었다.
“그냥 여기 있자.”
“...그래.”
두 시간이나 둘만 오붓하게 연습하니 이건 이거대로 설레긴 설렌다. 하지만 별개로 목을 너무 많이 풀어서 더 이상 풀 건덕지도 없다.
무엇보다 가방 안에서 썩어가고 있는 음식물쓰레기들을 버려야 되는데 제새끼가 연습실 중간에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 무슨 핑계로 가방을 들고 나가야 될지 모르겠다.
“우리 6시 기상인가?”
“어.”
“멤버들 깨워야하지 않아?”
“네가 깨워.”
제새끼가 시크하게 대답하고는 하던 검무 연습을 마저 한다. 연습하는 거 보고 있으면 진짜 괜히 모셔너계 탈아이돌급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동작 하나 하나에 오러가 실려 있어서 옛날 무협 영화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제새끼주제에 멋있기는 오질나게 멋있다.
“그래, 그럼 내가 멤버들 깨우고 온다.”
“가방은 왜들고 가냐.”
“.......”
저 새끼는 귀에도 눈이 달렸나.. 들고 있던 백팩을 내려놨다. 에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릴 다른 방법을 궁리하며 방으로 올라갔다.
이미 멤버들은 다 일어나서 씻고 양치까지 마친 상태였다. 제이도 연습실에 있다고 하니 다들 놀랐다.
“너야 부지런한 거 알았지만 그 새끼가 웬일이래?”
“몰라. 뭔 바람이 불었는지. 가자.”
각자 가방을 챙기는 걸 보고 있다가 연습실에 놔둔 백팩이 신경 쓰여서 먼저 내려왔다. 한새놈이 같이 가자고 욕설을 동반한 요청을 했지만 무시했다.
벌컥, 연습실 문을 열자 제새끼가 내 가방 지퍼를 열고 내용물을 살펴보고 있었다. 아니, 꺼내려고 했다. 순간 온 세상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급한 마음에 오러부터 뻗어나갔다.
“안 돼. 먹지 마!”
오러는 붉은색으로 빛나며 제이를 감쌌다.
헉, 헉.
다급히 달려가 제이의 손이 닿은 백팩을 갈무리하고 멀리 던져버렸다.
“너 뭐하는 짓이야. 왜 남의 가방을 훔쳐 봐?”
“..뭐 때문에 이렇게 화내는 거지?”
“남의 걸 만지니까 그렇지! 내가 선물 공유하는 거 싫다고 했잖아!”
내가 조금만 더 늦게 내려왔더라면 어땠을까.
망할 제이새끼가 손에 집힌 수제 빵 봉지를 뜯어서 한 입 먹은 후였다면.
뒷목이 서늘해졌다. 동시에 다리가 풀렸다.
정말 다행이다. 늦지 않게 발견해서 다행이야.
“야.. 너.. 우냐?”
“안 울어, 시발놈아.”
새벽 내내 목 푼 게 무색하게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서 나왔다. 제이는 내가 만든 오러를 가뿐히 풀어내고 멀찌감치 나뒹굴고 있는 백팩을 봤다가 다시 나를 봤다.
“나한테 먹을 거 나눠주는 거 그렇게 싫냐?”
“.......”
그런 게 아니다. 나는 저걸 먹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내가 좀 식탐이 있어. 그러니까 내 건 만지지 마. 저번에도 분명히 말했잖아.”
멤버들 다 모인 자리에서 선언하듯이 얘기했었다. 한새 놈은 대놓고 기분 나빠 했지만 다른 멤버들은 개인 성향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였다. 한새도 곧 얜 이런 놈이구나 하고 넘어갔다. 그래서 난 지금까지 음식 선물에 대한 공유를 막을 수 있었다.
특히 제이는 원래부터가 사적인 선을 철저히 지키는 놈이라서 설마 내 가방을 열어볼 줄 몰랐다.
아니.. 내가 잘못했다. 제이는 검무 연습으로 인해서 허기졌을 테고, 나는 백팩 안에 먹을 게 잔뜩 들어있다고 얘기했으니 제이로서는 열어보는 게 당연하다. 다 내가 방심한 탓이다.
제이가 내 앞에 앉아 나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상체를 숙였다.
“이라.”
“.......”
“알았어. 미안하다. 이제 손 안 댈게.”
너는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 너는 그냥 배가 고파서 친구 걸 조금 먹으려고 했던 것뿐이야.
“...어, 앞으로는 조심해.”
“.......”
“곧 멤버들 내려올 거야. 그럼 다 같이 아침 먹으러 가자. 요 앞에 24시간 해장국집 갈래? 오랜만에 내가 쏨.”
제이가 날 지긋이 바라봤다. 남색 눈이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모든 걸 꿰뚫어보는 듯한 깊은 시선을 빙그레 웃으며 마주했다. 제이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곧 멤버들이 들이닥쳤다. 눈새 한새는 왜 둘만 연습하냐고 왈왈거렸다. 워낙 표정 변화 없는 야단이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문 형은 제이와 나 사이의 무거운 공기를 알아챈 것 같았다.
내가 한새와 야단이를 데리고 해장국집으로 갈 때 제이와 문 형은 뒤에 거리를 벌리고 떨어져서 무슨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
내 얘기일까?
저렇게 식탐 많은 새끼 처음 봤다거나.
문득 아까 일을 떠올리는데 웃음이 나왔다.
자기 거 못 먹게 하려고 오러까지 펼치는 이런 병신 새끼가 어디있다는 말인가.
너무 웃겨서 웃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컴백 첫날부터 3주간의 스케줄이 벌써 꽉 들이찼다. 음방 녹화, 방송사 인터뷰, 라디오, 예능, 교양 프로그램.. 더블 라이브까지.
덕분에 컴백하고 벌써 나흘이 흘렀는데 아직도 팬사인회 독극물들을 처리하지 못했다. 계속 백팩에 담아 들고 다니기도 찝찝하고, 누군가 먹을까봐 전전긍긍하기도 지쳐서 결국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기로 했다.
“자, 녹화 시작합니다. 모두 자리해주세요!”
스태프가 소리쳤다. 옹기종기 모여 있던 우리도 문 형을 앞세우고 세트장으로 들어갔다. 난 올라가기 직전 조용히 매니저 용준이 형을 불렀다. 귀를 대보라고 시늉하자 형이 무릎을 굽혀줬다.
“우리 대기실에 있는 제 백팩, 팬싸에서 받은 음식들이에요.”
“...그래, 녹화 중일 때 몰래 버릴게.”
용준이 형은 그 일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다.
녹화가 시작 되자마자 용준이 형이 슬그머니 나가는 게 보였다. 형이 처리해주는 건 두 번째 있는 일이다. 자기 탓도 아닌데 나한테 미안해하는 게 보여서 웬만해서는 내가 다 처리 했었다.
「미안하다, 이라야.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로 하자」
“.......”
형이 그 말을 한 것 형의 탓이 아니다.
나는 이제 전부 이해하고 있다.
그 말을 하는 형의 얼굴은 30년은 더 늙은 것 같았고, 눈도 퉁퉁 부어 있었으나 그때 나는 그런 모습을 인지할 상황이 아니었다. 형에게 원망의 소리를 퍼부었었다.
그 후로 형과 내 사이에는 다시는 맞닿을 수 없는 깊은 골이 파여 있다. 형도 내게 미안해하고, 나도 형도 미안해한다. 그런데 사실 형은 나한테 미안해 할 필요는 없다. 이 얘기를 형에게 해주고 싶은데, 아직까지는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내가 철이 덜 들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엔돌핀이 컴백만 하면 늘 출연하는 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엔돌핀’이다. 우리 몸의 건강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교양 겸 예능인데, 아무래도 이름이 같다보니 감독님이나 작가님들도, 스태프도, 우리 쪽 스태프도 팬들도 서로 친밀하게 생각하고 있다.
오늘 소재는 오러학이었다. 이 과일은 소울 오러에 좋고, 이 채소는 모셔 오러에 좋고.. 어떤 게 궁합이 맞으며 어떤 게 악효과인지. 그런 것들을 배우는데 필연적으로 먹방을 해야 한다. 아까 대본 받고 먹방이 있다고 해서 기대됐다. 야무지게 먹어야지.
“오늘 게스트는 우리 프로와 이름이 같아서 애정하는 분들입니다. 삶의 필수 요소인 엔돌핀, 다섯 분들이 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엔돌핀입니다!!”
패널은 의사 셋이 끝이고, 방청객이 있는 것도 아니라 환호는 없었다.
“그리고 항상 자리해주시는 김이박 세 선생님과 더불어 오늘 특별히 초대한 분이 한 분 계시죠.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러어댑터 권수한 선생님이십니다~!!”
“와아아아!!!”
짝짝짝. 우리는 열렬하게 박수쳤다. 대본대로.
무대 뒤쪽에서 완벽한 슈트 차림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의사라기보다는 무슨 직장인.. 그것도 음지의 직장인 같은 포스였다. 굉장히 키도 크고 잘 생겼는데 좀 차가운 인상의 냉미남이다. 아무래도 얼굴이 익숙해 보이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니 어디선가 봤나 보다.